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등
- 감독
- 김일형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정지훈, 문석범, 이종빈, 문미영, 김대중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겟 아웃>은 어두운 날 밤, 어떤 흑인 남성이 납치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시점이 바뀌고 흑인인 남자친구 크리스는 백인인 여자친구 로즈가 함께 로즈의 본가인 '아미타지'가 에 가기로 하였는데, 자신이 흑인이라는 점을 여자친구의 가족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로즈에게 털어놓는다. 그러자 로즈는 크리스를 괜찮다며 안심시킨다. 크리스는 흑인 친구인 교통 경찰관 로드에게 강아지를 맡기고 둘은 로즈의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가는 길에 사슴을 로드킬 하게 되고, 경찰이 부르게 된다. 백인이었던 경찰은 운전자였던 로즈 뿐만 아니라 크리스까지도 신분증을 확인하려 한다. 그러자 로즈는 그것을 인종차별로 여긴 건지 경찰들의 행동을 지적하게 되고 결국 경찰들은 크리스의 신분증을 받지 못한 채 부숴진 전조등과 백미러를 고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간다. 우여곡절 끝에 로즈의 본가에 도착하게 된 크리스는 로즈의 가족들에게 환대를 받게 된다. 크리스는 로즈의 아버지인 딘에게 집을 소개받으면서 집의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딘은 백인 가족과 흑인 피고용인 조합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알지만, 오래 전부터 이 집안과 함께해 온 사람들이라 내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딘의 말에 크리스는 납득한다. 영화 <겟 아웃>은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조던 필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조던 필 감독은 미국의 세컨 시티 코미디 극단 출신으로, FOX의 ‘Mad TV’에서 만난 키건 마이클 키와 결성한 Key & Peele 콤비로 미국의 코미디 전문 방송국인 코미디 센트럴에서 본인들의 이름을 건 쇼를 진행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조던 필 감독을 코미디언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 영화 <겟 아웃>의 감독이 조던 필이라는 것을 알고는 많이 놀란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조던 필 감독은 젊어서부터 영화를 찍고 싶어 했으며 감독으로 입봉하기 위한 일종의 과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직업인 코미디언을 택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겟 아웃>의 중심이 되는 인종차별이라는 주제에 전부터 매우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코미디언 시절부터 자주 인종차별에 관한 주제로 개그를 짜기도 했으며,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내재된 고정관념적 인종차별, 그리고 흑인 사회 속에서조차 존재하는 인종차별에 대해 자주 미디어에서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신의 꿈과 생각을 실현시킨 조던 필의 연출 입문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저예산 영화인 <겟 아웃>은 무려 1억 2400만 달러의 수익을 챙겨 흑인 감독의 연출작 중 영화사상 최대 흥행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으며, 평론가들과 각종 영화 평가 사이트들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코미디언 출신 감독의 데뷔작이 이토록 흥행하고 좋은 평가까지 챙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겟 아웃>은 치밀한 복선의 설계와 메타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면 시작부터 건장한 흑인 남성이 누군가에게 납치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실 납치 당한 흑인은 영화 중반쯤에 나오는 이미 백인에게 몸을 빼앗긴 안드레이며 그와 전화를 하던 여자친구는 사실 안드레를 납치하기 위해 접근했던 크리스의 여자친구 로즈였다. 이 장면으로 흑인도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미타지 가족들의 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흑인 월터는 밤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기도 하며, 작중 크리스의 여자친구인 로즈를 예쁜 아이라며 칭찬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육상선수였던 딘의 아버지가 월터의 몸을 빼앗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딘은 자신의 아버지가 베를린 올림픽 미국 대표 선발 예선 대회에서 흑인 육상선수였던 제시 오언스에게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크리스가 "그 분에게는 아픔이었을 것이다"라고 할 때 딘이 "그러셨지. 하지만 극복하셨어"라는 현재 진행형 대사를 넣어 아버지가 살아있는 듯한 뉘앙스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딘이 크리스에게 "어머니가 이 주방을 너무 좋아하셔서 물건을 그대로 남겨놓았다"고 할 때 바로 흑인 하녀인 조지나가 나온다. 조지나가 사실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한다. 그리고 파티를 할 때 크리스에게 로즈와의 밤자리에 대해 물어보거나 타이거 우즈를 언급하며 크리스의 운동 능력에 대해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언뜻 봤을 때, 단순한 노파심에 던지는 오지랖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크리스의 몸을 빼앗기 위해 그를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과정이다. 로즈의 부모님이 계속해서 크리스에게 금연을 권유하는 것도 크리스의 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상품 가치의 하락을 걱정하는 것이다. 로즈의 아버지 딘은 로즈와 크리스로부터 차를 타고 길을 가던 중 사슴을 쳤다는 소리를 듣고는 사슴은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미국 재건기 때 백인에게 협력하지 않는 흑인들을 가리켜서 이들을 검은 사슴이라고 하였다. 사실 딘의 말에서 사슴은 흑인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겉으로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며, 과하다 할 정도로 흑인을 두둔하는 딘이 사실은 흑인을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겟 아웃>은 줄거리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인종차별이라는 정말 오랫동안 숱하게 대두되어 왔던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영화에 사용했다. 그리고 스토리는 비교적 평화롭게 시작되어서 점점 고조되며 공포스러워지는 분위기와 주인공의 위기, 그리고 위기의 극복, 다소 개연성이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겟 아웃>의 전체적인 흐름까지, 정말 무난한 스릴러 영화의 표본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보면 영화 <겟 아웃>은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뻔한 스릴러 영화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겟 아웃>을 실제로 본다면 영화 그저 그런 뻔한 영화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겟 아웃>은 특별하다. 그렇다면, <겟 아웃>이 우리에게 익숙한 여러 소재를 다루면서도 같은 소재를 다룬 여타 영화들와 다르게 신선하고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겟 아웃>이 사회적으로나, 영화의 소재로서나 우리에게 익숙한 인종차별을 다루었음에도 신선하고 특별한 이유는 역사 속 인물의 서사나 사건을 주로 다루는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영화 중 흔치 않은 장르인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영화라는 점도 큰 몫을 하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인종차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우리가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고정관념을 가지고 인종차별적 시선으로 영화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함정적인 요소들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초반에 크리스와 로즈가 그녀의 본가로 향다던 중 백인 경찰들이 갑자기 크리스와 로즈가 타고 있는 차를 검문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로즈는 마치 경찰들이 흑인인 크리스를 흑인이라는 이유로 검문하려 한다는 듯 크리스를 두둔하였고, 경찰들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물러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당연히 경찰들이 크리스가 흑인인 탓에 검문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영화 속 설정을 살펴보면 로즈의 본가 근처 흑인의 실종 사고가 많아서 경찰들이 흑인인 크리스를 불러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흑인인 크리스의 얼굴에 발리는 새하얀 면도 크림,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백인들, 하나같이 모두 검은 차에서 내리는 백인들, 빨간색 장신구들을 하고 있는 백인들과 작중 혼자서 파란색 옷을 입고 있는 크리스 등 색깔을 대비시키는 의도된 연출도 영화를 보는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스릴러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귀신과 같은 소재들을 사용한 것이 아닌 최면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사용하고 귀신보다도 무서운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로 공포를 자아냈다는 점은 <겟 아웃>을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영화들뿐만 아니라 스릴러 장르의 영화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겟 아웃>에서도 작은 아쉬움이 존재한다. 바로 크리스의 친구 로드이다. 작중 로드는 등장할 때마다 코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작품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크리스를 구해내는 데 결과적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현실성과 개연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다. 앞에서 이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할 때, 개연성과 현실성에 관해 말한 것도 이 이유에서 말한 것이기도 하다. 로드는 연락이 되지 않는 크리스를 구하려 경찰서로 가지만, 경찰들은 흑인들을 붙잡아 최면을 통해 성노예로 만드는 마을에서 크리스가 실종되었다는 로드의 주장에 로드의 말을 비웃는다. 그래서 결국 로드는 혼자 크리스를 구하러 가, 결국은 크리스를 구해내게 되지만, 로드가 크리스를 구하러 가는 과정과 그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 이 점이 <겟 아웃>에서 아쉬운 점이었다.
< 타바코 로드 >(1941)는 당대에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실패했으며 오늘에도 존 포드의 영화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영화에 속할 것이다. 앤드루 새리스의 표현을 옮기면 이 영화는 “1940년과 1941년에 거둔 존 포드의 엄청난 성공행렬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 사람들은 최고의 위치에 오른 포드가 왜 이런 프로젝트에 손댔는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포드의 열렬한 찬미자인 태그 갤러거의 두꺼운 저서도 이 영화에는 단 세 문장만 할애한다. “시나리오를 쓴 누널리 존슨은 < 타바코 로드 >가 엉성하고 서투른 구식 코미디에 의존함으로써 대실패작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몇몇 마술적 순간들이 등장하지만.... < 굽이도는 증기선 >에서 하층민을 바라보는 포드의 단순명료한 시선이 여기선 들뜬 포퓰리즘의 과장된 제스처로 대체되었다.” < 타바코 로드 >의 원작은 브로드웨이에서 1933년부터 1941년까지 최장기 공연기록을 세우며 대성공을 거둔 연극이다. 어스킨 콜드웰Erskine Caldwell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잭 커크랜드Jack Kirkland가 희곡을 썼다. 앤드루 새리스는 이 영화의 실패 이유가 당시 할리우드 제작준칙(hollywood production code)이 콜드웰의 재기 넘치는 음란함과 커크랜드의 화장실 유머를 용인하지 않는 바람에 존 포드와 누널리 존슨이 원작의 많은 부분을 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판단도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이 영화의 제작 경위에 대해선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어 당시 포드의 의중을 알긴 힘들지만, 적어도 포드가 그의 영화 전체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든 음란함과 화장실 유머 때문에 원작에 이끌리진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1937년 오마하, 연극 <타바코 로드>가 공연되는 극장 내가 아는 범위에서 이 영화의 지지자는 두 사람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2014년 서울과 부산에서 존 포드 회고전이 열릴 무렵 간행된 「씨네21」에 보내온 자신의 존 포드 10베스트 명단에 < 타바코 로드 >를 포함시켰다. 이 명단에는 포드 전문가들도 잘 거론하지 않는 무성영화 <버킹 브로드웨이>(1917) <켄터키 프라이드>(1925)도 들어있다. 그리고 하스미다운 코멘트가 덧붙여져 있다. “< 철마 >(1924) 혹은 < 3인의 악인 >(1926)에서 시작해 < 수색자 >(1956)으로 끝나는, 그리고 < 밀고자 >(1936) < 역마차 >(1939) < 젊은 날의 링컨 >(1939) 등이 포함되는 포드의 10베스트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은 우리에게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도쿄의 유난히 더운 날씨 때문에 내 마음은 포드의 덜 알려진 영화들로 향한다. 물론 추운 날에는 이 명단이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포드 열광자인 린지 앤더슨이다. 그는 “관점의 일관성을 고수하면서도 무드와 악센트를 교차시키는 포드의 재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 타바코 로드 >를 제시한다. 앤더슨은 이 영화를 “회한에 찬 애상과 격렬한 슬랩스틱, 냉혹한 풍자와 부드러운 감상성을 오가며 무드를 끝없이 변주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특출한 솜씨”를 보여주는 포드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내로라하는 포드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만큼 극단적으로 견해가 갈리는 영화는 <타바코 로드> 외엔 찾기 힘들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노부부인 지터 레스터와 에이다 레스터는 목화농업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황폐화한 타바코 로드에 살고 있다. 17명 정도의 자식을 두었지만(그들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이젠 모자라고 착한 딸 엘리 메이와 역시 모자라지만 거의 미친 아들 듀드, 그리고 유령처럼 주위를 서성이다 불현듯 사라지는 노모가 가족의 전부이며, 끼니를 잇기 힘들만큼 가난하다.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의 땅이 은행에 차압당하고, 며칠 안에 농지 임대료를 내지 않으면 3대째 살아온 타바코 로드를 떠나야 할 처지다. 위기의 지터 노인은 엉성한 작전을 벌인다. 사적인 소감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2005년쯤 이 영화를 뒤늦게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정상이 아니어서 마음이 가는 인물은 하나도 없는 데다, 특히 소란스럽고 경박한 아들 듀드는 때리고 싶을 만큼 짜증 나고 거슬렸다.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는 사실상 없으며, 상태가 많이 안 좋은 인물들이 벌이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헛소동과 실소가 새 나오는 촌스런 유머와 슬랩스틱이 영화의 거의 전부였다. 난센스 코미디를 넘어선, 요즘의 은어로 ‘병맛’ 코미디였다. ‘이건 위대한 존 포드의 영화일 수가 없다.’ 황당무계한 영화 리스트라는 게 있다면 당장 최상위에 올리고 싶었다.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이 영화가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엔 즉각 해명하기 힘든 과격하고 대담한 몸짓이 관류하고 있다는 느낌,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보다 사적이고 무모한 그 몸짓이 모종의 해방감을 빚어낸다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이 영화보다 1년 전에 만들어져 모두에게 절찬 받은 < 분노의 포도 >를 다시 본 뒤에 더욱 강해졌다. 만일 누군가 <분노의 포도>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면 < 타바코 로드 >를 당분간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분노의 포도>에서 뭔가 답답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타바코 로드>를 보고 나와 비슷한 느낌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사적인 느낌의 몇 자락을 말해보려 한다. < 분노의 포도 >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영화는 포드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례없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며 메시지의 노골적 언명이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여기서 하층민인 톰 조드 일가는 나쁜 세상에 의해 상처 입고 수탈당해 떠도는 순결하고 가련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우리는 이 시선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같은 의미에서 이 시선이 규범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의 견해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라면 특별히 칭송할 것도 문제 삼을 것도 없는 이 규범적 시선이 존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가 봐온 바와 같다. 존 포드의 영화는 대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스테핀 페칫이 연기하는 흑인은 충직하지만 멍청하며, 인디언은 강직한 전사와 잔혹한 살육자를 수시로 오간다. 여성들은 <일곱 여인> 등 소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수동적이며, 하층민들은 대체로 선량하지만 소란스럽고 잘 속는다. 포드의 탈규범적인 성향은, 그의 정치적 보수성을 비판하는 진보적 비평가들에 의해 종종 경시되지만, 그의 작품이 지닌 특별한 활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포드는 지금 세대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전력투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거침없다는 포드의 각인이 새겨졌다”고 말할 때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 분노의 포도 >는 공백과 비약의 수사학(<분노의 포도> 편 참조)에도 불구하고 < 러틀리지 상사 > < 샤이엔의 가을 > 등과 함께 포드의 드문 규범적인 영화에 속한다. < 굽이도는 증기선 >(1936)이 하층민의 악덕과 무지 그리고 미덕과 용기가 난장을 벌이는 축제의 영화라면, <분노의 포도>는 무고한 하층민의 고난과 시련이 점화한 분노의 영화이며 정의의 영화다. 두 영화 사이에 놓인 1939년의 ‘젊은 링컨’은 난장의 도취에서 정의의 소명으로 망설이며 느리게 이행한다. < 타바코 로드 >의 놀라운 점은 중년의 포드를 성공으로 인도한 이 궤도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스스로 탈선한 열차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고 가난한 주요인물 모두가 동정할 여지도 없는 금치산자에 가까우며, 서사는 비루한 소동들의 연쇄일 뿐이다. 얼핏 보기에 포드는 < 분노의 포도 >에서와는 정반대로 이 가련한 하층민들을 조롱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터 노인은 가족과 합세해 아내(지터의 막내딸)가 도망갔다며 징징거리는 사위 러브(놀랍게도 워드 본드가 연기한다)를 구타해 그가 갖고 있는 무를 빼앗아 먹으며, 도망간 막내딸 대신 언니를 그에게 반강제로 보낸다. 지터는 어렵사리 구해온 옥수수를 먹느라 아이들 몰래 삶아 먹느라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와 집을 떠났다가 얼떨결에 돌아온 지터가 “어제부터 할머니(그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듯)가 안 보이네. 저기 숲으로 가서 죽었나 보군”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기가 막힌다. 물론 등장인물의 슬픔에 카메라가 깊이 동조하는 ‘마술적 순간’들이 간혹 등장하지만, 이 장면들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왜소해 아무리 봐도 애상과 풍자, 슬랩스틱과 감상이 균형을 맞추었다는 린지 앤더슨의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그런 표현은 < 굽이도는 증기선 >과 < 젊은 날의 링컨 >에나 어울릴 것이다. 무엇보다 포드는 이 영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시키길 거부하려는 것처럼 결말조차 터무니없어 보이도록 만들었다. 모든 소동이 엉겁결에 정리되었을 때, 그가 얻은 건 10달러밖에 없다. 7년 동안 멈춘 목화 농사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필요했을 두 아이는 그사이에 떠났다. 그는 이미 농사지을 힘이 남아있지 않아 보일 만큼 늙어버렸다. 그런데도 이 추레하고 왜소한 노인은 어이없게도 “올해가 내 인생 최고의 해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 모든 면에서 < 타바코 로드 >는 < 분노의 포도 >를 뒤집어버린다. 마치 <분노의 포도>가 자기 영화가 아님을 강변하려는 듯, 같은 사회적 처지의 주인공을 내세워 놓고 인물도 사건도 모두 저열화하며, 진지한 감정과 의미 있는 행동의 가능성을 봉쇄한다. 간혹 이질적인 것들을 뒤섞되 균형과 조화를 파기한다. 자기 반동 혹은 자기 파괴의 시도처럼 보이는 포드의 이런 선택의 동기를 짐작하기는 힘들다. 다만 <타바코 로드>를 보고 나면 포드를 불균형의 충동, 불협화음의 욕망을 억누를 수 없는 작가로 다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뿐이라면 < 타바코 로드 >는 ‘흥미로운 실패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난감함 속에서도 내가 매혹된 건 이 영화의 어떤 몸짓과 운동의 형상들이다. 난센스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일관된 방향의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부서짐의 운동이고 유일하게 일관된 행위가 있다면 사물을 부수는 행위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그러하다. #1 #2 #3 타바코 로드로 불리는 이 공간은 이미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다. 이웃의 저택도 지터의 초라한 오두막집도 모두 폐허의 형상이다. #4 #5 폭발음을 내며 위태위태하게 마을 길을 달려오는 지터의 작은 지프는 담을 부수며 진입하고 스스로도 바퀴가 하나씩 내려앉는다. 비가 쏟아지면 지터의 헛간도 현관도 내려앉는다. 이런 붕괴의 형상이 도입부에 제시되었다면 통상적 서사는 붕괴의 반대방향 즉 재건과 재생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 타바코 로드 >의 서사도 표면적으로 그런 방향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을 출신 중에서 제일 멀쩡한 청년 팀이 지터를 도우러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거의 핑계다. <타바코 로드>의 진정한 관심사는 이 붕괴 직전의 공간에 고급승용차가 소속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다. 경위를 간단히 밝혀두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온 이웃 여인 베시는 이 마을의 엉터리 목회자이자 얼치기 예언자다. 그녀는 지터의 정신 나간 아들 듀드(자동차 경적을 울리는 게 유일한 취미인 저능아다)에게 반해 그와 결혼한 뒤 자신의 재산 전부인 보험금 800달러를 고급승용차(Ford Super De Luxe Convertible)를 사는 데 써버린다. 지터는 1년 치 농지 임대료 100달러가 없으면 쫓겨나게 되므로 이 승용차가 향후 벌어질 사건의 중심에 놓일 것으로 우리는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사태는 황당무계하게 전개된다. #6 #7 #8 #9 모자란 듀드는 차를 사자마자 나무를 들이받고 덮개를 미친 듯 뜯어내며 차를 부수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손봐주겠다며 전조등을 만지던 지터는 차를 더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결과 하루 만에 고급승용차는 초라한 고물이 되어버린다. 차를 몰래 팔아 100달러를 마련하려는 지터의 시도 외엔, 이 고급승용차를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이다. #10 그리고 이 영화의 백미가 등장한다. 운전을 방해했다고 듀드가 러브에게 시비를 걸자, 칭얼거리던 러브는 이제야 워드 본드답게 말없이 듀드를 때려눕힌 뒤 길가에 처박힌 차를 뒤집어 박살 내버린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헛소동의 심장이다. 붕괴 직전의 이 공간에 고급승용차가 소속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라는 < 타바코 로드 >의 진정한 관심사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그것도 함께 부서져야 한다. 이 이질적 사물이 빨리 타바코 로드 자신의 형상처럼 무너져 내려야 한다. < 타바코 로드 >는 표면의 서사와는 무관하게 부서짐의 운동이며 붕괴의 유희다. 지터의 마지막 대사는 붕괴운동의 완료를 위장하며 동시에 암시하는 말이다. 사태가 호전될, 다시 말해 붕괴가 멈추고 재건이 개시될 어떤 전망도 없을 때, 가장 좋은 일은 죽음이다. 지터도 할머니처럼 사라져 죽어갈 것이며 이것이 타바코 로드의 형상이 이를 종착지일 것이다. 이것이 훌륭한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다만, 서사의 표면적 흐름과는 정반대의 운동과 형상이 전개되는 기괴한 영화를 달리 본 적이 없다.(계속)
낮이 밤으로 바뀌고 수많은 불빛들이 보인다. 빛이 채워졌던 자리에 어둠이 앉고 다시 작은 빛들이 하나둘씩 생긴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 멀리 혹은 더 멀리에 있는 불빛들을 보면 궁금해 지는 것들이 있다. 차창 저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은 꼭 자기만을 비추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빛들은 무언가를 비추고 있고 비추는 범위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빛은 굳건하게 또 어떤 빛은 화려하게 또 어떤 빛들은 웅크리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 빛들이 다 어떻게 또 어떤 이유로 만들어 졌는 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빛들이 비추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영화 < 낮과 밤 >은 지방에서 올라온 말수 없는 소녀가 서울의 가난한 동네로 흘러들면서 시작한다. 동네는 적의도 환대도 없다. 소녀도 쉽사리 소통을 바라지 않는 인상이다. 어느날 그녀는 자전거를 고치러 들른 가게에서 일을 하는 청년과 안면을 익힌다. 타향살이를 시작하지만 평범해보이는 동네는 은근히 범죄가 흉흉하고 구멍가게 비스무리한 편의점에 취직한 그녀 또한 번번히 가볍고 무거운 범죄의 대상이 된다.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연거푸 강도를 당한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그저 안면을 익힌 자전거 가게 청년 뿐이 없다. 영화는 장르적인 기교를 쓰지 않아도 제법 긴장감이 있다. 일상적이면서도 이방인에게 낯설고 무서운 모습을 모여주는 서늘한 도시 안에서, 그녀와 자전거 가게의 청년은 조용하게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 청년 또한 언뜻 그 도시의 위험요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그녀를 해칠 것 같지는 않다. 마치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 렛미인 >이라는 스웨덴 영화가 서울이라는 공간의 옷을 입은 것 처럼, 영화는 범죄와 위험이 노출되는 공간에서 그와 다른 온기를 절제로 만들어내며 매력을 드러낸다. 서로간의 관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선악을 구분해 놓지는 않는다. 그녀와 그 또한 의중을 알 수 없다. 그녀는 마지막 그를 만나러 간다. 해는 지고 있고 그녀는 먼 거리에 멈춰서서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둘이 만나는 길 저 멀리서 서로가 말없이 자전거의 전조등을 비출 때, 그 둘 사이에는 서로에게만은 안전하다는 싸인이 있다. 외롭고 무서워질 밤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간 그 길목에서 서로의 안전지대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도시의 총총한 불빛들 중 하나가 그렇게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