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
- 감독
- 전우열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신영균, 남정임, 허장강, 권오상, 윤일주, 유하나, 방영, 적낙, 왕협, 장혁, 이철, 최성호, 최무웅, 최창호, 최병철, 남성국, 방재운, 최연희, 엘리제 김, 조덕성, 나일, 최일, 임해림, 김기범, 박예숙, 김순애, 신경희, 범국명
이지룡은 1954년부터 1992년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한 영화제작자이다. 외화수입업으로 영화계에 입문해 명보극장을 설립했고 정창화 감독을 비롯한 유명 감독들의 작품을 제작한 인물이다. (사진1) 젊은 시절의 이지룡 그는 192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에서 치마대소학교와 대흥상업학교, 금정고등학교를 나와 함산금융조합 출납계원으로 일했다. 일제강점기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함흥 명보극장에 들어오는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안정적이었던 생활은 해방으로 인하여 변화된다. 그렇다해도 좌우대립이 심한 남한보다 그곳이 낫다는 생각에 그는 함흥에서 장사를 하며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곧 한국전쟁을 만나게 된다. 만세교를 건너 함흥에 입성하는 국군은 그에게 해방군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진2) 함흥만세교 사진 (사진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군이 입성한 뒤 그는 함흥 민사부 동원부장으로 국군을 도왔고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되자 퇴각하는 1군단과 함께 서호진에서 간신히 수송선을 타고 월남한다. 배는 예상과 달리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항에 닿았다. 단신에 무일푼으로 월남한 그는 국민방위군에 차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방위군이 해산되자 본격적인 피난생활이 시작된다. 부산에서 그는 친척인 삼양물산 주동태의 도움으로 쌀창고와 함흥냉면 장사를 하며 종자돈을 모아, 휴전되기 전 도강증을 구해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에서 건설업을 시작한다. 입찰과 재무 업무는 자신 있었지만 건설에는 영 취미가 없던 그는 친척인 이회극이 부사장으로 있는 수도극장에 자주 출입하게 된다. (사진3) 1951년 한국전쟁기의 수도극장의 모습과 2003년 스카라극장의 모습이다. 수도극장은 1930년 약초극장으로 개관해 1945년 수도극장,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재개관하며 유지되어 오다 2005년 근대문화재로 등록예고 된 뒤 소유주에 의해 철거되었다. (사진출처_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문화컨텐츠닷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극장 문 닫는 법이 없어. 손님이 오는 거야.”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극장에서 그는 영화사업의 가능성을 보게 되고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그는 먼저 외화수입을 통해 영화흥행에 대한 감을 익히며 명보극장 건설을 추진한다. 삼양물산의 주동태와 고향 친구이자 후에 연방영화사 부사장이 되는 양봉식을 설득해 투자유치를 하고 파리에서 귀국한 건축가 김중업에게 설계를 의뢰해 극장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국회부의장 조 모 씨의 권력을 등에 업고 나타나 일신산업에게 공사를 맡기며 위기는 시작된다.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던 건설업체인 일신산업의 미숙으로 공사가 난항을 겪게 된 것이다. (사진4) 1956년 명보극장(공사 초기 명성극장) 기공식 현장. 오른쪽 끝이 양봉식, 그 옆이 이지룡으로 일신산업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5) 1956년 명보극장 기공식 현장. 양봉식과 이지룡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는 자본과 기술이 있는 대림산업에게 공사를 의뢰했고 대림산업은 초기 투자자들 보다 더 많은 지분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대림산업의 요구를 들어준 뒤 공사는 시작되었다. (사진6) 명보극장 상량식. 대들보에 돈을 넣은 하얀천을 묶고 있다. (사진7, 사진8) 명보극장 건설현장 1957년 여름, 드디어 명보극장은 완성된다.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건설된 현대식 영화상영관이자 그가 청년기 함흥 시내에서 영화를 봤던 명보극장이 서울 충무로에도 들어선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29세이다. 명보극장은 1957년 8월 25일 개관식을 갖고 개관작 <상류사회 High Society>(찰스 월터스, 1956)를 시작으로 극장영업을 시작한다. 그는 명보극장 부사장으로 자리한다. (사진9) 1957년 명보극장 개관기념. 극장종업원들과 명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가 당시 민의원 의장 이기붕이고 오른쪽이 부인 박마리아, 그 옆이 이지룡이다. 명보극장은 개관했으나 대림산업과의 알력다툼으로 친구 양봉식을 비롯한 초기 관계자들은 명보극장에서 손을 떼게 되고 그 또한 명보극장에서 나오게 된다. 대림산업 측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5.16으로 유야무야 된다. 그는 다시금 심기일전해 1960년대 중반 영화제작업에 뛰어든다. 1964년 <학생부부>(김수용) 등 다른 영화사의 이름을 대명해 세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1966년 아세아영화사를 만들어 자신의 메이커로 본격적인 영화제작을 시작한다. (사진10) <학생부부>(김수용, 1964) 촬영현장. 선글라스를 낀 이가 김수용 감독이고 그 옆에 양복을 입고 있는 이가 제작자 이지룡이다.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고 있는 이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그리고 1965년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로 정창화 감독과 처음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중 미얀마 전선을 배경으로 스스로를 황군으로 정체화한 조선인 지원병이 미얀마 게릴라 대원과 친구인 조선인 학도병들의 죽음을 통해 각성하고 일본군에 대항하지만 미얀마 게릴라 대장의 오해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의 남방전쟁액션영화이다. 열대 지방인 미얀마 전선을 국내에 재연하기 위해 그는 미공보원에 있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정창화 감독과 함께 미공보원에 들어가 동남아 전투장면에 대한 영상을 살펴보고 자료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군 초소와 열대 밀림을 광릉에 만들고 실제 동남아 전선을 촬영한 미공보원의 필름까지 복사해 영화에 사용했다. (사진1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동남아 분위기를 내기 위해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사용한 것이다. (사진12)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열대 전선 상공을 나는 전투기 장면도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13, 14, 15)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오픈세트로 만든 일본군 초소는 그 규모와 정교함에서 추석 대작프로그램의 면모를 보여준다. 정창화 감독은 본인의 구술에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열대 야자수는 국내의 호사가에게 빌려서 촬영한 것이라 증언했다. 제작자 이지룡은 야자나무를 제작팀이 천이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직접 만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쌀과자로 중국식 발을 만들었던 당시 소품팀의 재주라면 야자나무 또한 그럴듯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영화 속에 열대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 야자나무 일부는 빌리고 일부는 만드는 식으로 처리한 듯하다. (사진16, 17)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야자나무가 화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데 옥의 티처럼 화면 왼쪽 하단에 화분이 보인다. 당시 촬영현장에는 따로 모니터가 없고 카메라의 작은 뷰파인더로만 촬영 중인 화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네마스코프 영화의 경우 카메라 뷰파인더에는 일명 쫄쫄이 화면이라 불리는 세로로 긴 왜곡된 화면이 보이기 때문에 이런 실수가 발생했을 것이다. (사진18, 19, 20)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광릉에 만들어 놓은 열대밀림과 서해안으로 보이는 곳에 만들어 놓은 열대의 바닷가 장면이다. 전쟁이 끝나고 회한에 젖은 주인공이 홀로 바닷가로 향하는 장면에는 큰 키의 야자나무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호사가의 야자나무인지 제작팀이 직접 제작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도 당시 대부분의 한국영화 처럼 지방배급업자들에게 지역판권을 선판매한 자금에 초기 투자금 및 초과되는 제작비를 제작자가 감당하는 방식으로 돈을 조달해 영화를 만들었다. 제작 초기 스틸사진만 보고 지방배급업자들이 어음을 끊어주고 시사회에서 개봉관 아카데미극장 방우영 사장이 일어나 박수 칠 정도로 평이 좋아 흥행을 기대했으나 대중의 반응은 달랐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손해만 안겨준 작품이 된다. (사진2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포스터 깐깐하고 꼼꼼한 정창화 감독을 만족시키는 데는 많은 제작비가 들었다. “정창화한테 내가 밤낮 지지...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 그러니까 다른 회사는 가지도 않고, 다른 회사에서도 정창화가 제작비를 많이 들인다 해가지고 정창화 쓰는 걸 겁내 한 거야.” 그럼에도 그는 정창화 감독의 가능성을 보고 영화를 계속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연출로 1966년 <순간은 영원히>, <예라이샹>, <위험한 청춘>, 1967년 <비련>, <위험은 가득히>, <황혼의 검객>, <조용한 이별>, 1970년 <아랑곡의 혈투>(정창화·짱깅퍼)를 연이어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이 2년간 연출, 개봉한 작품의 70퍼센트를 그가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까다로운 연출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작사는 아세아영화사 말고는 없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사진22) 아세아영화사 사무실에서 이지룡, 정창화 당시 홍콩 굴지의 영화사 쇼브라더스가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게 된 영화 <순간은 영원히>도 그가 한홍합작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정창화 감독이 아시아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한 제작자였다. 자칫 멜로드라마로 오해할 법한 제목인 <순간은 영원히>는 사실 홍콩을 무대로 남한 정보원들이 대남공작을 위해 막대한 금괴를 수송하려는 북괴 간첩단을 일망타진한다는 첩보액션영화이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위기X7호>인데 무슨 일인지 공보부는 개명을 권유했고 결국 <순간은 영원히>로 변경한다. 그래도 영문제목은 <Special Agent X-7>이다. (사진23)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의 포스터 <순간은 영원히>는 홍콩 로케이션 촬영을 위해, 국내에서 중화권 영화의 통번역을 맡았던 인물의 소개로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유린영화사와 합작해서 만들어졌다. 달러의 반출이 어렵던 시절 이국적인 홍콩배경이 필요한 경우 합작은 유리한 선택이었다. 국내 배우와 스태프들의 개런티와 국내 촬영 비용은 국내제작사가 부담하고 홍콩배우들과 홍콩촬영분은 합작한 홍콩 현지 제작사가 비용을 부담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제작 방식은 홍콩이나 대만의 영화사들에게도 매력적인 일종의 공동제작, 투자방식이었던 듯싶다. 그래서 그는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 <비련>(정창화, 1967),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낮과 밤>(전우열, 1968),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대벽관>(부청화·장진원, 1970) 등을 한홍합작으로 제작했다. 홍콩에서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를 본 쇼브라더스사는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아세아영화사에 연락했고 그는 정창화 감독 외에 액션영화에 일가견이 있던 김기덕, 장일호 감독도 함께 소개해주었다. 또한 부족한 홍콩의 남자배우들을 채우기 위해 배우 성훈, 남석훈, 방수일, 오경아 등을 추천해 그들 또한 홍콩에서 한동안 활동하게 된다. (사진24)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에 출연 중인 오경아와 방수일 정창화 감독을 쇼브라더스에 소개한 인연으로 아세아영화사도 쇼브라더스와 함께 <아랑곡의 혈투>를 합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쇼브라더스의 영화를 합작영화로 둔갑시킨 위장합작 영화라는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당시 외국영화의 수입편수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다 보니 인기 있는 외국영화와 겉모습을 취할 수 있는 합작영화의 제작이 인기였다. 실제 국내영화사와 거래를 했던 홍콩과 대만의 영화사는 국내 영화법의 각종 제약(합작영화의 조건인 국내감독의 참여, 국내배우의 출연, 투자금액의 제한 등)을 인식하고 이에 맞춰 때로는 이면계약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홍콩이나 대만영화에 국내 영화제작사가 사전투자를 통해 합작영화 타이틀을 얻기도 했는데 이런 작품들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위장합작이다. 아세아영화사는 김진규의 추천으로 대만 영화에 사전투자를 했지만 결과물이 좋지 않아 추가 투자를 철회하고 판권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국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합작영화의 제작은 대단히 유동적이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진25) 쇼브라더스와 아세아영화사와의 합작영화인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포스터이다. 홍콩무협영화의 색채를 띈다. (사진26)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영광영업공사와 아세아영화사의 합작영화인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포스터이다. 주연 여배우인 홍콩 배우 정향이 신성일과 남정임 사이에 작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1971년에 그는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을 연출한다. 아세아영화사의 여배우 공모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인데 당시 공모전 사진을 보면 지금의 오디션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사진27)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포스터 (사진28)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여배우 공모전 사진 1972년에는 영화제작사인 유림흥업을 설립한다. 그리고 1973년 이성구 감독 연출로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일본의 고즈시마섬에서 로케이션으로 제작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쥬리아는 임진왜란기 일본에 입양된 조선 출신 여성으로 천주교도로 성장해, 천주교를 박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 제안을 거절하여 유배당하고, 유배지에서 약자와 병자에게 헌신해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다. (사진29)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포스터 1973년 오타 쥬리아에 대한 기사가 국내에 소개되어 인기를 얻자 다섯 개의 영화사가 이 소재를 영화화하고자 경합했다. 영화사들이 기획안을 문화부에 접수했고 그 중 유림흥업의 작품이 선정된다. 유림흥업은 야심차게 일본 고즈시마섬에서 이 작품의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한다. (사진30, 31)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의 스틸 섬 사람들의 관심과 우호적인 협조 속에서 진행된 작품이라 벅찬 마음에 제작자는 영화 타이틀이 뜨기 전 작품의 취지에 대한 제작자의 당부 영상과 이를 일어로 통역하는 배우 김진규의 영상까지 넣어 완성시켰다. (사진32)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일본 고즈시마섬 촬영 현장. 보조출연을 해 준 섬 주민들과 함께한 사진으로 양복을 입은 이가 이지룡이고 오른쪽이 배우 김진규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단체관람도 기대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한 시사회에서 추기경이 관람 도중 나가는 사태가 발생할 만큼 영화에 불편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쥬리아가 유배를 가게 된 동기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쥬리아의 성녀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된 것이 원인이라 지적했다. 흥행을 위해 외설적인 묘사를 시도한 것이 오히려 흥행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진33, 34)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도꾸가와 이에야스 역의 허장강과 쥬리아 역의 신숙 야심차게 제작한 작품의 부진으로 타격을 입은 그는 10년 정도 합동영화사와 한진흥업, 남아진흥공사에서 부사장으로 있으며 극장업과 영화제작에 대한 자문과 기획 활동을 했다. 극장업과 수입, 제작을 아우르며 폭넓게 활동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작사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1986년 다시 다남흥업을 설립한다. 1992년까지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와 같은 흥행작을 수입했으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를 비롯하여 6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프리지스 오너>는 1986년 9월 다남흥업이 수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한 작품이다. 당시 신문에 의하면(《매일경제》 1986년 8월 13일 9면) 다남흥업은 <프리지스 오너>의 사전제작단계에서 수입을 결정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영화를 수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35, 사진36)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 개봉 당일. 종로 극장 단성사 앞의 풍경으로 관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길게 줄 서 있다. 단관 개봉관 시절에는 인기작의 경우 영화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관객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작자들은 이것 또한 광고라 생각하고 일부러 줄을 대로변으로 세우거나 티켓박스를 조금 늦게 열기도 했다. 1989년에 제작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는 작가 이문열의 요구에 따라 원작료를 러닝개런티로 선점하고, 베니스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 강수연을 캐스팅해, 영화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야심작이었다. (사진37, 38)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 홍보사진 이 작품은 음력설이었던 개봉일, 한파에도 불구하고 국도극장에서 을지로까지 줄을 선 관객들로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극장 문을 열었다. 31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그해 방화 3번째 흥행작이 된다. 그리고 1990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기획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해 흥행은 물론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영화가 된다. 그동안 그가 제작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만족시키고자 큰 투자를 감행했던 작품들이 기대에 못 미쳤으나 드디어 만족스러운 성과를 낸 작품이 나온 것이다. 그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의 성공 이후 소품 두 어 편을 제작한 뒤 40년 가까이 몸담은 영화계를 은퇴한다. 무일푼 단신으로 월남했지만 빠른 판단과 추진력, 도전정신을 통해 영화계에 족적을 남긴 그의 다이나믹한 인생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2012년 원로영화인 구술에서 좀 더 깊이 있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이 이원세 감독을 처음 만난 때는 1969년 초 가을로 생각된다. 태창흥업에서 ' 문정왕후 ' < 나봉한 감독> ' 마지막 편지 ' < 최훈 감독> '돌아오지 않는 다리' < 고영남 감독>등의 작품을 계속 쓰고 있을 때였다. 이원세 감독이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있을 때인데 하루는 태창흥업의 제작상무인 최재호씨가 본인에게 좋은 친구 한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하며 소개해 준 이가 바로 이원세 감독이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구, 잘 생긴 얼굴하며, 귀를 덮은 더벅머리, 당시 우리가 좋아하는 사나이 모습이었다. 만난 것은 처음이지만, 김수용 감독이 연출해 크게 성공한 작품 ' 수전지대 '의 시나리오를 쓴 이가 이원세 라는 사실에 금방 그와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되었다. 작가와 감독 지망생이 만났으니 작품 하나쯤은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고 의기투합, 경비는 최재호씨가 충당해 줘, 본인과 이원세 감독은 제주도로 급행, 작품 쓰기에 전력을 다 했다. <하니문 · 하우스>라던지 <성산 일출봉>, <외돌개>며 <사자바위>, 우리가 가 보지 않은 제주 구석은 없었다. 제주에 온지 두 달 만에 '꿀맛'이라는 제명의 작품을 완성했다. 신성일 , 문희 가 주연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을 무사히 끝내고 녹음을 마치자 문공부에 영화 검열을 신청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명 '꿀맛'이 문제가 되었다. 남의 집 아내를 사랑한 불륜이 어째서 '꿀맛'인가? 제명을 바꾸라는 통첩이 떨어졌다. 이원세 감독은 자기의 첫 작품의 제명도 사랑스러웠던지 여러 곳에 '꿀맛' 제명을 쓰게 해 달라고 했지만, 서슬이 퍼렇던 군사정권이었고, 가는 곳마다 정보부 파견관이 있어, 그들의 말이 곧 법이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제명을 ' 잃어버린 계절 '로 바꾸었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주인공 소라는 결혼식을 올리고 시집의 큰 목장에 들어오지만, 남편은 오랜 항해를 위해 집을 비우게 된다. 소라는 시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나, 치미는 뜨거운 열기로 긴 밤 잠 못 이루곤 한다. 이 목장 하인의 아들인 정신 이상자가 몰래 소라의 침실을 가끔 훔쳐 보곤 한다. 천우신조였을까 ? 넓은 목장 안에 꿀 채집 차가 들어온다. 소라 앞에 양봉쟁이 청년이 나타나 반찬도 얻어 가고, 물도 얻어 먹으며, 그만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런 두 사람의 사랑의 유희를 정신 이상자가 가끔 몰래 훔쳐 봄은 물론이다. 시아버지는 소라의 불륜을 알고 오래도록 고민 하다가 소라를 청년에게 주려고 결심, 청년을 불러 소라를 부탁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이제는 자유라며 굳게 쓸어 안고 또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이 광경에 질투를 느낀 정신 이상자는 양봉쟁이 청년을 살해하고 만다. 이에 소라도 목장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1971년 8월에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관객 9만여 명이 든 작품이었다. ' 기로 , 72' ' 흑지 , 72' ' 나와 나 , 72' 이 작품은 최무룡 , 하명중 , 우연정 이 주연한 작품인데 스토리는 <대학 중퇴생인 유진이 외삼촌의 부름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외삼촌이 준 자가용 한대를 가지고 귀국한다. 부산에서부터 가지고 오는 차로 인해 재일 교포로 인정받게 되고, 가짜 교포 행세를 하느라 사기도 치고, 점점 범죄의 포로가 돼 슬프게 살다가 가짜 이름인 <히라오까 유지로>로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원세 감독은 이 작품으로 <청룡 영화제 신인 감독상>을 받는다. ' 방년 18세 , 73' ' 석양에 떠나라 , 73' ' 특별 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 74'는 신일룡 , 윤소라 , 이대엽 이 주연했으며,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배태옥은 해방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철저한 공산주의 신봉자인 남편 황룡에게 휘말려 남노당 당원으로 조국에 침입해, 경찰에 잡혀 형을 받아 수감생활을 할 때 6. 25사변이 터져 서울의 감옥은 깨어지고, 배태옥은 석방 돼 <서울여성동맹위원장>이 되고, 공산당을 위해서 온갖 악행을 다 부린다. 9. 28 수복이 되자, 월북하지 못한 배태옥은 경찰에 잡혀 사형선고를 받으나, 과거 독립운동을 했다는 공 때문에 20년으로 감형, 20년의 옥살이하고 난 그 인생은 이미 끝나 있더라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아세아 영화제>에 출품돼 윤소라 씨가 <주연 여우상>을 수상한 바 있다. ' 특별 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 74' ' 아빠하고 나하고 , 74' ' 만나야할 사람 , 74' ' 빵간에 산다 , 74' ' 인간 단지 , 75' ' 특별 수사본부 외팔이 김종원 , 75' ' 꽃과 뱀 , 75' ' 목마와 숙녀 , 76' ' 광화문통 아이들 , 76' ' 엄마 없는 하늘아래 , 77' ' 악어의 공포 , 77' ' 속 · 엄마 없는 하늘아래 , 77' ' 철새들의 축제 , 78' ' 병아리들의 잔칫날 , 78' ' 전우가 남긴 한마디 , 79' 는 진봉진 , 장혁 , 전영선 이 주연한 <40번 뺏기고, 38번 찾은 158고지의 일화를 그린 작품이다. 적의 천년 요새를 파괴하기 위해서 특공대가 조직되고, 여럿의 특공대가 전사 하면서 적의 천년 요새에 침투, 시한폭탄을 장치하고 살아 남은 대원들만 귀대하는 순간, 적에게 발견돼 적의 추격을 받는다. 이에 늙은 장상사가 나서며 적들을 자기가 막을 테니 모두 떠나라고 외친다. 대원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장상사를 버리고 자리를 떠난다>는 이야기다. 이원세 감독은 이 작품으로 80년 <백상대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 땅콩껍질 속의 여자 , 79' ' 돛대도 아니 달고 , 79' ' 태양을 훔친 여자 , 79' '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 80' 이 작품은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는 소설가 조세희 의 작품을 영화한 것이다. 주연은 안성기 , 신우철 , 장미희 가 했으며, <행복동에 사는 난쟁이 김불이의 가족이 일으키는 부동산 투기의 전말을 그린 영화다>. 이 작품의 우수성을 이제 다시 말해서 무엇하랴! 그러나 할 이야기는 하고 가야할 게 아닌가? 유신 독재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이미 두 차례나 지나 간 터에 <행복동>처럼 못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떠들 때 이 영화가 나왔으니 문제였다. 그러나 대종상 영화제가 며칠 남지 않은 날 <문화공보부>의 영화 담당자가 이원세 감독에게 전화를 했단다. 이번 영화제에 귀하가 연출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으니 그 날 모두 양복을 입고 나오도록 해 달라는 이야기가 있었단다. 그런데 이원세 감독의 작품이 사회성을 망각했다는 이유로 영화제 시작 두 시간 전에 딴 작품들로 바뀌었다니, 그때의 심정이 오죽 했겠는가? 그때 정말 영화를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나중에 미국에 살면서 이원세 감독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 하늘이 부를 때까지 , 80' ' 매일 죽는 남자 , 80' '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 80' ' 하와의 행방 , 82'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 82' ' 3일 낮 3일 밤 , 83' ' 이방인 , 84' ' 그 여름의 마지막 날 , 84' 이 영화는 하재영 , 나영희 , 박근형 이 주연했으며, 스토리는 <대학 지하 서클에서 공산주의 이론으로 자라난 영철은 학교 소요 사태의 주범이 돼 경찰에 쫒기자, 일본으로 밀항, 조총련의 신기화를 만나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간다. 그러나 영철은 북한의 엉터리 선전을 보자 북한 탈출을 시도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북의 손에 희생된다는 이야기다.> 이원세 감독은 <대종상 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다. ' 여왕벌 , 85'는 이혜영 , 조용원 , 이주성 주연이었고, 스토리는 <영어회화 선생인 미희는 외국인과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자 방황하며, 이태원의 <여왕벌>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첫사랑의 남자 경수가 악의 수렁에 빠져 있는 미희를 구출하려고 하지만 미희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한편 동생인 정희가 미국인을 데리고 나타나 언니에게 과시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 스티브란 사나이는 다름 아닌 미희에게 사랑의 상처를 준 남자며, 그가 하는 일은 여자를 울리는 악한 사나이의 표본이었다. 미희는 동생을 구출하려고 스티브를 유혹해 그를 살해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또 반미 사상이 깊이 깔려 있다고, 수시로 정보부에서 오라는 호출이 수십 번이었단다. 이때야말로 영화를 그만 두고 평범하게 살겠다고 결심했노라고 이원세 감독은 후일 본인에게 말한 바 있다. 처남의 <미아리 양말 공장>도 망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돈 독촉도 받고, 정보부에서의 태도가 이원세 감독이 조국을 떠난 커다란 원인이었으리라. 본인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이민을 가 뉴욕 Ch. 25 한국 텔레비전 방송국의 보도담당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사무실을 꾸미기 위해 <크리스마스 · 트리>를 사려고 <롱아일랜드> 큰 시장엘 나갔다가 먼 발치서 아는 얼굴을 언뜻 보게 되었다. 분명 이원세 감독의 얼굴이었으나 당시 <크리스마스 · 트리>를 팔고 있는 모습만으로는 이원세 감독으로 짐작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눈을 여러 번 의심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이원세 감독이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미아리>에서 <양말공장>을 하는 처남의 사업이 잘 안돼 이원세 감독이 영화계 여러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처남의 공장을 도와주는 처지라고 하던데 그 공장이 쓰러지고, 이원세 감독은 빌린 돈에 떠밀려 미국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으나, 이원세 감독 이야기를 들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문화공보부>로부터 11개 부문이나 <노미네이트>됐다가 수상 두 시간 전에 다른 작품으로 바꿔진 일이며, 이태원 <여왕벌>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그린 것이 <반미사상> 때문이 아니었냐고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을 해 대 고국을 떠나 미국에 오게 됐노라고 이야기했고, 그 이유 중에는 가까운 영화계 이웃들에게 돈을 빌려 처남을 도와주고 공장이 망해, 돈을 돌려주지 못한 것도 큰 이유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 뉴욕에 함께 살면서 가끔 이원세 감독을 만나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인 배순미 여사와 외아들 승준이도 잘 크고, 공부도 잘하고 있다고 했다. 그후 이원세 감독이 큰 상가에 점포를 연 일이며, 그가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살던 어느 날 본인이 이원세 감독, 전우열 감독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영화계를 위해 뭔가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북 영화제'나 한번 해 보자고 제의했고, 두 사람도 찬성해 뉴욕 제1회 '남북 영화제'를 주동진 님의 주선으로 열게 되었으며, 북에서 엄길선, 홍영희 , 오미란 등 <인민배우> 8명이 참석했고, 우리 남에서도 신성일, 태현실 등 10여명이 참석해 아주 훌륭한 영화제가 되었다. 이원세 감독, 얼마 전 미국에 갔을 때 형이 뉴욕에 안 계신 이유를, 여러 사람이 본인에게 들려 주었지만 이형! 나는 압니다. 몸이 좀 불편해 사람을 만나는데 조금은 부담스런 모습이지만 열심히 그 치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형! 어서 빨리 그리다 만, 초상화를 완성해야 하지 않습니까? 보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 이원세 감독! 이두형 (시나리오 작가) / 2003년 <프로필> 1940년 11월 16일 평양 출생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국학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1년 < 잃어버린 계절 >로 데뷔 <수상 경력> 1973 청룡상 신인상( 나와 나 ) 1974 아세아영화제 주연여우상(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 1981 백상대상 감독상( 전우가 남긴 한마디 ) 1984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 그 여름의 마지막 날 ) <작품 연보> 1972 기로 / 나와나 1973 방년18세 / 석양에 떠나라 /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1974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 아빠하고 나하고 / 만나야 할 사람 / 빵간에 산다 1975 인간단지 / 특별수사본부 외팔이 김종원 / 꽃과 뱀 1976 목마와 숙녀 / 광화문통 아이 1977 엄마없는 하늘아래 / 악어의 공포 / 엄마없는 하늘아래(속) / 1978 철새들의 축제 / 엄마없는 하늘아래(병아리들의 잔칫날) 1979 전우가 남긴 한마디 / 땅콩껍질 속의 연가 / 돛대도 아니달고 / 태양을 훔친 여자 1980 매일 죽는 남자 / 하늘이 부를 때까지 / 그대앞에 다시 서리라 1981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82 하와의 행방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1983 3일낮 3일밤 1984 이방인 / 그여름의 마지막 날 1985 여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