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
- 감독
- 김용삼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고유준, 김용삼, 박지원, 곽민규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2월 2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를 오픈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2월 2일. KMDb는 2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KMDb를 기획·구축하며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누군가 ‘무비씨’라는 이름을 제안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억나고,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가를 따라 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판단해 KMDb로 지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은 kmdb.or.kr 도메인을 구매했다. KMDb에는 20년간 생겼다 없어진 콘텐츠와 기능이 많다. 초기에는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도 상당했으나 생각보다 양질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어려워 하나둘 폐기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전용 KMDb를 따로 만들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통합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한 기능과 콘텐츠로 운영하는 중이다. KMDb를 준비하며 호기롭게 “풀 크레딧을 가지고 갑시다!”라는 (제안을 내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 정책을 시작하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KMDb는 영화·영화인 DB 서비스뿐 아니라 VOD로 한국고전영화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영화글로 다양한 필자의 글을 소개했으며 리스트와 컬렉션이 순차적으로 오픈해 지금에 이르렀다. 2006년 2월 1일. 오픈 전날 디지털정보화팀의 담당 세 명은 그제야 동명이인에 대한 이슈를 발견하는 사고를 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정유미 배우가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명이래! 라는 비명을 한밤중에 지르며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인물을 분리하며 밤을 지새다 퇴근해 다음 날 오픈시켰다. 그리고 그 동명이인 이슈는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할 수가 없다. IMDb도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슈를 KMDb 라고 별수 있겠는가. IMDb 매니저는 이름이 짧은 한국 인명으로 동명이인에 대한 고충이 더 심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성명이 “정유미”인 배우 3인에 대한 KMDb 영화인 정보 KMDb는 영화·영화인 데이터의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제는 영화인이 자신의 필모를 증빙하기 위한 웹사이트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KMDb에 쌓인 데이터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사용자들도 궁금해할까? KMDb 20주년 이벤트를 근사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로 가득한 사이트의 20년 묵은 통계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축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지난 20년의 통계 10선을 소개한다. 1.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극·비극) 의 수: 50,787편 2.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인 의 수: 83,279명 3. 가장 많이 접근된 영화인 페이지 정윤희(1위), 임권택(2위), 신성일(3위) / 사진: 전승열, 정기성 1위 | 정윤희 2위 | 임권택 3위 | 신성일 4위 | 김기영 5위 | 이상사 6위 | 김지미 7위 | 박노식 8위 | 김진규 9위 | 신상옥 10위 | 안성기 4. 작품 리스트(필모그라피) 가 가장 많은 영화인 1위 | 현동춘 | 편집 | 994편 2위 | 김희수 | 편집 | 863편 3위 | 최형래 | 음향효과 | 850편 4위 | 손인호 | 음향효과 | 793편 5위 | 김기범 | 배우 | 753편 6위 | 허장강 | 배우 | 687편 7위 | 임해림 | 배우 | 660편 8위 | 김재경 | 음향효과 | 657편 9위 | 윤일주 | 배우 | 650편 10위 | 최남현 | 배우 | 609편 5. 한 작품(장편영화)에 가장 많은 크레딧 을 올린 영화인 1위 | 노영석 | THE 자연인 (노영석, 2023) | 17개 공동 2위 | 박용철 | 싸이더:애,심 (박용철, 2019) | 16개 공동 2위 | 준오 | 휴게소 (준오, 2016) | 16개 ※ 노영석 감독은 <THE 자연인>에서 감독, 각본, 출연, 프로듀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미술, 의상, 동시녹음, 사운드(음향), 시각효과, 색보정, 예고편, 포스터, 기타스탭(캘리그라피)을 담당함. 6. 참여 스태프 가 가장 많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1위) 1위 | 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2022) | 1,665명 2위 | 백두산 (이해준, 김병서, 2019) | 1,612명 3위 | 안시성 (김광식, 2018) | 1,502명 4위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 | 1,492명 5위 | 신과 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 | 1,487명 7. 상 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 1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58회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45회 3위 | 추격자 (나홍진, 2007) | 41회 4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40회 공동 5위 | 괴물 (봉준호, 2006) | 31회 공동 5위 | 벌새 (김보라, 2018) | 31회 ※ KMDb에서 관리하는 영화제·시상식에 한함 8. 리스트에서 본 영화로 가장 많이 체크된 작품 <올드보이>(1위), <괴물>(2위), <기생충>(3위) / 사진: 디씨어터 1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2,581명 2위 | 괴물 (봉준호, 2006) | 2,355명 3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2,178명 4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2,055명 5위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 1,672명 6위 | 아가씨 (박찬욱, 2016) | 1,648명 7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 1,574명 8위 | 마더 (봉준호, 2009) | 1,533명 9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1,515명 10위 |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 1,438명 ※ 박찬욱 감독 작품 4편, 봉준호 감독 작품 4편 9. 리스트에 본 영화 체크를 가장 많이 한 사용자 1위 | bo**** | 2,076편 2위 | ha**** | 1,865편 3위 | gs**** | 1,747편 4위 | ba**** | 1,696편 5위 | in**** | 1,636편 ※ ****는 ID의 글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10. 가장 많은 조회수의 영화글 1위 | “ [시네필 안내서]서문: 시네필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당신에게 ” (영화천국 Vol.48) | 정성일 | 91,634회 사실 진정한 20주년 이벤트라면 올해 KMDb가 전면 개편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하지만 어찌 됐든 2026년 말 새로운 KMDb가 문을 열 것이다. 오랜 KMDb 관여자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20년이 지난 이젠 누구나 KMDb를 KMDb(b를 소문자)로 써주길 바란다는 것 정도. 소박한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고(故) 이강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보라>는 제조공장에서 현장보건관리를 받는 과정을 차근차근 기록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은 3개월에 한 번씩 보건관리를 받도록 되어 있다. 영화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관점을 따라가기보다는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병원>(1970), <내셔널 갤러리>(2014), <시티홀>(2020) 등을 만든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처럼 시스템이 굴러가는 과정을 일정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인터뷰 장면이 서너 차례 등장하지만 제작진이 직접적으로 사건에 참여하거나 등장인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상황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스타일적으로도 거의 모든 장면에서 롱쇼트나 풀쇼트를 유지한다. 시스템에 관계하는 인간과 비인간 요소 모두를 고르게 관찰하려는, 휴머니즘적이지 않은 태도는 역설적으로 노동 시스템과 그 속에서 만들어진 인간의 삶의 고통을 지근거리에서 감각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 거리는 피부 위의 보라색 멍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 기법적인 클로즈업은 사용되지 않지만 시스템 내부와 고통의 지속시간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비유적 혹은 사후적 클로즈업을 체험하게 된다. 시스템 관찰은 당연하게도 관리 및 운영 체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다양한 역할과 위치의 사람들을 포함한다. 노동자, 안전보건을 담당하는 회사 관리직과 사원, 산업의학 전문의와 연구자, 산업안전보건감독관, 노조활동가, 관련 부서 행정 공무원 등이 그들이다. 영화는 사이사이에 1980년대 초에 석면을 다루는 공장에서 단 2년 일했을 뿐인데도 그 여파로 평생 폐병을 앓고 있는 나이 든 노동자의 인터뷰와 한국산업안전공단에서 주관한 한국타이어공장 역학조사 보고회를 삽입한다. 짧은 인터뷰에도 숨 쉬기 어려워하는 석면공장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 사망사례와 공장의 유해환경 간에는 연관성이 없다고 발표하는 보고회의 배치는 인과적이고 논리적인 설명 없이도 산업재해를 증명하고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석면처럼 오래전에는 그 유해성이 대중에게 밝혀지지 않거나 난청이나 근골격계 통증처럼 장기간에 걸쳐 유해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병증의 문제가 있다. 노동은 반복과 지속시간 속에 있는 것이기에 산업보건관리는 제조과정뿐 아니라 그의 일상과 일생을 심도 있게 추적관찰 해야 한다. 술과 담배는 강도 높은 긴 시간의 노동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현실은 그저 몇 개의 문답으로 끝난다. 보건관리 전문의가 작업현장에서 노동 패턴과 유해환경을 관찰하며 애쓰지만 하루 몇 시간 관찰로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이강현 감독은 공장 전경을 보여줄 때는 롱쇼트로, 안전보건 감독관과 보건관리 전문의들이 노동자들에게 질문을 던질 때는 풀쇼트나 미디엄 쇼트로 거리를 두고 다큐멘터리를 진행한다. 심지어 철골이 노출되어 있는 공장은 때로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게 포착되기도 한다. 거기에 고통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노동자들은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 기법적인 클로즈업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청각적인 클로즈업이 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즉흥적으로 붐마이크와 휴대용 녹음기를 들이댔던 전형적인 미국 다이렉트 시네마의 장면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산업현장에서 대화를 나눌 때면 붐마이크가 한 프레임 안에 늘 등장하곤 한다. 등장인물들은 무선 마이크를 차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붐마이크를 사용해 상황의 대화를 포착한다. 그로 인해 어떤 상황에서도 갑자기 대화가 진행되어도 매우 선명하게 들린다. 공장의 소음들과 함께. 대부분의 경우 롱쇼트로 멀리서 포착하기 때문에 붐마이크가 보일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이를 애써 치우거나 지우지 않는다. 노동자들과 산업관리 감독관이 나누는 대화, 관리직원과 보건 전문의가 나누는 대화들은 시스템을 돌아가게 만드는 행위자들이지만 또한 그것에 제약받는 이들임을 알게 해준다. 청각적 클로즈업뿐 아니라 친밀성에 있어서도 영화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클로즈업을 시도한다. 그것은 바로 경험에 대한 경험이다. 영화 중반 즈음에 노동자들이 보건관리를 위해 검사받는 자신들의 장면을 촬영한 영상을 강당에서 함께 감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노동자들은 관객으로서 영화화된 자신의 신체를 경험한다. 여기서 관객은 이미 앞서 해당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프레임 안의 프레임으로서 반복해서 이 장면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장면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관객으로 경험하는 것을 함께 보게 된다. 따라서 이 장면은 경험에 대한 경험이다. 영화 속 스크린에서 난청이 있는 노동자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의사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 “올 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의사가 묻자 나이든 노동자는 “으응, 소주 두 병 정도 먹지”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에서 당사자를 비롯해 다른 노동자들은 자지러지게 웃는다. 사실 정보 차원에서 이 장면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장면이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도 당사자에게도 반복이다. 관객은 이미 앞서 본 장면이고, 당사자들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이 행한 것을 스크린 상에서 재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어떤 면에서 모든 영화 상영은 곧 ‘재연(re-enactment)’이며, 더 중요하게는 자신들의 신체가 어떻게 영화의 질료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한다. 붐마이크의 지속적 등장이 영화 만들기라는 노동을 각인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여러 영화사의 중요한 운동들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신체와 일상을 영화의 질료로 내어준 오데사, 키이우, 하르키우, 모스크바의 시민들을 영화 생산과정에서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오프닝과 엔딩에 관객과 극장상영 과정 자체를 포함시킨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1929)의 실천 그리고 그러한 마르크스주의적 영화운동을 계승했던 제3 영화운동의 순간들 말이다. 특히 제3 영화 운동이 일어났던 1970년대 쿠바에서 훌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자(Julio García Espinosa)는 ‘미완의 영화(imperfect cinema)’를 주장한 바 있다. 1960년대 탈식민적인 정치적 영화를 주장했던 남미의 영화감독과 이론가들은 형식적으로 보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제1 영화로, 미학적으로 혁신적이고 계급의식을 갖고 있지만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던 유럽 영화를 제2 영화로, 탈식민적인 계급의식을 갖고 미학적 혁신을 꿈꾸는 영화를 제3 영화로 규정한다. 제3 영화의 변증법적인 실천 개념 중 하나로 주장된 ‘미완의 영화’는 텍스트 내적으로 완결되지 않는 영화를 뜻한다. 형식적으로든 서사적으로든 열려있는 영화는 언제나 상영과 그 이후의 토론을 통해 ‘매번’ 완성된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언제나 과정 중에 있다. 각기 다른 관객들은 동일한 영화를 매번 다르게 감상한다. 재연이 기원을 보존하려 하지만 동시에 반복을 통해 그 기원의 완벽한 보존이 불가능함을 제시하며 반복된 수행의 단독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미완의 영화’ 개념에서 영화 상영은 매순간 반복될 때마다 참여자들이 그 상영의 의미를 결정짓고 따라서 반복된 상영은 단독성을 갖고 개별적 사건으로 의미화 된다. 독립영화 혹은 작은 영화라는 개념으로 범주화되었던 한국의 정치적 다큐멘터리는 제3 영화의 선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제작되었던 정치적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되었고, 관객 역시 노동자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이었다. 대중을 타겟 관객으로 할 때조차도 일차적으로 영화를 시사하고 그 영화의 가치를 의미화하는 이들은 노동자 당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와 신체를 화면에서 보는 것이 익숙했다.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대부분 자신을 활동가의 위치에 놓았고, 자신들이 스크린에 옮긴 이미지의 주체를 영화생산자-관객의 위치에서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 윤리적 태도라 믿었다. <보라>에서 약 50초 동안 지속되는 이 롱테이크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이제는 노동 현장을 다룬 많은 다큐멘터리들 역시 노동자 공동체에게만 소구되는 것을 넘어 일반 대중으로 관객층을 확장하고자 한다. 다큐멘터리가 화이트박스라 불리는 미술관 같은 극장 외의 다른 플랫폼에서 상영되면서 새로운 관객층이 형성되고 있다. 한편, 과거에 영상을 함께 공동제작하고 감상했던 노동자들의 공동체 혹은 노동조합은 예전만큼 공고하지 못하다. 그러한 가운데 삽입된 이 장면은 과거 노동 현장을 다룬 한국의 정치적 다큐멘터리들이 주요하게 상영되던 방식을 재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장면은 한국 노동 다큐멘터리 영화의 역사쓰기이자 관객층 변화에 대한 논평이 된다. 이 장면은 또한 개인적으로 고전 할리우드 영화인 < 설리반의 여행 >(프레스턴 스터지스, 1941)의 유명한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영화에 대한 영화인 <설리반의 여행>에서 유명한 코미디 영화감독인 존 설리반은 자신의 영화경력을 반성하며 가벼운 코미디보다는 현 시대를 보여주는 사실적인 민중의 모습을 그린 영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떠돌이로 위장해 가난을 체험하려 하지만 줄곧 실패한다. 그러다 신분증을 빼앗기고 싸움에 휘말려 법정에서 6년의 중노동을 구형받는다. 그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하층민이 된다. 설리반은 강제 수용소에서 죄수들을 위한 영화 상영회에 참석하고, 수감자들이 고된 노동 후 디즈니 만화 <장난기 많은 플루토>(1934)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깨달음을 얻은 설리반은 우여곡절 끝에 영화감독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코미디를 만들며 꿈의 공장인 고전 할리우드 시스템을 재승인한다. 하지만 설리번은 <플루토>가 코미디라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을 놓쳤다. 그 영화가 신체극이었다는 사실이다. 슬랩스틱의 과장된 그리고 때로는 폭력적인 신체 사용은 몸을 쓰는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을 투영할 수 있게 만든다. 그 영화는 누구에게 말 거는가? 이 질문은 노동 영화에서 늘 중요한 쟁점이었다. <보라>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하는 몸’을 검사받는 장면을 보며 박장대소하는 장면은 <설리반의 여행>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며 즐거워하는 노동자들의 장면과 어떤 면에선 중첩된다.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다. 그들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지루하고 음울할 것으로만 상정하는 것 역시 편견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고통을 담은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역시 편견이다. 노동하는 신체의 전시, ‘보라(고통의 색)’의 스펙터클은 그들 자신의 신체의 고통을 감각하게 하면서도 즐겁게 만든다. ‘보라’는 단순히 트라우마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있어 산업재해와 관련해 성찰하고 고민하고 행동해야할 지점이며 반복된 일상이다. 재연(재상영)을 통해 과거 사건의 당사자이자 목격자가 되는 노동자-관객, 그리고 그 목격자들을 바라보는 스크린 밖의 관객은 ‘보라’를 신체적으로 체험하는 동시에 그 이미지에 대해 성찰한다. 동문서답의 대답이 유발하는 웃음은 소음과 먼지, 유해화학물질 그리고 반복된 팔과 어깨의 사용으로 인한 병증과 고통, 즉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을 경유한다. <보라>는 50인 이상 규모의 공장 노동자들로 시작해, 네트워크 서버 관리자, 딸기 농장의 노동자들, 취미 사진촬영이 전문가 수준에 이른 이들까지 오늘날 자본주의 노동의 양태를 기록한다. 영화는 농부와 제조공장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을 전시하고 가상 디지털 네트워크 역시 노동자들의 밤샘 노동을 통해 관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디지털 정보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물질 노동이 비물질 노동을 떠받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의 형태는 진화론적이거나 단절적인 방식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주류 산업이 서비스, 금융, 디지털 플랫폼 같은 비물질 노동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해서 근대적 형태의 공장 노동, 농장 노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디지털 산업에서도 노동자 없이 컴퓨터와 가상시스템으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근대적이고 전근대적인 노동의 형태들은 여전히 포스트포디즘 체제하에서도 공존한다. 그래서 전문적인 사진 취미처럼 놀이와 노동이 구분되지 않는 새로운 생산양식까지 치밀하게 최신의 변화를 포착하면서도, 감독은 여전히 지속되는 노동자들의 고통 받는 몸을 스크린에 가장 중요한 스펙터클로 표현한다. 이러한 강조가 과거의 생산양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오늘날 지워지고 비가시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고유한 노동자의 몸을 역사 속에 기입하려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안간힘이다.”
<햇볕을 볼 시간>을 연출한 이다영 감독은 제작일지를 통해 이 작품이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라고 적었다. 이보다 더 간결하고 명징한 작품 소개가 있을까. 감독은 작품의 이야기를 포장할 수 있는 미사여구를 쓰는 대신 작업 과정을 사실적으로 압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 제작일지에는 제작 동기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다. “한 달 동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우리끼리 즐기면서 영화 찍으면 재밌겠다.” 제작일지에 적힌 이 두 문장은 영화 만들기가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닌 영화 만들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햇볕을 볼 시간>은 영화 만들기에 빠져든 영화인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이 만든 세계에 빠져들 관객을 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불완전한 상태를 가진 사물 또는 사람이다. 여주인공 재경은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이다. 그녀는 출연이 예정된 작품의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연습에 몰두한다. 영화 속 주요 소품 중 하나인 외바퀴 자전거는 재경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그녀의 자질과 가능성을 두루 비추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외바퀴 자전거는 바퀴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를 불안하게 만든다. 재경은 미숙하게나마 외바퀴 자전거를 탈 수 있지만, 그녀가 연기해야 할 캐릭터는 그녀보다 더 능숙하게 외바퀴 자전거를 탈 수 있어야 한다. 배우와 캐릭터의 불일치 그리고 배우의 현재와 배우가 꿈꾸는 미래의 불일치. 이러한 이유로 재경에 대한 문자적 묘사는 ‘아직’이라는 부사와 어떤 사실을 부정하는 ‘아니다’ 혹은 어떤 상태를 부정하는 ‘없다’라는 형용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그녀는 아직 그녀가 꿈꾸는 배역이 갖추어야 할 어떤 자질이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재경과 동거하고 있는 현수 또한 불안한 현재를 사는 것으로 묘사된다. 현수는 일상 곳곳에서 소리를 수집하여 음악을 만드는 일을 즐겨 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생계유지를 위해 하는 일은 사운드 엔지니어이다. 만약 현수가 음악가로서의 꿈을 꾸고 있다면 그가 소망하는 미래는 현재 그의 직업적인 일로 인해서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재경은 현수의 음악과 그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에게 유튜브를 해보라고 권하지만, 그런 재경의 제안에 현수는 “모르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현수는 자신의 현재가 불안정하다고 해서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내기를 걸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한편, 현수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현수가 사는 집의 계약 기간이 만료될 시점이 가까워지자 집주인이 월세를 올리겠다고 통보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불안이다. 이 일로 현수와 재경의 삶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어난다. 두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정든 공간을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과거와 미래는 현재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 또한 재경과 현수의 일상에서 불현듯이 감지되는 과거의 어느 순간 또는 미래의 어느 순간과 마주할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영화는 어떻게 현재를 묘사할 수 있을까? 영화는 어떻게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나 미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햇볕을 볼 시간>은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의 기묘함을 드러내기 위해 신체에 습관의 형태로 각인된 감각을 시각화하는 방식과 함께 특정 대상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을 두루 활용하고 있다. 먼저 전자의 경우로는 신체와 몸짓을 통해 시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재경이 출근, 퇴근, 외출 등을 할 때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모습, 현수가 녹음실에서 자판을 보지도 않고 키보드를 다루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재경과 현수가 의례적인 몸짓으로 가벼운 신체 접촉과 함께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재경과 현수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분리수거를 하는 모습 등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이 장면들 모두 재경과 현수가 직업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반복된 행동 양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장면에서 배우들의 몸짓은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과거, 즉 영화가 애써 다 보여주지 않은 캐릭터의 과거의 누적된 경험을 관객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음으로 후자의 경우로는 특정 대상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이 장면들은 대체로 가까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상태를 의식적으로 개선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재경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의 배역을 따내기 위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예로는 재경이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로 구연동화를 하는 장면들을 거론할 수 있다. 재경은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즐거워하기를 바라면서 구연동화의 시연 방식을 조금씩 바꾼다. 재경은 자신의 구연동화를 듣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미래, 즉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여러 시도를 한 것이다. 또한, 이사를 앞두고 재경과 현수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사소한 언쟁을 벌이는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반복과 습관을 통해 과거가 현재로 지속되고, 기대와 예측을 통해 현재가 미래로 연장되는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두 개의 시간, 즉 과거가 새어 들어오는 현재와 미래가 새어 들어오는 현재는 질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실상 두 경우 모두 시간의 속성이 인간이 의식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에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썼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는 그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분명 뒤엉킨 시간의 질서는 우리를 조급하고 불안하게 만들겠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시간의 기묘한 성격으로부터 도리어 위안을 찾으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의식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우리는 무기력해질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나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좌절, 무기력, 패배,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경험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고 난 뒤에 따사한 햇살과 말간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삶은 우리에게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뜻하지 않은 행복과 위로를 전해주기도 한다. <햇볕을 볼 시간>에서 그런 우연은 재경이 산 중고 캠코더 안에서 발견된 누군가가 찍어 놓은 동네 풍경 또는 재경과 현수가 함께 하는 여러 소소한 일상들 안에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일상을 구성하는 여러 다른 시간적 경험이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하나의 리듬을 구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삶의 흐름이 만들어낸 하나의 교항곡과 같다. 음악의 리듬을 듣고 느끼는 것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듯이 누군가의 삶의 리듬을 보고 느끼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