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 감독
- 정창화
- 제작년도
- 1961
- 출연
- 김진규, 김지미, 주증녀, 조미령, 황정순, 강미애, 전계현, 장동휘, 최남현, 이예춘, 김승호, 황해, 박노식, 정애란, 윤인자, 김근자, 남미리, 유계선, 김신재, 석금성, 복혜숙, 김동원, 이룡, 최성호, 장훈, 최명수, 김희갑, 김세라, 박상익, 정철, 김칠성, 남춘역, 장혁, 임해림, 김주오, 이예민, 소동순, 박남규, 강선희, 방연실, 강석제, 윤정란, 김신명, 임예심
몹시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 신궁 >을 보러 간 날을 기억한다. 날짜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날의 날씨는 어제처럼 생생하다. 바람이 몹시 차갑고 메마른 하늘. 알 수 없게 스산한 공기. 애매하게 늦은 겨울 저녁. 그해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서울 종로구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경호실장 차지철을 대동하고 술을 마시다가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갑자기 모든 학교는 휴교를 했고 처음에는 모두들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우리들은 다방에서 만나 한가하게 음악도 듣고 줄곧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죽이다가 헤어졌다. 통행금지가 있었고 이듬해 정치의 봄이 올 때까지 서울은 조용했다. 갑자기 서둘러 시작된 겨울방학을 보내던 어느 날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고 미아 삼거리에 있던 대지극장에 가서 <신궁>을 보았다. 나는 그해 봄에 ‘林權澤’을 발견했다. < 족보 >를 본 다음부터 이 이름의 ‘監督’ 영화를 모두 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내 결심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비디오나 DVD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셈에 포함시켜 주시기 바란다. 영상자료원은 영화진흥공사 산하 기구였으며 단지 필름을 ‘보관’만 했고 (지금과 달리) 어떤 영화도 상영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명화극장에서는 할리우드 영화만을 방영했다. <신궁>은 내가 <족보> 다음에 본 임권택 의 ‘두 번째’ 영화였다. 그래서 <신궁>이 개봉했다는 소식에 조금 흥분했다. 구태여 조금, 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당시 대지극장이 재개봉관이었고 그 말은 제작사가 개봉을 포기한 영화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많은 한국영화들을 제작사가 거의 버리다시피 개봉시켰다. 그들은 외화수입 쿼터만이 관심이었고 한국영화는 그저 미끼에 불과했다. 그때 나는 마치 빈칸을 채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국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보고 있었다. 이 영화들을 달리 볼 방법이 없었던 나는 그 무렵 서울 시내의 거의 모든 재개봉관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보고 있었다. 대지극장에서 <신궁>을 보았을 때 객석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극장 안은 추웠고 헐벗은 누에처럼 웅크리고 코트를 내내 양손으로 저미며 영화를 보았다. 첫인상. < 신궁 >을 보면서 몹시 당황하였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 족보 >에서 나를 매혹시켰던 그 무언가가 없었다. 차라리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무언지는 그때 잘 설명하기 어려웠다. 어느 쪽이 이 사람의 영화였던 것일까. 내가 당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신궁>을 보았을 때 즉시 내가 이미 이런 영화를 어디선가 보았음을 깨달았다. <신궁>은 어딘가 김기영의 <이어도>를 닮아있었고 동시에 유현목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와 겹치고 있었고 하길종의 < 별들의 고향(속) >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서툴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때 내가 즉각적으로 반응한 그것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궁>에서 고유한 그 무언가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두 가지 배움의 간극. 그것임과 그 무언가. <신궁>은 내게 어떤 대결의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는 용기를 내서 좀 더 솔직하게 그때의 심정을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는 여러 힘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힘들이 서로를 통제하지 못한 채 뒤죽박죽으로 서로 뒤섞여 있었다. 그 힘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전술적으로 여겨졌고, 그 안에서 자기의 가치를 부여받고 창조에 봉사하는 대신 서로의 존재방식을 증명하기 위해서 웅성거리는 것만 같았다. <족보>는 무엇보다 우아했고 기품이 있었다. 그건 단지 영화의 내용이나 인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 그러했다. <신궁>은 폭력적이고 독립적인 쇼트들이 침범하듯이 등장하였다. 마치 다른 임권택 이 있는 것처럼 <신궁>은 다른 설명을 요구하였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겠다. <족보>는 하나의 결론처럼 보였다. <신궁>은 지금 막 무언가를 시작하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둘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둘이 임권택의 영화를 이루는 원심력이자 구심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잡아당기는 힘과 벗어나려는 힘. 수렴하는 힘과 분산하는 힘. 거의 서로 닿을 듯이 서로 가까이 있는 두 영화. 나는 먼저 둘 사이를 마주 보게 할 필요를 느꼈다. 단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주석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 하나 옆에 다른 하나가 있을 필요가 생긴 것일까. 그런데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심리적인 소설을 쓰는 것은 비평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두 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변수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면 어떤 출현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정일성 촬영감독 그 둘 사이의 사건은 정일성 이다. 1929년 도쿄에서 태어난 다음 한국전쟁 시기에 미국 공보관에서 일을 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은 사람. 김학성 밑에서 촬영부 생활을 했고 1957년 조긍하 의 < 가거라 슬픔이여 >가 촬영감독 ‘입봉’작이다. 이력 중에 가장 특별한 것은 1963년 아시아 영화재단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대목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구로사와 아키라가 < 붉은 수염 >을 찍을 때 내가 B 카메라를 잡았”다. 1965년 4월 3일에 도쿄에서 개봉한 흑백 시네마스코프 영화. 미후네 도시로가 붉은 수염이 난 지방 의사로 나와 도시에서 온 젊은 의사에게 진정한 의술이란 단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것이란 배움을 전수한다. 상영시간 3시간 5분. 누군가는 구로사와가 도스토옙스키와 셰익스피어에게서 배운 예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 진정한 걸작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1960년대 전공투 세대에게 태평양 전쟁세대가 베푸는 역겨운 계몽교훈극이라고 불렀다. <붉은 수염>의 촬영감독은 나카이 아사카즈다. 이미 구로사와와 < 들개 >로 시작해서 < 7인의 사무라이 > < 거미의 성 > < 천국과 지옥 >을 찍었고 이후에도 < 데르수 우잘라 >와 < 란 >을 찍었다. 하지만 정일성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촬영감독은 미야가와 카즈오라고 대답했다. 구로사와의 <라쇼몽>을 찍은 사람. 미조구치 겐지의 수많은 영화들, 그중에서도 로 유명한 촬영감독. 그리고 종종 (잉마르 베리만과 함께 작업한) 스벤 니크비스트를 말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정일성 이 갑자기 놀라운 촬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산업 안으로 돌아왔고 촬영은 감독의 결정 아래 놓여있다. 정일성은 유감스럽게도 충무로에서 미조구치 겐지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1971년 김기영 을 만났다. < 화녀 >를 찍은 다음 이어서 < 충녀 >를 찍었다. 이때부터 정일성은 양식적인 그만의 스타일을 화면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 화면의 주인을 찾는 것은 난처한 일이다. 우선 그 당시의 현장이 지금과 매우 달랐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장에서 모니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때 현장에서 연출은 그저 배우를 바라보며 카메라에 담겨질 구도를 ‘미루어 짐작하면서’ “레디 액션”을 불렀고 그런 다음 ‘감으로’ 오케이와 엔지를 구별해냈다. 이건 전 세계 영화 현장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더 그때의 현장은 위계질서가 엄격했으며 감독은 모든 문제를 결정했다. 하지만 촬영의 ‘순간’을 보는 사람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촬영감독뿐이었다. 게다가 이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촬영이 끝난 다음 필름을 현상소에 보내서 프린트를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편집실에서 하는 탄식은 의미 없는 후회이다. 나는 1978년 처음으로 영화 촬영현장을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현장은 하길종 의 마지막 영화 < 병태와 영자 >(1979)였다. 촬영은 장석준 이었고 제작은 그 당시 가장 안정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화천공사였다. 연출부와 촬영부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감독은 촬영감독의 허락 없이 카메라의 구도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촬영감독은 이따금 마치 자신의 관대함을 보이려는 듯 감독이 구도를 확인하는 것을 허락하곤 했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필름은 최소의 재촬영을 허락했으며 여분의 촬영은 상상할 수 없었다. <화녀>의 현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김기영은 정일성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이어서 이듬해 <충녀>(1972), 비구니들에 관한 이야기 < 파계 >(1974), < 만추 >를 다시 찍은 < 육체의 약속 >(1975)을 이어서 함께 찍었다. 거의 동시에 유현목 과 < 불꽃 >(1975)과 < 문 >(1977)을 찍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결정적인 명성을 안겨준 영화는 하길종 과 찍은 < 바보들의 행진 >(1975)일 것이다. 그리고 김수용 과 < 가위 바위 보 >와 < 화려한 외출 >을 찍었다. 김기영, 유현목, 하길종, 김수용. 그들은 단지 이름이 아니다. 한국영화라는 발명.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시대에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영화가 아름답게 작동하는 방식을 창조해냈다. 물론 정일성의 목록이 항상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것은 촬영이라는 자리의 운명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선택하는 대신 선택 당했다. 그는 같은 시기에 < 고교얄개 >(1976), < 고교 꺼꾸리군 장다리군 >(1977), 그리고 < 여고얄개 >(1977)을 찍었다. 임권택 은 1970년대에 들어선 다음 거의 매번 다른 배우들과 작업했지만 촬영감독은 고작 서너 명의 이름들을 돌아가면서 반복해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서정민 , 이석기 , 구중모 가 그 이름이다. < 신궁 >은 임권택이 정일성과 함께 작업한 첫 번째 영화이다. 그때 두 사람은 모두 한 해에 몇 편의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일정을 조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본 임 감독의 영화는 < 왕십리 >였어요. 그 이전 영화는 별로 본 기억이 없어요. <왕십리>는 정돈이 대단히 잘 된 영화였어요. 그 영화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감독의 힘으로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나는 < 과부 >( 조문진 , 1978)로 대종상에서 촬영상을 받고 임 감독은 < 족보 >로 감독상을 받아 함께 해외연수를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거기서 함께 많은 이야기를 했지요. 그때 임 감독은 듣고 또 들었어요. 그게 임 감독의 매력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것. 마침 나는 샤머니즘에 관한 영화를 몇 편 작업하면서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어요. < 이어도 >나 < 을화 > 같은 작품들을 찍었어요. 그때 < 신궁 >을 만나게 된 거지요”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렌즈의 문제 분명한 사실은 첫 번째 작업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망쳤다는 것이다. < 신궁 >은 영화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화면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그게 말이에요, 촬영을 떠났는데 미처 카메라를 테스트하지를 않은 거예요. 찍는 동안에는 몰랐죠, 그게 섬에 가서 촬영을 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현상을 해보니 그냥 화면이 그렇게 된 거지요. 초점이 다 나간 거지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렌즈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겨서 일부 화면들은 잘못된 아이리스 같은 효과가 생긴 장면들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아마 현상소에서 두 사람 모두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술적 결함이라는 외피를 잠시만, 하여튼 잠시만, 옆으로 치워놓고 질문을 진행시킬 생각이다. 촬영이라는 문제. 정일성 의 촬영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정의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와 함께 작업한 연출자들은 각자의 공간을 만들어냈고 각자의 구도를 찾아냈으며 각자의 리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정일성과 작업하기 전에 이미 자기의 세계를 갖고 있었다. 그 세계 안에 들어가서 정일성은 무언가를 했다. 영화에서 촬영이 하는 무언가. 그때 임권택 은 그들의 영화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나는 약간 사태를 단순화시켜서 설명하고 싶다. 정일성의 촬영이 아름다운 순간은 대부분 롱쇼트를 찍을 때였다. 그 순간 이상할 정도로 그의 구도 안에서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건 단지 멀리서 찍었다는 뜻이 아니다. 정일성은 롱쇼크를 찍기 위해서 대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할 지, 얼마나 높이 있어야 할 지, 그때 렌즈가 어떤 깊이를 가져야 할 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어떤 빛이 화면 안에 스며들어야하는지를 예민하게 느껴보았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정일성은 충무로에서 대부분의 촬영감독들이 와이드 렌즈 촬영을 잘 해낼 때 정반대로 망원렌즈로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곤 했다. 그는 여름보다 겨울을 선호했고 눈이 내릴 때보다 눈이 녹을 때가 촬영을 해야 할 ‘진정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엔 아픔이 있잖아요” 몇 번이고 그 말을 썼다. 심지어 촬영현장에서 만족스러운 장면을 얻어냈을 때에도 그렇게 말을 했다. 이미지 안의 아픔. 그런데 그건 어떤 아픔일까. 아니, 이미지가 아프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당신께서 생각하는 촬영은 무엇인가요? “난 말이에요, 칼라로 찍었지만 그게 흑백처럼 보이는 장면을 해내고 싶어요. 영화는 암부(暗部)가 살아나야하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영화를 보다가 아, 세상이 사라져가는 거였구나, 라는 걸 거기서 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가 슬퍼지는 거죠. 왜냐, 세상 앞에서 자기가 보잘 것 없으니까” 정일성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담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충무로에서, 그걸 그려내려는 감독을 만나야만 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구부릴 차례이다. 좀 이상하게 말하자면 임권택 은 < 신궁 >에서 이전에는 해본 적이 없는 방식의 장면들을 만난다. 그건 이전까지의 그의 영화에서 나타난 주제나 소재, 이야기, 등장인물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물론 <신궁>에서 다룬 무속신앙은 임권택에게 새로운 주제이다. 그는 그 이전까지 이런 주제 안의 인물을 다룬 적이 없다. 갑자기 이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 불의 딸 >을 경유해서 < 축제 >까지 이 관심을 이어갔다. 임권택은 무속신앙이 사실상 한국의 모든 종교의 뿌리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고 생각한다. “그렇잖아요, 부처님에게 극락왕생시켜달라고 비는 건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소원이지요, 욕심을 버리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공양을 해가면서까지 제 남편 제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빌고 하는 건 사실상 절에 가서 굿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거예요. 그건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교회에 가서 자기는 천당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건 내세를 믿는 무속 신앙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거죠”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임권택이 <신궁>을 만들었을 때 그는 이미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밀고 나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당신에게 <신궁> 주변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 전해에 임권택은 < 족보 >를 찍었다. 그리고 <신궁>을 만들었던 1979년 그는 < 깃발 없는 기수 >를 찍었다. 그 이듬해 < 짝코 >를 찍었고, 그리고 1981년 < 만다라 >를 찍었다. 하지만 이건 촬영과 상관없는 이야기다. 임권택은 이미 1973년(< 잡초 >), 혹은 1976년(< 왕십리 >)부터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질문을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궁>은 심지어 그 변화의 과정에서조차 그 이전 영화들과 단지 다르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고 무언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정식화도 허락하지 않는 대립. 여기서 형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외양의 차이라고 하고 싶은 어떤 단락이 나타났다. 나는 처음 보았을 때 이것이 왠지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을 만큼 강제적인 균열로 보였다. 어쩌면 <족보>의 감흥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간략한 줄거리. 1977년 7월 한국문학에 발표한 천승세 작가의 원작을 각색한 < 신궁 >은 섬에서 세습무로 유명한 당골네 왕년이의 이야기다. 그녀는 주로 뱃사공들을 위해 고기잡이가 풍년이 되게 해달라는 굿판에서 용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하지만 그녀의 굿판 장구잽이 (이자 남편인) 옥수는 배를 타고 싶어 한다. 우여곡절 끝에 배를 사서 선장이 되지만 이 섬의 부자 최판수의 흉계에 빠진 채 빚에 몰려 배를 팔고 그 배에 선원으로 올라탔다가 그만 태풍에 배 밑창에서 죽는다. 실의에 찬 왕년이는 아들 용수와 자기 굿판을 물려줄 쪼깐년을 데리고 지내면서 더 이상 굿판에 벌이지 않는다. 집을 나간 용수가 일 년 만에 돌아오고 고기잡이는 흉년이 들어 모두들 왕년이가 굿판을 벌여주기를 조르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그런 어느 날 쪼간년이 돈에 눈이 멀어 최판수와 자기 몰래 통정을 나눈다는 사실을 알고 굿판을 잡겠다고 자청한다. 왕년이는 굿판을 벌이기 전에 최판수의 운수대통을 위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궁으로 운세를 내려주겠노라며 굿판 복판에 앉힌다. 그런 다음 바가지를 씌운 최판수의 이마에 활을 쏘아 내리꽂는다. 그녀의 복수. 왕년이의 거절 임권택 은 이야기의 전체 구조를 구성하면서 다시 한 번 복습하듯이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시킨다. 첫 장면. 왕년이의 집에 섬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굿판을 벌여달라고 간청하지만 왕년이는 다 물리친다. 왕년이의 아들이 돌아오고 그런 아들을 바라보면서 왕년이는 남편 옥수를 떠올린다. (flash_back) 임권택은 언제나처럼 이야기 안에 시간의 주름을 만들고 마치 그 시간의 주인이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에 걸려 넘어지듯 그 안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 신궁 > 가까이 있는 < 짝코 >는 이 구조를 쫓는 송기열과 쫓기는 ‘짝코’ 백공산 두 사람의 복수의 주름으로 만든 다음 번갈아 오간다. < 길소뜸 >은 화영과 동진을 번갈아 오가면서 방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둘로 나눈다. 이번에는 왕년이의 차례이다. 무속신앙을 다룬다고 해서 임권택은 이야기의 구조를 뒤틀거나 인물의 줄거리에 특별한 형식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해왔던 방식에 따라서 전기적 구성을 해나간다. 여기서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혹은 인물이 형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 신궁 >은 영화의 경제학에 따라 둘로 나누어서 촬영되었다. 풍경이 나오는 외부는 모두 섬에서 로케 촬영을 했고 왕년이의 집으로 들어서면 세트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일부 낮에 문을 열어놓고 바깥 풍경이 걸리는 왕년이 집의 일부는 섬에서 촬영했다. 이전까지 임권택 은 인물이 방 안에 들어가면 함께 들어갔다.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인물들 사이의 시선을 설계하고 장면을 분할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시네마스코프로 촬영을 시작한 임권택은 방 안에 들어가면 인물들의 동선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바닥에 앉는) 좌식 생활을 하는 한국은 일단 한 번 앉으면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가능하면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방 안에 들어가게 되면 카메라를 중심으로 타원형 구조로 앉힌 다음 옆으로 펼쳐놓았다. 먼저 위치를 확인시키고 나면(master_shot) 재빨리 대화의 내부로 들어가 인물들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약간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정확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에서 보여주는 배치를 한 다음 나루세 미키오의 방식으로 분할해 들어갔다. 하지만 임권택은 1970년대 어딘가에서부터 이런 분할 방식을 버리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그때부터 임권택의 장면들은 눈에 보이게 시간적으로 분할 없이 지속되기(long_take)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따금 문득 멈춰 서서 바라보듯이 보여준 영화는 < 아내들의 행진 >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형태의 좌식 배치에 관한 여러 가지 변형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구도가 여러 명을 앉혀놓았을 때는 인물들의 집합 효과가 있지만 단지 두세 명의 인물이 있을 때는 시네마스코프의 경우 일부 공간이 지속적으로 비어있거나 빈 공간이 주는 효과가 엄습해올 때 그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불필요하게 인물에게 다가가야 할 필요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이른바 문법에서 말하는 일정 거리 안으로까지) 인물에게 다가가면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오즈만이 다가가 본 거리. 임권택은 < 족보 >에서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방 안에서 가끔 카메라의 위치를 사각형의 사각에 가져다 놓았다. 문제는 그때 그 자리가 영화적으로는 성립된다 할지라도 한국 가옥구조에서 건축적인 선을 기형적으로 왜곡시키거나 종종 파괴적으로 침범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마 그걸 나보다 임권택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frame_in_frame_ 문 안의 혹은 문 밖의 풍경 < 신궁 >은 이 문제를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종종 여기서는 카메라가 왕년이의 방 안에 들어가기를 망설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저 바깥에 머물면서 방 안을 들여다본다. 이때 핵심은 문이 화면 안에 또 하나의 화면을 만들어낸다는(frame_in_frame)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로로 펼쳐져 있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가로로 긴 문이 마치 불필요한 면을 잘라내는 것만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면서 자유자재로 영화의 화면 구도를 다시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두 개의 전통이 있다. 하나는 이미 비스콘티가 < 센소 > 혹은 < 레오파드 >에서 귀족들의 집에 들어간 다음 늘어서 있는 방과 방 사이의 문, 혹은 창문을 사용하면서 다시 화면을 분할한 경우이다. 물론 그는 이 방법을 장 르누아르에게서 배워왔고, 장 르누아르는 연극에서 가져왔다. 다른 하나는 이미 1930년대 일본영화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미조구치 겐지는 전통적인 일본 가옥에 들어서서 여러 개의 미닫이문을 겹쳐놓듯이(layers_in_depth) 여닫으면서 인물들의 여러 개의 동선을 전경과 후경에 놓은 다음 가깝고 동시에 멀리(deep_focus) 움직일 때 이 구도를 사용하였다 무엇보다도 < 기온의 자매 >에서의 실내장면들, 혹은 오즈 야스지로가 적산가옥의 마루에 인물들을 앉힌 다음 미닫이문을 애매하게 열고, 혹은 애매하게 닫고, 말하자면 바로 이 애매함의 정취의 자리인 방 안쪽에서 인물들을 찍을 때 사용하였다. 종종 오즈는 그렇게 스탠다드 화면에서 세로가 더 긴 것만 같은 효과의 화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이 두 가지 전통을 하나의 영화에서 현대적으로 다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허우 샤오시엔이다. 이를테면 < 동년왕사 >. 하지만 여기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방 안의 방, 문 안의 문이라는 유럽 건축양식, 혹은 일본 가옥 구조라는 전제이다.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에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린 시절 아하가 할머니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살았던 집은 일본 식민지 강점하에 세워진 일본식 가옥구조였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것은 건축의 문제이자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적산가옥은 재빨리 사라졌으며 여기서 사용되는 집은 전통적인 초가집이다. 그러므로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외부 공간이 된다. 이 가옥에 문을 사용하여 공간을 다시 분할하면 첫째, 반드시 방문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이 구도는 겨울에 찍을 수 없다. 계절이라는 절대성. 기후의 요구. 혹은 강제로 문을 열어놓고 내버려두어야 한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단지 동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이며 인물의 심리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 방문을 열어놓고 외부에서 찍으면 방문 옆의 벽이 문제가 된다. 오즈나 미조구치, 혹은 허우 샤오시엔은 이 문이 문 안의 문이거나 방 안의 방이기 때문에 문을 겹쳐놓거나 미닫이문의 종이 질감이나 문양을 사용하였다. 정일성 은 이 벽을 단지 어둡다기보다는 마치 지워버린 것처럼 ‘블랙에 가까운’ 어둠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정일성의 구도는 종종 기하학적인 양식처럼 보였다. 이 구도는 항상 성공적이지 않았다. 때로는 마치 화면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아마 임권택 은 이 구도가 다소 불편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세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 방에 두 개의 문을 만든 다음 어떤 장면에서는 앞쪽의 문을 열어놓고 그 바깥에서 찍었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 뒤편의 문을 열어놓고 방 안에 들어와서 찍어나갔다. 그렇게 되면 다른 문제와 만난다. 세트에서 찍은 장면과 로케에서 찍은 장면을 하나의 씬 안에서 붙여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전혀 다른 날, 전혀 다른 장소, 전혀 다른 시간에 찍은 쇼트를 하나의 씬 안에서 연결시키는 것은 단지 기술적인 문제만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임권택은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어나간다. <이어도> 정일성 은 이미 이 구도를 다른 영화에서 해보았다. 김기영 과 전해에 찍은 < 이어도 >는 같은 방법을 거의 극단적인 구도까지 밀고 나아갔다. 그래서 마치 이 영화는 단지 공간이 가져다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화면의 비례에 대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어쩌면 < 신궁 >에서는 한발 물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도가 김기영의 요구인지 정일성의 제안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김기영은 이미 < 고려장 >에서도 (정확하게 동일하진 않지만)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김기영은 자신이 연극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영화를 연출하면서 숨기지 않았으며 때로는 거기서 가져온 방법(들)을 폭력적으로 밀고 나아갔다. 하지만 정일성과 작업한 첫 번째 영화 < 화녀 >는 그렇게 찍지 않았다. 내게 나쁜 인상을 준 것은 <신궁>을 보기 얼마 전에 <이어도>를 보았고 서로 다른 감독의 이름 아래 동일한 방법을 만났을 때 교집합의 매너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은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름의 영토에서 만난 동일한 구도. 게다가 <이어도>와 <신궁>은 둘 다 섬에서 촬영되었고 동일한 기후 환경 아래 거의 유사한 신비주의가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도>로 미루어 보건대 <신궁>에서의 구도는 정일성의 제안이 분명하다. 그리고 임권택 은 이 구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구도는 이후에도, 이를테면 < 만다라 > 혹은 < 길소뜸 >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 이 구도는 (거의) 사라졌다. 이 구도가 임권택 으로 하여금 훨씬 수월하게 멈추지 않고, 분할하지 않고, 대화의 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물을 바라볼 수 있게(long_take) 도와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구도는 임권택의 화면을 멈춰 세우곤 한다. (fixed_camera) 물론 여기엔 어떤 주장이 있다. 주장? 그렇다. 하나의 교육. 하나의 개념. 나는 거기서 임권택의 새로운 긴장을 본다. 그렇게 임권택은 < 신궁 >에서 가끔씩 마치 호흡을 멈추는 것만 같은 화면을 보여주곤 한다. 거기서 종종 리듬은 죽은 듯이 숨을 죽인다. 나는 두 번 반복해서 죽은 듯이, 라고 썼다. 임권택의 우아한 선은 오히려 왕년이가 굿판을 앞두고 부정 탄다면서 남편 옥수가 집요하게 접근하며 옷을 벗기려는 몸짓을 거부하는 모습을 따라가면서, 부주의하면 놓칠 만큼 느리게, 하지만 거의 몸짓과 하나가 된 것처럼 슬그머니 이동하는 장면에 있다. 정지와 이동. <신궁>은 이 두 개의 운동이 시종일관 긴장을 만들어낸다. 바다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카메라 하지만 실내에서의 기하학적인 구도보다 좀 더 이상한 순간은 야외에서 장면이 진행될 때 갑자기 선 바깥으로 나가는 쇼트들의 존재이다. 왕년이가 굿판을 벌일 때 종종 이런 쇼트들이 등장한다.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혹은 등지고 왕년이는 제사 단을 차린 다음 신령님께 굿을 올린다. 이때 임권택 은 왕년이와 굿판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 쇼트를 진행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바다 저 멀리서 굿판을 바라본다. 바다 위에는 아무도 없으며 또한 그 굿판 주변으로 배가 지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일성 은 배 위에 카메라를 싣고 멀리서 굿판을 벌이는 주변을 스쳐 지나가면서 찍는다. 우선 이 장면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지적하고 싶다.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그건 일종의 상황 설정을 설명하는 쇼트(master_shot)가 아닌가요. 첫째, 그러기에는 굿판으로부터 너무 멀리서 찍었다. 둘째, < 신궁 >에서 이 쇼트는 시퀀스가 시작할 때가 아니라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나타난다.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설정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 쇼트는 고전문법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잉여의 자리이다.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버린 쇼트의 존재에 대해서 이미 스티븐 히스와 닉 브라운은 긴 논의를 제시했다. 스티븐 히스는 오시마 나기사의 < 교사형 >에서 고양이의 쇼트를 예로 들었으며(‘Narrative Space’) 닉 브라운은 < 역마차 >의 식탁 테이블을 문제 삼았다. (‘The Spectator-in-the-Text: The Rhetoric of < Stagecoach >’) 좀 더 긴 논쟁도 있다. 오즈의 < 만춘 >에서 교토에 아버지와 노리코가 여행을 가서 잠든 그 날 밤 료칸 방 안의 화병이 문제가 되었다. <신궁>은 같은 맥락에서 좀 다른 문제와 만난다. 여기서 정일성이 달리는 배 위에서 굿판을 멀리서 바라볼 때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도 아니다. 바다에는 어떤 배도 떠 있지 않았고, 또한 사실주의의 관점을 택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신비한 제3의 시선이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게다가 이 장소는 바다 위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우연히 이 광경을 이 위치에서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멈춰 서서 바라보는 대신 배가 달리면서 찍었기 때문에 카메라의 운동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배와 카메라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혹은 이 쇼트가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면 이제까지 일관된 어떤 미학적 원칙에 따라 사용된 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그냥 간단하게 이 쇼트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인상적으로만 말한다면 진행되던 쇼트의 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기보다는 차라리 갑작스러운 쇼트가 진행되던 리듬을 찢으면서 침범했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면 누군가는 로셀리니가 < 전화의 저편 >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빨치산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바라보는 무심하리만큼 객관적인 쇼트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궁>에서의 이 쇼트는 보는 자리를 관객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질문한다면 차라리 이 쇼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하게 영화 안의 어딘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무언가 빠져나온 것 같지만 어디선가 멈춰버린 쇼트가 씬 안에서 존재한다는 뜻. 나는 이 애매함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임권택 은 왜 이런 쇼트를 허용한 것일까. 그 쇼트의 효과는 무엇인가. 여기서 쇼트 사이의 새로운 방향이 생겨난 것이다. 방향? 이 말을 조심스럽게 쓰고 싶다. 쇼트(shot)들이 일종의 면(plan)이라면 영화는 그 면을 연속적으로 세워놓으며 서로 반사하고 연결시키는 것이다. 고전주의의 방법은 이 면들을 어떤 간격으로 세워놓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는 면 자체에 관한 장황한 이론은 잠시 건너뛸 생각이다. 이때 임권택은 갑자기 일렬로 세워진 면들 사이에서 하나의 면을 더한 다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가로로 세워진 일련의 면들의 집합을 바라보면서 하나의 면을 갑자기 세로로 놓은 것이다. 세로의 인서트. 그러나 이 쇼트가 시점 쇼트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왜상효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의 시퀀스 안에서 이야기를 따라 왕년이와 함께 여기에 온 우리가 갑자기 이야기 곁으로 비스듬히 나와 왕년이를 바라보게 된다. 이걸 주관적 씬과 객관적 씬의 분리라고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설명이다. 핵심은 이 인서트를 사이에 둔 두 개의 씬이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이 인서트 자체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 갑작스러운 쇼트가 주는 운동감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쇼트는 고립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쇼트는 앞과 뒤의 어디에도 달라붙지(raccord) 않는다. 노엘 버치는 그걸 정확하게 설명했다. 쇼트가 달라붙지 않을 때, 버치의 표현을 빌리면 ‘잘못 달라붙었을 때(faux_raccord)’, 우리는 영화에서 시각기호를 가독기호(lecto_signe)로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쇼트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나요, 라고 질문하면 당신은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올바른 질문은 거기서 왜 읽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인가요, 라고 해야 한다. 나는 소설을 쓰는 위험을 피하고 싶다. 임권택 과 정일성 이 여기서 어떤 의견을 교환했는지 알지 못한다. “< 신궁 >을 만들었을 때는 서로의 스타일이 있었어요. 내가 앵글을 잡을 때 그 장면에 대해 반드시 임 감독과 나는 토론을 했어요. 그때 임 감독이 그러더군요. 토론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이 쇼트를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한쪽이 제안했고 다른 한쪽이 그걸 받아들였다. 우선 영화의 경제학에 따른 복기. 굿판이 열리는 장면을 바다 위에서 달려가는 배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찍는 것은 그 순간 갑자기 어떤 영감을 받아서 촬영의 위치를 옮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배를 준비하는 것은 제작비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결정이다. 말하자면 이 쇼트는 콘티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는 장면이라는 뜻이다. 한 가지 더. 촬영팀이 모두 배로 옮겨 이 쇼트 단 하나를 찍기 위해 시간을 보낼 때 다른 모든 팀은 그저 구경을 하고 있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섬에 가서 촬영을 하는 것은 날짜와의 싸움이다. 그 상황에서 임권택은 이 한 장면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이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호이다. 어떤 신호? 임권택 은 질서정연한 시스템을 갑자기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 쇼트는 그 위기를 알리는 신호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고 싶다. 왜 임권택은 위기를 필요로 하는가. 용기를 내서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그는 질서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다. 어떤 질서? 가로의 질서. 일단 이 질서 안으로 들어오면 안정적인 공간이 영화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긴밀한 문법의 네트워크. 그 안정 바깥으로 무리하게 나갈 때 영화가 부서지기 시작한다. 물론 누구나 처음에는 들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지 않으면 영화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공간이 안정되고 나면 이 시스템이 거의 물샐틈없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거의 고유명사화 된 ‘오즈적인 것(小津的’なもの)’에 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영화에서 180도란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 라고 탄식하듯이 말한다. 영화는 일단 그 안으로 들어오는데서 시작한다. 임권택은 그 안에서 시작한 감독이다. 그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찍었다. 좀 더 중요한 지적이 남아있다. 충무로에서 이 법칙을 벗어나면 스텝들은 촬영에 협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서 설명할 필요도 없이 < 장희빈 >을 찍으면서 시간에 쫓긴 정창화 가 상상선을 벗어나자 조감독 임권택은 그러면 안 된다, 고 조언을 했다가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로의 쇼트는 탈출의 신호이기도 하다. 물론 임권택은 지속적으로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첫 번째 신호가 < 잡초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탈출이 일시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반복적인 힘을 지속적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잡초> ‘이후’의 영화들에서 나는 수 없는 탈출의 신호들의 예를 설명할 수 있다. 아니, 차라리 목록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반동적인 힘들의 예를 설명할 수 있다. <잡초> ‘이후’의 영화들에서 내가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것은 기괴할 정도로 불균질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임권택이 그 공간의 성질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질문을 한 쇼트들일 것이다. 그는 성질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스스로 항상 외면하려고 애쓴) ‘나쁜 버릇’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신궁 >이 임권택의 일흔 한 번째 영화라는 것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 전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시퀀스 전체를 와해시키는 지경으로까지 밀고 나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쇼트의 자리는 약간 애매해 보인다. 이야기는 유지되면서 성질이 다른 쇼트가 그 안으로 뛰어들 때 이 세로의 쇼트는 정확하게 이야기 안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바라보는 쇼트. 하지만 임권택은 이 쇼트의 권리를 보는 쪽에게 넘길 생각이 없다. 이때 나는 약간 까다로운 가정을 해보고 싶다. 이 쇼트는 현장에서 촬영의 관점에서 관념적인 설명에 기댄 장면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쇼트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출의 관점에서 이 쇼트는 편집의 맥락에서라면 미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지금 둘 중 이 쇼트가 누구의 권리냐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쇼트가 두 사람의 합의 아래 이루어졌다고 정말 믿는다. 그래서 여기서 바쟁이 했던 영화라는 과정에 관한 비평의 방법론에 따라 이렇게 추론하고 싶다. 임권택 은 현장에서 관념적인 관점의 ‘잉여의’ 촬영을 받아들였고 정일성 은 이 장면이 편집실에 가서 미학적인 관점의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는 쇼트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촬영과 편집 사이에 놓인 사전적인 작업과 사후적인 작업 사이에 놓인 간극을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나는 이 장면이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일성 은 자기의 장면이 어떤 쇼트가 될 지를 가정하면서 촬영을 했을 것이다. 임권택 은 그 잉여의 촬영을 허락하면서 끊임없이 그의 두뇌 속에서 영화를 다시 편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임권택의 영화가 불균질을 받아들이면서 안정적인 공간 안에서 정신적인 그것,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찾아가고 있다는 신호가 되었다. < 신궁 >은 괴이한 신비주의와 따분한 진부함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순간 임권택의 어떤 도약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마 내가 그해 겨울 이 영화를 보고 당황한 것은 그 해 봄에 < 족보 >를 보고 느꼈던 아름다움이 일시에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폭력적으로 느슨해져가면서 그 사이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그 정신적인 그것, 앞에서의 당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신궁>이 아니었다면 < 만다라 >는 없었을 것이다. 두 승려가 불가의 가르침에 관한 화두를 끊임없이 토론하며 걸어가고 또 걸어가는 그 정신적인 만행길. 정신적인 그것임. “내가 유현목 감독의 < 사람의 아들 >을 찍을 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때 마침 임감독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병원에 와서 위로를 하며 이번에 퇴원을 하면 자신과 함께 새 영화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수술 결과는 끝나봐야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집에서는 장례식 준비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그때 병원에 찾아와서 말한 새 영화가 < 만다라 >이다. 임권택 은 <만다라>를 정일성 만이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신궁 >은 <만다라>로 가는 과정의 영화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조만간에 반복하면서 다시 한 번 시작할 생각이다. (계속) 1979년 93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태창흥업 각색 김지헌 촬영 정일성 조명 손달호 편집 김희수 음악 김동진 윤정희 김희라
“나는 그렇게 일찍 ‘입봉’할 생각이 없었어요. 이게 내가 먹고사는 유일한 방법인데 조감독을 하면 그냥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잖아요. 그때만 해도 내가 충무로에서는 꽤 똘똘한 조감독이어서 사람들이 권택이, 권택이 그러면서 나를 찾았으니까요. 그런데 감독 한번 해서 망하면 그걸 누가 다시 연출부로 데려다 쓰냐구요. 그때도 영화 한 편 찍고 사라진 사람들을 많이 봤으니까요. 나는 정창화 감독만 모시고 했잖아요. 여기저기 다니는 게 나한테 맞지도 않고. 그런데 < 장희빈 >을 찍을 때였어요. 그걸 창경궁에서 찍고 있는데 일정이 촉박해서 심지어 연출부들이 그때 막 궁궐 안에서 잠을 자면서까지 영화를 찍었어요. 장면을 찍는데 참, 이건 내가 잘못한 건데, 거기서 나와야 할 일정이 다 되어서 이제 떠나야 할 판국인데, 창경궁 바깥으로 일단 나가면 세트를 세울 수도 없고 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날 분량을 다 못 찍고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정창화 감독이 막 찍기 시작하는 거야. 동선도 안 맞고, 시선도 틀리고, 그래서 내가 이건 잘못된 겁니다, 라고 말을 했는데, 거기 배우들도 있고, 스태프들도 있고, 사실 정창화 감독도 다 알면서도 그러는 건데, 그래서 속에 불이 나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 알고 있을 법한 조감독이란 놈이 그러니까 다 있는 앞에서 나한테 갑자기 화를 내는 거예요. 그때는 내가 맞는 데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그만두겠다, 이러고 나온 거지, 그런데 내가 다른 감독 밑에서 해본 적도 없고 머리가 컸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감독들도 나를 안 부르는 거야, 그때 조감독 하던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제작자가 그러지 말고 그냥 ‘입봉’을 해라, 해서 감독이 된 거예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장희빈>(정창화), <요화 장희빈>(임권택) 정창화 의 < 장희빈 >은 1961년에 제작되었고 김지미가 사극 드라마 사상 첫 번째 장희빈으로 등극한 영화이다. 숙종으로는 김진규가 출연하였다. 이듬해 임권택 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로 ‘입봉’하였다. 그런 다음 스무 편의 영화를 더 찍었다. 1968년 임권택은 자신의 첫 번째 칼라영화 < 요화 장희빈 >을 찍었다. 물론 그해에 이 영화만 찍은 것은 아니다. ‘입체영화’ < 몽녀 >를 찍었고, (< 7인의 사무라이 >를 리메이크한) < 황야의 7인 >를 리메이크한 < 바람 같은 사나이 >를 찍었고, 첫 번째 다찌마와리 액션활극 < 돌아온 왼손잡이 >를 찍었다. 하지만 자신의 ‘오야지’(그때는 자신이 모시던 감독을 그렇게 불렀다)가 찍었던 영화, 그 현장에서 떠나야했던 영화, 그 영화와 같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자신이 찍게 되었을 때 임권택은 틀림없이 약간 민망하지만 어떤 승리감을 느꼈을 것이며 또한 대결‘하는’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오야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싶다. ‘親父’라는 말. 자기 아버지라는 뜻. 영화 현장에서 연출부들은 자기가 모시는 감독을 다른 자리에서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 하여 ‘오야지’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대결하는 장면. 약간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임권택은 <요화 장희빈>을 ‘연출하면서’ 정창화의 그림자를 벗어났다. 그런 다음 의도치 않게 한국영화 산업 안에서 스스로 망가지면서 자기 영화를 찾아가는 과정에 나서게 되었다. 헐벗은 연출. 가진 것 없이 버려지게 된 다음 다시 시작하는 계기. 그런 의미에서 <요화 장희빈>, 혹은 이 스물 한 번째 영화는 임권택에게 하나의 사건이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영화는 임권택의 내부에서 미처 종결되지 않았던 하나의 중단이 마침내 자기 손에 의해서 완성된 다음 끝난 것이다. 물론 과도하게 <요화 장희빈>에 대해서 (프로이드를 경유한) 아버지와의 대결이라는 드라마를 끌어들이는 것은 사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두 번째. 한국영화에서 첫 번째 칼라영화는 1949년에 만든 홍성기의 16mm 필름인 <여성일기>였지만 긴 시간 동안 한국영화에서 칼라영화의 시대는 미루어졌다. 그 시대를 시작한 것은 1961년에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홍성기 의 < 춘향전 >과 신상옥 의 < 성춘향 >이었다. 임권택 이 ‘입봉’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 칼라영화의 시대. 그러나 임권택은 자신의 칼라영화를 한참 뒤로 미루었다. 물론 그건 그의 예술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필름 값은 영화 제작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비쌌(을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비용이 부담스러울 만큼 제작 조건이 열악한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임권택은 기다려야 했다. < 요화 장희빈 >은 임권택의 첫 번째 칼라영화이다. 한 가지 더. 신기하게도 1968년에 찍은 임권택의 영화는 ‘갑자기’ 모두 칼라영화이다.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흑백영화를 찍지 않았다. 같은 말이지만 되돌아가지 않았다. 혹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를테면 홍상수 는 가끔 흑백으로 영화를 찍었다. . 혹은 칼라로 작업한 다음 마지막에 흑백으로 전환한 < 북촌방향 >. (그래서 이 영화의 예고편은 칼라이다) 봉준호 는 칼라로 개봉한 다음 감독판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색 보정 작업에 참여해서) 흑백으로 전환한 다음 < 마더 >를 (다소 제한적인 방식으로) 다시 상영하였다. 일부 극장에서 102번째 영화 < 화장 >을 흑백으로 변환하여 상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보지 못했다. 임권택 자신은 이 영화의 최종판은 칼라이며 흑백 버전의 <화장>에 대해서 “상업적인 이유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럴 수도 있는” 판본이라고 불렀다. 이 말의 무심함. <요화 장희빈> 한복의 색채 <요리사, 도둑,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 공간에 물드는 의상 그걸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 요화 장희빈 >은 누구라도 보자마자 그 색채감각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여기서 세트 미술의 도움 없이 오로지 한복의 색채만을 활용하여 영화 전체를 마치 붓으로 채색하는 것처럼 그려낸다. 이 말을 단지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의상이 회화와 다른 점은 그것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동선을 따라 화면 안을 자유로이 이동하면서 색채의 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때 의상은 미장센의 일부이면서 종종 그로부터 독립된 어떤 존재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어떤 존재감? 그렇다. 이를테면 롤랑 바르트가 섬세하게 파리를 거니는 마담 혹은 마드모아젤을 바라보면서 의상이라는 모드에 대한 기나긴 기호학적 분석을 그려낸 예. 혹은 삐에르 부르디외가 냉정하게 펼쳐 보인 계급적 취향의 차이라는 서로 나누어진 세계. 물론 맨 위에는 프로이드가 있다. 꿈속에서 나타난 의상보다 더 분명한 흔적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형상화라는 과정. 영화가 꿈은 아니지만 욕망이 진행되는 과정, 좀 더 프로이드적인 언어로 투사되는 과정에 이르면 둘 사이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이때 의상은 2차 가공 과정의 어떤 역할을 할(수 있을)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감독들은 의상의 비밀을 처음 건드린 세대이다. 나는 지금 피터 그리너웨이의 바로크적인 의상(-미장센)을 떠올리고 있다.< 요리사, 도둑,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에서 요리사의 아내가 화장실에서 복도를 지나 자기 방을 지나친 다음 실외에 이르기까지 수평으로 이동하면서 동일한 디자인의 옷이 마치 공간의 색에 물들기라도 하듯 형형색색으로 바뀌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홍상수 는 등장인물의 옷을 그 역할을 하는 배우의 집에 가서 고른 다음 그 배우의 일상생활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서 등장인물과 배우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옷에 묻어있는 삶이라는 흔적. 취향이 보여주는 내면. 거기서 시작하는 영화. 박찬욱 은 의상을 등장인물 내면의 기하학적 조형이라고 생각한다. < 친절한 금자씨 >의 땡땡이 무늬가 있는 원피스. 마치 총에 맞아 뚫린 것 같은 구멍들. 임권택은 의상의 체계 안에 들어서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위계질서가 있고 차려야 할 격식이 있으며 종종 의상이 인물을 규정한다. 그것은 신분의 기호이며 금지와 배제로 이루어진 기호들의 집합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명령의 신호이기도 하다. 종종 임권택은 그런 다음 서로 다른 의상의 세계 사이의 충돌이 빚어내는 긴장을 즐긴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의 예. 일제강점하 가문의 성씨를 지키던 설씨 노인이 자살을 하자 그 장례식에 찾아간 일본인 다니는 예의를 표하기 위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찾아간다. 하지만 마당에 있는 모든 한국인은 흰색의 한복을 입고 있다. 흰색의 무리 속의 단 한 점의 검은 색. (< 족보 >) 승복을 입은 두 승려가 찾아가는 사창가 여인들의 과장된 노출의 의상들. (< 만다라 >) 씨받이로 들어간 소녀는 끝내 양반들의 의상을 입어보지 못한 채 아이를 임신한 다음 비밀리에 출산하고 쫓겨난다. (< 씨받이 >) <요화 장희빈>은 17세기 조선 시대 숙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27년에 걸쳐 궁궐 안에서 넘쳐나는 여인들의 정념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로 의상을 활용하고 있다. 종종 그녀들이 입은 옷은 마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창문이 된 것처럼 투명해지기조차 한다. 임권택은 그녀들이 입은 옷을 때로 그녀들의 정념에 대한 환유처럼 입히기도 하고 혹은 그녀들의 태도에 대한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교차하는 정념의 수사들. 그런 의미에서 <요화 장희빈>에서 그녀들이 입은 옷은 신분의 체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질투와 분노, 사랑과 박해, 의심과 욕심 사이에서 생겨나는 욕망과 불안을 오가면서 몸과 마음을 봉합해내는 정념의 순환 회로이기도 한다. <요화 장희빈>과 <현기증>의 녹색 여기서 장희빈은 서로 다른 수많은 여인들, 그녀를 내친 인경왕후와 그녀를 다시 받아들인 인경왕후, 인현왕후와 (연잉군을 나은) 숙빈 최씨, 그녀들을 둘러싼 왕가의 친인척 여인들, 그녀들을 받드는 서로 다른 계층의 여인들, 그 주변의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녹색의 한복을 입고 자기의 자리를 점유한다. 나는 여기서 과도하게 색채의 심리학에 의지할 생각은 없다. 대신 영화사에서 유명한 녹색을 환기시키고 싶다.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스카티 눈앞에 주디가 종탑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마들랜과 똑같은 머리 모양과 옷을 입고 마치 환생한 것처럼 나타났을 때 방을 가득 채운 녹색. 아니 차라리 넘쳐나는 것만 같은 녹색. 이 불안한 색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옮겨가면서 죽은 자가 다시 되돌아오는 것만 같은 환상을 만들어낼 때 히치콕은 영화에서 녹색이 갖는 새로운 의미를 거의 창조해내다시피 하고 있다. 물론 임권택 이 히치콕의 영향 아래 놓여있거나 혹은 <현기증>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마도) 아니다. 하지만 < 요화 장희빈 >을 보고 있으면 그저 귀여웠던 한 소녀가 어느 자리에서부터 사악하고 요염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할 때 마치 그것이 그녀가 입은 기분 나쁜 초록색의 한복에서 나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복장도착과도 같은 변신. 초록색 자체가 나쁜 기운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잘 알다시피 녹색은 평화의 상징이며 또한 생명을 지키고 환경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그린’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에서 미신을 부추기고 불길한 신령들을 불러내는 무당들에게 자주 초록색 한복을 입히는 것은 이 색채에 대해서 한국 문화 안의 고유한 코드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나는 의도적으로 마치 떠오르는 듯이 장희빈의 녹색 한복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임권택은 장희빈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한복의 색채를 체계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건 이후에도 그렇다. 임권택은 먼저 도식을 세우지만 영화 안에서 어떤 도식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종종 부분적으로 자신의 도식을 위반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오래된 예술가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임권택은 마치 그 도식이 등장인물의 생명을 위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어느 순간 예외를 마련하거나 때로는 돌발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도식을 부수기도 한다. 그래서 가까스로 도식을 찾아냈을 때 혹시 이것이 그 안에서 예외의 규칙이 아닌지 의심하도록 유도한다. 임권택의 예술에 관한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경험이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그 자신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에게 되돌아가서 그 안에서의 원리를 추론하는 이 경험의 표지들 사이에 생명이 감도는 순간을 임권택은 도식 안의 예외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거기서 장희빈이 그 요염하고도 불길한 초록색 한복을 선택했을 때 그녀의 삶 안에서 그 순간들이 이루는 예외의 도식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예외의 도식? 유혹의 전술이 전개되는 순간이라는 도식. 누구를 대상으로? 숙종을 대상으로. 무엇을 목표로? 오직 상감마마와의 침실에서의 여흥의 시간을 위하여. 그래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원자 아기씨. 좀 더 간단하게 임신. 그 임신이 안겨주게 될 자리. 우리는 조선시대가 유교의 이데올로기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문을 잇는 선이 끊어지는 것은 제사에서 죽은 조상과 대면할 때 예외 없는 불효의 세계였다는 것을 한 번 더 환기해야 한다. 이 연쇄적인 계산의 논리적인 도식.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 녹음현장 (출처: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하지만 < 요화 장희빈 >은 시각적인 드라마라기보다는 청각적인 해설의 영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아마 그건 <요화 장희빈>이 고스란히 정창화 의 < 장희빈 >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두 편의 장희빈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숙종의 재위 기간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 아니라 1961년 1월 23일에 첫 방송을 시작해서 3월 4일에 36회로 종방(終放)한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을 영화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1960년대가 라디오의 시대였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좀 더 실감나는 설명. 1970년대 거의 마지막까지 시내버스를 타면 기사들은 라디오 방송을 틀어놓고 예외 없이 라디오 드라마를 들었다. 그때 승객들은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고 마치 요즘 텔레비전 방송 드라마의 우여곡절에 전 국민이 매달리듯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장희빈>의 대본을 쓴 이서구 작가는 일제 강점하인 1920년 동아일보 창사와 함께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고 그런 다음 연극 모임인 ‘토요회’를 거쳐 라디오 방송에 입문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서구 작가는 1957년부터 라디오 드라마에 전념했고 <장희빈>이 방송되는 시간에는 “장안의 길거리가 텅 비었고 특히 목욕탕 여탕은 말할 것도 없이 마찬가지로 텅텅 비었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성우들은 지금의 탤런트들에 비교할만한 인기를 모았다. <장희빈>은 미처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영화사가 판권을 샀고 정창화가 그 대본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었다. 또 다른 이서구 작가의 사극 라디오 드라마 <강화도령>은 1963년에 동명의 제목으로 신상옥 이 영화로 찍었다. <장희빈>은 단지 드라마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주제가도 1960년대 가요의 고전으로 남았다. 이서구 작가가 작사를 하고 전오승이 작곡한 <장희빈>은 그 당시 ‘꾀꼬리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황금심이 불러서 “이 노래를 듣기 위하여 드라마 시간을 기다리는 애청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잠시 멈춘 다음 당신께서 YOU를 검색하셔서 음미하듯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먼저 읽어주시기 바란다. <요화 장희빈>에는 이 노래가 거의 갑자기 기습하듯이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흐른다. 조선 시대 사극에 덮어씌운 그 시절 엔카(演歌) 풍의 대중가요. “구중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아, 님도 잃은 그 날 밤이 치마 그리워 치마폭에 목메는가, 대전마마 뫼시던 날에 칠보단장 화사하던 장희빈아, 칠보단장 푸른 한에 흐느껴서 화관마저 떨리는가” 아마 임권택 도 이 방송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라디오 드라마가 영화화된 영화의 조감독을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되던 1961년의 언저리가 아니라 그로부터 7년 후인 1968년에 다시 만들면서 왜 라디오 드라마를 참조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런 설명이 가능하긴 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칼라영화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과정에서 성공한 흑백영화를 다시 칼라영화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상업적 모델이 되었다. 그때 대중들은 리메이크를 새로운 영화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성공한 영화의 반복을 자신의 선택에 대한 만족의 보증이라고 여겼다. 물론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한 영화가 자신을 만족시킬 것이라는 바보 같은 공식은 지금도 작동되고 있는 대중적 신화이기는 하다. 이 모델은 거의 무차별적으로 대입되었다. 심지어 김기영 조차 흑백영화 < 하녀 >를 칼라영화 < 화녀 >로 다시 찍었다. 임권택은 단지 장희빈을 소재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 요화 장희빈 >이 라디오 드라마이기라도 한 것처럼 진행시켜 나간다. 여기서 영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장희빈이나 숙종이 아니라 영화 바깥의 목소리(voice_over_narration)이다. 물론 그때 한국영화에서 보이스 오버의 방식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종종 나태하다고 느낄 정도로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방법이 다르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후일 임권택이 영화의 시청각 기호 위에 문자를 더하면서 자막을 입히는 방법으로 발전하게 되는 초기 이전(primitive)의 모델을 떠오르게 만든다. 여기서 그 목소리는 마치 변사처럼 영화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설명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그 목소리는 (다소 따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야기 구석구석을 내려다보는 대타자의 음성이다. 말하자면 극영화에서 집행되는 다큐멘터리에서의 (빌 니콜스의 구분에 따르면) 신의 목소리로서의 방법. 하지만 내 귀를 붙잡은 순간은 그 목소리가 종종 영화의 감정을 연기하기 시작할 때이다. 그 목소리는 영화를 설명하다 말고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음모에 떨어질 때 영화를 보는 나를 앞질러, 혹은 대신하여, 탄식하기도 하고 숙종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분노를 하며 줄거리의 윤곽을 설명해야 할 순간에 스스로 감정을 대리하는 영화 안의 또 다른 영화적 존재가 된다. 이때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목소리가 단지 주인의 역할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화 자신이 몸이 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안의 몸들을 대신하는 영화라는 몸. 영화의 기호들에 부여하는 뼈와 살, 무엇보다도 감흥을 불러내는 자율적인 장치. 그 안에서 영화가 스스로 느껴보기 시작한다. <요화 장희빈>의 신기한 변화는 거기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마치 그 목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영화의 시청각 기호들이 불응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중하게 불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누군가는 눈치챘겠지만 나는 이 개념적 표현을 노엘 버치에게서 빌려왔다. 버치는 영화에서 어느 순간 왜 단순한 화면에서 등장인물에게 쇼트의 방법론이 매개변수가 되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리듬을 가지려 할 때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가, 라고 질문하고 있다. 버치는 그 대답을 오즈에게서 가져온다. 영화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그사이에 영화를 바라보는 것과 영화가 바라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영화를 바라보는 과정을 관성에 내맡긴 채 영화가 바라보는 과정에 감흥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 말의 망설임.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 요화 장희빈 >은 제목과 달리 장희빈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래서 이 영화가 몹시 산만하게 느껴진다. 사료에도 장희빈의 출생 신분이 불명료하지만(그녀가 노비 출신인지, 아니면 몰락한 양반집 규수인지, 혹은 다른 자료에 따르면 중상인의 자제라고도 되어있든가 하지만) <요화 장희빈>은 조선왕조실록을 옮긴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희빈이 궁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장희빈의 모친 폐비 윤씨의 집으로 이야기가 찾아갈 때 그녀가 자란 환경을 어렴풋하게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근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조선 시대라는 생활조건의 외양 안에 감추어진 삶의 과정을 가늠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의 근거를 뒤로하고 드라마의 관점에서만 접근해도 장희빈의 배경을 지운 것은 그녀가 궁궐 안에서 경쟁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도약을 시도하는 그녀의 욕망의 힘을 끌어낸 증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임권택 은 마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점적인 왕후의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장희빈의 유일한 임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과정에 어떤 의심도 품지 않는다. 이 사태를 단순하게 공격하기 어려운 것은 종종 임권택이 장희빈을 주인공이 아니라는 듯이 제쳐놓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건 처음부터 그렇다. 이야기는 숙종이 아직 세자였던 시절에서 시작하면서 마치 그를 따라 진행할 것처럼 이어진다. 장희빈은 이야기에 삽입되는 방식으로 갑자기 등장하고 난 다음 이야기의 중심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그녀가 항상 이야기의 중심을 점거하는 것도 아니다. 장희빈은 궁궐 바깥으로 두 번 쫓겨나는데 심지어 그녀가 첫 번째 쫓겨났을 때는 마치 영화가 잠시 동안 그녀를 잊은 것처럼 진행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장희빈이 다시 궁궐에 돌아왔을 때 그녀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어진 인현왕후는 숙종이 장희빈을 잊지 못하자 주변의 우려를 모두 물리치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때 임권택은 다시 장희빈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희빈을 다시 불러들인 사실을 숨기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부디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한다. 영문을 모르는 숙종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한다. 물론 우리들은 인현왕후가 몹시 위험하게도 장희빈을 다시 궁궐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눈치챈다. 여기서 임권택은 마치 장희빈이 처음 등장하는 것처럼 진행한다. 인현왕후는 숙종을 모시고 내실로 인도하고 거기서 장희빈과 다시 해후하는 자리를 만든다. 인현왕후는 영화가 거의 절반에 이르렀을 때 처음 등장했고 그녀가 한 첫 번째 역할은 숙종과 장희빈을 다시 만나게 하는 시나리오 안의 기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숙종과 장희빈이 다시 해후하는 자리를 만들고 인현왕후가 다시 바깥으로 나갈 때 카메라는 그녀와 함께 문 바깥으로 나간다. 두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 첫째, 그렇게 되면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둘째, 순간적으로 여기서 임권택은 주인공을 바꿔치고 있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 영화가 <요화 장희빈>이 아니라 <인현왕후>이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동선을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짠 다음 거기에 감정선을 더한다. 그런 다음 숙종과 장희빈이 포옹을 할 때 인현왕후는 여기까지 행한 그녀의 선의와 상관없이 창문 바깥에서 그걸 흘낏 바라본 다음 차마 더 이상 마주 보지 못한 채 외면을 하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벽에 기대어 슬픔에 가득 차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핵심은 이 장면의 심리적인 설명이 아니다. 이 장면이 어떤 전환점으로 작용하면서 이제부터 영화는 인현왕후가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 자리를 둘러싸고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분주하게 나타나고 퇴장한 다음 다시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혹은 새로 나타났을 때는 중심으로부터 주변에 옮겨간 다음 제 할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누구라도 당황하게 될 만한 순간과 마주치게 된다. 숙종에게는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경종 이외에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연잉군이라는 아들이 있다. < 요화 장희빈 >은 숙빈 최씨의 잉태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임권택 이 숙빈 최씨를 인물들 사이의 원근법을 통해서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은 단순하게 수평으로 옮겨가는 대신 마치 층위를 오르내리며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면서 틈새 사이를 돌아다닌다. 이때 숙빈 최씨의 행위소를 작동시키는 원리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숙빈 최씨의 행위는 항상 수동적 상황 안에서 능동적으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숙빈 최씨에 관해서만 화면 바깥의 그 목소리를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장희빈이 숙빈 최씨를 야단치는 장면 앙갚음을 하듯 숙빈 최씨가 장희빈 뺨을 때리는 장면 여기에 좀 더 디테일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좀 전에 말한 누구라도 당황할만한 장면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숙빈 최씨는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지만 단지 눈에 띄는 무수리 중의 한 명, 아니 오히려 무수리 전부를 대신하는 환유적 기능처럼 보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별달리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임권택 은 무수리들을 집합으로 만든 다음 이동시키거나 아니면 배경에 보이는 미장센의 일부로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중의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등장인물 곁에 다가온 다음 다시 멀어지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고 숙빈 최씨는 처음에는 정확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말하자면 시나리오 작법에서 말하는 중심을 이루는 혹성들을 배치한 다음 그 주변을 떠돌거나 오가는 위성들의 운동감. 첫 번째 등장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장희빈이 숙종과 합궁을 한 다음 지위가 올라가자 궁궐에서 과장되게 자신을 과시하면서 걸어갈 때 숙빈 최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간다. 장희빈은 그녀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면서 지나친 숙빈 최씨를 다시 불러 세워놓고 야단을 친다. 이 장면은 방점이 숙빈 최씨에 있지 않고 장희빈에 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힘을 통제하는 데 실패하는 사례의 장면처럼 보인다. 이 신을 주변으로 그녀는 심지어 숙종 앞에서마저 안하무인격인 무례한 태도를 내보이고 함부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숙빈 최씨는 여기서 희생의 사례처럼 지나쳐간다. 하지만 장희빈이 그 방자함으로 인경왕후에게 쫓겨날 때 숙빈 최씨는 궁궐 대문 앞까지 따라와 마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몇 차례이고 모질게 장희빈의 뺨을 때린다. 단지 여기서는 부채를 갚는다거나 균형을 맞춘다는 구성상의 계산 이상으로 누구라도 약간 멈칫할 만큼 폭력적이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게 과잉 하는 힘 앞에서 어리둥절해진다. 게다가 이 순간에 황금심의 주제가까지 흘러나오기 때문에 이 영화가 장희빈을 대하는 갑작스러운 동정심에 대해서조차 무언가 잘 조절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숙종과 인현황후의 생일상을 마련한 숙빈 최씨 임권택 의 계산은 거기에 있지 않다. 장희빈이 다시 궁궐로 돌아왔을 때 숙빈 최씨는 마치 그녀의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그녀가 다시 되돌아오는 순간은 숙종이 장희빈의 계략에 넘어가 인현왕후를 사가로 내친 다음 신하들의 이에 관한 간절한 읍소를 물리치고 다시 더 세월이 지나 백성들의 뜻을 알고자 미복을 하고 잠행을 나갔다가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후회를 시작하는 대목이다. 종종 숙종은 야심한 밤에 궁궐 안을 산책하는데 대비마마 거처에서 우연히 만난 장희빈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한밤중 창경궁의 연못 앞에서이다. 그러므로 숙종의 한밤중 산책은 이상하지 않다. 그날 밤도 숙종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궁궐을 떠도는데 우연히 숙빈 최씨의 방 앞에서 멈춘다. 숙빈 최씨가 한밤중에 조촐한 생일상을 마련하고 절을 올리고 있어 연유를 묻자 오늘이 인현왕후의 생일이라 궁 안에 계시지는 않지만 모시는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있다고 아뢴다. 숙종은 참으로 갸륵한 마음씨로구나, 라며 어디 네 이야기를 들어보자, 라고 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 방에 들어서기 전에 숙빈 최씨는 이미 앞질러 상감마마를 뫼실 곳이 아니오니 자신이 마당에 나가 인사를 드리겠다고 몇 번이고 말하지만 숙종은 매번 그 청을 거절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중의 거절. 주고받는 거절. 두 거절 사이에 놓인 불균형한 힘의 관계. 이 신에 이를 때까지 숙종은 숙빈 최씨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가 여기서 이렇게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아니, 차라리 방안에 들어설 때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신은 영화의 경제학에서 완전히 낭비된다. 임권택은 영화에서 중복을 허용하지 않는 영화감독이다. 나는 이미 이 신이 누구라도 당황할만한 순간, 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둘 사이의 음란한 충돌이 있다. 하나는 영화 바깥에서 온 것이다. 봉건 군주제에서 왕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 말의 방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에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말의 안에는 해서는 안 된다, 의 경계가 법이 아니라 도덕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 안에서 온 것이다. 숙종은 이미 인경왕후라는 공식적인 왕비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장희빈을 또 다른 애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는 이런 사랑의 공식이 통속적인 궁중 연애풍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다. 문제는 그것이 놓여있는 자리에 있다. 지금 숙종은 애정의 대상이었던 장희빈과의 관계가 역전되어 자기 자신이 애정의 대상이 된 다음 그녀의 요구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을 받는 중이다. 우리는 계산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숙종의 고통은 착한 인현왕후를 내쫓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의 자리에 있던 숙종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그 자리로 인하여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한 다음 그것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임권택은 고통받는 숙종을 등 떠밀어 숙빈 최씨의 방 앞까지 보낸다. 방에 들어선 숙종은 문득 생각난 듯 숙빈 최씨를 바라본다. 숙빈 최씨는 그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본다. 물론 우리들도 거의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쇼트의 위치와 배우의 연기, 그리고 프레임의 크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일부러 둘 사이의 간격을 벌려 놓았다. ‘알아본다’, 와 ‘모를 수가 없다’, 의 차이. 이때 도덕적 주체였던 숙종은 갑자기 욕망의 주체에로 옮겨간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넘어갈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떠오른다. 물론 한 명은 궁궐 바깥에서 장희빈으로부터 핍박을 넘어서서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인현왕후이다. 숙종은 지금 둘 사이에서 고통받으면서 이제 이 관계를 셋으로 다시 하나를 추가하는 중이다. 인현왕후는 정말 견딜 수 있을까? 다시 하나가 더해지면 그녀는 돌아올 수 있을까? 둘 더하기 하나. 이때 무언가 인현왕후의 자리가 단지 좁아진다기보다는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중요한 논점이 숨어있다. 인현왕후는 단 한 번도 숙종에게 욕망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다. 나는 역사적인 사료를 뒤로하고 오로지 드라마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는 중이다. 다른 한 사람은 장희빈이다. 숙빈 최씨와의 새로운 관계는 정확하게 장희빈과의 관계의 반복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장희빈이 궁궐 바깥으로 쫓겨나갈 때 숙빈 최씨가 쫓아 나와 그녀의 뺨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몇 번이고 때리는 장면을 보았다. 숙빈 최씨가 다시 추가로 셈에 더해질 때 문득 장희빈이 둘이 되는 상황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숙종은 그걸 계산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왕의 자리는 그 계산 바깥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숙종이 숙빈 최씨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 때 상황이 해결되기는커녕 완전히 새로운 상황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은 다음 그녀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내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임권택 은 그런 선택을 보여주어야만 했던 것일까. 상투적인 대답. 숙빈 최씨는 임신을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장희빈은 그녀를 문초하던 중 갑자기 방문한 숙종의 면전 앞에서 그 장면을 보여주게 되고 결국 인현왕후를 다시 궁궐로 부르고 장희빈을 궐 바깥으로 쫓아내는 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이다. 즉각적인 반문. 숙종의 결정이 ‘못된’ 장희빈을 목격하고 ‘착한’ 인현왕후가 음모에 빠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그 어떤 순간도 이 장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지 숙종이 본 것은 자신이 새롭게 총애한 숙빈 최씨의 웃저고리가 벗겨진 채 매질을 당하고 있는 광경뿐이다. 그건 인현왕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장면이다. 임권택의 계산. 여기서 숙종은 비로소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신과 도덕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일치시킨다. 그것이 마치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그 자리에서 왕으로서의 명령을 내리고 모든 사태를 원상복귀 시키려 든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숙종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여기서 임권택은 단지 숙종을 도덕적 주체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덕? 어떤 도덕?) 욕망의 주체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장면 전체를 음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음란하게? 그렇다. 장희빈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노와 질투의 감정은 오로지 그 두 사람이 숙종의 애정을,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숙종의 성기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몸을 사이에 둔 이 무서운 경쟁. 이때 숙종은 여기서 도덕적 주체가 되기 위해 타자의 편에 서서(타자? 도대체 누구?) 타자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나는 여기서 짓궂은 가정을 하고 싶어진다. 만일 장희빈이 인현왕후만 돌아오지 않으면 괜찮다는 정치적 계산을 한 다음 숙종에게 자신과 숙빈 최씨가 숙종의 몸을 공유하기를 허락한 다음 그저 둘 사이에서만 오가기를 제안한다면 숙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때 인현왕후의 자리는 어디인가? 물론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때 임권택의 계산은 왕의 사랑이란 얼마나 역겨운 것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숙종은 욕망의 주체로서 자기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리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다소 음산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되찾은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임권택 이 주인공 없는 이야기, 아니 차라리 중심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요화 장희빈 >은 분명히 정의가 회복되고 모든 일은 사필귀정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대중들의 요구일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이 정의의 몫을 숙종에게 안겨줄 생각이 없다. 거의 이야기의 오점처럼 작동하는 숙빈 최씨의 임신. 임권택은 역사의 사료를 끌어들이는 척하면서 숙종이 권력을 통하여 자신의 주체를 되찾는 과정을 마치 오작동처럼 취급하고 있다. <요화 장희빈>은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권력의 사필귀정에 대한 부정이 있다. 임권택은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제 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만들면서 이야기의 주체를 텅 빈 상태로 내버려 둔다. 아니, 정확하게 그 자리에는 몸이 없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몸이 없기 때문에 영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그저 바깥에서 떠돌 뿐이다. 대타자라는 그 무기력한 시선. 임권택에게 그 자리는 언제나 수수방관할 따름이다. 어쩌면 그 목소리의 주인보다 더 이 영화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이는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말의 반복. 없는 것과 마찬가지. 역사에서 알고 있는 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임권택에게 역사의 주인이란 없다. 아마도 그것이 <요화 장희빈>을 라디오 드라마처럼 진행시킨 진정한 이유일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 앞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는 영화가 없다. 하지만... (계속) 1968년 9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한국영화주식회사 각본 장천호 촬영 안윤혁 조명 정덕규 편집 김희수 음악 김용환 남정임 신성일 태현실
목소리의 시대가 있었다. 라디오 드라마는 물론 영화 속 여배우들의 후시녹음, 문화영화의 내레이션 때로는 방송 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고은정 선생일 것이다. 2009년 진행한 고은정 선생의 채록문을 보면 1950년대 인기 있는 라디오 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 조차 영화 < 피아골 >( 이강천 , 1955)의 후시녹음 때, 당시 인기가 높았던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청실홍실>(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 1956)의 전후파 여성 동숙(정은숙 연기)을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고 하니 라디오 드라마와 성우들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던 셈이다. 고은정 은 1954년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극회원 1기로 이력을 시작했다. 참고로 1947년과 48년에 1, 2기로 장민호 , 민구, 최무룡 , 윤일봉 , 이혜경 등이 선발되었으나 후에 모두 특기로 구분하고 있다. 연기자 정체성이 전면에 드러났던 당대 성우들은 연극적 소양 또한 비중 있게 다뤄졌다. 학창 시절 인기였던 대학연극경연대회에서의 열띤 경합이나 성우들이 정기적으로 올렸던 연극 공연에 대한 회고, 그리고 아나운서로 잠시 활동했지만 연기에 대한 갈증 때문에 이내 성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연기력이 성우 활동의 바탕이 됨을 잘 말해준다. 고은정 선생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57년 < 산 넘어 바다 건너 >(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에서 상해에서 돌아온 30대 마담, 상하이 가에리 미라 역을 맡으면서다. 매일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습한 끝에 득음한 듯 귀가 트여 본인의 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즈음이다. 이어서 < 동심초 >(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의 경희, < 장희빈 >(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8)을 맡으며 대표적인 성우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인기 라디오 드라마가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기 고은정 선생은 영화 < 동심초 >( 신상옥 , 1959)에서 엄앵란 의 목소리를 더빙하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20대 여대생 경희의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이후 엄앵란의 목소리는 고은정 선생이 도맡아 하는데 이밖에도 김지미 , 문희 , 윤정희 , 남정임 , 정윤희 , 안인숙 까지 당대 내로라할 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는 모두 고은정 선생 차지였다. 성우들의 후시녹음 관행은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과거 한국영화계는 판권을 미리 파는 입도선매로 제작되었는데 입도선매의 전제가 특정 배우들의 출연이었고 이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유발했다. 겹치기 출연을 위해선 빠른 제작 속도가 관건이었다. 다른 작품의 세트에 앉아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불려 다니다보니 배우들이 대사를 외우거나 연기에 몰입할 시간은 당연히 부족했다. 이 때문에 후시녹음은 성우가 배우의 목소리를 입히는 작업이기보다는 촬영 현장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배우들이 못다 한 연기를 마무리해주는 작업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여배우의 표정에 속칭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쏟게 해달라는 요구를 들어줘야 했고 대사가 틀린 채 어영부영 넘어가는 입 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후시녹음된 영화에서 인물이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배우의 입 모양이 대사와 맞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 때로 촬영분의 부족으로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을 때면 컷이 바뀐 뒤에도 웃음소리를 유지해 연결을 맞춰주기도 했다. 후시녹음은 실로 성우들의 인공호흡으로 마지막 순간에 영화를 살려내는 과정이었다. 한국영화 제작 관행에 가려진 성우들의 ‘목소리’ 후시녹음이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는 기술적인 제약과 더불어,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으로 단련된 성우들의 더빙 능력이 보여준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결과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다는 비난은 성우들이 더빙을 탁월하게 잘해주었다는 말의 역설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더빙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 과 엄앵란 , 이창환 과 신성일 등 성우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디트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 있지 않다. 한국영화 제작 관행의 특수성을, 영화의 완성을 인증하는 크레디트라는 공적 영역에서 부정해온 이 같은 ‘없음’의 증거를 다층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 구술 채록의 후반작업일 것이다. 고은정 선생은1977년 MBC라디오 각본 공모에 당선되며 이후 방송작가로도 활동했고 < 위기의 여자 >( 정지영 , 1987)의 시나리오를 쓴 바 있다. 현재까지 서울예술대학 방송영상과 초빙교수로 후학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고은정 선생의 구술 채록문에는 1950년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방송과 영화계의 생생한 경험뿐 아니라 학도의용군 예술대원 생활과 부산, 대구, 제주도를 거친 고단한 피난생활을 문학소녀의 모험기로 도치시킨 6?25전쟁기의 이야기 또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