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린다
- 감독
- 이운실, 제니, 하은순
- 제작년도
- 2010
주상숙은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도 되는 걸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명의 브라질 영화를 원작으로 한 < 정직한 후보 >( 장유정 , 2019)는 기막힌 설정 한 줄이 큰 몫을 하는 영화다. 늘 거짓말을 하던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하게 되면서 겪는 해프닝이 핵심 요소다. 이런 설정이 재미있는 건, 정치인은 무릇 청렴한 공직자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도) 그렇지 않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단단하게 형성돼 있어서다. <정직한 후보>는 이런 사회적 인식을 가볍게 흔들어 코미디를 만든다. 하지만 참신한 설정에 기대는 서사일수록, 마무리가 중요한 법. 그런 맥락에서 <정직한 후보>의 ‘국민뻥쟁이’ 국회의원 주상숙이 ‘진실의 주둥이’를 얻게 된 후가 더 궁금했다. 먼저 짚고 갈 게 있다. 주상숙은 ‘뻥쟁이’ 시절부터 막나가는 진실 폭탄 발언을 할 때까지 한 번도 관객의 호감을 잃지 않는다. 주식 내부 거래, 사학재단 비리, 자녀 군입대 비리 등 ‘비리 3종 세트’를 시원하게 저지르는 데도 말이다. 이는 장유정 감독과 그가 주인공 성별까지 바꾸며 캐스팅한 배우 라미란 의 눈부신 컬라버레이션 덕분이다. 대중 영화의 주인공으로 잃으면 안 될 호감도와 가벼운 현실 풍자를 모두 잡아낸, 흔치 않은 성과다. 극중 주상숙은 거짓말을 못하게 된 후엔 노련한 선거전략가 이운학( 송영창 )을 기용해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하지만 밉지 않은 주상숙에게 용서할 수 없는 치부가 있다. 이미지 전략으로도 커버할 수 없어 이운학이 주상숙을 배신하게 되는 큰 문제다. 그건 주상숙이 살아 있는 할머니 김옥희( 나문희) 를 두고 ‘운명을 달리했다’고 공론화해 동정표를 얻은 과거다. 김옥희는 호적상으론 사망해, 숨어 살고 있다. 김옥희 건은 이 영화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갈피다. 절대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을 해버린 정치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극은 주인공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를 처벌할 것인가, 눈감아 줄 것인가. 여기엔 이 영화가 지닌 윤리적 결정이 있다. <정직한 후보>가 내놓은 답은 적당한 절충안이다. 정면 돌파는 하지 않으면서, 주상숙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한다. ‘데우스엑스마키나’처럼 김옥희는 이 중대한 거짓말이 탄로 나기 직전 적절한 시점에 사망하고, 주상숙은 정치를 포기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우연한 결과로 그녀의 ‘자폭’ 결정은 그녀 외의 많은 비리 정치인을 무더기로 고발하게 된다. 이후 주상숙은 죄값을 받고 가난하지만 선량한 정치인으로 거듭난다. 종합하면 극 중 세상사람들은 그녀가 멀쩡한 할머니를 죽었다고 한 거짓말은 끝내 모른 채로 영화가 끝난다. 이렇게 해결하지 못(안)할 결정적 악행을 왜 애당초 만든 것일까. 결말부엔 예전에 부패한 주상숙을 맹공격하던 젊은 정치인 신지선( 조수향 )이 과거 주상숙처럼 변한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은 순수한 정치인조차 변할 수 밖에 없는 정계 현실을 풍자한다. 누구도 다르지 않은 현실. 그 누구도 깨끗할 수 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렇게 닳고 닳아버린 신지선에 비해 개과천선한 주상숙은 좀 더 괜찮은 인물로 비춰진다. <정직한 후보>는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적당히 부패했지만 자기 과오를 뉘우치는 주상숙을 끊임없이 끌어안는 영화다 (결국 주상숙은 서울시장에 도전한다). 이 세계엔 냉정한 심판자가 없다. 돌아보면 최근 한국 상업 영화와 드라마에서 악한 주인공을 단죄하지 않는 경향이 여럿 보인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용두사미’라는 평을 들으며 매듭지은 것도 비슷하다. 거짓말로 다른 이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았던 한서진( 염정아 )은 마지막에 자기 잘못을 스스로 깨닫기만 할 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창작자도, 배우도, 관객도 나쁜 짓을 해온 주인공과 친밀해져 어느새 단죄하지 못하는 현상. 이런 서사적 경향의 기저에는 친소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보류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것일까.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결말을 보면 악한 주인공을 매력있게 그리면서도 창작자가 주인공에게 갖는 단호한 윤리적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직한 후보>의 유쾌하고 밝은 연출에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반문했다. “그래서, 살아 계시던 자기 할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한 정치인이 영원히 그걸 숨긴 채 적당히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서울시장에 도전한다고?”
서양화가 청구(靑駒) 이마동(1906-1981)은 1932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 1933년 7월부터 동아일보에 출근했다. 미술 분야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지만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것이 그의 주 업무였다. 그러던 1935년 여름, 이마동은 서울 시내 곳곳을 직접 돌아보고 풍경을 스케치해 '서울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1회부터 4회까지는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바라본 서울을 스케치했다. 옥상을 내려와 그린 다섯 번째 서울풍경은 종로 네거리였는데 "종로의 옛 기억을 환기시키는 현존한 유일의 기념물"이자 "침묵의 종(鐘)으로서 이 서울의 몸부림을 응시" 1 하는 보신각을 스케치했다. 그다음 연재에서는 "점쟁이, 관상쟁이, 천냥만냥꾼들이 긴긴 여름날에도 해 기우는 줄 모르고 권태에 찌들은 푸념을 허구한 세월을 두고 하고 있는" 2 탑동공원(파고다공원)을, 이어서 7회차에서는 동관 네거리 풍경을 스케치했다. 이 동관 네거리 스케치에는 다음과 같은 경안(耿岸) 서항석의 감상이 덧붙여져 있다.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는 이른바 ‘대경성(大京城)’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그때, 도시 생활자의 머릿속에서 경성은 이미 ‘대경성’이 돼 있는 듯 하다. 서울이 변하여 대경성(大京城)이 되고 대경성이 나눠져 남촌(南村), 북촌(北村)이 된 오늘 북촌의 번화처(繁華處)로는 종로 네거리가 첫째요, 거기 따르려는 것이 동관 네거리다. 십자로에 가로는 전차, 세로는 버스, 제법 교통도 빈번한 편이다. 그러나 여기는 종로 네거리와는 딴 냄새가 있다. 북향하여 바라보면 좌편으로는 명월관을 앞세우고 돈의동 일대의 색주가굴이 유위(有爲)한 청년의 고혈을 기다리고 있고, 우편으로는 단성사가 신장(新粧)을 말쑥이 하고 나앉아 외국영화 봉절관은 나뿐이오, 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저 혼자 바쁘다. 말하자면 여기가 북촌의 환락경(歡樂境)이다. 저기 서있는 망대야. 너는 서울을 화재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이 언저리에서 심연에 빠지는 자들을 또한 감시해 주어야하겠다. 아차, 내가 발 앞을 보고 잔소리하기에 저기 어마어마한 돈화문이 그 옛날을 잊은 듯이 입을 닫힌 채 말없이 서있는 그 심정을 모른 체 했구나. 3 동아일보 사옥에서 시작하여 종로의 보신각과 탑동공원을 지나 동관 네거리까지, 이마동의 북촌 스케치들은 오늘날 독자들의 눈에 그저 고요하고 적막하게 보인다. ‘작은 도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제국의 화려한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남촌에 비해, 조선인들의 북촌 거리는 소박하다. 근대 건축물이 들어서고, 전봇대가 늘어서고, 전차와 버스가 다니는 풍경 속에 조선왕조의 건축물이 조용히 서 있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이마동의 스케치에 글을 보탠 동아일보 기자들의 감상에는 북촌 거리가 ‘번화한 풍경’으로 공들여 서술되지만, 종로 네거리 다음으로 북촌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동관 네거리가 서항석은 오히려 맘에 들지 않는 듯하다. 요릿집과 색주가와 극장으로 시끄럽고 요란한 이 뒷골목의 ‘환락경’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조차 ‘심연(深淵)’에 들게 하는 것이다. 그때 서항석의 시선이 자연스레 향한 대로, 동관 네거리에는 돈화문(창덕궁 정문)이 지키고 서있다. 보신각이 자리 잡은 종로 네거리처럼, 돈화문이 자리한 동관 네거리 역시 민족이라는 정체성 집단과 조선인을 매개하는 ‘기억의 터’임을, 서항석은 대경성 사업으로 한창 소란스러운 와중에 한번쯤 되새겨보았을지 모른다. 이마동이 스케치한 연작의 제목이 환기시키는 것은 그러한 기억의 장소들, ‘경성’과는 다른 ‘서울’의 풍경이었으리라. 다시 말해 이마동의 「서울풍경」은 도시 개발과 근대화가 진행되던 당시의 '경성'을 스케치의 여백 너머에서 읽게끔 두고, 현재 발 딛고 생활하고 있는 '서울'을 기억이 공간화되는 장소로 바꿔놓는다. 신축한 3층 건물에 RCA 발성영화 영사기를 들여놓고 토키라는 시대적 변화에 드디어 발을 맞춰가기 시작한 단성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남촌에 화려한 외관의 명치좌와 약초극장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외국영화 봉절권은 나뿐이오"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관객들은 더 좋은 설비와 안락한 편의시설을 갖춘 극장에서 최신의 명화를 감상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토키 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극장'이라는 구획은 이전만큼의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채권자와의 분쟁으로 이미 안팎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단성사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외국영화 필름 임대료가 폭등하자 신작 상영도 힘들어졌다. 일본의 배급 체인과 손잡지 못한 채 필름 수급에 난항을 거듭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바쁘다는 서항석의 비아냥은 차라리 그리운 것이 된다. 사진1. 토키 극장으로 개축한 단성사 출처: 『조선과 건축』 1935년 2월호 사진2. 남촌에 신축 개장한 명치좌 출처: 『조선과 건축』 1936년 12월호 조선극장이 화재로 전소(1936)된 이래 북촌 유일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는, 결국 1939년 명치좌 관주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인수된다. 쇼치쿠 체인의 제2봉절관으로서 '대륙극장'이라는 새 이름과 함께 30여 년의 단성사 역사도 시대의 저편으로 기울어 간다. 제 기능을 잃은 보신각과 돈화문을 보며 조선왕조를 떠올리듯, 대륙극장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북촌의 밤을 지키는 단성사도 누군가에게 '기억의 터'가 되었으리라. 1)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5)」《동아일보》 1935년 7월 2일자, 석간 3면 2)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6)」《동아일보》 1935년 7월 7일자, 석간 3면 3) 이마동 그림·경안 서항석 글,「서울풍경 (7)」《동아일보》 1935년 7월 9일자, 석간 3면 상단 그림 1. 동관 네거리 출처: 이마동, 「서울 풍경」 연작 중에서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백암동인(白岩洞人),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비판』1938년 10월호, 74~76쪽. 지금이나 조금 오래 전이나 사십만 부민 때나 칠십만 부민 때나 경성의 소위 북촌에 극장이라는 것은 늘은 것은 없고 오히려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이면 기생퇴물 같이 얼굴이 시퍼러둥둥한 헌 건물의 우미관과 싸움투성이의 단성사라는 것이 있고, 조선의 흥행극장이나마라도 기업적으로 연극단체를 조직해놓고 통제적으로 극장을 경영하는 동양극장이 새 깃발을 들고 나온 것뿐이다. 우리들이 무엇이나 지나간 것을 너무 캐고 비판한들 돌아오는 그 문제만큼은 신통할 것 없으니 조선극장, 단성사에 대해서는 현재가 너무 비참하니 윤곽만 잠시 말하고 동양극장에 대하여 아는 데까지 써보기로 하자. 조선극장이 처음 세워지기는 현재 불탄 자욱만 남은 인사정 [필자 주: 仁寺町, 인사동] 인데 내지인 조천(早川)이란 사람이 세워놓고 얼마하다 이태진(李泰鎭)에게 넘어가고 그 후 김찬영에게 그리고 현재 제일극장의 관주인 미나토(ミナト)에게 팔려 넘겼었는데, 물론 그 사이에 현철, 신용희, 김조성 등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추잡한 문제를 일으킨 적도 많고 또 어느 때는 양화(洋畫) 제일봉절(第一封切)로 경성에서 내로라 하고 행세한 적도 있었으나 그나마라도 지금 극장이나 있고 무엇을 한다면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문제라도 붙여보겠으나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느니만큼 가정적으로도 불행한 일청년(一靑年)의 성냥불 장난으로 다 타버리고 땅덩어리만 남아 겨울에는 가련하게도 스케이트 장, 그렇지 않으면 시골로 다니는 곡마단 부스러기가 와서 지나가는 행인의 고개를 기웃거리게 할 뿐이요, 우미관이래야 5전 입장료를 받을 때를 최고로 지금은 경성 내에서 제일 더러운 집으로 소위 “겡가도리" [필자 주: 喧嘩どり, 싸움꾼이라는 의미] 의 소굴이던 우미관패의 잔해가 그저 남아있는 것 같고, 제일극장이래야 그 역 우미관류이며, 오직 북촌에서 문제되어 때로는 서로 경영상 혹은 영업상으로 경쟁도 하고 흥행방식을 때때로 꾀하는 것도 결국 동양극장과 단성사뿐이다. 단성사라면 조선사람의 머리에는 아직까지도 머리에 인상이 깊은 것은 고(故) 박승필 씨가 처음 시작해서 중간에 그 분이 돌아가고 박정현 씨가 맡아 하게 되고 그 후의 여러 가지 추문, 소문 등이 많았어도 경영체는 늘 박씨의 일파에서 해온 것으로 북촌에서 조선사람의 극장 경영은 오직 이 하나뿐이었고, 무성영화 시대의 조선영화는 거의 다 단성사에서 봉절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극장을 신축하고 최신 RCA 영사기를 배치하여 한때는 전 경성(全京城)의 양화 봉절관으로 수위를 점령했던 것도 지금에는 옛 꿈, 갖은 비화(悲話), 애화(哀話)만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단성사가 오늘날 이렇게 쇠퇴하게 된 제일의 원인은 물론 가급적 현대적 설비를 해놓은 명치좌, 약초극장 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2류 극장으로 아니 떨어질 수 없었지만, 결국 단성사를 오늘날 비경(悲境)에 빠지게 한 것은 신무대 때문이요, 지엽적으로 조그마한 문제를 든다면 내부의 추잡한 문제를 들 수 있으나, 그것은 그만두고라도 단성사를 신축할 때에 그 설계의 빈약함을 지금 또 탓을 아니 할 수 없다. 일지사변 [필자 주:日支事變, 중일전쟁] 이 나기 전까지도 조선극장이 그 뒤터를 더 사서 늘여서 크게 지려다가 옆집에서 땅을 아니 파니까 할 수 없이 그냥 그 터로 4계(階)로 짓는다고 했고 구(舊) 종로서 터에 모(某)가 극장을 짓는다는 둥 또는 공평정 [필자 주:公平町, 공평동] 공설시장 비스듬히 건너편 광장에 내지(內地)의 재벌이 나와 극장을 짓는다는 소문의 소문이 돌아다녔으나 북지(北支)의 총소리 한방으로 그런 말은 꼬리를 없애버리고 오직 현재는 숨넘어가는 어린애와 같은 운명에 있는 단성사와 조선 흥행극계에 무적함대와 같이 돌진해가는 동양극장이 있을 뿐이다. 동양극장이 처음 개관식을 하기는 소화(昭和) 10년 가을인 모양인데 지금은 고인이 된 홍순언 씨가 극장 명의 관계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씨와 형식상으로 손을 잡고 실상의 극장의 경영은 한때 조선문단에 너무나 거탄적 존재이며 신문연재소설의 왕좌격이던 최독견 씨를 지배인으로 맞아들인 홍순언 씨의 두뇌의 명석함을 가히 짐작할 바니, 최독견 씨가 동양극장의 모든 일을 맡아가지고 오늘날까지 일하여 왔는데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연극은 기업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조선에서 뚜렷이 보여준 이가 최씨이며 배우들도 연극으로 생활을 안정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넣어준 것도 최씨이니 현재 동극 [필자 주: 東劇, 동양극장의 줄임말] 에서 매월 월급을 먹고 있는 사람이 이백여 명이요, 배우들도 전부 매월 최저 사십오 원에서 최고 백여 원의 월급을 받고들 있다. 동극이 처음 탄생할 때에 큰 공로를 한 분이 현재 동극 문예부에 있는 이운방 씨인데, 그 분의 알선으로 청춘좌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그의 멤버는 대개 토월회의 후신이라고 할 만한 송영, 서월영, 박제행 씨 등이 중요한 멤버이었다. 이 청춘좌는 주로 동양극장에서 경성 손님을 상대로 하려고 조직한 것이니 그 다음 지방순회극단을 조직하여야 하겠으므로 동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시험으로 조선에서도 손님을 웃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을 조직해보겠다는 것이 주점(主點)으로 희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해서 수차 흥행을 하여보았으나 아직 조선에서는 일러(그렇다면 오늘의 조선의 연극팬은 눈물을 즐겨하는 모양이다.) 결국 실패하고 동극좌와 희극좌와 합병을 시킨 것이 결국은 금일의 호화선이라는 것인 게, 결국 동양극장의 달러 상(箱)은 청춘좌이다. 그러면 오늘날 연극을 궤도에 잡아 올리고 통제와 기업적 조직 아래에서 연극흥행을 해나가며 배우의 이상과 출세의 길을 열어준 것이 오늘의 동양극장이라면 그것을 운전해온 사람이 즉 최독견 씨이다. 조선의 연극흥행에 있어서 그의 공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금년 봄에 들어가 동양극장에서는 이중흥행을 하여 낮에는 영화를 2회 상영하고 야간에만 평상대로 연극을 상연하는데 이것이야 재래의 연극 주야 2회 상연으로 인한 배우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로에 완전히 구해냈다고 볼 수 있으며, 극장 경영상이나 연극의 질적 향상이나 사회적 문제로 보더라도 배우들의 보건을 위하여 크게 기뻐할 바다. 그런데 그 극장의 설계가 얼뜬 보기에는 객석을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으나 실은 무대에 돈을 더 들이고 연구를 하여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회전무대라는 것을 만들어왔다. 이렇게 비약과 진전이 있는 데는 물론 여러 가지의 문제가 없을 수 없어, 혹은 청춘좌의 일부 배우가 탈퇴를 하여 중앙무대라는 것을 조직해서 중간극이니 무엇이니 해봤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금년 5월 1일 동양극장은 여러 가지 풍문 속에서 극계의 성공아 최독견 씨의 손에 경영일체가 넘어가고 말았다. 과거의 동양극장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현재의 동극의 전권을 장악한 최씨의 수완을 크게 기대하여도 좋을 것이나 벌써 들리는 말에는 조선영화 배급계의 오소리티 [authority] 인 이창용 씨와 같이 경성촬영소를 매수하여 조선영화제작도 한다 하니 불행과 비운만 거듭하던 조선흥행계에서 기린아 최독견 씨의 앞날의 원대한 성공을 빌며 붓을 놓는다.
해방공간의 영화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감격에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직접 그린 태극기가 방방곡곡에 물결쳤다. 조선의 영화인들 역시 그 기쁨을 함께했는데, 직접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 해방의 감동을 기록하는 것으로 응답한다. 물론 그들은 일제강점기 말 유일한 영화사이자 국책영화사였던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소속이었고, 카메라 역시 ‘법인 조영’의 광희동 촬영소 창고에서 꺼낸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영화인들이 기록한 영상들은 <해방뉴스> 시리즈로 공개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어지럽게 진행된 좌와 우의 갈등은 영화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법인 조영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영화건설 본부가 1945년 9월 24일 창립됐고, 11월 5일에는 좌익 영화인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결성됐다. 12월 6일에는 두 조직이 해산하며 합쳐진 조선영화동맹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은 영화인들의 좌우 분열과 통합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각 조직의 면면을 들여다본다면 인력과 기술을 더 중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는 영화 제작 환경의 특수성을 읽어낼 수 있다. 지도부 외 구성원들은 좌우익 이데올로기와 정확히 밀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친일 부역 문제나 좌우익 갈등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조선영화계의 생존 그 자체였다. 해방기 영화계의 상황은 미국영화의 범람과 조선영화의 위기로 요약된다. 1948년 4월 시점의 「서울신문」 기사에 의하면, 1945년 11월부터 1948년 3월까지 미국 극영화가 422편, 미국의 뉴스영화는 298편이 수입되었는데, 그중 극영화 400편, 뉴스 250편이 중앙영화배급사(CMPE)의 영화였다. 당시 일본 도쿄에서 온 ‘중배’의 조선사무소가 미군의 보호를 받고 있어 미군정 소속인지 알았다는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9대 영화사의 배급 대행 기관이었던 중배는 해방기 남한에서 미국이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의 첨병 역할을 했다. 같은 기간 조선 극영화는 17편에 불과했다. 해방 후 첫 극영화로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1946)이 개봉하고,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해방영화’로 인정받으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영화 제작의 기본이라 할 필름 구하기도 쉽지 않아 극영화 만들기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영화 장면을 활용하는 연쇄극이 다시 만들어지는가 하면, 16mm 필름에 변사를 써야 하는 무성영화들이 성행할 정도였다. 현재 필름이 보존되어 있는 영화 중에서, 16mm 발성으로 제작된 <청춘행로>(장황연, 1949), 16mm 무성으로 만들어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48)이 대표적이다. ‘예술영화’라는 지향과 ‘건국 프로파간다’라는 현실 영화 <해연>은 1947년 말 촬영을 시작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에 완성되었고,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영화로 인정받으며 11월 21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다. 당시 일본 오사카부의 재일조선인단체에서 수입을 진행한 덕분에, 국내에서는 사라진 필름이 2014년 9월 고베영화자료관에서 발굴되었고, 개봉된 지 60년도 훌쩍 지난 시점인 2015년 7월에 다시 공개되었다. <해연>은 여러 의미에서 해방기 영화계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예술영화사는 동인제 성격의 영화사로 프로듀서 이철혁, 각본 이운룡 등 구성원 대부분이 연극 무대 출신이었다. 한편 촬영 현장은 김동규 등 배우들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로 감독 데뷔한 이규환이 연출을 맡았고, 촬영 양세웅, 녹음 이필우, 조명 고해진 등이 참가했다. 애초 <해연>의 감독을 맡기로 한 이는, 일본 도호영화사 출신으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법인 조영’의 전신)에서 국책영화 <우러르라 창공>(1943) 등을 연출한 김영화였다. “해방 후 3년간 자중하고 있던”(「예술영화」, 14쪽) 그가 과도정부 영화 과장으로 취임하면서 이규환이 대신 연출을 맡게 된 것이다. 식민지 조선영화 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규환은 <똘똘이의 모험>(1946. 09. 07. 개봉), <민족의 새벽>(1947. 04. 21. 개봉), <그들의 행복>(1947. 12. 02. 개봉)을 연이어 개봉하며 해방기 영화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일제 말기 법인 조영에 참가하지 못해 평택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하다 해방을 맞았는데, 이후의 활발한 활동 배경에는 일제 협력에 대한 부채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개인의 판단과 영화계의 일치된 평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해연>의 제작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점은, 예술영화사가 이 영화의 착수 시점과 완성 시점에 잡지 「예술영화」와 「해연」을 각각 발간했다는 점이다. 영화사의 명칭 그 자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들은 미국영화가 범람하고 ‘영화다운 영화’는 제작되지 못하는 해방기 상황에서, ‘예술영화’의 이론적 고찰과 실천을 모두 겨냥하며 잡지/영화를 동시에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이 오롯이 예술영화로만 수렴될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야 하는 바로 그때, 영화 역시 다른 매체들과 발맞춰 ‘건국 프로파간다’라는 노선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 <의사 안중근>(이구영, 1946), <윤봉길 의사>(윤봉춘, 1947) 등 일제강점기 애국지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경찰 조직의 후원을 받은 <밤의 태양>(박기채, 1948), <수우>(안종화, 1948) 등 ‘경찰영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계몽과 건국을 키워드로 한 ‘한국’영화의 등장은, 새로운 국가 만들기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몽타주와 할리우드 스타일의 공존 기본적으로 <해연>은 건국 도상의 조선 사회와 민중이 체현해야 할 가치들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혼란한 정국을 틈타 모리배 짓을 일삼는 철수(박학)와 헤어지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사명으로 감화원 선생을 맡기 위해 떠나는 정애(남미림)의 모습이 압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어 영화는 불량소년들을 모아 계도하는 감화원(실제 촬영은 부산 수영소년학교)을 배경으로 새로운 국민 만들기를 묘사한다. 그리고 계모 때문에 가출해 불량소년이 된 수길과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를 찾아온 정숙(조미령)이 남매처럼 가까워지는 것을 통해 대중을 위한 멜로드라마적 사건을 만들어낸다. 식민지 영화감독 이규환이 연출한 <해연>이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해방 이전 조선영화의 영화문법을 대표하는 소비에트 몽타주(Soviet Montage)와 해방 이후 미국화를 상징하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Classical Hollywood Cinema)의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전자는 감화원 실습지에서 원생들의 노동 장면을 통해 확인된다. 시나리오의 “괭이로 파는 소년, 삽으로 흙을 떠 던지는 소년들! / 박선생과 정애도 같이 일을 한다 / 정애의 고운 얼굴에 구슬 같은 땀방울! / 소년들의 합창소리! / 하늘에 나는 갈매기! / 멀리 반짝거리는 황금빛 바다물결!”이라는 문자는, 영화에서는 웅장한 남성합창단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선생들과 원생들이 황무지에서 곡괭이질하는 모습과 세찬 파도의 쇼트가 리듬감 있게 병치되는 것으로 영상화된다. 감독의 예술성과 국가 건설이라는 키워드가 몽타주 기법으로 만난 것이다. 한편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연속편집(continuity editing)이 영화 전반에 안정적으로 구사되고 있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다. 특히 고전 할리우드 방식의 ‘몽타주 시퀀스’ 기법을 활용해, 수길이 공중으로 핸드백을 던지는 쇼트에 바로 이어 빠른 음악과 함께 해방 후 대도시 서울의 타락한 풍경과 소매치기 소년으로 변해버린 수길의 모습이 속도감 있는 쇼트들로 배치되는 장면이 그렇다. 완성도를 별도로 하자면, 영화의 말미 떠나는 정숙과 따라가는 수길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할리우드 스타일의 교차편집을 이용한다. 이처럼 이규환은 이 영화가 처한 정치적 기반에 동의하면서 예술영화 운동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해연>은 예술영화를 지향하면서도 ‘건국 프로파간다’ 서사의 자장 속에 머무른다. 해방기에서 6·25전쟁기로 오리지널 영화음악을 사용한 것이 크게 평가 받는 등 <해연>이 개척한 예술성은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과 <푸른 언덕>(유동일, 1949) 등의 작품으로 이어졌고, 1948~49년 한국영화계는 매해 20편의 극영화를 내놓으며 제작 환경이 안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시련은 다시 닥쳐왔다. 6·25전쟁의 발발로 모든 영화 제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1·4 후퇴 이후 국방부 촬영대 등 군관의 기록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간다. 1952년 이후 피란도시 대구 등지에서는 <태양의 거리>(민경식, 1952) 같은 극영화도 제작되고 극장에서 개봉되어, 피란지 관객들이 전쟁의 아픔과 고단한 일상을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가 대중문화의 총아로 급부상하는 기반은 이때 마련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