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없는
- 감독
- 박정범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박정범, 문예진, 박종영, 박영덕, 이효원, 서나경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하얀 눈밭 위에 놓인 빨간 자동차일 것이다. 이는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 치유하는 서사의 정점이다. 끌어안은 두 사람의 형상에서는 다소 직접적이고 고전적인 위로와 연대가 묻어난다. 감독은 전작 <아사코>, <우연과 상상>에서도 두 인물의 만남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했다. 아사코는 우연히 전 남자친구와 동일한 얼굴의 남자를 만났다. <우연과 상상>3부의 나츠코는 우연히 첫사랑과 닮은 여자를 만난다. 여기 <드라이브 마이카>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배정된 드라이버는 꼭 가후쿠처럼 가족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여기서도 가후쿠가 우연의 힘을 빌려 위로받고 나아가도록 만들까? 앞서 언급한 설산의 이미지를 보면 이는 결과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카>에는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의 서사에서 연기자는 주인공이 아니라 상대편에 부여된 몫이었다. 주인공은 첫만남에 상대를 오인하는 쪽인 관객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인공 가후쿠가 아예 연극배우로 설정되었으며 그의 연극은 극중극 이상의 존재감을 갖는다. <아사코>와 <우연과 상상>을 떠올리면 주인공을 미사키로 설정하는 서사도 있음직하다. 그녀가 연극배우인 가후쿠와 그의 연극을 차례로 만나 상실을 극복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왜 이번에는 관객, 즉 연기를 듣는 위치(청자)의 시선이 아니라 연기자, 즉 연기를 발화하는 위치(화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여줄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그렇게 되면 난 이 역에 자신을 바칠 수가 없어.” 부인 오토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이어지는 씬은 가후쿠의 클로즈업한 눈물도, 오토가 떠난 빈 집도 아니다. 그것은 연극<바냐 아저씨>의 실연 장면이다. 여기서 가후쿠는 공연 도중 연기를 중단한다. 무대에서 뛰쳐 나온 가후쿠의 등 뒤로 “나도 말할거야. 내 아내는 달아났다고.”라는 대사가 지나간다. 영화를 위해 발췌된 <바냐아저씨> 대사들은 매번 가후쿠의 상황에 부합한다. 하지만 이를 보고 대사가 곧 그의 속마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1차원적이다. 그보다는 연기가 불가능한 상태를 선언하는 이 장면이 영화 2부의 시작임에 집중해보자. 시간이 흘러 2부의 마지막은 이전처럼 연기가 가능해진 상태의 가후쿠를 보여주며 닫힌다. 사실 그는 배우들의 뒷모습만 보고도 ‘무언가 일어났음’을 캐치하는 능숙한 연기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2부는 그가 대사를 발화할 수 없는 순간에서 시작해 대사를 발화할 수 있는 순간까지의 과정이다. 영화는 연기불가능 상태에서 출발해 가능 상태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우리가 따라가게 만든다. 발화의 사전적 의미는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현실적인 언어 행위를 하다’이다. 부인 오토가 죽던 날, 가후쿠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끌면서 대화를 미루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실은 가후쿠를 이 상황 속에 가둔다. 오토는 첫 등장부터 흐릿한 형체와 또렷한 목소리를 보여주었고 딱 그 모습대로 자동차 속에서 반복재생된다. 2년 후,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바퀴는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의 릴과 겹쳐 보인다. 가후쿠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청자인 오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바냐아저씨’의 자리를 빌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후일 미사키에게 ‘아내는 2년 전 죽었어. 그 테이프를 듣기가 무서워졌니’라고 물은 적이 있다. 2년 전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는 행동은 스스로도 무섭다고 생각한 걸까. 그럼에도 오토에게 할 말이 남아있는 한 가후쿠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바냐의 언어’밖에 없다.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아저씨>에는 독특한 점이 눈에 띈다. 다국적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대사를 하되 연극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2부가 새롭게 시작되는 표면적인 이유는 가후쿠가 이 ‘다국어 연극’의 연출직을 위해 히로시마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곧 2부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바냐의 언어’에 갇힌 가후쿠의 앞에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언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터뷰에서 “연기의 바탕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는 사고방식을 밝힌다. 이 말은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의 연출가 가후쿠를 떠올리게 한다. 연기 현장의 하마구치 감독과 가후쿠는 둘 다 ‘날 것의 섬세한 무언가를 어떻게 지켜낼지’ 고민하며 그 불안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 소냐와 엘레냐 역의 배우들은 연기 도중 가후쿠를 등지고 선다. 가후쿠는 연기를 볼 수 없음에도 확신있게 “방금 무언가가 일어났어”라고 외친다. 여기서 가후쿠가 발견한 ‘무언가’를 탄생시킨 주체는 잎사귀를 주워 내민 이유나의 손이다. 수화언어로 연기하는 이유나의 등장마다 우리는 그녀의 손이 보여주는 움직임에 빨려 들어간다. 첫 등장인 오디션 장면에서 카메라는 ‘손의 언어’를 복잡한 동선과 숏의 변화 없이 차분하게 보여준다. 다른 배우들의 다국어 오디션이 카메라로 쪼개지고 붙여지는 동안에도 침묵 속 ‘손의 언어’는 굳건하다. 유나와 윤수가 마련한 식사자리 장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카메라가 나머지 세 사람 의 등을 비추며 어둠 속에 위치할 때도 그녀의 손은 중앙의 빛나는 공간에 놓여있다.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만난 새로운 언어는 ‘손’외에도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침묵하되 매번 섬세한 응답을 보내 주는 드라이버 미사키의 언어이다. 미사키는 어디든 가 달라는 가후쿠의 질문에 긴말없이 ‘있다가 없어진 흔적의 공간’으로 차를 몬다. 가후쿠의 과거사를 들은 뒤엔 “소중하게 대해 온 게 느껴져 그의 자동차가 좋다”는 말을 고른다. 그 정점은 가후쿠가 생각할 만한 장소를 물을 때 그녀가 자동차를 툭툭 두드린 몸짓이다. “차 안이 좋겠네요”같은 말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어쩌면 겉으로는 상응하지 않는 듯 보이는 문답이지만 드라이버 미사키가 가진 ‘운전수의 언어’는 결국 가후쿠를 아픔에서 건져낸다. 그를 설산 위의 빨간 자동차까지 데려간다. 다시 하마구치의 말로 돌아와 보자. 섬세한 연기의 탄생은 불안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 불안은 ‘바냐의 언어’를 붙잡고 싶은 가후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정해둔 청자를 놓치기 싫은 불안감이다. 자신이 선택한 언어는 곧 자신이 선택한 청자와의 연결통로를 만든다. 이 다국어 연극 속에서는 상대배우의 낯선 언어가 끊임없이 낯선 연결통로를 만들고 있다. 가후쿠는 이 연극의 연출가로서 배우들이 감정을 제외하고 대본의 글자만 읽게끔 지시한다. 미리 결정하고 외워서 재현하는 감정표현과 그것을 서로의 큐사인으로 사용하는 순간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작 가후쿠 자신은 그것에 실패했다. 그는 오토가 가진 ‘꿈의 언어’를 습관적으로 되돌려 주었을 뿐이다. 꿈이야기의 소녀처럼 징표를 남기고 싶어한 오토의 부유를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가후쿠가 ‘대본의 언어’뒤로 숨고, 오토가 ‘꿈의 언어’뒤로 숨었을 때 둘은 ‘좀 더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 했다. 경계했어야 했다. 야외 리허설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유나가 상대 배우를 등 뒤에서 껴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는 불쑥 상대의 눈 앞으로 수화를 등장시킨다. 통상의 음성언어에서는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서 있을 때 껴안지 않아도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낯선 손의 언어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나뭇잎을 주워 주며, 바냐 아저씨의 가슴과 턱을 두드리며 말한다. 이 낯선 연결통로의 생성은 ‘무언가’를 만든 힘이고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를 안아주게 한 동력이다. “실제로 섬세한 연기가 탄생하는 것과 가후쿠를 비롯한 상처받은 영혼들이 재생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감독의 대담 속 한 구절을 통과하며, <드라이브 마이카>의 차별점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다. 물론 영화는 전작들의 장기인 ‘어긋남과 기다림’의 테마를 가후쿠-오토의 관계 속에 능숙하게 녹여낸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숏은 ‘오토를 외면한 가후쿠가 상처를 직면하고 나아간다’는 하마구치 식 서사구조 역시도 또렷히 전달한다. 다만 이번에는 여기에 연기자 가후쿠의 시선을 덧붙인다. 연기 불가능 상태인 가후쿠에서 시작해 연기 가능상태인 가후쿠에 도착하는 과정. 가후쿠가 연극을 둘러싼 새로운 언어들을 만나 불안을 겪고, 그 불안에서 탄생한 섬세한 위로를 경험하는 과정. 왜 이번에는 맞은편인 연기자의 시선을 경험하게 하면서 이 서사구조를 보여주었을까. <아사코> 속 아사코의 맞은편에는 새 남자친구인 료헤이가 있다. 료헤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아사코가 전 남자친구와 갔던 사진관에 놓인다. <우연과 상상> 속 나츠코의 맞은편에는 미카가 있다. 미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대화 속 첫사랑의 자리에 놓인다. 이때 주인공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상대를 오인하고 맞은편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가후쿠의 시선을 경유하며 이 시간이 단순한 오인이나 관찰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연기를 ‘요구’하는 중임을 안다. 맞은편의 상대에게 낯선 언어와 낯선 연결통로를 제안하는 중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제안이 상대방의 재생을 촉구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이는 그동안 스크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관객석에도 해당된다. 우리도 가후쿠처럼 하마구치 영화에서 주인공의 맞은편에서 자리한 채 낯선 언어를 제안받아 재생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는 야외리허설 장면과 동일한 정면샷으로 가후쿠를 안아준다. 하지만 객석을 등을 지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보며 안아준다. 그렇게 연습 당시 두 배우 사이에 일어난 ‘무언가’가 드디어 객석의 미사키에게도, 스크린을 보는 우리에게도 허락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김학성 (金學成) 촬영감독에게는 여배우 최은희 의 전남편이라는 과거사가 따라붙었다. 여기에 미8군 무대에 섰던 재미 가수 김계자의 외삼촌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바로 월북 배우 김연실 (金蓮實)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전 조선 아마추어 복싱 플라이급 선수권 보유자였다는 전력이 함께 언급됐다. 그는 평소에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연출해보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에 떠밀려 살아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그의 운명론적 인생관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나든 특유의 6?25 전쟁 체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당시의 촬영기사들은 전황을 기록하기 위해 종군했다. 김학성 도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 소속으로 최전방에 나섰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던 아내( 최은희 )가 국군의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난 지 얼마 안 된 뒤였다. 1.4후퇴 때였다. 수원 북방 안성 2백고지 전투는 서울 진격의 성패가 달린 중요한 고비였다. 1사단 15연대는 혼성부대와 함께 혈전을 벌였다. 선두에 선 소대가 고개 중턱에 이르렀을 때 박격 포탄이 작렬했다. 그 순간 그들을 따라가던 그의 몸도 땅 위로 솟구쳤다. 그날 오후 고갯마루로 진격해온 군인들이 시체더미 사이에 떨어진 뉴스 촬영용 아이모 카메라(Eyemo Camera)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니 그때 그가 국방부 정훈국 소속 촬영대원임을 밝히는 완장을 차고 있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됐을 것이다. 아랫배에 세 군데나 관통상을 입은 그의 오른쪽 가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더욱이 오른발은 반이나 날아간 상태였다. 피로 얼룩진 국방부 발행 신분증을 보게 된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수원의 야전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미군의관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끈질긴 그의 목숨은 대구 제16육군병원으로 후송된 후 한 미군 고문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이번에도 그의 몸을 덮은 담요에 표시된 ‘보도대원’ 덕이었다. 그는 이렇게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세 번의 고비와 일곱 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를 포화 속에서 살려낸 것은 메고 있던 스틸용 카메라 코닥 레티나(Kodak Retina)였다. 파편이 카메라를 관통하는 바람에 심장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다 건너온 일본 카메라맨의 우정 내가 의례적인 인사만 건네던 김학성 선생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1966년 봄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월간지의 기자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사회 각계 인사들이 보물로 여기는 애장품을 소개하기 위해 섭외하면서부터였다. 자택에 와주기를 바라는 대부분의 인사들과는 달리 약속한 충무로의 어느 다방에 나타난 그는 물 한잔을 마시고 나자 메고 있던 낡은 카메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 목숨을 살려준 보물이에요. 나의 가보지요.” 예의 스틸용 카메라 코닥 레티나였다. 이 카메라는 선생의 모습과 함께 ‘나의 가보(家寶)’라는 제목으로 화보에 소개 됐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선생을 통해 서울을 방문한 일본의 촬영기사 오카자키 고우조(岡崎 宏三) 씨를 알게 됐다. 조선호텔에서 였다. 맘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이분은 김 선생이 일본 신코(新興)키네마의 촬영 조수 시절 가깝게 지낸 동료였다. 나이는 1913년생인 김 선생보다 다섯 살 아래였지만, 같은 해인 1939년 <사랑의 기념일>로 등장한 데뷔 동기였다. 그는 이후 <36인의 승객>(1957), <어용금>(御用金, 1957), <무뢰한>(1970) 등 40편이 넘는 촬영 작품을 내놓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카메라맨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 영화인들의 왕래가 드물었던 시절, 어렵게 바다를 건너온 옛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며 미안해하던 김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그때 명동 퇴계로 방향 지금의 퍼시픽호텔 왼쪽 남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살았다. 나는 이들의 각별한 우정을 <주간 조선>에 소개하고, 두 사람을 MBC의 간판 프로였던 <모닝 쇼>에 출연하도록 주선했다. 오카자키 씨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나에게 선물과 함께 연하장을 보내오기도 했다. 김학성 선생은 광복 전후의 촬영기사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오늘날에는 촬영기사 대신 촬영감독이라는 명칭을 쓰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냥 촬영기사로 불렸다. 촬영감독 이라는 지칭에는 영화감독의 지시를 받는 단순한 화면 구성자가 아니라, 이와 동등한 위상을 가진 수평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인식에 이르는 데는 그를 존경했던 정일성 촬영감독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임권택 감독과 콤비를 이룬 < 만다라 >(1981), < 서편제 >(1993), < 취화선 >(2002) 등이 진가를 발휘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김학성 선생은 이런 일에 개의치 않고 30여 년에 이르는 카메라 인생의 길을 걸어왔다. 데뷔작 < 성황당 >( 방한준 ,1939)을 비롯한 < 집 없는 천사 >( 최인규 , 1941), < 거경전(巨鯨傳) > < 풍년가 >(이상 방한준, 1944), < 새로운 맹서 >( 신경균 , 1947), < 밤의 태양 >( 박기채 , 1948), < 생명 >( 이강천 , 1958), < 오발탄 >( 유현목 , 1961), < 성웅 이순신 >(유현목, 1962), < 건너지 못하는 강 >( 조긍하 , 1963), < 아리랑 >(유현목, 1968) 등 19편이 그 자취이다. 이 가운데는 6.25 전쟁 전후의 < 여수 순천 반란사건 >(1948)과 <정의의 진격>(1951) 등 2편의 기록영화가 포함돼 있다. < 집 없는 천사 >는 ‘부랑아의 구제 문제’를 부각시켜 ‘사회적인 반향’(<영화순보>, 1941년 11월1일, 제30호)을 일으켰고, < 새로운 맹서 >는 최은희 를 배출함으로써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 생명 >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시대를 여는 기술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 오발탄 >은 한국영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으며 그가 창출한 영상미에도 주목하게 했다. 1982년 11월 20일 선생이 쉰아홉 생애를 거두고 간 지 어느새 3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분과 함께 남산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김연실이 출연한 북한영화를 보고 아쉬워하며 어두운 남산길을 내려오던 일이 손에 잡힐 듯한 기억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