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정,전쟁영화의 설계사
- 감독
- 박상홍, 양창주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이봉준, 김갑의, 김종원, 박진수, 서정민, 설태호, 이해룡, 최성
사진: Marry Ellen Mark, “ Apocalypse Now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 지옥의 묵시록 >(1979)은 당시 일본 개봉 제목 ‘地獄の黙示録’을 그대로 활용해 번역되었으나, 원제 ‘Apocalypse Now’는 사실 ‘바로 지금 이곳이 지옥’ 또는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의 종말’이라는 처연한 고발, 좌절, 참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개봉한 지 무척 오랜 시간이 흘렀고(감독 확장판(Redux, 2001)을 기점으로 해도) 이후 직접적 영향을 받은 수작들이 여럿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탁월한 전쟁 영화 중 하나’ 정도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지옥의 묵시록>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넘어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 그리고 예술과 역사-현실의 경계를 짓이기는 정교하며 무자비한 실험이다. 이 영화는 내게 전쟁의 잔혹함을 넘어, 소리와 이미지가 어떻게 관객을 사로잡고 내면의 심연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는 음악을 비롯한 창작 작업의 범위를 넘어 내 삶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다. 영화는 문명의 야만을 파헤쳤다고 평가받는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1899)을 기반으로 하지만, 식민 시절 콩고에서 베트남 전쟁으로 배경을 치환한 단순한 서술적 흐름에 기대지 않는다. 몽환적인 편집과 공간을 압도하는 사운드 디자인, 그리고 음산하게 폭발하는 음악들이 혼재하며 관객을 전장의 무질서 속으로 밀어 넣는다. 스무 살 무렵 친구의 강권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영화를 통해 감각적으로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 특히 록 밴드 더 도어스(The Doors)의 <The End>(1967)가 흐르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불타는 정글 위를 비행하는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와 주인공 윌라드 대위(마틴 쉰)가 머무는 숙소 천장팬의 움직임이 하나의 악보처럼 맞물릴 때, 나는 영화 속에서 음악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배경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심리적 공간을 창조하는 도구임을 깨달았다. 불타는 정글과 헬리콥터, 천장팬, 그리고 윌라드 대위가 겹쳐지는 영화 초반부 영화 속 서사의 시작점인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은 니체적 의미에서 초인적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전체를 기준으로 무척 적은 분량인 그의 대사는 한 음절 한 음절이 묵직한 무게를 공유하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공포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공포와 친하게 지내야 해(Horror has a face... and you must make a friend of horror.)”라는 그의 읊조림은 전쟁터의 참혹한 현실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를 암시하며 질문한다. 영화에서 음악은 영상의 보조재가 아니라 핵심으로 자리하며 인물들의 심리, 이념, 광기를 대변한다. 헬리콥터 부대가 민가를 향해 무차별적 공격을 퍼붓는 유명한 장면에서 흐르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 Prelude to Act III)>은 단순한 감정 고양의 장치가 아니라, 전쟁 자체를 하나의 장엄한 스펙터클로 완성하며 폭력에 대한 고발과 창작-예술의 경계, 동시에 오락 산업으로서의 영화라는 뒤엉킨 모순적 현실마저 깨진 거울마냥 선연하게 드러낸다. 커츠 대령, <발퀴레의 기행>이 흐르는 전투 장면 (사진: "Apocalypse Now"( 1 , 2 , 3 ), IMDb) 모임 별은 지난 25년간 소속이 없는 독립적인 밴드이자 브랜딩/디자인 스튜디오로 활동해왔다. 우리 팀은 분명 통상적인 영화음악 감독은 아니지만,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에 참여한 이후 꾸준히 학생 영화, 실험 영화, 저자본 영화 작업들에 참여해 왔다. 가능한 상업적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기 위해 애써온 우리에게, <지옥의 묵시록>의 제작 과정에서 감독과 출연진, 스태프가 함께 만들어낸 예측 불가능성의 미학과 실험 정신은 여전히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최근 담당한 영화 < 폭설 >(윤수익, 2023)에서는 서퍼들의 몸을 때리는 차디찬 겨울 파도소리와 낡은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들에서 뽑아낸 극한적 소음들을, < 힘을 낼 시간 >(남궁선, 2024)에서는 클래식 기타 연주와 랜덤 알고리즘 베이스의 VST 악기 패턴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작은 실험들을 수행 중이다. 귀를 사로잡는 음률 보다는 반복되는 패턴 속에 미묘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주어, 청자가 음악을 뚜렷이 인식하지 않는 상태로 영화 속 서사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폭설>과 <힘을 낼 시간>의 음악 (이미지 클릭)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나 돌아보니 ‘업계 표준’에서 벗어난 활동 방식과 작법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다양한 예술가들, 기관, 기업들과 함께 예술, 상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새로운 시도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진 여러 실무 담당자의 고마운 배려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또한 새로이 작업을 시작하는 독립적인 젊은 예술가들과 기획자들에게 작게나마 실질적 도움이 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있고, 새삼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짐한다. 코폴라는 <지옥의 묵시록>을 만들며 마주한 끊임없는 문제와 막대한 혼돈을 고스란히 작품 안에 담아내며 영화를 완성했다. 불확실성과 모순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작품은 단순한 작가의 종속물, 재현물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온전한 실체가 되었다. <지옥의 묵시록>이 없었다면, 내가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혹시라도 아직 영화를 감상하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1979년의 최초 개봉 버전, 2001년 공개된 리덕스(Redux), 2019년 파이널 컷(Final Cut) 중 단연 리덕스 를 추천드린다. 조태상(모임 별 작곡가, 디자이너) l 모임 별( Byul.org )은 우연히 만난 친구들의 술자리 시낭송회에서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여전히 친한 친구들의 술모임이며,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며 녹음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일상을 기록 중이다. 김경렴, 서현정, 최원겸, 황소윤, 오태경, 김수빈, 조태상, 장용석, 이선주로 구성되어 있다. 조태상은 모임 별에서 작곡과 디자인을 담당한다. 2012년 정규음반 <아편굴 처녀가 들려준 이야기>, 2017년 <밤도깨비들을 위한 선곡집>, 2019년 <주인 없는 금>, 2024년 <우리 개> 등을 발매했고,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 < 힘을 낼 시간 >(남궁선, 2024) 등의 영화에 음악 작업으로 참여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는 한국검열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반공법 위반, 최초의 감독 구속 사건을 초래한 유례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만희, 1963)의 비평적·대중적 성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만희 감독은 1964년, 새로운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를 연출한다. 전쟁 중 북한군에게 사로잡힌 간호부대 소속 7명의 여군 포로(정확히는 4명의 여군과 양공주를 포함한 3명의 민간인 여성, 그리고 운전병 1명으로 총 8명이다)를 호송하던 북한군 수색대 대원들이, 중공군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군들을 구하고 남한으로 귀순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는, 개봉 직전인 1964년 12월 중순 검찰에 의해 ①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② 무기력한 국군을 묘사했으며 ③ 북한괴뢰군을 찬양하고 ④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참상을 과장 묘사하는 등의 외세 배격 풍조를 고취했다는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때 검찰은 이만희 감독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당시 법원은 영장 발부를 기각했다. 이듬해 2월, 검찰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 청구가 받아들여져 이만희 감독은 3월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약 40일간 옥중 생활을 해야 했다. 1965년 12월, 결국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았지만, 그 사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채 1965년 7월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명으로 개봉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악명 높은 이 사건의 전개 과정과 결말은 당시 검열서류를 통해 상세히 남아있다. 1막: 석연찮은 상영보류 결정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검열서류 에 따르면 1963년 11월, 이 영화의 제작신고가 이루어졌고,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1964년 12월 7일, 완성된 영화의 본편 검열이 접수되었다. 12월 8일에는 실사 검열이 이루어졌고, 12월 10일에 상영허가가 승인되었다. 양공주의 노골적이고 비판적인 대사 및 여군이 “괴뢰장교에게 경례하는 장면” 등 화면 1개 처, 대사 3개 처에 대한 제한이 가해졌다. 통상적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서류는 다른 서류와 달랐다. 일반적으로 상영허가 서류가 영화제작사에 대한 공문 발송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이 서류는 내부 보고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상영허가 결정이 제작사에게 통보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약 열흘 후인 12월 19일 공보부 검열 실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검열경위서를 통해 밝혀진다. 12월 19일은 검찰이 이 영화의 감독 겸 각색자 이만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필름을 압수한 다음날이었다. 경위서에 의한 영화의 검열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글꼴: 경기천년바탕) 공보부 담당자에 의해 작성된 <7인의 여포로> 검열경위서 (1964. 12. 19.) 위 경위서에 따르면 1964년 12월 10일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통상적인 수준의 제한 및 개봉에 동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11일, 급작스럽게 보류방침 이 통보된다. 그 내막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중앙정보부의 상영보류 조치와 검찰의 기소가 결정되면서 공보부는 급히 움직여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2월 하순 공보부는 각 지역의 시도지사에 공문을 발송했고, 합동영화주식회사는 지역 극장에서 상영 중 혹은 상영 대기 중이던 예고편 필름을 반환받았다. 한편 공보부는 상영보류 후 검찰 기소에 들어가기 전인 12월 15일 공보부자문위원회영화분과위원회(위원장 이순근)의 자문 심의를 받았다. 이순근, 이청기, 여석기, 이진섭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이 12월 16일 제출한 장문의 보고서는 이 영화의 작품적 측면, 사상적 측면, 법적 측면을 고찰하였고, 종합적으로 군데군데 오해를 살 여지는 있지만 작품적으로 우수하고 반공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언론들 역시 공보부 자문위원들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했고, 이들의 입을 빌어 영화에 대한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월 21일,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는 감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하고 필름 압수영장만 발부했다. 물론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사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는 여전히 보류된 상태였고 이 영화의 수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2막: 감독의 구속과 논란의 확대(1965년 2월) 1965년 1월 검찰은 감독을 소환조사한다. 불구속 상태였지만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2월 4일 마침내 감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은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를 거론하며 앞서 언급한 네 가지 혐의를 거론했다. 감독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들은 앞다투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했다. 영화인협회 산하 영화감독협회 역시 공보부에 접수한 진정서를 통해 검찰의 공소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한 예술인의 인신구속이 앞으로의 창작활동을 심리적으로 위축케 할지 모르”며, “반공군사영화가 앞으로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추는 위기를 조성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만희 감독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인신구속을 계기로 검열당국은 2월 6일 합동영화주식회사에 영화상영허가 보류를 공식적으로 통보한다. 동 영화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수사 중에 있다는 이유였다. 구속 다음날 발 빠르게 작성된 서류였다. 1964년 12월 7일 신청된 서류에 대한 2개월 만의 공식적 답변이었던 셈이다(물론 당사자 간의 비공식적인 의사소통은 있었을 것이다). 이후 검열당국의 반응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3월 15일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보석을 허가하여 석방 결정했다. 사회적인 여론과 영화계의 반응이 부정적인 가운데 감독마저 석방되면서 영화를 살리기 위한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희 감독의 선처를 호소한 감독협회 진정서 (1965. 2. 10.) 3막: 천신만고 끝 누더기 상태의 개봉 합동영화주식회사는 4월 19일 작성하여 29일 접수한 민원에서 재편집과 보충촬영을 했으니 재심의 후 상영보류를 해제해주기 바란다는 취지를 밝힌다. 그런데 이 재편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대사 삭제 100여 개처, 화면 삭제가 10개 처에 달하는 대규모 수정판이었다. 편집의 대상은 대개 검찰의 공소장에서 거론된 네 가지 문제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반부는 양공주 관련, 후반부는 북한군의 언행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또한 북한 수색대장과 동료들이 “자유대한으로 월남귀순할 것을 모의”하는 장면이 보충촬영을 통해 추가되었다. 이는 귀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민원은 공식적으로는 4월 29일에 접수되었지만, 부속 자료를 감안할 때 실제로는 4월 20일에 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 검열 담당과 함께 4월 27일 재편집본에 대한 재심의를 진행했다. 재심의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은 2주가 훨씬 지난 5월 14일 전달되었다. 영화사 측의 대규모 편집에도 불구하고, 정보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우선 영화제명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고, “검찰에서 기소한 문제점을 완전 삭제치 않았으므로 이를 시정하고 반공적인 내용으로 대폭 보강할 것”을 요구했다. 완전 삭제치 않은 부분으로 거론된 것은 “괴뢰군이 양공주를 총살하는 장면, 중공군이 여포로를 겁탈하려 하자 인민군이 중공군을 사살하고 인민군이 영웅적으로 동족애를 발휘하는 장면” 등 6개 장면이었다. 나아가 영화의 장면들을 “삭제하고 재편집함에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뚜렷한 반공적 이념을 공고히 하도록 주의깊게 보강”할 것을 요청했다. 애초 제작사의 재편집을 거치며 원모습을 거의 상실했던 영화는 그 잔재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공보부에 보낸 「영화재심 의견통보」(1965. 5. 14.) 이에 영화사는 5월 25일 자로 영화검열보류재심 신청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성자와 작성일자를 알 수 없는 공보부 내부 메모(부전지)에 의하면 공보부가 “CIA”에 해당 영화에 대한 의사를 문의했고, CIA, 서울지검 등의 관계기관과 충분한 합의를 거친 후에 보류해제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간 필자를 포함한 몇몇 연구자들이 “CIA”를 미국의 정보기관으로 오해하는 일도 있었으나, 여러 정황을 감안하건대, 한국 중앙정보부의 영어식 약자로 생각된다. 합동영화주식회사는 5월 25일 상영보류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였으나, 공보부 내부 문건에 의하면 일부 필름의 재편집이 완료되지 못해 검열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편집 과정이 그렇게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쩌면 5월 25일 당시 필름이 재입고되었으나, 공식적인 서류에 드러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정부 측의 불만족 사항이 전달되어 필름이 반려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5월 26일 CIA 측에 재심을 통고했다는 공보부의 7월 5일 자 서류상의 내용을 감안할 때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어쨌든 재검열 대상 필름은 6월 23일 입고되었고, 6월 28일 중앙정보부가 참석한 가운데 재검열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보부는 7월 2일 “본 영화는 64. 12. 8 검열 당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후 동 작품이 수차에 걸친 수정으로 불온 부분을 삭제 또는 보강하여 건전한 반공영화로 재편집되어 보안상 유해로운 사항이 없음으로 상영보류 해제하니 상영조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7월 2일 중앙정보부의 입장을 전달받은 공보부는 7월 10일 마침내 영화 제명을 <돌아온 여군>으로 개제하고, 추가 대사 삭제 9개 처의 의견으로 상영보류 조치를 해제 하게 된다. 중학생 이상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이었다. 7월 10일 상영보류 해제를 통고받은 영화사는 드디어 7월 30일 자로 이 영화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검열로 화제가 되었던 사실을 강조하여 홍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5년 7월 28일 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상영금지되였든 화제의 전쟁드라마! 드디어 상영금지 해제”라는 자극적인 선전문구와 함께 “칠인의 여포로”라는 원명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제작사가 검열을 상업적으로 활용한다는 최근까지의 검열당국의 주장과 연계할 때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돌아온 여군> 광고 (경향신문, 1965. 7. 28.) 4막: 개봉이 끝이 아니었다-국방부의 참전 드디어 기나긴 과정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국방부 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국방부는 1965년 7월 30일 이 영화가 “여군 전체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군의 대외 위신을 손상하며 장차의 여군 모병에 큰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삭제 또는 수정하여 상영하도록 귀부에서 조치하여 주시기 의뢰”한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장면은 인민군 부관이 여군을 강간하는 장면과 관련 대사였다. 이 요구를 접수한 공보부는 검열 주무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주관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보부는 국방부의 요청을 자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국방부의 요청사항을 받아들일지를 중앙정보부에 문의한다.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자부의 의견은 이미 충분히 전달한 상태이므로, 국방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공보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하라는 답변을 보낸다. 공보부는 결국 8월 10일, 국방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작사에 추가제한 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제한이 어느 정도 실효를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7월 30일 자로 개봉을 했고, 8월 10일이면 이미 개봉 2주차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봉관에서 대략 2~3주를 흥행하던 당대의 관행을 감안할 때, 적어도 이 조치는 서울 개봉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후 지방의 개봉 등에는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국방부, 「군사극영화 “돌아온 여군”에 관한 삭제 의뢰」(1965. 7. 30.) 그리고 이만희 감독에 대한 법원의 판결 절차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법원의 판결은 1965년 12월 8일에 내려졌다. 처음 문제가 된 지 정확히 1년 만이었다.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무죄에 가까운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1심의 선고에 대해 검찰은 항소했고, 무려 4년 뒤인 1969년 3월에야 법원이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기나긴 이야기는 이제서야 끝이 났다. 영화적 반공이 본격화되다 우리는 막연하게 반공영화에 대해 정부가 추동 혹은 지원했던 영화 장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반공영화는 정부 정책을 지원하는 일종의 관제영화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검열 현장에서 항용 가장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장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반공영화이기도 했다. 비단 <7인의 여포로>뿐 아니라 1955년 작 이강천 감독의 < 피아골 > 역시 영화의 용공적 성격이 문제가 되었고, 조긍하 감독의 < 철조망 >(1960), 이만희 감독의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 이두용 감독의 < 최후의 증인 >(1980) 등도 검열과 관련하여 당국과 마찰을 빚은 영화로 회자된다. 당대 평자들이 <7인의 여포로>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밝혔듯, 영화감독과 같은 창작자를 포함한 영화계 인사들은 보다 흥미로운 반공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북한군 캐릭터,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전장에서의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 보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해석을 가해야 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자의 의도는 검열자가 보기에 때로 작은 뉘앙스의 차이만으로도 한국전쟁과 남한 정부, 혹은 냉전적 세계체제의 본성을 폭로하는 불온한 영화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과 북의 극한적 대결 구도의 선봉에 섰던 반공영화 장르는 뜻하지 않게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위험한 장르이기도 했다. 검열자의 시각에서 <7인의 여포로>는 이러한 반공영화의 잠재적 위험성이 현실화된 극명한 사례였다. 그리고 <7인의 여포로> 사건은 이후 ‘ 영화적 반공 ’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상징적이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3공화국이 안정되며, 냉전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정권의 권위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제 한국전쟁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당대의 냉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에 강고하게 포착되고, 관점과 캐릭터가 고정된다. 그와 함께 영화적 반공에 포착된 한국전쟁 영화, 스파이영화, 간첩영화, 문예영화 등은 점차 그 상업적 활기를 잃어갔으며, 1970년대에 이르게 되면 정부의 인위적인 “우수영화” 정책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해 가는 상황에 이른다. 그 중요한 분기점이 <7인의 여포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부록: <7인의 여포로> 사건 경과 ※
전투기 편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화면을 횡으로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비행기의 놀라운 속도감은 꼬리의 연기로 배가된다. 자욱한 운해가 화면을 송두리째 채우고 있다. 은빛 동체의 전투기들 저 아래로 지상은 까마득하게 검붉은 지형으로 보인다. 동체에 선명히 찍혀 있는 ‘R(epublic).O(f).K(orea). AIR FORCE’. ‘대한민국 공군’의 위용을 자랑하며 세 대씩 삼각편대를 구성한 9대의 비행기가 화면의 전방으로 날아 들어와, 가로질러 후방으로 빠져나갈 때 속도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공기와의 마찰음 사운드가 이를 청각적으로 확장시킨다. 그 위에 울려 퍼지는 주제가.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이 경쾌한 행진곡풍의 주제가는 곧 대한민국 공군의 공식 군가로 채택될 터이다. < 빨간 마후라 >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 순간의 신상옥의 야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성공한 색채 공중촬영”, “속도감 있고 박력 넘치는” 화면이라는 1964년 당시 <빨간 마후라>에 부여되었던 평가는 정말로 이 영화의 모든 것으로 보인다. 신상옥 은 한국 전쟁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전혀 새로운 공중촬영을 위해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가용자원을 동원한 것 같다(참고로 공군을 소재로 한 최초의 한국영화는 1954년 홍성기 가 감독한 영화 < 출격명령 >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공군 파일럿이라는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와 전우애를 그리고 있는 이 영화에서 공중촬영은 아직 시도되지 못하고 있었다.) 공군의 전면적인 지원으로 공중촬영을 달성해내고 있는 이 영화는 당시 일반적인 영화 한 편당 사용되던 필름 양의 무려 4배에 해당하는 8만 자를 사용하였으며(이중 절반이 생소한 공중촬영의 ‘시험’ 촬영에 소용되었다), 특별히 10배 줌 렌즈가 사용되었고, 고속촬영을 위해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고속촬영기를 빌려왔다. 이로써 < 성춘향 >(1961) 이래 컬러 시네마스코프라는 당대의 영화적 세계표준시를 성공적으로 시험하고 있던 이 테크놀로지스트는 비행기라는 대상이 보여주는 속도와 높이를 화면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과연 <빨간 마후라>가 선사하는 것은 칼라 시네마스코프 공중촬영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시각적 쾌감이다. 화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아찔한 활공. 그것들은 종종 급강하하며 폭탄을 투척하고 다시 떠오르는데, 정찰기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된 이 장면들은 비행기-카메라와 대상인 전투기의 속도라는 이중의 움직임-속도 속에서 놀라운 쾌감을 선사한다. 속도와 높이를 탑재한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사물들이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지상의 대공포가 하늘을 향하여 포탄을 발사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간단하게 지상의 사람과 사물들을 제압한다. 덧붙이자면 신상옥은 한국전에서 한국 공군의 활약상을 그려내는 이 영화에서 소위 역사적 고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영화의 전투기는 F-86이고, 클라이막스에서는 미그기와의 공중전이 감행된다. 실제로 F-86 제트기는 한국전 당시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였으며(한국 공군의 주력은 P-51 머스탱. F-86은 전쟁 이후 3년이 지나서 한국 공군에 도입되었다), 한국 공군의 인적 물적 자원하에서 공중전은 불가능했다. 참고로 고지전으로 상징되는 지상의 지리한 공방전과 별개로 한국전에서 미군은 전쟁 초기부터 단 한 번도 제공권을 상실한 적이 없었다. 승패의 불확정, 휴전으로 잠정 종결된 이 전쟁을 다루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이 미공군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정 부분 이로부터 기인한다. 즉, 공군 표상 속에서 이 전쟁의 이미지는 승리로 어필될 수 있었다. 1964년의 시점에 보여지는, 한국전 당시 F-86을 타고 지상 폭격과 공중전을 치러내는 대한민국 공군이라는 이 ‘소망적’ 형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백해 보인다. 그것은 한국전 당시 미공군이 수행하던 역할을 한국 공군으로 치환시킴으로써, 강력한 (동시에) 현대적인 대한민국의 남성성을 과시한다. 그런데, 이 명백한 표상 전략은 한국 전쟁영화라는 맥락 속에서 조금 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에서 미군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전략은 1961년 < 5인의 해병 >(김기덕)이 한국전쟁을 다룬 최초의 전쟁영화로 자리매김한 이래 한국 전쟁영화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법으로 제시되었다.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오롯이 한국군의 힘으로 내부를 지켜내는 이 문법을 통하여 한국 전쟁영화는 전쟁영화의 본원적인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적과 동지를 가르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슈미트) 위에서 어떻게 내부의 공동체를 창출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 한편, 이 공동체를 위해 죽어간 자들의 희생을 상기시킴으로써 구체적이고 심정적인 결속으로 나아가는 애도의 공동체 형성과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빨간 마후라> 이전의 두 편의 성공적인 한국 전쟁영화 <5인의 해병>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은 ‘한국군’과 ‘희생’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어떻게 한국전쟁을 이 정치공동체의 원천적 장소로서 내러티브화하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을 한국군‘만’의 전쟁으로 부각시킬 때, 현재의 이 국가가 이들의 죽음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를 공고히 하고자 할 때 여기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필연적인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 전쟁이 ‘내전’인 한에 있어서 제기되는 적의 이중성과 관련된 문제. 그러니까 이 적은 적이자 또한 ‘형제’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바로 이 문제와 직면했다. 인민군의 양민학살 ‘이후’로부터 시작하는 (그럼으로 인민군의 형상을 비껴가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적의 자리에 중국군을 둠으로써 내전이 야기하는 심리적 딜레마를 해소하고자 한다. 산등성이를 가득 메운 중국군이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며 벌판으로 밀려 내려온다. 롱 숏의 사이즈는 이들을 절대다수의 숫자로만 인식하도록 만든다. 참호 속 아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달려오는 적들은 번번히 쓰러지지만 저 숫자를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에서 감지되는 것은 보병적 전투의 무력감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죽음들은 <5인의 해병>의 희생 서사를 반복하며, 동일한 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하지만 저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오는 적을 상대로 한 전투의 무력감은 <5인의 해병>과 달리 이 희생에 기초한 그 어떤 승리의 예감도 봉쇄시키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이를 상쇄시킬 것인가? 1964년의 <빨간 마후라>는 이 순간 한국 전쟁영화가 봉착한 문제에 대한 아마도 가장 ‘탁월한’ 답변으로 보인다. 앞질러 말하자면 그것은 오로지 이 영화가 공군의 영화, 폭격기 조종사의 시점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보병의 무력감은 지상을 향한 공중에서의 폭격이라는 절대적인 위치의 비대칭성을 통하여 상쇄된다. 비행기가 점유하는 고공의, 속도를 동반한 시선. 이 속도와 높이 속에서 보병적 감각의 무력감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속도와 높이는 필연적으로 사람과 사물의 고유성의 상실이라고 할만한 것을 동반하는 것이다. 시선의 위치는 너무나 높고, 너무나 빨라서 저 아래 있는 사물들은, 사람들은 거의 분간되지 않는다. 사물들과 사람들이 그 개별성을 상실할 때, 그것이 그저 추상적인 덩어리로 인식될 때 감정은 얼마나 이입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를, 혹은 그녀를 분간할 수 있는가? 그 혹은 그녀의 얼굴을, 몸을 볼 수 있는가? 만약 볼 수 없다면 당신에게 그 혹은 그녀의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미를 갖는가, 혹은 그저 무의미한 덩어리에 불과할 뿐인가? 오늘 ‘괴뢰군’이 숨어있는 자신의 고향을 폭격한 조종사는 폭격을 당한 자들 중에 당신의 친척이, 아는 자들이 있지는 않겠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모르죠, 있었는지도.” <빨간 마후라>가 내전이 야기한 그 어떤 심리적 얼룩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조종사의 대답은 그 어떤 과장도 없이 솔직하고 담백한 것이다. 그의 위치에서 지상의 얼굴들이란 이미 식별 불가능하다. 이 순간 적의 얼굴을 둘러싼 딜레마는 원천적으로 해소된다. 그리고 곧이어 조종사는 이 냉담함을 통해 더 높은 사명으로 가닿는다. “그러나 저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슬퍼하기 전에 이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찌 되든 싸움에 이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빨간 마후라>는 한국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그 어떤 영화보다 밝고 명랑하다. 슬픔도, 탄식도, 체념도 없는 이 세계는 누군가의 언급처럼 거의 ‘찬란’해 보일 지경이다. 그것은 ‘모르죠’라는 저 언급이 보여주고 있는바, 얼굴, 개별성, 구체성의 상실을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구현해낸 스펙터클의 핵심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내전인 한에 있어서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심리적 부하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영화이다. 그것은 오직 하늘을 나는 자의 시선을 획득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 시선은 조망하는 시선이자, 편재하는 시선이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자는 빠른 속도와 높이를 획득한다. 높이 속에서 사물들과 사람들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그것은 그저 지형이 된다. 속도 속에서 사물들과 사람들은 빠르게, 거의 순식간에 뒤로 밀려가며 사라진다. 비행기에서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무정한’ 시선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시선을 획득한 순간 이 영화는 1960년대의 한국 전쟁영화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냉전 아시아의 문화장이라고 할만한 곳에서 통용가능한 이미지-상품으로 기능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빨간 마후라>는 대만에서 거의 붐이라 할만한 현상을 만들어냈고(신상옥에 따르면 대만 국책영화를 이끌었던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은 그에게 이런 영화를 한 편 만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홍콩, 싱가폴, 태국 등지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둬들였으며, 일본 극장(쇼치쿠 계열)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첫 번째 한국영화로 기록되었다.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가 이룩해낸 공중전 스펙터클의 기념비적 이미지는 냉전 아시아에서 통용되는 시각적 보편성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 지점이 <빨간 마후라>가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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