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
- 감독
- 박상호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주민아, 이영관, 남궁원, 조미령, 김희갑, 이상화, 장일식, 강철원, 최석, 강동규, 최연광
*영화의 전개 과정을 마구마구 적어놓은 글입니다. 딱히 반전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나중에 읽는 게 낫겠습니다. < 에듀케이션 >을 보면서 따로 제목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교육에 관한 영화? 그렇게 읽으면 좀 웃겨지지 않나. 그런데 김덕중이 만든 두 번째 장편의 제목이 < 컨버세이션 >이니까 제목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이 감독이 제목에 영어 한 단어를 계속 붙이는 이유는 뭘까. 생각만 계속하니 제목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에 관한 영화일까? 그래서 대화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고, 대화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굴레가 덫이 되고, 대화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고, 이상한 지경에 빠졌다. 기억해 보니 이 영화를 여러 번 본 것도 아니고, 딱 한 번 봤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의 경연에 여러 차례, 그것도 줄곧 눈과 귀를 대고 있다는 착각까지 일어난다. 이건 무슨 주술 같은 것에 빠진 건가. 슬슬 피곤함이 몰려와 영화에 대해, 정확하게는 그들의 대화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날 즈음 나는 다시 이 영화를 꺼냈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에 관한 영화다, 이런! 역시나 나는 같은 생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로 페이드인하면, 세 명의 여자 – 은영, 명숙, 다혜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환한 햇살이 그들 사이로 비친다. 아무리 봐도 나이 차가 나 보이는데, 그들은 친구처럼 말을 놓는다. 대화의 내용으로 미뤄 그들은 모두 파리에서 유학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만약 프랑스인이 듣는다면 콤플렉스에 빠진 아시아인이라고 코웃음 칠 테고, 한국인이나 아시아인이 듣는다면 별로 친근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흉볼 것 같다. 10분이 지나고, 다음 장면에서 명숙과 다혜가 어둑어둑해진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한다. 대화 속 관계의 영역이 더 넓어지는데, 한 번 박인 밉상의 인이 더 깊어진 탓인지 특히 명숙과 다혜에 대한 비호감은 좀체 회복되지 않는다. 대화를 마치고 은영의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 비상문이 열리지 않아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깨소금 맛이라고 여기면서도 미안하지 않다. 다음 장면은, 술에 취한 은영이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걸 보여주는데, 앞선 장면과 시간상 연결이 되지 않는다. 기사와의 대화 내용으로 보아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은영과 명숙이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 성가신 상황을 겪고, 다음 장면은 다시 현재(대화 도중 ‘한남’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로 돌아와 한밤에 은영과 두 친구가 대화하는 모습을 담는다. 첫 시퀀스에서 대화의 주제로 나온 대로 그들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 은영은 곁에 있는 아기가 깨지 않도록 신경이 쓰인다. <컨버세이션>은 챕터로 나뉜 영화가 아니지만, 인물이 들어가고 나가는 시점을 기준으로 편의상 몇 개의 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44분까지 전개되는 첫 번째 챕터는 은영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건이랄 게 없거니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도 친절하지는 않다. 한 예로, 이 챕터는 대략 다섯 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쇼트의 숫자로 쳐도 여섯 개에 불과하다. 두 개의 쇼트로 이뤄진 첫 시퀀스를 빼면, 전부 하나의 쇼트로 하나의 시퀀스가 구성되며, 제목 그대로 대화하는 모습만을 기록하고 있어서 정적이란 인상을 준다. 압권은 제일 긴 쇼트인 택시 내부 장면이다. 은영과 기사의 대화가 주 내용인데, 영화는 오직 은영만을 보여준다. 나는 화면 바깥에 있는 기사의 모습을 10분 넘도록 상상만 해야 한다. 현재의 어느 하루의 낮, 저녁, 밤 시퀀스와, 그 사이에 낀 과거의 두 시퀀스가 부드럽게 연결된 편도 아니다. 시간과 시간이 불쑥 드나드는 까닭에, 과거의 장면이 현재를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이러한 특징들이 평범한 영화는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하지만, 온갖 괴상한 영화가 설쳐대는 요즘에 <컨버세이션>의 형식이 유달리 신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택시 장면에서 문득 설렘을 느꼈으나, 첫 번째 챕터가 끝날 때까지 나는 <컨버세이션>에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에듀케이션>을 만든 영민한 감독의 소포모어징크스인가, 그런 생각만 했더랬다. 감기려고 하던 눈이 반짝 떠진 것은 44분까지의 은영 챕터가 끝나고, 갑자기 낯선 인물들로 두 번째 장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은영은 스크린 밖으로 사라져 나오지 않는다. 여기선 승진과 필재의 씁쓸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은영이 나중에 그들 사이로 어떻게 들어온단 말인가. <컨버세이션>은 별개의 이야기로 나뉜 옴니버스영화일까. 그런저런 예상을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첫 장의 스타일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다. 쇼트의 길이는 길고, 인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라곤 없으며, 시간과 시간 사이로 갑자기 그와 그녀가, 그와 그녀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나간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깥 공간의 개입에서 비롯되는데, 첫 장에서 갇혀 있던, 그래서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만 대화하던 인물들이 바깥의 공간에서 움직인다는 점이다. 두 번째 장의 인물인 승진과 필재는 대화하면서 움직이는 존재다. 승진이 “걸을까”라고 말한 뒤 유모차를 끌며 앞장서 걸으면, 필재가 그를 따라 공원 한 귀퉁이를 도는 장면이 그러하다. 몸의 움직임과 함께 대화가 끌려 나오고, 그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움직인다. 이러한 신체의 움직임은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대화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인물이 느끼는 감정, 인물 관계의 변화’ 같은 것들에 대화가 어떻게 관여하는가, 그것이 신기하게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 미화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런 작품에선 더욱 그러하다. 첫 번째 장에서 은영이 딸 라온을 둔 시점을 현재로 상정한다면, 이후에 튀어나오는 것들은 대부분 과거의 언제일 확률이 높은데, 묘하게도 과거의 어떤 이미지들이 뜻 모를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어느 날 밤, 집 앞에 차를 주차하지 못한 필재가 좁은 공간을 배회하는 장면이 그 중 하나다. 그는 차를 몰고 어디를 다녀온 길일까, 골목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 장면은 저 뒤에 나올 열차 장면과 쌍을 이룬다. KTX 안, 아마도 필재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인 듯한 승진은 종이를 꺼내 편지를 쓴다. 그의 말대로 그건 아주 슬픈 편지다. 골목을 오가던 필재는 그런 편지를 받을 줄 모르고 있을 테지. 그런저런 생각들로 두 개의 이미지를 엮는 일은 곧 ‘애통의 미를 관조’하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아름답지만, 다른 정서와 마주하게 하는 장면은 승진과 필재가 버스킹을 구경할 때다. 여기서도 공연하는 가수는 화면 밖에서 목소리만 들려줄 뿐, 나는 승진과 필재만 쳐다볼 수 있다. 무심한 듯 앉은 필재에 비해, 승진의 앉은 자세는 어딘가 어색하다. 그는 안절부절못한다. 마침내 뒤로 누운 그의 손길은 가슴 속에서 주문하는 행동을 옮기지 못해 허공을 맴돈다. 짧은 아스라함이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모리스>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정이 전달됨을 느꼈다. 이 장면과, 승진과 은영이 산행에 나선 마지막 시퀀스는 대구를 이룬다. 앞선 장면과 달리, 승진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대담하다. 앞의 버스킹 장면이 있기에, 산행 장면의 승진을 보며 나는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놓인 열차 장면이 승진에게 어떤 확신을 준 것일까, 이 영화의 대다수 장면이 그러하듯 ‘그렇다’고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컨버세이션>의 인물들은 적절한 단어와 몸짓을 갈구한다. 자기 마음속 어떤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쉬 떠오르지 않아, 그것을 마음껏 밖으로 내뱉지 못해 답답해할 때도 있다. 현재의 은영은 결혼과 출산 이후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감정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컨버세이션>은 어쩌면 그런 그녀의 감정이 찾아 나선 시간의 해법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돌고 돌아 그녀는 끝내 산행에 나섰던 그 날로 되돌아간다. 은영과 승진은 여전히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그들의 대화는 다시 한 번 엇갈린다. “말을 해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안다”고 자신 넘치게 말했던 은영은 “내가 너 사랑한다”는 승진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 대화의 영화에서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그렇게 오지만, <컨버세이션>은 그 대화의 끝에서 풍성함을 거둔다. 흡사 영화 내내 쏟아져 나오던 수많은 단어들이 하나의 순간을 위해 달려가는 양, 이리저리 맞서고 뒤엉켜 싸우던 감정의 선들이 대화의 결을 따라 정리된다. 하나의 원이 완성되는 순간, 하지만 이것은 진실과는 또 다른 문제다. 버스킹 장면의 승진이 산행 장면의 승진보다 덜 혹은 더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그들의 관계가 커다란 원을 돌아 하나의 지점에 도착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의 대화가 진실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승진이 편지에 썼던 것처럼, 우리는 맞는 길을 걷는 게 아니라, 각자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며, 산행에서 돌아오는 그 순간에 은영과 승진은 적어도 맞다고 여긴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대화의 영화라는 점에서 <컨버세이션>은 대화가 주를 이루는 몇몇 프랑스 영화와 근친 관계를 맺는다. 근래 등장한 프랑스 영화 중에 대화가 중심에 선 작품으로 <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이 있다. 그런데 <러브 어페어>의 대화와 <컨버세이션>의 그것은 다르다. <러브 어페어>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빌려 대화하는 형식의 영화다. 여기서 대화는 구애의 방식이다. 누군가의 비밀을 전달하는 것처럼 대화하면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감정 속으로 접근하고, 그러한 접근은 결국 두 사람의 관계로 매듭지어진다. 대화는 직접적으로 인물과 인물에게 영향을 주는 수단이며,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린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와 차별화된다. <컨버세이션>에서 은영과 승진이, 혹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시간 순서대로 배치되지 않는다. 이 말인즉 그들의 대화는 이후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은영과 승진은 곧장 맺어질 듯이 대화와 감정의 연결점을 취하지만, 그것은 이미 흘러간 몇 년 전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 즉, 이 영화의 엔딩에서 벌어지는 대화의 손길은, 영화의 첫 번째 장에서 부부의 애정을 절감하는 은영에게 직접적인 은혜의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은영은 현재의 외로움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자기 영역 밖의 일이다. 현재의 은영은 여전히 외로운 아내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상담할 때는 이런저런 조언을 풀어놓는 그지만, 정작 그 자신의 답은 찾지 못할 것이다. 영화가, 아니면 김덕중이, 그들 – 은영과 승진이 산을 찾아 대화를 나누었던 어떤 시간을 찾아간 것이지, 현재의 은영이란 인물이 과거 어느 시점의 자기 대화를 찾아낸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엔딩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무엇이라 설명하든 – 진실이든 풍성함이든 찬란함이든 신비함이든 농담이든 – 그것은 은영이란 인물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며, 굳이 말하자면 영화가 창조해낸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러므로 은영에 대해 안타까워할 이유 또한 없다. 누군가 <러브 어페어>의 리뷰에서 알랭 레네가 연상된다고 써놓은 것을 읽었다. 글쎄다, 레네가 영화적 생명의 중후기에 쌓아 올린 형식적인 경지를 감안한다면, <러브 어페어>보다 <컨버세이션>을 들이미는 게 더 적합해 보인다. 예를 들어, <스모킹 노스모킹>에서 각 인물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말하느냐, 에 따라 알 수 없는 수많은 결과를 낳는 것과, 이런 길과 저런 길을 오가는 은영과 승진의 삶의 양태가 닮아도 더 닮았다. 김덕중은 대화에 관한 영화로 <컨버세이션>을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가 완성한 것은 ‘대화의 영화, 영화의 대화, 대화의 작동 원리’에 대해 고심한 결과물로서의 영화다. 나는 말장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공원 장면에서, 승진이 물었다. “그래서 애수가 뭔데?” 필재가 대답했다. “슬픔과 비슷한 건데 설명하긴 어려워” 나중에 승진은 또 말한다. “너도 애 생기잖아, 아마 애수가 철철 넘쳐흐를걸?” 대화가 다 풀어놓지 못하는 것, 그것을 기어코 대화를 통해 이뤄내도록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곧 인물의 관계를 만들어내고, 이윽고 인물이 대화를 통해 도달한 미지의 공간이 <컨버세이션>이다. 어느 날, 김덕중 앞으로 은영이란 인물이 도착한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그는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다. 겉도는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유일하게 자기의 외로움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이 그다. 김덕중은 다른 시간의 레이어에 놓인 그를 상상한다. 때론 그를 시간 밖으로 내던지기도 한다. 그가 부재하는 시간 동안, 그와 인연을 맺을 다른 사람들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이다, 다시 은영의 레이어와 교차한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 속에서 다른 머리를 하고 다른 옷을 입은 여러 은영과 여러 승진이 그 사이를 떠돈다. 그 작업을 통해 김덕중은 은영에게 하나의 순간이 될 시간과, 그 시간의 대화를 빚어낸다. 현재에서 과거의 가능한 결과를 찾아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이 영화에선 가능하다는 것을 김덕중은 영화적으로 설명하고 구현해 낸다. 어떤 서두름도 없어서 더욱 놀랍다. *무슨 까닭인지 글을 마칠 즈음 < 스프링 피버 >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두 영화를 비교하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김덕중은 로예와 전혀 다른 감성의 감독이다.
하나, 김정민의 영화를 보았다. < 감자 >(2018)가 2019년에 가장 뜨거웠던 단편영화 중 한 편이라는 거, 나는 몰랐다. 당연히 김정민이란 감독의 이름도 알 리 없었다. 그러다 < 긴 밤 >(2020)이란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2020년에 열린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 은근히 < 기생충 >(2019)에 딴지를 거는 듯한 영화에 매혹당하는 데는 단 몇 분이면 족했다. 너무나 예쁜 컬러 – 근래 김정민이 만드는 영화들의 특징 중 하나다 – 로 포장된 세계는 아마도 반지하나 지하로 보이는 어떤 공간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기괴한 행태, 혹은 사건은 페미니스트들이 기겁하고 입을 막을 그런 류의 것이다. 당연히 영화제마다 받아들이는 형국이 극과 극으로 다를 수밖에 없을 터, 사실 그것은 김정민이란 감독이 그간 만들어온 수십 편의 단편영화가 겪었을 수난의 한 예에 불과하다. 내가 아는 한 제일 먼저 나온 김정민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라는 제목의 2016년 작품이다. ‘홍상수 영화’라니. 홍상수에 관한 영화인가 싶었는데 그야말로 홍상수 영화를 따라가며 흉내 낸 그런 영화다. 극 중 대사를 빌리자면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보다 똑같이 베끼는 게 영화제 취향에 맞을 것 같다’라는 논지다. 영화제 취향을 어설프게 간파한 죄인지,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가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아마도 영화제의 예심을 보는 수많은 사람에게 비웃음을 사며 여기저기 떠돌다 사라진, 그런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김정민이 방향을 튼 거 같지는 않다. 노골적인 베끼기는 아니어도 특정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거나 오마주를 바친 듯한 영화의 리스트는 끝도 없이 전개되었다. 내가 대충 감을 잡은 감독의 이름만 나열하더라도 ‘홍상수, 봉준호, 왕가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장 뤽 고다르, 오즈 야스지로, 기타노 다케시, 스탠리 큐브릭, 폴 토마스 앤더슨, 허준호, 이마무라 쇼헤이, 미카엘 하네케’ 등이다. 하나같이 위대한 거장의 이름이니 창피함을 무릅쓴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 참 겁도 없다 싶다. 그런 경향의 작품 가운데 피식대며 본 작품도 있고, 썩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다. 2018년 작품 <세 아들>은 후자에 해당한다. 4:3 화면비에 흑백으로 찍은 카메라의 눈높이가 정확하게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과 일치하고, 제목(특히 영어 제목 - A Winter Afternoon)이나 음악도 영락없이 오즈의 그것이다. 만약 오즈가 이 영화를 본다면 네 인물이 빚는 관계의 이야기에 슬며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단, 온전히 오즈의 인장만 박힌 것도 아니다. 김정민의 감성과,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21세기 청년의 분위기가 이건 디지털영화라고 말한다. 물론 김정민이 그런 영화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여기저기를 찔러대는 시도가 별로 바뀌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색채를 갖춘 작품도 하나둘씩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감자>가 그런 작품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5년에 걸쳐 어림잡아 스물다섯 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근작인 <감자>와 <긴 밤> 외에 주목을 받은 영화는 드물다. ‘숏컷 시리즈’라 이름 붙인 영화들은 습작처럼 보이고 완결성이 아쉬운 터라 그간 영화제에서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왼다리>(2019)와 <첩첩산중>(2019)처럼 느슨하게 연결된 영화의 경우 나란히 보지 않으면 매력을 놓쳤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유를 따져 보면 너무나 많은 (영화제) 불합격의 사유를 꺼낼 수 있겠으나, 그중 가장 큰 것 하나를 들자면 ‘이단성(異端性)’ 때문이라 하겠다.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앨범 재킷을 먼저 보았으면 한다. 그룹 ‘스틸리 댄’의 명반 시대를 연 1972년 앨범 <Can’t Buy a Thrill>의 재킷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김정민 특유의 색감이 궁금하다면 이 앨범의 재킷을 보면 된다. 노랗고 빨간 색깔에 변형을 가해 어딘지 인공적이고 조잡한 인상을 주는데, 김정민은 여기에 파스텔 톤을 좀 더 강화해 ‘이것이 김정민의 세계다’라고 주장한다. 위 재킷에서 컬러보다 더 신경 써서 보아야 할 건 소재다. ‘거리의 여성, 나체의 남자와 여자, 욕망을 은유하는 싸구려 물품’은 재킷의 컬러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포스트 히피 시대에나 어울릴 것들인 게 사실이다. 스틸리 댄의 앨범 재킷이 종종 육감적인 소재를 다루긴 하지만, 이 앨범의 키치적 취향은 다른 앨범 재킷의 고상한 톤과 거리가 멀다. 21세기에 저런 재킷을 앨범의 커버로 사용하는 팔푼이는 없을 게다. 김정민의 영화가 저런 소재나 주제를 다루지 않지만, 시대와 주변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생산해 내는 그의 영화와, 위의 재킷이 주는 인상이 스무드하게 오버랩된다. 이상한 세계의 앨리스의 눈으로 현실의 세계를 보려는 정신 나간 시도. 심지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살짝 다룰 때에도 현실감보다 생뚱맞은 시선을 들이대곤 한다. 굳이 김정민의 영화를 독립영화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주류 독립영화의 경향과 그의 영화는 어떤 연결점이 없다. ‘똑같은 고민, 지배적인 정서, 하나의 목소리’가 반복되는 독립영화와도 거리가 먼, 김정민의 영화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발견된다. 만듦새에서 부족할지 몰라도 나는 그의 개성을 찬양한다. 게다가 그는 한 해에 최소 다섯 편 정도의 영화를 쏟아낸다. 그건 열정의 다른 얼굴이다. 아무도 안 봐주는데 이렇게 미치도록 영화를 만들어내는 열정, 무기력한 영화들 사이에서 그 에너지가 어찌 각별하지 않겠나. 둘, 김정민의 집을 찾아서. 몇 개월 전, 어찌어찌 <감자>와 <긴 밤>을 본 뒤로 나는 김정민이란 감독에 대해 호기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엔 그가 그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우연히 지인이 그를 한 영화제에 초대했다는 걸 알게 돼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다. 짐작했듯이 영화와 별로 상관없는 학교를 나와 주변 사람들을 모아 영화를 찍는다고 했다. 진짜 발견은 유튜브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그는 ‘정민김’이란 집을 지어 그와 친구들이 찍어온 영화 전부를 공개해 두었다(<감자>와 <긴 밤>은 판권이 팔린 건지 제외됐다). 유튜브의 거대한 세계에서 김정민이란 이름으로 집을 지었다간 검색해도 쉬 찾기 힘들 텐데, 정민김으로 검색하면 그가 세운 영화의 집이 바로 뜬다. 동영상 항목을 누르면 스물다섯 편이 넘는 영화와 영상이 쭉 나열된다. 보통은 영화 속 이미지 하나를 따서 영화를 소개하기 마련인데, 김정민은 영화와 어울릴 만한 이미지를 따로 구해 썸네일을 만들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아주 예쁜 디자인 하우스의 홈페이지 같은 인상을 준다. 듣기로, 심리학을 전공한 서른 청년이라는데, 예쁘게 세워놓은 유튜브의 집과 과감하고 와일드한 영화 중 그의 본디 모습이 어디에 가까울지 마구 궁금해진다.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김정민은 필름과 거리가 먼 세대다. 그가 열 살을 지날 즈음 세상의 영화는 디지털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러니 극장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보는 행위가 그에게 익숙하다면 거짓말이다. 당연히 그즈음 영화 매체는 디지털을 화두로 삼아 영화의 미래를 논의했다. 초기에 디지털로 찍은 초기의 박철수의 영화에 대고 비판했던 글들이 기억난다. 그 영화는 디지털의 자세로 찍지 못했다고 뭇매를 맞았다. 대상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느니, 카메라의 움직임이 필름의 그것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느니, 그 영화는 그런 비판을 들어야 했다. 지금 그 평자들이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들이 짧은 시선으로 예상하고 그렸던 디지털 영화가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영화 산업이 디지털로 재편된 현재, 대다수의 영화는 그들이 말했던 영화와 전혀 딴판이다. 적어도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밋밋하고 시시해졌다. 극장에 걸리는 대중영화 사이에서 독특한 이미지를 발견하는 건 필름 시대와 비교해 더 힘들어졌다. 필름에서 벗어나 뭔가 혁명적인 이미지가 나올 거라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가, 디지털은 그냥 ‘표준화된 컬러와 이미지’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시대로 발전했다. 앞서 말했듯이 김정민은 필름 시대의 영화감독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고전적인 필름 시대의 영화와 뮤직비디오 같은 비디오 시대의 이미지 사이에 위치한다. 필름 영화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만, 동시대의 디지털로 영화를 만드는 데 별로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 같지 않다. 필름의 질감을 흉내 낸 영화도 만들고, 다수의 독립영화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디지털 질감의 영화도 만들면서 그는 어느덧 김정민스러운 디지털 영화를 하나씩 내놓는 중이다. 물론 내가 본 그것들이 최후의 완성된 형태는 아닐 것이다. 김정민스러운 컬러를 보여준다고 해서, 김정민스러운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해서, 김정민스러운 간략한 편집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게 김정민의 디지털 영화다, 라고 말할 생각은 아직 없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고작 4년에서 5년 정도 영화를 만들어온 초보 작가일 따름이다. 무어 그리 대단한 영화를 만들었겠나. 그렇다면 인터넷, 유튜브에 있는 집을 찾아가면서까지 김정민이란 감독의 영화에 왜 호기심을 보이는지 나는 설명해야만 한다. 대답은 그가 영화를 생산하고 관객과 만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포지션을 영화감독이라는 데 두고 있으며, 그 직업에 맞게 꾸준히 영화를 찍는 게 자신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렇게 영화를 찍다 경지에 오르면 다행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영화감독이 영화만 찍다 죽었다고 해서 욕을 들을 일은 없다. 코로나 시대에 영화와 극장의 운명을 두고 여러 예측이 오간다. 흥미로운 말씀도 있고 별것도 아닌 걸 대단한 양 예언한 글도 읽었다. 지금은 습관이 변하는 시간이다. 그게 언제 어떻게 문화를 형성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문화가 형성되리라는 것뿐이다. 관객의 수가 줄어든 것을, 극장이 문을 닫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거꾸로, 우리가 그동안 너무 많은 영화를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마을마다 극장이 들어선 것이, 골목마다 들어선 교회만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의 영화 과소비가 극장을 편의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에도 김정민은 멈추지 않고 영화를 찍는다. 아마 이런 시기를 반영한 영화를 찍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는 <다큐멘터리: 일렉트릭 러브>라는 괴상한 영화를 만들었고, 그걸 유튜브의 자기 집에 선물처럼 올려두었다. 향후 영화와 영화 문화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내겐 김정민 같은 감독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으로 족하다. 평범한 감독이 만든 아무 감흥 없는 영화 열 편보다, 내가 사랑하는 감독의 영화 한 편 한 편이 더 소중하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김정민은 그렇게 만든 영화들로 자기 집을 만든다. 그게 꼭 극장이 아닌들 무슨 상관인가.
박홍민 은 지금까지 세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내용은 단순하다. 그는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나 멜로드라마를 주로 다룬다. 신작 < 그대 너머에 >도 다르지 않다. 영화 두 편을 찍고 멈춘 상태인 감독 경호가 지연이란 이름의 젊은 여성과 만난다(박홍민의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항상 지연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이름이 인숙이라고 밝힌 뒤 경호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지 묻는다. 놀라 과거를 부정한 경호는 지연의 뒤를 몰래 따라가 인숙과 20년 만에 재회한다. 도입부의 줄거리만 들어도 <그대 너머에>에서 < 물고기 >(2011)와 < 혼자 >(2016)의 세계가 반복되고 있는 건 맞다. 영화 속에서 반복을 즐기는 스타일은 영화와 영화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박홍민은 ‘죽음, 귀신, 령, 꿈, 기억, 인연, 불안, 무의식’의 세계에서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그대 너머에>를 연작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전작들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혼자>처럼 공간의 구성에 신경 쓰는 법이 여전한 가운데, 카메라가 훨씬 매끄러워진 점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경호가 지연을 따라 놀이터에 도착해 벌어지는 장면이 그러하다. 아마도 경호가 숨어서 바라볼 동안, 지연과 인숙이 대화를 나눈다. 얼핏 보기에 인숙의 시점 아래 지연이 놓인 것 같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지연의 시선이 살짝 어긋나 있어서 흡사 그녀가 사시(斜視)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참을 그러다 지연이 자리를 바꾸어 인숙 쪽으로 다가가면, 카메라는 180도로 시선을 돌려 그네에 앉은 두 인물을 포착한다. 문득 인숙이 “나무가 참 앙상하다”라고 말하면 카메라가 그 의도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려 앙상한 겨울 나무와, 그 곁에서 해에 걸린 또 다른 마른 나무를 마저 붙든다. 그 나무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지연이 원래 앉았던 벤치 위로 인숙과 지연이 나란히 앉아 있다. 그들은 언제 맞은편으로 옮긴 것일까. 사소하지만 복잡한 배려가 깊이 밴 이 시퀀스는, 집으로 가는 지연을 인숙의 등 뒤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 인숙의 주관적 시선 아래 전개될 것 같던 시퀀스가 인숙의 시선을 가장하는 척하면서 마치는 거다. 이 시퀀스의 카메라 움직임은 사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경호와 지연이 만나는 시퀀스의 그것을 변주한 것이다. 아무리 반복을 즐기는 박홍민이라고 하더라도 왜 그가 굳이 어려운 방식으로 미장셴을 구축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매끄러우나 의미는 더 모호해지는 이러한 방식에 대한 답을 구하자면 1시간 정도 영화를 더 보아야 한다. <혼자>의 주인공 수민이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감독인 것처럼, 경호가 두 편의 영화를 찍은 감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창작자로서 경호는 감독 박홍민과 좀 더 결부된 인물이다. 그는 의식의 물화에 매진하는 박홍민을 닮았다. 그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지하층의 어두운 방에 앉아 그는 세 번째 영화의 바탕이 될 시나리오를 쓴다. 그런데 그가 쓰는 시나리오의 내용은 지연이 전달해준 이야기 그대로다. 그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노트북에 적혀 있는 이야기가 과연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확실하지 않다. 심지어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노트북은 자동 피아노처럼 그가 할 말과 행동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문자로 연주한다. 경호는 인숙이 쓴 수천 장의 노트에 기록된 인물일까? 사정은 인숙이나 지연도 비슷하다. 지연은 자기가 글 속의 인물인지 애초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인지 스스로 질문한다.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미치도록 써 글로 남기는 인숙은 기억이 흐릿해질 때마다 자신과 경호, 자신과 지연의 관계를 의심한다. 경호, 인숙, 지연의 사정은 기실 박홍민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게 적용된다. 박홍민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자신이 유령이 아닌지 반복해서 묻는다. 그 질문은 자기 실존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골목에서 지연이 경호에게 하는 말은 ‘유령 선언’이다. “어차피 어딜 가더라도 아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경호는 자기가 실존한다는 증거를 자기 시나리오 안에서 찾으려 한다. 그는 인숙이 지어놓은 의식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를 문자 그대로 시도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연이 하는 방식을 따라, 그는 자기 머리를 인숙의 머릿속으로 세게 밀어 넣는다. 머리를 쥐어 잡으며 일어난 그는 인숙의 집, 즉 인숙의 의식을 방문하고, 인숙 또한 의식의 입구에 달린 문을 열어 그를 받아들인다. 상황을 다시 정리하면 이러하다. 인숙의 의식 세계라 할 집 안에서 경호와 인숙이 만나 이야기를 나눌 동안, 인숙이 종종 낯선 존재로 인식하는 지연은 문밖을 지키고 섰다. 그런 까닭에 인숙의 집에 걸린 액자에서 지연의 자리는 지워져 있다. 경호와 대화를 나누던 인숙은 어느 순간 기억이 흐릿해지자 기억을 정리해둔 수천, 수만 장의 노트의 바다 위에서 거칠게 몸부림친다. 집 곳곳에 가득 쌓인 노트 곁에서, 지연은 물론 경호와 인숙은 그들의 유령성을 재확인할 따름이다.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공간은 쓰라린 고통과 함께 허구의 세계임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유령성을 확인하는 순간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내 의식을 건드리는 건 어떤 비디오에 녹화된 이미지다. 경호는 인숙의 방에서 오래전에 자신이 찍어둔 비디오 테잎을 발견한다. 경호와 인숙이 비디오를 보면서 대화를 나눈다. 개미 한 마리가 나무 위로 기어가는 중이다. 개미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을 나누다 인숙이 “카메라를 움직여 봐봐, 아래로, 아래로”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카메라가 시선을 땅 쪽으로 이동해 모래 위를 걷는 또 다른 개미를 바라본다. 이건 좀 이상한 상황이다. 보통 비디오를 보다 이동을 요구할 때, 그 이동은 시간의 순서상 앞이나 뒤를 의미한다. 그런데 인숙이 비디오에 찍힌 공간 내에서 아래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자,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카메라는 그 요구를 따른다. 비디오에 찍힌 이미지는 고정되기 마련인데, 인숙의 기억 속 주문에 맞춰 경호가 과거에 찍어놓은 이미지가 자유자재로 새로운 이미지를 추가한다. 고정되었던 이미지 내부에서 인숙의 기억이 요구하는 대로 새 이미지를 꾸미게 되고, 기억을 더듬던 인숙의 손으로 옮겨 간 카메라는 20년 전의 경호의 모습을 되살려낸다. 시간을 당기고 늘여서 그 사이로 무언가를 삽입이라도 하겠다는 투다. 게다가 카메라를 인숙에게 넘겨주는 건 경호의 손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게 기억의 손이란 말인가. 이어 인숙의 기억이 사라질수록 경호의 이미지도 흐릿해진다. 남은 건 이미지뿐인 이 세계에서, 인물의 부유하는 의식 속에서 유일하게 실존하는(혹은 실존을 돕는) 건 카메라다. <혼자>와 비교해 더욱 풍성해진 박홍민의 ‘골목 오디세이’는 ‘98분 44초부터 102분 25초’에서 폭발한다. 이 장면은 <혼자>의 ‘47분 56초부터 56분 28초’ 사이에 전개되는 지옥의 골목 신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혼자>에서 아무리 걸어도 골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민을 카메라가 어김없이 잡아내던 것처럼, <그대 너머에>의 카메라는 골목 사이로 잠긴 인숙을 기어이 끄집어낸다. 박홍민의 세계가 구저분해 보이는 건 주요 공간이 가난한 동네의 골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홍민은 골목과 집의 집합이 꾸며낸 이미지가 중세 도시의 그것이라도 되는 양 다룬다. 골목은 중세의 여명이 깃든 전근대의 공간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카메라는 앞서 인숙과 지연이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 두었다 하나의 이미지 - 골목으로 재현한다. 놀이터에서 인숙은 옆에 앉은 지연이 낯선 인물인 것처럼 예전 기억을 전했다. “꿈이랑 똑같이 딸을 잃어버린 날, 온 동네를 찾아 헤매다가 내가 혹시나 하고 집에 가봤는데 지연이가 울면서 마루에 앉아 있더라고요” 221초에 걸쳐 인숙은 지연의 이름을 부르며 골목 사이를 돌아다닌다. 골목은 공간 전체를 미로처럼 연결하지만, 정작 그것을 잇는 자기 모습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길이다. <혼자>에서 수민이 지연에게 말하기를, 골목은 머릿속, 뇌 안에 있는 주름 같다고 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고요한 마을의 서쪽 모퉁이 집에서 나온 인숙은 골목 사이를 돌고 돌아 동쪽 아래 어귀로 불쑥 등장한다. 경호의 비디오가 인숙의 기억을 물질로 바꿔놓은 것처럼, 221초의 여정은 인숙이 딸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물화한다. 나는 그 221초의 이미지를 올해의 장면이라 부를 것이다. 90년대 이후 대중영화에서 골목은 주요한 공간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미로로서의 골목과 가난한 멜로드라마라는 점에서 나는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의 도입부를 기억했다. 택시 기사가 된 주석(안성기 분)이 오래전 헤어진 검은 장갑(김보연 분)을 알아보고 뒤를 쫓는다. 그런데 검은 장갑을 뒤따르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철거민들이 모여 사는 작은 동네에 불과한데,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은 좁으면서 끝이 안 날 것 같은 미로에 다름이 없다. 갖가지 짐을 이고 든 검은 장갑은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카메라는 신비하고 매력적인 물체에 매혹된 듯이 그녀의 뒤를 따른다. 영화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나는 박홍민의 골목 멜로드라마가 <꼬방동네 사람들>의 21세기 버전처럼 보인다. 하층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요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골목에서 건져낸 멜로드라마. 범죄의 일기였던 전편에 비해 다소 따뜻해지긴 했으나, 박홍민의 멜로드라마는 우울하다. 노스탤지어를 제거했을 때 장르 영화는 얼마나 잔혹해지는가, 그게 박홍민이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무릇 현실은 실존을 넘어선다. 영화를 완성하고 죽은 감독은 다시 유령이 되어 인적이 드문 충무로의 극장 주변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