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정신대
- 감독
- 정중, 이상언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박준금, 장두식, 김기종, 정지희, 장지평, 원가페, 이요우, 이미령, 주평, 황국동, 엄가빈, 양인실, 김길래, 화국동
1. 1970년대 변두리 극장을 선회하던 액션영화에 홍콩식 권격영화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협객물이라고 불렸던 이 영화들은 전지구적 유통망 속을 흘러가던 권격영화들의 한편에서 자국 관객들에 대한 강력한 어필로 70년대 한국의 액션영화 시장을 양분하였다. 이 ‘내수용’ 영화들이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영화들이 그 어떤 장르영화보다도 명료하게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를 구성하는 적대의 선을 말 그대로 물리적인 방식으로 반복 재현해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실재하는 하나의 이름을 끌어옴으로써 가능해졌는데, 일찍이 독립전쟁을 수행한 ‘장군의 아들’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내걸었던 이 고유명은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인들의 상업거주 지역인 종로통의 ‘주먹’으로 부상한 이래 해방 정국의 백색 테러리스트로서 ‘빨갱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1960년대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정치 ‘협객’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미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이 이름은 김두한이다. 이 이름이 그토록 오랫동안 (적어도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남성 대중문화의 강력한 원천으로 작동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일과 반공으로 성립된 대한민국의 고유한 두 적을 탁월한 폭력으로 능히 제압해내는 그는 그럼으로써 이 국가가 소망하는 강력한 남성성을 온몸으로 체현해내고 있는 자라고 할만하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는 통한의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이곳의 아들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식민지 남성들이 겪어야 했던 저 강렬한 고아의식과 전후의 비루한 아버지의 형상들을 떠올린다면 거리의 고아 소년이 독립운동가 ‘장군’의 위대한 혈통을 잇는 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얼마나 매혹적인 것인가. 1) 2. 이런 류의 영화들의 기억할만한 첫 시작은 1969년 1월에 개봉한 < 팔도 사나이 >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당시 김두한은 막 정치판에서 자취를 감춘 직후였으나,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똥물을 퍼부었던 정치 협객 김두한의 인기는 절정에 달해 있었고 이제 곧 그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매력적인 자원이 될 터이다. 2) 비록 김두한이라는 실명은 피하고 있지만 <팔도 사나이>는 ‘김두한 스토리’의 첫 번째 버전이라고 할만하다. 고아인 어린 소년 호(虎)는 자신을 길러준 노인으로부터 실은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독립투사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른이 된 호는 주먹으로 종로를 평정하고, 그런 그에게 평양 박달이부터 광주 용팔이까지 팔도의 사나이들이 차례로 도전장을 내민다. 호는 이 싸움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고, 도전자들은 그를 ‘형님’으로 모신다. 이제 조선 주먹을 대표하게 된 호는 종로를 넘보는 일본 야쿠자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 놀랍도록 전형적인 이야기는 한편으로 ‘김두한 스토리’의 원형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팔도’가 환기시키는 1960년대 후반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토’의 현현이라는 감각을 과시한다. ‘종로’의 주인 호가 도전을 받아들이고 굴복시키고 형제의 따뜻한 연을 맺는 일련의 과정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위계화를 완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내부를 계서적 형제관계로 마름질한 그는 외부의 적 과 맞서 싸워 통쾌한 승리를 거둬낸다. 3. <팔도 사나이>는 10만 7천명의 관객동원을 기록하였다. 1967년 기록적인 관람률을 보여주었던 국책영화 < 팔도강산 >의 성공 여파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온 수많은 ‘팔도’ 영화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영화 이후 감독 김효천과 시나리오 작가 편거영은 각자의 방식대로 이 성공을 이어가고자 했다. 같은 해 < 속 팔도 사나이 >, < 돌아온 팔도 사나이 >의 각본/연출을 맡기 시작한 편거영은 < 한국 제일의 사나이 >(1970), < 원한의 팔도 사나이 >(1970), < 예비군 팔도 사나이 >(1971), < 바보같은 사나이 >(1971)를 만들었고, 김효천은 < 명동출신 >(1969), < 명동노신사 >(1970), < 명동백작 >(1970), < 명동에 흐르는 세월 >(1971), < 명동을 떠나면서 >(1973) 등의 ‘명동’ 시리즈를 만들었다. 이 영화들은 적을 규정함으로써 어떻게 정치공동체가 형성되는가를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는 한국영화일 것이다. 이를테면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명동노신사>는 남한 사회가 누구를 동지로 삼고 있으며, 누구를 적으로 하여 형성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룡(장동휘)과 덕팔은 해방 전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형제 같은’ 사이이다. 남조선노동당의 앞잡이가 된 덕팔은 강룡을 포섭하려고 하나 그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강룡의 노모와 누이를 살해하고 빨치산이 되어 산에 들어간다. 한편 강룡이 과거 덕팔과 함께 모셨던 형님 덕진은 국방경비대 창설의 주역이다. 강룡은 덕진 형님을 찾아가 자신의 부하들로 특별부대를 편성, ‘공산비적’을 소탕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밝힌다. 팔도에서 온 부하들을 이끈 강룡의 공비소탕전이 펼쳐진다. 부하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장렬히 전사해간다. 홀로 살아남은 강룡이 이들을 추모한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결절점이 있다. 첫 번째, 형제애의 수사로 강조되는 하나의 민족. 함께 일본에 대항했던 덕팔과 강룡은 ‘형제 같은’ 사이였다. 두 번째, 그러나 이 ‘형제’는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서로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홀로 살아남은 전투의 증언자가 우리를 또 하나의 애도의 공동체로 초대한다. 요컨대, 이 영화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국가, 대한민국을 형성하기 위해서 누구의 피가 흘려졌는가? 3) 4. 김두한의 실명 사용은 그의 죽음 이후 가능해졌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인 1974년 < 실록 김두한 >을 시작으로 < 협객 김두한 >(1974), < 김두한 속 3부 >(1975), < 김두한 속 4부 >(1975)까지 이어진 ‘김두한’ 시리즈는 신필름의 마지막 흥행작이기도 하였다. 김두한이라는 실명이 사용되고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시리즈는 동시기 일본 야쿠자영화의 주요 경향, 소위 ‘실록 노선’을 창조적으로 벤치마킹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실록 노선’의 기념비적 시작을 알린 것은 1973년 정월에 개봉해서 일대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후카사쿠 긴지의 < 의리없는 전쟁 >(1973)이었다. 전후 일본을 야쿠자들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항쟁사로 그려내고 있는 이 시리즈가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였던 일본 68이 좌절된 1970년대 일본 사회의 절망과 조응하는 것이었다면, 김두한의 ‘실록’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의 유신과 긴급조치의 시대에 그야말로 적절하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이 시리즈를 기획했던 자의 말처럼, 이 반일(<실록 김두한> <협객 김두한>)과 반공(<<김두한 속 3부>, <김두한 속 4부>)의 물리적 행위자는 “인정사정없이 줘패는” 행위를 통해 “분풀이 할 데 없는” 대중들을 “대리만족 시켜”주었다. 국가적 요구를 반영하는 이 폭력의 전시야말로 아마도 유신시대에 향유가능했던 가장 안전한 쾌락이었을 것이다. *** 1) 물론 반공에 비해서 반일이란 대한민국의 성립과정이 보여주고 있는 바 어느 정도 애매모호한 것일 수밖에 없다. 김두한의 이력 속에서 보자면 그는 1943년 조직된 총독부 협력단체인 반도의용정신대의 주도자였다.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고등계 형사로 재직중이었던 장명원에 의해 ‘불량청년’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는 이 단체의 설립 및 활동에 근거하여 장명원을 기소하지만 이 기소는 반도의용정신대가 ‘표면상 왜 정책에 협력하는 것같이 보이’나 불량청년들을 ‘감화지도하여 선량한 청년을 육성’하였다는 이유로 유예된다. 당시 김두한은 대표적인 극우 테러리스트로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2) 1966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과 국회의 미온적 대처에 대한 항의로 벌어진 김두한의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내각이 총사퇴하고 김두한 자신은 제명론이 비등한 가운데 자진 사퇴, 국회의장 모욕죄와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1967년 총선에서 ‘서민층에 호소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신민당 공천(수원)으로 선거에 나온 그는 “북괴에는 농촌까지 전기가 들어와 있는데 우리 농촌은 헐벗고 있다”는 요지의 연설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된다. 김두한은 그해 11월 보석으로 출감된 이후 정치계에서 은퇴하였다. 3) 강룡과 덕팔의 이야기는 김두한의 실제 스토리로부터 비롯되었다. 1947년 김두한은 죽마고우 정진용을 그가 좌익 행동대장이라는 이유로 린치,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미군정에 의해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이승만에게 특별사면 받았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3월이면 누이가 생각난다. 흰 저고리에 버선발이 드러나는 검은 치마를 입고 92년 전 거리로 나선 누이들... 일제의 폭거에 항거하던 조선 민중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민족 존폐와 생존의 문제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던 그 시절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주의에 의해 치뤄진 대동아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성적 노리개로 희생당한 누이들은 아직도 먼 타국의 전장에서 명예회복을 통한 완전한 복귀를 하지 못한 체 구천을 떠돌고 있는 현실을 일깨우는 영화 한편이 있다. 김준기 감독의 < 소녀이야기 >는 이러한 위안부 문제를 다큐 형식의 애니메이션으로 묘사해내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데.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협조와 이제는 고인이 된 정서운(1924-2004)할머니의 육성증언록을 바탕으로 실제 겪은 위안부 이야기를 애니메이션 영화로 구성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당시의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도록 3D이미지로 잘 표현해 냄으로써 한국 애니메이션 사에서 역사다큐라는 장르개척과 더불어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위안부 할머니인 정서운의 목소리와 함께 시간은 일제치하의 조선 어느 농촌마을의 기와집에 일본 순사가 들이닥쳐 전쟁물자로 사용하고자 놋그릇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들의 요구를 거절한 아버지는 주재소에 갇히고 소녀와 어머니는 일본 공장에서 잠시 노역을 하고 오면 아버지가 풀려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이장의 꼬임에 넘어가 소녀는 머나먼 타지인 에 배로 며칠을 걸려 도착하게 되고 이곳에서 공장일이 아닌 일본병사들의 성 접대부인 위안부로 끌려온 사실을 뒤 늦게 알게 되지만 도망칠 수도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만을 부지하며 하루하루 치욕적인 생활을 하게 되다 일본군이 패하여 도망치며 모든 것을 소각하며 위기에 빠졌으나 다행히 현지인의 도움으로 기적같이 빠져나오게 되어 고향에 돌아오지만 아버지는 옥에서 죽음을 당하고 난리 통에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집은 폐허가 된 체 소녀를 맞이하게 된다. 일제의 잔혹하고 파렴치한 제국주의의 모습을 한 소녀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잔잔하지만 큰 울림의 감동을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 소녀이야기 >는 고도성장과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잊혀져가는 우리 민족 누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와 치욕의 역사를 영상기록으로 증언하여 오늘날까지 제국주의의 오만함에 빠진 그들의 만행을 고발함으로써 반성하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이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경쟁부문 상영을 시작으로 독일 슈트트가르트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단편 경쟁부문 진출 등 국내외에서 큰 반향과 주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김준기 감독은 굳이 다큐적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하고자 했던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는 아주 자신감 있고 당연하다는 듯이 애기했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사실성과 객관성을 전달하는데 어려운 장르라는 편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록영화로 표현 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 할 수 있다는 장점 또한 있는 것이고 각각의 캐릭터를 표현 할 때 그 스토리 안에서의 역할을 고려한 디자인 설정이 되었다. 즉, 일본군이 선하게 표현되는 것은 이야기상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인상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다큐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다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김준기 감독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아티스트레지던스를 통해 이번 작품을 완료하여 새로운 제작시스템의 모델로 평가받았다. < 소녀이야기 >는 극장에서 만나긴 당분간 어렵겠지만 올 5월 완공되는 위안부박물관에 상시상영을 계획하고 있으니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차기작으로 또다시 태평양전쟁 때 가미가제로 출격한 한인을 소재로 단편을 준비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일제에 대한 우리의 피해의식은 아마도 그들에 희생된 영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히 잠들 때라야 영원히 사라질 것이리라....
내가 이감독을 처음 만난건 1950년대 명동에서였다. 피차 20대 초반의 나이로 영화계에 청운의 꿈을 안고 뛰어들고 나서였다. 당시 명동 한복판(옛날 명동 공원) 바로 옆에 5층 건물 있었고 3층에 고 이병일 (李炳逸) 감독님 사무실이 있었다. 다섯평 정도의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그 사무실에서 이상언 을 처음 만났다. 나는 수도(首都)영화사( 홍찬 사장 경영)에 공채로 합격하여 영화계에 화려하게 입문했으나 얼마 못있다가 영장이 나와 군에 가야만 했다. 군제대 후 영화계에 돌아 와 보니 수도영화사는 최초의 칼라 영화 ' 생명 '( 이강천 감독) 영화 하나만 만들고 어쩐지 비실거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반실업자가 되어 방황하게 되었다. 어떻게 알음알음으로 이병일 감독님 사무실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들이 김지헌 시나리오 작가, 이성구 감독, 촬영기사 홍동혁 그리고 이상언이었다. 이상언은 당시 홍동혁 촬영기사의 촬영부 제2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병일 감독님의 작품을 촬영중이어서 그런지 활발한 모습으로 요즘 말로하면 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난 연출부 지망이었으므로 직접적으로 이상언과 부딛칠 기회는 없었다. 충무로 바닥이 워낙 좁은 곳이라 길거리에서 이상언과는 눈인사 정도는 하였으나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따로 놀았다. 그러다가 내가 이성구 감독 밑에 조감독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 연출부에 상언이 들어 왔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상언 은 일찌기 대구에서 연극을 하였다니까 아마 배우 쪽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나 보았다. 몇편의 영화 출연도 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그가 촬영부에서 카메라를 익히다가 다시 연출부로 뛴걸 보면 상당한 계산을 두고 차곡차곡 계단을 밟지 않았나싶었다. 일테면 상언이는 말을 똑똑하게 잘했고 좀 설친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적극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난 그렇치가 못했다. 촬영 현장에서 이성구감독은 이상언 을 주로 상대하면서 작업을 진행시켰다. 나는 현장에서는 상언이에게 밀리는 신세였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쓴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언이가 나를 경계한다고 할까. 어쨋던 그럭저럭 상언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상언이는 술을 못해서 술을 좀 하는 나와는 어울리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상언이 나한테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그 이유가 밝혀졌다. 그의 집이 중구청 뒤쪽 적산집 이층이었는데 모친님과 동생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무튼 상언이는 자주 그의 집에 나를 끌고 갔다. 그 이유는 그가 구상한 시나리오를 나한테 씌우려고 한 것 같다. 그 시나리오 쓰는 일 때문에 나는 그의 집에서 먹구자고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자연히 상언의 생활 반경이 나한테 노출되었다. 그때 상언의 교제하는 애인이 그 유명한 부인 김숙자 여사였다.(상언은 김숙자 여사를 잘도 물었지) 김숙자 여사는 영화계에서 다 알다싶이 이름 난 헤어드레서로서 김지미 여사와 동거동락 하는 사이였다. 그 때문에 나는 상언이와 김숙자씨 연애하는 사이에 끼어서 맛있는걸 얻어 먹곤했다. 이감독은 1965년도에 합동영화사에서 ' 후회하지 않겠다 ' 란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 무난한 데뷔였다. 그는 총 33편의 작품을 감독했는데 이 정도면 영화 감독으로서는 상당한 작품을 감독한 셈이다. 특히 ' 형 ' 이란 작품은 두 번씩이나 리바리벌 활 정도로 힛트를 했다. 형이 택시 운전을 하면서 갖은 고생하여 공부시킨 아우가 나중에 번듯하게 출세를 했음에도 그 신세진 형을 되게 괄세한다는 내용이다. 일테면 (孝)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많은 관객을 울렸다. 그리고 ' 2박 3일 ' 영화. 이 작품은 연방영화사(사장 주동진 )에서 제작했는데 애당초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하기로 됐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으나 난 겹치기 연출로 스케쥴이 맞지 않자 이상언 감독이 레디고를 부르게 되었다. 당시 배우는 하명중 윤연경 김희갑 등 호화 캐스팅은 결코 아니었다. 일종의 쿼타용 맞춤 영화였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선전도 별로 하지를 않았고 충무로에서는 아무도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 '2박 3일'' 영화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났을 당시 김위원장과 기자들 사이에 한국영화가 화제에 올랐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갑자기 김위원장이 '2박 3일'' 영화를 아느냐고 기자들에게 물었다.(홍콩을 통해 프린트가 북으로 넘어 간 모양) 그러나 기자들 중에 아무도 그 영화를 본 사람이 없어 잠잠하자, 김위원장이 '2박 3일' 의 영화 내용을 침을 퉁기며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그 얘기가 또 국내 일간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연출을 담당했던 이상언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 되어, 그 대신 '2박 3일' 시나리오 쓴 나를 기자들이 찾아와 묻기에 인터뷰에 응하고 한 기억이 새롭다. 상언은 참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얘기도 그의 입을 일단 거치면 개똥 철학이든 아니든간에 뭔가 그럴듯한 인생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때문에 상언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은 그냥 듣기만 하면 밑천을 건지고도 남는다. 이상언 이 사망하기 전까지 영화사 사장직을 맡아서 일 한때가 있었다. 김숙자 여사는 이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추억한다. 남편이 영화 감독이 되고 난 후로 제때 또박 또박 월급 봉투를 안겨 준게 생전 처음이라는 것이다. 상언이 친구들 밥 먹이고 술 사는데 쓰는걸 다 알면서도 김여사는 그런 남편이 뿌듯했다고 얘기한다. 나는 이상언의 단골 쯤 되어 그의 술 파티(상언은 그냥 폼으로 술 마시는 형)에 빠지지 않게 끼이게 된걸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저녁 때 쯤이면 상언이한테서 전화가 온다. 나는 나 혼자만 불러서 갔는가 혀여 자리를 잡고 앉으면 잠시 후 줄줄이 사탕으로 배고픈(?) 손님들이 하나 둘씩 꾸역꾸역 기어들어 온다. 별로 중요한 일 때문에 만나는게 아니고 그냥 친구들 밥먹여서 보내고 잡담하며 지내는걸 즐기는 상언이인지라 아무 부담이 없다. 거기에는 반듯이 김숙자 여사가 그림자처럼 동석하게 마련이다. 상언이 친구들을 좌우에 좍 거느리고 그 유명한 담론을 쏟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한눈을 팔래야 팔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상언은 얘기의 달인이다. 그의 화제가 값이 있는 건 흔이 술자리에서 있게 마련인 남에 대한 험담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인격이 돋보이고 듣는 사람들은 편안해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게 있는데 그의 일본말 구사 능력이다. 별로 학구적으로 배운 것 같지는 않은데도 일본말 구사는 기름을 친 듯 거침이 없다. 어디서 언제 배웠는지 간단한 생활 일본어임이 분명한데 그럴듯하게 구사하는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 더러 일본인이 합석하여 상언의 일본어 구사를 듣게 되는데 일본인들이 요절 복통을 하는걸 옆에서 지켜 보면사 감탄 한 일이 한두번 아니다. 원어민을 앞에 앉혀놓고 일어로 웃긴다는건 보통 수준이 넘는다. 난 일본어 원서를 읽지만 회화는 아작도 더듬거리는데 말이다. 언젠가는 상언이 일본갔다가 무슨 집회 같은데서 백여명 넘는 일본인들 앞에서 연설한 하는데 그 자리에서도 되게 일본인들을 웃겼다니 참 대단한 친구다. 상언의 기지(機智)라면 일본어를 기가 막히게 잘 했대서 웃는게 아니라 일부러 어수룩하게, 또는 유치하게 단어를 골라서 함으로서 일본어로 웃기는 그런 재주는 보통이 아니다. 상언이는 한번 일본인을 사귀면 상언이를 계속 쫒아 다니게끔 만드는 모양이다. 특별한 공무가 아니고도 일부러 일본에서 건너 와서 상언이를 만나고 가는 그런 일본친구들을 나도 몇 명인가 인사를 받았다. 그는 무슨 영화인 단체회의 모임에, 주최측은 이미 짜고 진행되는 회의임에도 불구하고 꼭 나서서 독불 장군식으로 한마디 하고나서야 넘어간다. 이상언 은 그런데 단골멤버이다. 이상언이 그냥 말없이 넘어가면 심심 할 지경이다. 그러나 맹탕 헛소리 하는 경우는 드믈다. 외톨이 동끼호테 기질인지 모르겠다. 그에게서 딱 한가지 배울게 있다. 이상언 이 같은 말도 기왕이면 듣게좋게 돌려서, 양념을 처서 하는 솜씨는 일단 평가 해줘야 마땅하다. 그런 그가, 참 잘 나가기 시작하던 그가 뜻밖에도 1993년 6월 14일, 그러니까 지금부터 딱 10년전에 우리 곁을 부랴 부랴 떠났다. 당시 이상언 이 사장으로 있던 SKC 영화사 작품 '남자위의 여자'를 고용남 감독한테 맡겨 한강변에서 촬영 진행중이었다. 특별히 헬리콥터까지 동원되었다. 원래 찰영부에서 솜씨를 닦았고 나중에 연출까지 익힌 이상언 감독이 고영남을 대신하여 헬리콥터에 오른건 숙명이 아니었나싶다. 헬리콥터에서 부감으로 낮게 날게끔 이상언이 독려한건 하나도 이상하지가 않다. 단지 헬리콥터 조종사가 미숙했을 뿐이다. 이상언은 일찌기 촬영부에 있을때 익힌 카메라에 자신만 있지 않았드라도, 또는 감독 출신만 아니었드리도 그런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헬리콥터 부감에서 고도를 점차 낮추면서 가장 멋진 캇트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카메라가 돌아가는 신바람나는 그 순간만큼은 이상언에게 있어 어떤 행복감에 도취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는 현장에서 일하다가 고귀하게 순직하고 그 이름을 남겼다. 이상언 의 장례직장에는 영화계에 유례없는 조객이 모여들어 고인을 추도했다. 일본에서도 친구들이 다수 참석했다. 고인에게는 안됐지만 영화감독이 촬영을 하다가 현장에서 타계한건 더 없는 명예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조문진 (영화감독) / 2003년 <프로필> 1937년 2월 1일 경북 김천 출생 1965년 < 후회하지 않겠다 > 데뷔 1993년 6월 14일 타계 <작품 연보> 1965 후회하지 않겠다 / 잃어버린 세월 / 현금은 내것이다 1966 집없는 천사 / 소금장수 1967 동심초 1968 갈망 1969 형 1970 당신을 알고 나서 / 범띠 가시내 / 잊을 수가 있을까 / 저 하늘에도 슬픔이(속) / 누가 그 여인을 모르시나요 / 타인의 집 1971 흐느끼는 두 여인 / 검은 장갑을 껴라 / 오빠 1972 불장난 / 항구의 등불 1973 똘똘이 해상특공대 / 흑조 1974 시집갈래요 / 2박3일 1975 조약돌 1976 별하나 나하나 1978 오빠하고 누나하고 1979 터질 듯한 이 가슴을 1981 0번 아가씨 1982 화순이 1984 형 1985 오싱 / 여자정신대 1987 뜨겁고 깊은 겨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