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사람들
- 감독
- 전조명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오영일, 문희, 최남현, 한은진, 이대엽, 김동원, 김신재, 장혁, 유계선, 김정옥, 서월영, 이풍구, 고선애, 김기범, 임생출, 김세라, 윤신옥, 이정애, 김지영, 최준, 김광일, 지방열, 임운학, 조덕성, 문미봉, 권오상
‘기록한다’라는 의미에 어원을 둔 ‘다큐멘터리’영화는 흔히 현재와 과거, 즉 관객에게 보이는 시점에서는 과거가 된 시간을 기록한다. 다큐멘터리에 재연을 비롯한 극영화적 요소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면서 무엇이 더 ‘사실적’이고 다큐멘터리적인가에 대한 논쟁은 이미 식상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문승욱 감독의 신작 < 망대 >는 다큐멘터리의 더 견고한 관습인 시간의 개념에 도전한다. 미래라는 허구의 설정을 도입한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춘천이라는 동시대 공간에서 실제 거주자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작품은 ‘미래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영화 속의 시간은 우리의 현재이며 미래의 시점에서 본 과거로 그려진다. 도입부에서 자막은 타임머신이 개발되어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려 하고 과거를 바꾸어 현재를 바꾸는 것이 단속의 대상이 된 2037년의 상황을 소개한다. 이 SF영화 같은 설정에서 도시의 스산한 불빛과 사람들을 우리는 미래인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영화는 ‘불법체류자’라 불리는, 과거에 불법으로 체류하려는 사람들을 단속하러 나온 시간 감시자의 눈을 따라 현재를 본다. 재개발이 한창인 춘천 약사동 망대거리에는 많은 불법체류자들이 존재한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철거될 망대는 사라져 가는 오래된 것들 중 하나이자 그들이 붙들고 있는 남은 노스텔지아의 상징이다. 시간 감시자는 과거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조사하기 위해 그곳의 불법체류자들을 쫓는다. 그들은 인심의 변화, 그에 따른 거리의 변화, 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미래라는 설정은 단순히 극영화적 플롯 외에도 많은 것을 영화에 제공한다. 현재를 이야기하는 인물들은 미래를 이미 본 자로서의 새로운 아우라를 부여받지만, 진행형이어야 할 그들이 처한 현재는 마치 긴 시간 속의 하나의 박제처럼 쓸쓸하면서도 초현실적이다. 변화를 앞둔 현재의 기록은 감상적인 넋두리이거나 건조한 선동으로 흐르기 쉽다. 전자에 가까워질 뻔한 영상은 미래의 사람들이 그토록 머물고 싶어하는 풍경이라는 설정 아래 경각심을 주며 감상주의에 대한 자기비판의 시각도 내포한다. 그저 추억 속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시간 감시자는 ‘빛바랜 낡은 추억처럼 무기력한 존재’라고 부르며 단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중요하지 않은 수많은 무기력한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다. 단속의 대상인 미래(극 중 현재)를 바꾸려는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다. 실제로 감독은 재개발에 반대하는 투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이들에게 카메라를 돌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첫사랑이나 추억, 고향 같은 사소한 것들을 위해 자신들의 현재를 희생시켰다.’ 는 말은 지금 우리가 처한 무기력의 빠져나가기 싫은 달콤함과 덧없음에 대한 아픈 자각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현재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많은 영화들과 다른 각도의 호소력을 지니는 지점이다. 시간 감시자의 존재감과 현재에 부여된 다른 시간성이 후반부로 가면서 희미해지는 것이 다소 아쉬운 점이지만 사라져 가는 것들,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독특하고 아름다운 초상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임이 틀림없다.
배창호 의 < 정 >을 좋아한다. 초기작들보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끌리는 영화들이 그의 후기작들인데, 그 중에서도 <정>은 심금을 울리는 영화였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환한 달빛 아래 남편이 외간 여자와 정을 통하는 순간을 훔쳐보는 여인을 비추어보여줄 때이다. 그 때 정말 모든 움직임이 함께 한다. 갈대숲을 가로질러 두 남녀를 분주하게 ?는 여인의 움직임, 나뭇가지를 흔들어버릴 만큼 매서운 바람의 움직임, 그리고 격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그렇게 정말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그녀는 둘의 격렬한 포옹을 이렇게 묘사한다. “참말로 요상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두 사람이 그러고 있는 것이 밉게 보이지 않았다. 기막힌 심정으로 둘을 바라보는데,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의 절실함이 느껴졌다. 얼마나 좋아하면 그럴까?” 정말로 요상한 것이 이 장면을 보면서 발생한다. 정념의 움직임을 이렇게 아름답게 보여주는 장면은 정말 거의 없다. 데뷔작인 < 꼬방동네 사람들 >에서 시작해 최근작인 < 여행 >까지 배창호 의 영화는 떠나는 사람들의 여행을 그린다. 언젠가 배창호 감독에게 “왜 감독님의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매번 길을 떠나는가”라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그는 “누군가가 떠나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모습”이라 말했다. 삶은 언제나 다시 무언가를 찾아 떠나고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기에 자신의 영화가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을 초월하는 센티멘털리티와 방랑성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문제는 유랑의 불가피성에 있다. 왜 인물들은 집을 떠나는가? 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거주할 집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살던 집에서 마음이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일종의 ‘퇴거退去의 영화’라 부를 수 있다. 집이 없거나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하여 그들의 필연적인 유랑과 여정,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나는 이러한 구도가 웨스턴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가령 한 여자가 마을 어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린다. 저 멀리 신작로 길로 버스 한 대가 들어오고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본다. 배창호 감독의 < 정 >의 초반부 장면이다. 뭔가 특별할 것이 없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 시작부가 배창호 감독의 영화가 지닌 무의식을 슬쩍 보여주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황량한 들판을 쳐다보며 서 있는 한 여인, 그리고 어딘가 멀리서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그 여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말하자면 전형적인 웨스턴의 도입부이다. 아니, 마지막의 풍경이라 말할 수도 있다. 버스가 들어오는 장면에 역마차나 말이 갑자기 나타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배창호의 영화는 웨스턴의 무의식을 작동시킨다. 집에서 출발해보자. 존 포드의 영화 대부분은 집을 잃은 사람들이 새로운 집을 건설해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분노의 포도 >는 트랙터에 무참하게 짓밟힌 오클라호마의 집에서 시작해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여정을, < 수색자 >는 불에 타버린 집에서 시작해 다시 집으로의 귀환 여행을 보여준다. 존 포드의 인물들은 집을 동경하고 향수를 갖고 있지만 불가피하게 그곳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려 한다. 떠도는 사람들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집이 필요하고 가족을 구성하려면 여인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에서 가장 비통한 순간은 존 웨인이 스스로 집을 불태워버릴 때이다. 배창호 의 정서가 이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그의 영화의 진정한 주제 중의 하나는 그들이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극적인 가족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가 불가역적이라는 것이다. 인물들이 자신이 귀속해야 할 가족과 공동체를 떠나기에 그들은 이제 한 개인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모색해야만 한다. < 정 >이 보여주는 세계가 그러하다. 이는 여인의 수난사를 다룬 미조구치의 세계가 아니다. 이 여정은 마음의 거처를 찾기 위한 모험이기도 하다. < 황진이 >의 한 장면에서 스님은 황진이에게 ‘육체의 거처는 정해진 것이 아니니 마음의 거처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황진이의 여정은 육신의 유랑과 더불어 몸이 계속 낮은 상태로 나아가며 최종적으로 몸은 무너지지만 정신은 고양되어가는 중력과 은총의 이야기다. 배창호 의 영화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고정불변한 것이거나 원래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영화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거나 방랑을 거듭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영화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집을 떠난 방랑자가 길을 걷는 여정에 의해 생겨나 타인과의 만남으로 생겨난다. 여행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 그것의 불가역성을 거스르는 것은 그의 영화에 흐르는 되돌아가는 시간이다. 직선적인 움직임에 저항하면서 그의 영화는 우리를 끊임없이 과거로 되돌아가게 한다. 과거로 되돌아가야 한다. 좋은 것은 과거에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현실이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배창호 감독은 그것이 원형성에의 추구라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거기에 뭔가 더 좋은 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였던 파스빈더는 언젠가 자신의 영화 작업이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로 집을 짓는 행위라고 말했었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도 그와 같다고 생각한다. < 정 >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새롭게 영화를 만들 결심에 새로운 집을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를 만들 집을 잃었지만 새롭게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가 거처할 집을 만들었다. 물론 그 집에 거주하는 것은 절실한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