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프린스 1호점
- 감독
- 이윤정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공유, 윤은혜, 이선균, 채정안, 김창완, 김동욱, 김재욱, 이언, 김영옥, 최일화, 김자옥, 박원숙, 한예인, 이한위
열여덟 살 소년 한슬기는 남산순환로 통행 매표소 동전함을 털다 걸려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는다. 카메라는 비좁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듯 한슬기가 수감된 소년원의 내부를 관음적인 앵글로 비추고 있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음, 정해진 배우 없음, 정해진 카메라 없음, 정해진 미술 없음, 정해진 음악 없음, 정해진 편집 없음, 정해진 거 다 없음, 이라는 자멸적 어조의 자막이 순서에 의거하여 나타나고 인디 밴드 ‘삐삐롱스타킹’이 부르는 노래 ‘나쁜 영화’가 울려 퍼진다.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보컬 이윤정의 울부짖는 듯한 보이스가 “책상 위에 수많은 아주 좋은 영화가/ 잠을 자고 있는데 식탁 밑엔 수많은/나쁜 영화...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좋은) 100편 (나쁜) 1편/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로 이어지는 가사를 통해내는 동안 아이들은 어두컴컴한 기차 안에서 무리를 지어 본드와 가스를 불고 갈피를 잃은 저들의 내면적 정황이 ‘환각 재현’이라는 제목의 키치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재생된다. 다음 쇼트에서 이어지는 한 장의 영정사진, 가스와 본드를 과다 흡입한 한 여자아이의 장례식장에서 지루해진 아이들이 춤을 춘다. 순간 나쁜 조감독의 나레이션이 나쁜 감독을 꼬시기로 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나쁜 조감독이 찍은 단편영화의 러프컷인가? 시험에 든 나쁜 감독. 나쁜 조감독의 꾐에 넘어간 나쁜 감독은 생각나는 대로 사는 아이들에 관한 생각나는 대로 찍는 영화를 시작한다. 나쁜 배우들을 구하는 광고를 통해 모인 아이들은 그들이 쓴 짧은 이야기를 자기 멋대로 찍는다. 상술(上述)한 < 나쁜 영화 >(1997)의 도입부는 서울의 10대 청소년들과 그들의 무모하고 환멸에 찬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혼란스럽고 무정부적인 이야기의 개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서정적이고 영적인 것에서부터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뤘던 장선우의 이전 영화들과 달리 <나쁜 영화>는 길을 잃은 아이들처럼 거칠다. <제목이 없는 영원한 나쁜 영화>(Timeless, Bottomless Bad Movie)라고 하는 영문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나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구조화되지 않은 특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기성 영화의 기준과 규칙, 문법을 따를 생각이 없음을 선언한다. 항상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감독 장선우는 이제 나쁜 영화를 만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는 놀랍다. 자학과 폭력, 섹스, 환각, 범죄의 만화경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10대 아이들이 쓴 대본을 재연하면서, 때로는 술 취한 거리의 사람들을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특정 장면에서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삽입하는 예술적 만용으로, 일부는 35mm, 다른 일부는 16mm 내지는 슈퍼 8미리로 촬영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경계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경계를 지우가 위해 다양한 출처의 이야기와 장르, 형식, 캐릭터를 비빈다. 영화의 1/4 지점에서 서사는 기성의 논리와 계율을 거부하는 10대들의 삶에서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바깥에 있기를 선택한 홈리스의 삶으로 건너간다.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강타한 1997년 한국의 경제적 투쟁이 버려진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장선우의 방식은 틀에 박힌 사회에 풍요에 저항하는 거리의 방랑자들에 대한 사실과 거짓의 앙상블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거친 젊은이들, 안전하게 부유한 삶을 좇는 체제를 회의하는 홈리스들의 정신적 풍경을 기린다. 장선우는 새와 레드변, 감자, 이쁜이, 아이떡 따위의 유치한 별명으로 불리는 10대 등장인물들이 지루함의 공백을 범죄, 학대, 장난, 폭력 및 섹스로 채우려고 하는 맹목적인 행동들을 스토리로 만들어 연기하도록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서울역 주변을 어슬렁대는 홈리스들의 일상과 10대들의 존재 양식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체제로부터 버림을 당한 이들의 무모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는 것만이 저들의 공통점일까? 10대 청소년들과 홈리스들 사이의 접점을 상상하게 하면서 카메라는 즉흥적인 퍼포먼스와 느슨한 플롯에 의해 사전에 설계하지 않았던 의미가 발발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원초적인 분노, 평온한 포기, 특정한 순간을 위해 사는 것, 경고를 무시하고 사는 무정부주의적인 삶의 가치를 찬미하는 장선우의 예술적 자의식은 도전적이다. 형식적으로 <나쁜 영화>는 유사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로 거리의 유목민들을 묘사하는 픽션 영화이다. 시네마베리테 양식으로 촬영되었지만 재연 에피소드와 현실, 구성된 이벤트 사이를 오가며 현실과 무대 사이의 경계를 흐리기 위해 애쓴다. 계획과 우연을 병합한 사이비 다큐멘터리 형식은 영화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한다. 카메라를 든 영화 스태프가 길바닥에 주저앉은 한 소년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자. 이제부터 카메라를 든 사람과 붐 마이크가 화면 안으로 들이닥친다. 여기서 카메라는 스스로 참여적이 되는 동시에 촬영 대상의 개입을 촉발하는 촉매가 된다. 영화적 진실을 생산하는 순간처럼 의도된 그 장면에서 실제적인 세계에 속한 자연인은 허구적 스토리가 요구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실재하는 존재와 대상에게 부여되는 역할이 중첩되어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힘든 영화적 실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연출된 무수히 많은 장면들은 상당한 정도의 혼란을 유발한다. 카오스는 캐릭터들의 재현 방식과 그들의 행동 뿐 아니라 운동의 방향에서도 발생한다. 때때로 등장인물들은 의도적으로 화면서 속도를 덧붙이면서 골목길을 질주하거나 추적자들의 추궁을 피하기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섹스와 성적인 방종은 자유로운 행동 양식의 소여(所與)인 것처럼 변덕스러운 스타일로 전달되고 목표나 의도, 지향을 버린 말과 행위, 결과가 수반된다.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습격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적 태도와 유머, 냉소를 시전하는 특성은 어떤 한국영화도 도달하지 못했던 미학적 혁신의 지점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실제 영상과 가공된 재연의 흐릿한 경계가 명확해지는 장면 중 하나는 송강호와 안내상, 기주봉, 이문식 등 익숙한 얼굴의 배우들이 홈리스 분장을 하고 실제 홈리스들과 섞여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찬송가를 부르는 거리의 전도자들 사이로 슬금슬금 이동하여 능청스럽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송강호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지우는 전략을 육체적 제스쳐를 통해 몸소 실행한다. 기주봉은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는 서울역의 홈리스가 되어 현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진짜 행려들과 3개월 간 합숙을 한 안내상은 놀라운 친화력으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10대 아이들, 홈리스들과 달리 이 진짜를 연기하는 가짜들은 오랜 기간 훈련한 스킬을 발휘하여 능숙하게 현실에 자리를 잡는다. 감독과 스태프, 감독과 배우, 배우와 일반인, 진짜와 가짜, 선과 악, 미와 추, 현실과 허구 따위의 기준들을 깔아뭉개는 장선우의 방임적 태도는 야심적이다. 현재 시점에서 회고해 보건대 <나쁜 영화>의 위상은 시네마베리테와 에세이 필름의 언저리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대상들의 세계로 들어가 의도된 구성을 포기하고 그들에 의해 영화가 생성되는 과정을 조직한다. 젊음의 기쁨과 발견의 시기를 거리에서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묘사하면서 장선우는 미학적 논쟁을 야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체의 영화적 형식을 제거한 상태로 나아간다. 진실(과 진실한 사람)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를 말하고 그 과정에서 매체의 성질을 다시 설정하며, 가치판단의 기준을 재정의하도록 하는 불온한 의도는 시네마의 역량을 시험한다. 도전적이지만 의도적으로 한계를 두지 않는 이 이야기는 체제에 저항하는 존재들의 삶과 예술적 반항의 태도를 일치시킨 현대 한국영화의 시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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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기흥공장 주변엔 노동자들의 기숙사가 있다. 각 동마다 `개나리` `라일락` `수선화`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생명 없는 시멘트 덩어리에 예쁜 꽃 이름을 넣으면 그나마 힐링이 될 듯 보이지만 홍리경 감독의 < 탐욕의 제국 >에서는 그런 애처로우면서도 기만적인 네이밍이 기실 `삼성`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시멘트 덩어리에겐 예쁜 이름을 지어줄 여력은 있지만 그 안에서 고통받고 스러져 갔을 젊은 영혼들에겐 무어라 부를 의지도, 만날 생각도, 대화할 노력도 없는 것이 `삼성`이다. 차갑고 딱딱하고 숨이 막힐 듯 건조하게 <탐욕의 제국>은 바로 자본 권력의 비인간성을 깊게 각인시킨다. 6년 전, 고 황유미 씨의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는 충격적이다. 제보된 건수는 200건이 넘으며 사망한 노동자는 79명. 이중 삼성 관련 공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만 69명이다. 피해자 유족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삼성의 사과와 산업재해 인정, 그리고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사회적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삼성과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다큐멘터리 < 탐욕의 제국 >을 구성하게 한 팩트다.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라는 이야기의 구도는 명확하며 현존하는 비극은 관객들의 감정적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폭로와 선동, 사회적 환기라는 다큐멘터리의 목표에 적확하게 부합하는 사건이라 하겠다. 하지만 홍리경 감독은 폭로와 감정배설만을 위해 이 작품을 연출한 거 같지는 않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사려 깊게 선택한 이미지와 냉정하면서도 공정하게 분배된 인물 시퀀스의 배치. 또한 운율에 따라 곱게 잘리는 안정적인 커팅 대신 낯설게 분절된 영상과 음성의 재조직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삼성이라는 거대자본의 본질에 대해 성찰케 한다. 예를 들어 중간 부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 앞에서 이야기한 기숙사 건물(이 건물은 작품 속에 몇 번 나누어 등장한다) 위에 얼굴 없는 증언자들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삼성이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을 했었다는 내용이었다. 초일류기업 이미지를 갈취한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뭐라 딱히 이야기할 수 없는 불안으로 그곳에서 벗어난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역설이 안개 낀 시멘트 덩어리 위해 새겨진 `개나리`위에 흘러나온다. 노동자들은 불안하고 불안의 정체는 미래에 확인된다. 그렇게 우리가 인지 못하는 시간 동안 그 비극은 지금과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이후의 미래는 안개 낀 날씨처럼 흐릿하다. 홍리경 감독은 이렇듯 보이는 것과 들려지는 것 사이에 `연결`을 성찰케 하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거대자본 삼성이 이 사건의 책임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는 기만을 더욱더 큰 분노로 비판하게 한다. 힘 있는 국회의원에겐 또박또박 쉰 소리로 답하지만 피해자의 호소엔 단 한마디도 응대하지 않는 삼성전자 부사장의 표정에서 `관리의 삼성`이라는 은밀한 속살을 묵도하게 한다. 수십 명의 젊은 노동자들의 허망한 죽음도 기업의 존재를 위해(이건희라는 일개인의 존재일 수도 있겠다)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저들의 자신감을 확인한다. 돈으로부터 만들어진 권력의 실체를 말이다. 다큐멘터리 작가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비극의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는다. 모든 관계가 다 그렇듯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작가 개인은 그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과제가 존재한다. 아마도 홍리경 감독도 그 관계로부터 < 탐욕의 제국 >을 생산하기까지 꽤 많은 고통이 있었으리라. 작품 속 첫 번째 피해자로 등장했던 이윤정 씨는 작품 속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청계천과 인사동을 가보고 싶어 했던 그녀는 젊은 나이에 아이와 남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옆에서 그 시간을 함께 했을 감독은 냉정하리만치 큰 인내심을 발휘한다. 고 이윤정 씨 본관 앞 노제를 치르기 위한 피해자와 경비들 간의 극심한 충돌의 한 가운데 (작품 속 유일한) 피해자의 비명 섞인 울음이 터져 나오는 그 순간. 카메라는 작정을 한 듯 멀리 떨어져 하이앵글로 그 모습을 보여준다. 너무하다 싶은 정도의 인내심이었다. 그 인내심은 하지만 현실 이미지의 임의적 전취를 추구하는 다큐작가의 실험 따위와는 궤를 달리한다. 홀로 떨어져 자신만의 언어를 생산하고 만족해하는 작가가 아니라 현실 속 사람들의 비극을 대하는 한 인간적인 작가의 고뇌와 인내심이라 불러야겠다. 이런 장면이 있다. 치열하게 분노를 쏟아내야 하는 시위의 공간에서 피해자 한혜경 씨는 노래도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며 자신을 한탄하는 인터뷰를 한다. 하지만 한혜경 씨는 마지막 부분 엄마와의 대화 속에서 장애인의 삶을 얻었어도 자신의 인생은 충만하다 단호하게 말한다. 비극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지만 희망은 이렇듯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진다는 잠언을 현실에서 확인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고통을 온전히 나누어지고 함께 했을 홍리경 감독의 2년간의 시간이 가치 있게 작품 속에 스며들었음을 <탐욕의 제국>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보여준다. 이제 갓 공개된 작품에 대한 지나친 기대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작품이 꼭 극장에 개봉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 자체를 읽고 공감하기 위해선 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중간 한혜경 씨와 어머니가 삼성전자 부사장을 면담하는 장면에는 긴장 타는 두 대립하는 인물들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 자주 등장하는 반올림 활동가 이종란 노무사의 얼굴도 보인다. 이 얼굴 속에 담겨진 표정을 읽어야 한다. 극장이라는 곳이 아니라면 화나면서도 안쓰러우면서도 슬픈 그 표정은 보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 장면뿐만이 아니다. 중간 중간 삽입된 항구에 야적된 컨테이너 이미지들과 삼성 본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를 작가의 숨결로 인지할 수 있는 건 극장뿐이다. 매체 특성을 완성도 있게 받아들이기 위해 < 탐욕의 제국 >은 꼭 극장에서 보시라 권유하고 싶다. 연관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탐욕의 제국>은 독립다큐멘터리가 현실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는 방법으로 극장을 선택하는 의미에서도 부합된다. 탐욕스러운 기업 삼성의 본질을 알리고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권은 더욱 확장되어 소통되어져야 한다면 <탐욕의 제국>은 그 역할을 담대히 담당할 작품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탐욕의 제국>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 낼 것이다. 독립다큐멘터리를 활용(!)했던 운동권이 이 작품을 어떻게 읽고 소화해 하나의 문화로 블로우 업 시킬지를 확인하는 여정(극장 개봉하는 과정) 속에 메마른 이 커뮤니티의 소비문화에 대해 자연스레 되돌아볼 가능성이 높다.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소비를 위한 선택’이라는 극장의 시장문화를 넘어 영화적 소비와 토론과 각성의 정치적 효과, 더불어 공동의 문화발전을 위한 단초가 된다면 극장 개봉을 안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탐욕의 제국>은 그럴만한 작품이라 확신한다. 잘 살펴보면 알겠지만 < 탐욕의 제국 >의 첫 화면과 끝 화면은 같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첫 화면을 통과해 끝 화면으로 빠져나와 다시 문을 열고 현실로 돌아갈 때 관객들은 탐욕의 제국이 지배하는 사회를 같은 모습이지만 다르게 바라볼 것이다. 이것이 <탐욕의 제국>이 있기 전과 후의 차이이며 하나의 다큐멘터리가 이 세상에 깊게 새겨 놓은 흔적이다. ‘탐욕의 제국’은 그렇게 존재할 다큐멘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