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감독
- 이원세
- 제작년도
- 1984
- 출연
- 강석우, 이혜숙, 하재영, 비상구, 이치우, 최남현, 김복희, 신찬일, 박부양, 태일, 김수천, 문태선, 길달호, 최재호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성벽을 뚫고>의 육군 하사로 시작 1미터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황해(黃海)가 극장 화면에 처음 얼굴을 비친 것은 1949년 한형모 감독의 데뷔작 <성벽을 뚫고>(김보철프로덕션 제작)부터였다. 이 영화는 해방 후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육군 소위(이집길)인 처남과 공산주의자(권영팔)인 매부 사이에 벌어지는 이념의 갈등과 반목을 그린 것이다.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황해는 이 작품에 조연급인 육군 하사 역으로 출연했다. 남북 분단이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애를 담은 최초의 영화였다. [사진]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서의 황해 이렇게 영화계에 나왔으나 황해는 한동안 후속 출연작을 내지 못했다. 6.25전쟁과 연극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한 것은 ‘뚱뚱이 양훈’과 겨룬 코미디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이었다. 이후 <나는 고발한다>(김묵, 1959)를 비롯한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1959), <햇빛 쏟아지는 벌판>, (정창화, 1960),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폭력지대>(김묵, 1965),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 등 액션물과 <한많은 청춘>(권영순, 1958), <자장가>(하한수, 1958), <목포의 눈물>(하한수, 1958), <울지 마라 두 남매>(서석주, 1960),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 등 신파 멜로, <박서방>(강대진, 1960), <마부>(강대진, 1961) 등의 서민영화,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 <심봤다>(정진우, 1979) 등 문예영화에 출연했다. [사진] <자장가>(하한수, 1958)의 황해. 왼쪽은 배우 한미나(사진제공: 김종원) 황해가 <자장가> 유의 신파와 액션 연기에 강한 것은 일찍이 악극단 등에서 쌓은 15년 경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버라이어티 쇼적 재능과 과장된 표정연기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차츰 탈색돼 69년 <독짓는 늙은이>를 계기로 내적 연소의 연기양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단지>(이원세, 1975), <부초(浮草)>(이한욱, 1978)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장의 한계 극복한 무대 경험 황해는 1920년 3월 6일 동해의 푸른 물을 끼고 뒤쪽으로는 외금강 줄기가 뻗어나간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경동(京洞)에서 태어났다. 정어리 기름공장을 경영하는 전병근(全炳根)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 네 살 터울인 그에게 홍구(弘玖)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큰 아버지 댁에 보내 주교(舟橋)국민학교를 다니게 했다. 졸업 후 경신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년제인 경성상공업 기계과에 들어갔다. 졸업(1936년) 후에는 미쓰비시(三菱)백화점 식료품 점원을 거쳐 중앙우체국 집배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집배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변두리 로 나설 때면 무료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집배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함께 아버지가 하는 정어리 가공 일을 도왔다. [사진]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에서 황해와 윤정희 그런데 이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열여덟 살 되는 해 봄이었다. 서울의 성보(城寶)악극단이 전국순회 공연 중에 이 고장을 찾아온 것이다. 악극단은 관객동원의 수단으로 공연 첫날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는데, 홍구 청년도 참가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한 여단원이 소질이 있으니 서울에 가서 가수의 길을 걸어보라고 권했다. 그녀가 바로 ‘성보의 간판스타’인 가수 신 카나리아였다. 이에 용기를 얻어 성보악극단의 연구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 1천 2백여 명의 경쟁자 가운데 12명을 뽑는 성보악극단의 제1기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들어간 극단에서 처음 출연하게 된 것이 신 카나리아 주연의 <춘풍일가>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객석에 나와 다른 배우들이 하는 동작이나 대사, 표정을 관찰하고, 화장술을 익혔다. 그런 열성 탓인지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지방공연의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지방공연은 밤차에서 새우잠을 자는 등 고달픈 일이었지만 무대에 서기만 하면 신명이 났다. 이렇게 시작한 연극이 1938년부터 4년 동안 10여 편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 카나리아의 부군인 김화랑이 제일악극단을 조직하자 성보악극단을 떠났다. 2차세계대전으로 해초 가루로 만든 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그는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제일악극단에 머물렀다. 그런데 계속 조여 오는 징용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천진에 내리자 미리 와있던 신 카나리아, 박단마 등과 함께 손목인이 이끄는 신태양악극단에 입단했다. 백파진(白波進)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사진] <인간단지>(이원세, 1975)에서의 황해(사진제공: 김종원) 군예대원으로 아내와 평양까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그는 간절히 기다리던 귀국선에 오르게 된다. 인천항에 내린 그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황해 바다, 밟고 싶던 조국의 땅이 아닌가. 그는 “한국남자는 황해 바다처럼 넓고 거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던 한 광복군 노인의 충고를 떠올리며 예명을 다시 황해(黃海)로 바꾸었다. (황해, 「藝에 살다(13) 최초의 액션 스타(13)」,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7일자) 이렇게 3년 만에 서울 돈암동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신 카나리아 부부가 만든 새별악극단에 가담했다. 이 무렵 <자유만세>(1946)를 찍은 한형모(韓瀅模) 촬영기사가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 왔다. 이번에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로 ‘입봉’하게 되었는데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해는 이렇게 하고 싶었던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연극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새별악극단을 인수하고 전성기로 올려놓을 무렵 가수 백설희(白雪姬)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동거생활을 결행하였다.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살림을 꾸린지 15년 만인 1960년 서대문 밖 백련사(白蓮寺)에서였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며 아내와 함께 군예대(軍藝隊)에 들어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사진] <부초>(이한욱, 1978)에서의 황해와 윤세라(오른쪽)(사진제공: 김종원) 배우로서는 불리한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승부욕으로 관객 앞에 다가선 ‘작은 거인’ 황해는 1965년 장동휘, 허장강과 함께 동인프로덕션을 설립, 파월장병의 용맹상을 그린 <맹호작전>(1965)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2월 9일 슬하에 노래하는 배우 전영록을 남기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 꼬방동네 사람들 >은 1982년 5월 개봉하여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당해 흥행 4위에 오른 1) ,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에서 시작하여 < 우묵배미의 사랑 >( 장선우 , 1990)에 이르는, 노동자 개념으로 포괄되지 않는 소외계층을 포착한 1980년대 영화의 계보에 놓인다. (2) 그리고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이원세 , 1981), < 어둠의 자식들 >(이장호, 1981)과 함께 1980년대 초 도시 빈민을 다룬 ‘사회물’ 또는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 영화가 제작된 1980년대 초는 시민의 피를 밟고 집권한 신군부 정권이 민심을 달래기 위해 그 동안 규제되어 왔던 컬러TV방송을 허가하고, 스포츠와 문화 육성을 표방하는 등 선심성 정책을 편 시기다. 1970년대에 텔레비전 드라마 시대가 열리면서 불황에 빠진 영화산업은 컬러TV방송으로 인해 한층 더 수심이 깊어졌다. 그럼에도 분명히 1970년대와는 다른 시대의 기운이 저류하고 있었고, 박정희 정권기의 영화 검열 제도가 온존하는 가운데서도 영화계는 돌파구를 모색한다. 이때, 1960년대 중반 이후 이중검열 속에서, 용공 또는 외국에 보이기 부끄럽다는 이유로 금기시되었던 ‘가난’이 적극적으로 재현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6년부터 발이 묶였다가 4년 만에 활동을 재개하게 된 이장호 감독이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어둠의 자식들>로 그러한 작업을 시작했다. 배창호는 바로 이 두 영화의 조감독이었고, <어둠의 자식들>의 원안자였던 이동철(본명 이철용)이 <꼬방동네 사람들>의 원작자이기도 했다. 1970년대 수기 붐에 이어 1980년대 초에는 도시 빈민의 삶이 그 계층 출신의 생생한 증언으로 서술되는 책이 주목을 받는다. 1980년에 이동철이 구술하고 황석영이 정리하여 출판한 『어둠의 자식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이듬해에는 아예 이동철 작(作)으로 『꼬방동네 사람들』이 출간되는데 또 베스트셀러가 된다. 여세를 몰아 1982년에는 『오과부』가 출간되었고, 이는 < 과부춤 >(이장호, 1983)의 원작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그때까지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에 대중이 귀기울이고, 영화가 그것을 재현하는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당당하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짧은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원작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검은 장갑」을 각색한 것이다. ‘검은 장갑’은 손에 흉터가 있어서 검은 장갑을 끼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명숙이라는 기구한 여자의 이야기다. 원작에서는 어쩌다 보니 ‘두 서방’을 갖게 된 이 여자의 사연을 담담하고 간결하게 서술한다. 영화에서는 원작의 여러 일화 중 이 스토리를 전경화시켜 꼬방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후경에 펼쳐지는 가운데 주인공 명숙이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멜로드라마로 장편화했다. 명숙( 김보연 )은 십대에 김주석( 안성기 )이라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그가 일반적인 회사원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소매치기였다. 주석은 소매치기를 하다 체포되어 구속되고 명숙은 임신한 몸으로 그를 기다린다. 그러나 전과자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수감되기도 하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홧김에 남의 물건에 손을 대기도 하면서 주석의 전과가 느는 동안 명숙은 지쳐간다. 그리고 주석이 감옥에 있을 때 어린 아들을 데리고 떠난다. 그 후 꼬방동네에 자리 잡은 명숙은 강태섭( 김희라 )이라는 건달을 만나 살림을 차리고 반찬가게를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출감 후에 택시운전사가 된 주석이 우연히 명숙을 발견하여 찾아온다. 그는 명숙에게 함께 떠나자고 하고 안 된다면 아들만이라도 달라고 조른다. 태섭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명숙을 가운데 둔 두 남자의 갈등이 격화한다. 결국 태섭이 과거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자수하러 가는 길에 주석을 찾아가 명숙을 부탁하는 것으로 갈등은 봉합된다. 혈연과 가부장 질서에 순응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귀결되는 것은 당시 대중들이 기대하는 무난한 결말이었을 것이며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해결방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결말이 영화에 시종일관 흐르는 민중 신학의 가르침과 맞물리며 도덕성을 확보한다. 태섭에게 살인죄를 부과하여 자수하게 하는 것이나 주석이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는 것은 원작에는 없던 설정이다. 여기에는 이미 각색자의 윤리적 판단이 전제되어 있으며 결말이 예비된다. 명숙은 주석과 재결합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문제가 되는 것은 태섭의 속죄 여부다. 태섭이 끝까지 악인으로 남아 체포되어 간다고 해도 멜로드라마의 결말로서는 안 될 게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를 속죄케 하고 공소시효가 이틀 남은 시점에서 자수하게 만든다. 이는 마지막에 길게 삽입되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병든 자들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공목사( 송재호 )의 설교에 맞닿는 것이다. 공목사가 설교하는 가운데 술에 절어 살던 ‘길자’( 김형자 )가 개과천선하여 흰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것 또한 태섭의 행동과 동궤에 놓인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멜로드라마적 비계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빈민 계층을 연민과 계도의 관점에서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조응한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러한 낭만적인 도덕성이 눈에 띄게 부상했던 시기는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1960년대 초였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초였다. 전자의 경우 근대적 가부장 질서와 손잡으며 공권력의 강화로 이어졌다면, 후자에서는 민주적 저항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1980년대 초 그러한 영화들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화해로운 이상을 품었던 영화였다. 현재의 관점에서 진부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이상적 가치나 도덕성이 이 영화에서 여전히 빛날 수 있는 것은 소외계층의 활력을 통해 그것을 구현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놓인 인물이 바로 명숙이다. 당시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의 주인공과 달리 명숙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게 주동적으로 행동한다. 그녀는 주석이 소매치기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꿋꿋이 그를 기다린다. 그러다 옥바라지가 힘겨워지자 주석을 찾아가 사랑하지만 지쳤다며 떠나겠다고 당당히 말한다. 명숙이 주석에게 이별을 통보한 날 김영동의 ‘조각배’가 깔리는 가운데 아이를 들쳐 업고 황량한 길을 걸어가는 장면은 참으로 절절하다. 그러한 정서를 유발하는 것은 우선 명숙의 신산한 처지에 기인하나, 그것이 보다 핍진한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그녀 행동에 배어있는 주체적 배려와 진정성에 있다. 결말부에 이르면 그녀의 이러한 성격이 더욱 오롯하게 드러나며 영화의 압권을 이룬다. 그녀는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하는 주석에게 일갈한다. “정말 당신네 남자들 왜 이러는 거예요? 내 아일 가지고 무슨 권리로 당신네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라고. 그리고 태섭에 의해 남편을 잃고 ‘팔자가 꼬여’ 아비가 다른 네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된 여인에게 명숙은 반찬가게 판 돈을 내어준다. 일견 명숙이 태섭을 대신해 속죄하는 듯하지만 결코 관습적인 속죄양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그녀의 행동은 소외계층의 연대이자 여성의 연대로까지 의미화될 만한 결단으로 다가오는데, 이는 이 영화가 당시 다른 영화들과 변별되는 지점이다. 아울러 이 영화에 특별출연한 공옥진 씨의 역할 또한 주목을 요한다. 공옥진 씨의 춤과 노래는 사람을 모이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줌으로써 공동체의 활력을 추동한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마을의 소문을 실어 나르고 사건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드는 ‘짹짹이 아줌마’를 연기하여 영화 서사에도 활력을 부여한다. 모자라 보이고, 주책없으며, 오지랖 넓어서 갈등을 조장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그녀의 모습은 이 영화가 재현하고자 했던 소외계층의 표상이다. 가난과 빈민이 카메라의 중심에 놓이는 일은 빈민운동이 조직화되는 1987년 이후에는 오히려 점차 사라져 간다. 서울의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고, 성매매 업소들이 폐업되어 주변으로 밀려나면서 상업적 극영화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실제로 빈민의 모습은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도시에서 은닉되며 대중의 눈에서 멀어져 가기도 했다. 또한 ‘민중의 시대’가 저물고 전 세계적 자본주의화로 치달으면서 대중이 ‘가난’을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제 행정적 검열이 아닌 자본의 검열이 도시 빈민의 재현을 배제하게 된다. 이후 그들을 포착하고 문제 삼는 일은 다큐멘터리가 주로 담당해왔다. < 상계동 올림픽 >( 김동원 , 1988)부터 < 공동정범 >( 김일란 · 이혁상 , 2016)에 이르는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1) 「통계로 본 올해의 영화가」, 『동아일보』, 1982.12.15.,12면. 2) 이용철, 「꼬방동네 사람들」,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 100선』, 한국영상자료원, 2015, 138-139면. 3) 「‘꼬방동네 사람들’, 전국서점 현지조사 베스트셀러 1위」, 『경향신문』, 1981.9.24.,12면. >> 꼬방동네 사람들 VOD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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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세 구술 컬렉션 | 33건 | 2024-03-05 | 2022-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