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인력거
- 감독
- 이성규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샬림 , 마노즈, 모하메드, 후세인, 로시니, 암뚬니사, 사담, 문나
19세기 후반 외국인의 출입과 거주가 허용되면서 서울에 근대식 건축물과 일본식 가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로가 닦이고, 전기가 들어오고, 전차가 다녔다. 날이 갈수록 눈에 띠게 달라지는 서울에는 구경꾼들도 모여들어, 각지에서 온 ‘경성관광단’ 소식이 신문지상에 심심치 않게 보도되곤 했다. 구경꾼 무리 중에는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 관광단도 있었다. 대륙으로 뻗어가는 제국의 위세를 확인하기 위해 만주-조선 시찰 중 식민 수도 경성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와 조선의 부산 사이를 운행하는 관부연락선을 이용했는데, 부산항에 내려서 경부선 기차로 갈아타고 경성으로 오는 식이었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 산기슭에 자리 잡은 조용한 마을과 단조로운 농촌 풍경뿐이라 지겨워 졸고 있노라면 시끄러운 소음에 눈을 뜨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가스등과 전기등이 빛을 밝히는 경성역이었다. 전차가 달리고, 자동차가 달리고, 인력거가 달리는 경성은 일본의 도시들을 부지런하게 모방하며 변해 가는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경성에 도착한 그들은 번화한 일본인 거류지에 숙소를 잡고 고궁과 사찰, 유적지, 그리고 종로의 조선인 거리를 탐방한 뒤 다시 일본인 거류지로 돌아오는 식으로 관광을 했다. 자신들과 외모는 비슷하지만 말이 다르고 의식주가 다른 조선 사람들의 생활 풍속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한편으로,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의 식민 통치가 조선의 경관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 ‘흐뭇하게’ 눈에 담는, 제국주의적 욕망이 투사되는 관광이었다. 일본인 관광단에게 경성의 극장은 한번쯤 가 볼 만한 곳으로 여겨진 듯하다. 이들이 마치 조선에 대한 안내서인 양 읽었던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의 소설 『조선(朝鮮)』(東京日日新聞, 1911년 6월 19일~11월 25일 연재)에서도, 주인공이 종로의 조선인 거리와 기생집을 구경한 다음 극장을 찾는 대목이 있다. 일본인의 시선으로 조선의 극장과 공연 문화를 관찰한 이 대목은 당시의 극장 문화를 상상해 보는 데에도 유익한 자료가 된다. (아마도 1908년에 세워진 원각사를 떠올리게 하는) 극장 ‘원융사(圓融社)’에 방문한 주인공은 조선인 관객들과 함께 음악 연주, 기생의 춤, 그리고 중국인 마술과 곰 곡예를 구경하면서, 그러한 극장 연예가 일본과 어떻게 다르며 조선의 관객들이 무엇에 흥겨워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 여행자에게 타지의 극장은 본국으로부터 떠나왔다는 고립감을 환기하는 동시에 이색적인 경험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림2. 곰 곡예 출처: 다카하마 교시, 『조선』 중에서 경성의 도시 경관은 계속 바뀌어 갔고, 극장은 그에 따른 풍속의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할 수 있는 장소였다. 다카하마의 『조선』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나, ‘대경성(大京城)’으로 확장된 경성을 소개하는 『신판 대경성 안내』(『新版大京城案內』, 矢野干城·森川淸人, 京城都市文化硏究所出版部, 1936)가 발간되었다. 이 안내책자는 “영화관 외에는 이렇다 할 놀 곳이 없는 경성인에게 영화 보기는 경성인의 최대 오락”이라며 경성의 여러 극장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희락관, 낭화관, 중앙관, 약초영화극장, 송죽좌, 경룡관, 단성사, 조선극장, 제일극장, 우미관, 동양극장이 영화를 상영하는 시설이었으며, 조일좌와 경성극장이 연극을 상연하는 시설이었다. 『조선』의 일본인 여행자가 조선인 극장에서 조선인이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신기해 하며 관찰하는 태도를 취했다면, 『대경성 안내』는 일본인 관광객이 도시의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여러 소비 공간—카페, 바, 끽다점, 백화점—과 함께 극장을 소개하면서 소비자의 입장에서 유익할 정보들을 제공하는 모양새이다. 각 극장의 주요 프로그램이나 입장 요금, 영사 시설, 냉난방 설비 등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 극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버스나 전차의 노선과 정류장으로 극장의 위치를 안내하는 것도 흥미롭다. 1936년 현재, 아직 명치좌(明治座)는 개관하지 않았지만 경성의 극장가가 한창 들떠 있는 듯하다. 이를 두고 『대경성 안내』는 경성의 영화 흥행계가 설비를 개선하고 신관을 건축하는 등 일본의 일류 도시에 버금갈 정도로 극장을 단장 중이라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경성 영화가의 풍속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1935년 말 신설된 약초영화극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극장에 ‘극장 여급(お茶子)’이 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극장 여급은 입장한 관객을 좌석으로 안내하면서 방석과 화로 등을 거의 강매하다시피 판매했다.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은 ‘50전’의 입장료를 지불하고도 방석과 화로를 따로 구매해야 해서 실제로는 ‘65전’ 이상을 부담해야 했다. 필름 영사 중에도 담배를 필 수 있게 해서 극장 환경이 위험하고, 위생상 불결하다는 점도 관광객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일본의 모든 극장이 고급한 설비를 갖춘 것도, 모든 일본인 관광객의 문화 취향이 고상했던 것도 아닐 테지만, 『대경성 안내』는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추고 관객의 편안한 관람을 방해하는 관행이 없어져야 ‘문화의 전당’이라는 수식어에 걸맞다고 전제하며 일본의 문화 수준에 미달하는 경성의 극장 정보를 이른바 ‘알아두면 쓸데 있는’ 관광 정보로 제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낙후되었다고 본 경성의 극장들에 대한 기록이 오늘날 경성의 극장 문화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셈이다. 상단그림1. 원각사를 모델로 한 '원융사' 출처: 다카하마 교시, 『조선』 중에서 <자료> 1. 다카하마 교시, 『조선』, 김영식 옮김, 소명출판, 2015, 74~79쪽, 부분 발췌. 극장 앞은 아직 번잡하게 보였다. 나는 한정 없이 환락을 쫓아 돌아다녔던 학생 시절의 기분을 환기시키면서―열한 시가 되건 열두 시가 되건 잠도 피로도 잊고 등불 있는 곳을 쫓아 돌아다녔던 그 당시의 기분을 불러일으키면서―표를 사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형의 건물은 서양풍을 가미한 것으로,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좌석에는 많은 조선인이 조용히 구경하고 있었다. 무대에는 두 사람의 총각과 세 명의 요보 1 가 마주하고 있어, 잠시 들어보니 봉오도리(盆踊) 노래 같은 것을 합창하면서 각각 손에 들거나 목에 건 악기를 요란하게 치고 있었다. 홍 상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여기는 극장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대중연예장처럼 되어 있어 음악도 하고 기생 춤도 하며 중국인 마술 같은 것도 한다고 했다. 우리는 가장 뒤의 높은 곳에 빈 의자를 발견하고 앉았다. 그곳도 조선인이 앉아 있었으나 우리를 보고 자리를 양보했다. 둘러본 바, 일본인은 나와 고조뿐으로 장내의 조선인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또, 남녀의 좌석은 엄밀히 구분되어 있어 여자 쪽 자리에도 의외로 많은 부인이 얼굴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홍 상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양반 등의 첩으로 정식 부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무대의 요란한 전주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홍 상은, “이건 참 따분하군요. 무언가 재미있는 것으로 빨리 바꾸면 좋을 텐데”라고 조바심을 냈다. 그렇지만 나는 무대보다도 관람석 쪽에 더 많은 흥미를 찾아내며 그들 조선인 남녀가 어떠한 기분으로 이들의 연예를 보러 왔는지 알고 싶었다. 그들은 정숙하게 멍하니 단지 그 음악을 듣고 있었다. 우리가 내려다보는 바로 밑쪽에는 아이를 업은 총각이 의자 위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업힌 아이도 그대로 자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 앉아 있는 조선인은 손에 쥔 긴 담뱃대의 대통을 무릎 위에 얹고 때때로 입으로 연기를 내뿜으면서 계속 조용히 무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 좌석 쪽도 모두 딴 곳으로 보지도 않고 각종 색깔의 옷자락을 양손으로 여미고 일제히 무대 쪽을 보고 있었다. 그때, 지금 막 들어와서 뒤쪽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멀리 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소담이 틀림없었다. (...) 과연 중국인의 마술은 재미있었다. 한 사람의 중국인은 이상한 큰 소리를 내며 뭐라고 하자 조선인은 모두 웃었으나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저건 조선말입니까?”라고 홍 상에게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홍 상은 대답했다. 이윽고 중국인은 하나의 큰 상자 같은 것을 꺼내 정면의 상 위에 놓고 그 상자 안을 관객에게 보이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곧 그 안에서 이런저런 것을 끄집어내어 객석의 갈채를 받았다. 빈 상자 안에서 물건을 꺼낸다는 것은 일본의 마술과 다를 바 없었으나 단지 그 상자가 매우 큰 상자로, 그 안에서 끄집어내는 것도 커다란 화분이나 크고 더러운 항아리 등인 것이 일본 마술의 섬세함과 비교하여 대국적(大國的)으로 보였다. 특히 중국인은 더럽게 때가 낀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마지막에는 상의를 벗어 맨몸을 보이고 변발을 뱀처럼 목에 감고 그 끝을 입에 물거나 하며 분발하는 것이 특이하게 보였다. 반주는 징이나 북이 들어간 극히 살벌하고 요란한 것이었다. 단조롭고 유장한 조선인의 음악과 춤의 다음에 나와서인지 자극이 강한 이 반주나 연희는 매우 사람의 마음을 북돋았다. 그 다음은 다시 중국인의 곰 곡예였다. 잘 훈련된 한 마리의 곰이 중국인의 명령에 따라 양 발로 일어나거나 고개를 넘거나 봉을 들거나 하는 여러 곡예를 하면 그때마다 국자 한 잔씩 먹이를 얻어먹고 요상한 소리로 짖었다. 그 소리가 참으로 맹수적으로 왠지 기분 나쁘게 들렸다. 평생 사육을 당하며 약간의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여러 가지 곡예를 부리고 슬프게 울부짖는 맹수의 소리와, 그 맹수를 질타하는 중국인의 소리와, 그것을 기쁘게 환호하는 조선인의 소리가 뒤섞여서 이채로운 느낌을 주었다. 홍 상은 매우 흥에 겨운 듯 지금까지 별로 본 적이 없는 열띤 표정을 하고 열심히 무대를 바라보았다. 곰 곡예가 끝난 후, 다시 조선인 네다섯 명이 악기를 들고 무대에 나타나 단조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조를 깨워서 밖으로 나왔다. 달은 기울며 점점 환해지고 밤의 서늘한 기운은 피부에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2. 야노 간조․모리카와 기요히토, 『신판 대경성 안내』, 경성도시문화연구소 출판부, 1936, 184~187쪽, 필자 옮김. 영화관 외에는 이렇다 할 놀 곳이 없는 경성인에게 영화보기는 경성인의 최대 오락이다. 상설영화관만 해도 11개에 달하고, 1년의 입장 연인원은 쇼와 9년에 2,314,914명, 그 입장료 판매 수익은 13만 3천원에 이른다. 상설관을 열거해 보면, 희락관(喜樂館) 본정 1정목. 닛카쓰(日活) 영화 직영관, 웨스턴 재생기로 수은정류기(水銀整流器)를 설비, 영사 시설로는 부내(府内) 제일을 자랑한다. 봉절은 내지보다 1개월 정도 늦다. 입장 요금은 계상 70전, 계하 50전이 봉절 흥행의 표준. 때로 오래된 사진을 재상영, 대중석 20전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장소는 본정 한복판으로 부내 제일. 다만, 스팀은 있으나 엄동설한에는 조금 춥다. 낭화관(浪花館) 명치정. (전차는 명치정 입구 하차) 쇼치쿠(松竹) 영화 봉절. 이곳은 원래 양화 전문관이었던 것을 빌려서 신관이 생길 때까지 (쇼와 11년 7월 준공 예정) 가주거 정원 350명인 베이비관. 그런 이유로 1일 3회 흥행을 하고 있다. 단 제3회째는 교체한다. 재생기는 닙톤 직류이기 때문에 화면은 선명. 입장 요금은 계상 60전, 계하 40전이 표준. 스팀 설비가 있고, 관이 작아서 겨울에는 비교적 따뜻하다. 봉절은 대체로 내지보다 1개월 정도 늦다. 중앙관(中央館) 영락정. (전차는 황금정 2정목 하차) 신코(新興), 간(寬)프로, 2 반쓰마(阪妻) 3 영화 봉절, 때로 외국물도 봉절한다. 재생기는 RCA 포토폰. 개봉은 내지보다 2개월 정도 늦다. 입장 요금은 계상 60전, 계하 40전이 표준. 스팀 설비가 있고, 엄동설한에도 비교적 따뜻한 편. 1일 3회 흥행. 약초영화극장(若草映畵劇場) 약초정. (전차는 약초정, 버스는 본정 3정목) 철근 콘크리트 3층의 모던 건축, 내지와 비교해서도 정상급 신관이다. 재생기는 로얄. 방화는 PCL 봉절, 외국영화는 파라마운트 봉절을 중심으로 각 사 봉절 재상영도 하고 있다. 입장 요금은 계상 50전 균일, 학생 30전 균일. 온풍냉풍 설비는 있지만, 엄동설한에는 조금 춥다. 1일 3회 상영. 송죽좌(松竹座) 황금정 3정목. (전차는 황금정 3정목 하차) 이름은 송죽좌지만 이전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것으로, 현재는 마키노(マキノ), 교쿠도(極東), 다이토(大都), 워너를 봉절한다. 옛날에 황금관, 동아구락부 등으로 사용했던 오래되고 큰 관이지만, 현재 신관을 건축 중이다. 입장 요금은 계상 30전, 계하 20전이 표준. 1일 2회 흥행. 봉절은 비교적 빠르다. 경룡관(京龍館) 용산 연병정. (전차는 연병정 하차) 2류관, 쇼치쿠와 PCL의 재상영, 입장 요금은 20전이 표준. 1일 야간 1회 흥행으로 일요일과 휴일만 주야 2회 흥행. 단성사(團成社) 종로 3정목. (전차는 종로 3정목 하차) 모던한 신관으로 재생기는 RCA. 외국영화 전문관으로서 각 사의 우수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내선(內鮮) 쌍방의 고급 관객을 끌어 모은다. 입장 요금은 계상 60전, 계하 40전이 표준. 내지인들에게는 조선어 설명이 귀에 거슬리지만, 봉절도 상당히 빠르고 양화팬이 즐길 수 있는 관이다. 조선극장(朝鮮劇場) 인사동. (전차는 종로 2정목 하차) 외국물 봉절과 일본영화 재상영, 그리고 때로 조선연극을 상연한다. 재생기는 RCA. 한때는 단성사와 나란히 양화 봉절관으로서 내지인 관객도 있어 전성시대를 누렸으나, 단성사의 신축 이후 2류관이 되었다. 입장 요금도 저렴하다. 제일극장(第一劇場) 종로 4정목. 2류관으로서 일본영화를 재상영하여 조선인 대중을 부른다. 우미관(優美館) 종로 2정목. (전차는 종로 2정목 하차) 일본영화 재상영, 외국 대중 작품 봉절을 하여 역시 조선인 대중 팬을 노리고 있다. 동양극장(東洋劇場) 죽첨정. (전차는 서대문 하차) 조선인 측에서는 가장 새로운 모던 관으로, 외국물을 개봉하거나 조선연극, 레뷰를 상연한다. 이상이 경성의 영화관 개요이다. 그 밖에 현재 쇼치쿠영화의 봉절관으로 송죽좌 신관이 건축을 서두르고 있다. 이렇게 경성의 영화흥행계도 설비 개선, 신관 건축 등으로 면목을 일신하여 내지 일류 도시의 수준에 달하고 있다. 내외의 영화배급사도 지사나 출장소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 다만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내지에서 온 사람들을 깜짝 놀랄 만큼 불쾌하게 하는 것은 ‘극장 여급(お茶子)’의 존재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유유히 들어가면, 에이프런을 걸친 무뚝뚝한 극장 여급이 안내하면서 방석과 화로를 강매한다. 방석은 5전, 화로는 10전, 따라서 가령 50전의 흥행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65전이 든다. 물론 반드시 빌려야 할 의무는 없지만, 방석이 없으면 의자가 딱딱하고, 게다가 극장 여급이 퉁명스럽게 굴어서 더욱 불쾌해진다. 극장 여급 제도에 대해서는 각 방면에서 비난과 폐지의 소리가 있으나, 약초극장만 폐지했다. 그 외에도 흥행 취체가 불완전해서 영사 중에 제멋대로 담배를 피거나 하는 그러한 불쾌한 점들이 있는데 당국에서 드디어 취체를 강화하기로 했다. 극장 경성은 연극으로는 완전히 척박한 곳이다. 필름 1편으로도 족한 영화와 달리 규모 있는 극단을 부르게 되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부른다고 해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입장 요금을 내야만 한다. 그래서 결국 순회 구파•신파 극단이나 만자이(萬歲, 漫才) 4 등으로 만족해야 한다. 다만 쇼와 10년에는 경성에 전례 없는 방문이 있었다. 만주황군 위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치무라 우자에몬 일좌(市村羽左衛門一座)와 닌교조루리 분라쿠자(人形瑠璃文樂座)가 공연한 것이다. 이것은 경성의 연극애호가들이 대단히 기쁘게 했다. 경성극 흥행계의 고민은 그뿐만이 아니다. 훌륭한 대극장이 없는 것도 큰 결함이다. 현재는 조일좌 (朝日座, 본정 5정목), 경성극장 (京城劇場, 본정 2정목) 2곳이 있는데, 둘 다 내지의 3, 4류 도시의 소극장 정도이다. 경성부민들이 대망하던 부민관 대홀 (정원 1,800명)이 등장하여 이를 흥행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어서 대극장 문제는 일단 해소되었으나, 공공건물이라서 부민들 간에는 순흥행적인 새로운 극장을 요망하는 소리가 높다. 조선연극 은 내지의 가부키나 신파에 비해서 수준이 매우 낮다. 현재 직업 극단으로서 신무대(新舞臺), 태양극장(太陽劇場), 신성좌(新星座) 등이 있고, 주로 조선극장, 동양극장 등에서 공연한다. 음악 방면으로는 내지의 일류 악인이나 외국의 내조자(來朝者) 지방 순회가 신문사 주체 등으로 이루어져 그 대부분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행이다. 이들의 공연장으로는 부민관 대홀, 경성공회당 (장곡천정, 상공회의소의 누상(樓上))이 사용되고 있다. 1) 조선인을 가리키는 말. ‘여보세요’의 ‘여보’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 『조선』에서는 ‘大人’, 즉 ‘어른’이라고 쓰고 ‘요보(ヨボ)’라고 병기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에는 조선인 성인 남성을 가리키던 ‘요보’는 점차 조선인을 멸시하거나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2) 아라시 간주로 프로덕션(嵐寛寿郎プロダクション)의 약칭. 3) 반도 쓰마사부로 프로덕션(阪東妻三郎プロダクション)의 약칭. 4) 원문 표기는 ‘만세(萬歲).’ 만자이(漫才)는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으며 진행하는 해학적인 화예(話藝)로 만담과 유사하다. 13, 14세기에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 새해에 악귀를 쫓고 번영을 기원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쌀과 돈을 청한 사람들을 ‘만자이(萬歲)’라고 했는데, 이것이 만자이의 기원이라고 한다.
1912년 유일서관에서 출간된 이해조의 신소설 『산천초목』의 표지화는 연흥사 앞 수상한 세 남녀의 그림이다. 연흥사는 1907년 서울 중부 사동(寺洞)에 개관해 주로 전통 연희와 신파극을 많이 공연하던 극장이다. 소설 속에서 희대의 호색한 이시종은 박참령의 첩 강릉집을 유혹하기 위해, 첫 만남 장소로 연흥사를 선택한다. 두 남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소설 전반부에는 이 시기의 극장 풍경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근대 초기 극장 문화를 재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제, 이시종이 강릉집을 유혹하던 연흥사의 시간 속으로 거슬러 가보자. 평소 연흥사를 ‘연애 작업장’으로 애용하던 이시종은 어느 날 경복궁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강릉집을 보았다. 예의 끼가 발동한 그는 뚜쟁이 신마마를 졸라 드디어 강릉집을 연흥사 앞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단성사, 장안사, 원각사 구경은 몇 번씩 해봤지만 연흥사는 말만 들었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강릉집. 그날 순진하게 신마마를 따라 극장 구경에 나선다. 강릉집과 신마마에게는 입장을 위해 표를 살 때부터가 이미 극장 구경이다. 두 사람은 매표소에서 특등표를 골라 사는 것도 재미있고, 그렇게 산 특등표와 찬성표 1 를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것도 재미있다. 이시종은 표 파는 사람 행세를 하며 강릉집 일행에게 특등석이며 화장실의 위치를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손바닥을 두어 번 딱딱 쳐 뽀이를 부르더니, 방석을 가져오너라, 화로를 가져오너라, 가비차 2 도 갖다주고 여송연도” 갖다준다. 잠시 후 두 남녀의 눈길이 오가고 강릉집 얼굴은 발개진다. 극장은 이시종과 강릉집 같은 이들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체험하는 곳이다. 물리적으로는 사방이 막힌 폐쇄 공간이지만 가정과 같이 내밀한 사적 공간도 아닌 곳에서, 모르는 남녀가 같은 시간 한 공간에 있다. 부인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고 해도, 남녀 관객 그리고 공연자와 관객 사이에는 은밀한 눈길과 희롱이 오갈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이 새로운 공적 공간에서 ‘사교’가 이루어지고, 때로는 ‘연애’도 시작되는 것이다. 일찍이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에서 조선 사람들이 넓혀야 할 문명국가의 ‘견문(見聞)’으로 소개되었던 극장은 막상 조선에 세워지자 음부탕자(淫婦蕩子)들의 음란폐풍 공간으로 지탄을 받았다. 황실극장 협률사의 운영 책임을 맡았던 봉상시(奉常寺) 부제조(副提調) 이필화는 스스로 협률사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1906)를 올렸는데, 그 폐지 사유 중 하나가 협률사 공연이 음란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켜 미풍양속을 해칠 뿐 아니라 청년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며, 천한 무리의 생계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구 문명국가를 따라 황실극장은 지어놓았으나, 무대에 오르는 공연은 남사당패와 기생 연희, 판소리와 잡가 등 ‘천한 집단의 음탕한 작태’다 보니, 고관대작과 부유한 집 자제들이 음란, 사치, 낭비를 일삼는 일탈 공간에 불과하다는 염려가 그런 상소를 올리게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극장 구경이 ‘원님도 보고 환자도 타는 일’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방탕한 남녀의 대합소’라는 근대 극장을 향한 비난과 우려 속에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봉건적 유교주의 사회가 극장으로 대표되는 근대 문물과 만났을 때, 거기서 분출되는 욕망들이 일으킬 불온한 균열과 파장에 대한 불안 말이다. 한편 극장은 그 안팎에서 들려오는 근대의 모든 소란스러운 소리를 모아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소설 속에서 강릉집 일행에게 뽀이가 방석과 화로를 가져다준 것은 이들이 특등석과 찬성표를 들고 입장했기 때문인데, 이처럼 엄격하게 지켜지는 좌석의 등급 구분에 대해 불만이 적지 않았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구경꾼이 될 수 있었지만, “돈 좀 적게 내는 하등석이라고 앉을 자리도 없는 중, 앞에는 혹시 중등으로 들어갈까 겁이나 철망을 얽는 동아줄로 서까래를 매어놓는다. 별별 구박을 다 하고도 난로 하나 안 피워주니, 우리 돈은 돈이 아니고 무슨 사금파리인 줄 아는지, 정작 돈 주는 사람은 그렇게 냉대를 하고 동전 한 푼 안내고 허입권으로 통행하는 사람은 상등석으로 모시고 불도 따뜻이 피워주니 이런 불평한 데가 어디 있소” 3 라고 어떤 ‘불평객’이 볼멘소리를 투고할 정도였다. 그러자 그 이튿날 신문에는 “연극장에서 하등석에 난로 안 피고 철망으로나 서까래로 앞을 막는 것도 분하지마는, 제일 아니꼽고 괘씸한 것은 상등객에게는 굽실굽실하는 사무원들이 하등객에게는 조금만 하면 눈을 부라리며 호령이 나오니 그래서야 어찌 연극장 하등에 구경 들어가겠어요” 4 라고 ‘동감생’이 맞장구를 쳤다. 기생 구경 가느라 극장 출입이 잦은 한량이 있는가 하면 기생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썩 유쾌하지 않은 부인네도 있고, 신문기자 행세를 하며 매일 무료 관람하는 사람, 연극장을 화투장으로 만드는 노름꾼, 극장에서 사람을 속여 생활하는 사기꾼, 밤마다 극장에서 사느라 시험에 낙제한 학생, 상등석에서 남자들과 어울려 앉은 여염집 규수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히 사고도 많고 소동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극장은 그 어느 곳보다도 풍기가 문란하여 엄격한 통제와 규율이 요구되는 공간으로 비춰졌다. ‘부랑한 자의 집회소’가 되어서 ‘부정한 무리’가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극장이니 경찰의 단속이 있어야 한다고 당국의 통제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인 만큼 공중위생 문제와 예절 문제도 예민하게 작용했다. 예컨대 초창기 극장 좌석은 대부분 계단식 마루였던 터라 실내로 들어가기 전에는 매표소 옆 작은 방에 들러 신발을 맡기고 신발표를 타야 했다. 서민들 중에는 평소 신을 신지 않는 이가 많았는데, 이들은 우물에서 발을 씻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1920년대에는 덧신을 10전에 대여해 주기도 했다. 또한 수백 명의 사람이 서로 어깨를 비비며 기운을 통하는 극장은 여름마다 전염병 발병의 온상으로 지목되었다. 극장 지배인을 경찰서로 불러 질서문란, 소란, 위생과 청결, 적정인원 입장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은 1930년대에도 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근대의 극장은 경찰의 감시가 있어야 하는 곳이며, 아울러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검열을 거쳐야 하는 공간으로 조명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식민 당국은 위생과 질서, 그리고 ‘공공의 안전’을 명분 삼아 단속, 검열, 순시를 통한 감시 체제를 더욱 강고하게 했다. 극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삐라를 살포하거나 불법연설을 해서 ‘풍속을 괴란하고 공안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음부탕자와 불온한 무리는 때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그러나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그들 사이의 간극은 매우 얇은 것이었다. 1) 초대권. 2) 커피. 3) 《매일신보》 1913년 12월 3일자, 3면. 4) 《매일신보》 1913년 12월 4일자, 3면. 상단 그림 . 연흥사 앞의 남녀들. 출처: 이해조, 『산천초목』(유일서관, 1912)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이해조, 『산천초목』(유일서관, 1912), 부분 발췌 둥구재 넘어가는 해가 볼일이 바쁜 듯이 어정어정 내려가다가 만인간(萬人間)을 돌아보며, ‘밤새 평안히들 계시오. 나는 내일 다시 오리다’ 하는 부탁이 들리는 듯하더니, 낙산 한허리로 두렷이 밝은 달이 반갑게 올라온다. 그 달빛이 탑골공원 서편 마당에 반쯤 들랴 말랴 하니까 별안간에 네누나 나누나 나니누 네눈실, 그 나팔 뒤를 따라 장구 소고 징 제금을 함부로 두드려내니, 이는 사동 연흥사에서 날마다 그맘때면 취군하는 소리라. 같은 귀로 같은 소리를 듣기는 일반이언마는 어떤 사람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살을 잔뜩 찡그리며, “에잉, 저놈의 소리가 또 나노, 세상, 귀가 듣그러워 사람이 살 수가 있나? 기왕 연극을 하려거든 역사적 학문적으로 아무쪼록 풍속을 개량하거나 지식을 발달할 만한 것을 하지 아니하고, 마치 음담패설로 남의 집 부녀와 젊은 자식들을 모두 버리게 하는 와굴을 만드니, 경무청에서는 왜 저런 것을 엄금하지 아니하누?” 어떠한 사람들은 나팔소리에 어깨춤이 나서 저녁밥을 허둥지둥 재촉을 하여 먹으며, “이애, 이동백이 김봉문이는 정말 명창이더라. 난쟁이 요술도 신출귀몰하던걸. 나는 밤낮 보고 밤낮 들어도 싫지 아니한 것은 연흥사 구경이더라. 속담에 ‘원님도 보고 환자도 탄다’는 일체로, 연극도 구경하고 부인석에 갈보 구경도 실컷 하겠더라. 에 참, 갈보도 많이는 모여들어. 아마 장안 갈보가 취군 나팔소리만 들으면 나 모양으로 신이 절로 내리는 것이더라.” 치마 쓴 계집, 인력거 탄 계집, 양복 입은 자, 모자만 쓴 자, 잘생긴 자, 못생긴 자, 떼떼로 작축하여 사동 넓은 길이 뻑뻑하도록 모여 들어오는데, 이문 안 언덕길로 의복을 선명히 입고 방망이 같은 여송연을 새로 피워 뻑뻑 빨고 조끼에서 보석시계를 내어 연해 보며 분주히 사동으로 내려오는 소년 명사는 이시종이라. (중략) 강릉집이 신마마와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흥사 문앞에를 당도하여 신마마더러, 강 : 형님, 돈은 내가 드릴 것이니 구경표를 내 것까지 형님이 좀 사주시오. 신 : 이런 데 와서 돈도 제 돈을 내고 표도 제 손으로 사야 재미가 있나니, 표 살 돈을 나도 가지고 왔네. 도섭스러운 말 말고 우리 제각기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 보세. 강 : 부끄러워 어떻게 표를 사나? …… 그러면 형님부터 사시오. 신 : 이애, 아양부리지 말아라. 부끄럽기는 쥐 밑구멍이 부끄러워? 하며 표 파는 구멍 앞으로 앞서 가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내어 구멍 앞에다 탁 놓으며, “여보, 특등표 한 장 파오.” 신마마가 표를 받아들고 나서니, 강릉집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서 마침 꺼내들었던 돈을 구멍 앞에다 여전히 놓으며, “나도 특등표 한 장만 주오.” 하고 표 주기를 기다리느라고 그 구멍을 들여다본즉, 표 파는 사람이 표 한 장을 쭉 찢어 주더니, “아차, 그것은 이리 도로 주십시오. 중등표올시다.” 강릉집이 표를 받았다가 도로 들이밀고 섰노라니, 표 파는 사람이 이 표 저 표 여러 장을 들고 한참을 뒤적뒤적하며 찾는 모양을 하다가 표 한 장을 들고 문밖으로 나아오더니 강릉집 앞에 와 공순히 서며, “이렇게 오래 서 계시게 하와서 가이 없습니다. 특등표가 다 팔리고 이것 한 장뿐이온데, 이것은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무료로 구경하는 찬성표올시다. 돈은 도로 넣으시고 이 표를 가지고 들어가십시오.” 강릉집이 그 대답은 아니하고 신마마를 돌아보며, “형님이나 구경을 하고 오시오. 표가 다 팔리고 없다니까 나는…….” 신: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히 올 걸 그리 했지. 아우님 도로 가는데 나 혼자 뒤처져 구경하고 있을 의리가 있나? 아우님 가면 나도 가지. 표 파는 자가 강릉집더러는 대답 없는 말을 또 하기 몰렴하던지 신마마를 보고, “왜 구경을 아니 하시고 가신다고 하십니까? 이 표는 당장 돈을 주시는 것보다, 가지고 구경을 하여주시면 본사에서 얼마쯤 더 감사히 여기는 터이올시다. 아무 관계 말으시고 어서 들어가 구경을 하시지요.” 신: 이왕 저처럼 말씀을 하니 그 표를 받게 그랴. 말이 쉽지, 우리가 날마다 밤마다 오겠나? 벼르고 별러 온 길인데 공행(空行)을 하면 절통하지 않은가? 강릉집이 마지못하여 그 표를 받아들고 신마마의 뒤를 따라 장내로 들어가는데, 표 팔던 자가 앞에서 연해 인도를 하며, “이리로 들어오시오. 이리로 올라오시오. 여기가 특등이오. 변소는 저리 가오.” 하며 손바닥을 두어 번 딱딱 쳐 뽀이를 부르더니, 방석을 가져오너라, 화로를 가져오너라, 가비차도 갖다주고 여송연도 갖다주며, 똑바로 마주 보이는 자리에 가 앉아 정신없이 강릉집 건너다보고 앉아서 헛기침을 연해 하더라. 2. 박진, 『세세년년』(세손, 1991[경화출판사, 1966]), 부분 발췌 1912년인 성싶다. 내가 여덟 살 때니까. 서울 종로 철물교 건너편 사동 큰길을 들어서면 왼손편에 동향편으로 커다란 가설극장인 연흥사(演興社)에서는 임성구의 혁신단이 갖가지 재미나는 신파극을 상연하여 장안의 인기를 끌었다. 임성구는 그 전해에 일인 경영인 남성사 [필자 주: '어성좌'의 오기] 에서 창립공연을 했으나 장소가 일인촌인 관계로 실패했고 다음해에 동관(東關)에 있는 단성사(현 단성사)에서 제2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이어서 연흥사에서 많은 상연목록을 가지고 계속했다. 해질 무렵이 되면 장안 한복판에서 하늘을 찌르고 퍼지는 징, 꽹과리, 날라리소리는 장안 사람의 궁둥이를 들먹거리게 했다. 나는 그때 중붓골이라는 중사동, 즉 지금의 장사동에 살았으니 그 날라리 소리는 나를 매일같이 연흥사 문밖에 불러다 세웠다. 대인은 10전, 소인은 5전, 출입구 옆 고좌(高座)에 앉은 사람이 나무패를 두드리며 핏대를 올리고 외쳤다. 그 위에 높다란 곳에서는 호적소리가 신이 났다. 사동길 연흥사 앞엔 사람이 산같이 모였다. 나는 맨 앞에 서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이런 매일을 보내다가 견딜 수 없어 어머니를 졸랐다. 될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하도 울고 떼쓰고 안달하는 귀여운 아들을 위해서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탈출을 했다. 장옷을 쓰고 소비(小婢)에게 요강을 보에 싸서 들리고 나를 앞세웠다. 아들의 소원을 풀어주려는 갸륵한 용기였다. 대인 하나 소인 둘, 입장권인 나무판대기를 손에 쥔 순간 한숨이 터져 나오면서 이상한 흥분에 가슴이 뛰었다. 장내에 들어서니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아래층에 나무 걸상이 길쭉길쭉하게 놓였다. 우리 일행은 이층으로 갔다. 거기는 삿자리를 깔았다. 비록 비계목으로 엮은 가설이었지만 객석은 아래 위층으로 되었고 무대도 넓었다. 객석은 물론 남녀별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부인석으로 갔다. 희미한 전등불이 담배연기로 더욱 침침했다. 그렇건만 나는 천당에나 온 것 같았다. 아래 위층에서 웅성대는 소리, 잃어버린 일행을 찾느라고 이름 부르는 소리, 과자 삽쇼, 담배 삽쇼, 물건 사라는 소리, 대목날 장터 같았다. 면막은 외겹 포장인데 갖가지 광고가 가득 찼다. 전면 이맛전에는 철사를 가로 매놓고 거기에 길게 자른 백지를 주렁주렁 달았는데, 그 종이에는 “일금(一金) ○원야(圓也) ○○씨”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은 유지들의 희사금이랄까, 기부금이랄까, 보조금이랄까 어쨌든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투척하는 돈이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연극을 구경하다가 어느 장면에서 흥이나 신이 나면 돈을 던진다. 이것은 마치 무당굿 구경을 하다가 신명이 나면 무당 이마에 지전을 붙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일본사람들은 가부끼(歌舞技)나 신파 구경을 하다가 배우가 잘했거나 자기 자신이 흥이 났거나 했을 때에 휴지에 돈을 싸서 무대로 던진다. 이런 풍습은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랍시고 할 때에 활동사진관에서도 보았다. 명변사가 활변(活辯)을 했을 때, 그 영화가 끝나고 불 켜진 다음에 보면 스크린 앞에 휴지 뭉치가 수두룩했다. 어느 것이나 적지 않은 돈이다. 그때 연흥사에서도 장안사(낙원동에 있었다)에서도, 단성사에서도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이 좋은 풍경이 없어진 지도 오래다. 고도의 문화족이 된 까닭에 시시한 고풍은 없앤건지는 모르나 돈은 안 던져도 좋으니 연극 구경을 많이 와 주기나 했으면 좋겠다. 문이 메이도록 모여들던 때가 그립다.
영화를 보기 전, 정보는 전혀 없었다. 감독 서호봉은 낯설었다. < 무사: 4대문파와의 혈투 >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왜구의 무기>라는 제목으로 영화제에서 상영한 기억이 났다. <왜구의 무기>라는 제목으로는 무슨 영화인지 잘 알 수 없었고, <무사: 4대문파와의 혈투>라는 제목은 70년대 무협영화보다도 촌스러웠다. 아니 그 시절의 무협영화 제목은 오히려 멋졌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서호봉의 영화 두 편의 제목은 참 밋밋했고, 포스터 이미지는 너무나 구닥다리였다. 보고 싶은 맘이 안 들 정도로. 하지만 < 사부: 영춘권 마스터 >의 ‘금마장 최우수 액션상 수상’이라는 문구에 끌렸다. < 엽문 >과 < 일대종사 > 등 근대 이후 무술 고수들의 행로를 그린 영화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란 생각을 했다. 액션 장면만 뛰어나다면 다른 것이 허술해도 참을 수 있다. 무협영화의 핵심은 일단 ‘무’에 있는 것이니까. 1912년 중국 최초로 천진에 무도관이 탄생했고, 전국 각지의 고수들이 찾는 무도계의 성지가 되었다. 1932년의 천진, 영춘권의 계승자인 천스가 광동에서 올라온다. 도장을 격파하고 자신의 도장을 세우려는 천스에게 천진의 고수인 정산아오가 조언을 한다. “직접 도장을 깨고 다니면 결국 미움을 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제자를 키워서 그가 8개의 도장을 격파하면, 천진의 고수가 나와서 그를 쫓아낸다. 대신 스승이 천진에서 도장을 낼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고수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천진 무술계의 권위를 지키는 방법인 것이다. 천스는 천진의 미녀인 자오와 결혼하여 빈민촌에 살면서, 인력거꾼이었던 겅량천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당시의 천진은 복잡한 정세에 놓여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위협이 극심한 가운데 군벌들의 세력다툼이 치열했다.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었던 무림은 이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군벌의 비호 아래 권력의 일부로서 남든가, 일종의 스포츠로서 전락하든가. 군벌인 린시원이 무림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음모를 꾸미고, 천진 무술인의 중심인 쩌우 관장은 권모술수를 이용해서라도 무림의 명예를 지켜내려 한다. 치열한 권력다툼의 와중에 천스와 겅량천은 하나의 말로써만 이용될 뿐이다. 첫 장면에서 겅량천의 대결이 보인다. 무술 장면이 박력 있다. < 사부: 영춘권 마스터 >는 무술인의 액션을 심플하게 보여준다. 필요한 동작만을 골라내 강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고수의 싸움이다. 복싱이나 종합격투기 시합에서도 고수들의 싸움은 일단 빙빙 돌면서 기회를 잡는다. 풋워크를 이용해서 치고 빠진다. 상대의 구역 안으로 들어가면 과감하게 치고받는다. 이소룡의 절권도가 근본 없이 나온 게 아니란 생각도 든다. 감독인 서호봉은 홍콩이나 대만이 아니라 중국인이다. 무협 소설 작가로도 유명하고, < 일대종사 >의 무술자문을 맡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 능하다. 직접 무술을 하면서 무협소설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장이모우의 < 영웅 >, 풍덕륜의 < 타이치 > 그동안 중국에서 만든 무협영화는 무엇이 있었는지 떠올려봤다. 장이머우의 < 영웅 >과 < 연인 >? 하지만 무술감독인 정소동은 홍콩 출신이다. 풍덕륜의 < 타이치 >도 적당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오락물 정도였다. 과거 중국에서는 무협소설을 금지한 적도 있었다. 제대로 무협물이 성장할 여건이 갖춰지지 못했다. 대신 홍콩에서 무협영화는 빛을 발했고, 김용의 무협소설은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고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오락물로써 무협영화를 만든다면 홍콩영화계의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다. 아쉽기는 했다. 뭔가 대륙의 기상을 담은 무협영화를 보고 싶었다. 과장과 허세로 그려내는 무협이 아니라 진정한 무와 협의 정신을 보여주는 영화를. 그건 이제 홍콩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무협영화가 되었다. 그런데 < 사부: 영춘권 마스터 >에서 발견했다. 처음에는 너무 절제하고 냉정하여 어색함도 느꼈지만, 초반을 넘어서면 담담한 매력에 흠씬 빠지게 된다. 일단 무술 장면이 너무나 좋다. 동네 깡패들과 싸우는 장면을 비롯하여 모든 장면이 좋지만 최고는 클라이막스에서 벌어지는 고수들과의 대결이다. 중국에는 골목길의 담벼락이 대단히 높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도저히 담을 넘을 수가 없다. 미로 같은 공간에서 고수들이 차례로 대기하고 있다. 천스는 한 명씩 대결을 하며 나아간다. 좁은 골목길인데 결코 좁지가 않다. 높은 담 위로 뻗은 하늘 위에서 싸우는 것만 같다. 팔참도, 육점반곤, 팔쾌쌍월 등 다양한 병기를 이용하여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절로 숨이 막힌다. 다행히도 각각의 대결이, 성룡의 아크로바틱 액션처럼 오래 가지 않는다. 이건 진정한 고수들의 결투니까.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사부: 영춘권 마스터>는 걸작이라 부를 수 있다. 이 무술 장면이야말로, 홍콩의 무협영화와는 다른 중국만의 새로운 무협영화의 길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무협의 또 하나의 기둥은 ‘협’이다. < 사부: 영춘권 마스터 >의 ‘협’은 ‘무’ 이상으로 범상치 않다. 천스는 가문과 무술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다. 제자를 이용할 수 있고, 아내를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스는 강직한 인물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잠시 눈을 감을 수도 있다고 합리화했지만 결국은 돌아선다. 자신의 의리를 지킨다. 정산아오도, 쩌우 관장도 명분이나 이익을 위해서는 음모를 꾸미고,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자신도 속아가면서.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무림의 인간이다. 그들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협’이 그들에게는 존재한다. 그렇게 쩌우는 천진을 지켜내고, 정산아오는 브라질로 떠난다. 천스는 모든 것을 버린 채 광동으로 향하고. < 사부: 영춘권 마스터 >는 그야말로 하드보일드하다. 알고 있으면서도 속는다. 당신을 이용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만은 최선을 다하겠다. 진심을 결코 구걸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한 걸음씩 나아가기만 한다. 그래서 한순간에 감동이 확 밀려든다. 멀리 가면 자신의 기도가 닿지 않을 것이기에 도장 바로 앞 가게에 자리 잡은 자오를 보고 있으면, 너무나도 아름답다. 자신의 할 일을 결코 비굴하지 않게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들의 기개가 너무 멋지다. <사부: 영춘권 마스터>는 무와 협, 모두 절정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PS: < 사부: 영춘권 마스터 >를 보고 전작인 < 무사: 사대문파와의 결투 >를 봤다. <무사>도 무협의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는 뛰어난 수작이다. 하지만 <사부>에는 미치지 못한다. <사부>는 <무사>에서 몇 걸음을 더 나아간 걸작이다. 그래서 서호봉의 다음 영화가 더 기대된다. <사부>에서 보여주지 못한 것이 훨씬 더 있다는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