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끼나와 전투
- 제작년도
- 1955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호프 >(나홍진, 2026)는 우리가 알던 비평의 한계를 절감하게 했다. 비평 글 각각의 탁월함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비평의 작동 방식이 <호프>를 둘러싼 말들을 특정한 장에 끌어당기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것은 제도적 패배다. <호프>는 제2의 < 디 워 >(심형래, 2007)가 아니었다. 영화를 즐겨 보는 이들 사이에선 <디 워> 정도의 화제가 된 것만 같았고, <호프>를 두고 수많은 말이 오고 갔음을 누구나 느꼈다. 하지만 <호프> 주위엔 논객이라 할 만한 매개가 없었다. 2007년의 <디 워> 사태는 진중권 평론가를 비롯한 일련의 기성 평론가 진영과 포털 사이트에 모인 대중의 갈등 양상으로 번졌었다. 양극단에 다중 다수의 논객이 생겼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할리우드를 향한 사대주의 등 여러 사회적 담론이 부풀었다. <호프>엔 말만 있고 뼈가 없었다. 상술한 논객, 달리 말해 중심 지대가 된 논지가 부재했다. 이것은 <호프> 스스로가 원한 결과이기도 하다. 다수의 공식 석상에서 밝혔듯 나홍진 감독은 앞만 보고 즐기는 영화를 택했다. 장재현 감독이 < 파묘 >(2024) 개봉쯤 밝혔던 태도와도 비슷하다. 극장 엔터테이닝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대중영화 감독들은 다 같이 ‘보기만 해도 재밌는’ 영화를 꿈꿨다. <호프>도 그렇듯 보인다. 1980년대를 가리키는 다소간의 이미지가 영화에 내포되었기는 하나 이것은 기호가 되지 않는 기표에 가까웠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 이후 《씨네21》 김소미 기자가 설명한 것처럼, [1] <호프>는 작중 ‘서브 텍스트’를 최대한 장난스럽게 소거해 가는 영화였다. <호프> 개봉 이후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이든 반대하는 이들이든, 1980년대라는 맥거핀에 관해선 딱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야기하지 않았다”기보단 그러질 “못했다.” 다시, <디 워>의 사례처럼 어떠한 담론의 실재라도 만들었냐의 차원에서 비평은 <호프>를 이기지 못했다. 전술했듯이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매체와 창구, 플랫폼이 <호프>로 휩싸이긴 했다. 말 그대로 휩싸였다. 그저 분위기에 휩싸인 듯 보였다. 매체부터. 《씨네21》은 <호프>의 작가, 장르, 서사 등에 관해 비평했다. 이어서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의 얄 사다트 평론가,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의 글을 실었다. 글 하나하나의 가치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며, <호프>라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호프>에 대해 생산됐던 말들이 순환적으로 돌고 도는 허무의 궤에 빠졌단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좋은 비평일지라도 대중들의 거친 찬동이나 거센 반발을 그러모으진 못했다. 비평이 꼭 대중과 영합해야만 한다는 고루함의 태도는 아니다. 다만 적어도 <호프>에 대해서는, 한여름의 텐트폴 영화에 있어서는 제 몫을 했어야 만족스러웠을 듯하다. 대신 <호프>를 두고는 비평적 담론에 대한 논의보단 평론가 개인의 인격과 이력에 대한 대중의 비난이 잇따르기까지 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이동진 평론가의 말조차 그랬다. [2] <디 워> 마지막의 ‘아리랑’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다시 말하지만, 개별 비평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더 큰 사태다. 질량 없는 부피, 맥락 없는 요소, 총체 없는 부분. 얄 사다트 평론가는 “미국에서 흔히 쓰는 ‘larger than life’라는 표현은, 어쩌면 위대한 블록버스터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인지도 모른다.” [3] 라며 <호프>를 상찬했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한국에서 <호프>를 두고 발생한 일련의 현상에 빗대어진다. 니콜라스 레이가 <실물보다 큰> 그림자를 보여줬듯이 <호프>에 대한 비평은 그것의 실재보다 큰 음영으로만 존재했다. <호프>에 대한 말은 흐릿했고, <호프>에 대한 말들에 반응하는 말들이 더 뚜렷했다. 아무런 생각도 안 해야 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듀나 평론가의 말처럼 “<호프>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영화가 아무 생각을 안 할 때” [4] 이기 때문이다. <호프>는 그 내부의 원리에 천착할수록 힘을 잃는 덩어리다. 이 작품이 어느 IPTV를 통해 수입된 이름 모를 감독의 영화였다면 많아야 수백 명 정도가 기억하는 B급 영화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호프>는 한국 영화산업의 중심에 있는 700억 원(추정)짜리 대작이다. ‘컬트’가 될 수 없다. 세상에 수백억 원을 들여 수백만 명이 봤으며 북미와 유럽에 배급된 컬트영화란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론적인 모순. <호프>는 작아야 하지만, 너무 커졌다. 역도 성립한다. 더 커야 하지만, 너무 작아져 버렸다. 모순은 더해진다. <호프>는 칸 경쟁부문에 진출하여 국내 평자들에게 모종의 비평적 요구를 선보인 ‘작가주의적’ 작품으로 소비됐다.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하나의 토큰처럼 사용한 유럽 영화계의 전략이었을까. 여하간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나홍진은 봉준호 , 박찬욱 이후 한국영화를 견인할 것만 같은 인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에 <호프>를 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매체와 평단의 방기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말해도 문제, 말하지 않아도 문제. 하지만 마땅한 방법론 따위 없는 듯한 절벽. 필자는 이에 관해서 ‘한국식 작가주의의 패배’라는 요지의 단상을 남겼다. [5] 영화보다 큰 곳이 아니라 감독의 세계관에 들어가 비평하던, 즉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 의 영화를 작가 개인의 것으로 탐색하던 2000~2020년대의 작가주의 비평으론 <호프>에 대적할 수 없단 것이다. <호프>와의 싸움은 애초부터 패배의 운명, 허무의 감각을 타고났다.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호프>의 내적 가치는 딱히 없다. 이 가치 없음의 가치에 관해 구구절절한 글을 쓴 적도 있다. [6] <호프>에 부여된 비평의 질료란 영화 바깥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호프>는 한국영화이기에, 그 어떤 틀로도 규정되지 않는 아웃라이어이기에, 장르적으로도 영화사적으로도 작가주의적으로도 큰 가치가 없는 부수이기에, 한국영화가 꾸준히 배태해 온 다성적 모방의 성취에 극도로 기대고 있기에, 대신 내부적으로는 자체적 맥락을 일절 가미하지 않았기에 유의미” [7] 하다. 간단히 말해 <호프>에 대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영화 매체의 테두리를 오고 가는 원심력의 원리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작품과 작가를 탐하기보단, 비평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제도의 지형도를 더 면밀히 살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비평 제도와 비평적 틀은 ‘바깥’을 이야기하는 힘을 잃어왔다. 구심력을 택해왔다. 임재철 평론가는 1999년 《필름 컬처》 1호의 권두에서 이 사태를 예견했다. “현재 한국의 영화 비평은 글쓰기가 응당 가져야 할 제도와의 긴장감을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다. 비평 자체가 마치 자신이 제도의 일부분인 것처럼 -심지어 아무런 대중적 영향력이 없는 경우에도- 착각하는 경우도 왕왕 목격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비평의 자족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평이 영화 창작 주체 그리고 나아가서는 영화 제도의 구성원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산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소통은 위상의 차이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거칠게 볼 때 한국식 작가주의란 감독들을 신봉하고, 그들의 미시 세계를 해제해야 한다는 1990년대 전후 국내의 시네필리아적 계보에서 연장했다. 그런데 <호프>에서 나홍진의 작가성 같은 것은 이 거대한 콘텐츠 놀음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었고, <호프> 비평에 제대로 맞물릴 수 없었다. 비평은 작품과 제도, 그 어느 곳과도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이가 문제의식을 느꼈다.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일종의 갈증 같은 것을 느낀 듯하다. 『호프 끝장』 [8] 이라는 제목으로 8월 31일 출판 예정인 하나의 평론 선집은 이에 관한 리액션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 책의 소재는 <호프>를 둘러싼 모든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며, 이 책은 반응을 생산하는 모든 이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기획되었다.”라는 책 소개 글이 단서다. 이야기를 더 나누자는 제스처이며, 유의미한 시도인 듯하다. 다만 이러한 기획조차 <호프>의 허무를 완연히 이기긴 힘들 것이라 슬그머니 비관해 본다. 아직 책의 내용을 상세히 읽진 못했지만, 기획 배경과 사전 공개된 한 꼭지의 다음 내용에 미루어 보았을 때 그렇다. “그렇기에 <호프>는 신정원 과 < 차우 >를 다시 불러내며 ‘한국의 시네필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친다.” [9] 두 가지의 의문이 드리운다. 첫째, 『호프 끝장』이 택한 책의 물성은 <호프>란 허무를 모종의 틀에 가두기 위한 방책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호프>의 범석( 황정민 )과 주민들이 외계 종족을 보고 느낀 공포의 감정과 유사한 반응일 테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제야 <호프> 안쪽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 글 역시 <호프>의 허무를 이기지 못한 사례의 하나란 이야기다) 정체 모를 언어가 눈과 귀를 파고들 때, 우리의 본능은 자연스레 공포를 느낀다. 도망가거나 공격한다. 『호프 끝장』은 후자인 듯하다. ‘끝장’이라는 제약의 언어를 통해 <호프>를 둘러싼 말들의 확산을 한 주머니에 가두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낯선 괴물을 포박하여 감금하듯이 비평가들은 이것에 대한 ‘끝장’을 원하는 듯 보인다. 손아귀에 넣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호프>의 크기는 웬만한 주머니의 용적량을 넘어섰다. 둘째, 왜 한국의 ‘시네필’들이 <차우>로 단결해야 하는 것일까. 궁금증의 시작은 꽤 개인적이다. 필자 역시 저 부름에 사전적으로 응답한 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7월 6일 <호프>의 언론배급시사회 직후 필자는 개인 SNS에 <호프>의 뚜렷한 레퍼런스가 <차우>임을 언급했다. [10] <차우>를 아는 이라면 대개 그랬을 것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겪었던 세대에게, <차우>와 신정원 감독은 현재 우리가 잃어버린 충무로의 자기반영적 패스티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호프>는 이런저런 장르적 요철을 뿌리 삼아 발진한 대중영화이기에 <차우>의 호명엔 어느 정도 당위성이 생긴다. 틀린 말이란 의도가 아니다. <호프>와 <차우>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 ㈜영화사 수작, 빅하우스(주)벤티지홀딩스 (사진: Daum ) 여기서 짚고 싶은 점은 <호프>가 <차우>의 적자라든지 하는 비평적 주제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차우>를 아는 이라면 대개 그랬을 것”이라 말하는 필자의 태도야말로 이 속 간지러운 의문의 원흉이다. 김신 평론가는 KMDb의 ‘비평, 안녕하십니까’에서 동시대 한국 시네필들의 폐쇄성 또는 군집성을 지적한 적 있다. “다수의 시네필 집단은 종종 영화와 비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몇 가지 디지털 채널을 일종의 단일 신경망처럼 공유하는 초개체 생물 군집처럼 보일 때” [11] 가 있다는 것이다. 적확하다. <호프>에 대한 <차우>의 연상은 어느 순간부터 동시대 평자들에게 하나의 집단적 기억으로 각인됐다. ‘시네필들의 단결’은 이미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끈끈하다. 그럼에도 재차 집합 구호를 외치는 일은, 지금의 ‘시네필 단결’이 대중적으로 유효한 테제를 남기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는 허무감의 역설적 발로일 것이다. <호프>와 <차우>의 비교 논지는 작금 시네필리아적 행위의 특질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김병규 영화평론가는 동시대 시네필리아들이 20세기(한국이라면 2010년대 이전까지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기억에 짓눌려 비명을 지른다고 썼다. “어쩌면 동시대 영화는 더 이상 유효한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눌어붙은 세계를 다시 조형하는 시네필리아의 작업이 된 것” [12] 이다. 요즈음 대개의 시네필리아는 과거의 유산을 파먹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호프>를 보며 한국 장르영화의 계보를 따지거나 <차우>를 떠올린다. 이럴수록 작품 내부를 향한 비평에 더해, 그 작동 방식과 환경까지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투보다 전쟁. <호프>에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주민들을 모을게요 『호프 끝장』은 <호프>를 끝장내지 못할 것이다. “비평계 공론장이 점차 고립된 상황, 그리고 그게 고립된 원인이 비평계 내부에 있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고립이 생성되는 상황의 원인을 몇몇 평자들의 책임”(김신) [13] 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환경 변화가 수반됐다. 여기서 그 변화와 일일이 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힘도 없다. 작금의 상황에 놓인 그 어떤 비평적 주체도 <호프>를 둘러싼 제도의 불명확성을 다잡진 못한다. 좁디좁은 비평계란 ‘군체’가 700억 원짜리 <호프>를 이기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호프>는 약 59조 원짜리 X(2022년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금액)를 이기지 못한다. <디 워> 사태를 재연할 역량은 소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다수가 다수의 말을 쏟아 내는 쪽이 훨씬 큰 경제력을 생산한다. 이 시장 논리의 당연함은 거의 장르적일 정도로 세계에 고착됐다. 어쩌면 “호프 끝장”이란 제목은 이 한계를 미리 알고 선제적으로 자조한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일단 주민들을 모아 대응하겠다는 성애( 정호연 )의 말처럼, 할 일은 해야겠다는 종류의 동력이었을까. 마음이 이상하다고 요령부득 뇌까리기만 하는 범석처럼 무력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덧붙여 필자 나름의 극복 방식도 제언해 보고 싶다. <호프>에 대한 비평의 (뒤늦은) 승리 방식이란 두 가지로 고려된다. 첫째, <호프>의 자결을 기다린다. 상업영화의 자결이란 개봉 상영의 끝, 그로 인한 대중들의 무관심이다. <호프>는 거대 외화들의 공습 시점에 맞춰 이미 피를 흘리는 중이다. 둘째, 시간의 흐름이다. < 환송대 >(1962)에 관한 크리스 마커 자신의 말, “사랑은 시간에 대한 유일한 승리”를 변주하자면 “시간은 <호프>에 대한 비평의 유일한 승리”일 것이다. 하나로 뭉치지 않은 채 맥락 없이 흐트러져버린 비평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으기 위해선 훨씬 더 긴 시대의 틈이 필요하다. 쓰고 보니 두 방식 모두 ‘하릴없는 기다림’의 다른 말이다. 범석이 왜 무력해졌는지 잘 알겠다. <호프>에 대한 말들을 모으고, 그것들의 쓸모없어짐을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성애처럼 낙관으로 억지 부리듯이, 의도적으로 최대한 많은 문장을 모으려 했다. 결론적으론 이 글 역시 무수한 실패의 종이 쪼가리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호프>의 안쪽처럼 난삽한 구성이 되더라도 일부러 그러려 했다. 여하간 그 과정에서 《씨네21》, 《필름 컬처》와 같은 오래된 영화 전문지부터, 《쿨투라》라는 문화지, 독립출판물, X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 블로그, KMDb 영화글 등의 여러 창구를 통과했다. 지금 영화에 관해 (필자처럼 나름 고관여로) 말하고 쓰는 이들의 경로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다. 크게 다르지 않은 곳에 모일 테다. 하여 이런 상상도 해본다. ‘성애가 주민들을 한곳에 모은다면, 외계인들은 외려 더 손쉽게 인간들을 절멸시킬 수 있지 않을까?’란 무서움.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사족 끝으로 정직하게, 이 글의 원료는 필자의 사적 회한이자, 자의식 과잉의 내적 독백이었다. 설령 아무도 듣지 않았더라도, 왜 <호프>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을 하지 못했을까. 빙빙 돌려 그 허무의 가치를 어떻게든 격상하려 한 것일까. ‘<호프>에 관해’ 무언가 말할 수 있겠다는 지각은, ‘<호프>를’ 말할 수 있겠단 사실과 같지 않은데 말이다. 정치에 대한 영화와 정치적 영화를 갈랐던 고다르의 말처럼, 저 둘은 엄연히 다르다. 태초부터 <호프>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씨네21》 지면에 별점 4개를 주었다는 일의 책임감이었을까. 그렇다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작가적 기호(記號)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개인의 기호(嗜好)로 유희할 순 없는 것일까. (사실 그러기는 싫다)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의 동반사멸” [14] 이 팽배한 이 시대에, 모든 비평은 에세이가 될 수밖에 없을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여 이 글처럼 우리는 계속 영화에 ‘관한’ 무언가에 더 크게 반응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모든 물음은 마베이요의 빛나는 심장처럼 아무 의미 없는 허세에 가까울까. 어쨌거나 한 명의 관객이자 평자로서는 <호프>의 허무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체, <호프>를 두고 무슨 말이 남았나? 아니, 애초에 왜 말했나? *** [1] “ [특집] 백주 스릴러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 칸 경쟁부문 <호프> 첫 시사 리뷰 ”, 《씨네21》 1558호, 2026. 5. 29. [2] “ 이 세상은 아직 ”.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개인 블로그에 <호프> 별점에 대한 일종의 후기를 남겼다. 2026. 7. 20. [3] “ [기획] 가속이 향하는 곳, 얄 사다트 평론가가 본 <호프> ”, 《씨네21》 1568호, 2026. 8. 6. [4] “ [특집] <호프>의 외계인은 왜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 외계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장르 읽기 ”, 《씨네21》 1566호, 2026. 7. 24. [5] “ 사회는 영화보다 크다. 네 가지 관점으로 보는 2026년➊ 한국식 작가주의의 한계를 마주한 2026년 ”, 《씨네21》 1570호, 2026. 8. 21. [6] “ [영화] 〈호프〉는 한국영화이기에 유의미하다. ” 《쿨투라》 2026년 8월호, 2026. 7. 29. [7] 4)와 동일. [8] 『호프 끝장』 알라딘 북펀드 웹페이지 . [9] 『호프 끝장』의 출판사 ‘디깅룸’의 X(구 트위터) 게시글 . [10] https://www.instagram.com/p/Dacd6WLj8aH/?igsh=M285cnVvcmZ5cXF1 [11] 김신. “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2020년대 전후 시네필 커뮤니티와 영화 속 대화에 관한 단상 ”, 2024. 11. 21. [12] “ [비평]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해 있다, 김병규 평론가의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 ”, 《씨네21》 1540호, 2026. 1. 21. [13] 10과 동일. [14] 이광호. “ 1인칭 사이 1인칭: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 2024. 5. 21. 이우빈(영화기자) l 《씨네21》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관에 가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본 1997년생. 최근엔 저널리즘 비평이 대체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 중.
사진: 출판사 무제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 시나리오는 영화에게 마치 엄마 같은 존재라고. 영화 촬영장에서 자신만의 일을 해내고 있는 이런저런 자식들은 역시 엄마가 있었기에 거기 있게 된 거라고. 엄마가 자식을 어찌 낳아 길러내는 건지에 대해 일일이 거론할 수 없다고 느끼듯이,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가 쓰이는 과정은 실로 재현이 불가능한 작업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시나리오를 써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언어적·비언어적 창작의 속성이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중 특히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비유하자면 마치 밤사이 꾸는 꿈 같다. 아니, 밤사이 지나간 꿈을 일상과 인생에 연결시켜 플롯화하려는 편집증적인 집착에 가깝다. 이 과정은 환한 조명 아래 카메라 앞에서 기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거칠고 어두운 침묵의 방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대개 주목받지 못한 채 잊히거나 심지어 무시당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들의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언제부턴가 나는 이것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불운이자 불행이라고 생각해왔다. 또한 이 모든 불리함과 아픔을 작가가 자기만의 것으로 기꺼이 끌어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에게는 더없는 보상이라 할 만한 삶의 아이러니와 예술의 신비로 가는 비밀스러운 문이 열린다고도. 좀 더 구성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영화 시나리오에는 어떤 의미에서건 작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고유한 인생의 단면뿐 아니라, 그를 스쳐 가는 여러 만남들, 인연들, 인연이 아닌 것들, 실제의 사건들과 환상 혹은 망상 속의 기미들이 모두 담기기 마련이고 담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허구의 영화를 최대한 진짜 삶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여러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여러 사람을 보는 카메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집필 중인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자신을 부수고 또 부순다. 얼마나 부술 수 있을지에 승부가 달려있다. 혹자는 나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작가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가 겪는 일과 비슷하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마도 이와 같은 유체이탈의 무한반복과정을 포착해내거나 이해해내는 일은, AI 첨단 장비를 구비한 미래의 뇌신경과학자나 도스또예프스키 급의 작가에게 맡겨져야 할 법도 하다. 영화제작현장을 찍는 메이킹필름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정말로 이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이해하는 일에 한 획을 긋는, 꽤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과학 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오랫동안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온 일이기에 더욱 그럴 것 같다. 나는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계라는 곳, 보이는 게 너무도 중요한 세계에서 하필 영화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애초에 영화는 작가의 고독한 삶에서, 그의 일상을 지나쳐가는 모든 유의미하고 무의미한 사물과 인연 속에서 절묘하게 잉태된다. 그것은 언어로 쓰여 책이 되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되며, 그 사람들이 붐비는 촬영장이 된다. 그곳에서 카메라를 통해 결코 만질 수 없으나 만져질 듯 생생한 영상으로 기록된다. 이 영상은 마침내 무수한 디지털 입자가 되어 하얀 화면 위로 투사되고, 화면 앞에 앉은 익명의 인간들의 망막을 뚫고서 그들의 몸과 삶 속으로, 어쩌면 영혼 속으로 침투한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곳은 결국 우리들 각자의 인생 속에서 라는 생각을 갖게 됐는데, 이것은 점점 하나의 견해라기보다 신념에 가까운 것이 되어갔다. 나는 어느새 영화는 잔상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고, 어느 날부턴가는 우리 안에서 영화의 잔상이 우리 각자의 삶과 섞이고 섞여 뒤죽박죽인 상태가 될 때, 그때야 비로소 영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어졌다. 책 『내 모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의 바탕에서 생겨났다. 이 책의 집필 과정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아카이빙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바탕이라고 본다. 『내 모든 것』 중 인물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언급한 작품들 (상) <걸어도 걸어도>, <애정의 조건> (사진: IMDb , Photo by Archive Photos/Getty Images, © 2012 Getty Images) (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코요테 어글리> (사진: IMDb , © 2000 Buena Vista Home Entertainment) 좀 더 용기를 내서 첨언하자면,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현실적 지지 없이 영화 및 기타 영상산업의 인간다운 도약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AI가 다 할 수 있겠구나, 싶은 방향으로 퇴행 중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영화라는 것이 단지 영상 오락물 내지 서비스 업종이 아니라 예술일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인간이 있는 한, 그는 기필코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을 스쳐 갔던 기억과 상상을 통하여서 스스로에게 운명 같은 영화 시나리오를 써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지금과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꽤 뼈아픈 전투가, 아마도 산업적으로 패배할 확률이 높은 무모한 도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여 나는 이 시대의 자본과 시스템에게 굳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만약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예술에 투자하고 싶다면? 골방에 처박힌 가난한 작가를 더 자주, 더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마치 <삼체>(2024)에서 인류의 미래를 미리 사냥해 둔 외계인이 등장하기 전에 면벽수행을 할 현자들을 골라 침묵의 인류구조 시나리오를 비축해달라고 강제하듯이. 그러나 유튜브 쇼츠로부터 도파민을 공급받기 위하여 어둠 속 이부자리에서 녹내장의 위험을 무릅쓰는 현대의 인간들이 과연 그와 같은 투자를 감행할 투지를 품을 수 있을런지? 내 판단으로는, 영상예술의 미래는 당분간 AI에 삼켜졌다고 본다. 한편 이후 AI의 인격적 고민이 가시화될 세계에 대해서는, 내 능력 밖의 일이란 낙관론을 남겨두겠다. 그러므로 책 『내 모든 것』이라는 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취재일기, 이런저런 사람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고백들을 담아낸 우연하면서도 필연적인 순간들의 기록,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각각의 의미 있는 단편으로 구성해보고자 애를 쓴 창작노트, 그 창작의 과정 속에서 작자 스스로의 삶을 거울로써 이용하고 들여다보고자 한 고군분투기는 그저 티끌 같은 기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록은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유일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 시나리오 작업이란 본래 이처럼 개인적이고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그저 평범한 에세이나 인터뷰집이 아닌 단편소설집 같다고 느끼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래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작가 자신과 작가 주변의 삶을 바탕으로 허구의 주인공을 찾아내고 그의 삶을 진짜처럼 그려내는 것이니까. 책 『내 모든 것』의 맨 처음 가제는 “삶을 이기는 영화”였다. 실은 그 시절 나 자신에게 던지고픈 질문이었다.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을 이기나? 혹은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의 고통을 이기게 해주나? 영화라는 게 내가 이렇게 기를 쓰고 진을 빼며 만들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럴 만큼 영화라는 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필요하긴 한 건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서 늘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살아가다보니, 집필 중에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됐고 묻게 됐다. “살면서 영향을 받은 영화가 있나요? 그게 영화의 이야기든 영화 속 한 장면이든, 인생에 남아있는 어떤 영화가 있나요?” (사실 이 책에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이는 작가가 아닌 이 책을 펴낸 무제출판사였음을 여기서 밝혀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소재가 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거나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런 만큼 자유로웠다. 그들이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익명의 장치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책 속 ‘노아’와 ‘세라’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두 여성과의 잇단 만남이었다. 둘 다 집필 초반에 우연한 기회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왠지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인터뷰를 청했는데, 각각 성폭력 피해 경험과 자살 중독을 앓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내 작은 머릿속에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가져다줬다. 이곳에는 노아의 이야기를 남겨두려 한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 사진: IMDb( 1 , 2 ) 노아는 조기유학시절 덜 신중했던 성관계로부터 비롯된 집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로서, 이후 성(性)적으로 문란하고 예민하고 특수한 각종 시도와 방황을 통해 생존해가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그녀 안에서 필연적인 서사로 느껴졌다. 좀 더 과감히 말하면, 고통으로 각인된 자기 몸의 한계를 부수려는 존엄한 투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영화 <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슈운지, 2001)에서 집단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후 자살을 하는 여고생, 아오이 유우와 친구가 되는 상상에 빠져들곤 했는데, 단지 그 영화 속으로 들어가 그녀 곁에 있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그냥 피해자가 한 명 느는 거죠. 그렇지만 덜 외롭잖아.” 나는 노아의 초현실적인 연대의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녀가 혼자였던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렸을지에 대해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몸이 조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껴 원고를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내 글의 처음 엔딩은 노아가 아오이 유우와 함께 무해한 동네 청년들 속에 섞여 마음껏 수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그저 그녀의 몸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살 속에 잠겨 있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글쓰기를 마친 후 거듭해서 읽어볼수록, 이와 같은 결말은 용맹했던 노아의 고백에 비해 너무나도 유치한 것 같았다. 어느 나른했던 저녁에, 나는 친구에게 원고를 보여주며 이렇게 고백했다. “사실 노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영화 속에서 연이 날던 그 언덕이 더 무서워졌어. 영화에서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아이들이 빨간 연을 날리고 있잖아. 너무 착해 보이고 너무 잘 웃고 너무 평범해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딱 일본사람들 같잖아. 태양 같은 욱일기를 휘날리면서 해맑게 사람을 죽였던 그 사람들 말이야. 내 말은 일본인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 일본이든 어디든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사람 같다는 거야……. 그런데 있잖아, 나한테는 그게 마치 영화 같기도 하거든. 영화라는 게 원래 너무 예쁘고 너무 멋지고 그래서, 그냥 그것 자체로 충분해보일 때가 많잖아. 심지어 영화 속 어떤 장면이나 인물이 내 영혼을 병들게 해도, 그게 나보다 근사해보인단 이유로 내가 거기에 그냥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잖아. 주저앉아버리기도 하잖아. 혹시 노아에게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 그런 거 아닐까? 자꾸 그런 걱정이 들어서 그랬는지,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게 너무 힘들었어. 사실 나는 노아가 그냥 또 한 명의 피해자로 그 영화 속에 들어가는 게 싫어. 나는 노아가 이제 그만 그 영화에서 나왔으면 좋겠거든. 아오이 유우의 손을 잡고서 같이 탈출했으면 좋겠거든. 내가 영화인이랍시고 영화에 대해 이런 책을 쓰고는 있지만, 영화 같은 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 노아가 사는 게 중요하지!” 그래서 나는 노아와 아오이 유우를 그 영화로부터 탈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 책 『내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됐다. 2026년 4월, 오정미.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사진: IMDb )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오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l 영화 < 버닝 >(2018), < 심장소리 >(2022), <가능한 사랑>의 각본을 썼다. 책 『내 모든 것』을 썼다.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