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
- 감독
- 박경희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서주희, 정은혜
사회복지학과 졸업을 앞둔 성희는 장애인 활동지원 아르바이트 활동 중 허리를 다치게 되고, 어떠한 산재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이용자로부터 해고당하게 된다. 학자금 대출, 생활비, 치료비 및 스페인 출국을 위한 자금 마련 등을 이유로 일을 그만둘 수 없었던 성희는 활동보조센터 담당자에게 산재 처리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일이 많지 않은 새로운 이용자 배정을 강력히 요구한다. 이후 하루 종일 의식 없이 누워만 있는 중증 장애인을 새 이용자로 배정받은 성희는 별 일 없이 업무시간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지만, 성희의 형식적인 업무 수행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용자의 아들 현목과 갈등에 놓인다. 다른 일자리에서 비해서 비교적 높은 시급을 받고 있지만, 고용 불안정과 이용자의 부당한 업무지시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장애인 수급비와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고 있지만 보통의 삶을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장애인 가족의 빈곤과 결핍. 이들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 < 에듀케이션 >( 김덕중 , 2019)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복지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로만 정의하기에는 여러 함의들이 내포되어 있다. 걷기 어려울 정도로 허리를 심하게 다쳤음에도 일을 쉴 수 없는 성희에게 장애인 활동지원사는 대학 졸업을 위한 실습 시간을 채워야하는 아르바이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성희가 직업의식이나 장애인 운동에 관한 사명감 없이 오로지 졸업을 위한 수단 겸 시급 높은 생계 수단으로만 활동지원 노동을 생각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성희에게 깊은 정서적 유대와 감정 노동을 원하는 현목과 이를 거부하는 성희 이 둘 중 누가 더 잘못했다고 명확히 판단하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을 내다가 기어코 파열로 끝나는 <에듀케이션> 인물들은 신체적·정신적 한계로 인해 자유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현목 엄마를 제외하곤 자신의 입장만 앞세우는 경향이 크다. 가령 활동지원사의 시급이 다른 직종보다 높다는 이유로 가사노동과 친밀감을 요구하는 현목에게 성희는 “(활동지원사가) 가사도우미, 파출부는 아니다.” 식으로 맞서는 설정이 몇 번 등장하는데 상시 업무 외 업무를 강요받는 활동지원사의 열악한 노동 환경 및 고용 불안정을 생각하면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아직 정서적 돌봄과 지지가 필요한 미성년자 현목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는 성희가 야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용자(혹은 이용자 가족)와 활동지원사간의 과도한 친밀감과 그로 인해 형성된 공고한 관계는 활동지원 노동 현장에서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고, 오히려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의 자기 결정권과 자립을 방해한다는 의견 또한 제기되고 있다. 1) 그렇다고 성희와 같은 활동지원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려드는 중증 장애인과 그(녀)의 가족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무조건 근절할 수도 없는 형국이다.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일상에 끼어들고 싶지 않는 활동지원사 성희와 그녀에게 정서적 유대와 친밀감을 간절히 원하는 장애인 이용자 가족 현목. 허나 <에듀케이션> 속 성희와 현목의 갈등은 두 개인의 갈등 혹은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장애인 이용자 (가족) 간의 문제를 넘어 현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제도만으로는 장애인(가족)의 자립과 사회 활동 참여 증진이 어려운 현실과 맞물린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밤낮없이 일해서 겨우 최저생계비를 면할 정도의 수입으로 먹고 살아야하는 성희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청년 도시 노동자의 비애를 대변한다.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시험 준비를 포기한 이후 스페인 이주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성희의 일상은 답답함과 무기력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막연하게라도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성희와 달리 중증 장애인의 보호자라는 이유로 많은 활동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현목의 상황은 더욱 참담하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 현목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는 있지만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성희와 자칫 잘못하면 엄마는 물론 스스로에게까지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현목의 관계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실패한 성희와 현목은 우려했던 대로 파국을 맞는다. 영화 <에듀케이션>은 장애인 활동지원 사업의 문제점을 전면으로 제기하기보다 복지 정책에서 완전히 소외된 청년 간의 갈등에 더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로 규정하고 이기적인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바쁜 성희와 자신의 미숙한 언행을 돌아볼 여력조차 갖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리는 현목. 승패 없이 서로에게 자괴감과 모멸감만 남기는 이들의 다툼은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각자의 불행을 이유로 자신의 입장만 내세울 뿐 정작 타인에 대해서는 몰이해로 일관했던 성희와 현목의 갈등을 극대화시키면서 엔딩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과연 영화가 보여준 엔딩은 절망과 분노 밖에 남지 않은 혼돈의 끝인가 아니면 미약하게나마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까? 스포일러가 될 까봐 더 이상 언급할 수 없지만, 단언컨대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문제적 엔딩이다. 1) <‘활동보조 갈등’을 바라보는 3인 3색 시각들>, 에이블뉴스, 2013.12.16.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햇살에 반짝이는 잔잔한 강물은 무심한 듯 아무 말이 없다. 아이들은 강가 옆 풀밭에서 천진하게 놀고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맑은소리와 조용히 흐르는 강물 사이로 한가로운 여름날의 모습이 보인다. 평화롭고 잔잔한 풍경 뒤로 어린 소녀의 주검이 강물에 흘러 떠내려온다. 그 주검 옆으로 영화의 제목인 < 시 >( 이창동 , 2010)의 필체가 그려진다. 너무나 강렬한 <시>의 첫 장면이다. 소녀의 시체와 <시> 상극인 두 세계의 매치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어서 나오는 병원 씬. 의사는 미자에게 “그거 기분 나쁘네요?”라며 반문한다. 일상의 단어들이 종종 생각이 안 나고, 잘 잊어버린다는 말에 감독은 의사의 입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미자의 세계에 기분 나쁜 일 이 펼쳐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시는 아름답다. 글자에서 주는 어감과 은유적 단어들이 주는 창조적 상징들은 아름다우면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생각하게 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미자의 내면과 그녀가 처한 차가운 현실 세계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과연 두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가? 이분법적으로만 구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중 김용탁 시인은 문화센터 수강생들에게’본다’ 에 중점을 두며 가르친다. 일상의 모든 것 들에게 마음을 주며 진심으로 대한적이 있냐고, 깊이 들여다 본적이 있냐고, 이제까지 본건 진짜로 본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지만 김용탁 시인이 말한 것처럼 자세히 보지 않는다. 그냥 습관처럼 지나칠 뿐이다. 시를 쓰려면 자세히 봐야 하고 그 봐야 하는 대상은 현실의 세계인 있는 일상의 공간뿐이다. 미자는 쓸쓸한 강물, 떨어지는 살구, 들판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지만 매일 하는 설거지 통에서는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시 낭송회에 갔다가 순수한 시를 읊는 자리에서 저질스런 농담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처음부터 그녀는 시와 일상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인식했다. 아름답고 순수한 것만 ‘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손자가 성폭행의 가해자지만 아무일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행동하고, 소녀의 영정사진 앞에서 그냥 밥을 먹고, 별일 없는 것처럼 친구와 몰려다니며 게임을 하고 똑같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가지만 미자는 괴로워한다. 소녀가 자살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다리에 올라가 소녀의 마음을 헤아린다.. 바람결에 모자가 강물에 떠내려가는걸 보고 소녀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굵은 소나기. 시 노트에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쏟아지는 장면은 어쩌면 소녀의 눈물이 고스란히 미자에게 다가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현실에서 소녀의 죽음을 자세히 관찰하며, 마음을 쏟고, 깊숙이 들여다봤다. 다른 가해자의 부모나, 슈퍼의 동네 아줌마들이 거들떠 보지 않았던 소녀의 죽음을. 그녀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진짜로 보는 것, 진짜로 마음을 쏟고, 깊이 들여다 보는 것을 이미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수강생들 중 유일하게 그녀만이 시를 완성한다. 모두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했지만 그 말을 시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 시는 시로써, 일상은 일상으로써 그렇게 그들은 시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경계에 서 있음을 확증하며 그 이면의 다른 것들은 깊숙이 들여다 보지 않았다.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지만 시를 쓰려는 그 마음을 먹기가 어려운 것처럼. 과연 ‘시’란 어떤 것일까? 단순히 어렵고 이해하지 못할 은유들로 가득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존재일까? 미자가 그토록 쓰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시’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름다운 것과 인간의 추악함이 가득한 일상의 곳곳에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혜안의 열쇠일까? 평범한 우리들에게 시가 열리는 그 순간은 올 수 있을까? 미자 역을 맡은 윤정희는 60년대 3대 트로이카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외모에 다양한 연기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배우다. 이창동 감독의 권유로 15년만에 출연을 결심했다던 그녀는 영화에서는 여타 60대 중반의 할머니와는 다른 톤의 연기를 보여준다. 일단 말투와 어감, 옷 입는 차림새, 생각하는 것, 시를 쓰는 것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대 또래와는 다른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미자’라는 인물은 영화 속에서 독특하게 묘사되며 그 캐릭터에 잘 녹아든다. 이제까지 감독의 전작에 나왔던 배우들과는 다른 질감이다. 영화 속 에서의 모습과 실제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독특함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연기를 2시간 내내 보여줬다. 그 특유의 말투에 이질감이나 이상한 부분은 느낄 수 없었다. 영화 속 캐릭터의 특이성이 잘 발현된 배우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 부분이 미자와 잘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창동 감독은 전작 밀양에서 신애(전도연)을 통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이야기 했다. 그녀는 그 힘듦을 종교적인 구원으로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 했지만 가식적인 교회 사람들과. 자신이 불행할거라 단정지으며 불쌍히 보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교회를 등진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행동으로 모든걸 끝내려 한다. <시>에서는 밀양과는 반대로 가해자 입장에서의 용서를 말한다. 그 용서와 속죄의 중심에는 아름다운 ‘시’가 있다. 두 영화 다 ‘용서’를 말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조금 다르다. 밀양은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모습 옆으로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비추며 끝을 맺는다. 마지막에 은은하게 내리쬐는 그 햇볕의 의미는 뭘까? 그래도 세상은 한줄기 희망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다는 뜻일까? 아무런 설명 없이 빛으로 끝나는 이 장면은 깊은 여운을 준다. 그나마 이 빛이 조금이라도 세상 여러 곳곳에 비춰졌으면 하는 희망으로 보인다. <시>는 흐르는 강물위로 미자가 썼던 ‘시’만 나오고. 그녀는 자취를 감춘다. 긴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모습은 그녀의 자살을 의미하지만 영화 속에선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밀양의 희망과 달리 시는 속죄의 의미로 죽음을 택했다.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하는지..감독의 선택에서 냉혹하리만치 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시와 현실이 동일시 된다면 시의 완성으로 그녀는 존재해도 되지 않을까? 육체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져야 했을까? 영화의 마지막. 학교의 교실, 운동장, 과학실, 배드민턴을 쳤던 빌라 앞 마당, 마을버스의 정류장, 피해자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어귀, 소녀가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물 위 다리, 그리고 희진의 미소 띈 얼굴이 보인다. 급격한 파도와 풍랑을 겪은 후 다시 일상의 모습들을 카메라는 천천히 훑는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동네에서 삼삼오오 모여 놀거나 담소를 나눈다, 강물은 첫 장면처럼 변함없이 유유히 흐른다. 모든 게 그대로인 일상. 이 평온한 일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흘려 보낸 건 무엇일까? 이 영화는 미자가 손자를 스스로 경찰에 넘김으로써 영화적 소명을 다 했다. 만약 현실이라면 부모들은 사고를 친 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어떻게든 보호하려 위해 애쓸 것이다. 절대로 먼저 본인들 손으로 경찰에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코. 현실에서는 부모라면 할 수 없는 일이 영화 속에서 실현 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할 수 없는 일들을 실현시키며 관객들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좋은 영화를 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룬 영화들을 본다고 해서 윤리적인 면죄부를 부여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영화들을 보며 과연 내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내 마음가짐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일상의 잔잔함 속에서 시와 현실의 세계. 나아가서 영화와 현실의 세계에 대한 간극은 좁혀지고 더 많은 공감과 이해로 우리들을 이끌어 줄 지 모르겠다. 그건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연일 화제다. 로맨스는 심쿵하고, 전우애는 훈훈하다. 덕분에 군인의 사랑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진다면, 이번 주 종영을 앞둔 드라마의 여운을 간직하고 이번에는 1960년대의 절절한 군인 로맨스를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영원한 영화청년, 장르영화의 장인 김기덕 감독전’을 통해 상영될 영화 < 남과 북 >(1965)은 6.25전쟁이 낳은 비극을 테마로 한 전쟁영화이다. 한국 1960~70년대 고전 영화들은 마치 그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시야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당대의 관객들도 한국영화를 보며 행복한 꿈에 젖거나 슬픔을 달랬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은 누구나 그 이름은 들어봤을 < 맨발의 청춘 >이나 SF영화 < 대괴수 용가리 >를 비롯해 코미디, 멜로, 청춘, 가족, 전쟁, 스포츠 등 다양한 장르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가깝게 다가섰고, 열악한 제작환경과 엄혹한 검열 속에서도 당대의 문제의식과 장르영화를 잘 버무려 소개한 열혈감독이었다. 전쟁이 소환하는 비극성은 그 자체로 엄청난 극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에 많은 작품들이 교전의 스펙터클과 함께 관객을 압도하고는 한다. 그런데 < 남과 북 >은 최전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포격 소리와 전투기 나르는 하늘 정도에서나 교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대신 이 영화가 주목하는 전쟁의 비극은 거의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 분단 때문에 헤어진 연인 고은아를 만나려고 투항한 북한군 장일구 소좌, 그를 인솔한 남한군 이해로 대위, 그리고 이해로의 아내가 된 고은아. 이 삼각관계, 나아가 영화 전체에는 악한이나 적이 없다. 장일구와 이해로는 서로의 됨됨이에 존경을 보내며, 심지어 둘 사이에는 어떤 교감이 흐른다. 감독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영화는 검열로 인해 라디오 방송극이었던 원작과 다른 결말로 개봉하게 되었다. 여기서 원작 결말만 공개하자면, 이해로가 교전에서 전사하자 장일구가 복수를 위해 다시 북쪽으로 향하고 이로 인해 그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거의 브로맨스 같지 않은가? 하나만 구한다는 이름 뜻을 가진 장일구가 좇은 하나는 사랑이지만, 그 사랑의 대상이 연인인지 우정인지 명예인지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그러니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고은아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비극이 그녀의 몫 같기도 한 것이다. 로맨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상대에게 반하는(영화 대사 중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군인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보다는 사랑을 중시하며, 적군이 없고, 서로를 존경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태도를 통해 분단의 비극을 절절하게 담아낸다. 영화 첫 장면을 보면 장일구가 투항하면서 “쏘지 마시오”라고 외치는데 원래라면 장일구는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니, 이때의 영화가 수미상관 구조를 통해 전쟁 비판에 대한 적극적인 발화 효과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영화로 소개되지 못했던 위 결말의 느낌을 실제 영화화된 결말과 비교해 상상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것 같다. 사나이 울리는 진~한 이야기는 김기덕 감독의 마지막 작품 < 영광의 9회말 >(1977) 까지도 이어진다. 정통 스포츠 영화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오합지졸 야구팀이 좋은 지도자를 통해 번듯하게 거듭나는 이야기로, 우선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진정한 선수로 나아가는 익숙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또 대사를 통해 야구란 협동, 희생, 인내를 바탕으로 하는 스포츠임이 강조되며, 경일고교 야구팀은 그러한 정신을 배우고 익혀가는 과정을 겪으며 진정한 팀을 이루어 간다. 이러한 익숙한 흐름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독특한 점은 승리와 패배가 그려지는 방식에 있다. 물론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라면 공정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어 승부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는 과정이 담기고 거기에는 승리도 패배도 있게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어쩐지 이미 패배를 받아들이거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비록 용가리는 죽지 않았지만, 청춘의 사랑은 자살로 끝나고, 권투 선수는 지키려 했던 소년을 결국 잃고, 연인은 화합하지 못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는 무수한 좌절과 불운의 감각이 정서적으로 녹아있는데, 이 마지막 영화도 은근히 그런 정서를 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 영화가 승리를 통한 한방의 성취보다 패배 후 다음 시합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에 과제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최동수 감독의 선수 시절 과오를 반복하지 못하게 된 영수의 모습에서도 그런 영화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장일기가 현재까지 김기덕 감독이 우리에게 전한 마지막 이야기이다. 사상 검열에 있어 최고조였던 1970년대였으니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의 건강한 톤이 검열을 피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작품에서 드러나는 교훈이 청년 시절 고구분투하며 영화를 제작하는 중에 얻은 귀중한 가치관으로 느껴지는 것은 오해일까? 김기덕 감독의 연출가로서의 삶에 < 영광의 9회말 >이 전하는 교훈을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에는 검열과 척박한 제작환경이 가하는 무수한 한계 속에서 작업했던 시대감각과 그에 저항하는 정서들이 분열적으로 뒤섞여 있다. 그러니 패배 속에서도 거듭 다음 시합을 생각하며 훈련하고 협동하라는 지침은 그의 연출가로서의 17년간을 이르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이처럼 한국 고전 영화는 수많은 조건들이 빚어내는 우연과 개입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당시 정서, 관객성, 판타지, 사회문제 등을 품은 보고(寶庫)이며,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에 대한 풍부한 보고서(報告書)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