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도 의리만은
- 감독
- 장석준
- 제작년도
- 1972
- 출연
- 김희라, 오유경, 황해, 조석근, 최성호, 김석훈, 황백, 권오상, 박명훈, 최무웅, 이경자, 박순길
김수용 감독은 자신이 영화 연출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본을 받으면 주어진 제작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영화의 도입부터 결말까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설계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마다 머릿 속에 구축해놓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촬영을 한 부분은 찍은 장면대로, 아직 안 찍은 부분은 콘티대로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를 몇 번이고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는 머릿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 본’ 영화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시청각 이미지로 구현하는가를 화두로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이 아니고 라디오극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화면들을 구축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덕분에 촬영 현장을 신속하게 지휘했고,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건 참 싫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는 영화 속에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서사 전개가 지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김수용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부터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이유는, 기념비적인 다작을 이룬 영화 장인일뿐만 아니라 영상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한 영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김수용이 교단에 서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다. 전시에는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휴전 후, 1954년에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에 위치한 적산가옥이었는데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민간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였고, 김수용은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195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이어서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10분간 휴식>은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장면화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만들었다. (사진 1)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근무 당시, 가운데가 김수용 김수용은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장편극영화 제작 현장에 참여하고, 군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배뱅이굿>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그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간부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여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사진 2)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이 작품은 김수용이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다. <공처가>는 장소팔, 김희갑, 구봉서, 백금녀 등의 당대 희극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였고 관객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촬영소에 있는 김 대위”에게 연출 의뢰가 계속 들어왔고, 김수용은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을 연출하여 그가 군 복무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사진 3) <청춘배달>(김수용, 1959)을 관람하기 위해 명보극장에 모여든 관객 이후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김수용은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그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사진 4) 모파상의 소설 「 귀향 」 을 번안한 영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스틸사진. 주인공 박남우(배우 김진규)는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화상 특수 분장으로 등장한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연출한다. 한국 배우 김희갑, 김지미, 조미령, 양훈, 최무룡, 양미희 등이 출연했다. 손오공 일행의 여정이 중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로 해마다 영화화되었지만, 김수용은 한국 관객을 감안했을 때 캐릭터 및 설정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영화 도입부를 작성하여 추가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5) <손오공(원제 화염산 火焰山)>(김수용, 1962) 촬영현장. 김수용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손오공 역을 맡은 배우 김희갑(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 등을 선보이고, 1963년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을 연출한다. 두 작품은 각각 라디오극과 연극 원작으로 김수용은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혈맥>은 원작 희곡이 방공호 토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영화적으로 장면화 하기 위해 판잣집으로 바꾸고, 서울역 근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판자촌 오픈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도시 빈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 각자의 개성을 활력있게 그려내어 극이 암울하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대종상 주연상 ·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배우 김승호(왼쪽)와 조미령(오른쪽) 1965년 작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수용은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된 주인공 해순을 비롯하여, 마을 아낙네 대다수가 과부로 동병상련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 이들이 해질녘 해변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에는 영화음악가 정윤주가 제안한 국악인 김소희의 창이 깔린다. 이 소리와 여인들의 건강한 육체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인물들이 고난을 견뎌가는 명랑함이 서정적으로 전해진다. (사진 7) <갯마을>(김수용, 1965) 중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 김수용이 연출한 연기 앙상블, 전조명 촬영 감독이 담아낸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김소희의 창이 어우러져 탄생한 명장면이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8) <갯마을> 출연진을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누워있는 이가 배우 이낙훈이고 오른쪽부터 배우 신영균, 고은아, 황정순 (사진 9) <갯마을>의 촬영감독인 전조명(왼쪽)과 김수용 “바다 냄새까지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는 <갯마을> 이후 김수용은 바다를 테마로 한 작품 <만선>(1967), <물보라>(1980)를 연출했고, 이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만선>은 천승세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바다에 생계와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어촌민들을 그려냈다. 당대 최정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船主)로부터 제 몫을 받을 수 없는 어부들의 갈등과 바다에 자식을 잃은 가족의 비애와 사랑을 열연한다. (사진 10) <만선>(김수용, 1967)에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들. 가운데가 곰치 역을 맡은 배우 김승호 (사진 11) <만선>에서 임금 문제로 선주와 갈등하는 어부들. 맨 앞이 배우 김승호, 그 뒤로 허장강(왼쪽 세 번째)과 김칠성(왼쪽 다섯 번째) (사진 12) <만선>에서 폭풍우를 겪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배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 앞줄 오른쪽부터 배우 남정임, 주증녀, 김칠성 한편 <갯마을>과 같은 해에 개봉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최고 흥행작으로, 초등학생 이윤복이 쓴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서울: 신태양사, 1964)를 영화화했다. 가난이라는 굴레에 쓰러지지 않고자 애쓰는 윤복이의 여정이 동요 따오기 선율과 함께 마음 아리면서도 담대하게 펼쳐진다. (사진 13)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에서 윤복이네 식구가 사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 윤복의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 장민호(가운데)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배우 정해정(순나 역), 김천만(윤복 역), 이지연(태순 역), 김용연(윤식 역) (사진 14)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윤복(왼쪽)에게 일기가 책으로 출간된 사실을 알려주는 약사(오른쪽)로 출연한 최현민은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희곡 <만선>을 연출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영화는 대만에서 <추상촌초심 秋霜寸草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출충하고, 특히 배우 김천만(이윤복 역)은 이후 김수용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1968)에서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축구팀원으로 열연한다. (사진 15) <맨발의 영광>(김수용, 1968)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는 진호(왼쪽, 배우 김천만) 이외에도 김수용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가위 바위 보>(1976), <달려라 만석아>(1979) 등의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교단에 서자마자 전쟁이 발발하여 뜻하지 않게 학생들과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는 항상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품어왔고, 아역들이 촬영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진 16)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 아역 배우에게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은 휴전선 근처 군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포탄 파편을 주워 생계를 돕는 아이들을 통해 전후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기적 같은 행운이나 해결책 없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채로 끝나는데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울림 있게 한다. (사진 17)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아이들이 행여 불발탈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탄피를 안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뒹구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 18)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에서 영규(배우 송현규)는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진다. 연기 경험이 없던 아역 송현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김수용은 이 작품으로 제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역시 김수용이 연출한 작품 <유정>이다. 서울 개봉 관객만 32만명을 돌파하여 전년도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서울 개봉 관객 28만 돌파)을 갱신했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은 일본 로케 촬영으로 북해도 설경을 담아낸 컬러 작품이고, 배우 남정임의 데뷔작이다. 김수용은 소수의 스타들에게만 작품이 집중되는 한국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하고 연기자층을 넓히기 위해,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 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발굴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문희, 윤정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고 한성, 이훈, 최난경,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당시 김수용이 주목한 신인 배우들이었다. 이후 강석우(<여수>(김수용, 1978) 주연), 금보라(<물보라>(김수용, 1980) 주연) 등이 그의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 19)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배우 한성(왼쪽)과 배우 전계현(오른쪽). 한성은 이 작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바쁜 톱스타로 등장한다. (사진 20) <웃음소리>(김수용, 1978)에서 주인공 학자를 연기한 배우 남정임. 김수용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고 은퇴한 배우 남정임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1967년에는 김수용이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진 21) <산불>(김수용, 1967)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김수용(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그는 1977년에 이 작품을 컬러 영화로 스스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사진 22) <산불>(김수용, 1967)에서 열연하는 배우 신영균(왼쪽)과 도금봉(오른쪽).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여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빨치산 규복이 숨어든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욕망과 파국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주연 배우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과 기자재들, 스태프들 그리고 이른바 ‘충무로 영화인들’의 문화와 실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김수용 본인도 감독으로 출연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제작에 투자한 지방흥행사(<어느 여배우의 고백>에는 호남 흥행사가 제작자와 면담하는 장면도 있다)가 흥행 감독으로 유명한 김수용의 모습도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길 원한다며, 감독이 직접 출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관객들의 관심이 관람하는 영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와 한국영화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23)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전창근 감독 (사진24)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위의 컷 다음에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 김수용 본인(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감독으로 출연한다. (사진25)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진규(왼쪽)와 김수용(오른쪽). 이 작품에서 김진규는 신인 배우 남정임을 지원하는 원로 배우로 출연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김수용, 1967)는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되었다고 한다(제작 김동수· 황혜미, 원작·각본 김승옥).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김수용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연출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연출했다. (사진26) <안개>(김수용, 1967)에서 기준(오른쪽, 배우 신성일)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뒤쪽 엑스트라 중 모자 쓰고 담배 문 사람이 원작자인 소설가 김승옥이다. <안개>는 1967년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영화로 주목 받고, 관객의 호응도 얻었다. 일찍이 김수용은 <굴비>(1963)를 감독할 무렵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는 앞서 <갯마을>(1965)의 ‘시네포엠’적인 몽타주나 <까치소리>(1967)에서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한 장면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후 김수용 특유의 영화적 개성으로 발전한다. <야행>(김수용, 1973년 제작·1977년 개봉)은 그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 1) 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한 작품이다.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과 플래쉬백, 점프컷 등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심상을 예상치 못한 방향과 템포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한다.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에서도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사 없이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직조하는 과감한 시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사진27) <야행>(김수용, 1977)에서 길 가던 행인이 던지는 추파를 거절하는 주인공 현주(배우 윤정희) <수전지대>(김수용, 1968)는 김수용의 조감독이었던 이원세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입선작)를 영화화했다. 어릴 적 염전마을에서 자라난 이원세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김수용은 그의 조감독들에게 장차 감독이 되려면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반드시 시나리오를 쓸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김수용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감독들로는 조문진, 이원세, 김수형, 정지영, 장길수 등이 있다. (사진28) <수전지대>(김수용, 1968)에서 아낙네들이 소금을 훔치는 장면. 염전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소금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그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진29) 동료 감독들과 야유회. 1960년대 후반, 왼쪽부터 이만희 감독, 김수용 감독, 김기덕 감독 1970년대에도 김수용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 <망명의 늪>(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70년대 초반에는 홍콩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와와후링 娃娃夫人>, <우중화 雨中花>를 연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와 미국 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그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 자본 및 기술력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용이 연출한 <가위 바위 보>(1976)는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든 모습이 검열 제재를 받는다. <망명의 늪>(김수용, 1978)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 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다루었는데, 상영 중지 및 작품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삐에로와 국화>(김수용, 1982)는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 그가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한 영화가 <만추>(김수용, 1981)이다.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김수용, 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동료 교수이자 극작가 차범석의 권유로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연출하여 10여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사진30) <만추>(김수용,1981)의 해외용 포스터. 주연 배우 김혜자가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에 따른 제작 환경이 요청하는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연출했다. 그는 빈민촌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소화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3) 이처럼 김수용은 제작자와 관객,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을 다룬 작품들은 아동물로만 소통되지 않고, 전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발현하여 문예영화의 부흥을 이끄는 한편 자신만의 직관과 개성을 담은 영상 표현을 시도하여 한국영화 화법에 새로운 결을 가져왔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가 선사하는 대담한 담대함, 그리고 특유의 리듬과 위트는 세월이 변해도 관객을 흔드는 영화적 감각, 영화적 체험이다. 1) 권용숙,「김수용」,『한국영화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생애사>』, 2012, 한국영상자료원, 351쪽. 2)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
침체의 시작 | 1970~1974년 197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며 국가 주도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그해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어두운 일면을 극명하게 부각했다. 1972년 10월 유신 정권이 탄생했고, 한국 사회는 더욱 경직되어갔다. 물론 사회를 반영하는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는 1970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기업형 제작사를 육성하겠다는 정부 주도의 정책은 인위적이었던 만큼 효과가 오래가지 않았고, 폐해는 더 커져갔다.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대중오락의 왕자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1970년대 내내, 흑백이었지만 텔레비전 보급률이 꾸준히 상승한 반면 전국의 영화관 및 영화 관객 수는 줄어들었다. 불황기, 침체기 그리고 쇠퇴기로 불리는 이 시기, 영화인들은 더 나빠지지 않을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1973년 2월, 유신 체제를 반영한 영화법 4차 개정이 있었다. 그 골자는 1)제작사를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 2)제작업과 수입업의 통합 3)영화진흥공사의 설립이었다. 1972년 20개이던 영화제작사는 1973년 12개로 줄었고, 그 12개사에 제작권을 부여해 연간 제작편수를 130편으로 묶었다. 47편으로 한정한 수입권도 12개 제작사에만 나눠주었다. 국산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쿼터 1편을 부여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받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작사들은 졸속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제작비 대비 흥행 성적이 안정적인 저예산 액션영화 장르가 유행한 이유였다. 특히 이런 유의 영화는 네거티브 필름을 반만 써서 촬영하는 테크니스코프 사이즈로 만들어져, 제작비를 아끼는 대신 완성도는 포기했다. 외화 쿼터를 더 따내기 위한 방법은 정부가 제시하는 ‘국책영화’ ‘우수영화’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었다. 제작사들은 관객보다는 정권의 기호에 부응한 반공영화, 새마을영화를 만들었다. 한편 ‘한국영화의 육성과 발전’을 슬로건으로 내건 영화진흥공사가 발족되어 유신 정권의 지배구조를 영화 산업 내부로 뿌리내리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계의 불황을 타개하겠다는 당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불황은 가속화되었다. 1971년까지 200편을 넘겼던 한국영화 편수는, 검열 편수 기준으로 1972년 122편, 1973년 125편, 1974년 141편을 기록했다. 이러한 침체 일로의 영화계에 일순간 활력을 불어넣은 작품이 바로 이장호 의 < 별들의 고향 >이었다. 행운아에서 풍운아로 1945년 5월 서울에서 출생한 이장호 는, 흥미롭게도 영화 검열관이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영화와 가깝게 지냈다. 홍익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제도권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부친의 권유로 신필림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신상옥 감독 등의 연출부 생활을 했으나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출부를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극단 생활을 위해 신필림을 들락날락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일을 모색했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한순간에 바뀌었다. 1973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별들의 고향」의 판권을 우여곡절 끝에 확보한 것이다. 사실 소설가 최인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는데, 그렇다고 감독 데뷔도 하지 않은 친구에게 덜컥 판권을 넘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장호는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최인호의 집에 던져놓고 오는 막무가내로, 결국 승낙을 받아낸다. 영화화 권리는 확보했지만 이후의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스승 신상옥 감독이 데뷔는 시켜주지만 신필름의 노장 이형표 감독에게 촬영을 맡긴다고 하자, 연출권을 확보하기 힘들 것을 직감한 그는 신필림을 도망치듯 떠나 하길종 감독이 소개한 화천공사로 옮긴다. 도제 시스템이 확고하던 시절, 연출부 제2조수 출신의 영화청년이 일순간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여하튼 기적 같은 일이었다. 눈으로 뒤덮인 광나루의 백사장에 도착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즉흥적으로 장면들을 만들어나간 것이 첫 연출 풍경이었다는 일화처럼 행운과 돌파력, 천재적 기질 사이의 어딘가에서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했고, 이장호는 46만이라는, 당시로는 전무후무한 흥행 성적으로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되었다. 1975년 연배가 위인 하길종, 김호선 등과 결성한 ‘영상시대’를 통해 ‘뉴시네마 운동’의 흐름을 이끌던 그는, 1976년 연예인 대마초 파동으로 감독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촉망받는 젊은 감독에서 순식간에 낭인으로 전락한 4년간의 시간은, 그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 정권 종식으로 감독 자격을 회복한 그는 그간의 고민을 담아 연출한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작가주의적 인장이 새겨진 < 바보선언 >(1983), < 과부춤 >(1983)의 흥행 실패로 위기감을 느꼈지만, 보란 듯이 < 무릎과 무릎 사이 > (1984), < 어우동 >(1985)을 히트시키며 상업적 감각을 입증하기도 했다. 1987년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이후의 영화는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30대 후반의 이장호 감독. <과부춤> 촬영 현장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만든 참신함 1972년 9월 「조선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한 「별들의 고향」은 연재 중은 물론이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1973년 한 해에만 15만 부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장호 가 연출의 기회를 잡고 개봉 초기 관객의 주목을 끌어낸 것은 당대 최고의 소설을 판권으로 확보한 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단관 개봉 시절,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석 달을 상영하며 46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기록은, 영화 자체의 힘이 분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기성 감독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맡았다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거칠고 투박하지만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을까. 당시 충무로의 선배 감독 다수가 판권을 탐내는 상황에서, 특유의 직관과 돌파력으로 이런저런 난관을 이겨낸 이장호는 어떻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사실 그는, 카메라를 직접 잡는 신상옥 감독 특유의 촬영 현장에서 게다가 제2조감독에 머물렀기 때문에 연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구영화를 섭렵했던 영화청년으로서의 세월이 그의 연출 방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냥 자기 느낌대로 한 것이다. 물론 당대 최고의 촬영기사 장석준 이 함께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이장호는 자신이 즐겨본 일본의 전문 사진잡지 「아사히 카메라」에서 스크랩한 이미지들을 장석준 기사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척하고 구도를 잡아냈다. 영상뿐만 아니라 음악도 큰 몫을 했다. 이전의 한국영화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영화음악의 대가들이 녹음실에 오케스트라를 불러 잠깐 맞춰본 뒤 일사천리로 음악을 녹음하는 식이었다. 이장호는 고교 후배인 가수 이장희 에게 음악을 맡겼고, 아예 레코드 스튜디오에 자리 잡고 무려 40여 일을 투자했다. 이장희가 작곡하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리스트 강근식 이 연주한 <별들의 고향>의 영화음악은, 국내 첫 OST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영화만큼 성공을 거뒀다(그 이전의 한국영화 음반은 주제가가 수록된 것이지만, 이 앨범은 문자 그대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었다). 물론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혹은 잘 몰라서, 신선하게 음악을 배치한 것도 이장호의 감각을 기반으로 했다. 이장희가 부르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흐르는 장면들의 참신함이 특히 그렇다. 물론 시퀀스 전체를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음악을 전면에 내세워 연결한 장면들은, < 졸업 The Graduate>(마이크 니콜스, 1967) 같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장호가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라고 규정한 것처럼, <별들의 고향>이라는 희대의 흥행작은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느낌대로 밀고 나간 덕분이었다. 사실 이 영화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와 같은 혁신을 일으켰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운규가 그리피스의 대작 멜로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 아리랑 >(1926)을 만들고, 이만희 가 할리우드의 빼어난 장르영화와 유럽의 예술영화를 소화해 < 만추 >(1966)를 만든 것처럼, 한국 상업영화의 새로움은 늘 서구 영화의 언어와 문법에서 힌트를 찾았다. 이장호 영화의 새로움 역시 서구 영화의 고전과 현대작을 섭렵한 영화광 출신의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이는 <별들의 고향>에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장 뤽 고다르, 1959)의 장 폴 벨몽도의 중절모나 <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오손 웰스, 1947)의 거울의 방 같은 설정을 넘어서는 문제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다는 사실이다.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같은 대사가 흐르던 바로 그 장면 멜로드라마와 새로움 사이 < 별들의 고향 >은 20대 중반의 순진하고 발랄한 여성 경아( 안인숙 )와 그녀가 만난 4명의 남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사실 영화는 내러티브의 밀도가 희박한 편으로, 시간순으로 줄거리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빌려 그 행간을 채워야 한다. 작은 회사 경리인 경아는 직장 선배인 영석( 하용수 )의 구애로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그는 아이까지 지운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두 번째 남자는 중년의 만준( 윤일봉 )이다. 경아는 만준의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경아를 닮은 전부인이 의처증으로 자살한 것과 경아의 낙태 경험이 밝혀지면서 파경을 맞는다. 이후 경아는 호스티스가 되고 화가 문오( 신성일 )를 만난다. 삶의 의욕을 잃었던 둘은 동거를 시작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지만, 폭력적으로 그녀에 집착하는 옛 애인 동혁( 백일섭 )이 찾아오면서, 문오도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고향으로 떠났다 서울로 돌아온 문오는 1년 반 만에 술집에 있는 경아를 만나고, 그녀가 잠든 사이 돈을 두고 나온다. 그리고 1년 후 경아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눈밭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문오가 유골함을 들고 경아를 회상하는 장면과 한강에 그녀의 재를 뿌리는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촘촘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에 기반을 둔 것이 그 이유겠지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하며 장면을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 촬영해놓은 필름을 돌려보며 편집실에서 구성을 시작했다는 이장호의 증언처럼, 그는 편집을 통해 아마추어리즘을 참신함으로 바꿔놓았다. 이 영화는 플래시백의 리듬도 균일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하지만 이는 되레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고 영화 속으로 몰입시킨다는 점에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영화의 발전도 계단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별들의 고향>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관객을 한 단계 성숙시킨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별들의 고향> 역시 이전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영화의 중반부 두 번째 남자 만준과의 에피소드가 특히 그렇다. 하지만 경아로 분한 안인숙의 연기가 이마저도 상쇄시킨다. 아역 배우 출신인 그녀는 여리고 순진하고 발랄하지만 도시의 비정한 남자들에게 버림받는 경아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 영화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여성의 수난담과 성적 과잉을 관음증적 볼거리로 제공하는 호스티스 영화의 출발점으로도 평가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경아를 잡아내는 구도나 쇼트들의 배치를 자세히 보면 여성의 입장에 공감하고 가부장적 폭력을 고발하는 것으로도 읽어낼 수 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 경아역의 안인숙 호스티스 영화와 청년 영화의 산파가 되다 < 별들의 고향 >이 출현한 덕분에 197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와 관객들도 새로운 활력을 얻은 것은 분명하다. <별들의 고향>이 선취한 도시 속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김호선 감독에 의해 세련돼졌다. 조선작의 연작소설을 원작으로 한 < 영자의 전성시대 > (1975)가 36만 관객을, 조해일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 겨울여자 >(1977)가 58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과 비평 양쪽을 두루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성공은 1970년대 후반, 순수한 여주인공이 호스티스로 전락해 여러 남성을 거치는 과정을 관음증적으로 전시하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가 양산되는 계기가 된다. ‘청년 영화’로서의 선명한 줄기는 미국 영화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 이 만들어냈다. 통기타. 청바지.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의 생기에, 당대 청년들의 저항과 체념의 정서까지 담아낸 < 바보들의 행진 >(1975)이 바로 그것이다.
몹시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 신궁 >을 보러 간 날을 기억한다. 날짜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날의 날씨는 어제처럼 생생하다. 바람이 몹시 차갑고 메마른 하늘. 알 수 없게 스산한 공기. 애매하게 늦은 겨울 저녁. 그해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서울 종로구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경호실장 차지철을 대동하고 술을 마시다가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갑자기 모든 학교는 휴교를 했고 처음에는 모두들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우리들은 다방에서 만나 한가하게 음악도 듣고 줄곧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죽이다가 헤어졌다. 통행금지가 있었고 이듬해 정치의 봄이 올 때까지 서울은 조용했다. 갑자기 서둘러 시작된 겨울방학을 보내던 어느 날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고 미아 삼거리에 있던 대지극장에 가서 <신궁>을 보았다. 나는 그해 봄에 ‘林權澤’을 발견했다. < 족보 >를 본 다음부터 이 이름의 ‘監督’ 영화를 모두 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내 결심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비디오나 DVD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셈에 포함시켜 주시기 바란다. 영상자료원은 영화진흥공사 산하 기구였으며 단지 필름을 ‘보관’만 했고 (지금과 달리) 어떤 영화도 상영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명화극장에서는 할리우드 영화만을 방영했다. <신궁>은 내가 <족보> 다음에 본 임권택 의 ‘두 번째’ 영화였다. 그래서 <신궁>이 개봉했다는 소식에 조금 흥분했다. 구태여 조금, 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당시 대지극장이 재개봉관이었고 그 말은 제작사가 개봉을 포기한 영화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많은 한국영화들을 제작사가 거의 버리다시피 개봉시켰다. 그들은 외화수입 쿼터만이 관심이었고 한국영화는 그저 미끼에 불과했다. 그때 나는 마치 빈칸을 채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국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보고 있었다. 이 영화들을 달리 볼 방법이 없었던 나는 그 무렵 서울 시내의 거의 모든 재개봉관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보고 있었다. 대지극장에서 <신궁>을 보았을 때 객석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극장 안은 추웠고 헐벗은 누에처럼 웅크리고 코트를 내내 양손으로 저미며 영화를 보았다. 첫인상. < 신궁 >을 보면서 몹시 당황하였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 족보 >에서 나를 매혹시켰던 그 무언가가 없었다. 차라리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무언지는 그때 잘 설명하기 어려웠다. 어느 쪽이 이 사람의 영화였던 것일까. 내가 당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신궁>을 보았을 때 즉시 내가 이미 이런 영화를 어디선가 보았음을 깨달았다. <신궁>은 어딘가 김기영의 <이어도>를 닮아있었고 동시에 유현목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와 겹치고 있었고 하길종의 < 별들의 고향(속) >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서툴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때 내가 즉각적으로 반응한 그것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궁>에서 고유한 그 무언가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두 가지 배움의 간극. 그것임과 그 무언가. <신궁>은 내게 어떤 대결의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는 용기를 내서 좀 더 솔직하게 그때의 심정을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는 여러 힘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힘들이 서로를 통제하지 못한 채 뒤죽박죽으로 서로 뒤섞여 있었다. 그 힘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전술적으로 여겨졌고, 그 안에서 자기의 가치를 부여받고 창조에 봉사하는 대신 서로의 존재방식을 증명하기 위해서 웅성거리는 것만 같았다. <족보>는 무엇보다 우아했고 기품이 있었다. 그건 단지 영화의 내용이나 인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 그러했다. <신궁>은 폭력적이고 독립적인 쇼트들이 침범하듯이 등장하였다. 마치 다른 임권택 이 있는 것처럼 <신궁>은 다른 설명을 요구하였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겠다. <족보>는 하나의 결론처럼 보였다. <신궁>은 지금 막 무언가를 시작하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둘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둘이 임권택의 영화를 이루는 원심력이자 구심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잡아당기는 힘과 벗어나려는 힘. 수렴하는 힘과 분산하는 힘. 거의 서로 닿을 듯이 서로 가까이 있는 두 영화. 나는 먼저 둘 사이를 마주 보게 할 필요를 느꼈다. 단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주석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 하나 옆에 다른 하나가 있을 필요가 생긴 것일까. 그런데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심리적인 소설을 쓰는 것은 비평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두 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변수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면 어떤 출현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정일성 촬영감독 그 둘 사이의 사건은 정일성 이다. 1929년 도쿄에서 태어난 다음 한국전쟁 시기에 미국 공보관에서 일을 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은 사람. 김학성 밑에서 촬영부 생활을 했고 1957년 조긍하 의 < 가거라 슬픔이여 >가 촬영감독 ‘입봉’작이다. 이력 중에 가장 특별한 것은 1963년 아시아 영화재단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대목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구로사와 아키라가 < 붉은 수염 >을 찍을 때 내가 B 카메라를 잡았”다. 1965년 4월 3일에 도쿄에서 개봉한 흑백 시네마스코프 영화. 미후네 도시로가 붉은 수염이 난 지방 의사로 나와 도시에서 온 젊은 의사에게 진정한 의술이란 단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것이란 배움을 전수한다. 상영시간 3시간 5분. 누군가는 구로사와가 도스토옙스키와 셰익스피어에게서 배운 예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 진정한 걸작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1960년대 전공투 세대에게 태평양 전쟁세대가 베푸는 역겨운 계몽교훈극이라고 불렀다. <붉은 수염>의 촬영감독은 나카이 아사카즈다. 이미 구로사와와 < 들개 >로 시작해서 < 7인의 사무라이 > < 거미의 성 > < 천국과 지옥 >을 찍었고 이후에도 < 데르수 우잘라 >와 < 란 >을 찍었다. 하지만 정일성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촬영감독은 미야가와 카즈오라고 대답했다. 구로사와의 <라쇼몽>을 찍은 사람. 미조구치 겐지의 수많은 영화들, 그중에서도 로 유명한 촬영감독. 그리고 종종 (잉마르 베리만과 함께 작업한) 스벤 니크비스트를 말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정일성 이 갑자기 놀라운 촬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산업 안으로 돌아왔고 촬영은 감독의 결정 아래 놓여있다. 정일성은 유감스럽게도 충무로에서 미조구치 겐지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1971년 김기영 을 만났다. < 화녀 >를 찍은 다음 이어서 < 충녀 >를 찍었다. 이때부터 정일성은 양식적인 그만의 스타일을 화면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 화면의 주인을 찾는 것은 난처한 일이다. 우선 그 당시의 현장이 지금과 매우 달랐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장에서 모니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때 현장에서 연출은 그저 배우를 바라보며 카메라에 담겨질 구도를 ‘미루어 짐작하면서’ “레디 액션”을 불렀고 그런 다음 ‘감으로’ 오케이와 엔지를 구별해냈다. 이건 전 세계 영화 현장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더 그때의 현장은 위계질서가 엄격했으며 감독은 모든 문제를 결정했다. 하지만 촬영의 ‘순간’을 보는 사람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촬영감독뿐이었다. 게다가 이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촬영이 끝난 다음 필름을 현상소에 보내서 프린트를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편집실에서 하는 탄식은 의미 없는 후회이다. 나는 1978년 처음으로 영화 촬영현장을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현장은 하길종 의 마지막 영화 < 병태와 영자 >(1979)였다. 촬영은 장석준 이었고 제작은 그 당시 가장 안정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화천공사였다. 연출부와 촬영부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감독은 촬영감독의 허락 없이 카메라의 구도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촬영감독은 이따금 마치 자신의 관대함을 보이려는 듯 감독이 구도를 확인하는 것을 허락하곤 했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필름은 최소의 재촬영을 허락했으며 여분의 촬영은 상상할 수 없었다. <화녀>의 현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김기영은 정일성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이어서 이듬해 <충녀>(1972), 비구니들에 관한 이야기 < 파계 >(1974), < 만추 >를 다시 찍은 < 육체의 약속 >(1975)을 이어서 함께 찍었다. 거의 동시에 유현목 과 < 불꽃 >(1975)과 < 문 >(1977)을 찍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결정적인 명성을 안겨준 영화는 하길종 과 찍은 < 바보들의 행진 >(1975)일 것이다. 그리고 김수용 과 < 가위 바위 보 >와 < 화려한 외출 >을 찍었다. 김기영, 유현목, 하길종, 김수용. 그들은 단지 이름이 아니다. 한국영화라는 발명.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시대에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영화가 아름답게 작동하는 방식을 창조해냈다. 물론 정일성의 목록이 항상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것은 촬영이라는 자리의 운명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선택하는 대신 선택 당했다. 그는 같은 시기에 < 고교얄개 >(1976), < 고교 꺼꾸리군 장다리군 >(1977), 그리고 < 여고얄개 >(1977)을 찍었다. 임권택 은 1970년대에 들어선 다음 거의 매번 다른 배우들과 작업했지만 촬영감독은 고작 서너 명의 이름들을 돌아가면서 반복해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서정민 , 이석기 , 구중모 가 그 이름이다. < 신궁 >은 임권택이 정일성과 함께 작업한 첫 번째 영화이다. 그때 두 사람은 모두 한 해에 몇 편의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일정을 조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본 임 감독의 영화는 < 왕십리 >였어요. 그 이전 영화는 별로 본 기억이 없어요. <왕십리>는 정돈이 대단히 잘 된 영화였어요. 그 영화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감독의 힘으로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나는 < 과부 >( 조문진 , 1978)로 대종상에서 촬영상을 받고 임 감독은 < 족보 >로 감독상을 받아 함께 해외연수를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거기서 함께 많은 이야기를 했지요. 그때 임 감독은 듣고 또 들었어요. 그게 임 감독의 매력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것. 마침 나는 샤머니즘에 관한 영화를 몇 편 작업하면서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어요. < 이어도 >나 < 을화 > 같은 작품들을 찍었어요. 그때 < 신궁 >을 만나게 된 거지요”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렌즈의 문제 분명한 사실은 첫 번째 작업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망쳤다는 것이다. < 신궁 >은 영화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화면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그게 말이에요, 촬영을 떠났는데 미처 카메라를 테스트하지를 않은 거예요. 찍는 동안에는 몰랐죠, 그게 섬에 가서 촬영을 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현상을 해보니 그냥 화면이 그렇게 된 거지요. 초점이 다 나간 거지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렌즈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겨서 일부 화면들은 잘못된 아이리스 같은 효과가 생긴 장면들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아마 현상소에서 두 사람 모두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술적 결함이라는 외피를 잠시만, 하여튼 잠시만, 옆으로 치워놓고 질문을 진행시킬 생각이다. 촬영이라는 문제. 정일성 의 촬영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정의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와 함께 작업한 연출자들은 각자의 공간을 만들어냈고 각자의 구도를 찾아냈으며 각자의 리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정일성과 작업하기 전에 이미 자기의 세계를 갖고 있었다. 그 세계 안에 들어가서 정일성은 무언가를 했다. 영화에서 촬영이 하는 무언가. 그때 임권택 은 그들의 영화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나는 약간 사태를 단순화시켜서 설명하고 싶다. 정일성의 촬영이 아름다운 순간은 대부분 롱쇼트를 찍을 때였다. 그 순간 이상할 정도로 그의 구도 안에서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건 단지 멀리서 찍었다는 뜻이 아니다. 정일성은 롱쇼크를 찍기 위해서 대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할 지, 얼마나 높이 있어야 할 지, 그때 렌즈가 어떤 깊이를 가져야 할 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어떤 빛이 화면 안에 스며들어야하는지를 예민하게 느껴보았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정일성은 충무로에서 대부분의 촬영감독들이 와이드 렌즈 촬영을 잘 해낼 때 정반대로 망원렌즈로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곤 했다. 그는 여름보다 겨울을 선호했고 눈이 내릴 때보다 눈이 녹을 때가 촬영을 해야 할 ‘진정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엔 아픔이 있잖아요” 몇 번이고 그 말을 썼다. 심지어 촬영현장에서 만족스러운 장면을 얻어냈을 때에도 그렇게 말을 했다. 이미지 안의 아픔. 그런데 그건 어떤 아픔일까. 아니, 이미지가 아프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당신께서 생각하는 촬영은 무엇인가요? “난 말이에요, 칼라로 찍었지만 그게 흑백처럼 보이는 장면을 해내고 싶어요. 영화는 암부(暗部)가 살아나야하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영화를 보다가 아, 세상이 사라져가는 거였구나, 라는 걸 거기서 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가 슬퍼지는 거죠. 왜냐, 세상 앞에서 자기가 보잘 것 없으니까” 정일성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담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충무로에서, 그걸 그려내려는 감독을 만나야만 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구부릴 차례이다. 좀 이상하게 말하자면 임권택 은 < 신궁 >에서 이전에는 해본 적이 없는 방식의 장면들을 만난다. 그건 이전까지의 그의 영화에서 나타난 주제나 소재, 이야기, 등장인물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물론 <신궁>에서 다룬 무속신앙은 임권택에게 새로운 주제이다. 그는 그 이전까지 이런 주제 안의 인물을 다룬 적이 없다. 갑자기 이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 불의 딸 >을 경유해서 < 축제 >까지 이 관심을 이어갔다. 임권택은 무속신앙이 사실상 한국의 모든 종교의 뿌리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고 생각한다. “그렇잖아요, 부처님에게 극락왕생시켜달라고 비는 건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소원이지요, 욕심을 버리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공양을 해가면서까지 제 남편 제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빌고 하는 건 사실상 절에 가서 굿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거예요. 그건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교회에 가서 자기는 천당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건 내세를 믿는 무속 신앙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거죠”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임권택이 <신궁>을 만들었을 때 그는 이미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밀고 나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당신에게 <신궁> 주변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 전해에 임권택은 < 족보 >를 찍었다. 그리고 <신궁>을 만들었던 1979년 그는 < 깃발 없는 기수 >를 찍었다. 그 이듬해 < 짝코 >를 찍었고, 그리고 1981년 < 만다라 >를 찍었다. 하지만 이건 촬영과 상관없는 이야기다. 임권택은 이미 1973년(< 잡초 >), 혹은 1976년(< 왕십리 >)부터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질문을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궁>은 심지어 그 변화의 과정에서조차 그 이전 영화들과 단지 다르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고 무언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정식화도 허락하지 않는 대립. 여기서 형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외양의 차이라고 하고 싶은 어떤 단락이 나타났다. 나는 처음 보았을 때 이것이 왠지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을 만큼 강제적인 균열로 보였다. 어쩌면 <족보>의 감흥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간략한 줄거리. 1977년 7월 한국문학에 발표한 천승세 작가의 원작을 각색한 < 신궁 >은 섬에서 세습무로 유명한 당골네 왕년이의 이야기다. 그녀는 주로 뱃사공들을 위해 고기잡이가 풍년이 되게 해달라는 굿판에서 용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하지만 그녀의 굿판 장구잽이 (이자 남편인) 옥수는 배를 타고 싶어 한다. 우여곡절 끝에 배를 사서 선장이 되지만 이 섬의 부자 최판수의 흉계에 빠진 채 빚에 몰려 배를 팔고 그 배에 선원으로 올라탔다가 그만 태풍에 배 밑창에서 죽는다. 실의에 찬 왕년이는 아들 용수와 자기 굿판을 물려줄 쪼깐년을 데리고 지내면서 더 이상 굿판에 벌이지 않는다. 집을 나간 용수가 일 년 만에 돌아오고 고기잡이는 흉년이 들어 모두들 왕년이가 굿판을 벌여주기를 조르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그런 어느 날 쪼간년이 돈에 눈이 멀어 최판수와 자기 몰래 통정을 나눈다는 사실을 알고 굿판을 잡겠다고 자청한다. 왕년이는 굿판을 벌이기 전에 최판수의 운수대통을 위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궁으로 운세를 내려주겠노라며 굿판 복판에 앉힌다. 그런 다음 바가지를 씌운 최판수의 이마에 활을 쏘아 내리꽂는다. 그녀의 복수. 왕년이의 거절 임권택 은 이야기의 전체 구조를 구성하면서 다시 한 번 복습하듯이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시킨다. 첫 장면. 왕년이의 집에 섬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굿판을 벌여달라고 간청하지만 왕년이는 다 물리친다. 왕년이의 아들이 돌아오고 그런 아들을 바라보면서 왕년이는 남편 옥수를 떠올린다. (flash_back) 임권택은 언제나처럼 이야기 안에 시간의 주름을 만들고 마치 그 시간의 주인이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에 걸려 넘어지듯 그 안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 신궁 > 가까이 있는 < 짝코 >는 이 구조를 쫓는 송기열과 쫓기는 ‘짝코’ 백공산 두 사람의 복수의 주름으로 만든 다음 번갈아 오간다. < 길소뜸 >은 화영과 동진을 번갈아 오가면서 방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둘로 나눈다. 이번에는 왕년이의 차례이다. 무속신앙을 다룬다고 해서 임권택은 이야기의 구조를 뒤틀거나 인물의 줄거리에 특별한 형식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해왔던 방식에 따라서 전기적 구성을 해나간다. 여기서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혹은 인물이 형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 신궁 >은 영화의 경제학에 따라 둘로 나누어서 촬영되었다. 풍경이 나오는 외부는 모두 섬에서 로케 촬영을 했고 왕년이의 집으로 들어서면 세트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일부 낮에 문을 열어놓고 바깥 풍경이 걸리는 왕년이 집의 일부는 섬에서 촬영했다. 이전까지 임권택 은 인물이 방 안에 들어가면 함께 들어갔다.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인물들 사이의 시선을 설계하고 장면을 분할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시네마스코프로 촬영을 시작한 임권택은 방 안에 들어가면 인물들의 동선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바닥에 앉는) 좌식 생활을 하는 한국은 일단 한 번 앉으면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가능하면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방 안에 들어가게 되면 카메라를 중심으로 타원형 구조로 앉힌 다음 옆으로 펼쳐놓았다. 먼저 위치를 확인시키고 나면(master_shot) 재빨리 대화의 내부로 들어가 인물들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약간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정확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에서 보여주는 배치를 한 다음 나루세 미키오의 방식으로 분할해 들어갔다. 하지만 임권택은 1970년대 어딘가에서부터 이런 분할 방식을 버리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그때부터 임권택의 장면들은 눈에 보이게 시간적으로 분할 없이 지속되기(long_take)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따금 문득 멈춰 서서 바라보듯이 보여준 영화는 < 아내들의 행진 >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형태의 좌식 배치에 관한 여러 가지 변형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구도가 여러 명을 앉혀놓았을 때는 인물들의 집합 효과가 있지만 단지 두세 명의 인물이 있을 때는 시네마스코프의 경우 일부 공간이 지속적으로 비어있거나 빈 공간이 주는 효과가 엄습해올 때 그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불필요하게 인물에게 다가가야 할 필요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이른바 문법에서 말하는 일정 거리 안으로까지) 인물에게 다가가면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오즈만이 다가가 본 거리. 임권택은 < 족보 >에서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방 안에서 가끔 카메라의 위치를 사각형의 사각에 가져다 놓았다. 문제는 그때 그 자리가 영화적으로는 성립된다 할지라도 한국 가옥구조에서 건축적인 선을 기형적으로 왜곡시키거나 종종 파괴적으로 침범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마 그걸 나보다 임권택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frame_in_frame_ 문 안의 혹은 문 밖의 풍경 < 신궁 >은 이 문제를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종종 여기서는 카메라가 왕년이의 방 안에 들어가기를 망설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저 바깥에 머물면서 방 안을 들여다본다. 이때 핵심은 문이 화면 안에 또 하나의 화면을 만들어낸다는(frame_in_frame)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로로 펼쳐져 있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가로로 긴 문이 마치 불필요한 면을 잘라내는 것만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면서 자유자재로 영화의 화면 구도를 다시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두 개의 전통이 있다. 하나는 이미 비스콘티가 < 센소 > 혹은 < 레오파드 >에서 귀족들의 집에 들어간 다음 늘어서 있는 방과 방 사이의 문, 혹은 창문을 사용하면서 다시 화면을 분할한 경우이다. 물론 그는 이 방법을 장 르누아르에게서 배워왔고, 장 르누아르는 연극에서 가져왔다. 다른 하나는 이미 1930년대 일본영화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미조구치 겐지는 전통적인 일본 가옥에 들어서서 여러 개의 미닫이문을 겹쳐놓듯이(layers_in_depth) 여닫으면서 인물들의 여러 개의 동선을 전경과 후경에 놓은 다음 가깝고 동시에 멀리(deep_focus) 움직일 때 이 구도를 사용하였다 무엇보다도 < 기온의 자매 >에서의 실내장면들, 혹은 오즈 야스지로가 적산가옥의 마루에 인물들을 앉힌 다음 미닫이문을 애매하게 열고, 혹은 애매하게 닫고, 말하자면 바로 이 애매함의 정취의 자리인 방 안쪽에서 인물들을 찍을 때 사용하였다. 종종 오즈는 그렇게 스탠다드 화면에서 세로가 더 긴 것만 같은 효과의 화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이 두 가지 전통을 하나의 영화에서 현대적으로 다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허우 샤오시엔이다. 이를테면 < 동년왕사 >. 하지만 여기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방 안의 방, 문 안의 문이라는 유럽 건축양식, 혹은 일본 가옥 구조라는 전제이다.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에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린 시절 아하가 할머니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살았던 집은 일본 식민지 강점하에 세워진 일본식 가옥구조였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것은 건축의 문제이자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적산가옥은 재빨리 사라졌으며 여기서 사용되는 집은 전통적인 초가집이다. 그러므로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외부 공간이 된다. 이 가옥에 문을 사용하여 공간을 다시 분할하면 첫째, 반드시 방문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이 구도는 겨울에 찍을 수 없다. 계절이라는 절대성. 기후의 요구. 혹은 강제로 문을 열어놓고 내버려두어야 한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단지 동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이며 인물의 심리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 방문을 열어놓고 외부에서 찍으면 방문 옆의 벽이 문제가 된다. 오즈나 미조구치, 혹은 허우 샤오시엔은 이 문이 문 안의 문이거나 방 안의 방이기 때문에 문을 겹쳐놓거나 미닫이문의 종이 질감이나 문양을 사용하였다. 정일성 은 이 벽을 단지 어둡다기보다는 마치 지워버린 것처럼 ‘블랙에 가까운’ 어둠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정일성의 구도는 종종 기하학적인 양식처럼 보였다. 이 구도는 항상 성공적이지 않았다. 때로는 마치 화면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아마 임권택 은 이 구도가 다소 불편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세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 방에 두 개의 문을 만든 다음 어떤 장면에서는 앞쪽의 문을 열어놓고 그 바깥에서 찍었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 뒤편의 문을 열어놓고 방 안에 들어와서 찍어나갔다. 그렇게 되면 다른 문제와 만난다. 세트에서 찍은 장면과 로케에서 찍은 장면을 하나의 씬 안에서 붙여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전혀 다른 날, 전혀 다른 장소, 전혀 다른 시간에 찍은 쇼트를 하나의 씬 안에서 연결시키는 것은 단지 기술적인 문제만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임권택은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어나간다. <이어도> 정일성 은 이미 이 구도를 다른 영화에서 해보았다. 김기영 과 전해에 찍은 < 이어도 >는 같은 방법을 거의 극단적인 구도까지 밀고 나아갔다. 그래서 마치 이 영화는 단지 공간이 가져다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화면의 비례에 대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어쩌면 < 신궁 >에서는 한발 물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도가 김기영의 요구인지 정일성의 제안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김기영은 이미 < 고려장 >에서도 (정확하게 동일하진 않지만)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김기영은 자신이 연극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영화를 연출하면서 숨기지 않았으며 때로는 거기서 가져온 방법(들)을 폭력적으로 밀고 나아갔다. 하지만 정일성과 작업한 첫 번째 영화 < 화녀 >는 그렇게 찍지 않았다. 내게 나쁜 인상을 준 것은 <신궁>을 보기 얼마 전에 <이어도>를 보았고 서로 다른 감독의 이름 아래 동일한 방법을 만났을 때 교집합의 매너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은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름의 영토에서 만난 동일한 구도. 게다가 <이어도>와 <신궁>은 둘 다 섬에서 촬영되었고 동일한 기후 환경 아래 거의 유사한 신비주의가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도>로 미루어 보건대 <신궁>에서의 구도는 정일성의 제안이 분명하다. 그리고 임권택 은 이 구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구도는 이후에도, 이를테면 < 만다라 > 혹은 < 길소뜸 >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 이 구도는 (거의) 사라졌다. 이 구도가 임권택 으로 하여금 훨씬 수월하게 멈추지 않고, 분할하지 않고, 대화의 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물을 바라볼 수 있게(long_take) 도와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구도는 임권택의 화면을 멈춰 세우곤 한다. (fixed_camera) 물론 여기엔 어떤 주장이 있다. 주장? 그렇다. 하나의 교육. 하나의 개념. 나는 거기서 임권택의 새로운 긴장을 본다. 그렇게 임권택은 < 신궁 >에서 가끔씩 마치 호흡을 멈추는 것만 같은 화면을 보여주곤 한다. 거기서 종종 리듬은 죽은 듯이 숨을 죽인다. 나는 두 번 반복해서 죽은 듯이, 라고 썼다. 임권택의 우아한 선은 오히려 왕년이가 굿판을 앞두고 부정 탄다면서 남편 옥수가 집요하게 접근하며 옷을 벗기려는 몸짓을 거부하는 모습을 따라가면서, 부주의하면 놓칠 만큼 느리게, 하지만 거의 몸짓과 하나가 된 것처럼 슬그머니 이동하는 장면에 있다. 정지와 이동. <신궁>은 이 두 개의 운동이 시종일관 긴장을 만들어낸다. 바다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카메라 하지만 실내에서의 기하학적인 구도보다 좀 더 이상한 순간은 야외에서 장면이 진행될 때 갑자기 선 바깥으로 나가는 쇼트들의 존재이다. 왕년이가 굿판을 벌일 때 종종 이런 쇼트들이 등장한다.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혹은 등지고 왕년이는 제사 단을 차린 다음 신령님께 굿을 올린다. 이때 임권택 은 왕년이와 굿판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 쇼트를 진행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바다 저 멀리서 굿판을 바라본다. 바다 위에는 아무도 없으며 또한 그 굿판 주변으로 배가 지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일성 은 배 위에 카메라를 싣고 멀리서 굿판을 벌이는 주변을 스쳐 지나가면서 찍는다. 우선 이 장면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지적하고 싶다.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그건 일종의 상황 설정을 설명하는 쇼트(master_shot)가 아닌가요. 첫째, 그러기에는 굿판으로부터 너무 멀리서 찍었다. 둘째, < 신궁 >에서 이 쇼트는 시퀀스가 시작할 때가 아니라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나타난다.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설정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 쇼트는 고전문법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잉여의 자리이다.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버린 쇼트의 존재에 대해서 이미 스티븐 히스와 닉 브라운은 긴 논의를 제시했다. 스티븐 히스는 오시마 나기사의 < 교사형 >에서 고양이의 쇼트를 예로 들었으며(‘Narrative Space’) 닉 브라운은 < 역마차 >의 식탁 테이블을 문제 삼았다. (‘The Spectator-in-the-Text: The Rhetoric of < Stagecoach >’) 좀 더 긴 논쟁도 있다. 오즈의 < 만춘 >에서 교토에 아버지와 노리코가 여행을 가서 잠든 그 날 밤 료칸 방 안의 화병이 문제가 되었다. <신궁>은 같은 맥락에서 좀 다른 문제와 만난다. 여기서 정일성이 달리는 배 위에서 굿판을 멀리서 바라볼 때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도 아니다. 바다에는 어떤 배도 떠 있지 않았고, 또한 사실주의의 관점을 택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신비한 제3의 시선이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게다가 이 장소는 바다 위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우연히 이 광경을 이 위치에서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멈춰 서서 바라보는 대신 배가 달리면서 찍었기 때문에 카메라의 운동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배와 카메라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혹은 이 쇼트가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면 이제까지 일관된 어떤 미학적 원칙에 따라 사용된 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그냥 간단하게 이 쇼트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인상적으로만 말한다면 진행되던 쇼트의 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기보다는 차라리 갑작스러운 쇼트가 진행되던 리듬을 찢으면서 침범했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면 누군가는 로셀리니가 < 전화의 저편 >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빨치산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바라보는 무심하리만큼 객관적인 쇼트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궁>에서의 이 쇼트는 보는 자리를 관객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질문한다면 차라리 이 쇼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하게 영화 안의 어딘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무언가 빠져나온 것 같지만 어디선가 멈춰버린 쇼트가 씬 안에서 존재한다는 뜻. 나는 이 애매함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임권택 은 왜 이런 쇼트를 허용한 것일까. 그 쇼트의 효과는 무엇인가. 여기서 쇼트 사이의 새로운 방향이 생겨난 것이다. 방향? 이 말을 조심스럽게 쓰고 싶다. 쇼트(shot)들이 일종의 면(plan)이라면 영화는 그 면을 연속적으로 세워놓으며 서로 반사하고 연결시키는 것이다. 고전주의의 방법은 이 면들을 어떤 간격으로 세워놓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는 면 자체에 관한 장황한 이론은 잠시 건너뛸 생각이다. 이때 임권택은 갑자기 일렬로 세워진 면들 사이에서 하나의 면을 더한 다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가로로 세워진 일련의 면들의 집합을 바라보면서 하나의 면을 갑자기 세로로 놓은 것이다. 세로의 인서트. 그러나 이 쇼트가 시점 쇼트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왜상효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의 시퀀스 안에서 이야기를 따라 왕년이와 함께 여기에 온 우리가 갑자기 이야기 곁으로 비스듬히 나와 왕년이를 바라보게 된다. 이걸 주관적 씬과 객관적 씬의 분리라고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설명이다. 핵심은 이 인서트를 사이에 둔 두 개의 씬이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이 인서트 자체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 갑작스러운 쇼트가 주는 운동감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쇼트는 고립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쇼트는 앞과 뒤의 어디에도 달라붙지(raccord) 않는다. 노엘 버치는 그걸 정확하게 설명했다. 쇼트가 달라붙지 않을 때, 버치의 표현을 빌리면 ‘잘못 달라붙었을 때(faux_raccord)’, 우리는 영화에서 시각기호를 가독기호(lecto_signe)로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쇼트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나요, 라고 질문하면 당신은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올바른 질문은 거기서 왜 읽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인가요, 라고 해야 한다. 나는 소설을 쓰는 위험을 피하고 싶다. 임권택 과 정일성 이 여기서 어떤 의견을 교환했는지 알지 못한다. “< 신궁 >을 만들었을 때는 서로의 스타일이 있었어요. 내가 앵글을 잡을 때 그 장면에 대해 반드시 임 감독과 나는 토론을 했어요. 그때 임 감독이 그러더군요. 토론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이 쇼트를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한쪽이 제안했고 다른 한쪽이 그걸 받아들였다. 우선 영화의 경제학에 따른 복기. 굿판이 열리는 장면을 바다 위에서 달려가는 배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찍는 것은 그 순간 갑자기 어떤 영감을 받아서 촬영의 위치를 옮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배를 준비하는 것은 제작비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결정이다. 말하자면 이 쇼트는 콘티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는 장면이라는 뜻이다. 한 가지 더. 촬영팀이 모두 배로 옮겨 이 쇼트 단 하나를 찍기 위해 시간을 보낼 때 다른 모든 팀은 그저 구경을 하고 있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섬에 가서 촬영을 하는 것은 날짜와의 싸움이다. 그 상황에서 임권택은 이 한 장면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이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호이다. 어떤 신호? 임권택 은 질서정연한 시스템을 갑자기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 쇼트는 그 위기를 알리는 신호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고 싶다. 왜 임권택은 위기를 필요로 하는가. 용기를 내서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그는 질서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다. 어떤 질서? 가로의 질서. 일단 이 질서 안으로 들어오면 안정적인 공간이 영화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긴밀한 문법의 네트워크. 그 안정 바깥으로 무리하게 나갈 때 영화가 부서지기 시작한다. 물론 누구나 처음에는 들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지 않으면 영화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공간이 안정되고 나면 이 시스템이 거의 물샐틈없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거의 고유명사화 된 ‘오즈적인 것(小津的’なもの)’에 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영화에서 180도란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 라고 탄식하듯이 말한다. 영화는 일단 그 안으로 들어오는데서 시작한다. 임권택은 그 안에서 시작한 감독이다. 그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찍었다. 좀 더 중요한 지적이 남아있다. 충무로에서 이 법칙을 벗어나면 스텝들은 촬영에 협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서 설명할 필요도 없이 < 장희빈 >을 찍으면서 시간에 쫓긴 정창화 가 상상선을 벗어나자 조감독 임권택은 그러면 안 된다, 고 조언을 했다가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로의 쇼트는 탈출의 신호이기도 하다. 물론 임권택은 지속적으로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첫 번째 신호가 < 잡초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탈출이 일시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반복적인 힘을 지속적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잡초> ‘이후’의 영화들에서 나는 수 없는 탈출의 신호들의 예를 설명할 수 있다. 아니, 차라리 목록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반동적인 힘들의 예를 설명할 수 있다. <잡초> ‘이후’의 영화들에서 내가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것은 기괴할 정도로 불균질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임권택이 그 공간의 성질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질문을 한 쇼트들일 것이다. 그는 성질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스스로 항상 외면하려고 애쓴) ‘나쁜 버릇’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신궁 >이 임권택의 일흔 한 번째 영화라는 것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 전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시퀀스 전체를 와해시키는 지경으로까지 밀고 나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쇼트의 자리는 약간 애매해 보인다. 이야기는 유지되면서 성질이 다른 쇼트가 그 안으로 뛰어들 때 이 세로의 쇼트는 정확하게 이야기 안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바라보는 쇼트. 하지만 임권택은 이 쇼트의 권리를 보는 쪽에게 넘길 생각이 없다. 이때 나는 약간 까다로운 가정을 해보고 싶다. 이 쇼트는 현장에서 촬영의 관점에서 관념적인 설명에 기댄 장면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쇼트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출의 관점에서 이 쇼트는 편집의 맥락에서라면 미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지금 둘 중 이 쇼트가 누구의 권리냐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쇼트가 두 사람의 합의 아래 이루어졌다고 정말 믿는다. 그래서 여기서 바쟁이 했던 영화라는 과정에 관한 비평의 방법론에 따라 이렇게 추론하고 싶다. 임권택 은 현장에서 관념적인 관점의 ‘잉여의’ 촬영을 받아들였고 정일성 은 이 장면이 편집실에 가서 미학적인 관점의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는 쇼트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촬영과 편집 사이에 놓인 사전적인 작업과 사후적인 작업 사이에 놓인 간극을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나는 이 장면이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일성 은 자기의 장면이 어떤 쇼트가 될 지를 가정하면서 촬영을 했을 것이다. 임권택 은 그 잉여의 촬영을 허락하면서 끊임없이 그의 두뇌 속에서 영화를 다시 편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임권택의 영화가 불균질을 받아들이면서 안정적인 공간 안에서 정신적인 그것,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찾아가고 있다는 신호가 되었다. < 신궁 >은 괴이한 신비주의와 따분한 진부함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순간 임권택의 어떤 도약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마 내가 그해 겨울 이 영화를 보고 당황한 것은 그 해 봄에 < 족보 >를 보고 느꼈던 아름다움이 일시에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폭력적으로 느슨해져가면서 그 사이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그 정신적인 그것, 앞에서의 당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신궁>이 아니었다면 < 만다라 >는 없었을 것이다. 두 승려가 불가의 가르침에 관한 화두를 끊임없이 토론하며 걸어가고 또 걸어가는 그 정신적인 만행길. 정신적인 그것임. “내가 유현목 감독의 < 사람의 아들 >을 찍을 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때 마침 임감독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병원에 와서 위로를 하며 이번에 퇴원을 하면 자신과 함께 새 영화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수술 결과는 끝나봐야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집에서는 장례식 준비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그때 병원에 찾아와서 말한 새 영화가 < 만다라 >이다. 임권택 은 <만다라>를 정일성 만이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신궁 >은 <만다라>로 가는 과정의 영화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조만간에 반복하면서 다시 한 번 시작할 생각이다. (계속) 1979년 93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태창흥업 각색 김지헌 촬영 정일성 조명 손달호 편집 김희수 음악 김동진 윤정희 김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