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톨러런스
- 감독
- 송미나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이인희, 이용훈, 신미경, 구원영
영화사에 관한 책을 보면 누구라도 마주치게 되는 영화. 보고 있으면 단지 압도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그 무게에 눌려서 질린 상태가 되어 보게 되는 영화. 말 그대로 모든 점에서 훌륭하고 심지어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건 예언적인 영화. 그런데 한 번 보고 나면 두 번 볼 엄두가 안 나는 영화. 데이빗 워크 그리피스의 < 불관용 >은 처음 볼 때 있는 힘을 다해서 보아야 하는 영화이다. 왜냐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책에서 이 영화를 <인톨러런스>라고 그냥 ‘音讀’한다. 여기서는 번역어로 옮길 생각이다) 단지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게다가 내내 스펙터클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세트는 장엄하고 모든 장면들은 공들여 찍었다. 3,000명의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었고, 바빌론 궁전 세트는 높이 90미터에 이르는 건축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불관용>은 (다른 그리피스의 영화가 그런 것처럼) 멜로드라마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두 번 보기가 힘든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관용>은 영화사에서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구태여 말하자면) 마치 미켈란젤로가 1508년에서 12년 사이에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천장화>와 같은 위치에 있다. 위대하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 천장을 3시간 30분 동안 반복해서 볼 자신이 없다. (<불관용>은 여러 판본이 있다. 좀 더 자주 시네마테크에서 볼 수 있는 버전은 상영시간 3시간 17분 판본이다) 그리피스는 1915년 < 국가의 탄생 >을 완성했다. 영화에서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에 겨룰만한 성취를 얻어냈다고 에이젠쉬테인은 찬사를 보냈다. 미국에서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언론과 지식인들은 <국가의 탄생>이 흑인에 대한 인종편견에 찬 영화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리피스는 이중적인 태도로 <불관용> 제작 연출에 착수하였다. 하나는 물론 알라바이이다. 자신이 인종편견주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류애라는 휴머니즘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걸 영화로 증명하길 원했다. 속죄로서의 영화. 다른 하나는 그때 예술적으로 거의 정점에 올라온 그리피스는 자신의 영화적 가능성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불관용>은 거의 전례 없는 규모로 진행된 실험적인 영화이다. 모든 의미에서 <불관용>은 동시대 영화들과 차원을 달리한 영화였다. 아마도 <불관용>에 연출부였던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과 토드 브라우닝은 그때 많은 것을 훔쳤을 것이다. 그리피스는 서사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웠다. 서기 전 539년. 바빌론은 모든 것이 평화롭고 풍족한 왕국이었다. 벨샤자르 왕자는 펴민인 산골소녀를 돌보고 그녀는 왕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파국은 바깥에서 온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바빌론을 쳐들어온다. 서기 27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며 전도에 나섰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의 음모에 빠져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서기 1572년 8월 24일. 프랑스. 신교도 위그노들과 갈등을 빚어오던 가톨릭교도들은 그날 대규모의 신교도 학살을 한다. 1914년 현재. 가난한 젊은 청년은 공장에 다니면서 아내와 살고 있다. 공장에 파업이 일어나고 이에 연루되어 해고당한다. 이제 낯선 곳에서 먹고 살기위해 애쓰던 청년은 그만 범죄조직과 얽혀든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의 젊은 아내가 가련하게 애를 쓴다. 이제까지의 영화들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서사를 가지게 되면 차례로 진행하였다. 그리피스는 야심적으로 이 네 개의 시대를 번갈아 오가는 구조로 재구성하였다. 다른 영화들이 이 쇼트와 저 쇼트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리피스는 영화 전체를 (아직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시간의 몽타주의 천장 벽화처럼 만들었다. 시간은 자유로이 여기서 저기로, 그리고 저기서 거기로, 그렇게 이동하면서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를 펼쳐보였다. 아놀드 하우저는 <불관용>을 본 다음 문학이 이제까지 이르려고 애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혹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화는 시작하였다, 라고 탄식하듯이 썼다. 심지어 1916년은 제임스 조이스가 아직 <율리시즈>를 쓰고 있었고(이 소설은 1922년에 출판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두 번째 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를 발표했을 따름이다. (1912년에 초고가 끝났을 뿐이었다) 그리피스는 서사 전체의 시간, 차라리 인류의 역사 전체를 그렇게 잘게 쪼개놓은 다음 완전히 서사 바깥에 놓여있는 에피소드를 반복적으로 추가하였다. 릴리안 기쉬가 연기하는 어머니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어린 아기가 누워있는 요람을 흔드는 그 유명한 장면. (그래서 이제는 모든 영화교과서에서 문법처럼 인용되고 있는 장면) 그리피스는 여기서 우리에게 서로 다른 시대의 시간으로 산산 조각난 씬들을 하나의 고정점 아래 매듭을 만들어 새로운 질서를 세워 유기적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의 순간 중의 하나. 하지만 <불관용>은 그리피스의 알리바이를 증명하지도 못했고, 동시에 미학적으로 대중적 승리를 맛보지도 못했다. 이 영화는 자기의 시대로부터 멀리 떠나왔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오락이 예술적인 목표를 향해 도약하는 새로운 도전을 참지 않았다. <불관용>은 대중들의 ‘인톨러런스’ 앞에서 거의 재난에 가까운 박스오피스를 마주했다. <불관용>의 가장 열렬한 관객은 예상치 않게도 (어쩌면 충분히 예상대로?) 볼쉐비키 혁명에 성공하고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가 필요했던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레닌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 역사의 ‘인톨러런스’로 읽어냈다. 그래서 <불관용>을 수입하여 러시아 전역에 대대적인 개봉을 했으며, 더 나아가 그리피스에게 새로운 소비에트 영화산업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리피스는 이 자리를 거절했다. 나는 거절의 과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이 제안을 수락하고 그리피스가 소비에트에 갔다면, 그래서 젊은 제자들, 에이젠쉬테인, 푸도프킨, 지가 베르토프, 미하일 롬, 도브첸코, 보리스 바르넷을 가르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십년 후에 < 전함 포템킨 >을 보는 그리피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사의 순간들의 우연이 만들어내는 별자리들. (계속)
“물체가 움직이는 효과가 특수효과예요. 그래서 조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특수효과 이문걸) 1) 영화 특수효과(Special Effect)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렇다, 마술사이기도 했던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그는 원-쇼트 필름(one-shot film)에서 우연히 ‘스톱 모션(stop motion)’을 발견해 마치 마술에서처럼 영화에서도 특수한 효과인 스톱 액션(stop-action), 이중 노출(double exposure), 원근감 트릭(perspective trick)을 사용해 영화를 만들었다. <신데렐라 Cinderella>(1899)에서는 스톱 액션을 써서 호박이 화려한 마차로 변하고 재투성이 아가씨의 누더기가 파티 드레스로 변하도록, <인디언 고무 머리 Indian Rubber Head>(1902)에서는 부분 마스킹을 이용한 분할화면(spilt-screen)을 활용해 자기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폭발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달세계 여행 A Trip to the Moon>(1902)에서는 원근 전환(perspective shift)과 많은 트릭 효과를 사용해서, 총알 우주선이 저 멀리 우주의 달로 발사되고 달세계에서 지구의 우산이 버섯으로 깜짝 변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시작된 특수효과는 오늘날의 관객들의 뇌리에는 컴퓨터 그래픽(Computer-generated imagery, CGI)을 사용하여 스펙터클한 화면 시각 효과(Visual effect)를 내는 할리우드식 공상과학 영화를 만드는 최첨단 기술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1990년대 이후로 본격적으로 특수효과의 영역으로 진입한 컴퓨터 그래픽은 최근 한국영화에서도 <퇴마록>(박광춘, 1998)을 시작으로 <괴물>(봉준호, 2006), <신과 함께-죄와 벌>(김용화, 2017) 등의 판타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 <웰컴 투 동막골>(박광현, 2009), <명량>(김한민, 2014)처럼 사극과 전쟁 영화, <화산고>(김태균, 2001), <악녀>(정병길, 2017) 같은 액션 영화는 물론 멜로드라마 <뷰티 인사이드>(백종열, 2015)에서도 수준급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효과는 대부분 광학효과를 만들어내는 후반작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엄격히 말하면 특수효과의 일부분이다. 자연현상인 눈, 비, 안개, 지진부터 건물 파괴, 총격이나 폭발의 장면 등을 기계적 또는 화학적 방법으로 재현하는 것, 고속/저속촬영은 물론 애니메이션이나 미니어처 같은 촬영 방법을 함께 동원해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하는 그 모두를 일컫는 것이 바로 특수효과이다. 그래서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인력들은 영화 연출에 전반에 대한 미학적 기술적 인식은 물론이고 물리 법칙이나 화학 배합에 대한 지식을 장착해야 한다. (사진1)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처럼 1960년대 전쟁영화에서는 특수효과랄 것도 없이, 실탄을 장착한 총기를 사용해서 실제 전투 장면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의 궁금증,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특수효과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상상과 공상의 장면을 구성하고 코믹한 효과를 주기위해 특수효과가 시작된 서구의 영화 제작과는 달리, 한국영화에서의 특수효과는 영화계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는 1950년대 후반,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등 민족의 수난을 소재와 주제로 한 영화들에서 시작되었다. <5인의 해병>을 연출한 김기덕도 회고한 바 있듯이, 연기자 주변의 땅바닥에 총이 맞아 튀는 효과를 내기 위해 군이나 경찰의 지원과 엄격한 통제 하에 명사수를 데려다 실제로 실탄 사격을 해댔다. 2) 이처럼 전쟁과 첩보, 군사, 액션영화에서 적과의 총격이나 전투 장면에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총격과 폭파 효과를 내던 것이 바로 한국 특수효과의 시초였다. 실제 총에 실탄을 장전해 연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영화를 찍던 1960년대 초, 중요하지만 또 위험한 소품인 총기나 무기류를 챙겨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제작부 소품 담당의 주요 임무였다. 아직은 영화 엔딩 크레딧에 ‘특수효과’라는 명칭으로 오르지도 못한 채, 총기류와 폭약류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가 바로 이문걸이다. 1996년 <크레이지 댄스)<박한순>을 마지막으로 약 7백여 편의 극영화, <배달의 기수>등 군 홍보영화와 <전우> 같은 4백여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다. ‘보이는 모든 장면을 실감나게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이문걸은 특수효과의 불모지에서 수많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분야를 개척한, 명실상부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계에 독보적이고도 유일한 특수효과 ‘맨’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특수효과의 역사는 이문걸의 작품연보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진2) 군홍보영화 <잃어버린 세월>(설태호, 1990) 촬영현장에서 왼쪽부터 특수효과 감독 이문걸, 감독 설태호, 촬영감독 팽정문 이문걸은 1935년 일본 나가노켄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한국으로 왔다. 1956년에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꼼꼼하고 부지런한 성격 덕분에 상병 계급이던 당시, 오히려 하사를 병기계 보로 두고 병기계 담당을 맡았다. 1960년 한흥영화사의 제작부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영화계에서 일하던 동생 이예남의 권유 때문이었다. 병기계 담당을 하던 군에서의 경력이 인연이 되어 그는 자연스럽게 제작부에서 총기를 관리했다. 그가 제작부로 입사한 한흥영화사는 최관두가 이끌고 있었고 당시 제작부장은 김홍빈이었다. 1959년 창립한 한흥영화사는 정창화의 멜로드라마 <사랑이 가기 전에>(1959)로 영화제작을 시작했지만 주로 활극, 스릴러를 기획, 제작하면서 가히 ‘액션 스펙터클의 총본산’으로 불렸다. 김홍빈의 제작부에서 활동한 이문걸은 <지평선>(1961)의 정창화, <싸우는 사자들>(1962)의 김묵,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의 임권택, <창살 없는 감옥>(1963)의 강범구의 작품을 함께 했다. (사진3)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제작부에서 총기 담당을 맡으며 특수효과에 입문했다. (사진4)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소품’ 담당으로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지평선>에서도 활약을 했지만 이문걸이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것은 한흥영화사의 10회 기념작 <싸우는 사자들>의 ‘소품’ 담당이었다.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한국전쟁 당시 철원지구에 잠입한 유격대의 활약상을 그린 이 작품은 여성 유격대원들의 전투장면과 포로수용소의 대폭파 장면이 압권이었다. ‘7백 여 명의 「엑스트라」 및 약 6백 자루의 권총, 「엠원」 소총, 「칼빙」소총, 자동소총, 다발총 등의 소화기를 동원하였고 TNT 폭탄 2백 「파운드」씩 두 번’을 사용해, 촬영 당시 ‘파편으로 경상을 입은 「엑스트라」가 21명’이나 될 정도로,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처음 있는 특수효과를 실험해 전쟁 스펙터클을 구현해 낸 액션 영화였다. 3) (사진5)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중 독립군과 일본군이 펼치는 설원의 최후 전투 장면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는 학생독립단의 무력 항쟁을 그린 임권택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특수효과 ‘맨’ 이문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첫 촬영은 독립투사가 일본군 중대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었다. 대관령에서 촬영한 이 장면을 위해 이문걸은 연기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실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총격 효과를 내는 특수효과를 실험한다. 마분지를 연필 굵기로 3cm씩 말아서 그 속에 특수 약품을 넣어 가짜 실탄을 만들었다. 그렇게 백여 개를 만들어 하나씩 특수전선을 연결한 후 땅속에 일정한 간격으로 묻어 선에 전기가 흐르도록 합선·폭발하여 흙이 튀면서 실탄이 맞는 특수 효과를 만들어 냈다. 4) 또 이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은 만주로 가려는 독립군들의 마지막 격전, 두만강 도하를 목전에 둔 겨울 계곡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벌이는 전투이다. 영화 내내 어두웠던 흑백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은 눈 쌓인 설원을 활강하는 스키 부대의 활약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살상이 벌어지는 총격전은 비장할 만큼 눈부시기도 하다. (사진6) <증언>(임권택, 1973)의 탄착효과가 돋보이는 전투장면 (사진7) <증언>(임권택, 1973)의 한강 다리 미니어처 폭파 장면, 이문걸은 특히 <빨간 마후라>(1964)와 <대괴수 용가리>(1967)의 경험 이후에 다리 폭파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임권택과 이문걸이 함께 만든 이러한 액션 미학은 <증언>(1973),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임진란과 계월향>(1977), <아벤고공수단>(1982), <개벽>(1991), <장군의 아들3>(1992), <태백산맥>(1994)으로 이어진다. 점차 영화계 내서도 총격 효과를 내는 것, 화약을 다루는 것이 전문적인 영역으로 인식되면서, 이문걸은 자연스럽게 ‘특수효과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흥영화사에서 탄탄하게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문걸은 1963년 영화사가 폐업하자 <소만국경>(강범구, 1964)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특수효과’로 크레딧을 올렸고, 조수 5명을 데리고 독립했다. (사진8) <소만국경>(강범구, 1964) 총격 장면의 화약 효과 ‘제작부’나 소품‘으로 이름을 올리던 그가 특수효과로 독립하면서 시작한 것은 ‘가짜 실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가짜 실탄’은 하나하나 말아서 만들어야했던 불편한 ‘마분지 실탄’이나 다소 위험했던 공업용 뇌관을 대신할 수 있는, 보다 간편하고 좀 더 안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실탄과 선을 직접 맨손으로 합선시켜야만 폭발시킬 수 있던 방법도 개선해서 버튼 하나를 눌러 수백 발의 실탄을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자동 폭발시킬 수 있는 전자식 ‘컨트롤 박스(control box)’도 그의 특수효과 팀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9)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 미니어처로 제작한 비행기와 한강 다리 장면 미니어처(miniature)를 제작해 물리적, 화학적 효과를 가미하는 촬영 방법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1916),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서도 사용했던 영화사 초창기부터 발달해온 오래되었지만 대표적인 특수효과 기법이다.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에서 이문걸은 동생 이예남과 함께 미니어처 작업을 처음 시도했다. 당시 주먹구구식의 미니어처를 만들어 야외에서 촬영해 폭파 장면을 찍었다. 이런 장면의 연출은 감독과 긴밀하게 소통해야하는 것은 물론, 폭파되어 전소될 건물을 짓기 위해 미술 담당 스태프에게 톱밥을 섞은 연한 석고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여러 번 실험해 촬영 스태프와 합을 맞추는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영화에서 여러 번 한강 다리를 폭파시키는 경험을 했는데, 다리 폭파(?)의 전문가가 되었다. (사진 10)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칠흑 같은 우주에서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 장면 (사진 11)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용해 용가리가 서울 시내의 건물을 파괴하는 장면 (사진 12)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와 대치하는 군의 포격 장면 (사진 13)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가 한강 다리를 파괴하는 미니어처 장면 이문걸이 본격적으로 미니어처와 결합한 특수효과를 몸에 익힌 것은 김기덕의 한국형 공상과학 영화이자 괴수물 <대괴수 용가리>(1967)에서였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철사에 모형 비행기를 매달아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하는 공중전을 연출했고, 떨어지는 유성은 물론 반짝이는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을 영상화했다. 또 특수전선을 늘어놓고 순간적으로 전류를 흐르게 하여 번개가 치게 하고 미니어처로 만든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장면을 거뜬히 해냈다.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괴수물에 능숙한 일본의 특수효과 전문인력들에게 연화(煙花, 불꽃놀이 폭죽으로 사용되는 화약)로 영화 촬영용 폭약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미니어처이다 보니 축소해 만든 건물이나 다리를 폭파하면 폭파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은 물론 눈으로 보기에도 작은 폭발로 보인다. 이를 스크린 상에서 용가리가 야기한 거대하고 웅장한 재난의 현장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특수카메라를 이용한 고속 촬영은 물론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해한 특수효과 팀의 폭파 기술이 유기적으로 접목되어야 한다는 방법론을 체화했다. 그가 이때 연마한 미니어처 폭파 기술은 이후 <증언>에서의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은 물론, 1980년대를 풍미했던 <조선왕조 오백년>같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임진왜란의 해전을 재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사진14) <갯마을>(김수용, 1965)에서 이문걸이 만들어 낸 새벽의 안개 장면 하지만 총기나 폭약으로 특수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자로만 이문걸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수효과 담당자가 맡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프레임 속에서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고, 지진이 나게 하고, 물 위에 살얼음이 뜨게 만들었다. 연기자의 몸에서 피가 날 수 있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훨훨 공중을 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우선 김수용의 <갯마을>(1965)에서의 안개 낀 바닷가 소나무밭 장면을 보자. 시동생 성칠(이낙훈)과 시어머니(황정순)은 마을 사람들이 잠든 안개 낀 새벽을 틈 타 주인공 혜순(고은아)이 상수(신영균)이 마을을 떠나보낸다. 부산 기장에서 촬영한 이 장면에서 감독은 ‘바다 전체에 안개(스모그)를 깔아 달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혹여 안개가 낀 바다를 연출하기 위해 바다 전체에 연기를 까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바람이 불 수 있는 야외공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당시 스모그를 만들어내는 담당 스태프를 ‘쪼다통’이라 불렀다. 피우라는 시점에 해당 공간에 스모그를 채운다고 해도 바람이 불어 버리면 담당 스태프는 변명의 여지없이 ‘쪼다’ 소리를 듣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으로 이 장면은 바람이 거의 없는 기압이 낮은 새벽에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숨을 참아가며 연막통을 터뜨려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15) <결사대작전>(고영남, 1969)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경험한 이문걸을 이후 <오, 인천!>(1981)의 특수효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사진16)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포스터 (사진17)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포스터 흑백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던 시기 특수효과를 시작했던 이문걸은 영화를 촬영하기 이전에 연기자들과 동선을 맞춰보고 촬영지에 가서는 수차례 시험 폭파를 했다. 연기자의 안전을 위한 이유가 첫 번째였기는 하지만 필름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제한된 예산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한 폭파 시험뿐이었다. 1960년대 후반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점차 표준이 되어 가자 감독들은 특수효과에서 더 많은 폭파 불꽃을 시각화하기를 원했고, 총탄을 맞자마자 피가 나는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싶어 했다.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같은 영화에서 안중근(김진규) 의사가 이등박문(박노식)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문걸은 피가 범벅된 화약과 함께 솜을 긴 대롱에 넣고, 에어스프레이(Air-spray)로 쏘아주는 방식을 사용했다. 전쟁 영화에서 총탄을 맞아 가슴에서, 머리에서, 철모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들은 분장과 이런 특수효과의 트릭들을 활용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는 대만과 홍콩영화와의 합작이 많아지고, ‘으악새 영화 혹은 참바라 영화’로 불리는 액션영화가 국내에서 많이 제작되던 시기, <돌아온 외다리>(이두용, 1974),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같은 영화에서 이문걸은 배우들의 액션과 점프를 도와줄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장비를 도입하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사진18)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포스터 이 영화 작업을 통해 이문걸은 할리우드식 영화제작 및 운영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했다. (사진 19)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폭격 장면 스틸 특수효과가 주요했던 전쟁영화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은 이문걸의 작품연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크레딧에서 그가 특수효과를 담당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문걸은 <오, 인천!> 촬영에 참여해 할리우드식 영화의 제작 및 운영 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하게 되는 값진 계기를 얻었다. 통일교 문선명의 제작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이 작품은 <디어 헌터 Dear Hunter>(마이클 치미노, 1978)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던 프레드 크래머(Fred Cramer) 팀이 도맡아 작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위한 무기류의 국내 반입이 쉽지 않았을 뿐더러 할리우드에서 촬영용으로 사용하던 흑폭약이나 화학 약품들을 한국에서 구하는 일이 녹녹치 않았다. 또 특수효과가 대부분인 로케이션 촬영이 상당수이고 계획대로 촬영할 수 있기 위해서 국내 여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자 이문걸의 특수효과 팀이 합류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촬영용 폭약은 대부분 이문걸이 직접 공수해 가능한 것이었고, 이문걸 팀은 촬영 상황에 따른 장비 응용력은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에 이 팀에 대한 신뢰는 점점 깊어져갔다. 5)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인천 등대 유리창을 깨어야 했는데 건설부 친구들이 꼭대기에 올라가는 사다리를 제대로 만들지 않아서 산소통을 끌고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도리가 없어서 이문걸 씨가 고무줄에 베아링을 연결지어 쏘아 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한국 측의 이문걸 씨나 박광남 씨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어서 미국 측도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6) 실사에 더 유능했던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과 미니어처를 제작해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을 촬영했으나 결국 감독 테렌스 영은 이문걸에게 맡겨 그 장면을 재촬영을 했을 정도로 그의 미니어처 폭파 기술을 인정했다. 또 할리우드 스태프들은 이문걸이 만든 콘트롤 박스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결국 이문걸 팀에게 컨트롤 박스를 얻어갔다. 총탄이 비 오듯 퍼붓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 아비규환의 전쟁터. 그리고 가슴에 총탄을 맞은 연기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이 모든 장면들은 진짜‘처럼’ 보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가져야하고 감독이 ‘컷’을 외칠 때까지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은 머리털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 이문걸이 일생을 바친 특수효과란 “같은 양의 특수약품이더라도 방향, 습도, 위치에 따라 위력이 다르고 화면도 달라” 7) 지기 때문에 철저한 계산은 물론 수많은 경험치가 필요한, 자신은 물론 스태프의 목숨을 담보로 한 매번 위험천만한 작업이었다. 총기 소지가 힘들 뿐 아니라 탄약과 화약을 민간인에게는 공식적으로 판매하지 않는 한국에서 이문걸은 종종 ‘불법으로’ 일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참고할 만한 그 어떤 선례도 없는 가운데 영화 장면을 위해서 총을 개조하고 뇌관을 만들었다. 이문걸은 서늘한 간담을 뜨거운 열정으로 녹이며 임하는 작업 과정 속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험과 현장 감각으로 한국영화의 명장면들을 만들어 낸 특수효과 ‘맨’이자 스크린의 마법사이다. *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를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 참고. 2) 「김기덕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5 참고. 3) ‘TNT 4백 「파운드」로 쾅!’, 조선일보, 1962년 8월 28일 4면. 4) 오홍근, ‘국내 유일, 그만둘 자유도 없어 영화 특수효과맨 이문걸 씨’, 중앙일보 1981년 2월 17일 6면. 5)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2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1/2월호, 45~48쪽. 6)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3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3/4월호, 43쪽. 7) 오홍근, 앞의 기사.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제4회 칸영화제에서는 루마니아 태생의 스물여섯 살 청년이 만든 한 편의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적잖은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2년 전에 출간한 책으로 외설 논란을 일으키며 잠시 수감되기도 했던 이 청년 작가는 칸영화제 한 달 전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 작품이 “시네마를 철저하게 바꿔놓을 것이며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경로로 밀고 나갈 것”이라고 호언장담까지 한 터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작 칸의 공식 초청을 받은 작품이 아니었고 그저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동안 한 차례의 상영회가 마련되어 있을 뿐이었다. 1951년 4월 20일 금요일, 칸의 복스(Vox) 극장에서 마침내 영화가 공개되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영화였지만 그때까지 편집이 마무리되지 않았던 탓에 2장과 3장은 이미지 없이 사운드만 흘러나왔고, 그나마 꼴을 갖춘 1장마저도 이미지와 사운드의 연계를 파악하기 힘든 요령부득의 작품이었다. 관객과 기자들은 분노했다. 반면 칸에서 이 영화를 본 장 콕토는 “영화제 기간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스캔들”이라 불렀고 이듬해 이 영화가 파리에서 개봉될 때는 포스터를 그려주기까지 했다. 개봉 당시 이 영화를 본 평론가 시절의 에릭 로메르는 다소 양가적인 감정으로 작품에 거리를 두면서도 1장만큼은 “내가 지금껏 본 그 어떤 최고의 비상업적 영화들보다도 천 배는 나를 사로잡았다”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썼다. 1953년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의 상영회를 통해 이 영화를 보았던 스탠 브래키지는 훗날 작가에게 편지를 띄우면서 그것이 “내가 영화작가로서 발전하는 데 있어 가장 심원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킨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고백했다. 이상은 이지도르 이주와 레트리즘(Lettrism) 영화의 시작을 알린 그의 데뷔작 <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 Traité de bave et d’éternité >(이하 <논고>로 표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 이 영화는 영미권에서는 ‘독설과 영원’(Venom and Eternity)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왔고 여전히 그러한데, 이는 ‘타액(침)’과 ‘독설’이라는 뜻을 모두 지니고 있는 프랑스어 ‘bave’를 잘못 해석한 데서 나온 제목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면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다. 이는 과격한 레트리즘 텍스트를 낭독할 때 입에 고이거나 흘러나오는 침을 뜻하는 것이다.) 장 콕토가 디자인한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 포스터 이주가 1946년에 출간한 저널 「레트리스트 독재 La Dictature Lettriste」로 모습을 드러낸 레트리즘 운동(첫 멤버는 이주 자신과 가브리엘 포메랑 둘 뿐이었다)은 문학, 회화, 영화 등에서부터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에 이르는 영역까지를 겨냥하는 무정부주의적 실천이었는데, 이에 영감을 제공한 것은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특히 다다이즘이었다. 이 운동에 레트리즘이란 명칭이 붙은 이유는 애초에 그것이 문학, 특히 시적 언어의 전복을 꾀하는 작업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레트리즘 시는 시어에서 모든 의미를 제거하고 시를 전적으로 문자(letter) 그 자체, 그리고 소리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 이런 문학적 시도는 다다이스트들의 음향시(Lautgedicht) 작업은 물론이고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러시아 미래파 작가들이 고안했던 초이성적(super-rational) 언어인 자움(zaum) 또한 떠올리게 한다.) 1955년, 오슨 웰즈는 영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오슨 웰즈와의 세계 일주 Around the World with Orson Welles>의 한 에피소드에서 레트리즘 그룹 멤버들(이지도르 이주, 모리스 르메트르, 자크 스파카냐)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레트리즘 시를 낭독하는 광경을 담은 바 있다. <논고>는 레트리즘 영화의 이념과 방법론을 한꺼번에 드러낸 선언문이자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이미지들 간의 관계는 대단히 불투명하고, 이미지와 사운드는 동조화되지 않은 채 서로 무관하다 싶을 만큼 자율적으로 흘러간다. 이주는 이를 불협몽타주(montage discrépant)라고 불렀다. <논고>에서 이주 자신이 연기(?)한 다니엘은 “나는 눈이라고 하는 영화의 지배자로부터 귀를 분리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불협의 원리에 따라 분리된 이미지와 사운드는 이른바 ‘끌질’(cisèlement) 작업을 통해 물리적, 물질적 특성을 고스란히 노출하게 된 대상들이다. 이주는 날카로운 도구들로 필름 표면을 긁어내거나 그 위에 잉크를 칠하기도 했다. 영화의 사운드는 일단 레코드판에 녹음된 뒤에 광학 사운드트랙으로 옮겨졌는데 이로 인해 자글거리는 소음이 시종일관 들리게 되었다. 또한 이주는 이 영화를 위해 새로 촬영한 이미지들 외에도 상당 부분 뉴스릴 등 기존의 영상자료를 재활용하고 있다. 영상자료들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 내고, 끌질을 통해 변형시키고, 임의로 다른 것들과 결합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독’한다고 할 수 있는 <논고>는, (1951년에 레트리즘 그룹에 가입한) 기 드보르에 의해 후일 상황주의(Situationism)의 정치미학적 전략으로 정교화될 전용(détournement)의 방법론까지도 예시하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논고>는 어느 정도는 에세이영화이고, 어느 정도는 추상영화이고, 어느 정도는 낭독영화이고, 또 어느 정도는 파운드푸티지 영화이기도 한 대단히 복합적인 작품이다. 편집이 마무리되지 않아 영화의 2/3가량이 사운드만 흘러나오는 프린트를 상영해 칸영화제에서 물의를 일으킨 것도 반쯤은 의도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 다니엘은 “시네마가 일종의 라디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라고 따져 묻는다. - <논고>는 필름 퍼포먼스 실천이기도 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심지어 라디오 방송극처럼 펼쳐지는 연애담도 포함되어 있다!) <논고>는 영화가 이제 스스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철저히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것들을 분해하고 해체한 뒤에 가능한 여러 대안적 결합의 양상을 모색하는 (보다 과격하게는, 결합의 모든 가능성을 폐지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논고>의 복합성은 그러한 복합성 자체를 추구해서 얻어진 것이라기보다, 이처럼 영화가 새로운 단계로 이행했다는 전제에 입각해 이주가 연역적으로 수행한 이런저런 작업의 산물이라 봐야 한다. 말하자면 <논고>는 대단히 소크라테스적인 정신의 산물인 셈인데, 이는 훗날 고다르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인디아>(1959)를 보고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정신이다.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의 프레임들 하지만 <논고> 이후 이주는 더 이상 영화작업을 지속하지 않았다. 그가 열어젖힌 문 안으로 본격적으로 뛰어든 이는 모리스 르메트르였다. (그는 <논고>의 후반 작업 당시 프린트를 늘어놓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끌질’ 수작업을 프레임 단위로 수행한 장본인이다.) 이주의 영화가 칸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나서 7개월 후, 파리의 한 시네클럽에서 르메트르의 첫 영화 <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Le film est déja commencé? >가 공개되었다. 여기서 르메트르는 이주가 <논고>에서 제시한 불협몽타주와 끌질의 전략을 더 밀고 나갔다. 전체 영화의 대부분 숏이 수작업으로 채색되었고 이미지의 추상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사운드트랙의 구성은 정말이지 파격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에 대한 사색에서부터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가 상영되는 영화관 환경 및 상영 도중 영화관에서 벌어지는 소란과 말다툼(“이런 영화를 보려 하다니 미쳤군! 원한다면 내가 돈을 줄 테니 커플이라면 차라리 그걸로 호텔에나 가시오!”)에 대한 묘사, 그리고 심지어 이 영화에 대한 언론의 리뷰들(물론 꾸며낸 것이다)까지 읊조려지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돌연 영화가 끝나버린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극장 매니저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방금 영사기사가 르메트르 씨 영화의 마지막 릴을 찾을 수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어디에 잘못 둔 것인지 배달이 안 된 것인지는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여하간 상황이 이렇게 되어 상영을 끝까지 마칠 수 없게 되어 참으로 유감입니다. (사탕과 초콜릿 그리고 아이스크림 있어요!)” 오늘날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를 르메트르가 의도한 바의 모습으로 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에게 있어 영화란 비단 기계적으로 재생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총체만이 아니었고, 그것이 상영되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과 결부된 - 바로 그때 바로 그곳에서 벌어진 - 사건들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함께 끌어안는 개념이었다. 또한 스크린은 백색의 직사각형이 아닌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고, 영화 상영 중 관객에게 요구되는 침묵과 부동의 상태 또한 얼마든지 위반해도 좋은 것이었다. 즉,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의 사운드트랙에 재현된 일련의 소란은 비단 영화 내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영화가 상영되는 환경에서 실제로 수행(performance)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구상한 상영환경을 개략적으로 묘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가 상영될 영화관 입구에는 핑크색으로 칠해진 이동식 스크린이 설치된다. 상영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영사기사는 이 이동식 스크린에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 같은 고전 영화들을 상영한다.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면, 관객들은 채색된 천들과 이런저런 움직이는 물체들로 스크린이 어지러이 가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상영이 시작되면, 르메트르가 미리 ‘심어둔’ 연기자들이 영화관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을 가리면서 소리를 질러댄다. 얼마 후에는 다른 이가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칼로 스크린을 자르고 그 너머로 간다. 관객들 가운데는 항의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이 과격한 퍼포먼스에 동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 상영은 계속된다. 그리고 또 …. 이러한 영화적 실천을 르메트르는 종합영화(syncinéma)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의 프레임들 이러한 실천은 <반개념 L’Anticoncept>(1952) 상영 시 헬륨가스가 든 지름 2미터짜리 구형 풍선의 표면을 스크린으로 활용한 질 J. 울망 등에 의해 레트리즘 영화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60~70년대에 걸쳐 본격적으로 만개한 확장영화(expanded cinema) 작업들이 나오기 이전, 이미 레트리즘 그룹은 라이브 퍼포먼스의 도입을 통해 영화를 다시 사고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예술제도는 이러한 반제도적 실천마저도 제도의 일부로 끌어안은 지 오래다. 지금의 우리가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를 르메트르가 의도한 모습 그대로 보기가 어려운 것은, 그가 구상한 종합영화적 실천을 실행에 옮기는 게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더 이상 우리가 그러한 실천을 스캔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의 정치학은 예술이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만, 이제 스캔들은 정치에 고유한 것이 되었고 예술은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가 되었다. 예술과 관련된 스캔들은 있어도 예술의 스캔들은 없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레트리즘을 돌아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와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이후 레트리즘 운동의 전개 과정, 그리고 레트리즘 그룹과 상황주의 그룹의 관계 등에 대해 서술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런저런 무용담과 전설과 영웅 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에 대한 반응과 평가가 당대에 어떠했는지를 저릿한 기분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스콧 맥도널드와의 인터뷰에서 P. 애덤스 시트니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한 것을 보고 나서다. “1963년 파리 […]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바깥에 서서 제게 적대적인 문건을 나눠주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저는 당시 그 사람을 무시하라는 제 프랑스 친구의 말을 들었던 것을 후회합니다. 그 사람은 레트리즘 영화작가인 모리스 르메트르였어요. 그는 제가 침입자이면서 그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거대한 음모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이라 여겼어요. 그리고 그가 느끼는 감정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프랑스인들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는데, 반면 미국 작품을 받아들이고 있던 프랑스인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와 누벨바그에 의해 규정된 그림자 내에서 움직이지 않는 프랑스 영화작가들은 죄다 무시했어요.” ※ 위 글에서 언급된 레트리즘 영화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은 2014년에 출간된 카이라 M. 카바냐스(Kaira M. Cabañas)의 「오프-스크린 시네마: 이지도르 이주와 레트리즘 아방가르드 Off-Screen Cinema: Isidore Isou and the Lettrist Avant-Garde」를 참고로 해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영어로 출간된 레트리즘 영화에 관한 첫 단행본이다. 이지도르 이주의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 모리스 르메트르의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질 J. 울망의 <반개념> 그리고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한 울부짖음 Hurlements en faveur de Sade>(1952)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역시 2014년에 출간된 니콜 브레네즈(Nicole Brenez)의 「레트리즘 영화 입문 Introduction to Lettrist Cinema」도 참고할 만하다. 소책자이기는 하지만 레트리즘 그룹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부터 1960년대 이후 이 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것이 후대에 미친 영향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웹사이트 www.mauricelemaitre.org 에서는 레트리즘의 정의와 연대기, 그리고 르메트르의 작품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