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X
- 감독
- 이용남
- 제작년도
- 1996
- 출연
- 이장욱, 이은주, 이광일, 김성훈, 김정희, 주우, 이치삼, 이규범, 이건희, 이학평, 신영운, 성진희, 이재호, 민복희, 이경민, 남선우
일제강점기 조선의 중심도시 경성은 인구가 대폭 증가하면서 4대문 밖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1910년 경성부에 편입된 용산 지역 외에도, 서쪽으로는 서대문 넘어 신촌과 마포 방향으로, 동쪽으로는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와 왕십리 방향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1930년대 새롭게 도시로 편입된 지역에는 영화관이 설립되었다. 도화관(桃花館), 도화극장(桃花劇場) 도화관(桃花館)은 서울 마포 도화동에 위치한 극장이다. 1930년 11월 1일부터 이곳에서 <여류명창대회> 공연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0년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여류명창대회“, 《동아일보》, 1930.11.1) 일설에 의하면 도화관이 1929년 정기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1 극장의 규모가 협소한 탓에 건물의 신축을 꾀해 1933년 10월 7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재개하게 된다 .(“도화관 낙성식”, 《조선신문》, 1933.10.8) 당시 건물주는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였다. 그는 1877년 일본 효고(兵庫)현에서 태어나 포목상으로 일하던 사람으로, 1905년 5월 조선으로 건너와 용산 원정(元町) 3정목에서 토미이상점(富井商店)을 열었으며 용산상영회(龍山商榮會)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도화관 신축을 추진할 당시 이를 반대하는 도화동 주민들의 진정이 있었다. 도화동 주민 150여명은 연명 날인하여 도화관이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면 풍속의 아름다움을 해치게 하여 아직까지 보존하여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경기도 보안과에 반대 진정을 냈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극장의 신축은 이루어졌다. 1933년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도화관에서 도화극장으로 바뀌었다. 일제말기까지 도화극장은 토미이가 운영하고 있었다. 《영화순보》에 실려 있는 도화관에 관한 정보를 확인해 보면 흥행주는 토미이, 지배인은 스가와라(管原)였으며, 총 좌석 수는 782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된 도화극장은 1950년대 경보극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신부좌(新富座) 신부좌는 동대문 밖 신당정에 설립된 영화관으로 1936년 10월 10일 낙성식을 개최하고 12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도화극장의 운영자인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이다. (“新富座成る”, 《京城日報》, 1936.10.11.) 신부좌의 개관을 알리는 기사를 보면, “4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으로 수용인원이 1,200명이나 되는 큰 건물이며 12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의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업을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매일신보》, 1936.10.14.) 1943년 당시 신부좌의 흥행주는 토미이(富井實太郞), 지배인은 古都勇作으로 총 좌석수는 758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으며 이름을 한성극장으로 개칭했다 .(“신부좌, 한성극장으로 개칭”, 《동아일보》, 1946.1.20.) 광무극장(光武劇場) 1930년 5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광무대는 상왕십리 쪽에 가설극장을 짓고 영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33년 봄 상설극장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면서 이름도 광무극장으로 바꾸었다 .(“광무극장 상설”, 《조선중앙일보》, 1933.5.18.) 영화와 연극을 고루 상연하던 광무극장에서는 1934년 5월 카프에서 세운 극단 신건설이 <서부전선 이상 없다>, <누가 제일 바보냐>, <신임 이사장> 등을 공연 한 바 있다. (“신건설 순회공연 시외 광무극장서”, 《동아일보》, 1934.5.2.) 1943년 당시 광무극장의 흥행주는 소노다(園田實生)였다. 총 4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다. 영등포연예관(永登浦演藝館), 영보극장(永寶劇場) 영등포연예관은 1930년대에 들면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등포 지역에 들어선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개관했다. 설립자는 써커스단을 운영하며 다년간의 흥행 경험을 가지고 있던 오오타(太田光)란 일본인인데 그는 충남 예산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던 오오타 칸(太田寬)의 동생으로 1939년 《국민신보》 창간 기념 광고에도 관주로 기록된 인물이다 .(“광고”, 《國民新報》, 1939.8.20.) 영등포연예관은 213평의 부지에 총공비 5만여 원을 들여 연와의 2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개관 첫 공연은 연극호(演劇號)의 연극이었다. (”영등포연예관 연극호 대인기“, 《매일신보》, 1935.10.13.) 영등포 지역의 유일한 영화관으로 존재하던 영등포연예관은 1942년 9월 1일자로 흥행주가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의 무라이(村伊德治)로 바뀌게 되면서 그 이름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경영자가 운영하게 된 영보극장은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등 시설과 외관을 정비하여 영화관으로의 새롭게 변신하였다 .(“영보극장 래 일일 개관”, 《매일신보》, 1942.8.26.) 1943년 당시 영보극장은 흥행주 무라이(村伊德治), 지배인 기하라(木原督夫)로 총 좌석수는 400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1. 이에 관한 이용남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마포 도화정의 도화극장은 1929년 정기준이 세운 목조 1층 건물의 극장으로, 무대는 허술하였으며 수용인원도 300명 정도의 초라한 극장이었다. 개관 후 1년이 못되어 일본인 富井實太郞이 사들여 2층 벽돌 건물로 다시 지었다. 새 건물은 무대도 넓었으며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었다. 도화극장은 영화 상영을 주로 하였으며 가끔 연예나 연극 등도 공연하였다. 후일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다.” 이용남, 「해방 전 조선 영화극장사 고찰」, 청주대석사논문, 2001, 116쪽. * [사진](상단) 신부좌 작성 당시 기사에 게재된 사진 [자료] 《매일신보》, 1936.10.14.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십이일부터 개관 대경성(大京城)의 실현에 ᄯᅡ라 경성 근교의 인구증가률은 기하급수(幾何級數)적인 숫자를 보이고 잇슴에 반하야 근교(近郊) 부민들의 오락기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업서 곤난중이더니 이것을 유감으로 역이든 유지의 손으로 이번에 신당정(新堂町)에다 신부좌(新富座)라는 사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을 세웟다는데 수용인원이 일천이백명이나 되는 큰 건물로 십이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을 맞이하야 개관하얏다고 함니다.(사진은 신부좌) [자료] 《매일신보》, 1942.08.26. 영보극장 래(來) 일일 개관 영등포 유일의 영화상설관 연예관(演藝館)이 금번 새로운 경영주를 마지하는 동시 이름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곳친 후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한편 내용과 외관도 일신해가지고 오는 구월 일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 무라이(村伊德治)씨가 신경영주로 제반경영을 담당하게 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37.08.12. ●팔월 십이일부터 특별대공연 개관 일주년 기념대흥행 ○ 납량특별 『선물』 진정! = 요금특별 봉사제공 = 대인석 십오전 균일 조선극계의 정화! 극단 혜성좌(彗星座) 대공연 ▲ 혜성좌 名극본 대진용! =예제 매야 교환 상연= ○ 만주애화(哀話) 만주의 십년몽 이막 ○ 정의극 마음의 꽃다발 이막 ○ 사회비극 나는 왜 범죄를 하였나 삼막 ○ 희비극 온천장 행진곡 이막 ○ 시대물 임거정전(林巨正傳) 삼막 ○ 모성비극 모성애의 금자탑 삼막 막간 = 넌센스, 합창, 민요, 스켓취, 독창 무용 =혜성 올째스뺀드= 요금 싸고 『선물』 가저가시게 만원되기 전 일즉 일즉 오십시요 왕십리정 광무극장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05.18. 광무극장 상설 부외 상왕십리(上往十里)에 잇는 가설극장 광무대(光武臺)를 금번에 상설극장(常設劇場)으로 개혁하는 동시에 극장 일흠도 광무극장(光武劇場)으로 고치고 활동사진과 기타 연극 등을 흥행하리라 한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10.21. 시외 도화동에 도화극장 신축 【경서(京西)】 시외 도화동(市外 桃花洞)에 잇는 영화상설관 도화극장(映畵常設館 桃花劇場)은 지난 십일일 동극장 내에서 신축 낙성식을 대성황리에 거행하엿다는대 동 극계에 경험이 잇는 부정실태랑(富井實太郞)씨와 동 지배인 김년(同 支配人 金年)씨가 가티 삼만 오천원이란 거금을 드리여가며 조선극예술을 위하여 만흔 노력을 한다하며 또 부정씨는 마포에 양영학교란 보교를 건설하고 조선무산아동을 모아서 가르킨다는데 근처 일반은 부정씨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자료] 《동아일보》, 1932.07.22. 상설극장 반대 도화동민 진정 시외 도화동(桃花洞) 주민 일백오십여명은 련명 날인으로 부정(富井)씨의 경영하는 도화관(桃花館) 신축을 반대키 위하여 금 이십일일 오전 십일시경 경기도 보안과를 방문하고 진정한 바 잇섯다고 한다. 동 도화관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서 풍속의 아름다움을 손하게 하여 아직ᄭᅡ지 보존하야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한다는 것이 반대 진정의 주요 원인이라 한다.
흔히 배우를 가리켜 '천의 얼굴을 가진 인간' '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말을 실행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배우도 전문성을 가진 직업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재능과 의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순재 는 무슨 역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을 맡든 믿을 수 있는 배우로 통한다. 대학시절인 1956년 <지평선 넘어>라는 연극작품에 출연하면서 무대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61년 KBS가 개국하면서 텔레비전 연기자를 겸했고 1966년 < 초연 >이란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는 영화배우의 길도 함께 걸었다. 어느 분야에서건 그는 성실한 배우, 믿을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았다. 그와 함께 일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순재''의 모습은 한결같다. ''약속시간보다 1분이라도 빨리 나오는 배우'' ''항상 대본을 읽는 배우'' ''누구보다도 성실한 배우''---. 실제로 그의 일상도 그같은 평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술을 별로 하지 않는데다 남들 눈에 두드러져 보일만한 호사를 즐기는 경우도 드물다. 배우에게라면 의례 따라 다닐 것 같은 스캔들도 없다. 겸손하고 진지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그의 특징이자 이미지인 셈이다. 이순재 는 1935년 10월 10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주위 어른들을 통해 전해들은 정도에 그친다. 그가 네 살되던 해에 조부모가 살고 있던 서울로 와 줄곧 생활했기 때문이다. 조부는 서울에서 소규모 부동산업을 하며 생활했고 부친 이용남(작고)은 고향에서 비누를 만들어 파는 것을 생계로 삼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 피난민들 속에 섞여 서울로 왔다. 그가 기억하는 집안 사정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아현동에서 성장한 이순재는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이때까지도 역시 그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시절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뒤의 세상은 쓰라린 상처와 가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현실의 생존은 무엇보다도 다급한 과제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변화는 크게 다가왔다. 이념의 대립이 어떤 형태로 폭발할 수 있는 가를 절감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군(UN)의 파견과 함께 들어온 미국식 문화와 가치관,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영화는 새로운 문화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며 꿈을 키우는 창구였다. 특히 미국영화는 법과 정의, 풍요와 행복이 넘치는 파라다이스가 어떤 것인가를 실증하는 ''시네마 천국''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위안과 꿈, 희망을 찾았다. 현실이 거칠었던만큼 영화는 더욱 간절하게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잡았다. 스무살 전후 청년 시절의 이순재 역시 영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영화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중요한 일과였다.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캠퍼스와 종로 통의 단성사, 우미관, 을지로의 국도극장, 충무로의 수도극장(현재는 스카라극장)은 당시 사정으로는 ''한 걸음에 닿을 수 있는'' 문화센터나 다름없었다. 시간 나는 대로, 극장 표를 살만한 형편이 되는대로 그는 극장을 들락거렸다. 주로 외국영화들을 섭렵했다. 영화를 보면서 생기는 궁금증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던 ''포토플레이''(Photoplay) ''모던 스크린''(Modern Screen), 일본에서 발행되던 ''키네마 준포''(키네마旬報)나 ''에이가노도모''(映畵의友)) 같은 영화잡지들을 구해 보면서 풀기도 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작품 내역, 아카데미 영화상의 수상기록 등 잡다한 상식이 늘어갔고 그 덕분에 이순재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영화박사''로 통할 정도였다. 영화매니아 청년이 호기심을 넘어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영화덕분이었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흑백영화 < 햄릿 >(1948)은 영화 이상으로 다가왔다. 철학과 지도교수의 권유로 본 것이지만 가동의 충격은 강렬했다. 삼선교 건너 돈암동 동도극장에서 그 영화가 다시 상영될 때는 첫 회에 들어가 4번을 연속해서 보고 나온 적도 있었다. 아침에 들어가서 어두워 져서야 극장 밖으로 나왔고 점심도 거른 채 였지만 <햄릿>의 감동은 그런 것들을 잊게 만들었다. 결국 이순재 는 연극부에 들어갔다. 배우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배우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성인배우들 조차 변변하게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 젊은 배우 지망생의 처지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로지 젊은 열정과 위대한 배우가 되겠다는 의지만이 보상의 전부였을 뿐이었다. 한가지 더 있다면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연극을 한다는 것,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순수한 예술을 지킨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었다. 1958년 입대한 그는 3년동안 대북방송을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받아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군인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연극계와 가깝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61년, 그가 군대를 제대하던 해에 KBS 방송국이 개국했다. 새로 생긴 텔레비전 방송은 드라마를 주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연기자들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넓어지고 있었다. 1967년에는 동양방송(TBC)이 개국했다. 방송 드라마에 필요한 연기자는 대부분 연극무대 출신들이 맡았다. 지금은 무대와 방송, 영화 분야의 연기가 서로 넘나드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저항감이나 차별적 인식이 없지만 1960년대 무렵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영화배우들은 텔레비전 연기를 비정통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텔레비전 연기자들이 대부분 무대 배우 출신들이라 연기 패턴에도 연극적 과장이 섞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연극배우들은 과장이 심하다며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텔레비전 연기자들은 정통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영화계에서는 선뜻 문을 열지 않았다. 60년대를 넘기면서는 한국영화의 연간 제작편수가 연간 150여편을 넘나들 정도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영화 분야에서는 작품 편수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 새로운 연기자의 발굴이 절실한 문제였지만 방송 연기자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순재 는 1966년 정진우 감독이 연출한 < 초연 >이란 작품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는 한수 접는 시선으로 연극이나 텔레비전 연기자들을 대하려 했지만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새로운 연기자를 구해야 하는 영화계로서는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 많은 없는 일이었다. 이낙훈 , 김성원 , 전운 , 김성옥 , 오현경 , 김동훈 같은 연기자들이 연극과 방송 쪽에서 경력을 쌓으며 당시 영화계로 활동영역을 넓힌 대표적 인물들이다. 영화계에서도 이순재 의 성실함은 여전했다.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고, 자신이 맡은 역할의 성격을 꼼꼼하게 따졌다.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의 영화계 스타는 신성일 , 엄앵란 을 비롯하여 김지미 , 최은희 , 김승호 , 김진규 , 최무룡 , 남궁원 , 박노식 , 황해 , 장동휘 , 신영균 등 모두가 내로라 하는 거물급들이었다. 잘 나가는 스타들은 몇 편의 영화에 동시 출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스케줄이 엉킬 때는 여러 곳의 촬영 일정이 연쇄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주연급 배우가 시간에 맞추어 촬영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머지 배우나 스탭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도 이순재는 시나리오를 읽고 대사를 다듬으며 감정을 정리하는 것을 습관처럼 삼았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추어도 표시가 나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그의 성실함과 연기 감각은 영화계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 막차로 온 손님들 >(1967), < 나무들 비탈에 서다 >(1968), < 일식 >(1968) , < 피도 눈물도 없다 >(1969), < 분례기 >(1971), < 토지 >(1974) < 집념 >(1976) < 광염 소나타 >(1979) 등에 계속 출연하며 연기력 있는 이른바 ''성격파 배우''로 주목받았다. 1999년의 <허준>에 이르기까지 그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200여편이다. 그 중에서 한의로 명성을 날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집념>에서 그는 주인공 허준 역을 맡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조연 캐릭터였다. 많은 경우 조연급 연기자들은 영화의 간판 역할을 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의 흐름을 받쳐주며 특색있는 포인트 역할을 한다. 이순재 역시 이지적이며 논리적인 인물, 따뜻한 심성을 지닌 캐릭터를 독특하게 소화 해냈다. 지금 이순재 는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삶과 신념을 지켜나가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아버지 역할을 자주 맡으며 현역 배우로서의 위엄을 지켜나가고 있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연기한 ''대발이 아버지'' 역이나 <허준>에서 한의의 도를 지켜나가는 유의태, 조선시대 상인들의 사업 철학을 들여다본 <상도>의 거상 박주명 등의 역할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경우들이다. 한때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며 정치인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연기자의 길로 다시 돌아왔고, 노년의 열정을 연기에 담고 있다. 지난해에는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 역을 맡아 변함없는 무대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성실한 일관성으로 평생을 배우로 살고 있는 사람, 무대나 영화 텔레비전을 오가며 최선의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순재다. 조희문 (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5년 10월 10일 함북 회령 출생 1958년 3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1956년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로 연극활동 시작 1966년 정진우 감독의 < 초연 >으로 영화 데뷔 <주요 경력>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 역임 14대 국회의원 현재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사단법인 중랑문화원원장, 대한적십자사 친선대사 <수상 경력> 1976 < 집념 >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최우수남우상 < 어머니 > 대종상 남우특별상 1982 <풍운> 한국방송대상 2002 문화훈장 보관장, MBC '명예의 전당' <주요 작품> 초연 , 막차로 온 손님들 , 탈출 , 서북청년단 , 어머니 , 집념 등 20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