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귀신
- 감독
- 심우섭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방성자, 이예춘, 정애란, 이낙훈, 이향, 장일구, 백송, 최리, 이업동
한국영화를 둘러싼 검열의 기록들을 살펴본다면, ‘1964년 겨울’은 매우 중요한 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7인의 여포로>(검열후 <돌아온 여군>으로 제명 변경)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이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북괴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던 일련의 사건은 1964년 12월 11일부터 이듬해 7월까지 지속되었으며,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권력을 독점한 국가 권력의 존재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밖에 없게 된 것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였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이만희를 구속시켰던 법률적 근거는 ‘검열법’이 아니라 ‘반공법’이었다. 하지만 검열이 단지 법률 조항의 위반 문제만이 아니라 상상의 범위를 제한하고 실천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권력 효과의 문제라고 봤을 때, 1964년 겨울,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은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 감각을 설정하는 동시에, 영화의 재현 가능성의 범위를 규정한 문제적인 검열 사건이었다. 중요한 점은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검열이 단선적이거나 일관된 논리로 점철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4.19 혁명의 정치적 열망을 일부나마 군부 정권의 통치성 내부로 포섭하려했던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반공영화’라 할지라도 체제의 우월성을 기계적으로 선전하는 차원을 넘어 이념 대립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나아가 냉전 체제의 모순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장소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1) 그러나 1964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민적 저항(6.3 학생운동)을 법질서를 중단하는 계엄령을 통해 무화시키는 순간은 박정희 체제의 통치 전략이 근본적으로 수정된 시점이었다. 영화를 둘러싼 검열의 내적인 논리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데, <7인의 여포로>(1965)와 <남과 북>(1964)의 검열 과정은 그 분기점을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은 영화 검열을 둘러싼 기존의 논의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이 작품은 <7인의 여포로>와 함께 반공영화의 가능성과 표현의 임계를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관객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던 해당 영화는 이념을 초월한 사랑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는데, 신파적인 감성으로 넘쳐나는 영화 속에서 ‘공산주의자’가 재현되는 방식은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기존의 반공영화에서 공산주의자가 인격이 소거된 채 성격화되지 않은 인물로서 그려졌다면, <남과 북>에서는 사랑을 찾아 전선을 넘어온 공산주의자 장일구 소좌(신영균)의 내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산주의자를 재현하는 방식 또한 매우 극적으로 전환되게 되는데, 이는 이산 멜로드라마의 문법이 반공영화에도 적용됨으로써 공산주의자에 대한 영화적 표상이 달라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전환의 과정은 북한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북한에 대한 발화를 금기시했던 이전 시기와 달리 “북한에 대한 유동적인 지식 일반의 흐름을 관장하고 주시하는 가운데 최종적인 유통 여부와 진위를 판별하여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는” 2) 방식으로 체제가 변화된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림 1] 영화상영 허가신청서 어찌 보면 매우 불온한 영화가 어떻게 검열에 통과될 수 있었을까. 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검열 문서철을 보면, <남과 북>은 극동흥업 주식회사의 이름으로 1964년 11월 11일 ‘영화 제작 신고서’와 ‘배역 명단’ 및 전속배우 활용에 관한 요강을 준수한다는 ‘서약서’가 공보부에 제출되면서 제작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원작자인 한운사가 직접 각색을 하고, 극동흥업의 사장인 차태진이 제작을 맡아 만들어진 영화는 1964년 12월 8일에 상영을 위해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제작 기간은 약 한 달이 못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사 검열을 위해 제출된 필름은 총 35미리 12권 8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검열을 위해 원본 네거티브가 제출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복사본을 모두 포함하여 8편의 필름이 제출되었다는 점은 해당 영화에 대한 제작사의 흥행 기대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서철을 통해 볼 때, 상영 허가를 위해 실사 검열이 신청된 일자는 1964년 12월 29일이고, 검열이 완료된 시점은 12월 31일이었다. 상영허가가 유효한 기간은 검열이 완료된 시점으로부터 1년이기에, 영화는 1965년 12월 30일까지 8편의 복사본에 대해 상영 권한을 갖게 된다. 박정희 체제의 검열 권력을 사유하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화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이념을 초과한 사랑이 서사의 중심으로 제시되면서 북한과 공산주의자가 재현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특히, 영화를 이끌어가는 신영균(장일구 역)의 스타 페르소나는 스크린의 안팎에서 민족계몽을 이끄는 지도자이자 개발주의적 근대화를 이끄는 실천가, 영웅적인 국군이자 미성숙한 군인들을 남성의 세계로 편입시키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소비되었던 만큼, <남과 북>의 공산주의자 형상은 문제가 될 소지가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점은 이와 같은 영화적 표현이 당대의 검열 과정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림 2] 영화검열 기안지 #1 기안지(1964년 12월 31일) 기안자 : 공보부 영화과 행정주사 이달형 기안년월일 : 1964년 12월 31일 (중략) 제한사항: 화면 2개처, 대사 6개처 [그림 3] 전언통신문 #2 전언통신문(1964년 12월 31일) 송화자 : 중앙정보부 5국 보안과 김 조정관 수화자 : 영화과 행정사무관 이영희 국산극영화 <남과 북> 검열의견 통보 극동흥업주식회사 제작 <남과 북>에 관한 검열 의견을 다음과 같이 통보하오니 허가에 반영조치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제한 요청사항 가. 보초가 “신세한탄”하는 대사 삭제 나. 장일구 대사 중 “목숨 걸고 애인 찾는다.” 삭제 다. 이 대위 대사 중 “어떤 …38선” 삭제 라. 미군대위 나오는 화면 전체 삭제 마. 장일구 대사 중 “북녘하늘 어머니 돌려보내주시요” 삭제 바. 장일구와 이 대위가 “어깨동무하고 술 먹는 장면” 화면 삭제 검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해당 영화는 대사 6개 처와 화면 2개 처를 삭제하는 것으로 검열에 통과된다. 기안지와 전언통신문 사이에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이는 문서 작성 과정에서의 실수로 보인다. 제한 요청 사항을 분석해보면, 감정의 과잉으로 인한 해석상의 문제가 야기되는 부분은 대사가 삭제되나, 미국이 등장하는 장면과 장일구와 이대위(최무룡 분)가 어깨동무를 하고 술을 마시는 장면은 화면이 전체적으로 삭제된다. 이는 ‘감상적 민족주의’라는 틀 속에서 민족 개념을 분화하고 전유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통치 전략이 검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영화는 관람등급 신청에서도 별다른 제한 사항 없이 ‘국민학교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는다. 즉,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적 규범 아래서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좇는 한 인간으로서 공산주의자를 그리는 방식은 당대의 검열 기준에서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었다. 영화는 1965년 1월 1일에 개봉한 후 11일 만에 6만 관객을 돌파하여 1965년 1월 21일에 복사판 상영 허가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영화가 상영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에 해당 영화는 갑작스럽게 문제적인 작품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림 4] 내무부 의견서 <남과 북> 내무부 의견서 수신처 : 공보부(1965.2.5)/결재(2.8) 치안국장 귀하 영화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남과 북”(아카데미 극장 상영 중) 줄거리 38선에서 괴뢰 소좌가 애인을 찾아 투강하여 왔으나 그녀는 이미 국군 대위와 결혼한 처가 되고 말았으며 이 사실로 인하여 국군 대위는 전투에서 전사하고 소좌는 자살하고 국군 사단에서는 소좌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사단장 이하 뒤흔들리는 설명 영화임. 영화 감상 후 나의 의견 1. 괴뢰 소좌는 자유를 동경하여 투강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애정관계로 투강하였으며 동괴뢰 소좌는 남성적이고도 용감하며 국가관이 투철하고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 성으로 묘사되었고. 2. 투강장교 1명으로 말미암아 전 사단이 휘둘리는 것은 국군의 위신에도 관계가 있고 3. 괴뢰 소좌에 비하여 국군대위는 연약성이 엿보이고 있음. 결론 본 영화 괴뢰 소좌를 동 영화의 주연으로 등장시켜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영웅화한 스토리임으로 수준이 얕은 대중 에게는 결과적으로 괴뢰군의 훌륭한 것만을 남기게 될 우려가 있고 또한 쏘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에서 예술공세에 있어 노골적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찬양시키는 데에 부합되는 느낌이 있었음 . - <남과 북>, 검열 문서철.(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1965년 2월 5일, 내무부에서는 공보부 치안국장에게 <남과 북>과 관련하여 의견서를 제출한다. 의견서에는 해당 영화가 “쏘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에서” 사용하는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찬양시키는”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는 소견을 담고 있다. 문서 작성자는 전선을 넘어 온 “괴뢰소좌”가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성”이라는 점과 “투강 장교 1인에 전 사단이 휘둘리게” 묘사한 점 그리고 괴뢰소좌에 비해 국군대위가 연약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그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다. 이는 중앙정보부에서 검열을 실시한 이후 명기한 ‘제한 요청사항’과도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구도와 배우의 페르소나 자체를 의구심에 부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다. 당시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고 활발히 상영 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남과 북>은 1965년 2월 5일에 이르러 ‘불온한 텍스트’로서 발견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의 불온성이 누구에게 소구되는가라는 문제와 남성성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는 “수준이 얕은 대중”에게 “연약성을 엿보이는” 국군과 대조적으로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성”인 “괴뢰소좌”를 부각시킴으로써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내무부에서 갑작스러운 의견서를 공보부에 보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65년 2월 5일은 이만희 감독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이 제출된 날이기도 하다. 영화에 각인된 성별화된 이미지의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법률적인 문제로 전환시킨 해당 공소장으로 이만희는 긴급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례적인 내부무 의견서는 그래서 단순한 요식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무부 의견서가 상당한 수준의 의혹을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에 대한 추가적인 제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미 상영 중인 작품의 제작자들에게 용공 혐의를 덮어씌우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지 않았나하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후 1965년 4월 22일, 제작사는 영화의 추가 상영을 위한 16미리 복사판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그에 따른 검열 당국의 입장은 해당 영화가 “1964년자 당부 허가번호 제3595호로 신규상영 허가된 바 있는 영화”이기에, “상영을 허가하고 별첨 허가증을 교부”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다. 영화를 둘러싼 이적성 혹은 용공성 시비는 일단락된 듯 보이나, 4년이 지난 1969년 1월 13일, 정익진이라는 사람의 탄원서가 제출되면서 또 다시 시비에 휩쓸리게 된다. 영화는 1968년 5월 29일 재상영을 위해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게 되는데, 신청자는 합동영화주식회사의 곽정환으로 되어 있다. 검열 후 제한사항은 “본편 영화 신규 검열시와 같음(화면 단축 2, 대사 삭제 6)”이라는 판정을 받고 상영이 허가 된다. 그러나 영화가 재상영되는 국면에서는 해당 영화가 홍보 수단으로 삼은 ‘전장 실화에 기반한 영화’라는 문구가 문제로 부각되게 된다. [그림 5] 영화상영허가확인의뢰, 국방부 문서, 극영화 “남과 북” 검열 합격에 관한 확인 통보 국방부 1969.1.13. 수신 정익진(서울시 용산구 *****) 제목 전장 실화 전사 확인 건 귀하가 1968. 12. 30부로 제출한 육군 제 9사단 전장실화 확인 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회신함. 질문: 1953. 4. 18 중부 전선 제9사단에 괴뢰군 소좌 장일구가 자기 사단의 총공격 작전 명령지도와 보급창고의 위치도를 가지고 귀순한 사실 여부에 대한 전사기록상의 확인. 장익진이라는 이가 제기한 탄원에 대하여 국방부는 전사기록상에 그와 같은 기록이 없음을 확인 후 이를 통보해준다. 이후 그는 “이 영화가 1965~1969년 현재까지 전국에 상영 중인데 내용상 ‘1953. 4. 18. 휴전 전 제 9사단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자막(S#4)에 크게 박아 선전하고 있는데 공보부 검열 허가 시 이 허위조작 여부를 어떻게 검토하여 허가하였는지”를 밝힐 것을 요구한다. 또한 “국방부 검열관계는 어떻게 행정처리가 됐는지 여부”를 회부해주기를 요구하면서 행정 당국의 검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근거로 검열 합격을 취소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대해 검열 당국이었던 공보부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실화를 근거로 하여 극화된 것이거나 순전한 픽션으로 구성된 것인가의 여부”는 개의치 않고 “영화 제작자가 영화법에 제정한 절차에 따른 요식행위를 구비하여 검열 신청한 경우 그 내용이 관계 규정(검열기준)에 저촉되는가를 검토하여 검열합격 여부를 결정, 시행”함을 밝히며, 검열 과정에는 문제가 없음을 알린다. 그러나 해당 소원은 영화가 전사(戰史)를 위조하여 제작되었음으로 이를 제작한 자들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용공 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검열 합격 취소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사건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해당 사건은 1970년 6월 12일에 이르러 소원의 취지가 불분명하고 소원의 기한이 말소되어 허무하게 기각된다. 한 개인의 탄원으로부터 시작된 1969년의 용공시비는 해프닝으로 끝이 났으나 이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개인이 이를 전유하여 국가의 검열 절차를 문제 삼음으로써 국가의 의도를 초과하여 구성된 과잉된 반공적 주체성의 곤란함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1. 이에 대한 논의는 졸고, 「반공의 감각과 불화의 양식 – 박정희 체제 하의 ‘반공영화’를 읽는 방법론에 대한 고찰」, 2015년 1월 극예술학회 발표자료집 참조. 2. 4.19와 5.16 이후의 시간 속에서 북한에 관한 언설들에 가해진 극단의 공포정치(조용수의 필화사건)와 달리 북한에 대한 논의 자체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통해 볼 때, 박정희 체제는 “북한이라는 정체에 대해 적어도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접근을 요청”했으며, 북한에 대한 지식과 표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관리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 장세진, 「원한, 노스텔지어, 과학」, 『사이』 제17호, 도서출판 역락, 2014, 147-150쪽.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연일 화제다. 로맨스는 심쿵하고, 전우애는 훈훈하다. 덕분에 군인의 사랑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진다면, 이번 주 종영을 앞둔 드라마의 여운을 간직하고 이번에는 1960년대의 절절한 군인 로맨스를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영원한 영화청년, 장르영화의 장인 김기덕 감독전’을 통해 상영될 영화 < 남과 북 >(1965)은 6.25전쟁이 낳은 비극을 테마로 한 전쟁영화이다. 한국 1960~70년대 고전 영화들은 마치 그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시야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당대의 관객들도 한국영화를 보며 행복한 꿈에 젖거나 슬픔을 달랬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은 누구나 그 이름은 들어봤을 < 맨발의 청춘 >이나 SF영화 < 대괴수 용가리 >를 비롯해 코미디, 멜로, 청춘, 가족, 전쟁, 스포츠 등 다양한 장르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가깝게 다가섰고, 열악한 제작환경과 엄혹한 검열 속에서도 당대의 문제의식과 장르영화를 잘 버무려 소개한 열혈감독이었다. 전쟁이 소환하는 비극성은 그 자체로 엄청난 극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에 많은 작품들이 교전의 스펙터클과 함께 관객을 압도하고는 한다. 그런데 < 남과 북 >은 최전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포격 소리와 전투기 나르는 하늘 정도에서나 교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대신 이 영화가 주목하는 전쟁의 비극은 거의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 분단 때문에 헤어진 연인 고은아를 만나려고 투항한 북한군 장일구 소좌, 그를 인솔한 남한군 이해로 대위, 그리고 이해로의 아내가 된 고은아. 이 삼각관계, 나아가 영화 전체에는 악한이나 적이 없다. 장일구와 이해로는 서로의 됨됨이에 존경을 보내며, 심지어 둘 사이에는 어떤 교감이 흐른다. 감독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영화는 검열로 인해 라디오 방송극이었던 원작과 다른 결말로 개봉하게 되었다. 여기서 원작 결말만 공개하자면, 이해로가 교전에서 전사하자 장일구가 복수를 위해 다시 북쪽으로 향하고 이로 인해 그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거의 브로맨스 같지 않은가? 하나만 구한다는 이름 뜻을 가진 장일구가 좇은 하나는 사랑이지만, 그 사랑의 대상이 연인인지 우정인지 명예인지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그러니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고은아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비극이 그녀의 몫 같기도 한 것이다. 로맨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상대에게 반하는(영화 대사 중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군인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보다는 사랑을 중시하며, 적군이 없고, 서로를 존경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태도를 통해 분단의 비극을 절절하게 담아낸다. 영화 첫 장면을 보면 장일구가 투항하면서 “쏘지 마시오”라고 외치는데 원래라면 장일구는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니, 이때의 영화가 수미상관 구조를 통해 전쟁 비판에 대한 적극적인 발화 효과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영화로 소개되지 못했던 위 결말의 느낌을 실제 영화화된 결말과 비교해 상상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것 같다. 사나이 울리는 진~한 이야기는 김기덕 감독의 마지막 작품 < 영광의 9회말 >(1977) 까지도 이어진다. 정통 스포츠 영화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오합지졸 야구팀이 좋은 지도자를 통해 번듯하게 거듭나는 이야기로, 우선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진정한 선수로 나아가는 익숙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또 대사를 통해 야구란 협동, 희생, 인내를 바탕으로 하는 스포츠임이 강조되며, 경일고교 야구팀은 그러한 정신을 배우고 익혀가는 과정을 겪으며 진정한 팀을 이루어 간다. 이러한 익숙한 흐름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독특한 점은 승리와 패배가 그려지는 방식에 있다. 물론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라면 공정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어 승부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는 과정이 담기고 거기에는 승리도 패배도 있게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어쩐지 이미 패배를 받아들이거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비록 용가리는 죽지 않았지만, 청춘의 사랑은 자살로 끝나고, 권투 선수는 지키려 했던 소년을 결국 잃고, 연인은 화합하지 못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는 무수한 좌절과 불운의 감각이 정서적으로 녹아있는데, 이 마지막 영화도 은근히 그런 정서를 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 영화가 승리를 통한 한방의 성취보다 패배 후 다음 시합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에 과제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최동수 감독의 선수 시절 과오를 반복하지 못하게 된 영수의 모습에서도 그런 영화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장일기가 현재까지 김기덕 감독이 우리에게 전한 마지막 이야기이다. 사상 검열에 있어 최고조였던 1970년대였으니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의 건강한 톤이 검열을 피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작품에서 드러나는 교훈이 청년 시절 고구분투하며 영화를 제작하는 중에 얻은 귀중한 가치관으로 느껴지는 것은 오해일까? 김기덕 감독의 연출가로서의 삶에 < 영광의 9회말 >이 전하는 교훈을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에는 검열과 척박한 제작환경이 가하는 무수한 한계 속에서 작업했던 시대감각과 그에 저항하는 정서들이 분열적으로 뒤섞여 있다. 그러니 패배 속에서도 거듭 다음 시합을 생각하며 훈련하고 협동하라는 지침은 그의 연출가로서의 17년간을 이르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이처럼 한국 고전 영화는 수많은 조건들이 빚어내는 우연과 개입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당시 정서, 관객성, 판타지, 사회문제 등을 품은 보고(寶庫)이며,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에 대한 풍부한 보고서(報告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시작하는 노래 < 남과 북 >(한운사 작, 박춘석 작곡, 곽순옥 노래)은 바로 영화 <남과 북>(1965, 한운사 작, 김기덕 감독), 그리고 이 작품의 원작인 라디오드라마 <남과 북>의 주제가이다. 1960년대에 쏟아져나온 수많은 6?25 전쟁 소재 영화중 <남과 북>은 반공주의로 기울지 않은 매우 드문 작품이다. 한운사의 라디오드라마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같은 작가의 < 빨간 마후라 > 등과 비교해 보아도, 반공주의의 색깔이 많이 희석된 독특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여러 매체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작품 중 하나일 터이다. 1964년 KBS의 28부작 라디오드라마로 처음 발표(홍두표 연출)된 이후, 1965년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로, 1972년에 KBS에서 최상현 연출의 13부작 텔레비전드라마로, 1984년 김기 감독의 영화로, 1992년에는 MBC에서 고석만 연출의 2부작 텔레비전드라마로 제작되었고, 1996년에는 KBS에서 다시 라디오드라마로 리메이크했다. 여기에 리라이팅 소설과 뮤지컬까지 만들어졌으니, 아마 신파극 <장한몽>이나 나운규 의 < 아리랑 >을 제외하고는 이 정도의 리메이크 기록은 깨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작품의 핵심이 매력적이고 탄탄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용은, 6?25 전쟁 막바지에 전선에서 만난 남과 북의 두 장교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겪는 비극이다. 국군 대위 이해로는 전선을 뚫고 남하하여 투항한 인민군 소좌 장일구를 잡는데, 그 장일구가 자신의 아내 고은아와 그 아들을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남하했음을 알게 된다. 장일구는 인민군의 총공격 정보를, 고은아를 데려오는 조건으로만 털어놓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그를 담당한 정보참모는 48시간 안에 고은아를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장일구에게 정보를 빼내려 한다. 이미 이 구도만으로도 작품은 팽팽한 긴장으로 넘친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일구와 고은아가 열정적인 사랑을 했고 이미 그들 사이에 아이까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사랑은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으로 장일구와 헤어진 이후 간호장교로 일하던 고은아를 열정적으로 설득하고, 결국 장일구가 돌아오면 그에게 돌아가도록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한 후 결혼한 이해로와의 사랑도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이들 사이에도 이미 임신 3개월의 아이가 생겨나 있다. 삼각관계는 한껏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으로 넘친다. 여기에 48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과, 인민군의 총공격이 임박하여 빨리 정보를 빼내야 한다는 조건이 긴장감을 더한다.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장일구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고, 이해로가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고은아를 장일구 앞에 대령해야 한다. 시간이 마냥 주어진 것도 아니고 적진에서는 총성이 들리기 시작하는데, 악천후 속에서 청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고은아를 데려와야 한다. 제한된 시간 안에 모든 행동을 마무리해야 하는 이러한 설정은 ‘웰 메이드 플레이’의 정석을 보여준다. 이 점은, 다소 늘어질 수 있는 28부작 드라마를 2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해도 매우 잘 짜여진 구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바탕이 되었다. 이해로 역의 최무룡 , 장일구 역의 신영균 , 고은아 역의 엄앵란 , 정보참모 역의 남궁원 이 열연하는 영화 < 남과 북 >은 1960년대 작품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팽팽한 긴장감과 빠른 속도감을 지닌 작품인 셈이다. 당연히 드라마에 비해 영화는 훨씬 속도가 빠르다. 드라마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장일구의 과거 이야기,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수재 장일구의 성장과정, 상전 집 고명딸 고은아의 사랑 등 방송극 특유의 일상성을 과감히 제거했다. 그 결과 영화의 속도감과 구성은 좋아졌으나, 대신 군대 내의 논의 과정에서 전달되어 오는 작가의 전쟁관, 즉 6?25 전쟁이 우리의 선택이 아닌 국제적 역학관계의 산물이라는 내용 등이 제거되었고, 고은아와 결혼할 때에 약속했던 것처럼 장일구에게 아내를 내어주겠다는 이해로의 고뇌 장면도 많이 제거되었다. 그 결과 영화에서는 이해로가 다소 약화되어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장일구와의 힘의 균형이 다소 깨어진 아쉬움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빛나는 지점은, 수많은 반공적 작품이 생산되고 있던 1960년대 중반에 이 작품을 반공이 아닌 반전의 주제의식 몰고 간 점, 주인공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파적 갈등 속에 던져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절제감과 격조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끌고간 점 등이다. 여러 리메이크 버전을 놓고 비교해 보면 결말 처리가 계속 달라지고 있음이 눈에 띈다. 1964년 원작 드라마와 1965년 영화의 결말(영화에서는 마지막 부분 필름이 유실되어 시나리오로만 확인할 수 있다)은 이해로와 장일구가 모두 전선에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해로와 장일구, 고은아의 삼자대면에서, 이해로는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결행을 하여 고은아를 만나러 온 장일구의 사랑을 보며 약속대로 고은아를 양보하겠다고 하고, 장일구는 이미 멋진 남자와 결혼하여 잘 살고 있는 고은아를 보며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하고, 고은아는 울다가 탈진하여 의무실로 실려 간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이해로는 전투에 나가게 되고 거기에서 어이없이 전사하는데, 이 소식을 들고 충격을 받은 장일구는 이해로를 죽인 놈들을 가만 둘 수 없다며 맨몸으로 총격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뛰어나간다. 이때 정보참모가 ‘빨갱이들의 총에 죽게 할 수 없다’며 장일구를 자신의 총으로 쏘아 죽인다. 가장 비참한 결말이지만, 전쟁의 비극을 부각하기에는 가장 좋은 결말이다. 그런데 1972년 텔레비전드라마에서는 전쟁이 끝난 4년 후 그간 소식을 끊고 살다가 정보참모를 찾아온 장일구에게 4년 전 이해로의 전사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끝난다. 반면 1984년 영화에서는 장일구만 이동 중에 사고로 죽는다. 1992년 MBC 드라마에서는 이해로는 부상당한 채 살지만, 장일구는 이동 중 사고가 나서 어수선해진 틈에 정보참모의 총을 꺼내 자살한다. 두 명을 모두 죽이는 애초의 결말이 너무 처참해서 어쨌든 한 명이라도 살려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작가가 아무리 측은지심을 발휘하려 해도 전쟁의 비극은 엄연하다. 1964년 드라마와 1965년의 영화가, 수많은 리메이크 중 가장 뛰어난 버전으로 남은 것은 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