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 - 있는 사람들의 초상
- 감독
- 이율공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강선화, 정예준, 류미, 크리스
장률은 새로운 척도로 국경의 의미를 재창조하여 인간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장소의 중요성을 형상화해 온 초국적 영화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특정 지명과 관련 있다는 것(< 중경 >(2007), < 이리 >(2008), < 두만강 >(2011), < 경주 >(2014), <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2018), < 후쿠오카 >(2020))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중국의 독립영화와 한국의 디아스포라 영화를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장률의 작품 목록 안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다큐멘터리이자 한꺼번에 여러 장소들이 등장하는 희귀한 사례가 < 풍경 >(2013)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아 단편영화로 기획되었다가 장편으로 확장된 이 영화는 아시아 전역에서 한국으로 와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이다. 아시아 지역 출신으로 한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 외에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모두 다른 나라에서 하눆으로 이주하였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이유로 영화에는 중국어, 타갈로그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장률 그 자신도 조선족 출신으로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주 예술가’의 처지라는 점에서 저들과 상통한다. <풍경>은 이 노동자들의 개인사, 처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소재로부터 연상되는 르포르타주적인 접근법 대신 장률이 선택한 것은 저들의 꾸는 꿈의 내용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꿈은 다큐멘터리 서사의 통례들을 초월한 독특한 서사의 영역으로 이 영화를 데려간다. 영화의 도입부는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야심한 밤 영종대교를 달려 우리가 당도하는 곳은 인천공항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떠나오는 장소인 공항에서 질문은 시작된다. 한국에서 꾼,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무엇입니까?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을 떠나 동티모르로 돌아가게 된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에서 밤마다 어머니의 얼굴이 나오는 꿈을 꾸었노라고 고백한다. 장면은 전환되어 꿈을 꿀 때 하얗게 꺼져 가는 의식 마냥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의 숲을 이룬 영종대교 위를 미끄러져 가는 초현실적 광경이 펼쳐진다.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의 오프닝은 꿈의 입구를 지나 꿈의 세계로 깊어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부터 혼몽(昏懜)의 세계를 거니는 것 같은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무의식의 극장으로 해석되는 꿈은 희망(길몽)과 공포(흉몽)의 상반된 양태를 띄고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한다. 대부분은 사라지지만 기억에 남는 꿈에는 현실과의 특별한 연결이 존재한다. 기억하는 꿈에 대해 물었을 때 누군가는 사장님, 사모님, 직장 동료와 함께 고향 스리랑카의 아름다운 사원을 여행하는 광경을 떠올리고, 다른 누군가는 아내와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한국에서 로또에 맞을 날을 상상한다. 반면 20년 동안 시름시름 앓은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맞는 꿈을 꾸었다는 베트남 여인, 떨쳐지지 않는 유령의 악몽에 시달리는 태국 남자, 자신을 악독하게 다루었던 한국인 사장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반추하는 가구 기술자도 있다. 간질 치료를 위해 한국에 온 조선족 소녀는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이라고 포교를 일삼는 사진사 앞에서 여자 경찰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풍경>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매개된 관점을 배제한 채 인간과 풍경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몰두하는 관찰 다큐멘터리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장률은 객관적인 자리에 카메라를 두는 것을 초월하여 자신이 듣고 보았던 이미지를 흐릿한 기억에 의존하여 주관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는 꿈의 서사라는 접근을 취한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동력은 실향과 선회, 유랑, 귀향의 경험, 간단치 않은 삶의 역정을 살아온 자들 앞에서 느껴지는 숙연함, 말과 이미지의 이율배반적 표현이다. 꿈에 관한 질문에 화답하는 이주민들의 실존적 억류상태는 철 대문 옆에 방치된 개나 골목 모퉁이에 버려진 쓰레기 봉지, 도살장에 뒹구는 잘린 소의 머리, 쓸쓸한 여공 모집 광고, 공터에 방치된 그네로 형상화되고 있다. 스리랑카,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네팔, 타슈켄트에 두고 온 이주민들의 꿈은 먼 거리에서 물끄러미 응시된다. 사전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 이주민들의 꿈은 행복에 대한 인간의 보편 의식으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장률은 <풍경>에서 꿈이 삶이 놓친 시간과 그 흔적의 축적이며, 소망충족의 욕망이 남루한 현실과 교차하는 풍경의 집적물이라는 생각을 보여준다. 대다수의 장면에서 장률은 정적이고 긴 쇼트를 용의주도하게 배치한다. 이주노동자들의 일상은 꿈의 맥락에서 분리되면서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 노동의 시간과 나란히 놓인다. 사람이 전혀 없는 동네의 무작위적인 스냅 쇼트는 기이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스스로 움직이다가 멈추는 세발자전거, 지하철 역사(驛舍) 벤치에 앉았다가 열차가 지나간 뒤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두 명의 남자, 코끼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 이 장면들은 어떤 이유로 그곳에 들어가 있는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 세계에 뚫린 구멍, 세계의 내부로부터 열린 미스터리한 출구로 표현할 수 있는 이 장면들에서 장률의 복화술사적인 능력은 발휘되고 있다. 이웃에 산다는 것은 그 이웃에 있는 물건을 지속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풍경>의 카메라는 너무나 정적이고 자의적인 사물들에 집중함으로써 관객들이 서사와의 연결을 추정하기 힘든 사물과 순간들을 실제로 경험하도록 강요한다. 동질적 요소들을 나란하게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특성을 함축한 쇼트의 충돌(몽타주)이 우세한데, 이를 위해 동원된 것은 말과 이미지 사이의 패러독스이다. 거대한 기중기의 운동, 염색 천을 뽑아내는 지루한 과정, 가구를 만들고 운반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카메라에 기록된다. 꿈속의 장소들은 온기가 충만한 선량의 천국으로 기술되지만 그들이 놓인 장소는 냉혹한 현실이다. 제주도를 환상의 섬쯤으로 상상하는 남자의 이야기에 이어 우리는 황량한 제주의 풍경을 보게 되고, 아버지의 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인의 이미지 뒤에는 단란한 가족의 저녁식사가 배치된다. 이쯤 되면 꿈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소망충족의 대리 기제라는 의미로 쓰이거나 현실의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풍경>은 삶과 꿈의 아름다운 공생을 상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동시에 그 공생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장률은 꿈과 현실이 조화롭게 합치되는 삶이 이 땅에서 불가능한 소망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영화에는 안과 바깥, 이산과 귀향, 방랑과 정주(定住) 같은 극단적 풍경이 기록되어 있다. 이주민들이 꾸는 미몽과 현실, 실재와 상상 사이의 부조화, 균열의 찢김은 한국 사회의 패배이고 무능의 자인이다. 한 맥락에서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은 공명한다.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오프닝은 떠나려는 자의 이미지로 열리고, 클로징은 무언가를 맹렬하게 좇다가 하늘을 응시하는 익명의 시선으로 닫힌다. 헐떡거리는 카메라의 격렬한 움직임 위에 비행기의 굉음이 입혀진다. 그러니까 떠나는 장소(공항)에서 시작하여 떠나는 행위(비행기 소리)로 끝이 나는 셈이다. 아마도 향수병에 시달리던 동티모르인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을 떠났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어머님을 만나게 될 아우구스티노 씨에게 그것은 떠남이 아닌 귀향이다. 그러나 떠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몸이 놓인 장소와 정신이 열망하는 장소의 괴리는 자본주의적인 체제가 만들어낸 소외의 풍경이기도 하다. <풍경>에는 다시 꿰어맞추기에는 희미해진 삶의 흔적과 이방인들의 꿈, 그 소망을 배신하는 풍경이 한 프레임 안에 응축되어 있다. 이 충돌은 어느 곳에도 머무를 수 없는 영혼의 쓸쓸한 표류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레즈비언인 감독 ‘ 이영 ’은 1945년생의 ‘바지씨’인 ‘이묵’을 만나기 위해 여수로 내려간다. 레즈비언이나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바지씨는 동성 연인 관계에서 남성의 역할을 맡는 여성을 지칭하는 은어였다. 사실 이묵은 스스로를 남자로 인식해왔다. 감독은 그런 그의 소소한 일상을 촬영하고 과거의 삶에 대해 묻는다. 한편, 그의 이웃은 남성스러운 외모를 지닌 이방인 감독의 성별을 궁금해한다. 이묵은 곤란해 하는 그녀를 두둔하기 위해 애쓴다. 당황하는 감독의 모습에는 그대로 그의 젊은 시절이 투영된다. 감독은 그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집안일을 하며, 흡사 다정한 부녀의 모습을 연출한다. 감독은 이묵을 태운 리어카를 조심스레 끌거나 그의 눈가를 꼼꼼히 닦아주기도 한다. 그들은 피가 아닌 억압받는 소수자성을 공유하며 유사 가족을 형성한다. 감독은 서울로 온다. 이제 인물 다큐멘터리는 급히 방향을 선회해, 조직화된 반동성애 운동 진영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탐사 보도의 형태를 띤다. 감독은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일련의 인권조례들을 좌절시킨 보수 기독교인들의 공세를 꼼꼼히 기록하지만 녹록지 않다. 이제 이묵을 대하던 친밀한 손길은 촬영을 방해하는 불특정 인물들을 밀어내거나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기 위한 거친 손짓으로 변한다. 아울러 감독은 ‘세월호 사고’와 같은 동시대의 굵직한 사건을 조망한다. 보수 집회에서 세월호 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며 유가족들을 비난했던 인물이, 뒤돌아서서는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기 위한 명목으로 지금은 세월호 추모 기간이라는 근거를 드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인다. 성 소수자 혐오를 선동하는 집단의 비이성적이고 광기 어린 목소리의 모순성은 한국 사회의 공시적 맥락 속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혐오 세력들은 상대방에게 빈번히, “니들은 애미, 애비도 없냐”고 소리친다. 그들은 왜 각자의 신념에 따라 충돌하는 공론장에서 사적인 가족을 환기시키는가. 그들이 부모를 상기시키면서 우선시하는 것은 사랑과 배려가 아니라 복종을 강요하는 절대적 위계이다. 감독은 이에 대답하듯, 다시 이묵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 모든 혐오의 시선들을 버티고 살아낸 그가 곧 내 어머니이자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들처럼 서로의 말 못 할 아픔을 알아채고 보듬는 자들로 이뤄진 관계야말로 가족의 원형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이묵의 이야기로 문을 열고 닫는 구조이며, 그 사이를 동성애 인권운동 진영과 반동성애 진영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채우고 있다. (물론 그사이에 일본의 레즈비언 커플인 ‘논’과 ‘텐’의 달달한 사랑을 잠시 보여주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은 이묵이 들려주는 과거 연애담의 재연과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혐오 선동 세력들이 폭언을 하는 장면들은 분노 어리고 때로는 수치스러운 감정을 한껏 고양시킨다. 견디기 버거워질 때쯤, 영화는 다시 이묵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묵이 담담하게 읊조리는 회고담은 목청껏 뱉어내는 혐오 발언을 감싸 안는다. 그 분노와 수치를 수없이 감내하며 오늘에 이르러 마침내 차분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그리하여 세상을 통달한 듯 현자의 따뜻한 미소를 짓는 그를 통해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이내 격앙된 감정들은 사그라진다. 앞서, 그는 여성과 동거를 할 때마다 이웃들의 수근거림을 감수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난 결국에는 그 이웃들도 그들의 선함에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이것은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지닌 이들을 일깨우는, 오래 묵은, 그러나 언제나 유효한 일화로 빛을 발한다. 그러나 감독은 잔인하게도(!) 다시 동성애 반대 진영의 외침에 귀 기울인다. 그들은 어김없이 퀴어 퍼레이드를 훼방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암전된 화면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지만 그들이 북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들은 그치지 않는다. 아마도 감독은 관객들이 이묵이 건네는 위로에 안주하기를 원치 않는 듯하다. 저 밖에 여전히 혐오 세력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있으며, 고로 이묵이 진정 바라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동일 감독이 장장 8년 만에 내놓은 장편 신작 < 컴, 투게더 >는 중산층의 위기라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고전적 주제를 통해서 동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돌아보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설정은 다음과 같다. 한 회사에서 장기근속 중이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정리해고를 당한다. 카드 회사에 재직 중인 어머니는 치열한 사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업계 내에서 음성적으로 행해지는 편법까지도 마다치 않는다. 재수 끝에 명문대학에 지원한 딸은 예비후보가 된 상태에서 초조하게 최종합격자 발표를 기다린다. 이처럼 영화는 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과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아버지의 실직이다. 직장 상사로부터 그간 수고했다는 겉치레 인사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표정은 의외로 무덤덤하다. 마치 예상하던 일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실직은 한 가정을 엄습할 경제위기와 가부장의 권위 하락을 암시하는 적신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속에서 전개될 우연적인 만남, 도덕적 갈등, 물리적 충돌, 충격적인 파국의 서곡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무기력이 증가하는 정도에 비례해 어머니와 딸이 체감하는 심리적 압박은 가중된다. 어머니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불법과 편법을 자행하는 것은 물론 경쟁 관계에 있는 동료를 질투하고 모함하는 악수를 둔다. 영화는 어머니의 비정상적인 행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다. 대신, 보이지 않는 사회 구조적 힘으로 일상 곳곳에 경쟁 구도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갈등을 겪으면서 주택대출금에 대해 걱정하거나, 직장 동료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신용불량자임을 고백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어머니가 처한 극한의 상황과 그녀의 폭발하는 감정은 수사학적으로 대조법과 과장법을 통해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다. 한편, 딸이 처한 상황도 어머니의 처지만큼이나 가혹하다. 그녀에게 내려진 형벌은 일종의 희망 고문이다. 그녀는 과거 명문대학에 지원해서 예비합격자 명단에 올랐다가 떨어진 경험이 있다. 그리고 재수 끝에 같은 대학에 지원했지만 결과는 또다시 예비후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뿐이라면, 그 기도의 내용은 필연적으로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을 빌어야하기 때문이다. 신의 자비와 은총이 사라지고 잔혹한 경쟁만이 남은 세계에서 종교의 논리는 승자독식의 논리로 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딸이 겪고 있는 각각의 상황은 자본주의의 사회의 단면을 잘라 놓은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잔인한 경쟁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윤리적 고통을 겪고 있다. 영화는 비언어적 기호와 특정 공간의 물리적 특성을 활용해 두 여성의 심리적 고통을 극대화한다. 우선, 심리적 고통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단위를 배우들의 히스테릭한 몸짓과 말, 무표정한 얼굴을 통해 표현한다. 그리고 극 중 인물이 체감하는 비정한 현실을 사실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특정 공간의 물질적 특수성을 강조한다. 어머니와 딸이 겪고 있는 사건이 위기로 치달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심야의 도로변을 배회한다. 자동차의 강렬한 서치라이트 불빛과 요란한 경적으로 감각이 마비되는 그 공간에서 두 사람은 억눌렸던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해낸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져진 그녀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이처럼 영화는 단순 가족 멜로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를 넘어서 현대인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개개인의 고통의 총합을 넘어서는 사회적 고통이다. 다만, 그 고통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고 징후로서만 감지될 뿐이다. 이 영화에서 사회적 고통의 존재를 간파하는 유일한 인물은 아버지이다. 그는 영화 초반부터 냄새를 맡지 못하는 특이한 신체적 증상을 앓는다. 그러던 그가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밀폐된 공간에서 구토한 다음 온 세상에 악취가 풍긴다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그가 말한 악취란 사회 도처에 은폐된 구습, 폐단, 악행, 부조리에 대한 은유이다. 이 결정적인 장면을 통해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상이 부패해가고 있음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때, 오직 한 사람만은 그러한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신동일 감독의 < 컴, 투게더 >는 붕괴 직전의 사회를 되돌아보면서 잠들어 있던 의식이 깨어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