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 감독
- 양인은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전옥, 김혜정, 남양일, 안성기, 장훈, 이예춘, 전영선, 유춘수, 김영옥, 석운아, 방수일, 석금성, 남춘역, 김희갑, 최무룡, 윤정란, 신소영, 지방열, 문미봉, 노근호, 라정옥, 김수천
영화 < 고려장 >을 둘러싼 논란은 대개 영화가 아닌, 실제 풍습에 초점이 맞춰진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려장은 설화로 남아 있을 뿐, 실제 행한 기록은 없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의 풍습으로 세계에 알려졌다는 점 역시 논란거리다. 영화 <고려장>에는 한 사학자가 과거 풍습으로 고려장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어 고려장을 기정사실화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를 비판해야 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고려장>은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혹은 실제의) 풍습을 경유해 삶의 단면을 해부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김기영 이 인간 사회에 내재한 정신적인 본능을 영화로 구현해왔다고 이해할 때, 우리는 설사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고려장이라는 풍습에 내재한 인간의 욕망에 관해서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부정하고자 하는 데에는, 단지 사실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을 넘는 과잉된 무언가가 있다. 영화를 통해 우리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의 실체를 다시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려장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는 ‘효’사상이 있다. 고려장은 효사상에 위배되기에 용납할 수 없는 미개한 치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기영은 이질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고려장 문제가 단지 청산해야 할 과거의 유산만이 아님을 꼬집는다. 오프닝 장면은 전 세계적으로 당면한 인구 조절 문제에 관한 TV 토론 현장을 보여준다. 생물학자는 식량이 부족할 때 서로 잡아먹어 개체 수를 조절하는 쥐를 사례로 들자, 사학자는 이를 받아 과거 고려장 풍습을 언급한다. 이것은 뒤이어 등장할 구룡( 김진규 )의 이야기의 요약본이자, 고려장에 관한 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 고려장이 생겨난 근본 원인이 존속하는 한, 중립적이고 이성적인 외양을 띤 토론(혹은 법과 제도)의 형태로 고려장은 다시 등장할 것이고 이는 원래의 잔혹한 이면을 감춘 것에 불과하다. 토론 장면에서 인구조절 논리에 대응하는 것으로 ‘운명’이 언급된다. 일흔 정도 되는 한 방청객은 ‘예전 같으면 고려장을 당할 나이’라는 사회자의 발언에 ‘나는 100살까지 살 손금을 타고났다’고 받는다. 그러나 운명이 제도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부합한다면 어떨까. 근대 이전으로 회귀해 펼쳐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제도와 운명은 서로 동조한다. 어릴 적 구룡은 무당( 전옥 )으로부터 이복형제들을 죽일 것이라는 점괘를 받는다. 점괘를 통해 예고된 운명은 (잔인하긴 하지만) 인구조절이라는 제도적 목적과 부합한다. 점괘의 저주를 받은 구룡의 형제들은 구룡을 위기에 빠뜨리고 모함한 끝에 결국 그를 죽일 기회를 얻는다. 그런 아들을 구하기 위해 구룡의 어머니( 주증녀 )가 스스로 고려장을 선택한다. 이때 고려장은 제도와 운명의 결합체로 등장한다. 굿을 통해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예정된 운명과 인구조절이라는 근대적인 과제를 동일 선상에 놓으면서, 운명에의 저항을 곧 제도에의 저항으로 만드는 것이 영화의 미묘하고도 중요한 지점이다. 그 가운데 고려장은 효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도구와 인구조절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 이전에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버려지고 죽임당하는 일임이 드러난다. 구룡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목숨을 잃는다. 모함당해 죽고, 먹을 것이 없어 죽고, 어린아이가 제물로 바쳐지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고려장’만을 특별한 죽음의 방식으로 떼어놓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영화 속에서 유독 인상적인 것은 어떤 유예의 순간들이다. 구룡 어머니의 고려장 시퀀스에서 구룡의 행위를 유예시킨 건 구룡의 효심이 아니라 어머니의 살고자 하는 의지였다. 어머니는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는 공연한 말로 아들을 불러 세운 데 이어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를 통해 ‘효’나 ‘고귀한 희생’ 같은 추상적인 가치 이전에 본능적인 생존 욕구가 더욱 강조된다. 구룡이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는 이유는 ‘효심’ 이전에 길을 따라나선 아이로부터 ‘이다음에 아저씨를 데려오게 지게를 가져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구룡의 갈등 요인에는 단순히 효심과 운명 사이의 고심만이 아니라 고려장이 곧 자기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의 실감도 있다. 유예의 다른 순간은 구룡의 10형제에 대한 복수 시간에 도래한다. 연인 갓난이( 김보애 )가 10형제의 손에 죽임당했음을 무당으로부터 들은 구룡은 무당이 전해 준 도끼로 형제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이는 충분히 장르적으로 생략해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는 한 명 한 명 숫자를 세듯, 형제들이 하나하나 죽어나가는 장면을 이상한 느낌이 들 만큼 천천히 보여준다. 영화 내내 하나의 덩어리처럼 인식되었던 10형제들은 도끼질 속에서 각각의 개체로 분리되며 구룡에게 삶을 구걸한다. 그 속에서 행위에 관한 자각이 싹트고 구룡은 도끼질을 멈춘다. 구룡은 형제를 모두 죽이는 대신 그런 운명을 심어둔 무당의 나무를 자른다. 영화의 결말은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멈추고, 살육의 뿌리를 자르자는 지극히 계몽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어떤 시대, 어떤 장소와 만났을 때는 간절한 바람이 되기도 한다. 운명이든 제도든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은 오직 죽음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러므로 다시 묻자. (그것이 실제이든 허구든)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미개한가. 그렇다면 전쟁과 학살은 어떤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자는 누구인가.
1950년대 후반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과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로 포문을 연 한국의 코미디영화는 본격적인 장르로 형성되면서 196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청춘쌍곡선>을 시작으로,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한 <오부자>(권영순, 1958), <사람팔자 알 수 없다>(김화랑,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등의 코미디언코미디 1) 가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의 주류를 형성했다면,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과 <흥부와 놀부>(김화랑, 1959), <탈선 춘향전>(이경춘, 1960) 등 시대극을 표방한 코미디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등의 산뜻한 로맨틱 코미디도 관객들을 찾아갔다. 1960년대 초에는 가족드라마가 주요 장르로 등장하여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등의 가족희극드라마가 다수 제작되었는가 하면, 1960년대 중반 유행했던 청춘드라마의 영향으로 <총각김치>(장일호, 1964),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등의 청춘코미디가 한동안 코미디 시장을 휩쓸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는 서영춘, 구봉서를 투 톱으로 하는 코미디언 코미디가 다시 주류를 형성하면서, 구봉서 주연의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 <남자기생>(심우섭, 1969) 등의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 <팔푼며느리>(심우섭, 1968),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 등의 팔푼이 시리즈, 서영춘의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운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 등이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코미디영화는 197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코미디영화의 제작 비율은 연평균 12%에 이르렀다. 2) 코미디영화는 한국영화 시장에서 멜로드라마에 이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주요 장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코미디영화, 그 중에서도 특히 코미디언코미디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올랐던 ‘홀쭉이와 뚱뚱이’ 양석천(1921~1990)과 양훈(1923~1998)에서 김희갑(1923~1993), 구봉서(1926~2016), 서영춘(1928~1986), 배삼룡(1926~2010)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남성 코미디언들만으로 명단이 완성된다. 같은 시기, 이들에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는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거나 이야기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불출의 유일한 여성 제자이자 인정받는 만담가로서 신불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김윤심(1914~1997)을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 코미디언들의 활약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윤심은 한국 최초의 여성 코미디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쇼 무대의 인기 출연자였다. 김윤심의 활약이 만담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박옥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에서 활동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박옥초(1920-1984)는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의 입지를 다진 인물로 볼 수 있다. 소녀가극단 낭낭좌에서 데뷔한 이래 남성 역을 도맡아 여성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박옥초는 코미디로 연기 영역을 넓힌 뒤 1950-60년대에는 악극단과 쇼 무대, 영화와 라디오, TV까지 각종 매체를 넘나들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이 시기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활약했던 유일한 여성 코미디언으로 약 7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박옥초의 첫 영화출연은 안종화 감독의 영화 <수우>(1948)였다. <수우>는 알려진 바대로 ‘경찰정책영화’였는데, 김소영, 전택이, 신카나리아, 서월영 등이 주요 출연자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두 번째 영화는 6.25전쟁 이후, 한국영화가 새롭게 발돋움하던 시기에 제작된 1956년 영화 <애정파도>(문화성)였다. (그림1) <애정파도>(문화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위 전옥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고, 왼쪽 아래는 이예성과 안나영, 오른쪽 맨 아래 수영복 차림의 박옥초와 구봉서가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예성과 안나영, 전옥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애정파도>는 구봉서의 데뷔작이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구봉서와 콤비로 재미있는 장면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의 오른쪽 아래에 등장한 수영복 차림의 두 사람이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급증하던 이 시기에, 박옥초의 영화 출연도 한층 활발해졌다. 박옥초는 이 시기에만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이 시기에 유행했던 코미디영화였다. <봉이 김선달>(한홍열, 1957), <공처가>(김수용,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 등에서 박옥초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림2)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의 한장면. 박옥초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정혜선)의 집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아낙으로 등장했다. 박옥초는 빠른 템포로 수다를 늘어놓으며, 특유의 표정 연기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솜씨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3)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죽음 이후 다른 사람으로 빙의된 주인(구봉서)이 유령인 것 같다고 하며 호들갑을 떠는 식모로 등장하여 짧은 순간에 웃음을 자아내는 신 스틸러였다. 이처럼 조연이나 단역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코믹한 순간의 웃음을 담당했던 박옥초의 경력은 196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미 악극단과 쇼 무대의 유명한 배우였던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출연자였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가진 코미디언이었다. 1960년대에는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사극, 멜로드라마, 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 안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그림4)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장면 기생점고에 나타난 나이든 기생 박옥초를 변사또 이예춘이 타박하는 장면이다. 박옥초의 표정연기가 돋보인다. 이 장면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중 변학도(이예춘)가 남원에 부임하여 기생들을 불러 모아 점고를 하는 씬이다. 맨 끝에 서 있던 기생 박옥초를 발견한 변학도가 몇 살이냐고 묻자 천연덕스럽게 “열여섯이옵니다”이라고 대답하며 교태를 부리다가, 타박을 받고 돌아서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가 하면, <민며느리>(최은희, 1965)에서는 무당으로 등장하여 강한 존재감을 발휘했고,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서는 곽규석과 함께 미국 유학을 다녀와 허세를 부리는 박사 부부로 출연하여 이 진지한 영화에서 단 한 번 웃음을 유발하는 씬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림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의 한 장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박사 부부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 오른쪽부터 신성일, 백일섭. 박옥초와 곽규석이 출연했다. 드물게 허위의식에 가득 찬 상류층으로 등장했던 <장군의 수염>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박옥초가 영화 속에서 맡은 역할들은 주로 식모, 동네 아낙, 무당 등 하층계급의 여성들이었다. 주인공이 아닌 여성, 그 중에서도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중년의 여성이 당시 한국영화 속에서 맡을 수 있었던 캐릭터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박옥초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이런 역할들로 채워갔다. 그럼에도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모으고 웃음을 유발하는 개성 있는 배우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 코미디언이었다. (그림6)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의 한장면. 박옥초는 코미디영화 제작이 드물었던 197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톱스타 코미디언 이주일의 출세기를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박옥초가 출연했던 마지막 코미디영화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김수형 감독의 1981년작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70여 편의 영화를 남겼다. 박옥초는 심우섭, 이형표, 김화랑 등 주요 코미디 감독들의 코미디 영화 및 신상옥, 최은희, 이성구 감독 등의 다양한 장르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하는 씬 스틸러로 출연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로 기억될 만하다. 박옥초가 주로 조연배우로, 다작을 한 경우였다면 백금녀는 여성 코미디언으로 드물게 주연작을 가진 배우였다. 백금녀(1931-1995)는 김정분이라는 본명으로 부산 지역 악극단에서 데뷔한 뒤, 서울중앙방송 성우 제1기로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청춘극장과 황금좌 등의 악극단에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 후반 서영춘과 콤비를 이루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갈비씨와 뚱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서영춘과 백금녀는 쇼 무대와 라디오에서 큰 활약을 했다. 백금녀는 여기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도 진출, <공처가>(김수용, 1958)로 데뷔했다. 또, 1964년에는 박노식과 함께 악극 재건을 목표로 ‘11인 백합회’를 결성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중반에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유일하게 고소득 연예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데뷔작 <공처가>에서 백금녀는 장소팔과 부부로 등장하여 곰탕집을 운영하는 여걸 역할을 맡았다. 장소팔은 당시 악극단과 라디오 만담을 통해 전국적인 스타 만담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장소팔의 ‘대화만담’ 파트너였던 고춘자나 고백화가 아니라, 백금녀가 상대역으로 등장한 것은 이채로운 일이라 할 만하다. 아마도 백금녀가 ‘공처가’의 부인이라는 컨셉에 더 적합한 유형의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연기력을 인정받은 신인 배우 백금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캐스팅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림7)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장소팔의 등에 업힌 백금녀가 포스터 전면에 위치하여, 이 영화의 코믹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백금녀라는 예명은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김수용이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정분에게 ‘하얗고 돈 많은 여자’가 되라고 지어준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백금녀가 다시 주연 배우로 등장한 영화는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코미디언들을 주연으로 하는 영화들의 제작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초까지도 지속되었는데 여성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남자는 싫어> 단 한 편이었다. (그림8)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백금녀가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면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960년대 여성 코미디언을 단독 주연으로 삼아 제작된 유일한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백금녀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여성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에서 소비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포스터, 시나리오, 개작 전의 원작 시놉시스, 백금녀-서영춘 만담 레코드 등이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어 대략적인 내용은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림9) <서영춘과 백금녀, 폭소가요 코메듸- 갈비씨와 뚱순이의 애정행진곡> 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서영춘-백금녀 만담 레코드의 표지. 이들 콤비 코미디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삽화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초반에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스타 코미디언이자 중견 악극 배우였다. 이 같은 백금녀의 스타성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던 <남자는 싫어>는 기획부터 개작까지, 백금녀를 통한 웃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였다. 애초에는 서영춘과 백금녀 콤비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거꾸로 부부’를 차용한 ‘역할전도 부부 코미디’를 보여주고자 하였으나 검열에 의해 전면 개작을 하게 되면서 이 영화가 택한 두 번째 길은 백금녀를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를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언코미디가 다시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서 여성 코미디언 중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백금녀를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기획은 일견 참신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개작된 <남자는 싫어>에서 백금녀가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금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식이다. 즉, 백금녀를 희생양으로 삼아 (남성) 공동체에서 배제하면서 배타적인 웃음을 만드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백금녀가 자신의 스타 페르소나와 레퍼토리를 활용하여 적극적인 웃음의 유발자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이미 잘 알려진 자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스타 코미디언으로서의 장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코미디언코미디의 특징이기도 하다. 첫 번째 방식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것은 백금녀의 몸을 희화화하고 객체화하는 여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이들에 의해 가학적이고 공격적인 웃음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웃음은 사회적 전형화typification의 하나로, 남성들만의 세계all-male-world에서 여성들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다. 4) 따라서 그의 신체가 웃음거리가 되는 동안 백금녀 자신은 코믹 행위의 주체이거나 능동적인 주어가 아니다. 즉, 영화 속에서 백금녀는 유머의 주체로 기능하거나 유머를 적극적으로 주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함’으로 인하여,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비정상적인 신체’로 규정됨으로 인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객체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의 코미디성이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두 번째 범주에서이다. 즉, 기존의 퍼포먼스와 스타 페르소나를 활용한 코미디를 선보일 때, 백금녀는 능동적 주어로 활약한다. 성량이 풍부한 가수인 백금녀의 화려한 노래와 코믹한 춤 솜씨를 볼거리로 제시하는 장면, 서영춘과 함께 ‘거꾸로 부부’와 같은 남녀 역할 전도의 코미디를 선보이는 장면, 여성 레슬러로 활약하는 장면 등은 백금녀 코미디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특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림10)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이 영화는 서영춘의 출세기를 다룬 것으로, 주연 서영춘(왼쪽)과 함께 스타 배우였던 김희갑(오른쪽)이 포스터에 비중있게 등장한다.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은 서영춘과 사랑하는 사이로 등장하는 강문, 그 아래 서영춘을 제압한 백금녀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출세해서 남주나>와 같이 서영춘과 함께 출연하는 코미디영화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가 만들어졌다. 첫 번째 범주에서 금순의 신체가 ‘비정상적’이므로 배제되어야 하는 것, 그로테스크하고 혐오스러운 ‘비체abject’로 여겨져 왔다면, 레슬링 장면 등을 통해서 금순의 신체는 ‘단련된 스포츠’의 신체이면서 동시에 ‘요절복통할 폭소’를 유발하는 슬랩스틱의 신체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특히 레슬링 복장을 하고 신체를 당당히 드러내는 장면은 남성들이 부과한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깨뜨리는 것이며, 이는 훨씬 더 풍성하고 더 문제적인 신체의 가능성’들’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 5) 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백금녀의 ‘신체’는 배제와 폭력을 통해 규정되는 ‘대상’ 혹은 ‘비체’의 경계를 넘어, 주체됨을 통해 웃음을 만드는 ‘여성 코미디’의 신체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백금녀가 주연으로 등장한 마지막 영화는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이다. 이 영화는 화재로 전소한 고아원의 원장으로 등장한 백금녀는 김희갑과 함께 감동적인 고아원 재건 스토리를 그렸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와 <팔도강산>(배석인, 1967)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백금녀와 김희갑은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고아원 재건 비용을 마련한다. 백금녀는 한편으로는 김희갑의 코미디를 보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힘으로 사기꾼을 제압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11)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의 한장면 고아원 원장 역의 백금녀와 고아원 운영을 돕는 김주사 역의 김희갑. 이들은 고아원을 재건하기 위해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재건 자금을 마련하고자 한다. 전국을 여행하며 자녀들을 만나는 김희갑 부부가 출연하는 영화 <팔도강산>와 같은 계열의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밖에 영화에서 백금녀의 활발한 활약상은 다음과 같은 영화들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림12)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백금녀는 코미디영화가 아닌 여타 드라마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였다. (그림1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에서 백금녀는 ‘파이 던지기’라는 고전적 코미디의 한 장면을 차용한 레스토랑 신에 등장했다. (그림 14) <팔도노랭이>(심우섭, 1970) 포스터 <팔도노랭이>는 팔도의 구두쇠들을 사위로 삼은 김희갑의 이야기. 가운데 김희갑이 보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딸로 등장한 백금녀는 오른쪽 맨 아래. (그림15)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의 한 장면. 왼쪽 붉은 원피스 차림으로 춤추는 백금녀. 왼쪽 끝이 김희자, 백금녀의 오른쪽 옆이 양석천, 갓 쓴 할아버지 역의 김정훈, 그 오른쪽으로 검은 양복 차림의 허장강과 흰 재킷에 권색 바지 차림의 배삼룡이 보인다. 1) 코미디언코미디는 이미 잘 알려진 스타 코미디언의 개성과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워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들을 일컫는 장르 명칭으로, 미국의 코미디 영화 연구자 스티브 사이드만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Steve Seidman, Comedian Comedy-A Tradition in Hollywood Film, UMI Research Press, 1981 참고.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는 기존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의 스타성과 레퍼토리, 퍼포먼스 등을 전시하면서, 195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기에 영향력 있는 장르로 형성되었다.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 형성과 전개에 대해서는 박선영, 「한국 코미디영화 형성과정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1 참고. 2)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초창기~1976』, 영화진흥공사, 1977, 46~48쪽의 “국산극영화 내용별 제작실황”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이 수치는 멜로드라마가 거의 60-70%를 차지했던 상황에서 결코 작지 않은 비율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연예인고액납세”, 『중앙일보』 1966.8.5.3쪽; “늘어가는 스타의 자가용차”, 『서울신문』, 1966.9.17.5쪽; “납세액으로 본 인기 바로미터”, 『조선일보』 1967.3.26.5쪽. 백금녀는 1965년 연예인 고액납세자 중 가수 분야 3위로, 이미자, 박재란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자가용 승용차를 가진 코메디언 4인(구봉서, 김희갑, 후라이보이, 백금녀) 중 한 사람이었다. 또, 1966년에도 가수 중 8위로 링크되어 고액납세자의 명단에 올랐다. 4) Helga Kotthoff,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2006, p.12. 5) Andrew Stott, Comedy, Routledge, 2005, p.104.
전택이 (田澤二) 선생은 영화도 다섯 편이나 연출했지만 감독보다는 배우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1958년부터 출연 짬짬이 제작을 하며 메가폰을 잡았으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신파극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를 리메이크한 첫 연출작 < 애정무한 >(1958)부터 마지막 작품 < 홍도야 울지 마라 >(1965)까지 그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택이라면, 나이 많은 사람들은 < 망나니비사 >( 김성민 )의 참수인이나 < 춘향전 >( 이규환 , 이상 1955)의 방자 역을 기억하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뒤늦게 발굴된 광복 전의 < 집 없는 천사 >(1941), < 사랑과 맹세 >(1944)의 엿장수나 화물차 운전기사 역할을 더 가깝게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전 선생으로부터 들은 몇 가지 얘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가 1998년 3월 2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로부터 1년 전과 3년 전 두 차례가 된다. 처음은 그가 사는 충무로아파트(13평) 부근의 어느 다방이었고 그다음은 배우 김일해 선생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찍는 자리였다. 셋이 함께였다. 장충단공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처음 본 것은 1957년 대학 2학년 때였다. 영화인들이 자주 들르던 서울 명동의 나일구 다방이었다. 배우인 아내(노경희)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매우 깐깐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전 선생은 80대 중반에 들어선 말년에도 몸단장에 신경을 쓰고 기억력이 또렷했다. 쇳소리가 나기는 했으나 언어 구사도 정상이었다. 영화계에는 1935년 같은 해에 출발했으나 네 살 위인 김일해 선생에게 깍듯이 ‘형님’이라 부르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노령이라 몸이 불편한 데다 말이 어눌한 그가 기억이 흐려 말을 더듬을 때는 언성을 높여 바로잡아주곤 했다. 아무튼 그때 전 선생이 들려준 회고담에 따르면, 나운규의 < 아리랑 >(1926)은 7권. 45분 정도의 분량으로 1권이 900~1000자(尺)였다고 한다. 영사기는 수동으로 1초당 1자반 정도 돌아갔는데, <아리랑>의 경우는 18~20코마로 돌려 속도에 따라 50분이 넘을 때도 있었다. 주제가 가운데 ‘풍년이 왔네’라는 대목이 ‘좋은 세상’ 곧 ‘독립’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돼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폐병으로 기력이 떨어져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연출한 나운규 의 < 강 건너 마을 >(1935)로 데뷔하여 < 아리랑 3편 >에 출연하고 <불가사리>의 주인공으로 내정됐으나 < 오몽녀 >(1936)로 기획이 바뀌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 아리랑 >과 < 풍운아 >(1926), < 들쥐 > < 금붕어 >(1927)를 제작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사주 요도 도라조(淀虎藏)에 대해서는 경성촬영소를 운영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조차 무시하지 못한 존재였다고 언급했다. 그가 조선키네마에 앞서 본정(충무로)에 개업한 모자점 ‘요도야(淀屋)’는 아내가 경영했는데, 요도는 아라시 조즈로(嵐寬之郞, 본명 아라시 조사브로) 주연의 연극을 유치하여 황금좌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고 새로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설립하기 2년 전이었다. 연극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운규 에게 발탁되어 < 칠번통 소사건 > < 무화과 > < 강 건너 마을 >(이상 1935), < 아리랑 3편 >(1936) 등에 출연하며 가까워진 여배우 현방란 (玄芳蘭)의 그 뒤 행방에 대해서도 알게 해주었다. 나운규가 임종할 때까지 병상을 지킨 현방란은 장례식 때 참석한 전라도 출신인 애인 전씨(全氏)와 두 달 만에 살림을 차리고 아들까지 낳았다. 말년에는 치매증세를 보여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들과 수양딸이 찾아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일흔 살이었다. 1995년의 일이다. 전 선생은 나운규의 여성관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그중 하나가 1925년 극단 취성좌와 조선악극단을 거쳐 뒷날 한형모 감독의 < 청춘쌍곡선 >(1956)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방열 (池芳烈)의 부인 강보금 과 관련된 얘기다. 이 여자가 배우가 되고 싶어 나운규가 묵는 개성여관까지 찾아왔는데 어느새 서로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방열이 그들이 묵는 여관을 찾아와 각목을 휘두르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이 자리에 있었던 전 선생이 일본도로 위협하여 나운규를 보호한 덕에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일화였다. 전 선생은 이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만큼 다혈질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뒷날 아내 노경희 가 < 인생역마차 >(1956)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영화에서 신문기자와 암흑가 보스로 1인 2역을 한 이향과 입술을 포개는 키스신을 연기했는데, 그는 자신이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양해 없이 키스신을 연기했다며 이향 을 찾아 충무로의 다방과 단골술집, 영화사를 찾아 나섰다. 어쨌거나 전택이 선생은 나운규 감독이 연출한 17편 가운데 열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말년의 작품 < 강 건너 마을 >로 영화계에 이름을 얹게 된다. 술장사를 하는 여자에게 빠져 남의 돈을 훔쳐 도망가는 농촌 청년 용수 역이었다. 이로써 그는 신일선 , 이금룡 , 윤봉춘 , 전옥 , 김연실 , 유신방 등을 배출한 나운규 문하의 막내 격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후 < 청춘부대 >(1938)를 비롯한 < 성황당 >( 방한준 ), < 국경 >( 최인규 , 1939), < 망루의 결사대 >(이마이 다다시, 1943), < 출격명령 >( 홍성기 , 1954), < 실락원의 별 >(홍성기, 1957), < 돈 >( 김소동 , 1958) 등 114편에 출연하고 1966년 이봉래 감독의 < 무정가 1번지 >를 끝으로 촬영 현장을 떠나게 된다. 그에게 돌아온 배역들은 주연보다 조연이 많았으나 대부분 활달하고 경쾌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