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ra Bae] 이정현(Jung-Hyun Lee) - 와(Wa)
- 제작년도
- 2010
박찬욱 감독의 11번째 장편영화 < 헤어질 결심 >(2022)의 제목은 주체의 ‘의지’를 강조한다. 제목의 주체는 이별을 방해하는 것에 대항해 자기 의지를 다지고 필요한 전략을 실행하고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 제목만 보면 이 영화는 낭만적인 주체의 세계 대 자아 혹은 자율적인 이성 대 (무)의식적인 욕망 간의 투쟁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실체는 정반대다. 인간중심적인 주체의 의지를 강조한 이 제목은 반전을 위한 ‘미끼’다. 실제로 영화가 강조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정서적이고 투쟁적인 관계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인공과 자연, 물질과 비물질, 감정과 행위, 데이터와 의미, 사건과 시스템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행위자들(actors)의 복잡한 배치와 네트워크이다. 그렇기에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와 가장 닮은꼴을 찾아본다면 < 파란만장 >(2011, 33분)일 수 있다. 이정현과 오광록 주연의 <파란만장>은 KT의 제작지원을 받아 미디어아트 작가인 박찬경과 함께 작업한 단편으로 당시 신형이었던 아이폰4로만 촬영을 해서 극장 개봉을 했다. 이 영화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던 시점에 전문가적 역량을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캠페인 영화였다. 두 감독은 각종 취미 및 생활기계가 하나의 기기 안에 통합돼 있으면서도 휴대성과 편재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개별 기기들의 고성능 라인에 근접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던 스마트폰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귀신의 시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 영매의 역량으로 은유화 한다. 즉 비인간 기계와 초월적인 영적 존재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이질적인 것들을 채널링하는 그들의 공통역량을 조명한다. <헤어질 결심>은 짐짓 ‘나’의 정체성을 허물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의 파괴적 관계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를 가장한다. 그러나 자아와 타자의 경계와 정체성의 “붕괴”는 인간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 행위자들의 경계는 어떤 면에서 이미 ‘나’ 아닌 것에 매개되고 ‘지금-여기’ 아닌 시공간에 연결되어 있기에 이미 붕괴되어 있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근대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감정언어로 최종적으로 번역되기 이전의 현상, 즉 다층적으로 배치되고 네트워크 되어 있는 행위자들과 그들이 모이고 교차하는 마디점들(nodes)의 감각적 민족지학에 더 관심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의지(의식의 의미화)와 감정(정동의 의미화)이 있기 전의 사건들을 관찰한다. 경찰인 해준이 졸음 방지를 위해 동료인 수완(고경표)과 통화를 하며 밤 운전을 하는 장면에 나온 대사는 인간주체의 의지를 먼저 앞세우는 습관에서 벗어난 인과관계의 전복을 보여준다. 주체로서의 ‘너랑 나랑’을 강조하는 수완에게 해준은 “잠복해서 잠 부족이 아니라 잠이 안 와서 잠복근무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러한 경계의 무너짐과 네트워크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 의인화를 탈피한 비인간 중심의 응시를 곳곳에 배치하고 이질적 시공간을 오고가며 낯설게 사건들을 연결하는 교차편집 기술을 부각시킨다. 특히 시체와 휴대폰부터 디지털 워치, 소프트웨어, 유튜브 플랫폼, 오늘날의 영화체계, 산과 바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이민 체계와 가부장제까지 무생물과 비물질의 응시가 이 영화에선 탈인칭 쇼트뿐 아니라 시점 쇼트로도 작동한다. 그래서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와 감정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영화 전반적으로 매우 소란스럽다(내가 끝내 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뿐 아니라 다종다양한 무생물 행위자들도 네트워크에 연결된 자기의 행위성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눈들은 일종의 평등함을 부여받는다. ‘인간중심의 좌표를 벗어난 주체의 해체, 비인간적 주관성은 인간도 물질적이고 창발적인 세계의 질료 중 하나가 되게 만든다.’ (스테이시 알라이모) 비인간 시점은 영화사에서 여러 감독들에 의해 다양한 목적을 갖고 사용되어 왔다. 동물, 유령, 신, 사물들, 자연 풍경, 기계와 시스템은 비인간 시점을 표현해온 대표적 행위자들이다. 이 비인간-눈들은 장르적이든 그렇지 않든 대개는 친밀하고 낯선 기이함(the uncanny)의 느낌을 통해 자아와 타자, 내부와 외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흔들면서 불안정성을 만드는 데 기여해왔다. 비인간 시점의 미학적 실천은 최근 들어 한층 빈번해지고 있는데 주요하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기후위기에 대한 발본적 성찰로 인간중심성을 해체하려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화로 인한 물질적인 것의 재규정이다. <헤어질 결심>의 비인간 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랑으로 번역된 것의 네트워크에는 두 사람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이 있다. 영화는 그것을 종종 쇼트와 역쇼트를 하나의 쇼트 내에 보여주는 유사-주관적 시점으로 보여준다. 크레딧 타이틀 이후 나오는 첫 씬에선 서래의 남편인 기도수의 시체의 눈 안쪽으로부터의 응시를 보여준다. 시체 내부로부터의 시점으로 인해 눈동자의 실핏줄과 망막 위를 기어 다니는 클로즈업된 개미가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 역쇼트에 해당하는 암벽을 오르는 해준과 수완이 한 프레임에 담기게 된다. 쇼트에 해당하는 보는 주체와 역쇼트에 해당하는 보이는 대상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긴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주관적 시점이 아니다. 시체를 ‘보고 있는 주체’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는 보고 기록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기계와 같은 시스템으로 표현할 뿐이다. 해준이 그 시체를 보지만 시체 또한 해준을 보고 있다. 그 눈은 살인의 증거를 보았던 눈이기도 하고 살아있을 적에 서래를 폭력적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던 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눈이 현재 어떤 인간적인 욕망과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표현은 특히 병원의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서래 몸의 멍든 사진을 보며 해준이 마우스로 이미지를 확대해 픽셀이 가시화될 때, 휴대폰으로 서래와 문자를 나누거나 녹음된 음성파일을 들을 때 두드러진다. 화면 내부로부터의 시선, 즉 시스템의 시선은 해준과 기계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준과 서래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이포와 부산에 떨어져 있을 때, 해준은 밤에 잠이 오지 않자 서래와 문자를 주고받는다. 서로만 아는 방식으로 농담을 할 정도로 관계가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서래가 문자를 쓰고 있는 중임을 표시하는 “…”는 해준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그것은 기대와 설레임 등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 이 순간 카메라는 다시 휴대폰 내부로부터의 시선을 유지하며 스크린에 표시된 “…”와 휴대폰 스크린을 보고 있는 해준의 얼굴을 디졸브 시킨다. 해준은 “…”의 표현(농도, 깜박임, 지속시간 등)을 포함한 휴대폰의 문자 시스템과 동맹 중이다. 서래와 해준이 서로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번역기와 녹음기를 사용하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번역기 사용으로 인해 둘의 표현은 문어체에 가깝거나 직설적이게 되고, 심지어 오역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심장’으로 번역된다. 사극 드라마를 통해 배운 서래의 한국어는 고풍스럽다. 해준은 서래가 ‘꼿꼿해서’ 좋다고 고백한다. 소프트웨어와 미디어의 사용은 서래를 더 ‘꼿꼿한’ 이미지로 만들어 준다. 해준과 서래가 이포에서 재회한 후, 해준은 서래가 입은 옷의 색상에 집착한다. 그 옷은 청색인가, 녹색인가. 서래를 목격한 사람들은 동일한 드레스를 저마다 달리 증언한다. 그리고 해준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이 장면은 다분히 2015년 즈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레스의 색상 논란을 염두에 둔 농담이다. 당시 같은 드레스를 놓고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로 보는 사람들과 검은색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로 보는 사람들로 나뉘어 뜨겁게 논쟁을 했다. 드레스의 주변 밝기가 동일한 드레스를 다르게 보이게 한 것이다. 인간은 대상만을 떼어내 색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밝기에 맞춰 원래 색을 판별하려 한다. 뇌는 환경에 맞춰 색체보정을 하고 여러 번 보다보면 학습에 의해 색은 새로운 정보에 상관없이 고정된다. 해준은 서래를 판단함에 있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지속적으로 조정한다. 해준은 끊임없이 정보를 찾고 주변 환경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며, 사건이 종결되기 전까지 의미는 고정되지 않은 채 열려 있어야 한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이상 잠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해준은 꾸준하게 정보를 잘못 읽는다(서래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운다고 착각했던 것을 생각해 봐라). 오늘날의 세상에서 정보는 쉴 틈 없이 생산되고 또한 왜곡되기 때문에 세계(사건)의 종결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종결하는 법을 안다. 그는 살인자다. 그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언제 끝낼지를 주체적으로 정하려 하는 이다. 서래는 주변 환경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욕망을 응시하는 이다. 그렇다고 비인간 네트워크를 거부하는 자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갖고 있는 기기들을 목적에 맞게 이용한다. 스마트폰의 위치기록 기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기능을 역으로 사용해 정보를 기록하고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든다. 시스템에는 구멍이 있다. 해준은 ‘사랑’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지만 서래는 해준이 범행증거를 없애버리라고 한 말과 해준 자신이 붕괴되었다는 말을 ‘사랑’으로 번역한다. 해준이 정보 수집가라면 서래는 번역하는 사람이다. 해준이 미결자라면 서래는 종결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상대적으로 꼿꼿한 사람이고, 스스로 소프트웨어 혹은 시스템이 될 줄 아는 사람이다. 서래는 해준이 멀리 바다에 던져버리라던 휴대폰 대신 스스로를 바다에 묻는다. 위치기록 소프트웨어에서 그의 위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사랑의 네트워크에 구멍을 낸다. 이제 사건 혹은 의미화의 종결은 구멍으로서만 가능하다.
1990년대 후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주제와 그것을 다루는 태도가 다채로워진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와 노동투쟁에의 집중에서 ‘일본군 위안부’(<낮은 목소리> 3부작), 비전향 장기수와 탈식민적 현대사(< 송환 >, < 할매꽃 >), 가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 가족 프로젝트-아버지의 집 >, < 고추 말리기 >, <엄마...>, < 쇼킹 패밀리 >), 성소수자 정체성과 수행(< Out: 이반검열 두번째 이야기 >, <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 >, < 3xFTM >), 여성 노동자의 역사와 투쟁(< 얼굴들 >, < 밥꽃양 >, < 평행선 >, < 우리들은 정의파다 >, < 외박 >) 등 주제의 확장과 교차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감독 스스로가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성찰적인 태도 자체를 주제로 삼거나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트랜스-장르적 연출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정치적 참여의 장이 다변화된 동시에 독립 다큐멘터리 상영이 비교적 동질적인 집단의 공동체 상영에서 무작위적인 관객이 있는 극장으로 확장된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장애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 팬지와 담쟁이 >(계운경, 2000)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 이 시기에 장애여성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들이 몇 편 더 제작되었는데 〈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이야기 〉(김진열, 1999), < 거북이 시스터즈 >(이영, 2002), < 진옥 언니, 학교 가다 >(김진열, 2007)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장애여성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세 영화는 초점이 다르다. < 거북이 시스터즈 >는 장애인권을 위해 헌신해온 여성 장애인 활동가 세 명이 한 집에서 가족 대안 공동체로 살아가는 일상을 다룬다면, 연작인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이야기>와 <진옥 언니, 학교 가다>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김진옥이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 키우는 과정을 쫓는다. <팬지와 담쟁이>는 부산에 사는 수정과 윤정 자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상과 현실을 관통한다. 30대 중후반의 저신장 장애인인 수정과 윤정은 부산에서 부모형제와 함께 살고 있다. 영화는 언니인 수정이 친구들에게 소개받은 성주라는 남자와 ‘썸’을 타고 연애와 결혼을 꿈꾸는 로맨스를 서사의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수정의 연애는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다. 겨울에 소개 받은 후 설렘을 느끼며 봄을 지나지만 매미가 거세게 울어대던 늦여름의 어느 날 그 모든 감정과 기대들은 씁쓸하게 끝나고 만다. <팬지와 담쟁이>는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의 세월을 지나며 뜨거운 여름의 열기와 아이러니하게 대비되는 상실의 쓸쓸한 정취를 그린 계절영화이고, 호프집, 미장원, 사진관, 산부인과 병원, 지하철, 공원, 바닷가, 오래된 아파트 등 1990년대 말 부산 구석구석의 풍경을 보여주는 로컬 영화이기도 하다. 로맨스, 계절, 부산이라는 세 키워드를 품은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7개의 시퀀스로 구성된다. 각 시퀀스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어있다. ‘웨딩드레스 제작 중 1 - 야학 선생님 결혼식 - 웨딩드레스 제작 중 2- 엄마 기념사진 – 노래자랑 – 여름바다 - 웨딩드레스 제작 중 3.’ 오프닝씬은 호프집에서 술 게임을 하며 성주가 수정의 흑기사를 자처하고 노래방에서 함께 <19살이에요>를 부르며 ‘썸’을 타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퀀스의 제목은 놀랍게도 ‘웨딩드레스 제작 중 1’이다.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어 상호 감정을 나누는 단계를 모두 건너뛰고 결혼을 가정한 채 성관계와 임신 및 출산을 고민하는 단계로 돌입한다. 실제 성주의 관점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성주가 어떤 마음과 의향을 갖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썸-연애-결혼’이 압축된 시간성은 당시 부산에 거주하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 담론과 연관되어 있다. 수정은 성주가 노래방 ‘블루스 타임’에 키가 작은 자신을 안아 들어 올려 춤을 췄을 때 활동지원사들한테 안겼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고 수줍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연애경험이 없는 수정은 성주의 마음을 확신하기 어렵다. 동생 윤정과 연애상담을 해주는 친한 친구인 수견 언니는 수정에게 “내숭 떨지 말고” 성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라며 다그친다. 그리고 그들은 좋아하는 마음의 확인에서 결혼의 가능성으로 곧바로 넘어간다. 설렘과 연애의 낭만은 생략되다시피 재빨리 처리되고 결혼 이후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안전한 성관계 그리고 임신과 출산 대한 현실적인 고민까지 급속도로 일이 진척된다. 첫 만남의 설렘은 곧 연애가 되고, 연애는 곧 결혼이 된다. 이러한 성급한 ‘웨딩드레스 제작’은 분명하게 발화되지 않지만 암묵적인 몇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한다. 첫째, 수정은 성관계와 재생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 기회를 삼아 성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둘째, 수정은 이성애 결혼을 원한다. 셋째, 30대 후반이라는 나이와 장애를 고려할 때 수정에게 연애의 기회는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그래서 조금의 호감도 곧 결혼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넷째, 수정의 성격과 장애를 고려할 때 의지할 가족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첫 번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가정은 모두 당연한 현실도 타당한 진실도 아니다. 오히려 수정이 정말로 결혼을 (사실은 연애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왜 결혼을 원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다른 관계와 섹슈얼리티를 탐색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기회’를 잡는다는 건 오히려 다른 기회, 결혼이 아닌 방식으로 독립된 가구를 꾸릴 가능성을 제거하는 실천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수정이 성주와의 연애에 소극적인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수정은 연애가 처음이고 주위에서 부추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과 성주의 마음 모두에 확신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수정은 성주의 진심을 불안해한다. 그리고 기저에 잠재해있던 수정의 불안은 영화의 결말에서 현실화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갑자기 호감 정도의 감정을 급작스럽게 결혼으로 이끌고 갈까? 여기서 <팬지와 담쟁이>는 다큐멘터리가 제작자에 의해 ‘창의적으로 구성되고 설정된 것’임을 인식하게 한다. 여러 시퀀스의 제목에 사용된 “웨딩드레스 제작 중”이라는 언어적 프레임은 장애여성이 연애와 결혼을 고려하는 데 있어 어떠한 (차별적이고 자원이 한정된)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연출된 호들갑이자 인위적 과장이다. 그래서 “제작 중”이라는 현재형 표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들은 정말로 성주와의 결혼만을 염두에 두고 이 모든 일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가? 영화는 규범적인 이성애중심성이라는 비판의 위험을 기어이 감수하면서도 이 프레임에 두 주인공을 넣는다. 이 프레임 속에서 수정과 윤정은 함께 성인영화 비디오를 보며 키스, 애무, 체위잡기 등과 같은 성적 행위에 대해 기혼인 수견 언니에게 교육을 받고, 각자의 장애 유형과 정도에 따라 안전한 성행위는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부끄러움 속에서 낄낄대며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 사실상 주거의 독립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은 집에 함께 사는 친오빠 때문에 수견 언니 집에서 비디오를 보게 된 사연을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자매는 수견 언니의 조언을 들어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산부인과 의사는 장애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얕은 지식과 희미한 편견을 드러낼 뿐이다. 욕망은 구성되기도 전에 제한된다. 나이, 장애, 성별의 교차 속에서 정보를 비롯한 자원의 부족과 차별적 편견 때문에 그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제동에 걸리고 한정된다. 그래서 자신들의 욕망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탐색할 여유가 만들어지지 않고 규범 속에서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욕망이 허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 수정은 성주의 관심에 설레어 하고 윤정은 그런 수정을 부러워한다. 두 자매는 야학 교사의 결혼식에 참석해 자신들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욕망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기보다는 일상의 환경을 구성하는 조건,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여러 뉘앙스와 제스처의 수행으로 구성됨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가시성(visibility)이다. 소수자의 영화적 가시성은 단순히 출연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두 자매가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드라이로 앞머리를 산처럼 올리는 행동들의 클로즈업, 성인 비디오를 보면서 부끄러워하며 손으로 눈을 가리는 수정과 침착하게 표정관리를 하고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는 윤정, 장애가 있는 아버지와 연애 결혼한 비장애인인 어머니를 일종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미장원 원장의 이야기를 듣는 윤정의 표정, 해수욕장에서 선크림을 서로 발라주고 모래장난을 하는 수영복을 입은 자매의 모습을 사운드 없이 응시하는 카메라, 성주가 수정에게 ‘썸’의 끝을 알릴 때 당황한 수정이 손톱을 튕기는 제스처 등이 모두 ‘웨딩드레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시간, 즉 욕망이 실천되고 구성되는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과 제스처에는 하나로 의미를 결정할 수 없는 수많은 현실의 일상과 감정들이 섞여 있다. 또한 해수욕장에, 노래자랑 예선에, 보도에, 지하철에 장애인이 존재하고 그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도 자연스럽게 가시화한다. 일상을 쫓는 카메라는 두 자매와 함께 이동하며 관념적 상상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구체성을 전달한다. 걷는 것이 힘든 윤정은 자신의 체격과 신장에 맞는 탈 것으로 아동용 플라스틱 장난감 차를 사용한다. 윤정이 선택한 이동수단은 목발이나 휠체어가 아닌 다른 탈 것의 가능성을 가시화한다. 또한 이 이동수단은 장애인이 자신의 경험적 지식을 활용해 다양한 신체에 딱 맞게 개조한 크립 테크(criptech, 그리고 하이데거가 말한 도구가 아닌 예술로서의 테크네)의 훌륭한 사례가 된다. 그녀가 노래자랑 예선 무대 위에서 장난감 차 위에 앉아 이정현의 <와>를 춤과 함께 부를 때, 예선에서 떨어지고 벚꽃이 흩날리는 보도를 지나갈 때 노랗고 빨간 원색의 장난감은 시선을 잡아 끈다. 지하철에서 저신장인 수정과 윤정의 아이레벨에 맞춰 카메라가 낮아지자 자매를 응시하고 있는 어린 아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은 복잡한 레이어를 만든다. 성인의 신장은 매우 다양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아이레벨 역시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위치가 낮은 아이레벨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만 동일시할 수 없다. 동시에 실제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때때로 저신장 장애인을 아이처럼 대해온 사회적 고정관념의 시선을 환기하며 성찰을 유도한다. 그리고 타인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윤정은 자신의 체격에 잘 맞는 장난감 차를 자신의 탈 것으로 선택하며, 이러한 선택은 윤정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잘 드러낸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다른 장면에서는 높은 지하철 계단에서 장애인용 승강기로 내려가는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 자매는 능숙하게 승강기를 이용하지만 자매와 함께 탄 승강기 위의 카메라 시점은 그 승강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 영화 < 접속 >(1997)의 OST로 유명한 <러버스 콘체르토>의 단조로운 경음악이 경고음으로 계속 울려 퍼지자 행인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지하철 계단의 장애인용 승강기의 아슬아슬함, 무심하고 단조로운 <러버스 콘체르토> 경음악, 행인들의 무례한 시선은 이동을 환기하는 정동이자 ‘웨딩드레스 제작’의 조건이다. 그리고 자매는 반복되어 무뎌진 그 일상을 무심하게 받아들인다. 이 영화가 강조하는 또 다른 가시화는 장애의 서로 다른 유형과 정도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위계이다. 모든 연애관계에는 다층적이고 미묘한 권력이 작동한다. 수정과 성주의 관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권력은 장애의 정도가 된다. 성주는 겉보기에는 장애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증 장애인이다. 신체적으로 장애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권력이 된다. 늦여름 한낮의 공원에서 성주는 내내 담배를 피우고 주저하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어머니가 자신이 장남에 외동이어서 손자를 보길 원한다, 자신과 비슷한 장애가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나이가 있는 수정의 결혼까지 걱정해주는 조심스러운 그의 말들은 날카롭게 상처를 낸다. 듣는 내내 말이 없는 수정은 찡그린 얼굴에 어색하고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애꿎은 손톱을 튕긴다. 성주의 “여름이 다갔나”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그들의 연애도 끝을 맺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별 시퀀스의 제목은 여전히 현재형인 ‘웨딩드레스 제작 중 3’이다. 이번 연애는 실패했지만 자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까? 인공적으로 연출된 에필로그 시퀀스는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다 한가운데 쪽배를 탄 수정과 윤정을 보여준다. 둘은 영화 내내 염원하던 하얀 면사포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빨간 입술의 화장을 하고 있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 가운데 수정이 부르는 <나는 19살이에요>가 울려 퍼진다. 소프트 포커스 효과로 꿈처럼 연출된 환상성과 대비되게 둘의 표정은 지나치게 덤덤하다. 이 허구적 스펙터클은 극적 사건이나 분명한 감정의 표출과 거리가 멀다. 공들여 만든 이 장면은 결혼의 은유로 사용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는 문자그대로의 소원성취인가, 동네 미장원 원장의 말처럼 자매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면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모두 헛된 꿈이었다는 냉소적 자각인가. 그것도 아니면 수정이나 윤정 같은 저신장 장애 여성이 연애와 결혼을 하기 위한 환경과 조건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실재의 대면인가. 이 장면은 그 모든 욕망과 감정이 중첩된 이미지이다. 이 장면은 그들의 과거의 상실과 실패, 현재의 바람과 희망, 욕망을 탐색하고 실현되기 위한 미래의 조건을 질문한다. 이 허구의 연출된 장면은 그래서 실재적 환상이다. 이 시퀀스의 환상성과 쓸쓸한 정취, 원하던 웨딩드레스를 입었지만 웃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무심한 표정은 목적이 뚜렷한 실패나 성공의 서사를 지지하지 않는다. ‘웨딩드레스’는 그래서 단순히 ‘성공으로서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여성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 그 선택의 자유, 그 길의 이동성을 뜻한다. 그래서 여전히 ‘제작 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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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행 >( 연상호 , 2015)은 (마치 6.25때처럼)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서울을 버리고 부산에 다다르기 위한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가족을 위한 헌신이라는 마침표로 완성되었다. 부산행으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을 그린 < 반도 >(2020)는 어디로 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한반도를 버리는 이야기다. 북한은 38선으로 보호받은 듯 보이기 때문에 한반도라기보다는 대한민국이 소멸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심에 있는 가족 이야기로 따지면 <반도>의 가족은 수차례의 슬로모션을 거치며 천천히 결말을 향해 간다. 코로나19 때문에 극장에 관객이 반도 차지 않기도 했지만, 웃을 법한 장면에서도, 놀랄 만한 대목에서도, 울컥할 만한 신에서도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사실이 내내 신경쓰였다. <부산행>이 끝난 뒤, 대한민국은 좀비의 땅이 되었다.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부산마저 좀비에 점령당했다. 가까스로 부산을 출발한 배에 탑승한 군인인 정석( 강동원 )은 누나와 조카를 배 안에서 발생한 감염으로 잃고, 매형인 철민( 김도윤 )과 홍콩에 정착해 살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한국말을 쓰면 극심한 차별을 당하는 상황이고,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도 어렵기만 하다. 정석은 홍콩의 범죄조직으로부터 서울에 있는 달러를 가지고 나오면 그 절반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현금을 가득 실은 트럭이 목동 오목교 근처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다. 정석은 철민을 포함한 한국 출신자들과 네 명으로 된 팀을 꾸리고, 그 돈을 가지러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향한다. 인천항에서 목동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아포칼립스 서울의 모습이 드러난다. 웃자란 식물이며 아무렇게나 버려진 차량들 사이로, 소리와 빛에 반응하는 좀비들이 돌아다닌다. 정석 일행은 인천항에서 오목교 왕복이 수월하리라 생각하지만, 차를 발견해 빠져나오려는 순간 조명탄이 그들 앞에서 터진다. 정석은 도움을 제안한 준이( 이레 )와 유진( 이예원 )을 따라 간신히 빠져나온다. <반도>의 서울 풍경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는데, 인천항에서 오목교까지, 그리고 시내 곳곳이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이 뚫려있다는 것이다. 좀비가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생존자들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하는 셈이다. 631부대라고 불리는 군인들은 브레인격인 서 대위( 구교환 )와 좀비 대응에 강한 황 중사( 김민재 )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한편 정석은 생존자인 준이, 유진, 민정( 이정현 ), 김 노인( 권해효 )을 만나 군인들이 가져간 현금차량을 가지고 홍콩으로 가자고 설득한다. <부산행> 세계관의 연장에서 기획된 작품이기 때문에 <반도>는 <부산행>과 비교당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관객이 <반도>를 보기로 결정하는 단계에서부터 <부산행>에 대한 호의가 보답받기를 기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반도>의 주요 인적구성은 <부산행>때와 비슷한 데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표현하면 군인들을 제하면 ‘그림체가 같은’ 인물구성이 눈에 띈다. 중심에 있는 공유와 강동원, 정유미와 이정현, 김수안과 이예원이 그렇다.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가족 이야기로 마무리된다는 것 역시 그렇다.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서의 흐름은 두 작품이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가장 차별화되는 공간과 인물 구성은 바로 631부대다. 서 대위와 황 중사는 군인들의 구심점에 있으나 서로 불화하고 있으며, 서 대위가 군인들을 지배하는 방식은 식료품의 배급과 잡아온 생존자들과 좀비를 싸우게 해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인들의 생존력이 어떻게 다듬어졌는지는 잘 보여지는데, 민정이 이끄는 두 소녀와 치매 노인 쪽은 무슨 수로 살아남았는지 영화 속 정보로는 파악이 어렵다. 문제는 슬로모션이 수시로 등장하는 후반부다. 정서의 흐름이라는 면에서 이미 <부산행>으로 학습을 마친 관객은, 반복되는 슬로모션으로 지연되는 결말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된다. 긴장감있는 에피소드와 액션이 인간과 좀비 사이에서 쉬지 않고 이어지니 지루할 틈은 없다. 하지만, 감정은 학습한 대로 흐르고 심지어 슬로모션으로 자꾸 지연된다. 재미있지만 동시에 시큰둥한 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예상한 감정을 체험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