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 감독
- 전범성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김진규, 최난경, 허장강, 김희갑, 유계선, 최걸, 박상익, 박순봉, 이업동, 최은연, 성소민, 유창식, 조덕성, 송화춘, 김용학, 신희범, 김용희, 김세라, 서군수, 원대연, 강승원
해방 후 스무 번째 배출된 배우 최남현(崔湳鉉)은 해방 후 스무 번째 영화계에 진출한 배우이다. 주증녀(<돌아온 어머니>(이규환)), 황정순(<여성일기>(홍성기)), 주선태(<청춘행로>(장황연)), 황해(<성벽을 뚫고>(한형모))와는 1949년 데뷔 동기인 셈이다. 그가 첫 선 보인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사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아내(김연실 분)가 아편중독으로 죽고, 원양어선에서 돌아온 남편은 고아가 된 아들을 어렵게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내 역을 맡은 김연실(1911~1997)이 월북하고 최남현은 연극으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기영(金綺泳)의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부터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을 비롯,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아리랑>(김소동), <잃어버린 청춘>(유현목), <봉이 김선달>(이상 1957, 한홍렬), <돈>(김소동), <자유결혼>(이병일), <인생차압>(이상 1958, 유현목), <오 내고향>(김소동), <젊은 아내>(이강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상 1959, 전창근), <흙>(권영순, 1960), <어부들>(강대진, 1961), <인목대비>(안현철,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혈맥>(김수용, 1963), <추풍령>(전범성, 1965), <하숙생>(정진우, 1966),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 <망각>(이만희, 1967), <내시>(신상옥, 1968) 등에 주연과 조연으로 기용된다. [사진] 영화 <돈>에서의 최남현, 왼쪽은 배우 김승호 최남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최무룡 주연)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진섭은 그의 역할에 대해 “전 화면을 통해 압권이며 무대경험에서 쌓은 액팅이 오버함이 없이 적으나 자연스러운 연기” ( 「능한 연출, 능한 연기 / ‘유전의 애수’를 보고」, 『한국일보』, 1956.07.26) 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호평에 힘입어 1년도 안 돼 타이틀 롤을 맡은 <봉이 김선달>로 ‘최남현이라는 배우의 하나의 지위를 주장’ (「비교적 정돈된 야담영화 / 최남현의 ‘봉이 김선달’」, 『한국일보』, 1957.10.25)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탈세와 횡령을 일삼다 법망에서 벗어나려 거짓 자살극까지 꾸민 아우(김승호)에게 "생눈 파먹은 날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형 이중건(<인생차압>),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스승(<이름 없는 별들>), 드센 아내의 성화 속에 품팔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남산기슭 해방촌의 ‘3.8따라지’ 깡통영감(<혈맥>), 국군 낙오병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결단을 내려야하는 산골마을의 강노인(<싸리골의 신화>)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혈맥>에서의 최남현과 김승호(왼쪽) 이를테면 <봉이 김선달>, <인생차압> 등에서 보인 해학적인 요소, 처녀를 유린하고,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전의 애수>의 건달(인수 역), 피폐한 농촌에서 고리대금으로 농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돈>의 억조, 딸(윤정희)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딸이 사랑하는 하급 관리의 아들(신성일)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내시>의 김찬판 등 악역과 <이름 없는 별들>의 역사 교사 송선생,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싸리골의 신화>의 주인공 강노인이 보인 카리스마적 면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최남현. (사진제공 : 김종원) 그러나 최남현은 배우로서 절정기에 이른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카메라 앞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된다. 10여 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1977년 유현목 감독의 <문>을 계기로 재기,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 <고가(古家)>(조문진, 1977), <족보>(1978, 임권택), <심봤다>(정진우, 1979), <짝코>(임권택, 1980), <물보라>(김수용, 1980) 등에 출연했으나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화의 물결 속에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가>의 주인공 김노인, 아집에 사로잡힌 <물보라>의 지초시, 뜬 구름 같이 살아온 <심봤다>의 조연, 인생을 달관한 <짝코>의 배역에서 열연하였다. [사진] <물보라>에서의 최남현. 아래는 하용수 광물성의 카리스마와 최다 출연 기록 노경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으나 누가 뭐라 하든 최남현은 개성이 강한 성격파 배우였다. 그의 연기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갱도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광물성의 낮은 울림- 최남현 연기의 장점은 누구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 데에 있다. (김종원, 「인물영화사 / 중후한 조연 최남현」, 『일간스포츠』, 1987.07.08) 하지만 그에게는 1미터 75센티의 훤칠한 키와 상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중후한 외모가 풍기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신 뛰어난 연기감각과 형상력,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제1회 부일영화상 조연남우상(1958, <인생차압>), 제4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대상(1967, <싸리골의 신화>), 대종상 남우조연상(1966, <추풍령>) 등의 수상으로 나타났다. [사진] <싸리골의 신화>에서의 최남현. 왼쪽 박기태 최남현은 1918년 1월 7일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최찬수와 박이윤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법관이나 은행가를 지망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무대를 동경했다. 해방 이듬해에 월남하여 극예술협회(신협의 전신)에 들어갔으나 한동안 잔심부름을 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출연의 기회가 온 것은 1944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은하수>라는 연극이었다. <범선 천우호(帆船 天佑號)>(1949)의 무대에 오를 무렵 영화 <돌아온 어머니>에 발탁됐으나 6.25전쟁으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명우 추해당(秋海棠)>(상록극회, 1951), <통곡>(극협, 1952) 등 연극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전란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이 계속된 뒤에도 <한강은 흐른다>(신협, 1958) 등에 출연하여 연극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주선태, 박암 등 극협 단원들과 술로 회포를 풀었다. [사진]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서의 최남현 최남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외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술과 마작, 화투놀이로 소일하다시피 했고, 장기간의 투병으로 고급주택 등 모든 재산을 날렸다. 말년에는 양로원 생활을 하며 병상에 있는 아내까지 뒷바라지하다가 1990년 1월 7일 일흔 한 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 단역)였다. 30대 초반부터 노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누볐던 최남현은 40여 년 동안 720여 편에 출연하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
한편의 영화를 완성하기까지는 시나리오, 촬영, 미술과 음악, 그리고 현상 편집 녹음 등 여러 분업의 긴밀한 협력으로 이루어지지만 감독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캐스팅 즉 배역이다. 배역은 배우들이 스크린에 직접 나타나서 관객과 대면하기 때문에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시나리오작가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몸짓과 소리, 표정으로 관객에게 전달하게 된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자 곧 배우의 예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감독은 캐스팅에서 우선 드라마의 중축을 끌고 가는 주역들을 알맞게 선정해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주연들은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 육체적 조건과 대중들의 인기를 고려하는 스타시스템의 경향에 따르기 마련이다. 작가주의 영화를 젖혀놓고 이러한 관행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대중들의 새로운 호기심과 유행성 인기를 등에 업고 대대적인 선전과 아울러 신인들을 물색하여 과감히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경우도 스타 시스템의 한 속성이다. 그들을 가리켜 스타라고 불렀다. 스타란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에 빚대어 말한 것으로 일설에는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실락원''의 저자 <존.밀톤>이 처음으로 썼다는 설이 있다. 요즘에는 스타란 말이 영화뿐만 아니라 광범하게 쓰여지고 있는 유행어이지만 원래는 영화계에서 즐겨 쓰던 말이다. 배우란 말은 영화의 모체인 연극에서 유래되어 영화 연기자들까지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고 영어로는 남자배우는 Actor, 여자배우는 Actress라고 불렀다. 스타란 말을 매스컴에서 자주 애용하는 다분히 상업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1890년대 미국의 마크세네트는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은 미녀들이 물장구를 치는 것을 스크린에 등장시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것이 스타시스템의 시작이다. 꿈의 공장에서 만들어낸 스타들은 초창기에는 사실상 연기하고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육체와 성적 매력을 상품의 트레드마크로 써서 영화관객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하였다. 스타는 곧 대중의 우상으로 승화되고 영화 산업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드라마의 구축이 절대로 필요하고 관객을 사로잡기 위해서 연극적인 호소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꼭 필요했다. 물론 주역스타들에게도 연기력이 요구되지만 영화이야기를 잘 발효시켜 숙성된 명주(銘酒)와 같이 관객에게 진미를 전하는 데는 연기파 배우들의 몫이 컸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조연배우였다. 조연배우들은 드라마의 주변을 튼튼하게 다져가며 드라마의 행간을 빈틈없이 채워 주는데 큰 힘이 된다. 조연배우들이야말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절대로 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런 조연배우들이 없다면 영화는 한낱 쇼가 되기 쉽다. 조연 연기자들은 대체로 스타라고 부르기보다 배우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연기력과 육체적 조건을 겸비한 스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영화에서 주연, 조연을 구별하는 것은 애매할 경우도 있다. 나오는 신이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분류하기도 하고, 영화의 메인 스토리를 매듭짓고 끌고 가는 것이 역시 주연들이지만 주,조연에 차별성을 둔다든지 우월을 가리는 것은 상업주의 속성이다. 단순히 배우로서 논할 때에는 연기의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가끔 영화상 같은 것을 심사할 때 이런 고민에 부닥친 경우가 많다. 연기상을 주연 또는 조연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같이 되었지만 하나로 통합하여 최우수연기상을 선정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 스타시스템은 영화의 흥행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나 이로 인한 부작용도 있다. 한 신에 나오더라도 영화의 소구력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최남현 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6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영화의 조연배우 대명사로 불리울만큼 비중이 큰 존재였다. 5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도 스타시스템으로 들어가면서 많은 스타들이 탄생하였다. 또한 굵지한 조연 배우들이 명성을 떨친 시대이기도 했다. 그 이름만 열거해도 한국영화의 관객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명배우들이 군웅할거하다시피 스크린을 장식하던 시대였다. 가장 한국적인 남성상을 지닌 김승호 를 필두로 그와 쌍벽을 이룬 최남현, 그리고 중후하고도 유머러스한 주선태 , 지적인 연기파 박암 , 희극배우의 톱 타자 김희갑 과 구봉서 , 서영춘 밉지 않은 악역으로 인기가 높았던 허장강 , 악역의 성격 배우 이예춘 , 서민적인 정감에 넘치는 김칠성과 남춘역 , 터프한 개성파로 갈채를 받은 박노식 , 황해 , 장동휘 등등 기라성 같은 남성배우에다 한국의 어머니상을 대표한 황정순 , 한은진 , 정애란 그리고 꼭 있어야 할 역을 맡아온 고선애 , 정득순 등 조연 배우들이 엮어내는 아기자기한 감흥과 눈물과 웃음들은 당시의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최남현 은 잘생긴 미남이나 호남형은 아니지만 175cm의 키에 70kg이 넘는 중량감 이는 외모에다 개성미가 넘치는 배우였다. 그의 본명도 최남현. 아버지 최찬수와 어머니 박이윤이 6남매 중 장남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해가 1919년 1월 7일이었다. 그의 유소년기나 청년기의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의 명문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해방직전 월남하였다. 그의 동문에는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명성을 떨친 故 선우휘 가 있다. 한때는 주먹깨나 쓰는 뒷골목의 소영웅 노릇도 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영화인들을 만나면 노상 동문인 최남현 을 걱정하는 우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전 해,1944년 신극계의 명문 극예술협회에 입단했다는 짤막한 이력이 배우협회에 남아있다. 연극계의 원로 김동원 씨는 1947년 8월 극예술협회 제3회 공연 <은하수>무대에 최남현 이 단역으로 출연한 기억을 말한다. 당시 열성적인 연극지망생이던 현 감독협회 임원식 씨도 연극무대에서 열연한 최남현의 무대를 지금도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후 영화배우로 전신한다. 그 무렵 연극,악극 등 무대에서 활동하던 주선태, 김칠성 등 많은 배우들이 영화계로 이동하였다. 1949년, 이규환 감독의 < 돌아온 어머니 >에 출연함으로써 영화배우로 첫발을 디딘다. 당시의 명배우이자 다음해 월북한 김연실 과 함께 고난에 찬 한 가정이 슬픔과 역경을 그린 가정극이었다. 최남현은 연극에서 연마한 단단한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배우 생활은 30년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1980년 김수용 감독의 < 물보라 >가 마지막 작품이었다. 30년 동안 157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더러는 주연 역할도 했지만 대부분 조연배우로 시종하여 한국영화 조연배우의 대명사처럼 그의 위치는 확고했다. 70년을 고비로 TV시대가 열리게 되어 많은 배우들이 TV 안방극장으로 이동하였으나 최남현 은 고집스럽게 스크린을 지켰다. 가끔 TV드라마에 모습을 나타낸 일은 있었지만 단연코 영화가 주무대였다. 최남현의 전성기는 60년대였다. 70년대 이후 영화 환경도 바뀌고 영화의 주제나 소재 역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60년대의 한국영화의 이야기에 최남현이 맡을 만한 배역이 많았다고도 할 수 있다. 관객의 주력이 연령층이 젊어지고 감각적인 세대로 바뀌면서 최남현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 것이다. 70~80년까지 출연한 작품은 157편 들 18편이다. 최남현의 역은 배우 다양했다. 정장하면 위풍당당한 노신사로 회사의 대 중역이나 회장감이요, 사극에서는 관록있는 당상관, 홈드라마에서는 다정하고 지엄한 가부장, 흙냄새가 물씬나고 촌로(村老), 악역으로 나타나면 암흑가의 냉혹, 매정한 보스로 못할 것이 없었다. 그는 곧잘 김승호 와 주선태 , 허장강 등과 같이 어울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김승호와는 절친한 술친구였지만 스크린에서는 불꽃 튀는 라이벌이었다. 김소동 감독의 < 돈 1958 >에서 김승호와 논두렁 같은 데서 마치 투우사처럼 맞겨루는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임원식 감독은 김승호 와 공연하게 되면 최남현 은 무서운 기백으로 연기 대결에서 신바람이 나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긴장했다고 말한다. 최남현을 여섯 번이나 영화에 캐스팅한 김수용 감독은 '최남현 씨는 집념과 기백을 가진 연기자였다. 최남현 스타일이라고 부칠만한 독특한 개성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NG를 내가면서 연기에 몰두하였다. '고 말한다. 최남현 스타일이란 그의 중후하고도 열정적인 몸짓, 텁텁한 목소리에 너털웃음 그리고 미묘한 감정을 잘 표현하는 개성적인 액션을 말하는 것이다. 김승호가 유들유들하면서 부드러운 면이 있었다면 최남현은 대조적으로 거칠고 힘주는 연기파였다. 그래서 김승호와 최남현은 당시대의 경쟁자이면서 사적으로는 강장 절친한 술친구였다. 최남현의 연기 중 가장 인상적인 영화로 이만희 감독의 < 싸리골의 신화 1967 >와 김수용 감독의 < 혈맥 1963 > 두 편의 기억이 가장 뚜렷하다. <싸리골의 산화>는 6.25 한국전쟁기를 배경으로 목숨을 걸고 마을과 낙오 국군을 감싸는 한 촌로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그의 동문인 선우휘 의 원작이었다. 마을의 원로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한 노인(강노인)은 한국적 전통사회에서 규범이 될 만한 촌로였다. 맨손으로 공산군에 장악된 마을에서 지혜로움과 용기로 국군낙오병을 구출한다. 다소 반공영화의 유형에 빠지기는 했어도 매우 훌륭한 영화였다. 그리고 김영수 원작, 김수용 감독의 <혈맥>에서는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해방촌을 무대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절망을 극복하여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잡초와 같은 생명력과 서민들의 애환을 밀도있게 그린 작품이었다. 이 두 작품에서 주연(한국연극영화예술상)과 조연(청룡상)상을 수상했다. 혈맥에서는 깡통영감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버지 역에 최남현, 아들 김승호와 함께 명콤비를 이루어 절묘한 극적인 고양감을 이루어냈다. 이밖에도 최남현 이 조연배우상을 맡은 것은 여러 차례 있었다. 1966년에는 전범성 감독의 < 추풍령 >에서 대종상 조연상을 수상했고, 1959년에는 유현목 감독의 < 인생차압 >에서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1960년에는 유현목 감독의 < 구름은 흘러도 >에서 남우조연상 그리고 1980년 제19회 대종상에서는 공로영화인에게 주어지는 특별연기상을 받는 등 조연배우상을 많이 차지한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실향민이라서 가족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지명으로 오랫동안 병석을 떠나지 못했고, 그의 유일한 외아들과는 평화롭지 못했던 것 같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유일한 낙은 술과 마작 그리고 화투놀이였다고 한다. 술은 두주불사였고 화투놀이에는 거의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는 소문이 났다. 또한 정력강장제인 물개를 과도하게 먹어서인지 정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을 재촉한 원인이라고 주위에서 수근거렸다고 한다, 80년대 이후 최남현 의 이름도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고혈압 등 지병이 악화되고 의지할 곳 없이 경기도 한 마을에 몸을 의지했다. 그를 좋아하는 열렬한 팬인 한 교사의 돌보임을 받다가 끝내는 시골 양로원에서 쓸쓸히 인생을 거두었다. 1990년 2월 26일 그의 마지막 주소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신장사리 385번지였다. 그때는 술친구였던 김승호 , 주선태 , 김칠성 도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나고 각박한 영화계의 인심도 그를 애도하는데 흡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세상 그처럼 한국영화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팬들의 박수를 받아온 배우였으나 말로는 그지없이 쓸쓸하고 허전하였다. 영광 뒤에 오는 허무함, 인생무상의 업을 지닌 채 최남현은 살아진 것이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최남현 이 업적은 한국영화의 황금시절의 화려한 추억과 함께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고 누가 말한 바와 같이 배우 최남현은 아직도 당시에 살던 동시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영화 관객도 젊어지고 영화도 젊어졌다. 그러나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이야기도, 깊은 감동을 주는 드라마도 자주 보기가 힘들어졌다. 감각적으로나 기술적으로는 눈부시게 발전한 것 같으면서 인간을 그리는 진정한 드라마도 찾기 힘들다. 영화의 정서나 미적 감동도 예전과 같지는 않다. 살벌한 폭력이 난무하고 스크린에서 짓거리는 대사들도 거칠고 여유가 없다. 문득 최남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요즘 배우들은 몸짓만 있지 연기가 있는가 자문자답한다. 그렇다고 다양한 성격이나 개성미가 살아있는가는 생각케 되었다. 60년 한국영화를 주름잡던 대배우들 그들이 엮어낸 인간모양 같은 것이 그립다. 스타만 있고 배우가 부재한 한국영화의 앞날이 염려되는 것도 노파심일까? 보편적인 관객들은 과연 영화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더 좀 생각해 봐야겠다. 호현찬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출 생 : 1919년 1월 7일 평안북도 정주 1990년 2월 26일 사망 데 뷔 : 1949년 이규환 감독 < 돌아온 어머니 > 주요 작품 : < 싸리골의 신화 >, < 인생차압 >, < 세종대왕 >, < 공처가 3대 > 등
한국여배우사를 훑어볼 때 '착한 여자 콤플렉스', '천사표 콤플렉스'로 관객들의 눈물주머니를 터뜨려 놓은 배우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졌던 전옥 을 필두로 김연실 , 김소영 , 문예봉 , 유계선 , 김신재 , 이경희 , 고은아 , 전계현 , 문희 등 기라성 같은 명성을 떨친 여배우들이었다. 이들 여배우들 중에서도 특히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로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 여배우가 전옥에 이어 '제2의 눈물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경희(李璟姬)였다. 이경희 는 1932년 9월 29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여고 졸업 수 한때 레코드가수 및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영화연기자로는 1955년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로 데뷔하였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는 전택이 , 노경희 와 트리오로 공연했다. 이경희는 어린 소년시절부터 재학 당시 서울방송국에 출연하는 기회도 자주 가졌으며 졸업 후 레코드사의 요청을 받아 <서울의 거리>, <서울 부기> 등의 히트곡을 취힙하기도 했다. 그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악극단 <희망>에 입단하여 <루루태자>, <라 콤파르시타>, <분홍치마>. <클레오파트라> 등의 연극에 출연하였다. 그녀가 애수에 젖은 음감으로 <라 콤파르시타>를 불러 젖힐 때 관객들은 주저없이 '순정의 가희', '눈물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이경희 의 데뷔작 < 망나니 비사 >에 따른 에피소드(<여성영화인사전>69쪽 이경희.2001년 도서출판 소도)를 살펴 보자. 55년 서울 수복 후 여배우를 물색하던 김성민 감독은 이경희가 적역이라는 조언을 듣고 당시 국도극장에서 황해 등과 <님의 품에 안기리>라는 연극을 하고 있던 그에게 찾아봤다. 노경희 , 전택이 , 이민 등 당대의 빅 스타들과 함께 <망나니 비사>에 출연하게 된 이경희는 정조을 지키려던 자신 때문에 모함에 빠지게 된 아버지와,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목을 쳤지만 자신을 사랑하게 된 망나니 ''먹''(전택이)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보아야 하는 비운의 여인 ''채''로 분했다. 장옷를 뒤집어쓰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채''의 모습은 너무나 단아해서 잡시 발성영화에 잘못 캐스팅된 무성영화의 슬픈 페르소나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이 영화 이후 청순가련한 비극의 히로인은 이경희 에게 일종의 숙명처럼 고착되었다. 영화 < 망나니 비사 >에서 여주인공 '채'로 분한 이경희 와 역시 여주인공 '달'로 분한 노경희 는 양반집 규수(전자)대 술집 작부라는 상반된 신분의 여인으로 등장하였다. -어느 고을의 교리( 이민 )가 그 고을 진사의 딸 '채'( 이경희 )를 좋아한다. 그러나 진사는 자기 딸을 교리의 소실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교리는 갖은 모함을 다해서 진사를 역적으로 몰고 그의 딸을 차지하려 했다. 그랬지만 딸은 도망을 쳤다. 그 딸이 도망친 곳은 바로 망나니인 '먹'( 전택이 )이네 집. '먹'은 그 딸을 숨겨주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망나니 '먹'은 진사딸 '채'를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눈치챈 술집작부인 달은 사랑하는 '먹'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 이른바 삼각형 연애가 벌어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 가 청순가련형의 여인상을 연기한 반면 노경희는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먹'을 다루는 능동적인 하층민 여인상을 선보였다. 노경희는 이 영화의 '달'역으로 1955년 제1회 금룡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관객들의 가슴에는 '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마지막 대목에서의 이경희 연기가 아프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경희 는 이밖에도 < 모정 > '58. 양주남 감독 , < 육체의 길 > '59. 조긍하 감독, < 삼여성 > '59 박성복 감독, < 연산군 >'61 신상옥 감독, < 김약국집 딸들 > '63 유현목 감독, < 단종애사 >'63 이규웅 감독, < 모란이 피기까지는 > '63 김기덕 감독, < 혈맥 > '63 김수용 감독, < 추풍령 > '65 전범성 감독, < 신설 > '74 조문진 감독, < 들국화는 피었는데 > '74 이만희 감독, < 여자를 찾습니다 > '76 하길종 감독, < 깃발없는 기수 > '79 임권택 감독, < 내가 버린 여자2 > '80 홍성기 감독, < 아가다 > '79 김현명 감독>, < 영웅연가 > '86 김유진 감독, < 이장호의 외인구단 > '86. 이장호 감독, < 아다다 > '87 임권택 감독 등에 출연하였다. 이경희 의 대표작을 들라고 하면 < 망나니 비사 >, < 잃어버린 청춘 >, < 찔레꽃 > 등 3편을 통해서 보여준 연기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된다. 그 가운데서 대표작 중 1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에서 보여준 이경희의 연기(정애 역)를 평가하고자 한다. 영화 <잃어버린 청춘>의 주인공인 위진구( 최무룡 )의 직업은 전기공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전선 수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괴한과 맞부딪쳤다. 상대방은 바람처럼 달아나버리고 그 자리에는 돈다발이 떨어져 있었다. 위진구가 조심스럽게 돈다발을 집어들었을 때 근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진구가 그 사람을 발견,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그가 갑자기 '강도다!'라고 소리치며 칼을 뽑아들었다. 진구는 옷소매를 붙잡고 달라붙은 그 자를 때려눕히고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린 그는 죽었고, 진구는 억울하게도 살인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단절된 진구는 신을 의지하는 애인 정애 이경희 )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결국 젊은 전기공은 경찰에 자수하지만 애인의 따스한 눈물만으로는 냉엄한 현실의 절망감을 밀어젖힐 수 없었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6.25전쟁 후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서울의 도심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의 운명이 리얼한 영상 속에서 속절없이 농락당한다는 ''쫓기는 인생''의 삶이 비정하게 묘사된 영화에서 여주인공 정애의 마지막 내뱉은 말은 '이젠 울지 않겠어요'였다. 필자는 < 잃어버린 청춘 >이 제작된 지 45년이 지난 며칠 전 유현목 감독을 만나 영화배우 이경희 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유감독님이 < 잃어버린 청춘 >을 연출한 당시 연기자로서 이경희 씨는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해서 청순가련형의 동양적 이미지의 배우였지요. <잃어버린 청춘>의 라스트신을 찍는데, 비오는 장면이었습니다. 때가 엄동설한이라 우중 신을 찍기가 용이치 않았어요. 소방차를 동원 호스로 물을 뿌렸는데, 물이 잘못 뿜어져 고압선에 닿으면 위험한 형국이었어요. 나는 이경희 씨에게 추우니 비닐 옷을 입으라고 권했지요. 그런데도 2시간 이상 촬영하는 동안 이경희 씨는 끝내 비닐 옷을 걸치지 않고 꼬박 혹한 속에서 물세례를 받았어요. 나는 속으로 그녀가 인내력은 물론, 프로 의식이 강한 외유내강형 연기자로구나 생각했지요. 성실하고 싹싹했고, 외모도 나무랄 데 없는 미인형이였지요.' < 눈내리는 밤 ''58>, < 목포의 눈물 ''58> 등 신파극 멜로 드라마를 연출한 바 있는 하한수 감독도 이경희 에 대해 연기평을 했다. '내 영화에 출연한 후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진 전옥 씨는 정말 전설적인 여배우로 연기에 대한 열정은 가히 ''불꽃''이라고 부를만 했어요. 거기에 비해 이경희 씨는 소극적이며 내향적인 성품의 연기자였지요. 그의 매력은 항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함에 있습니다.' 1958년 초여름 결혼했던 남편 김영건과 1963년 사별한 이경희는 딸 혜정의 강한 어머니로서 모정의 세월 속에서 연기생활에 전념했다. 이경희 가 출연한 최근 작품으로는 < 세상 밖으로 >''94 여균동 , < 닥터 봉 > ''95 이광훈 , < 도둑과 시인 > ''95 석래명 , < 애 > ''99 이두용 , < 가위 >2000 윤종찬 등이 있다. 영화배우 이경희 .... 그녀는 1950년대 중반에 데뷔한 이래 45년간을 현역 연기자로 활동하였다.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는 늙음도 마다 않고 항상 우리 곁에 있다. 변인식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출 생 : 1932. 4. 27 서울 데 뷔 : 1955년 김성민 감독 < 망나니 비사 > 주요 작품 : < 찔레꽃 >, < 망부석 >, < 두남매 >, < 잃어버린 청춘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