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국토대장정(나를 넘어 우리가 되기까지)
- 제작년도
- 2003
비장의 OST가 연재되고 거의 십년이 지나 시즌2를 앞둔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의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코로나라는 팬데믹 상황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던 극장가와 더불어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약진은 문화산업의 지형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영화들은 제작되고 있고, 새로운 감독들과 스타들도 어김없이 탄생한다. 영화음악도 마찬가지. 돌아오는 비장의 OST 시즌2에선 이제 막 신인의 티를 벗고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영화음악가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의 비장의 OST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 클로버필드 10번지 >의 독특한 점은 영화에 참여했던 그 어떤 누구도 이 영화가 8년 전 깜짝 히트한 파운드 푸티지 방식의 ‘클로버필드’ 프랜차이즈가 될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각본을 쓴 작가 조시 캠벨과 맷 스투큰, 연출을 맡은 댄 트라첸버그는 물론, 주연 배우들마저도. 할리우드에선 종종 전혀 상관없는 원작을 들고 와 속편으로 뜯어고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월터 웨이저의 스탠드 얼론 소설 <58시간>은 < 다이하드 2 >가 되었고, 조너선 헨즐리가 쓴 ‘사이먼 세즈’란 각본은 < 다이하드 3 >로 탈바꿈되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영화가 제작되던 중간까지도 ‘the Cellar’라는 각본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스릴러가 될 예정이었다. 최연소 오스카 감독상에 빛나는 데이미언 셔젤은 이 히트리스트에 올랐던 각본을 각색하며 연출까지 고려했는데, 그가 고친 부분이 바로 지상에 나온 후 펼쳐지는 뒷부분, 이른바 반전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셔젤은 애초 계획대로 < 위플래시 >의 기회를 거머쥐었고, 댄 트라첸버그 감독에게 바톤이 넘어간 이 프로젝트는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가 클로버필드와의 연관성을 떠올리며 프로덕션 중에 세계관 확장(?)이라는 놀랄만한 방향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베어 맥크레리 이에 당황한 건 영화 촬영 전부터 참여해 후반을 앞두고 있던 영화음악가 베어 맥크레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는 TV쪽에서 꽤 잘 나가던 것과 달리 영화 쪽에선 호러나 스릴러, SF 등 b급 장르에서 행보를 이어온 신인에 가까웠는데, 모처럼 손 내민 파라마운트라는 메이저 스튜디오와 J. J. 에이브럼스라는 거물과의 협연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대학 시절 할리우드 영화음악 레전드인 앨머 번스타인에게 사사 받고, 영화음악가 리처드 깁스 밑에서 견습 생활을 했는데, 리처드 깁스가 스케줄 충돌로 인해 TV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의 대타로 메인 음악가로 들어가게 되며 작곡가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후 <휴먼 타겟>과 <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 >, <유레카>, < 워킹 데드 >, <쉴드 오브 에이전트>, <아웃랜더> 등 손대는 작품마다 반향을 일으키며 TV시리즈 음악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과 행보를 이어왔는데, 이런 광폭적인 업자들의 인기에 대해 선수 중에 선수인 제작자 쌍제이 에이브럼스도 모를 리 없었다. 베어 맥크레리는 매주 반복되는 TV를 넘어 더 큰 스케일에 도전을 원했고, 갑작스런 클로버필드 세계관으로의 편입은 그래서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점에서 베어 맥크레리가 <클로버필드 10번지>에 온갖 정성과 야심을 갈아 넣은 건 당연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제리 골드스미스와 버나드 허먼이라는 불세출의 영화음악가가 들려줘왔던 장르의 토대를 자양분 삼아 그는 고전 할리우드 장르 스코어가 가진 장기와 미덕이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도 십분 발휘되길 원했다. 영화 후반이 프로덕션 과정에서 변경되긴 했어도 여전히 주된 무대가 되는 건 벙커였고, 그는 여기서 음악 색채에 대한 전체적인 모티브를 얻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뉴올리언스의 벙커 세트장에 방문해 며칠을 보냈고, 어두운 통풍구, 답답한 콘크리트 감방, 비좁은 복도 등을 경험하며 그 공간 안에서 나올 소리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운드 팀을 동원해 양철 쓰레기통, 환풍기소리, 전동기구 고주파, 벽돌, 유리, 톱, 체인, 징, 에어로졸 스프레이, 각종 기계 등 다양한 소리들을 채집해 샘플링하고 왜곡·변형하며 음악 전반에 효과로, 타악기로, 그리고 엠비언트로 상당수를 녹여냈다. 이 사운드 디자인이 가미된 스코어는 벙커 안에 벌어지는 세 주인공들의 불안한 심리 싸움은 물론, 벙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황을 상상하게끔 만들며 들려주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스코어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독특한 소리들이 <클로버필드 10번지> 스코어의 근간이 되었지만, 베어 맥크레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더 주안점을 둔 지점이 있었으니, 바로 벙커라는 공간 그 자체를 들려줄, 아니 바로 그 공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블래스터 빔’이란 악기와 주인공 미셸의 캐릭터를 형상화하기 위해 동원된 터키의 민속악기 ‘야일리 탐부르 yaylı tambur’다. 제리 골드스미스가 <스타트렉: 극장판>에서 사용해 충격과 명성을 안긴 블래스터 빔은 페달 스틸기타를 큼지막이 확장시킨 것과 같은 대형악기(길이가 무려 3-5m에 이른다)로, 수많은 와이어가 연결된 본체를 손가락이나 막대, 활, 파이프 혹은 타피 같은 물체로 치거나 문지르거나 튕기며 연주한다. 이름만큼이나 어둡고 불길하며 환상적인 특유의 깊은 음색으로 SF나 호러 장르에서 사랑을 받았고, 제리 골드스미스의 뒤를 이어 제임스 호너가 <우주의 7인>에서, 존 배리가 <블랙홀>, 모리스 자르는 < 드림스케이프 >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7-80년대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20년간은 어느 영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다는 이 독특한 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 생명을 부여했다. 그랜드 피아노나 업라이트 베이스, 콘트라 바순의 가장 낮은 음보다 훨씬 더 깊은 아래의 저음을 으르렁 울리며 저돌적으로 휘몰아치는 긴장감 넘치며 파워풀한 소리는 가히 이 스코어의 백미로, 지하라는 공간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벙커 안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과 무력감, 그리고 지상의 인류 전멸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큰 일조를 한다. 반면 야일리 탐부르의 깊고 신비스러우며 풍부한 음색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흐르는 ‘장조와 단조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섯 노트 주제부’와 결부되며 주인공 미셸의 미묘한 심리를 표출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소리는 모든 상황에서 도망만 다니던 피동적인 모습에서 점차 적극적으로 의지를 드러내며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취적인 자세로 변해가는 성장형 캐릭터의 이중적인 면모를 담아내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앨머 번스타인은 영화가 시작될 때 비주얼도, 스토리도 진행되지 않을 찰라 음악만이 관객들의 모든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며 영화를 대표하는 악기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베어 맥크레리는 이 조언을 충실히 받아들여 배급사와 제작사 크레딧이 뜨는 동안 야일리 탐부르의 기묘한 소리로 연주되는 테마를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뒤로 갈수록 두텁고 큰 스케일의 관현악이 합류하고, 이른바 ‘미스터리 스트링’이라 이름 붙인 여덟 노트의 휘몰아치는 오스티나토(어떤 일정한 음형을, 악곡 전체에 걸쳐,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고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가 덧입혀지며 벙커 안의 긴장감 넘치는 주도권 싸움과 탈출 과정의 빌드 업을 묘사해 가는데, 영화 내내 단 3명의 등장인물과 하나의 공간만이 나오는 단출한 구성임에도 다이내믹하며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마력을 선사한다. 오케스트레이션에도 다양한 시도와 고전적인 방식을 교차로 활용했는데, 영화 초반의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던 불안한 상황에선 현악 콰르텟 편성을 위주로 디테일한 지점 묘사에 신경 쓴다면, 중반부에 이르러선 벙커의 깊이감이나 풍부한 미스터리함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무력감을 묘사하기 위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전혀 없는 30대의 첼로와 8대의 업라이트 베이스만 편성해 저음 위주의 공격적이고, 강력한 무게감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지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모든 비밀들이 밝혀지는 영화 후반에 이르러선 90인조 풀 관현악단을 활용해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케일의 영화음악으로 대장정을 마친다. 새로운 시도를 펼쳤던 < 혹성탈출 >과 < 에이리언 >, <스타트렉>의 제리 골드스미스와 긴장감 넘치는 현악으로 대표되는 < 싸이코 >와 < 현기증 >의 버나드 허먼에게 경배를 바치는 이 놀라운 작업물은 베어 맥크레리를 단순한 TV시리즈에서 활약하던 일개 젊은 작곡가 유망주에서 단숨에 차세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이끌 다크호스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베어 맥크레리가 현재 위치까지 오게 된 초석이자 가장 야심 있고 강력한 비전을 발휘해냈던 승부수이자 비장의 OST였다. 그는 계속해서 <클로버필드 패러독스>와 < 해피 데스데이 > 시리즈, <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 등 메이저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콜 오브 듀티: 뱅가드>나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등 인기 게임은 물론, 코로나로 인해 OTT 세상이 도래한 현재 가장 비싼 드라마 중에 하나인 아마존의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와 애플TV+의 <파운데이션>, 넷플릭스의 <위쳐: 블러드 오리진> 등 새 미드에서도 꾸준히 음악을 만들며 눈코 뜰 새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Track List 1. Michelle 2. The Concrete Cell 3. Howard 4. A Bright Red Flash 5. At The Door 6. Two Stories 7. Message From Megan 8. Hazmat Suit 9. A Happy Family 10. The Burn 11. Up Above 12. Valencia 13. The New Michelle 14. 10 Cloverfield Lane
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가 아니라 '달리기' TV에서는 핑클이 캠핑을 다녔다. 유튜브에서는 1990년대의 <SBS 인기가요>가 24시간 스트리밍됐다. <핑클클럽>과 <SBS 인기가요> 모두 그때의 기억을 소환시켰다. 논산 연무대에서 출발해 부대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처음 들었던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떠올랐고, 과거 <SBS 인기가요>에서 노래를 소개하며 ‘네~!’를 유행어로 만든 장정진 성우도 기억났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고 역시 1990년대를 그린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도 같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1994년부터 2005년까지, IMF를 지나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다룬 이 영화가 소환한 건, 잊혀진 기억이 아니라 잠시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언뜻 < 유열의 음악앨범 >( 정지우 , 2019)은 < 건축학개론 >( 이용주 , 2011)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다를 게 없어보이는 영화다. 과거의 사랑방식을 재현하면서 그때의 대중음악으로 기억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건축학개론>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응답하라> 시리즈가 HOT와 서태지를 활용했던 것처럼 <유열의 음악앨범>도 그때의 유행가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모자이크의 <자유시대>, 핑클의 <영원한 사랑>, 윤상이 부르고 토이 앨범에 수록했던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신승훈의 <오늘 같은 창밖이 좋아> 등등. 그때 이 음악을 들었던 관객들이라면, 반가워할 수밖에 없는 노래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들과 달리 ‘그땐 그랬지’란 그리움의 시선이 없다. 예를 들어 PC통신을 통해 소통하는 장면은 <응답하라 1997>에 나왔고, <건축학개론>에는 하드 용량 1기가의 펜티엄 컴퓨터가 나온다. 이 작품들에서 그때의 컴퓨터와 PC통신은 어디까지나 그때를 재현하는 소품이다. 하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주인공 미수가 PC통신을 이용해 현우에게 메일을 쓰는 상황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그리운 사람과 그렇게 소통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자체다. 여러 장면에서 소환되는 음악들이 일으키는 효과도 현재형으로 쓰인다. 음악들은 인물들이 직접 좋아하는 노래들로 나타나지 않고, 인물들이 영화 속 현재에서 느끼는 감정을 실어내보내는 역할을 맡는다. 드디어 다시 소통하게 된 미수와 현우의 감정을 ‘영원한 사랑’으로 표현한 연출이 대표적이다. 설렘을 증폭시키기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땐 그랬지’란 태도도 없지만, ‘그때가 좋았지’란 입장도 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인생에서 20대를 보낸 그때는 가장 아프고 추웠던 시절이다. 현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죄책감을 갖고 있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 한다. 미수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위치해 있는 공간에도 애써 로맨틱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낡고 허름한 빵집은 그 자체로 따뜻한 공기를 뿜지만 이후 현우와 미수가 사는 공간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우는 컨테이너로 가득한 곳에서 무거운 짐들을 옮기며 살고, 미수는 제본공장 바로 옆에 붙은 사무실에서 소음을 견디며 일한다. 녹슨 철제 컨테이너와 기계, 소음으로 가득한 이 풍경들은 이 영화가 그 시대를 현재로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강하게 드러낸다.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지 않는 <유열의 음악앨범>이 그럼에도 1990년대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가 필요로 한 건, 쉽게 소통할 수 없어서 우연에 기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더 절실해질 수 밖에 없는 시대다. 이야기는 두 남녀가 만났다가 멀어지고, 또 우연히 다시 만나고, 또 다시 멀어지는 걸 반복하지만 이런 흐름이 긴장감을 일으키는 이유도 시대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현우가 차를 타고 가버리는 미수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감정의 밀도가 높다. 지금 놓치면 또 언제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유열의 음악앨범>은 이 달리기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핸드폰도 없고,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고, 그래서 소셜미디어도 없는 시대의 남녀는 서로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헤매고 뛰어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보다 달리기에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달릴 필요가 없는 시대. <유열의 음악앨범>의 감정적 울림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극장이 만들어진 시기는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위안과 집회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극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인부좌(仁富座)라 지었다. 1892년 인부좌에서 이루어진 자선연예회 공연이 당시 인천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 《조선신보》에 게재되었다. 자선연예회와 관련한 이 신문기사는 조선에 설립된 극장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랜 기록이다. 인부좌에서 열린 자선연예회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892년 4월 5일 인천과 부산을 오가던 일본상선 이즈모마루(出雲丸)가 전라남도 소안도 인근에서 침몰해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부산에서 공연을 마치고 인천으로 들어와 인부좌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자그라 소이치(ジヤグラー操一)는 이즈모마루 침몰 사건이 일어나자 사상자 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인천에서 조난자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선연예회를 개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재난이 닥치면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연예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자그라의 생각에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새로 지어진 인부좌에서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참고로 이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를 주최한 자그라 조이치는 본명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필자 주: 아다치 하치사부로를 ‘安達八三郞’이외에 ‘安達初三郎’로 쓰기도 한다.]이며 “자그라”라는 예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저글링으로 유명한 마술사였다. 자선연예회는 1892년 5월 28일 오후 2시 반 시작되었다. 오후 4시 경에는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장 안을 메워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3~400명의 관객들이 극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인천에 살던 많은 일본인들이 자선연예회에 관객으로 참여했으며 그들 중 몇몇은 스스로 무대에 서기까지 했다. 프로그램 중에는 자그라 조이치의 마술뿐만 아니라 무용, 조루리(淨瑠璃), 수용(手踊) 및 연극 등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흥미를 돋았다. 이 자선연예회가 개최된 인부좌는 인천 일본영사관 뒤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선회 당일 극장 안팎의 모습을 살펴보면, 극장 밖에는 나뭇잎으로 장식한 문을 만들고 그곳에 일본 국기를 비롯하여 자수로 ‘자선회’라 적힌 큰 현판을 걸었으며, 조선신보사로부터 기증받은 ‘자선연회’라고 쓰인 큰 깃발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조이치가 디자인하여 만든 목조 ‘자선회비(慈善會碑)’를 두었고, 좌측에는 인부좌의 극장주로부터 기부받은 목조비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또한 극장 안 한 쪽을 각국의 국기와 신호기들로 장식했으며, 밤이 되면 극장 밖에 산(山) 자 형태로 높게 홍등을 켰다. 이후 인부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건, 인부좌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 1890년대부터 조선에서 극장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 극장은 일본 거류민들 문화의 일종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조선의 관객들에게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이는 1895년 정치국(丁致國)이 인천에 만들었다는 조선인 연극장 협률사(協律舍)[필자 주: 1902년 황실에서 설립한 희대(협률사,協律社)와는 다른 곳이다.]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인천협률사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일(高逸)이 쓴 『인천석금(仁川昔今)』(경기문화사, 1955)이다. 고일은 정치국이 인천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극장 협률사라고 기록했다. 최성연(崔聖淵) 역시 『개항과 양관 역정』(경기문화사, 1959)에서 인천의 부호 정치국이 운영하던 협률사를 애관(愛館)의 전신으로 추정하면서 청일전쟁 중 지은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기록은 인부좌가 들어선 인천에 조선인 연극장도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쉽게도 신문이나 잡지처럼 시기를 명확히 밝혀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아 인천 협률사의 존재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위의 기록들은 19세기말 개항장에 조선인 극장이 들어섰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 청일전쟁 이후 인천에는 인부좌가 사라지고 인천좌라는 다른 이름의 극장이 들어섰다. 인천좌가 들어선 시기는 1897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인천부사(仁川府史)』의 기록을 보면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화도(花道)[필자 주: 일본식 극장에 존재하던 무대와 연결된 장소로 주로 배우의 등·퇴장에 이용된다. 주요 배우의 연기가 펼쳐지기도 한다. ]를 갖춘 100석 규모의 극장이 일본영사관 서측인 중정(仲町) 1정목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것이 1897년 산수정(山手町) 2정목으로 이전, 후에 인천좌(仁川座)라 불렸다고 한다. 물론 객석의 숫자 등 기재상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은 인부좌가 자리를 옮긴 후 이름을 인천좌로 바꿨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인천부사』에 실린 기록을 더 살피면, 인천좌에서는 만자이(漫才), 고단(講談), 가쿄쿠(歌曲) 등 일본 전통 연희물을 상연했으며 인천가부키좌 건립 후에 충남 대전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인부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극장 설립은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지방의 극장사(劇場史) 연구가 현재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부산, 인천 등 개항장에 언제 어떻게 극장이 만들어졌는지 그 전모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몇몇 연구들이 부산, 인천 등 개항장의 일본인 극장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2. 인천가부키좌 앞에서 단원들의 모습 (『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인천 빈정(濱町)에 부지 300평, 건평 160평 규모의 2층 건물이 들어서서 이름을 가부키좌(歌舞技座)라 불렀다. 이름처럼 전형적인 가부키 전용극장이었으며 입장정원도 999명이나 되는 대형극장이었다. 이 건물은 재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회두(在仁川日本人商業會議所會頭) 가라이 에이타로(加來榮太郞)가 세웠는데 건축비 1만 4천원, 도구 및 의상비 6천원으로 총 2만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1915년 당시 인천가부키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신파극이 총 흥행일수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그 밖에 구극 상연, 활동사진 상영, 각종 연예회 등이 열렸다. 사진3. 부산좌의 외관(『부산요람(釜山要覽)』, 부산상업회의소, 1912) 1903년 당시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행좌(幸座)와 송정좌(松井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행좌는 일본인 거류 1세대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1903년 이전에 남빈정(南濱町) 끝자락(지금의 중구 광복동)에 세워 운영한 극장이었다. 하자마 후사타로는 1880년 이오이(五百井)상점 부산지점에 부임한 후 무역과 부동산업으로 큰 부를 쌓고, 거류민단 의원을 역임하는 등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상공인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행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일본연극, 일본씨름, 마술, 비파, 조루리 등과 활동사진이었다. 1915년 행좌는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건축되면서 행관(幸館)으로 이름을 바꿨다. 행좌 부근에 있던 송정좌는, 개항 직후 부산으로 건너온 마쓰이 고지로(松井幸次郞)가 세운 극장이다. 1903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1911년경에 폐관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부귀좌(富貴座, 1905~?), 부산좌(釜山座, 1907~1923), 동양좌(東洋座, 1912?~?), 변천좌(辨天座, 1912~1916), 질자좌(蛭子座, 1912~1918), 욱관(旭館, 1912~1916) 등이 세워졌다. 1897년 개항된 목포에는, 1904년 지금의 복만동에 목포좌(木浦座)가 생겨났으나 운영되지는 못했고 1908년 문을 닫았다. 목포좌가 없어진 1908년 상락동에 상반좌(常盤座)가 문을 열었다. 상반좌는 1914년 138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증축되었으며, 1929년 9월 30일 폐관되었다. 1899년 개항된 마산에서는, 마산 최초의 극장 희락좌(喜樂座)가 1906년 늦은 여름 경정(京町)의 고이즈미 시게조(小泉繁藏) 오복점 뒤편에 만들어졌다. 희락좌는 건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7년 2월 1일 실화로 소실되었다. 이 직후인 1907년 늦은 봄, 신마산의 유정(柳町)에 환서좌(丸西座)가 세워졌다. 환서좌는 가부키 극장으로 회전 무대를 갖췄고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경영자는 나카무라 초(中村肇)였다. 가부키, 나니와부시를 비롯한 일본 전통 연희물이 상연됐으며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그 외 원산, 군산 등의 개항장에도 1910년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극장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떤 극장이 있었는지는 현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의 극장이 일본의 극장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극장의 구조, 흥행방식, 용어 등이 일본식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23~33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1(글 상단). 《조선신보》에 실린 인부좌 관련 기사(《朝鮮新報》 1892년 6월 5일자.) [자료] 「자선연예회 - 인천 개항 이래의 구경거리」(《조선신보》 1892년 6월 5일자), 발췌 번역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하는 의연금을 구하기 위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자그라 소이치)가 발기, 오타니 마사나리(大谷正誠) 씨가 위원장, 고리 긴자부로(郡金三郞), 미쿠라 마사히로(三倉正寬), 모토하시 세이지로(本橋淸二郞), 이와다 가에몬(岩田嘉右衛門), 아사오카 도시키치(淺岡利吉), 스이쓰 세이조(水津淸三) 제씨가 위원, 노세 다쓰고로(能勢辰五郞), 니시와키 초타로(西脇長太郞), 사다케 진소(佐竹甚三), 헤이세이 데쓰사부로(平生欽三郞), 무코야마 시게히라(向山茂平), 우에다 호사쿠(上田豊作), 구마모토 에이치로(隈本榮一郞) 제씨가 찬성자가 되고, 기타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5월 28일 오후 2시 반부터 야마노테(山手)[필자 주: 인천의 일본인 조계지에서 만국공원이 있는 언덕 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인천 송학동으로 불리는 산수정(山手町)과 꼭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지역의 신극장 인부좌에서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자선회가 열린 것은 인천 개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상류 사회의 사람들이 많이 주선했다고 하는데, 특히 이 자선회는 인천 거류민들과 아주 관계가 깊은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한다는 면에서 개회 수일 전부터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당일 방문한 사람들은 무려 800여 명에 달하며, 회장이 꽉 차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4시경 이후로는 회장을 찾아와 허무하게 출입구에서 거절당해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3~4백 명은 될 것이다. 회장 문밖에는 상록수로 커다란 녹문을 만들어 국기를 매달고, 또 털실 세공으로 ‘자선회’라고 적은 큰 액자를 걸었으며, 본사가 기증한 ‘자선연예회’라고 크게 쓴 대형 기도 매달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소이치가 디자인한 자선회비(慈善會碑, 목조)를, 좌측에는 극장주가 기부한 길이가 1조(一丈)[필자 주: 약 3m이다.]에 가까운 목조비에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라고 크게 적어 세웠다. 장내 한 쪽에는 각국의 국기 혹은 신호기로 찬란하게 장식하여 넋을 빼앗았다. 밤이 되면 회장 밖에 山 자 모양으로 높게 홍등을 켜서 특별한 미관을 더했다. 만사에 주의하여 꼼꼼하게 이리저리 장식하고 배치를 완전하게 한 데는 주선한 유지들 모두의 연일의 노고가 담겨있다. 이 자선회의 특색이라면 2층과 아래층 두 곳에 귀부인 따님들이 음식물 매점을 열어서 자선바자회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연예는 오후 3시경부터 시작했는데, 십 수 가지의 연예가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관람객들의 갈채를 받았던 것을 들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