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방위
- 감독
- 세르지 르로이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끌로드 브라소, 베로니크 제네스트, 띠에리 레르미뜨, 크리스토퍼 램버트
완전 범죄는 있다 2018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 암수살인(暗數殺人) >( 김태균 )이었다. ‘보이지 않는 숫자’는 모든 정치의 열쇠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대표적인 숨겨진 범죄(hidden crimes)다. 신고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범죄라는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문제, 보지 않으려는 문제, 왜 어떤 문제는 드러나고, 어떤 문제는 덮어지는가, 어떤 문제는 문제로도 상정되지 않는가. 누구는 보호받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의 살인은 과실치사인데(폭력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다가 피해 여성이 사망하는 경우), 어떤 사람의 살인은 교묘히 계획된 범죄인가(남성의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를 행사한 여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누가 정하는가? 차이와 배제, 범주를 둘러싼 권력과 지식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는 말은 생각보다 심오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완전 범죄는 머리 좋은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암수살인처럼 피해를 파악할 수 없는 범죄가 완전 범죄다. 신고도, 시신도, 증거도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유일한 증인은 범인이다. 미제 사건도 아니고 범죄 자체가 가시화되지 않은 경우, 그것이 완전 범죄다. 하룻밤에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가정폭력으로 혹은 성 산업에 종사하다가 사망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강남역 사건은 드러났을 뿐이다. 암수살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이주자, 난민, 노약자, 빈곤층, 노숙자, 여성 등 취약 계층이 대부분이다. 글쓰기나 인문학 강의를 하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지식과 지식인의 개념이다. 다른 문제에 비해 이 이슈는 자신 있게(?) 대답하는 편이다. “지식의 개념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지식인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모르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르는 것을 모르는데...” 지식인의 개념보다는 지식인에게 필요한 태도를 묻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식인이나 예술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사명이나 역할이 아니다. 윤리에 대한 추구와 지향.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자세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지식은 공부하고 조사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딘가에 있어서 찾아지는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다. 시각이 지식을 드러나기 하므로 지식은 발명(making)되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시각이 앎을 결정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 색깔에 달려 있다. 등록되지 않는 죽음 영화 <암수살인>의 미덕은 윤리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형사 영화는 범인과의 심리 게임이나 액션(폭력), 스릴러를 강조한다. 주제는 남성들 간의 승부이고, 피해자(주로 여성과 어린이)는 그들의 대결이 가능하도록 기능하는 도구다. 그런 영화 중에서 가장 웰메이드를 꼽으라면 < 살인의 추억 >( 봉준호 , 2003)이 될 것이다. <암수살인>은 반대 입장을 취한다. 등장인물은 형사와 범인이지만, 서사의 흐름은 철저히 피해자 중심이다. 또한, 이 영화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다루고 있다. 이로 인해 <암수살인>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 ‘되었다’. 이 지면에서 굳이 언급하자면, 당대 한국의 남성 영화감독 중에서 시대의 윤리, 재현의 윤리를 가장 고민하는 이는 이창동 감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윤리성은 실화를 바탕 하는 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범죄자 강태오( 주지훈 분)는 김형민( 김윤석 분) 형사에게 진부한 대사를 던진다. “당신은 나 못 이겨”. 형사는 진부하지 않게 받는다. “내가 너를 이겨서, 뭐 할 긴데?” 그는 이기고 지는 것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런 장면을 두고 “진짜 이겼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역시 승부의 관점이다. 인간의 생명을 두고 승부가 중요한가? 형사의 관심사는 범죄자와의 심리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피해자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있다. 때문에 (실화와 달리), 김형민은 재소자 강태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불법 행위도 불사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대립 구도가 사회운동에서도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적’과의 싸움, 이기는 것에 무게를 두는 반면 어떤 이들은 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들의 상황을 더 걱정한다. 물론, 피해는 사회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전자의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피해자는 사회운동의 명분, 증거로 전락하게 된다. 피해자를 ‘앞세우거나 동원하는’ 사회운동가, 페미니스트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의 변(辨)은 한결같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긴 이야기다.) ‘완전 범죄’라는 표현은 가해자의 관점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완전 범죄는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 된다. 사람이 범죄의 대상이 된 현실이 완벽하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도 넌센스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은 완벽했다”는 말이 가능한가? 피해가 퍼펙트 했다? 영화에서는 “암수살인이 한 해 200건”이라는 대사가 나오지만, 이 숫자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법무부 장관도 알 것이다. 경찰이 인지한 사건만 이 정도라는 것이다. 실제는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실종 사건에서 남겨진 이들의 고통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확인하는 문제다. 기다리는 이들의 고통. 이들은 고통이 끝나길 원한다. 여기서 딜레마는 그것은 범인만이 알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수사 기관이 파악하지 못한 범죄를 범인이 자백하는 조건으로 형량 거래가 이루어지거나 이 영화에서처럼 형사가 자기 돈을 써가며 범인과 적극적으로 협상한다. 요컨대 <암수살인>은 고통, 가시성, 윤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상업 영화로서 성공했다는 점은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봤다. 암수살인의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라는 점, 피해자의 신분이나 언론의 관심도에 따라 사회적 자원(수사)은 다르게 분배된다는 현실. 용의자만 유전무죄가 아니다. 안전 역시 사회적 공공재이기 때문에, 잠재적 피해자들도 유전무죄다. 등록되지 못한 피해 정찬의 소설집 『새의 시선』(2018년, 문학과 지성사)에 수록된 단편 ‘등불’은, 세월호에 승선한 사람 중에 명단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에 탄 모든 이들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있는가? 세월호에 몇 명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가. 만일, 운임이 없어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아이와 함께 배에 탄 가난한 여성이 있다면? 이제 세월호 사건의 정확한 피해자 숫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등록된 자의 죽음. 역사도 우주도 저 하늘의 별도, 그 어디에도 흔적 없는 죽음이다. 무지가 권력인 사회에서, 소수자를 함부로 하는 사회에서, 시민권의 의미가 좁은 사회에서는 누가 인간이고 성원권을 가졌는지는 언제나 논쟁거리다. 태아는 생명권, 선거 연령, 동성애자의 숫자, 인터 섹스(間性), 누군가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는 투쟁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진실이다. 우리는 통계를 통해 현실을 아는 것이 아니다. 통계는 그 사회가 합의한 개념에 따라, 그에 맞는 수준의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예를 들어 무엇이 폭력일까. 무엇이 위계일까. 가해자, 피해자, 조사자의 개념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학교폭력이든 가정폭력이든 군대 내 폭력이든 실태 조사가 어렵다. 이런 일들은 부지기수다. 통계를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통계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한국기지촌여성인권운동사』를 쓴 적이 있어서) 주한미군 기지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당황한다. 통상, 기지(bases)의 개념에는 다양한 ‘시설’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a military base, camp, post, station, yard, center, homeport facility...) 이는 번역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이처럼 팩트는 단 한 번도 팩트일 수 없다. <암수살인>은 고통, 지식, 권력의 문제를 연결한다. ‘통찰’을 뜻하는 영어 ‘insight(in + sight)’는 “눈을 감아야 새로운 것이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을 잠시 잊거나 상대화하지 않으면, 새로운 지식은 절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절충’을 가장 싫어한다. 여성주의 지식이나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적 저항이 큰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과 연결된 문제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과 협상할 수는 있지만 양립할 수는 없다. 환경운동은 발전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인식이 당파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때부터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상은 매 순간의 긴장을 요구하는 만만치 않은 삶이다. <암수살인>에서 내가 좋아하는 몇 장면. 처음 두 남자가 비 오는 자갈치 시장을 걷는다. 바로 다음, 칼국수 집 장면은 화면 밖으로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경찰서나 관공서에 박카스류를 사 들고 오는 민초들, 실종자 할머니 역의 허진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그지 맹크로(거지처럼)” 같은 부산 사투리(서울말도 사투리지만)는 중독성이 있었다. 6년간에 걸친 감독의 필드웍은 이 속도의 시대에도 창작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음을 일깨운다. 김윤석 배우의 형사 영화를 모두 보았지만 비슷한 장면이 거의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는 < 천하장사 마돈나 >( 이해준 , 이해영 , 2006)다. 여성이 되기를 꿈꾸는 뚱뚱한 씨름 선수( 류덕환 분)의 아버지로 나오는데, 그는 상흔이 가득한 얼굴로 학대를 대물림한다. 상처 입은 남자가 아들에게 휘두르는 폭력. 나는 그의 ‘루저 한국 남성’ 연기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변호사 역의 김중기 배우는 오십대 초반인데, 아주 젊게 나온다. 택시 안의 구토물을 닦아내는 여성 노동자들의 일하는 장면. 강태오‘도’ 하지 않는 노동이다. 구토기와 눈물이 동시에 나왔다. 영화를 본 이들은 그 식사 장면을 기억하리라. 두 명의 형사(김윤식, 진선규 )가 포크레인 기사에게 ‘애원’하는 장면은 굉장한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일도 아닌데 늘 손해를 보면서 남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일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처럼 상관, 후배, 검사, 가족... 그러니, 이들의 인생은 늘 “미안하고 죄송하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일은 혼자 못하기 때문에 주변에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이두용 의 영화 < 최후의 증인 >의 결말은 의아하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주인공인 형사 오병호( 하명중 )도 수사 과정 중 범했던 살인 죄목으로 체포되어 이제 법의 심판대에 서야 할 처지다. 하지만 오병호의 살인은 스스로의 주장처럼 정당방위에 해당하므로 법은 그의 편이 되어 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그가 그다지 낙망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오병호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강가의 갈대숲으로 홀린 듯이 걸어 들어가더니 입안에 총부리를 넣고 급히 방아쇠를 당겨 자결한다. 그리고 영화는 종료된다. 그러니까 이것이 의아하다. 아니, 의아해서 흥미롭다. 오병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가. 감독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사람을 보호하려고, 약자를 보호하려고 했던 자신의 피땀 어린 노력이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파헤쳤다는 자책, 자신을 포함해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았고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자책과 속죄” 오병호가 살인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중 있었던 황바우( 최불암 )와 손지혜( 정윤희 )의 억울한 사연들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오늘날의 살인 행각도 그들의 자식인 태영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벌인 사건이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태영은 이미 미쳐 버렸고 태영의 죄를 대신하여 용서를 빌며 양아버지 황바우가 자살하자 손지혜도 남편인 황바우를 따라 자살해버린다. 오병호는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또 다른 비극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감독의 설명은, 이 복잡하고도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오병호가 인간적 자책과 속죄의 행위로써 자결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과에 따른 결과라는 점을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우리에게 의아하고도 흥미로운 것은 서사적 무리를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그 인과를 납득시키려는 이 영화의 감정적 자세와 강도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하달된 업무를 이행했을 뿐인 일개 형사가 의도치 않은 죽음들의 속출 앞에서 도덕적으로 괴로워할 수는 있다 해도 정녕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극단적 행위로 속죄를 결행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고 누군가는 또 반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최후의 증인>의 결말부 오병호의 자결은 이 영화가 모종의 도덕적 과잉 상태에 진입해 있음을 여실히 시사한다. 그러니 여기서의 핵심은 이 도덕적 과잉의 상태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이 사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게라면 우리가 의아하다고 표현한 도덕적 과잉은 더없이 흥미로운 무엇이 될 것이다. 요컨대 <최후의 증인>의 무엇이 우리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인가 질문할 때 그 흥미로움을 자아내는 활동의 요체는 사실상 전쟁이라는 비운의 역사나 그 참혹하게 뒤엉킨 복수극 혹은 한 여인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수난의 연대기(손지혜) 혹은 천하고 낮은 신분을 지녔으나 더없이 선한 한 남자의 억울한 옥살이(황바우) 같은 것에 있지 않다. 핵심은 진흙탕 같은 과거사와 관계 속으로 몸소 휩쓸려 다니는 동시에 관객인 우리 또한 끌고 다니는 오병호의 난처한 활동에 있으며 그 활동 중에 일어나는 그의 심정과 감정의 비극성에 있고 그 비극성을 통해 겪어지는 오병호라는 인물의 존재론적 변화 과정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자 오병호의 자결은 그렇게 변화되어간 존재의 최종적이면서도 불운한 선택에 해당된다. 이렇게 더 줄여 말할 수도 있다. <최후의 증인>의 흥미로움은 오병호라는 인물의 존재론적 변주에 있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다음과 같이 다른 각에서 진입해 보아도 사태는 유사하다. 따지자면 <최후의 증인>의 영화적 매혹은 이두용의 영화가 예의 성취해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특별한 미장센이나 시각적 운동성 등에 있지 않다. 그러한 점들은 < 경찰관 >의 초반부, 빗속의 두 경찰관과 장대 같은 빗줄기, < 장남 >의 결말부, 아파트 꼭대기에서 붉은 천에 쌓여 공중에 뜬 채로 크레인에 실려 위태롭게 위에서 아래로 휘청거리며 내려오는 관,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의 중반부, 방안에 잠시 우두커니 서서 주요 사물들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내는 한 여인의 육체적 형상, < 피막 >의 종결부, 불길하면서도 활기찬 마지막 움막의 화재 장면 등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 <최후의 증인>에서 압도적인 것은 시각적 요인들이 아니다. 비밀과 사연과 비극의 힘으로 철저하게 전개되는 내러티브 연쇄성과 그 연쇄 안에서 심리적 긴장감을 느끼는 주인공 오병호의 방황이 이 영화의 압도적인 면모다. 오병호는 여기서 질문이라는 사유의 활동 자체이며 이리저리 차이고 건네지는 감각의 공일뿐만 아니라 거대한 내러티브를 자신의 훼손되어 가는 몸과 정신으로 짓고 꿰어 나가는 매개자다. <최후의 증인>에서 여기서 저기로 이동해가며 운동하는 것이 있다면 혹은 스스로 변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오병호의 존재다. 때문에 그는 형사로 시작하지만 형사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마감된다. 오병호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실 처음부터도 잘 알 수 없다. 다른 부하가 아니라 그가 왜 이 사건을 맡아야 하는가에 관하여 설명하는 서장도“누군가는...”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오병호 자신도 여기에 뚜렷한 확신이나 반문을 갖지 않는다. 예컨대 오병호에 관하여 인상적으로 특별히 흥미로운 건 그가 적어도 여느 경찰이나 형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는 때때로 날렵한 형사가 아니라 예민한 기자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영화도 이와 같은 점을 얼마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오병호에게 호감을 느끼는 초등학교 교사가 그의 외양을 두고 “미남”이라고 칭찬하면서“경찰 같지가 않아서 그래요”라고 말하는 것은 흘러가는 대사로만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더하여 오병호가 정말 유능한 경찰이나 형사라면 그는 사건을 그렇게 추적해 나가선 안 되었을 것이다. 양조장 주인의 죽음으로 가장 크게 이득을 갖게 되는 자는 누구인지, 살인 사건의 현장에는 정확히 누가 있었는지 등 흔히 우리가 범죄 수사물의 클리셰로 보아온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의문과 수사 과정들이 여기에는 거의 없거나 뒤늦다. 대신 오병호가 집중하는 일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회고를 따라가고 채록하는 것이다. 오병호는 묻혀 있던 과거사를 캐낸다. 대개 그가 만나는 관계자는 살인 사건에 직접적으로 결부된 용의자나 증인들이 아닌데다가 그들로부터 듣는 것은 사건에 대한 긴밀한 증거라기보다는 참혹한 역사의 한 부분이어서 그가 행하는 일은 살인 사건에의 탐문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를 탐문하는 일이 되고 있으며 때문에 그는 형사가 아니라 어느 지역 주민들의 소사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오병호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들을 두고 그렇게 오래오래 돌아서 간다. 그가 형사로서 얼마나 무능한 자인지는“손지혜는 살인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정 짓는 것에서 가장 확실히 드러난다. 그는 사실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한 인간에게서 마음으로 느낀 인상과 인성에 추론의 근거를 둔다. 그러니 그는 얼마나 무책임한 탐문관인가. 그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닐뿐더러 사실을 챙겨야 하는 저널리스트의 성격조차도 포기하고 소사를 기록하는 역사 기술자의 행위에서도 주춤한다. 그가 점점 더 중시해 가는 것은, 가령 손지혜에게서 그러한 것과 같이, 그의 눈앞에 있는 인간들에게서 느껴지는 막연한 도덕성이며 동시에 그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도덕성이다. 그 때문에 그는 때때로 지극히 혹은 과잉적으로 괴로워하거나 분노에 가득 찬다. 예컨대 황바우를 모함한 한동주의 동생을 취조하는 장면에서 그의 과잉된 분노를 우린 접하게 된다. 오병호의 자결에 관하여 던졌던 같은 질문을 이때에도 할 수 있다. 가령, 오병호는 왜 저토록 분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형사도, 기자도, 역사가의 기질도 이즈음 모두 사라진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자 오병호는 마치 도덕이라는 종교에 몰두하고 헌신하는 하지만 다소 광신적이어서 폭력적 수행을 일삼기도 하는 그런 종교 수행자의 모습을 갖춘다. 오병호에 관하여 경찰서장이 지나치듯 했던 말에서 몇 가지를 뽑아 요약 연결해야만 하겠다. “그는 거대한 뜻이 있는 사건을 수사 중이고 그건 우리 모두가 책임 져야 할 문제이지만 대신 그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병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이 사건은 제가 꼭 해결하고 싶습니다” 하면서 다 부서져 가는 몸을 추스른다. 하지만 실상 오병호는 해결할 수 없고 단지 떠맡을 뿐이다. 오병호는 해결 불가능한 미욱한 인간 세계의 비극을 맹렬한 종교적 신념으로 기꺼이 떠맡아 흡수하려는 일종의 성자의 자세를 자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성자는 완결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히스테릭하다. 그는 이미 병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러티브의 예상치 못한 격전과 혼란 속에서 오병호라는 인물의 존재는 시시각각 변주를 거듭해가다가 마침내 어떤 병적인 성자라는 기묘한 부정합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최후의 증인>은 마침내 그 병적 성자의 탄생과 그의 히스테릭한 순교라는 최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의 결말부에서 갑작스럽게 행해지는 그의 자결은 단순히 가여운 이들에 대한 혹은 자신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겪은 이들에 대한 순진한 속죄나 책무로만 말해지기는 어려운, 저 스스로 심각할 대로 심각한 존재론적 다각화의 변주를 겪어나간 결과 마침내 병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어느 성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세운 오병호라는 인물의 히스테릭한 도덕적 경련이며 자해적 순교다. 역사의 비극 앞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며 숨겨진 진실을 자신의 몸과 정신에 새겨 오던 오병호라는 내러티브적 공은 부풀대로 부풀어 팽창한 뒤에 마침내 스스로 터져 버리기를 택한 것이다. 그러니 뒤집어 말하면, 오병호라는 이 공의 모양새가 변하고 팽창하여 마침내 터져 버릴 때까지 속절없이 몰아 나아가며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어 버리는 그 긴장감의 강도,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증인>의 진정한 매혹이다.
증기선이 질주한다. 목재를 태우고, 목재가 떨어지자 뜯어낸 갑판을 태우고, 구명보트를 태우고, 밀랍인형을 태우고, 악마의 음료이자 만병통치약인 럼주를 태우며 질주한다. 닥터 존(윌 로저스)이 이끄는 낡은 ‘클레어모어 퀸’ 호는 폭발할 듯 불꽃을 뿜으며 1890년대의 미시시피 강을 달린다. 태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태우자(존 포드의 형인 프랜시스는 여전히 술에 취한 채 동료 선원도 태우려 한다) 비로소 결승점에 도착한다. 목적지에 이르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간발의 차이로 닥터 존의 조카 듀크는 교수형을 면하고, 그들 가족은 또 다른 증기선 ‘프라이드 오브 파둑’을 획득한다. 증기선은 자기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리며, 영화는 서사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린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이 걸출한 액션영화라면(하스미 시게히코는 이 영화를 최고의 액션영화 50편 중의 하나로 뽑았다), 증기선의 물리적 운동감 때문이 아니다. 사실 이 증기선은 그렇게 날렵하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영화의 서사도 민첩하기는커녕 태평스럽고 느리기 짝이 없다. 태워질 것이라 예상할 수 없었던 것들,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기 힘들었던 차이들이 화로에서 한몸이 되어 불타오른다. 불타오르며 둔중한 증기선을 힘차게 밀고 간다. 우리를 사로잡는 건 배의 속도감도 불의 물리적 형상도 아닌, 배의 육체도 서사의 육체도 다 태워버릴 듯한 난폭하고도 맹렬한 불의 활동이다. #1 #2 1939년 < 역마차 >가 나오기 전까지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위대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윌 로저스를 주연으로 기용한 세 작품(< 닥터 불 > < 저지 프리스트 > < 굽이도는 증기선 >)과 < 순례여행 > <에어 메일> 등을 제외하면 그가 <역마차> 이전에 만든 20여 편의 유성 영화들은 어딘지 허술하고 독창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물론 < 밀고자 >(1935)로 첫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긴 했지만 이 영화는 과대평가된 포드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동년배인 킹 비더와 조셉 폰 스턴버그가 무성 시대의 말기와 유성시대의 첫 10년 동안 자신의 대표작들을 쏟아낸 것과 비교하면,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차라리 탐색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은 이 탐색기의 의심할 수 없는 최고작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 포드의 거의 모든 것이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처음엔 자신을 한 사건의 서사로 제시하지만 사건이 거의 잊혀질만큼 그것의 장악력이 느슨해지면서, 그 틈새들 사이로 유머와 헛소동, 잉여의 몸짓과 표정들, 그러니까 삶의 조각들과 세계의 조각들이 제멋대로 빛을 내며 활동하기 시작한다. 포드는 이 조각들의 난장을 플롯의 기예로 정리할 생각이 없다. 대신 하나의 결정적 활동 안에 그들을 밀어 넣는다. 미시시피 강에서 증기선 경주가 벌어지는 마지막 20여 분의 시퀀스는 그 조각들이 불타오르며 벌어지는, 영화사가 기억해야 할 황홀한 축제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닥터 존은 미시시피 강 일대를 돌아다니며 싸구려 럼주를 만병통치약으로 속여 판다. 그는 한때 항해사였고 유일한 가족은 조카인 항해사 듀크다. 두 사람은 닭장처럼 초라하고 낡은 증기선 ‘클레어모어 퀸’을 최근에 구입해 들뜬 상태다. 듀크가 늪지대에 사는 소녀 플리티 벨과 사랑에 빠져 그녀를 데리고 나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녀에게 추근대던 선원을 살해한 것이다. 선원이 먼저 칼을 뽑았기 때문에 정당방위이지만, 유일한 목격자인 얼뜨기 예언자 ‘새로운 모세’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듀크의 사형이 확정되고 항소는 거부당했다. 사형은 증기선 경주가 끝나는 시점에 경주의 결승점에서 집행될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듀크의 결백을 증언할 ‘새로운 모세’를 찾아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여기엔 멀쩡한 사람이 없다. 주인공인 닥터 존은 사기꾼 약장사이며, 그의 조카는 정당방위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 자신을 새로운 모세, 새로운 엘리아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엉터리 예언자들, 자수하러 온 살인자에게 귀찮다는 듯 감옥 열쇠를 던져주는 보안관, 사형집행을 앞두고도 증기선 경주에 더 관심이 많은 주지사, 항상 취해있는 알콜 중독 기관사 에페(프랜시스 포드) 등등, 이곳은 사기꾼과 가짜 예언자와 주정뱅이와 게으른 관리의 세계다. 여기엔 영웅도 악인도 없다. 신기하게도 포드는 이 비루한 세계를 더없이 평화롭고 따뜻한 곳으로 그려놓았다. 닥터 존과 ‘새로운 모세’는 적이지만 둘은 부딪히는 일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기 치며 살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미 벌어진 정당방위 살인과 곧 벌어질 부당한 사형집행.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문제를 포드는 사소하게 다룬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그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의 서사는 스스로 종종 그 문제를 잊어버린 것처럼 진행된다. 인물도 서사도 주어진 그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현재에 몰두하는 것이다. 포드는 때로, < 황야의 결투 > 혹은 < 웨건 마스터 >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영화가 심각한 문제를 다룰 때조차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혹은 영화가 사건을 등장시킨다 해도 사건을 다루는 매체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중심 사건조차 서사의 한 조각일 뿐이거나 때로 핑계에 가깝다. < 굽이도는 증기선 >에서 살인과 사형집행은 무엇의 핑계인가. 혹은 살인과 사형집행을 사소화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결국 증기선의 연료가 될 두 소재, 럼주와 밀랍인형을 먼저 떠올려보자. 닥터 존은 럼주가 전설의 인디언 처녀 포카혼타스의 처방약이라고 선전한다. ‘새로운 모세’는 럼주가 악마의 음료라고 주장하며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성령의 리본을 판매한다. 각각 전설과 성경을 근거로 럼주를 찬미하거나 규탄하는 것이다. 의미의 원천인 전설과 성경이 여기선 두 사기꾼의 효과적인 선전도구로 작동한다. 하지만 포드는 이 사기행각들의 악덕을 드러내기는커녕 그것에 유쾌한 활력과 정감을 불어넣는다. 우리의 주정뱅이 에페가 성령의 리본을 달고 악마의 럼주를 들이키며 즐거워할 때, 그는 사기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조작된 의미들과 유희를 벌이는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존재처럼 보인다. 증기선 안에 설치된 밀랍인형 박물관은 모세와 선지자들, 나폴레옹, 조지 왕, 그랜트 장군 등 위대한 전설을 거느린 역사적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영리한 사기꾼 닥터 존은 그들을 남부의 농부들이 좋아할 만한 인물로 바꿔버린다. 조지 왕은 조지 워싱턴으로, 북군의 그랜트 장군은 남군의 리 장군으로, 모세는 무법자 제시 제임스로 명찰을 바꿔단다. 이 영화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장면 가운데 하나는, 박물관을 부수러 온 성난 농부들이 제시 제임스로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리 장군에게 경례를 하는 장면이다. 총을 든 제시 제임스는 좀 전까지 모세였고, 리 장군은 좀 전까지 자신들이 싫어하는 그랜트 장군이었다. 물론 둘 다 밀랍인형이라는 모조품이다. #3 #4 #5 #6 럼주와 밀랍인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들 속에서 역사와 전설, 신화와 성경은 제멋대로 전용되며 조작된다. 진리의 원천, 의미의 심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 이곳에서 모든 것은 표층의 유희로 전유 되어 끝없이 변형된다. < 굽이도는 증기선 >가 기호 놀이라면 기의를 따돌린 기표들의 아방가르드적 유희가 아니라, 임의적이고 일회적이며 종종 기만적인 의미작용 자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기호놀이다. 이제 이 영화에서 사건의 역할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형집행은 사건으로서의 중대성 때문이 아니라 이 기호놀이의 종결자로 동원된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유일한 증인 ‘새로운 모세’를 찾아 사형집행 전까지 결승점에 도착해야 한다. 그 둔중한 육체를 전속력으로 약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에너지이며 힘이다. 이제 주변 사물들은 그것의 유동하는 의미와 상징이 아니라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수한 물질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조지 워싱턴, 리 장군, 제시 제임스, 악마의 음료, 만병통치약은 사라지고 오직 연료로서의 물질들만 남았다. 사형집행은 기만적이고 유희적인 기호놀이를 중단시키고, 모든 것을 힘과 속도의 문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목재는 물론이고 갑판도 구명보트도 태워버린 뒤, 닥터 존이 외친다. “박물관을 태워.” 이제 이름들과 의상들이 상징들이 사라지면서 밀랍인형들이 불탄다. ‘박물관’마저 다 태워버리자 화로는 다시 죽어간다. 부당한 사형집행을 막을 시간도 사라져 간다. 이때 주정뱅이 에페가 화로 곁에서 럼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를 본 ‘새로운 모세’가 화를 내며 술병을 빼앗아 화로에 던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악마의 음료가 그토록 가공할만한 연료인지 몰랐을 것이다. 누가 주정뱅이를 비난할 것이며, 거짓예언자를 손가락질할 것인가. 우연의 간계는 때로 악덕을 천상의 미덕으로 바꿔놓는다. 럼주가 마지막 연료로 등장해 화로에서 폭음을 내며 배를 집어삼킬 듯 불꽃을 내뿜을 때, 탄성을 참기 힘들다. 닥터 존에게 럼주는 이제 조카의 죽음을 막은 진정한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새로운 모세’에게 이것은 악마의 음료를 태워 없애며 한 생명을 살린 신성한 의식이 되었다. 두 사람은 사기꾼이며 엉터리 예언자였고 또한 서로 적이었지만, 어떤 논쟁도 대결도 없이 럼주를 함께 불태우는 행위 하나만으로 자신의 사기와 엉터리 예언을 자기도 모르게 정당화한 것이다. #7 의지와 우연, 미덕과 악덕들이 모두 하나의 불꽃으로 타오르자 비로소 간발의 차이로 행복한 목적지에 이른다. 이 대책 없는 서사의 낙천성은 세계관의 낙천성과 무관하다. 그것은 의지의 뜨거움이 아니라 운명의 차가움에 대한 긍정이며, 운명의 차가운 힘을 알게 된 자의 유희정신이다. 존 포드는 후에 “이건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었는데, 나서기 좋아하는 새 매니저(대릴 F. 자눅을 말한다)가 와서 코미디를 다 덜어내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불평했지만, < 굽이도는 증기선 >는 여전히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 중 하나이고, 소란과 난장의 활력이 영화 전부를 지배하는 포드의 첫 유성영화이며, 그의 후기 대표작들을 예기하는 걸작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3주 전인 1935년 8월 15일, 윌 로저스는 비행기 사고로 5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를 누빈 카우보이, 신랄하고도 유머러스한 칼럼니스트, 보드빌과 연극과 영화를 오간 배우이자 타고난 익살꾼이었던 로저스는 대통령에서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당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한 사내였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의 원래 엔딩은 로저스가 또 다른 증기선 선장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하는 장면이었지만, 그의 죽음 직후 그가 증기선에 편히 누워있는 지금의 엔딩 장면으로 바뀌었다. 원래 엔딩으로 상영할 경우 극장이 울음바다가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