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생
- 감독
- 신지연, 고현정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김민선, 박수정
‘전학 가기 전날 수향은 학교로 갈 준비를 한다.’ 이 짧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비를 지니고 있는지 영화 < 전학생 >은 차근차근 이야기한다. 박지인 감독의 단편 <전학생>은 ‘북에서 온 소녀’가 ‘남의 학교’로 전학을 가는 이야기이다. 소녀에게 전학은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는 만큼 무거운 일이기도 하다. 수향의 고민은 예상치 못한 고비 앞에 반복된다. 새 학교로 등교하기 위해 교복을 사러 가지만 그녀의 좀 다른 억양을 들은 가게 주인은 중국에서 왔냐며 그녀를 살피고 깜짝 놀랄만한 교복의 가격에 수향은 가게 문을 닫고 나온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언니의 삶 역시 일면 달콤해 보이지만 녹록할 리 만무하다. 먼저 ‘남의 학교’에 갔지만 그만두고 스타일리스트를 꿈꾸는 친구를 만나 친구가 입던 교복을 전달받으면서는 기대에 불안이 자꾸만 덧입혀진다. 과연 다시 만난 세계에서 나는 받아들여질까, 버틸 수 있을까. 가깝지만 먼 나라의 학생이 되는 일은 이렇듯 구중궁궐의 문을 여는 일과도 같다. 닫힌 교문을 여는 일, 무거운 마음의 문을 미는 일 모두 수향에게는 온몸과 맘의 사력을 다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학을 준비하는 그 하루의 끝, 한밤중 집으로 돌아온 수향에게 엄마는 이야기한다. “우리 딸을 믿는다”고. 그리고 수향은 천 번도 넘게 연습했을 첫인사를 또다시 주문처럼 되된다. “안녕 나는 수향이라고 해”. 다음 날, 마침내 교복을 입고, 닫힌 교문을 열고 들어선 교실 탁자 앞에서 수향은 무심한 선생님의 친절로 엉겁결에 정체가 탄로 나고 만다. 인사를 건네기도 전, 준비한 문장을 내뱉기도 전에 그녀는 ‘북에서 온 전학생’이 된다. 로맨스 장르물에 가까운 청춘영화들과 거칠고 어두운 세계의 이면을 다룬 수많은 학원물들 사이에서 박지인 감독의 < 전학생 >은 교복과 교실을 벗어난 소녀의 세계를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또렷한 변별성을 지닌 작품이다. 또한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충돌의 지점에서 생기는 파열음이 그저 성장통의 신음만이 아님을 사려 깊게 살피는 박지인 감독은 미덥게 캐릭터들의 마음속을 두루 살핀다.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태도와 서둘러 손을 내밀지 않는 조심스러움 덕에 <전학생>은 이야기의 흐름 이상으로 파고를 만들어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서두르는 법 없이 침착하고 단단하다. < 춘몽 > < 꿈의 제인 >을 통해 특유의 개성과 매력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배우 이주영 은 라옥 역할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무엇보다 북에서 온 소녀의 ‘언어와 심리’를 연기하는 ‘수향’ 역의 배우 박수연이 긴 잔상을 남긴다. 아나운서를 꿈꾸는 북한 소녀 수향 역을 온전히 받아들인 배우 박수연은 어떤 장치 없이도 화면과 관객을 아주 가깝게 끌어당긴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익숙하지만 새로운 말을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뱉던 수향의 순간은 이 배우가 공들여 완성해낸 < 전학생 >의 결정적 순간이기도 했다.
케이 기본스라는 미국 작가가 쓴 「엘렌 포스터」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출신 지역인 미국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가 배경일 법한 조용한 시골 마을을 무대로, 지독하게 냉소적인 고아 소녀 엘렌이 여러 위탁가정을 돌아다니며 암담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행복해지는 준비를 한다는... 그런 이야기다. 고전적인 구조의 성장담인데 1인칭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주인공 엘렌의 말투와 성격에 아주 그냥 매력이 철철 흘러넘쳐서 책장 넘기는 맛이 있는 그런 꿀잼의 책이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이십 대 초중반, 걸신들려 먹어치우듯이 책을 읽던 어린 시절에 한동안 몰입했던 장르의 책들이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미국 남부의 덥고 갑갑하고 헐벗었으면서도 보수적이기 짝이 없어서 왠지 변태적인 분위기까지 풍기는 동네를 배경으로, 보이기엔 과묵해도 머릿속으로는 재치 있는 수다쟁이인 주인공 소년/소녀가 1인칭 내레이터로 등장해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식의 성장담이었다. 분위기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대체로 이런 배경과 무드의 소설을 남부 고딕(Southern Gothic)이라는 하위장르로 통칭하여 부르곤 하는데, 여성작가 위주로 예를 들자면, 플래너리 오코너나 카슨 매컬러스, 유도라 웰티의 이름이 대표적이다. 참,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도 고딕 문학의 대표적인 케이스. 남자 작가의 책이지만 비교적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상 후보까지 올랐던 남부 고딕 소설로는, 「윈터스 본」이 있었다. 그래, 맞다, 제니퍼 로렌스가 스타로 발돋움했던 그 무시무시하게 암담한 스릴러 영화의 원작. 잡설이 길었다. 정리하자면, 내가 < 여름의 끝자락 >이라는 영화를 굳이 시간을 들여 이곳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치 미국 남부 고딕 문학 앤솔로지에 실려 있는 짜릿한 단편 소설 하나를 읽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수 시몬스’라는 낯선 이름의 여성작가가 데뷔 단편집으로 내놓은 책의 대표 단편 같은 느낌? 아마존닷컴과 각종 북클럽, 네임드 작가들의 추천작으로 선정될 만한 고른 완성도를 가진 단편들이 실린. 그런데 정작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작은 섬마을, 엄마의 가출 후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지내는 주연. 하지만 그런 외로움도 가장 소중한 친구 경희가 있어 견딜 수 있다. 주연과 경희는 언제나 함께 지낸다. 행복한 두 친구의 일상에 갑자기 전학생 소영이 나타난다.’ 영화제 리플렛에 실린 이 소개글로만 봤을 땐 (정확한 설명이지만 어쩔 수 없이 식상해 보이는) 정리 탓에 쉽게 무시해버리는 종류의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작 영화적인 분위기는 거의 딴판이다. 덥고 갑갑한 여름의 분위기를 캔버스에 찐득하게 깔아놓고, 투견장에서 한몫 챙기려는 불쾌한 아버지들과 불법 약물을 주사해 무시무시하게 흥분한 개들이 마구 짖어대는 그곳에서 소녀들은 진지한 삼각관계 멜로드라마를 땀 흘리며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이중엔 병약한 여자친구 캐릭터도 기필코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그 역할을 맡은 소녀는 당뇨를 앓고 있어 조금만 무리하게 움직여도 픽픽 쓰러져 정신을 잃는 터라, 주인공 소녀가 대신 놓아주는 인슐린 주사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 영화의 후반부는 예상대로 비극이다. 총소리가 들리고, 피가 흐르며, 시체가 등장한다. 갑갑하고 더운 여름, 무시무시한 폭력에 노출된 소녀들, 삼각관계 멜로드라마, 집착과 배신, 서러운 고함과도 같은 울음소리... 여름의 끝자락. 여름의 꼬리. 와, 내가 좋아하는 고딕 문학의 뜨거운 재료들이 다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주인공 소녀를 연기한 ‘윤금선아’라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을 가진 배우의 카리스마는 거의 신기할 정도로 강렬하다. 영화 전체를 혼자서 짊어진 채 오르락내리락하는 존재감을 쉴 틈 없이 과시하는데, 저 위의 스틸 사진이 나오는 신의 경우는 “난 이 영화의 심장이자 코어이며, 이 이야기가 노리고 있는 과녁의 텐포인트이면서, 빗나가는 화살을 기필코 과녁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의 원천이다!” 라고 소리치고 있는 당당한 주인공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의 제목을 그냥 <윤금선아>라고 해도 어울릴 것이다. 「엘렌 포스터」가 어쩌니, 미국 남부 고딕 문학이 저쩌니, 잘난 척하면서 시작한 다소 수상쩍은 소개글이었지만, 결국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추천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암담하고 폭력적인 환경 속에 노출된 여자 주인공이 강렬한 자존심과 잊을 수 없는 존재감을 과시하며 영화 전체를 이끌고 나가는 작품을 단편에서든 장편에서든 좀 더 많이 만나고 싶다는 것, 그런 영화가 뭐가 있냐는 질문을 이어받는다면 이 영화를 예로 들 만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