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빙 미스 김옥분
- 감독
- 임성민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나문희, 최윤선, 권병길, 박성원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 본 글에는 <색깔있는 남자>의 반전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한국영화 산업은 여러 면에서 척박했던 시기로 회자된다.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한국영화 산업의 첫 르네상스라 평가됐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와 80년대는 독재 권력의 감시 하에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검열이 극심해지면서 산업적 토대와 시스템이 허약해진 시기로 평가된다. 1970년대부터 대중추수적인 에로티시즘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처럼 청춘을 다룬 영화들을 중심으로 주제와 형식 측면에서 저항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간간이 출현했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는 한국영화의 전면적 시장개방이 일어나면서 한국영화 점유율이 급격히 떨어지긴 했지만, 영화제작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검열제도가 심의제도로 전환되고 저항적인 학생영화운동을 포함해 새로운 영화세대가 부상하면서 독립영화와 코리안 뉴웨이브의 싹이 틀 수 있는 움직임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 색깔있는 남자 >(김성수, 1985)가 개봉된 1980년대 초중반은 전두환 정권의 적극적인 3S(Sex, Screen, Sports) 정책, 선정성과 폭력성이 극대화된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할리우드 장르 관습, 흥행작의 끝없는 시리즈화, 컬러 비디오라는 새로운 부가시장의 저예산 문법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서 한국영화 산업 전반이 에로영화에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색깔있는 남자> 역시 에로틱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이 영화는 당시 대부분의 에로영화들처럼 다양한 정사 장면을 넣기 위한 지나치게 복잡한 인물 구도와 설득력 없는 급작스러운 반전, 컬러 비디오 시대에 걸맞은 화려한 색상과 조명, 줌 쇼트와 프리즈 프레임 등의 과도한 사용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선정성을 목표로 두면서 느슨해진 서사 그리고 부족한 예산과 시스템을 메우기 위한 표현적 과장은 오히려 이 영화를 급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 지점에서 김형석 은 <색깔있는 남자>를 < 디아볼릭 >(앙리 조르주 끄루조, 1955)이나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같은 놀라운 반전 서사를 가진 1980년대 대중영화의 숨겨진 걸작에, 이문우(「1980년대를 퀴어링하기」)는 범죄화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레즈비언을 가시화한다는 측면에서 퀴어적 독해의 텍스트로 위치시킨다. <색깔있는 남자>는 제목만 보면 김성수 감독의 전작, 장미희 와 이영하 주연의 < 색깔있는 여자 >(1980)의 후속작처럼 보이지만, 두 영화는 장르적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 <색깔있는 여자>가 신파적 특징이 강한 여성수난사라면, <색깔있는 남자>는 냉철하고 잔인무도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팜 파탈과 여성 착취적이고 이기적인 옴 파탈이 대격돌하는 스릴러 영화다. 이 영화는 당대 몇몇 에로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정적 재현을 위해 비규범적 성적 욕망과 관계를 소재로 가져온다. 유사 근친상간, 사도매저키즘, 양성애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도 전통적 젠더 역할을 뒤집는다. 영화는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패션 디자이너 샤르망 최( 임성민 )의 귀국 기자회견으로 시작한다. 세련된 매너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그는 돌아오자마자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샤르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여자들의 사랑과 욕망을 이용하는 데 거침이 없다. 샤르망은 공사 모두에서 누나 같은 변수린( 오수미 )의 돌봄과 지원을 당연하게 받고 있지만 정작 그의 집착 어린 사랑은 모른 척한다. 또한 그는 김여사( 홍명진 )의 애인 노릇을 하며 후원을 받아 패션사업을 키워나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른 젊은 여자들과의 성적 관계를 거절하지 않는다. 저돌적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부티크 직원( 오경아 )과 다른 여자들과 달리 자신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재미교포 사업가 주은몽( 오혜림 )이 그들이다. 모든 여자의 욕망의 대상인 샤르망은 이 모든 관계의 중심인 것처럼 보인다. 샤르망을 연기한 임성민은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한 스타로 신성일 이나 남궁원 같은 이목구비 뚜렷하고 키 큰 ‘미남배우’의 계보에 있긴 했지만 훨씬 세련되며 때로는 유약하기도 한, 그래서 이성애 여성들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은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미묘한 스타성을 갖고 있었다. 임성민이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장길수, 1994)에서 수많은 여성의 이상형으로 꼽히는 (그래서 여성운동 활동가 강민주에게 전략적으로 납치당하는) 스타 배우 백승하로 캐스팅된 것은 그의 실제 스타 이미지에 일부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매너 좋고 유약한 남성성에서 오는 그의 스타성은 에로영화의 선정적 노골성을 약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런 면에서 임성민은 에로영화의 타겟 관객을 이성애 여성으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실제로 여성 주인공들보다 임성민을 중심에 놓고 “에·놈·쌍쉬엘(Un homme sensuel)”이라는 카피를 전면에 내세운 포스터는 주인공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스펙터클화 하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좌) <색깔있는 남자> 포스터 (우) <색깔있는 남자> 중 배우 임성민 하지만 이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샤르망은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옴 파탈이다. 샤르망은 사업 확장을 위해 공장을 구매할 자금이 필요하다며 김여사를 부추기고, 김여사는 기어이 병들고 늙은 (가학적 성욕을 가진) 남편( 변희봉 )을 복상사하게 만든다. 범죄와 그에 따르는 불안과 집착은 연쇄성을 갖게 되고 영화는 점점 에로보다는 스릴러에 집중한다. 자금을 확보한 샤르망이 김여사를 귀찮아한다는 것을 눈치챈 변수린은 그렇잖아도 질투 때문에 마땅치 않던 그녀를 차로 여러 번 치어 살해한다. 변수린의 범죄를 알게 된 샤르망은 자신을 향한 집착이 부담스러워지고 재미교포 사업가 주은몽과 새 삶을 계획한다. 주은몽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에게 집착하지 않는 ‘쿨’한 여자다. 결국 그는 변수린을 기찻길에서 잔인하게 살해한다. 하지만 주은몽과 형사들은 그를 살인자로 의심하고 변수린이 살아있는 것 같은 이상한 징후들이 그를 불안에 휩싸이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반전을 내놓는다. 그 반전을 예상하지 못한 건 영화가 반전을 위한 서사를 거의 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디아볼릭>을 넘어선 파격적 혹은 허술한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주변부 인물, 즉 조연이었던 직원과 영화 후반부에 등장해 존재감이 미미했던 주은몽이 이 모든 계략을 지배하며 완전범죄를 저지른 레즈비언 커플이었음이 매우 급작스럽게 밝혀진다. 주은몽은 변수린에게서 벗어나고픈 샤르망의 욕망을 자극해 공장을 판매한 대금을 자신에게 투자하도록 유도했으며, 아마도 사적, 공적 공간 모두에서 프레임 바깥에 상시적으로 존재했을 직원은 온갖 정보를 수집해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변수린과 샤르망의 대화를 녹음해 변수린이 살아있는 것처럼 꾸밀 수 있었을 것이다. 변수린, 샤르망, 주은몽을 훔쳐보는 제3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종종 암시하지만 서사적으로 그 눈이 직원의 것일 거라는 예측을 하기는 어렵다. 프레임 바깥 존재인 그들의 비가시성과 유령성은 완전범죄와 ‘완벽한(예측 불가능한)’ 반전 서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비가시적이고 유령적인 레즈비언 커플이 변수린의 유령을 위장하고 무대화할 때 과장되게 연출된 줌 쇼트, 화려한 번쩍이는 조명, 사각앵글 등은 그들 스스로 유령적 존재였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매우 아이러니하다. 변수린이 김여사를 살해할 때 부띠크 직원을 용의자로 몰기 위해 그의 모습으로 변장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과장과 위장은 1980년대 에로틱 스릴러의 문법이기도 하면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없는 레즈비언 커플의 유령적 현현의 비틀어진 알레고리가 된다. 전말이 드러나는 에필로그, 즉 마지막 장면 바로 직전 쇼트에서 샤르망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형사들에게서 도망쳐 기차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간다. 기차와 부딪히기 직전 그의 신체는 프리즈 프레임 효과 속에서 동결된다. 기차의 헤드라이트 때문에 하얗게 날린 스크린은 종결보다는 다른 이미지와 서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하얀 스크린과 샤르망의 신체가 한중간에서 찢겨나가기라도 하듯 바로 이어지는 쇼트에서 창문 양쪽이 열리고 하얀 커튼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누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두 여자, 부띠크 직원과 주은몽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샤르망의 신체와 스크린(그리고 이성애 서사)을 찢고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 에이리언 >(리들리 스콧, 1979)에서 에일리언과 접촉했던 남자 승무원의 배를 찢고 아기 에일리언이 나오는 장면이, 직유적으로 (불가능한) 남성출산을 가리켰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까지 어떤 서사적 암시도 없었기에 그 반전은 그야말로 영화 전체를 헤집고 뒤집는 얼룩이 된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여자 등친 돈, 여자가 돌려받았을 뿐이야”라고 그럴듯한 범죄 동기를 던져줌에도 이 반전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이 예측 불가능한 에필로그는 철학자 질 들뢰즈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분석하며 그의 회화가 구상이나 추상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구상을 뒤흔들고 해체하는 힘의 운동(강도)에 가깝다고 분석한 것에 가깝다. 들뢰즈가 ‘돌발흔적’이라고 부른 것 말이다. 돌발흔적은 구상에 가까운 그림 위에 우발적이고 맹목적으로 던져진 국지적이고 질료적인 손의 흔적을 지칭한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에서 퀴어적인 것은 영화 내내 이어진 팜 파탈과 옴 파탈 간의 연쇄 범죄도, 비규범적 섹슈얼리티도, 레즈비언 커플이 가시화되는 에필로그도 아니다. 그보다는 국지적인, 흰 스크린 위의 얼룩과도 같은, 마지막 한 씬으로 영화 전체를 뒤흔들고 반향을 만드는 힘의 강도다. 무엇도 선명하게 의도되지 않고 혼탁하기 그지없다. 외삽도 내삽도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며 우발적으로 스크린을 찢어내며 등장한 돌발흔적. 레즈비언 커플은 그야말로 샤르망의 몸, (혹은) 스크린을 찢고 자진 탄생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기존의 (이성애) 서사를 완전히 망쳐 놓는다. 영화는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듯 “아... 색깔있는 남자여 안녕”이라는 대사를 던지며 웃는 주은몽의 얼굴로 다시 한 번 프리즈 프레임하며, 샤르망의 프리즈 프레임을 취소시키고, 그 자신의 얼굴로 끝을 낸다. 에필로그 ‘얼룩,’ ‘돌발흔적’에 그칠 수밖에 없던 레즈비언 커플은 기껏해야 하나의 씬, 비밀스러운 작은 침실에서만 가시화될 수 있었다. 최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두 편의 퀴어 장편영화 < 딸에 대하여 >(이미랑, 2023)와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는 사회와 공동체에 의해 지워버려야 하는 얼룩과 불쾌한 냄새로 취급되는 레즈비언 커플의 가족구성권 혹은 자기 자리와 공간의 확보를 다루고 있다. <색깔있는 남자>의 ‘에필로그’는 국지적인 것이 바탕을 바꾼다는 면에서 퀴어적으로 독해될 수 있지만 분명 한계가 있다. 반향을 만들어내는 얼룩의 자리는 강제된 것이고 실제로 그 자리 이외의 것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에 대하여>와 <럭키, 아파트>는 레즈비언 커플들이 더 이상 얼룩과 냄새로만 남아있지 않을 것이며, 돌발흔적은 오히려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넘어 상상된 관계들과 공동체들의 이접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말한다. 돌발흔적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촉지될 수 있다. <딸에 대하여>, <럭키, 아파트>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한국영화걸작선과 < 무릎과 무릎사이 >( 이장호 , 1984)의 만남. 만약 이 ‘기이한 조합’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아마도 당신은 성적 판타지가 만개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무릎과 무릎사이>를 본 관객일 가능성이 높다. 때로 어떤 영화는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을 뿌리 삼아 밑도 끝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다가, 어느새 ‘상상의 영화’가 되어 원작을 압도하곤 한다. <무릎과 무릎사이>가 바로 그런 영화다. (관람 당시 중고생이었던) 한 남자의 인생을 관람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은 < 나인 하프 위크 >(애드리안 라인, 1986)에 필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한국영화. 그것이 <무릎과 무릎사이>다. 강렬한, 너무나도 강렬한 이미지 < 무릎과 무릎사이 >는 3S(섹스, 스포츠, 스크린)로 대변되는 1980년대를 넘어 지금까지 등장한 그 어떤 한국 영화보다 선정적인 제목을 지닌다. 특히 그 주인공인 이보희 가 의자에 앉아 무릎을 치켜세운 모습을 전면에 노출한 포스터는 이 작품에 농밀한 느낌을 더한다. <무릎과 무릎사이>의 제목이나 포스터의 관능에 견줄만한 영화는 < 올 레이디 두 잇 >(틴토 브라스, 1994)이 유일하다. 어쨌든, <무릎과 무릎사이>는 제목과 포스터에서 남성 관객의 에로틱한 욕망을 낚아채려 했고, 그해 한국영화 흥행 2위라는 성적은 이 전략이 꽤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장호 는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1980년대 중반 충무로를 대표하는 흥행사로 재도약한다. < 무릎과 무릎사이 >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경멸할 만한 것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실제로 강간에서 쾌감을 얻는 여성 주인공 자영( 이보희 )의 캐릭터나,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하여 관음증적 쾌락의 도구로 삼는 연출, 타락한 여성을 남성이 용서하고 구원하는 도식적 드라마 등, <무릎과 무릎사이>는 여성 비하적인 설정과 장면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것이 <무릎과 무릎사이>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가로막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무릎과 무릎사이>는 무관심 속에 버려두기에는 텍스트의 ‘비균질성’이나, 남성의 가학적인 성적 판타지를 안전하게 유지시켜주는 상업적으로 영리한(?) 스토리텔링,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 관객의 기억에 평생 달라붙을 만한 강렬한 쇼트의 힘만큼은 한국영화 중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 무릎과 무릎사이 >에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이 있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자영에게 그녀에 대한 소유욕으로 가득한 동창( 임성민 )이 찾아온다. 동창은 무릎을 중심으로 자영의 신체를 애무한다. 이장호 는 동창의 행동과 자영의 리액션을 과감하게 이어 붙인다. 동창의 손을 따라서 자영의 몸을 부유하는 카메라. 자영의 입술. 이 모든 것의 빅 클로즈업. 그리고 그 반복. <무릎과 무릎사이>는 관객들에게 클로즈업이 사물의 확대라는 것, 우리에게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영화적 기법이라는 것을 온전하게 가르쳐준 영화다. 이 장면이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기억에서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물론 <무릎과 무릎사이>의 압권은 비 오는 밤 벌이는 동창과 자영의 정사 장면일 것이다. 이장호는 해변 장면보다 이 장면에서 더욱 과감해진다. 폭우, 천둥, 번개와 두 사람의 정사가 앙상블을 이루면서 1980년대 한국 에로영화 중 가장 압도적인 ‘야한 이미지’를 완성한다. 어린 시절 이후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이가 있다면, 이 장면에서 의외로 노출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우리 세대에게 가장 ‘야한’ 장면으로 착시적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것이 쇼트의 힘이고, 이미지의 강렬함이다. 이장호는 신체의 노출이 아니라, 음향이 가미된 쇼트의 리드미컬한 구성만으로 그것을 성취한다.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 < 무릎과 무릎사이 >에는 두 무릎 사이를 넘어서는 또 다른 ‘사이’가 존재한다. 자영의 동생은 마이클 잭슨에 빠져있고, 이는 전통을 추구하는 자영의 연인 조빈( 안성기 )와 대조를 이룬다. 또한 억압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순결을 강요하는 어머니와 자영을 성추행하는 서양인 선생의 대립이 있다. 실제로 자영이 서양인 선생이 성추행했던 무릎에 페티시즘적 쾌락을 갖게 된 것은 억압적인 어머니에게 반항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자영은 한국 사회가 전통과 서구화로 찢긴 지점, 바로 그 ‘사이’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달리 말해, 그녀의 페티시즘적 쾌락은 전통과 서구화의 충돌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혼란의 병적 징후인 것이다. 이장호 가 전통적 판소리와 클래식 연주의 교차 편집 등의 장면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 무릎과 무릎사이 >는 사회적 문제 제기를 위해 여성의 신체를 경유한 것일까, 아니면 여성의 신체를 탐닉하기 위한 알리바이로서 사회적 문제의식을 끌어들인 것일까? 어쩌면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이 작품을 두 질문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당시에 이장호 는 ‘내 영화의 겉포장은 섹스, 내용물은 정치’라고 공공연히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영화에 남은 것은 내용이 아니라 겉포장이다. 한마디로,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켰다.
1980년대 한국영화는 이상했다. < 결혼 이야기 >(1992)가 ‘기획 영화’의 시대를 열며 충무로 체질 개선을 시작하고 < 쉬리 >(1999)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장르화 속에서 이른바 ‘웰메이드’를 추구하며 한국영화가 서로 닮아가기 시작했다면, 그 이전인 1980년대는 중구난방의 시대였다. 이 시기 남한의 엔터테인먼트가 ‘3S 정책’의 억압 아래 있었고 그 여파로 충무로에 에로티시즘이 창궐했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인과 관계가 형성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영화는 어떤 정책을 수행하기엔 그 산업적 토대가 너무나 부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한 편이 완성될 때 그 최종심급은 심의와 검열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나온 영화들은 시스템이 아닌 모순적 사회 구조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에 산업적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국영화가 1990년대에 재 산업화에 들어가기까지, 그 사이에 이색지대처럼 존재하는 1970~80년대는 일종의 혼란기였으며, 1980년대는 그 혼란의 정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1980년대 한국영화는 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이 시기에 오면 한국영화의 정서적 기둥이었던 ‘신파 감성’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외국 영화가 맥락 없이 접목되며, 뜻하지 않는 장르적 시도들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며, 때론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마저 뒤흔드는 영화가 등장한다. 이런 증상은 이른바 ‘에로 영화’ 속에서 돌발적으로 나타나곤 했는데, < 어우동 >(1985)은 의도했든 안 했든 정치적 텍스트가 되었고, 위험한 섹슈얼리티 무비 < 사방지 >(1988)도 있었으며, <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1985)의 정신분열증적 아우라는 시대의 파격이었다. 이 불균질적이며 뒤엉킨 계보도 속에 김성수 감독의 < 색깔 있는 남자 >(1985)가 있다. 2004년에 세상을 떠난 김성수 감독은 1977년 < 돌아와요 부산항 >으로 데뷔한 후 1980년대에 장미희 , 원미경 , 이영하 등이 출연하는 < 색깔 있는 여자 >(1981)로 에로티시즘 멜로의 세계로 접어든다. 여기서 혹시 < 색깔 있는 여자 >와 < 색깔 있는 남자 >가 연작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 전작이 한 여성의 이중생활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 <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1977)를 연상시킨다면, 후자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 디아볼릭 >(1955)를 연상시키는 악녀 스토리다. < 색깔 있는 여자 > 이후 정윤희 주연의 < 여자와 비 >(1982), 김부선 이 등장하는 <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 >(1983) < 여자는 남자를 쏘았다 >(1984), 당대 급부상한 섹스 심벌 오혜림 이 마흥식 과 임성민 사이를 오가는 < 탄드라의 불 >(1984)까지 나름 일관성 있는 작품 세계를 구축하던 김성수 감독은 < 색깔 있는 남자 >에서 정점을 맞이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패션 디자이너 최태욱, 일명 ‘샤르망 최’(임성민)가 귀국한다. 그는 후원자인 김문자 여사( 홍명진 ) 덕에 성공적으로 한국 패션계에 진입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질투한 변수린( 오수미 )은 김문자를 살해한다. 변수린의 사랑이 부담스러워진 샤르망 최는 재미 교포인 주은몽( 오혜림 )과의 관계를 통해 벗어나려 하지만, 변수린의 집착은 점점 그를 옥죄어 온다. 결국 샤르망 최는 변수린을 잔인하게(기차 레일 위에 올려놓는 방식으로!) 살해하는데….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돈을 노린 주은몽의 계략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진 주변 인물에 지나지 않았던 샤르망 최의 부티크 점원( 오경아 )이 주은몽과 함께 묵직한 반전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 색깔 있는 남자 >는 한 명의 지골로를 네 명의 여자가 갉아먹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성적 위력은 진정 압도적이다. 김문자 여사에겐 성 기능을 상실한 나이 든 남편( 변희봉 이 역할을 맡았다!)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부실한 성기에 대한 대리물로 일본도에 집착한다. 여기서 진정 놀라운 장면이 나오는데, 김문자는 남편 앞에서 일본도 손잡이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그 광경을 본 남편은 극도의 흥분에 휩싸이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 복상사 따위는 우습게 만드는, 퍼포먼스만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놀라운 캐릭터다. 하지만 그녀도 변수린에게 죽게 된다. 한국영화에서 팜므파탈을 평가할 때 만신전에 봉헌되어야 할 오수미는 이 역할을 만나 놀라운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그녀는 한 마리 음탕한 거미처럼 남자를 옭아맨다. 그녀의 대사는 당연히 직설법인데, 음산한 목소리로 샤르망 최에게 “누님이라는 소리 때려치워!” 일갈하다가도 “색깔 있는 남자, 당신 날 흥분시켰어”라고 속삭이는 모습은, 끈적끈적하면서도 헤어나올 수 없는 마성을 지닌다. 여기서 대미를 장식하는 인물은 주은몽이다, 샤르망 최는 변수린을 살해한 후 결국 경찰에게 체포되고, 모든 것은 주은몽의 수중으로 돌아온다. 이때 그녀는 샤르망 최에게 쿨하게 말한다. “여자 등친 돈, 여자가 돌려받았을 뿐이야.” 그리고 이 영화가 러닝타임 내내 감춰왔던 관계가 드러난다. 샤르망 최와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 점원은 알고 보니 주은몽과 동성 연인이었던 것이다. 얼음송곳만 없었지 < 원초적 본능 >(1992) 못지않은 < 색깔 있는 남자 >는, 1980년대 에로티시즘 영화들 속에서도 가장 거친 욕정을 드러낸 영화다. 이 영화의 여자들은 절대로 욕망을 억누르지 않으며, 이 영화의 남자는 언제나 그들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강한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해 육체의 암투를 벌이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먹잇감이 되는 지옥도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섹스와 돈과 명예의 유혹이 넘실대는 에로틱 누아르 스릴러 <색깔 있는 남자>. 누구나 공감하는 걸작은 절대 아니지만, 이 영화만큼 강렬한 화면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