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의 화원
- 감독
- 신상옥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최은희, 최지희, 유춘, 안성기, 김석훈, 고선애, 남궁원, 김승호, 최남현, 주선태, 나애심, 성소민, 한은진, 김학, 조덕성, 남춘역, 윤정란, 이기홍, 박민호, 유동건, 최성, 전경미, 맹만식
신상옥 의 1959년 작 멜로드라마 < 자매의 화원 >은 전통적인 제인 오스틴 소설 상황에서 시작된다. 유능하지만 가난한 의사 남 박사가 아름다운 두 딸과 어린 아들에게 빚만 남겨놓고 병으로 죽는다. 양갓집 규수라는 타이틀을 제외하면 직업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두 딸에겐 결혼만이 유일한 선택처럼 보인다. 다행히도 어머니가 죽은 뒤로 가족을 이끌어 온 큰딸 정희는 그 집안과 가깝게 지내는 젊은 화가 동수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 하지만 동수는 작은딸 명수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이 결혼하자 정희는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여관(이라고 쓰고 요정이라고 읽는다)의 마담이 된다. 마침 아버지의 제자인 젊은 의사 순철이 정희를 좋아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제인 오스틴 소설의 커플들이 대부분 그렇듯 타이밍이 잘 맞지 않는다. 이때 정희에게 마담 자리를 제안한 아버지의 옛 환자 방사장이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정희는 방 사장의 청혼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자신의 과거가 순철의 경력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따라야 할까? 모든 옛 시대의 예술작품들은 세 가지 층으로 분리된다. 그들이 성취하려고 한 목표, 그들이 실제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이미지, 그리고 미래(그러니까 현대)의 감상자들이 실제로 보는 것. 첫 번째 층과 두 번째 층은 대부분 만들어진 직후부터 틈이 보인다.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을 만드는 변수는 두 번째 층과 세 번째 층 사이에 있다. 창작자는 두 층 사이의 간격이 존재하지 않길 바라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대부분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작품들은 그 벌어진 간격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가 붕괴되지 않는 경우에 속한다. 운이 아주 좋은 경우엔 그 간격이 그 작품을 더 재미있게 만들기도 한다. < 자매의 화원 >으로 돌아가 본다면, 이 영화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층 사이의 간격이 크게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의 야심은 신상옥 이 1959년에 무리 없이 도달할 수 있는 딱 그 지점에 맞추어져 있고 지나치게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다. 오스틴의 소설이 그렇듯, 신상옥의 이 영화엔 감상주의나 신파 감성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배배 꼬인 사각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네 사람의 이야기로 로맨스를 꾸밀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어조는 신중하고 차분하다. 연인들의 오해는 불필요한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비교적 빨리 풀리고, 한 남자를 둔 자매의 전쟁 같은 것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언니의 남자를 사랑하게 된 동생이 맨 먼저 한 일은 언니에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고 언니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며 언니 역시 그런 동생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큰 감정의 굴곡은 없다. 두 자매의 짝은 처음부터 정해졌고 이들이 정해진 길을 가려면 약간의 오해와 사회적 편견만 제거하면 된다. 이 영화에서 멜로드라마보다 더 중요하고 실제로 주인공의 행보를 결정짓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다. 한 마디로 자매에겐 돈이 없다. 순철의 자기희생으로 아버지의 빚은 갚았고 명희가 결혼해서 입을 덜긴 했지만 그림을 잘 팔지도 못하는 화가 동수도 가난한 건 마찬가지이다. 명희가 결혼 전부터 꿈꾸었던 양장점을 차리는 데에도 돈이 들어가고, 어린 남동생을 부양하는 데에도 돈이 들어간다. 동수가 양장점을 차리기 위해 친구의 공금을 빌렸다면 더욱 그렇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정희의 선택을 결정짓고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모두 돈, 정확히 말하면 돈의 결여이다. 현대 관객들에게 낯설고 흥미로워 보이는 것은 정희가 영화 중간에 받아들인 여관 마담이라는 직업이다. 명희에게 마담 자리를 제안하는 방 사장은 아버지 남 박사 때문에 목숨을 건진 부유한 남자로 영화 내내 중후한 신사 캐릭터를 맡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갓집 처녀에게 평생의 짐이 될 수 있는 그 직업을 제안하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재미있는 것은 정희 역시 그 제안을 그렇게까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립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정희에겐 여관 마담이 되는 것이 절실하게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신랑감을 구하는 것보다 더 당당한 선택이다. 당시 여성들에게 극히 제한되었던 사회적 진출의 기회와 경제적 위기가 정희를 이런 선택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하는 좁은 틈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모든 게 당연한 품위 속에서 진행된다. 문제가 있다면 당시 관객들과는 달리 지금의 관객들은 방 사장의 캐릭터와 그의 제안에 대해 훨씬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 자매의 화원 >이라는 50년대 영화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층을 갈라놓는다. 방 사장은 50년대 한국 영화 속 중년 남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품위와 절제를 갖고 행동하며 결국 정중하게 정희를 포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방 사장의 태도를 의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가 안전한 멜로드라마 조연의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50년대 한국 중상층 중년 남자들로 구성되었고 결국 대부분이 정희의 고객일 수밖에 없는 집단에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들이 정희를 어떻게 대하는지 슬쩍 엿볼 기회를 얻지만 아마 그게 정희가 겪은 경험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관객들은 이 규격화된 깔끔한 과정과 결말을 의심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50년대 한국 남자의 시야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그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무엇을 검열했을지를 상상하게 된다.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담 자리를 맡을 수밖에 없었던 양갓집 처녀를 다룬 이 단아한 흑백영화는 십여 년 뒤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올 호스티스 영화들의 전주곡처럼 보인다. 물론 그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방패가 되어 줄 집안도, 뒤에서 짝사랑하며 청혼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전도유망한 의사도, 옆에 안겨 술 따라주는 여자를 같은 계급 남자들에게 공급하는 주제에 시치미 뚝 뗀 위선 속에서 고상한 말만 하고 있는 보호자도 없었다. 위선이 벗겨지고 필름에 지저분한 색이 입혀졌으며 모든 게 더러워지고 적나라해졌다. 하지만 정희와 명해 자매가 필사적으로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50년대 말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심했다면 더 심하지 않았을까.
<지옥화 스틸>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 전후 한국 사람들의 상처를 위로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전쟁 중에도 영화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바로 제작에 착수했다. 영화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물론 영화는 크든 작든 자본의 투자와 회수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산업임이 틀림없고, 분명 개인 창작자로서의 욕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영화인들에게는 한국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열정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 같다. 환도한 이승만 정부도 이를 파악하고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로 한국영화 지원책을 단행한다. 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기폭제가 된 작품은 이규환의 <춘향전>(1955)이다. 1955년 벽두에 국도극장 한 관에서 개봉한 이 작품에 관객들은 2개월간의 장기 흥행으로 보답했다. 영화인들은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영화로 채산을 맞추는 것을 넘어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의 성공으로 이듬해까지 <심청전>(이규환, 1956)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 등 사극·시대극이 유행했고, 관객들이 싫증을 낼 틈도 없이 멜로드라마 현대극 장르가 열기를 이어갔다. 이를 주도한 것은 한형모인데,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의 각기 다른 연애를 다룬 <자유부인>(한형모, 1956)으로 전후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후 여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역시 멜로드라마였다. 특히 홍성기가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상업영화 감독으로서는 1인자의 자리를 누렸다. 영화사가 이영일은 특히 <자유부인>에 방점을 찍어 “시대 풍조의 멜로드라마”로, 홍성기의 영화는 “전형적인 애정 멜로드라마”로 정의하지만, 이 시기 어떤 멜로드라마든 전후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심리를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무명의 영화청년 신상옥의 등장 잘 알려진 것처럼 신상옥의 영화적 스승은 ‘남한’영화의 시원이라 할 최인규다. 한형모가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도제를 시작했다면, 그는 해방 이후 최인규의 문하에 참가하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장르에 충실하고 기술에 뛰어난 한형모가 테크니션으로서 최인규의 적통이라면 신상옥은 이는 물론이고 영화작가로서의 면모까지 확실히 이어받았다. 어쩌면 1950년대에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최인규의 영화세계를 완전히 계승한 이가 바로 신상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미완에 그쳤던 리얼리즘의 화법과 장르적 세계의 결합은 신상옥이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곱 번째 작품<지옥화>다. 사실 신상옥의 초기 영화들은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흥행에 실패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26세 때 만든 데뷔작 <악야>(1952)는 전쟁 시기 양공주를 그린 작품인데, 그 역시 증언했던 것처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염세적인 프랑스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 전쟁 중 대표 장르였던 세미 다큐멘터리 <코리아>(1954) 그리고 시대극 <젊은 그들>(1955), <꿈>(1955), <무영탑>(1957)을 연출했다. 영화계의 주류가 아니었던 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확실히 한형모가 보여준 참신함이나 세련됨이 느껴지지 않는다. 훗날의 신상옥다운 과감함이 제대로 발현된 작품은 1958년 만들어진 <지옥화>였다. 현대극·멜로드라마의 유행과 1958년부터의 악극을 원작으로 한 이른바 ‘신파물’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경향에서 완전히 돌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악야>에서 다룬 바 있는 양공주를 소재로 전후 한국 사회의 단면을 리얼리즘 화법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강렬한 파토스(pathos)를 드러내는 멜로드라마적 화법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었다. 물론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기지촌을 통해 드러낸 전후 한국 사회 <지옥화>는 동두천 기지촌을 배경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과 미군 부대의 물건을 훔쳐 암시장에 내다 파는 갱단이 등장하는, 한국영화사 전체를 훑어봐도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영화다. 영화는 형 영식(김학)을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동식(조해원)이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어지러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의 가방을 훔치는 날치기를 쫓으려던 동식은 불량배들의 시비로 자기 가방마저 잃어버려 망연자실하고, 이를 본 남대문의 지게꾼들은 세상을 한탄한다. 결국 동식은 남대문시장에 장물을 팔러 온 형을 발견하고 동두천으로 따라가게 된다. <지옥화>의 서두는 마치 기록영화인 듯 미군 부대 앞 시장통 풍경, 미군과 양공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영화 곳곳에서 다큐멘터리적 질감이 활용되는데, 단순히 기록영화적 화면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르영화의 문법과 결합시키는 연출이 무척 흥미롭다. <자유부인>에서 한형모가 영화 속 볼거리로 댄서의 장면을 보여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신상옥 역시 당시 관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미군 부대의 댄스홀 장면을 넉넉히 보여주지만, 영식 일당이 양공주들의 도움으로 미군 부대에 잠입해 물건을 훔치는 장면까지 덧붙이고 있다. 즉 댄서들의 공연 장면을 기록영화를 보는 듯한 숏들로 구성하는 한편, 교차 편집을 통한 장르적 긴장감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리얼리즘 화법과 결합한 멜로드라마 양식 영화는 영식과 그와 동거하는 양공주 쏘냐(최은희) 그리고 동식과 그를 좋아하게 된 주리(강선희)를 주요 인물로 배치한다. 쏘냐가 동생 동식을 유혹하고 둘이 가까워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진입한다. <지옥화>의 전단지에 붙은 “물결치는 관능의 파도”라는 문구처럼 사실 이 영화의 애정 묘사는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키스신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해진다. 영식과 쏘냐가 침대나 풀밭 또는 강변에서 보여주는(마치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프레드 진네만, 1953)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러브신, 쏘냐가 동식을 유혹하는 장면과 이후 둘의 러브신이 숨가쁘게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학자 벤 싱어(Ben Singer)는 무대 멜로드라마에서 시리얼 퀸(serial queen)의 연속 영화(serial film)로 이어지는 멜로드라마적 특성으로 파토스, 과도한 감정,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인 내러티브 구조뿐만 아니라 육체에 위험을 가하는 스펙터클, 스릴, 폭력, 액션의 강조로 정의되는 ‘선정주의’를 거론한 바 있다. <지옥화> 역시 멜로드라마의 이러한 관점에 정확히 일치하는데, 영화는 영식, 동식, 쏘냐의 복잡한 관계로 야기되는 액션 신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전체 러닝타임(86분) 중 후반부 30분 동안 펼쳐지는 기차 액션신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스펙터클이다. 신상옥 사단이자 훗날 스릴러·액션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떨친 강범구 감독이 달리는 열차 위에 밧줄로 몸을 묶고 촬영했다는 바로 그 장면이다. 영식 일당은 미군 부대의 물자를 실은 열차칸을 탈취하기 위해 떠나고, 쏘냐는 동식과 달아나기 위해 헌병대에 이들을 신고한다. 일당은 탈취에 성공하지만 헌병대가 이들의 차량을 쫓고, 이를 안동식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이들을 쫓아가고, 쏘냐마저 영식을 쫓아가는 3중의 추격전이 펼쳐진다. 헌병대와 총격전을 벌이던 영식 일당의 차량이 전복되고 영식은 겨우 살아남아 동식에게 발견되지만, 뒤따라온 쏘냐를 본 그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지금 성수대교 근처의 당시 사근동 늪지대에서 찍었다는 마지막 장면은 단연코 이 영화의 백미다. 쏘냐와 동식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투를 벌이고, 칼로 쏘냐를 찌른 영식 역시 죽은 그녀 옆으로 기어가 운명을 다한다. 진흙으로 가득 찬 늪은 영화의 초입 남대문의 지게꾼이 말한 “어지러운 세상”의 축도였다. 다행히 영화는 동식과 함께 시골로 떠나는 주리의 장면으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쏘냐는 ‘지옥화’로 남았고, 동식과 주리만이 그 지옥을 탈출해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중심에 서다 이후 신상옥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자매의 화원>(1959), <동심초>(1959) 등 서구영화를 지향한 세련된 멜로드라마를 선보이며 성공 가도를 달린다. <성춘향>이 크게 성공한 1961년, 신필름을 설립한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반을 리드하게 된다. 당시 한국영화계를 부르는 별칭 ‘충무로’는 신필름과 그 외 영화사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신필름이라는 영화왕국의 군주였다. 영화제작자로서 양산 체제를 지휘하는 한편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로서의 작업도 유지한, 세계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축복받은 존재였다. 1960년대 초반 영화산업의 외양이 급격히 확대되었고, 1962년부터 연간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게 된다. 한국 영화산업은 규모의 경제뿐만 아니라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성으로 깊이가 확보될 때 힘을 받았다.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앞둔 1996·1997년 홍상수·김기덕·이창동이 차례로 데뷔한 것처럼, 1960년 김기영이 <하녀>를, 1961년 유현목이 <오발탄>을, 신상옥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한국영화사의 위대한 걸작을 내놓으며 1960년대 르네상스의 폭과 깊이를 두루 만족시키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 전후 한국 사람들의 상처를 위로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전쟁 중에도 영화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바로 제작에 착수했다. 영화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물론 영화는 크든 작든 자본의 투자와 회수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산업임이 틀림없고, 분명 개인 창작자로서의 욕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영화인들에게는 한국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열정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 같다. 환도한 이승만 정부도 이를 파악하고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로 한국영화 지원책을 단행한다. 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기폭제가 된 작품은 이규환의 <춘향전>(1955)이다. 1955년 벽두에 국도극장 한 관에서 개봉한 이 작품에 관객들은 2개월간의 장기 흥행으로 보답했다. 영화인들은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영화로 채산을 맞추는 것을 넘어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의 성공으로 이듬해까지 <심청전>(이규환, 1956)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 등 사극·시대극이 유행했고, 관객들이 싫증을 낼 틈도 없이 멜로드라마 현대극 장르가 열기를 이어갔다. 이를 주도한 것은 한형모인데,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의 각기 다른 연애를 다룬 <자유부인>(한형모, 1956)으로 전후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후 여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역시 멜로드라마였다. 특히 홍성기가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상업영화 감독으로서는 1인자의 자리를 누렸다. 영화사가 이영일은 특히 <자유부인>에 방점을 찍어 “시대 풍조의 멜로드라마”로, 홍성기의 영화는 “전형적인 애정 멜로드라마”로 정의하지만, 이 시기 어떤 멜로드라마든 전후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심리를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무명의 영화청년 신상옥의 등장 잘 알려진 것처럼 신상옥의 영화적 스승은 ‘남한’영화의 시원이라 할 최인규다. 한형모가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도제를 시작했다면, 그는 해방 이후 최인규의 문하에 참가하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장르에 충실하고 기술에 뛰어난 한형모가 테크니션으로서 최인규의 적통이라면 신상옥은 이는 물론이고 영화작가로서의 면모까지 확실히 이어받았다. 어쩌면 1950년대에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최인규의 영화세계를 완전히 계승한 이가 바로 신상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미완에 그쳤던 리얼리즘의 화법과 장르적 세계의 결합은 신상옥이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곱 번째 작품<지옥화>다. 사실 신상옥의 초기 영화들은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흥행에 실패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26세 때 만든 데뷔작 <악야>(1952)는 전쟁 시기 양공주를 그린 작품인데, 그 역시 증언했던 것처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염세적인 프랑스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 전쟁 중 대표 장르였던 세미 다큐멘터리 <코리아>(1954) 그리고 시대극 <젊은 그들>(1955), <꿈>(1955), <무영탑>(1957)을 연출했다. 영화계의 주류가 아니었던 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확실히 한형모가 보여준 참신함이나 세련됨이 느껴지지 않는다. 훗날의 신상옥다운 과감함이 제대로 발현된 작품은 1958년 만들어진 <지옥화>였다. 현대극·멜로드라마의 유행과 1958년부터의 악극을 원작으로 한 이른바 ‘신파물’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경향에서 완전히 돌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악야>에서 다룬 바 있는 양공주를 소재로 전후 한국 사회의 단면을 리얼리즘 화법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강렬한 파토스(pathos)를 드러내는 멜로드라마적 화법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었다. 물론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기지촌을 통해 드러낸 전후 한국 사회 <지옥화>는 동두천 기지촌을 배경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과 미군 부대의 물건을 훔쳐 암시장에 내다 파는 갱단이 등장하는, 한국영화사 전체를 훑어봐도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영화다. 영화는 형 영식(김학)을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동식(조해원)이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어지러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의 가방을 훔치는 날치기를 쫓으려던 동식은 불량배들의 시비로 자기 가방마저 잃어버려 망연자실하고, 이를 본 남대문의 지게꾼들은 세상을 한탄한다. 결국 동식은 남대문시장에 장물을 팔러 온 형을 발견하고 동두천으로 따라가게 된다. <지옥화>의 서두는 마치 기록영화인 듯 미군 부대 앞 시장통 풍경, 미군과 양공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영화 곳곳에서 다큐멘터리적 질감이 활용되는데, 단순히 기록영화적 화면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르영화의 문법과 결합시키는 연출이 무척 흥미롭다. <자유부인>에서 한형모가 영화 속 볼거리로 댄서의 장면을 보여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신상옥 역시 당시 관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미군 부대의 댄스홀 장면을 넉넉히 보여주지만, 영식 일당이 양공주들의 도움으로 미군 부대에 잠입해 물건을 훔치는 장면까지 덧붙이고 있다. 즉 댄서들의 공연 장면을 기록영화를 보는 듯한 숏들로 구성하는 한편, 교차 편집을 통한 장르적 긴장감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리얼리즘 화법과 결합한 멜로드라마 양식 영화는 영식과 그와 동거하는 양공주 쏘냐(최은희) 그리고 동식과 그를 좋아하게 된 주리(강선희)를 주요 인물로 배치한다. 쏘냐가 동생 동식을 유혹하고 둘이 가까워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진입한다. <지옥화>의 전단지에 붙은 “물결치는 관능의 파도”라는 문구처럼 사실 이 영화의 애정 묘사는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키스신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해진다. 영식과 쏘냐가 침대나 풀밭 또는 강변에서 보여주는(마치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프레드 진네만, 1953)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러브신, 쏘냐가 동식을 유혹하는 장면과 이후 둘의 러브신이 숨가쁘게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학자 벤 싱어(Ben Singer)는 무대 멜로드라마에서 시리얼 퀸(serial queen)의 연속 영화(serial film)로 이어지는 멜로드라마적 특성으로 파토스, 과도한 감정,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인 내러티브 구조뿐만 아니라 육체에 위험을 가하는 스펙터클, 스릴, 폭력, 액션의 강조로 정의되는 ‘선정주의’를 거론한 바 있다. <지옥화> 역시 멜로드라마의 이러한 관점에 정확히 일치하는데, 영화는 영식, 동식, 쏘냐의 복잡한 관계로 야기되는 액션 신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전체 러닝타임(86분) 중 후반부 30분 동안 펼쳐지는 기차 액션신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스펙터클이다. 신상옥 사단이자 훗날 스릴러·액션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떨친 강범구 감독이 달리는 열차 위에 밧줄로 몸을 묶고 촬영했다는 바로 그 장면이다. 영식 일당은 미군 부대의 물자를 실은 열차칸을 탈취하기 위해 떠나고, 쏘냐는 동식과 달아나기 위해 헌병대에 이들을 신고한다. 일당은 탈취에 성공하지만 헌병대가 이들의 차량을 쫓고, 이를 안동식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이들을 쫓아가고, 쏘냐마저 영식을 쫓아가는 3중의 추격전이 펼쳐진다. 헌병대와 총격전을 벌이던 영식 일당의 차량이 전복되고 영식은 겨우 살아남아 동식에게 발견되지만, 뒤따라온 쏘냐를 본 그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지금 성수대교 근처의 당시 사근동 늪지대에서 찍었다는 마지막 장면은 단연코 이 영화의 백미다. 쏘냐와 동식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투를 벌이고, 칼로 쏘냐를 찌른 영식 역시 죽은 그녀 옆으로 기어가 운명을 다한다. 진흙으로 가득 찬 늪은 영화의 초입 남대문의 지게꾼이 말한 “어지러운 세상”의 축도였다. 다행히 영화는 동식과 함께 시골로 떠나는 주리의 장면으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쏘냐는 ‘지옥화’로 남았고, 동식과 주리만이 그 지옥을 탈출해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중심에 서다 이후 신상옥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자매의 화원>(1959), <동심초>(1959) 등 서구영화를 지향한 세련된 멜로드라마를 선보이며 성공 가도를 달린다. <성춘향>이 크게 성공한 1961년, 신필름을 설립한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반을 리드하게 된다. 당시 한국영화계를 부르는 별칭 ‘충무로’는 신필름과 그 외 영화사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신필름이라는 영화왕국의 군주였다. 영화제작자로서 양산 체제를 지휘하는 한편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로서의 작업도 유지한, 세계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축복받은 존재였다. 1960년대 초반 영화산업의 외양이 급격히 확대되었고, 1962년부터 연간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게 된다. 한국 영화산업은 규모의 경제뿐만 아니라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성으로 깊이가 확보될 때 힘을 받았다.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앞둔 1996·1997년 홍상수·김기덕·이창동이 차례로 데뷔한 것처럼, 1960년 김기영이 <하녀>를, 1961년 유현목이 <오발탄>을, 신상옥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한국영화사의 위대한 걸작을 내놓으며 1960년대 르네상스의 폭과 깊이를 두루 만족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