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의 T.V 특종모험
- 감독
- 전유성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내가 후라이보이 를 처음 만났던 것은 1969년경이었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중학교 3학년 때 아동극단 시험 보러갔다가 떨어지고 고등학교 때 연극부를 학교에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하는 억양이 이상하다고 너는 배우가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심지어는 빳다를 치는 선배도 있었다. 배우가 안되더라도 이바닥(?)을 떠날 수 없었다. 대학교는 연극과에 입학하여 전공을 연출로 바꾸었다-연출전공자에겐 억양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는다- 그래도 배우 꿈은 못버리고 학교를 다니면서 탈렌트 시험을 보러 다녔다. 4번이나 떨어졌다. 챙피해서 죽고 싶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탈렌트 시험에 턱턱 붙는 거다. 내가 연출할 때 정말 재능 없어 보이던 아해들까지 탈렌트가 되어 여기저기 엑스트라로 나오는데 정말 미치지 않은 게 세계평화를 위해서 다행이었을 거다. 방송국 불지르고 싶었으니까! 뭐야 갑자기 이런 얘기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TV에 출연하는 길은 탈렌트. 가수, 코미디언이다. 지금은 리포터까지 합해서 한 가지 더 늘었지만!!! 탈렌트는 각 방송국마다 돌아가며 떨어졌으니 텄고 가수도 노래를 못하니 텄다. 한 가지 남은 게 코미디언이었다. 중학교 때 알고 지내던 여학생이 졸업 즈음해서 돌린 사인지에 나에게 부쳐주고 싶은 별명이 있다면에 ' 후라이보이 2세'라는 별명을 부쳐주고 싶었단다. 그래 결심했어! 후라이보이를 찾아가는 거야! 후라이보이는 지금도 쇼의 대명사가 되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동양방송의 간판프로그램 ''쇼 쇼 쇼''의 명사회자, 대사회자였다. 그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가? 동양방송의 ''쇼 쇼 쇼''는 그 당시 지금의 운형궁이 되어버린 자리에 운현궁스튜디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녹화를 했었다. 지금도 방송국 출입하는 게 일반인들에겐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더 했던 것 같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경비와 말다툼도 여러 번했던 거 같은데 경비의 이름이나 혈액형, 출신학교를 물어본다면 하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후라이보이 가 녹화하는 운현궁스튜디오에 가보니 김상희, 최희준 , 패티김 , 윤복희 등등을 구경하게 되었고 그 가수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꿈결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후라이보이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주위에 워낙 사람들도 많았고 대기실에선 포카 같은걸 하고 계셨다. 포카를 안하고 있은들 내가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었겠는가? 녹화날만 되면 찾아가기를 일고 여덟 번!!!!!!!!!! 화장실을 가시는 거다. 소변보시러. 나는 무작정 따라가서 옆에 섰다. 볼일도 없으면서 볼일보는 척하면서 나의 첫 대사가 시작되었다. '선생님 코미디 원고는 누가 쓰세요?' 볼일보시다 말고 그자세대로 나를 쳐다본다. 아무말도 없으시다.'제가 써올께요'하고 대답도 안 듣고 바로 화장실을 나왔다. 아흐!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처음뵙을때의 얼굴이 생각나네요!!! ''쇼쇼쇼''는 ''쇼쇼쇼'' 주제가가 나오면서 무용단의 무용이 시작되고 멀리서 뛰어나오는 후라이보이 가 카메라 앞에 와서 멈춰 서면서 골프스윙을 맨손으로 한 번하시면서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로 오프닝을 시작하고 봄이면 봄에 관해 어쩌구 저쩌구 다음에 가수의 노래! 노래 중간중간에 꽁트가 3~4개 나온다. 나오는 사람은 후라이보이 곽규석에 장고웅 , 양영일, 세 사람이 꽁트를 한다. 주로 세태풍자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가끔 특집일 땐 후라이보이 혼자 마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꽁트 대본을 내가 써가지고 간 거다. 잔머리 머리 굴려서 20여 개를 써가지고 갖다 바쳤다. 경비가 '어디가?'하고 물으면 '후라이보이 원고가지고 왔어요' 하면 무사통과다. 기다렸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내가 써준 원고를 어떻게 하는가를 집에서 토요일 ''쇼쇼쇼'' 시간에 하는가 안하는가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얼씨구 !절씨구! 내가 써다드린 원고를 가지고 꽁트를 하는 거다(물론 더 재미있게 고쳐서!)그러나 내가 써준 원고에 나온 대사 몇 마디는 오리지널 그대로 하시는 거다. 지화자! 좋네 !풍년이 왔네! 조바심이 생겼지만 이삼 주인가를 안갔다! . 왜? 그냥 쑥스럽기도 하고 날 못 알아보면 어떻하나하는 두려움도 있었고! 얼마 만엔가 ''쇼쇼쇼'' 녹화장을 갔다. 쭈빗거리고 복도에 있는데 '야!임마! 왜 안왔어' 하시는 게 아닌가? 날 알아보다니! 풍년이 또 왔네!!!! 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아흐! 짠돌이 이시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 그 당시 택시비 기본 요금이 90원이었다. 같이 택시를 타고 내리면서 백원을 내고 내리신다. 택시비는 기본요금 90원이 나왔다. 백원을 내시고 방송국 안으로 사라지시면 나는 잔돈 10원을 받아 들고 후라이보이 뮤직프로덕션이 있던 정동사무실로 간다. 바쁘시니까 매일 만나지는 못하지만 사무실엔 출근해서 여러 가지 잡다하게 할 일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야 10원줘!' 하시는거다. '10원이요? 왜요?' '야 임마 3주 전에 택시비 90원 나왔을 때 내가 100원내고 내렸잖아! 잔돈 안 받았어?' '받았는데요!' '그럼 내놔!' 하시는 분이다. 아주 오래된 일인데도 10원을 기억하시고 달라시던 분! 정동사무실에서 남산KBS까지 시간 남으면 자가용이 있는데도 걸어가시던 분! 다방에서 약속 안하고 꼭 중국집에서 약속하시면서 커피값에 조금 보태면 한 끼 먹을 수 있는데 다방에서 커피는 왜 마시냐고 핀잔주시던 분! 가끔 점심식사로 샌드위치를 싸와서 정동사무실에서 드셨는데 -그때만 해도 샌드위치로 식사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서양스러운 일이라 멋있고 앞서 나가시는 분이구나 하며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봤다 - ' 야! 너도 좀 먹어' 아이고 황송해라 이걸 어떤 방법으로 먹어야하나? 고민하던 시절! 어느 날은 ' 유성이 점심 안 먹었지? 빵 사다 먹을까?' '네' 하고 달려나가 빵을 사오면 맛있게 드시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빵은 간식이지 식사대용이 아니었다. 나는 - 얼마가 지나 월급날이었다. 월급에 꼬리표가 붙었다. 지금은 월급이 생각 안나지만 예를 들어 만원이라면 만7백원을 주시는 거다. '선생님 7백원이 뭐예요?' '응 얼마 전에 니가 나가서 니돈으로 빵 사왔잖어! 빵 값이야' 그걸 기억하시고 챙겨주시던 후선생님! 이렇게 짠돌이셨지만 후라이보이 곽선생님의 기사는 내게 자랑하는 말이 있었다. '연예인 기사중에는 내가 월급이 제일 많아!' 아흐! 가까이하기엔 너무 어려웠던 곽선생님! 외국오케스트라 지휘도 하셨고 외국의 유명연예인이 오면 국적불문하고 사회를 도맡아 하셨던 5개 국어를 하신 명사회자 ! 총소리, 대포소리, 기차소리 못내는 소리가 없었던 원맨쇼의 개척자!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종합광고대행사를 차렸다가 징그럽게 운영이 안 돼어 부도나서 일본으로 도망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신 곽선생님! 다시 돌아오자 채무자들이 용서해줘서 놀랐던 일! 어느 날 목사님이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진짜 목사님이 되어 나타나신 선생님! 우리나라에 전자라이터가 처음 나왔을 때 그 전자라이터를 처음 수입하신 분의 아버지 환갑잔치에 사회 보러 갔다가 출연료 외에 보너스로 전자라이터를 선물로 받았다. 아버지가 달라고 해도 안 주던 전자라이터였다. 스위치를 누르면 타타닥! 하고 불꽃이 튕겨져 나와 가스에 불이 붙던 지금은 흔해 빠져서 담배 피우는 고등학생들도 가지고 다니는 전자라이터가 그 당시에는 너무너무 신기한 물건이었다. 누구나 그 라이터를 보면 탐내고 켜보고 뺏어 볼려고 하던 전자라이터였다. 어느 날 녹화장에 가지고 갔더니 장고웅 선배가 라이터에 눈독을 들인다. '안돼요! 아버지꺼라!!'일단 고비는 넘겼다. 다음 관문은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차례다. 타타닥! 불붙는 게 신기해 보였던지 던힐 라이터주시면서 바꾸자고 하신 곽선생님! 역시 아버지를 팔아서 안된다고 했는데 그 라이터를 집에서 뒷주머니에 넣고 갔다가 재래식화장실에 빠트렸다. 얼른 건져내어 씻고 또 씻고 또 씻어 말려서 그 다음날 자진해서 곽선생님에게 바쳤다. -이 사실은 처음으로 밝히는 나만의 비밀이다-지금은 금연운동이 한참이라 상상도 못하지만 전자라이터로 불을 타타닥 부치면서 ''쇼 쇼 쇼'' 마지막을 장식하시던 선생님! 대신 당신이 사용하시던 던힐 라이터를 나에게 주셨다. ( 그 비싼 던힐 라이터를 장고웅에게 빼았겼음) 언젠가 꽁트 원고를 갖다드리니까 원고를 읽어보시고 구봉서 선생님께 갖다주라는 겁니다. 왜 그러셨는지 이유를 몰랐지요! 나중에 물으시는 겁니다. 구봉서선생님이 하는 그 원고의 코미디를 봤냐는 겁니다. 물론 저는 봤다고 대답했지요! 봤으니까! 우리팀이 했으면 그만큼 재미있게 못했을 꺼야! 하시던 후선생님! 아흐흐! 곽규석 선생님 뵙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만지고 싶어요. 미국가실 때 제가 쓴 원고를 다시 한번 읽으셨대요! 감격했지요! 한 마디 하시더군요! '유성이 니가 쓴 원고를 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돈이 없어서 생긴 일만 썼냐?'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 울립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돈이 없었던 시절이니 렇뭬티? 생기는 일은 상상이 안 되었던 거지요! ' 전유성 이가 내 마지막 제자야' 하시던 말씀! 원맨쇼도 못하고 외국어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억양도 이상한데 ! 마지막 제자라니요! 황공무지하지요. 한국에 가끔 나오시면 찾아가면 잘 있니? 예수 믿어라 널 위해 기도 많이 한다. 그 기도 덕분에 아직도 버티고(?)있습니다. 지금도 사회자들이 가수나 누구를 소개할 때 누구 씨하면 씨자를 도르를 말아 이름보다 씨자를 더 크고 높게 발음할 때면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보고 싶습니다. 대본 중에는 곽선생님이 '야 백 원짜리 한 개 가지고와' 전유성 '네'라고 써놓고 녹화 들어가서 '야 백 원짜리 한 개 가지고 와' 하시면 '저... 오십원짜리 두 개로 가지고 와도 되지요?'했다가 녹화 끝나고 장고웅 형한테 대본으로 뒤통수 맞던일! '야 임마! 한 마디라도 더하면 낫냐?' 하시면 죄송합니다 대답하면서 속으론 '그럼 자식아 한 마디 더하면 낫지!!!' 뒤통수 맞는 거 보시며 '유성이 한 마디 더하게 해줘라'하시던 곽 선생님 보고 싶어요 만지고 싶어요 한번 안겨 울고 싶어요 !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곽규석 선생님! 전유성 (개그맨) / 2003년 <프로필> 1928년 11월 22일 경기도 안성 출생 1999년 8월 31일 타계 1951년 공군군악대창설로 데뷔 희극인으로 사회자, 악극, 영화 등 다방면으로 활동 <주요 작품>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 , 후라이보이 무전여행기 , 식모 삼형제 , 남자미용사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