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지옥
- 감독
- 이용주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남상미, 류승룡, 김보연, 심은경, 문희경, 이창직, 장영남, 오지은, 박진우, 손선근, 윤희철, 고서희, 박민영, 김도연, 유기태, 노성민, 권수현, 이은혜, 송기관, 박지선, 김지혜, 홍지연, 이미지, 김유정, 신은정
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가 아니라 '달리기' TV에서는 핑클이 캠핑을 다녔다. 유튜브에서는 1990년대의 <SBS 인기가요>가 24시간 스트리밍됐다. <핑클클럽>과 <SBS 인기가요> 모두 그때의 기억을 소환시켰다. 논산 연무대에서 출발해 부대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처음 들었던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떠올랐고, 과거 <SBS 인기가요>에서 노래를 소개하며 ‘네~!’를 유행어로 만든 장정진 성우도 기억났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고 역시 1990년대를 그린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도 같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1994년부터 2005년까지, IMF를 지나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다룬 이 영화가 소환한 건, 잊혀진 기억이 아니라 잠시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언뜻 < 유열의 음악앨범 >( 정지우 , 2019)은 < 건축학개론 >( 이용주 , 2011)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다를 게 없어보이는 영화다. 과거의 사랑방식을 재현하면서 그때의 대중음악으로 기억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건축학개론>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응답하라> 시리즈가 HOT와 서태지를 활용했던 것처럼 <유열의 음악앨범>도 그때의 유행가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모자이크의 <자유시대>, 핑클의 <영원한 사랑>, 윤상이 부르고 토이 앨범에 수록했던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신승훈의 <오늘 같은 창밖이 좋아> 등등. 그때 이 음악을 들었던 관객들이라면, 반가워할 수밖에 없는 노래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들과 달리 ‘그땐 그랬지’란 그리움의 시선이 없다. 예를 들어 PC통신을 통해 소통하는 장면은 <응답하라 1997>에 나왔고, <건축학개론>에는 하드 용량 1기가의 펜티엄 컴퓨터가 나온다. 이 작품들에서 그때의 컴퓨터와 PC통신은 어디까지나 그때를 재현하는 소품이다. 하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주인공 미수가 PC통신을 이용해 현우에게 메일을 쓰는 상황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그리운 사람과 그렇게 소통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자체다. 여러 장면에서 소환되는 음악들이 일으키는 효과도 현재형으로 쓰인다. 음악들은 인물들이 직접 좋아하는 노래들로 나타나지 않고, 인물들이 영화 속 현재에서 느끼는 감정을 실어내보내는 역할을 맡는다. 드디어 다시 소통하게 된 미수와 현우의 감정을 ‘영원한 사랑’으로 표현한 연출이 대표적이다. 설렘을 증폭시키기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땐 그랬지’란 태도도 없지만, ‘그때가 좋았지’란 입장도 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인생에서 20대를 보낸 그때는 가장 아프고 추웠던 시절이다. 현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죄책감을 갖고 있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 한다. 미수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위치해 있는 공간에도 애써 로맨틱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낡고 허름한 빵집은 그 자체로 따뜻한 공기를 뿜지만 이후 현우와 미수가 사는 공간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우는 컨테이너로 가득한 곳에서 무거운 짐들을 옮기며 살고, 미수는 제본공장 바로 옆에 붙은 사무실에서 소음을 견디며 일한다. 녹슨 철제 컨테이너와 기계, 소음으로 가득한 이 풍경들은 이 영화가 그 시대를 현재로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강하게 드러낸다.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지 않는 <유열의 음악앨범>이 그럼에도 1990년대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가 필요로 한 건, 쉽게 소통할 수 없어서 우연에 기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더 절실해질 수 밖에 없는 시대다. 이야기는 두 남녀가 만났다가 멀어지고, 또 우연히 다시 만나고, 또 다시 멀어지는 걸 반복하지만 이런 흐름이 긴장감을 일으키는 이유도 시대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현우가 차를 타고 가버리는 미수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감정의 밀도가 높다. 지금 놓치면 또 언제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유열의 음악앨범>은 이 달리기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핸드폰도 없고,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고, 그래서 소셜미디어도 없는 시대의 남녀는 서로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헤매고 뛰어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보다 달리기에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달릴 필요가 없는 시대. <유열의 음악앨범>의 감정적 울림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해마다 쏟아지는 독립영화들 중에는 가족이라는 소재에 기대는 작품이 많다. 심지어 가족이라는 관계가 인물의 직접적인 갈등의 요인이 아닌 작품이라도, 가족의 문제는 그 결함의 주위를 배회한다. 가족은 사적이고 친밀한 감정으로 구성되지만, 인정과 투쟁을 반복하는 부조리한 관계의 시작이다. 그래서 무수한 영화들은 폭력의 기원을 가족으로부터 찾는다. 이런 류의 영화들은 대체로 가족 중 누군가가 부재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폭력적이다. 이러한 파괴된 가족들의 등장은 가족이라는 구성체의 불신으로부터 비롯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무능력 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다. 이것이 무수히 많은 독립영화들에서 등장하는 가족이라는 실체이자, 가족에 관한 상상력이다. 한편 이러한 이야기들의 대량 생산은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한 발설되지 않은 욕망을 반증한다.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라는 현실화되지 않는 유토피아 같은 것 말이다. 성취되지 않는 욕망은 그 탄성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로 전이되지만, 욕망의 끝없는 실패는 우리를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그것을 어떤 이들은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성장’이라고도 부른다. 자신의 경험담을 소재로 제작된 김현정 감독의 단편 < 나만 없는 집 >은 그 ‘성장’의 어떤 지점을 건드린다. 영화는 세영이 혼자 식탁에서 아침을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영의 프레임 안으로 엄마가 무심히 들어오면서 아무 말도 않은 채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신다. 그 순간 정적인 화면을 파괴하듯 요란하게 들어오는 세영의 언니는 준비물을 사야 한다며 돈을 달라고 떼를 쓴다. “엄마는 밥 안 먹나”라는 세영의 관심에도, 엄마는 자신의 말만 한다. 가족과의 대화는 자주 어긋나고, 그들은 각자의 욕망으로 달려간다. 이날 아침, 그 누구도 세영의 식탁에 앉지 않는다. 밥 먹는 장면은 이후에도 등장하지만, 세영은 늘 혼자 먹는다. 세영의 밥 먹는 장면은, 고된 생활 탓에 아이들에게 무심해질 수밖에 없는 엄마와 사춘기에 접어든 언니 그리고 가족의 관심을 받기를 원하는 세영의 묘한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그렇게 영화는 세영의 인정투쟁의 장이 된다. 사실 세영이 밥을 먹는 첫 장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화면의 가시적 정보보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먼저 도착한다는 것이다. 나는 인물과 사물의 배치를 본격적으로 인지하기 전에, 세영의 입안에서 덜그럭대는 숟가락 소리에 먼저 반응했다. 이 장면에 감각의 소실점을 부과할 수 있다면 혹은 보이지 않는 내밀한 미장센이 있다면, 그것은 불쾌할 정도로 청각을 지배하는 쇳소리다. 그렇게 보면, 세영이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숟가락이 입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뿐, 정확히 어떤 물질이 입안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세영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물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 것,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여주지 않는 것은 그것이 중요치 않거나 화면에서 배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가족들이 음식을 함께 만들거나,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이 없다. 김현정 감독은 가족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음식의 역사성(기억)을 지워버린다. 마치 입안으로 빈 숟가락만 무한 반복하는 허기의 형상, 즉 관계의 허기가 < 나만 없는 집 >의 주인이자 가족이다. 그리고 영화는 세영과 엄마 그리고 언니와의 화해의 시간을 보여준 후 다시 한번 우리를 섬뜩한 세계로 인도한다. 세영에게 비빔면을 사 오라고 시킨 언니는 사라지고 없다. 물이 끓는 동안, 세영은 텅 빈 식탁에 앉아 과자를 입에 넣는다. 세영의 입은 마치 소심한 복수를 하는 것처럼 과자들을 산산조각내고, 더욱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아 과자를 부서뜨린다. 쾌감과 잔혹이 동시적으로 느껴지는 이 장면은, 더 이상 엄마의 딸이자 언니의 동생으로서의 세영이 아닌, 다른 인물로 느껴지게 한다. 이 섬뜩함의 과정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성장통은 어렴풋이 기억하겠지만, 자신이 어떻게 어른의 문턱에 닿았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이 섬뜩하고 괴기스러운 감정이 나의 유년 시절을 호출하고 말았다.
이 온통 하얀 풍경 아래 어딘가에 수학적인 하나의 선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국경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허구이다. - Stanley Cavell < 꿈 >( 원창성 , 2015)의 줄거리는 ‘고등학생 오성은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자주 잠들며, 꿈을 꾼다’, 라고 간단하게 요약될 수 있다. 이렇게 요약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성의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하고, 영화는 사건의 중심을 따라 이동할 생각이 없으며,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서사적 전략을 애써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꿈의 이미지들은 서사의 외부를 떠돌며 오성의 혼란스런 감정의 결들을 드러낸다. 현실 이미지가 멈추자, 꿈의 시간이 찾아온다. 오성의 꿈은 현실을 이질감 없이 드나든다. 현실의 차원과 꿈의 차원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있는 걸까. 우리는 마치 파도처럼 현실에 닿았다가, 다시 꿈에 닿는다. 닿는 곳 어디라도 아련해지거나, 작은 생채기를 목격한다. 감정의 강도를 가파르게 견인하지 않고, 스치듯 달아나는 오성의 생채기들은 그 시절 낯선 감각으로 산란된 섬세한 에너지들이다. 현실과 꿈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병치 되는 < 꿈 >은 동성애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류 퀴어 영화들의 경향과는 다른 지점에 위치한다. 그것은 육체의 자극적 전시나 금기의 위반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꿈>은 동성애라는 파격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의 불온성을 보여준다. 영화는 동성애라는 소재 자체를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방법으로 구성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보편적 감정에 흡수시키면서, 고등학생 시절의 꿈과 방황 그리고 사랑을 섬세한 감각으로 펼쳐낸다.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사회적 코드를 대립시키지 않고, 동일한 감정의 기원을 탐색하는 <꿈>은 왜곡된 사회적 시선의 근저를 흔든다. 사회적 코드의 위계에 대한 폭력적인 전복이 아니라, 한때 우리에게 머물다 떠난 사랑들처럼, 시각 너머 잃어버린 윤리의 지평을 더듬는다. 현대의 감각 체제는 상투적인 자극이 상식의 세계로 받아들여지고, 스펙타클의 강도와 속도의 과잉을 욕망하는 세계다. < 꿈 >은 이러한 감각 체제의 궤도를 이탈한다. 4:3이라는 화면 비율은 현실과 꿈의 형식을 같은 위계에 놓고, 현실은 마치 다큐의 날 것처럼 구성하고, 꿈은 빛의 왜곡과 외화면의 사운드로 몽환적 이미지를 담는다. 대화 장면은 숏-리버스 숏과 인물의 사이즈로 감정의 흐름을 견인하지 않고, 오히려 서사의 작동과 무관하게 인물들을 공간에 배치하고 즉흥적인 연출에 따른 줌-아웃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기존의 감각 체제를 허물고, 우리의 감각을 더욱 예민하고, 섬세하게 한다. <꿈>은 잊힌 감각이 다시 작동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릴 것을 요청한다. 오성의 현실과 꿈을 이렇게 교란할 때, 우리는 오성의 꿈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오성의 꿈을 프로이트가 언급한 ‘소원성취’로서 단순히 해석할 수 있을 까. 오성의 꿈의 이미지는 오성의 언어로 구술된 꿈이 아니라, 현실과 동등한 지위로 우리에게 직접 경험된다. 오성과 오성의 꿈의 간격, 오성의 꿈과 우리와의 간격, 이 간격이 해석을 위태롭게 한다. 영화의 후반부 오성과 우석의 여행지에서의 벌어진 꿈과 현실의 교차, 지연되는 시간들, 그리고 제시되지 않는 마지막 오성의 꿈은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영화가 끝나자 오성의 꿈의 내용은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꿈의 해석으로 < 꿈 >의 논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마치 인과율이 구멍 난 세계를 이해하는 것처럼 지지부진한 일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