한여름의 판타지아
- 감독
- 장건재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김새벽, 이와세 료, 임형국, 강수안, 박현영, 이승헌
‘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어요? 물론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영화 < 최악의 하루 >( 김종관 , 2016) 속 은희( 한예리 )는 무명 배우이다. 늦여름의 오후, 연기 수업을 듣고 나온 은희는 일본에서 와 길을 헤매는 작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나 도와준다. 연인 현오( 권율 )의 재촉에 은희는 배우인 그의 촬영지 남산으로 향해 그를 만나지만 고운 말이 오가는 평범한 데이트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참 연애사를 헤집으며 서로를 탓하다가 달콤한 연인 행세를 좀 하려는가 싶은 찰나, 현오는 은희를 다른 여성의 이름으로 부르고 만다. 화가 난 은희는 현오를 뒤로하고 남산에서 내려가고, 거기에는 은희의 트윗을 보고 멋대로 찾아온 운철(이희준)이 은희를 기다리고 있다. 은희가 현오와 헤어졌을 때 만났던 운철은 은희에 대한 미련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도, 뻔뻔하게 전 부인과의 재결합을 알린다. 운철은 오랜만에 겨우 만난 은희를 보내주지 않으려 하지만 은희는 적당히 둘러대며 다시 현오를 만나러 남산에 오른다. 그러나 또다시 은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운철을 마주치고, 현오와 셋이서 마주치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은희는 가지 않으려는 운철을 사정하다시피 해서 돌려보낸다. 물론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고, 현오와 함께 있는 은희를 운철은 다시 한번 찾아온다. 결국 맞닥뜨리게 된 세 명, 서로가 은희의 연인이라 주장하는 현오와 운철 사이에서 은희는 그저 힘없이 길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그들이 떠난 뒤, 은희는 앞서 연기 수업에서 배운 대사를 체화해서 조용히 읊어본다. ‘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최악의 하루>라는 제목은 꽤 직관적이다. 한 앵글에 잡히는 은희, 현오, 운철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쉴 테다. 영화는 료헤이의 내레이션으로 막을 연다. ‘여행지에서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은희의 하루가 료헤이가 문득 생각해낸 허구의 이야기라면, 이는 그가 곤경에 빠진 여성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생각해낸 것처럼 보인다. 보통의 액자식 구성(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끼어들어 있는 구성)은 내부 이야기와 외부 이야기의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최악의 하루>는 외부 이야기의 화자처럼 보이는 료헤이의 내레이션과 그의 모습이 잠깐 등장한 후, 바로 은희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료헤이는 자연스럽게 은희의 하루에 녹아들어 오늘 하루 동안 은희가 만나게 된 세 명의 남자 중 그저 한 명으로 느껴지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분명 처음의 내레이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은희의 하루에 같이 발을 동동 구르게 될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은희의 시간을 하루로 제한하는데, 그뿐만 아니라 공간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은희가 처음 수업을 듣고, 료헤이를 만나는 배경은 서촌이다. 길을 잃어 한없이 걷는 둘의 뒤로 펼쳐지는 고즈넉한 풍경은, 늦여름의 서울을 관객이 하여금 대신 만끽하도록 한다. 은희와 료헤이가 작별을 고한 후, 배경은 남산으로 고정된다. 현오를 만나러, 운철을 피하려 은희는 푸릇푸릇한 남산을 걷고 또 걷는다. 최악으로 치닫는 하루와는 대비되는 아름답고 안정감마저 주는 배경은 은희의 하루를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덜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최악의 하루>는 거짓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이다. 현오는 실수로 부른 이름의 여성과 은희 몰래 교제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운철은 전 부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은희를 만난 이력이 있다. 그러나 은희는 이들 사이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순진한 얼굴을 하고 난처해하지만은 않는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에는 거짓으로 응수하기를 선택한다. 비록 그 치열한 고군분투의 결과로 그의 하루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지만 말이다. 은희와 료헤이가 처음 만나 서로의 직업을 물었을 때, 료헤이는 소설가인 그의 직업을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라고 소개한다. 은희는 배우인 자신도 같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이 둘은 서로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서툰 언어인 영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줄여서, 쉽게 말한다. 유창한 거짓이 덧붙을 여유는 없다. 소박한 대화 속에서 그들은 미소 짓는다. 료헤이의 팬이라는 한 잡지 기자는 인터뷰에서 ‘이야기가 자극적이고 주인공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잔인하다. 왜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주지 않느냐’고 묻는다. ‘글은 글일 뿐’이라고 답하는 료헤이에게 ‘저는 부끄러웠어요. 저 자신과 그 안의 인물이 점점 닮아가더니 벼랑으로 떨어지고 땅에 묻히더군요.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라고 말한 뒤 기자는 사라진다. 아니, 있었던 흔적이 아예 온데간데없다. 료헤이가 본인에게 묻는 말인 것이다. 그대로 은희에게 가 닿는 질문. 그는 혼자 앉아 골똘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본다. 이미 늦은 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은희의 앞에 료헤이가 다시 나타난다. 현오에게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냥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은희는 료헤이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악의 하루를 보냈음에도, 은희는 다시 만난 료헤이에게 묻는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상대의 안위는 안중에 없이, 각자의 욕망만을 이야기하던 현오와 운철과는 극명히 대비된다. 이제는 별다른 목적 없이, 한 번도 끝까지 가 본 적 없는 남산의 산책길을 료헤이와 은희는 함께 걸어본다. 기자의 입을 빌려 자신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료헤이는 드디어 내놓는다. 한 번도 소설의 주인공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 없는 그가, 언제나 위기에 빠뜨리고 방관자의 눈으로만 지켜봤던 그가, 처음으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에게, 료헤이는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한 이야기에 대해 말해준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료헤이가 은희에게 직접 해주는 이 말은, 누구나 항상 되뇔법한 ‘다 잘 될 거야.’와 꽤나 다른 의미를 갖는다. 액자식 구성을 명확히 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과 남이 해주는 말의 무게는 으레 다른 법이지만, 나와 다른 층위에 있는 존재의 이 말은 강력해서 최악의 하루 끝에서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준다. 당신의 하루를 감히 이해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려 하지 않고, 그저 내일의 안녕을 빌어주는 말. 이는 료헤이가 은희에게 하는 말이면서도, 감독이 힘든 하루를 보냈을지도 모르는 관객에게 전하는 심심한 위로의 말이 아닐까.
은희에겐 정말 최악의 하루다. “하느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가을 어느 날, 배우 지망생 은희( 한예리 )는 연기수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연기력 없다고 타박 들으며 시원찮게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가, 길을 헤매고 있는 일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어쩌다 료헤이에게 길 안내를 해준 후, 아침드라마에 출연 중인 남자친구 현오( 권율 )을 만나러 남산으로 향하는 은희.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현오와 비밀 데이트를 하면서 은희의 최악의 하루가 펼쳐진다. 엉겁결에 자기 이름 대신 다른 여자 이름을 외친 현오. 화가 난 은희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게 되지만, 곧이어 다른 복병이 등장한다. 한때 썸을 탔던 운철( 이희준 )이 은희가 올린 트윗을 보고 우연히 남산에 나타난 것이다. 처음 본 일본 소설가, 현재 만나는 남자, 그리고 과거에 만났던 세 남자가 동시에 주마등처럼 하루 만에 은희 앞에 나타나고, 은희는 복잡한 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허세 가득한 현재의 남자와 솔직하지 못한 과거의 남자가 은희를 둘러싸고 만들어놓는 엉망진창의 삼각관계는, 흡사 홍상수 월드의 남자 캐릭터들이 빚어놓는 풍경처럼 적잖이 남우세스럽다. 마침내 조우한 연적의 두 남자가 담판을 짓기 위해 연희를 내버려둔 채 소주를 마시러 가는 장면은 가히 영혼의 빤스줄을 내린 지질한 한국 남자 전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홀로 남은 은희가 홀로 벤치에 앉아 하느님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라고 넋두리를 할 만큼 최악의 하루다. 6년 만에 내놓은 김종관 감독의 신작,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담백해졌다. 절제된 이미지들은 유려하게 이야기들 속에 스며들어 있고, 빛의 조탁 또한 탁월하다. 카페 벽면과 찻잔 테이블 위에까지 나뭇가지 그림자와 햇빛을 드리워 영화 전반에 생기를 불어넣는 디테일한 솜씨가 출중하다 못해 부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어리숙한 세 청춘의 삼각관계를 묘사하는 데 그쳤다면 이 영화는 그저 이쁘장한 엽서들이 나열된 듯한 평이한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 최악의 하루 >의 매력은 두 개의 후반 신부터 발산되기 시작한다.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와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홀로 남겨진 은희의 독백. “왜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주지 않나요?”라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료헤이는 자신이 쓰는 글은 그저 글을 뿐이고, 자신들이 아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답변하다. 그러나 정작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라는 질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대신, 그다음에 이어지는 신에서 은희는 마치 대꾸하듯이 이렇게 대답한다.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현실 속 인물과 영화 속 등장인물의 두 개의 속내가 포개지면서 돌연, 영화 속으로 감독의 자의식이 서서히 틈입한다. < 최악의 하루 >는 연애담이기도 하지만, 사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감독의 내밀한 고백이라는 걸 토로하는 순간이다. 은희와 료헤이가 남산의 밤길을 걷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마치 마법을 부려놓은 듯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영화 밖의 감독이 나란히 산책을 한다. 가을 밤빛이 나른히 부서지고, 료헤이의 이야기 속에서 뜨덤뜨덤 눈발이 내린다. 그 사이 손등을 스치듯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진다. 시적인 순간이다. 사랑을 하는 일이든, 영화를 만드는 일이든 사실 같은 여정인지도 모른다. 감독은 은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전 커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 최악의 하루 >는 최악의 남자들을 만나 최악의 하루를 보낸 영화 속 은희의 각성의 이야기자, 료헤이로 은유 된 감독의 은밀한 각성의 고백이기도 하다. 왠지 이 고백이 설렌다. 김종관 감독은 다음에 더욱 반짝거리고 단단한 영화로 다가올 것만 같다.
< 최악의 하루 >의 시나리오 초고는 4일 만에 썼다. 최악의 여자로 몰리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 여자라는 콘셉트가 만들어지고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가 노트에 담기고 나서 아주 빠른 속도로 시나리오가 나왔다. 너무 빨리 써져서 나 스스로도 놀란 기억이 있다. 2014년 겨울에 썼고 그 후 몇 번의 손질을 하고 제작사와 투자사를 알아보고 2015년 이른 봄부터 캐스팅 진행을 하다가 여름으로 진입하는 사이 배우 캐스팅이 정리되면서 영화 제작이 가시권에 들었다. 8월부터 대략 한 달 넘게 프리 프러덕션이 진행됐고 9월 중순에 크랭크 인 해서 한 달의 기간 16회차라는 기간으로 프로덕션이 마무리되었다. 그 정도면 장편 영화로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0월 중순에 촬영이 끝나고 두어 달의 편집 기간을 마치고는 잠시 진행이 멈춘 게 위기였다. 영화의 후반 작업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1차 편집본으로 후반 투자와 배급을 알아봤다. 다행히 후반 투자와 배급을 얻었고 음악 믹싱 등의 후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후반 작업 기간은 초반의 속도와는 다르게 약간 더뎠지만 6개월 정도의 기간 안에 다 마무리 지었다. 시나리오를 기획하고 쓰고 영화를 찍고 마무리하는 데까지 일 년 반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그 또한 빠른 속도로 영화가 마무리된 셈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일사천리의 순항만으로 영화를 마무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작품의 개발 과정을 연출자가 겪어 온 다른 과정으로 정리하면 다시 아래와 같다. 옴니버스 형식의 장편영화 < 조금만 더 가까이 >를 어느 가을에 개봉하고 그 이듬해부터 다음 장편을 준비하기 시작해서 햇수로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5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하면, 나름 바쁜 시간들이었다. 생활을 위해 돈을 벌었고 처음 1~2년은 책 쓰는 재미에 미쳐 출간할 산문집을 집필했다. 그리고 간간히 <조금만 더 가까이> 이전부터 진행했던 시나리오를 발전시켰지만 좋은 길로 가지 않았다. 2011년 말에 만들고 싶은 장편 시나리오 초고를 썼다. 그 시나리오는 상업 영화로 개봉하고 싶은 욕심으로 썼지만 내가 보여준 투자사와 제작사는 상업 영화로 보지 않았다. 전작 <조금만 더 가까이>는 내가 많이 배우기도 한 작품이고 많은 시도가 있었던 영화이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많은 영화였고 상업 영화 시장에서 보는 관점으로는 애매한 이력이 되었다. 그래도 머지않아 관심을 가져주는 제작사를 만났고 지금 떠올려봐도 만족스러운 아름다운 캐스팅을 했다. 배우가 매우 매력 있었음에도 투자사는 내가 쓴 시나리오의 상업적인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저예산 영화로 예산의 기준치를 낮춰 제작에 들어가려 했지만, 제작 진행을 눈앞에 두고 제작사에서는 좋은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투자액이 낮은 것은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것이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시나리오의 개발이 필요한 것 같다는 의견을 주었다. 난 의견을 받아들였고 시나리오가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했다. 그동안 아름다운 캐스팅의 주인공들은 바빠졌고 많은 영화를 찍었다. 캐스팅은 옅어졌고 난 다시 캐스팅을 진행했다. 다시 만족스러운 캐스팅을 했고 (난 항상 캐스팅 운이 좋은 편이다) 얼마 후 제작사 대표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를 만나 한강 변을 산책하면서 꽤나 좋은 예산 규모의 투자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디어 출발선에 선 것이다. 오랜만에 내가 정말 원하는 영화의 시작, 그 출발선에 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메일로 감독 계약서가 와 있었다. 그리고 계약서를 검토하던 중 다시 투자가 난항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된 줄 알았던 투자가 내부의 큰 반대 입장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영화는 그렇게 3년간 두세 번 너울 치며 제작의 앞에서 썰물처럼 기회가 빠져나갔다. 덕분에 눈앞에 잡히는 기회를 믿지 않는 냉정함이 생겼다. 그 영화는 이후에 한 번 더 제작의 기회를 맞았으나 제작사가 개봉한 다른 영화가 흥행에 큰 실패를 하면서 다시 난항에 빠졌고 시나리오는 다시 오롯이 내 가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튼 그렇게 너울 치는 상업 영화(?)의 길 앞에서 위기감 때문이었는지, 틈만 나면 부지런히 다른 시나리오를 써 댔고 4일 만에 초고를 쓴 < 최악의 하루 >라는 영화의 시나리오 또한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전 영화가 투자의 벽에 부딪히고 나서 난 저예산으로 제작 가능한 <최악의 하루>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했고 제작사를 정하고 다양한 제작 지원 사업에 출품했다. 안타깝고 지겹게도 제작 지원 사업은 낙방이 이어졌다. 그리고 3억의 투자가 30억 투자보다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던 중 단막극 제작 지원 사업에 출품했던 것이 1차 서류 전형에서 통화했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라마 작가와 피디들이 심사하는 면접이었고 그들은 드라마가 아닌 영화 시나리오라는 것에 대한 편견은 있었지만 나에 대한 편견은 없었다. 얼마 후 면접 심사를 통과했고 1억 정도의 지원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저예산 영화에 투자를 하고 싶다는 개인 투자자를 만났다. 어느 정도 배우 캐스팅만 안정되면 무리 없이 영화를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시나리오를 배우들에게 넣었고 연달아 좋은 캐스팅이 들어왔다. < 최악의 하루 >에는 주연급 일본 배우가 필요한데 무턱대고 질러본 캐스팅에서 좋은 소식이 왔다. 대어를 낚은 것이다. 일본 내에서 상당한 지명도가 있는 배우가 관심을 보였고 나는 그가 내 영화에 캐스팅된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획된 크랭크 인 몇 주 전에 캐스팅이 좌절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절이 중요한 영화임에도 계획된 시기에 영화를 들어갈 수 없겠다는 걱정이 되던 중 < 한여름의 판타지아 > 개봉 일정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와세 료를 만났다. 난 그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온화한 품성이 드러나는 얼굴과 낮은 목소리와 눈빛들이 좋았고 대어는 이미 내 관심 밖이었다. 남은 캐스팅도 그만큼의 드라마가 있었고 나에게 필요한 로케이션지가 있었지만 철옹성처럼 뚫리지 않던 것들을 마침내 모두 얻었다. 프리 프러덕션은 순리대로 흘러갔고 개인 투자사와 제작사 간 이견이 있었지만 영화 제작에는 차질이 없을 걸로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개인 투자사와 제작사 간 이견이 좁혀질 수 없다는 것을 크랭크 인 며칠 전에 알았다. 영화 투자치고는 소액인 1억 5천만 원 가량의 예산이었지만 우리 영화에는 컸다. 크랭크 인 이틀 전 난 제작사의 입장을 따랐고 투자사를 잃었고 내 전 재산을 털었다. 졸지에 내가 투자사가 되었다. 내 전 재산을 다 털어도 필요한 전체 예산을 채울 수는 없었지만 일단 프러덕션만 완성 짓는 것을 목표로 잡고 나머지 투자는 영화 촬영을 끝내고 알아보기로 했다. 영화 촬영은 시작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촬영 회차는 16회차였고 40~50회라는 일반적인 상업 영화 회차의 1/3 회차로 찍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들보다 3배 빠르게 찍겠다는 일념으로 영화를 찍었다. 계절은 도와줬고 배우들은 때때로 경이로운 연기력을 보여줬다. 난 계절과 배우들의 연기와 스태프들의 열정에 감사하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매우 행복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크랭크 업이 아쉬울 만큼 좋은 시간들이었고 스태프와 배우들이 빠져나간 시간, 그 많은 수고들을 편집했다. 편집본이 나왔고 더 이상 영화를 진행 시킬 예산의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투자를 찾았고 생각보다 쉽게 투자와 배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고마운 조력자들을 만나 무사히 영화를 완성 지었다. 세상의 평가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난 대략 만족스러운 나의 영화를 얻었다. 그리고 난 다음의 기회를 고민 중이다. 몇 년째 오전은 동네 스타벅스에서 시작했다. 노트북을 펼치고 계획하고 정리하고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글을 쓴다. 혼자 점심을 먹고 걷고 메모하고 책을 보고 메모하고 아이디어를 모은다. 또 어딘가 앉을만한 곳을 찾아 노트북을 펼친다. 매일 하나 이상의 시도와 실패가 있다. 내 안에서의 시도와 실패 혹은 선택되지 않았거나 거절당했거나 떨어졌다는 외부에서 오는 실패의 소식들을 듣는다. 내가 노력에 들이는 시간은 내 이야기를 쓰게 하지만 그만큼 내 앞에 놓인 벽들의 높이도 자란다. 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한 변화와 내가 모를 편견과 발치에 놓인 현실을 먹으며 벽들이 자란다. 매일은 큰 변화가 없는 듯하지만 거울 너머 흰머리를 보이게 하는 시간이 흐른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힘겹게 내가 손에 넣고 품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성공이나 성과로 불리는 것들은 되지 못한다. 수많은 실패의 무덤들을 지나 기회를 하나 얻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만들 기회, 또는 보여줄 기회를 귀하게 얻고는 그 기회를 품에 안고 잠이 든다. 다음날 눈을 떠도 그 기회가 남아있기를 바라고 그 기회로 하나의 시도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최악의 하루> 촬영현장(사진: 김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