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페르노
- 감독
- 프레드 올렌래이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릭 힐, 돈 더 드래곤 윌슨, 에반 루리
< 구타유발자들 >이란 제목을 다시 생각해본다. 구타를 유발하는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뮤지컬 오디션을 본 인정( 차예련 )은 교수 영선( 이병준 )의 차에 타고 한적한 강변에 내리게 된다. 목적이 뻔한 교수에게서 도망친 인정은 순박한 얼굴을 한 봉연( 이문식 )의 오토바이에 타게 된다. 그런데 봉연은 동네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 양아치들은 고등학생인 현재( 김시후 )를 목만 남기고 땅에 파묻는 등 학대를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현재는 고등학교 시절 봉연을 괴롭히던 문재( 한석규 )의 동생이다. 봉연은 경찰이 된 문재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그들의 폭력은 서로 얽혀 있다. 과거의 폭력이 현재의 폭력을 유발하고, 지금 권력을 쥔 쪽이 약한 자를 끝없이 괴롭힌다. 원신연 의 두번째 장편 < 구타유발자들 >은 지금 봐도 불편하다. 그들의 폭력에는 도대체 이유가 없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하다. 괴롭히고 싶으니까, 내가 힘이 있으니까. 현재를 괴롭히는 이유가 정말 그의 형 때문인 것일까? 봉연의 부하들은 과연 그런 과거를 알고 있을까? 그냥 괴롭힐 대상이 있으니까 폭력을 휘두른다. 그게 즐거우니까. 폭력이 그들의 놀이이니까. 마찬가지다. 교수가 인정을 강간하려 한 것은 그녀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판단한 아랫사람이니까. 누가 강하고 약한지 잘 알고 있는 교수는 시골 양아치들을 만나는 순간 고개를 숙인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육체적인 권력만이 존재할 뿐이고, 그는 도시에서 온 중년 남자일 뿐이니까. 시골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시골은 조용하고, 평화롭고, 인정이 남아 있는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그런 인식을 부정하는 영화들은 차고도 넘친다. < 안개마을 >은 폐쇄적인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야만과 폭력을 그린다. < 김복남 살인사건 >은 마을 전체가 폭력을 용인하고 시스템의 일부로 이용하는 실태를 보여준다. 샘 페킨파의 < 어둠의 표적 >과 존 부어맨의 <딜리버런스>를 보면 시골이 오히려 더 끔찍한 폭력의 도가니다. <브레이크 다운>에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시골의 농부들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다. 살아가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은, 자연에게 잘못 배운 생존법이다. 도시에서 온 중산층 남자들은 시골 사람들의 폭력에 당하다가 마침내 저항하면서 광기를 드러낸다. 그들에 맞서 폭력을 휘두르고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그것은 단지 광기일까? 어쩌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의 유전자가 아닐까?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킨 크로마뇽인의 후손인 인간은 살인의 역사를 거듭해왔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성이라는 발명품으로 덮어씌웠지만 우리의 본성은 결국 폭력일지도 모른다. 시골은 포장이 허술하기에 인간의 본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아닐까? 일라이 로스의 < 그린 인페르노 >가 보여주듯, 식인종은 아주 순진하고 평온하다. 다른 사람들을 사냥하고 죽이고 먹는 것을 뺀다면. 원신연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 구타유발자들 >을 구상하게 된 경위를 말했다. 단편 촬영 로케를 위해 인적이 드문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깊은 숲속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청년들과 만났다. 보는 순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함께 먹자고 권했다. 다 구워지지도 않은 빨간 고기를 쌈 싸서 먹으라고 건네주는 것을 다 받아먹었다.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거절한다면,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죽이고 내버리면 시체조차 찾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산속이었다. 그 경험이 <구타유발자들>로 확장되었다. 시골에서 만난 양아치들. 그들의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외부의 이방인들에게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온다. 영선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던 인정은 시골 양아치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그들과 같이 있는 것보다는 다시 영선의 차를 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문명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사는 도시인이 보기에 시골 양아치들은 너무나도 위험해 보인다. < 구타유발자들 >은 무척이나 불친절하고 불편하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인정이 교수를 따라 드라이브를 나선 이유는 오디션에 힘을 써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권력에 타협한 것 역시 죄다. 폭력의 희생자였던 현재는 자신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동일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폭력의 연쇄사슬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그 순간 그들은 결국 구타를 유발하는 존재가 된다. 스스로 폭력의 자장 안에 기꺼이 들어갔으니까. < 구타유발자들 >은 폭력으로 시작하여 폭력으로 끝난다. 육체적인 폭력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을 괴롭힌다. 어쩔 수가 없다. 폭력으로 망가져버린 봉연은 다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당한 만큼 어딘가에 풀어내야 한다. 과거를 용서하고 새로운 문명인으로 살아가기에 그는 한없이 부족하다. 그는 도시가 아닌 시골 마을의 치졸한 양아치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패자이고,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악인은 권력을 가진 경찰이 되었다. 두들겨 맞고 비명을 지르며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악인들은 권력을 찾아 도시로 가거나 마을의 강자가 되었다. <구타유발자들>은 닫힌 공간 안에 그들만이 아니라 관객까지 모두 몰아넣고 끝없이 폭력을 보여준다. 답답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한참이 지나고도 기억이 난다. 봉연의 순박한 얼굴이 악마로 변하는 순간과 문재의 야비한 웃음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저 멀리 시골 어딘가에 그런 악인들이 있다고 <구타유발자들>은 말하지만, 정작 폭력의 발원지는 도시 아니 문명 자체에 도사리고 있으니까. 목만 남기고 우리를 땅에 묻어버리지는 않지만 이미 우리는 폭력의 연쇄사슬 안에 존재하고 있다.
< 본 토마호크 >라는 영화가 재미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호러영화, 고어를 좋아하는 지인들이었다. 그런데 서부극이었다. 서부에서 식인 부족을 만난다는 이야기. 이상하지는 않다. 공포영화 장르에서, 외딴곳에 사는 식인종이나 괴물을 만나는 것은 익숙한 관습이다. 토비 후퍼의 <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1974)과 웨스 크레이븐의 < 공포의 휴가길 The Hills Have Eyes >(1977)부터 롭 슈미트의 < 데드 캠프 Wrong Turn >(2003)로 이어지는 살인마 계보도 있고, 루게르 데오다트의 <카니발 홀로코스트>(1991)처럼 오지의 야만인을 찾아가는 유형도 있다. <카니발 홀로코스트>를 리메이크한 일라이 로스의 < 그린 인페르노 >(2013)는 한창 개발이 되고 있는 아마존에 살고 있는 식인 부족의 기괴한 풍습을 전시한다. < 본 토마호크 >는 공포영화의 관습을 투영시킨 서부극이다. 서부 개척시대, 시골 마을인 브라이트 호프에서 사람들이 납치된다. 의사인 사만사와 보안관 조수. 보안관인 헌트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팀을 꾸린다. 나이 든 보안관 조수인 치코리, 사만사의 남편인 아서, 한때 사만사를 짝사랑했고 사격술이 뛰어난 브루더. 겨우 네 명이다. 하지만 식인 부족도 인원이 많지 않다.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식인 부족은 겨우 종족을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원주민들에게는 끔찍한 적일 수밖에 없고, 식인만으로 살아가기에 식량도 부족하다. 심심할 수밖에 없다. 단 네 명이 나섰는데, 아서는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상태다. 하나는 노인이고, 하나는 거동이 불편하고,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둘뿐이다. 적들도 계속 나오는 게 아니다. 부족이 살고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별다른 사건도 없다. 좀도둑들이 나타나 말을 훔쳐가려는 정도. 너른 서부를 달려가니 마주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중에 들러 작은 에피소드를 보여줄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네 명의 소소한 갈등이 벌어질 뿐이다. 시나리오 작가이며 촬영도 했던 S. 크레이그 찰러는 < 본 토마호크 >가 연출 데뷔작이다. 러닝타임도 짧지 않다. 무려 2시간 12분이다. 그런데도 크게 지루하지 않고, 적절한 긴장을 유지한다. 인물의 개성이 뚜렷하고, 갈등의 지점도 날이 서 있다. 커트 러셀이 연기하는 헌트는 거의 도인 같은 풍모를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모든 것을 헤아리며 해결책을 찾는다. 누구에게도 굽히거나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치코리는 말이 많다. 생각도 많고, 말도 많고, 겁도 많지만 선을 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은 분명하게 한다. 그가 해야 할 일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아서는 사만사를 사랑한다. 하지만 다리가 부러진 상태다. 소를 몰고 먼 길을 오고 가는 카우보이인 아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사만사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성격이 급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할 줄 아는 남자다. 브루더는 수염을 멋지게 기른 신사다. 수백 명의 원주민을 죽였다고 말하는 남자. 하지만 그 사실이 결코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이어 말한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순진하지만 다혈질인 아서와 자주 충돌하지만 팀으로서의 그들은 잘 어울린다. 크레이그 찰러는 헌트, 치코리, 아서, 브루더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작은 긴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 본 토마호크 >는 결코 과장하거나 대단한 스펙터클로 눈길을 끌려 하지 않는다. 고어 마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은 분명히 있다. 머리 가죽을 벗기고, 몸을 둘로 갈라내고, 팔다리가 잘리는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사람이 죽는 것도 별 게 아니다. 이곳은 공정한 결투가 벌어지는 공간이 아니다. 부족은 식량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고, 헌트와 동료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어쩔 수 없이 서로 죽여야만 한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심각하게 고민할 일도 아니다. 그런 고어 장면들이기에 오히려 눈에 확 들어온다. 일라이 로스가 < 그린 인페르노 >에서 의도적으로 식인의 풍경을 전시했던 것과는 반대다. 이곳에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식인 부족은 단지 먹는 것만이 아니라 여성을 대하는 야만의 풍습 등 모든 면에서 끔찍하다. 그들에게 소위 ‘인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남고, 종족을 유지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그런데 인간은 어떨까? 소위 ‘인간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과연 그들과 다를까? < 본 토마호크 >의 첫 장면은 무법자들이 야영을 하는 사람들의 목을 베는 장면이다. 지나가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돈과 소지품을 가로챈다. 그런 살인자들이 도망을 치다가 식인 부족의 신성한 표식을 건드리고, 하필 살아남은 이가 브라이트 호프로 들어오게 된다. 그들을 쫓아온 부족들에게 함께 있던 의사도 납치되고. 식인 부족의 행태는 아주 끔찍하지만, 가장 야만적인 행태로 드러난다는 것 이외에는 문명인들의 행태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 본 토마호크 >는 배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헌트 역의 커트 러셀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배우다. 존 카펜터의 < 뉴욕 탈출 >(1981), < 괴물 >(1982), < 빅 트러블 >(1986)의 커트 러셀은 최고였다. 싸구려 장르영화의 주인공으로 딱 어울리는 역할을 연기하면서도 커트 러셀은 품위가 있었고, 과장되지 않았다. 그런 커트 러셀의 캐릭터를 가장 잘 이해한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였다. 그리고 < 데쓰 프루프 >와 < 헤이트풀8 >에서의 커트 러셀은 다시 한 번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본 토마호크>는 저예산 장르영화의 공식을 따라가면서도 자신만의 개성과 호흡으로 긴장을 유지하는 수작이다. 서부극으로서도, 공포영화로서도 애매하지만 둘을 적절하게 결합시켜 보기에 좋은, 순간 짜릿하기도 한 수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