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
- 감독
- 유지민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이현, 김진구, 김보민, 홍석연
1999년 | 씨네2000 감독: 김태용 민규동 | 원안: 김준희 윤성아 윤제균 차영하 하성실 황병조 | 각본: 김태용 민규동 인정옥 | 제작: 이춘연 | 촬영: 김윤수 | 미술: 오상만 이대훈 | 음악: 조성우 CAST 민아: 김규리 (김민선) | 효신: 박예진 | 시은: 이영진 | 지원: 공효진 | 연안: 김재인 | 고형석: 백종학 벌써 이 영화가 나온 지 20년이 되었네요. 1998년 < 여고괴담 >( 박기형 )이 신드롬을 일으킨 후 1년 만에 나온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는, 속편이지만 전작과는 크게 다른 느낌의 독립된 작품처럼 여겨졌습니다. 1편만큼 큰 흥행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이 영화는 컬트적인 반응을 얻으며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죠. 독특하게 김태용, 민규동의 공동 연출 시스템으로 제작되기도 했고요. 김태용 감독의 설명처럼 “전편이 힘과 권력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개인의 감성에 대해 이야기”라고 있습니다. 동성 친구와 담임 선생님에 대한 효신의 사랑과 갈등엔 호러보다는 멜로의 요소가 훨씬 많았으니까요. 현장 공개는 10월에 있었습니다. 양수리 종합 촬영소에 지어진 교실 세트였죠. 효신(박예진)이 자살한 후, 아이들은 국어 교사인 고형석(백종학)과 효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국어 시간에 교과서를 교탁 위에 올려놓고 수업을 거부합니다. 프로듀서 출신인 백종학은 < 강원도의 힘 >( 홍상수 , 1998,에 이어 두 번째로 배우로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수업을 거부하고 책상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입니다. “자, 여기 집중해봐! 저기, 조용하고 여기 보라니까! 슛 하면 준비하고 액션 하면 연기하는 거다!” 간단한 장면 같지만, 적잖은 조율이 필요했습니다. 백종학과 김태용 감독의 모습입니다. 이 영화는 김태용 민규동, 두 감독의 공동 연출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 역할 분담에 대해 김태용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는 내가 연기 지도를 하고 규동이가 모니터 앞에 앉아 콘티를 점검하는 식으로 역할이 나뉘어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래요. 모니터 앞에 먼저 앉는 사람이 콘티를 보는 거죠. 의자가 하나밖에 없으면 늦게 온 사람이 앉을 수가 없으니까 연기 지도를 하게 되고요. 이건 농담 같은 진담이에요.” 효신이 세상을 떠난 후, 시은(이영진)은 효신의 반으로 찾아가 일기장을 찾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하고,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죠. 시은은 발로 의자를 차고 교실 밖으로 나갑니다. 효신의 책상 위에 놓인 국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적 비극’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시은을 찾기 위해 제작진은 각종 잡지를 보며 적합한 이미지를 지닌 배우나 모델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캐스팅 회의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날, 알고 보니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의 사진을 가져왔는데요, 바로 이영진이었죠. 강렬한 눈빛에 중성적 이미지를 지닌 육상부 시은은 어쩌면 이영진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였던 셈입니다. 김태용 감독과 민규동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동기로 < 열일곱 >(1997), < 창백한 푸른 점 >(1998) 등의 단편을 함께 연출한 바 있습니다. “나는 무지 게으른데 규동이는 부지런해요. 그런 데서 약간은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김태용) “타이핑 속도가 빠른 내가 시나리오를 정리하고, 남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태용이가 현장 사람들을 통제한다든지 하는 식이죠.”(민규동) “규동이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것, 흔히 사소하고 미시적이라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죠. 나는 남들이 관심을 갖는, 거시적이고 큰 것에 관심을 갖는 편이고요.”(김태용) “태용이는 현실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꾸밈없이 그리려는 경향이 있어요. 나는 어릴 때 서양 동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국적이 없고 환상적인 걸 좋아하고요.”(민규동) “하지만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가려는 점에서는 같죠.”(김태용) 세트장은 촬영 현장이라기보다는 실제 교실에 가까웠던 분위기였습니다. 아마 <여고괴담> 시리즈 다섯 편 중에서 아이들의 생생한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아닐까 싶고요. 이영진과 민규동 감독의 모습입니다. 민 감독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메가폰을 잡은 덴 여고생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삶의 어느 시기보다 에너지가 높은 열일곱, 열여덟 나이 또래 아이들에 대해 할 말이 많았어요. 그리고 내 안에 없는 여성성에 대해,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억압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고요.” 이 영화를 보신 관객이라면 낯설게 느끼실 만한 장면입니다. 효신은 죽음을 결정하기 전, 교실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면서 그 환영에 시달립니다. 결국 이 대목은 최종 편집본에 들어가지 못하고 삭제되는데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상당히 많은 신이 이렇게 잘려나갔습니다. 그 과정에 대해 민규동 감독은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픈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박예진은 냉소적인 모범생 효신 역을 맡았습니다. PC통신 포럼을 통해 지원한 500여 명 중 오디션을 통해 뽑혔습니다. “사실 ‘여고’에는 관심이 많은데 ‘괴담’이어야 한다는 게 좀 어려웠어요. 전편은 학교라는 공간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사회 전반에 가해지는 폭력성이라는 화두를 갖고 있어요. 살인이 일어나고 그것에 복수하고… 그로 인한 통쾌함이 있는 거죠.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다르게 접근하고 싶었어요. 한 소녀가 갖고 있는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고 할까요?”(김태용) “전편은 입시로 스트레스를 받는 1980년대 여고의 상황을 그렸어요. 하지만 1999년의 여고생들은 입시 외적인 문제로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죠. 두 번째 이야기는 그 현실을 그렸고 다음 세기에는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들은 상처와 슬픔을 담으려 노력했어요.”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6mm 디지털 단편을 찍을까 아니면 뭘 할까 고민하던 김태용 감독은 민규동 감독과 함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제안을 받고 “우리더러 장편영화를 찍으라고?”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기민 프로듀서를 만났고, 전적으로 두 감독에게 맡기겠다는 분위기여서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촬영이 이뤄진 양수리 종합 촬영소 세트입니다. 학교의 전체적인 모습은 창덕여고에서 촬영했습니다. 효신 역의 박예진입니다. 오디션 전에 보낸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고 그 결과 캐스팅이 되었습니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감정 이입이 뛰어난 신인이었습니다.
앞선 여성코미디언 약사 1에서는 박옥초와 백금녀의 영화에서의 활약을 살펴보았다. 악극단의 스타였던 박옥초가 영화로 무대를 옮기고 난 뒤 70여 편의 영화에서 개성 있는 조연과 단역을 맡아 신 스틸러가 되었다면, 백금녀는 확실한 자신만의 코미디 콘텐츠를 가지고 주연과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았던 경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여성 코미디언들은 영화보다는 라디오, TV 등 여타의 매체에서 더 돋보이는 활약을 하였거나, TV에서의 스타성을 가지고 영화로 영역을 넓힌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코미디영화 전성기에 남성 코미디언들이 주인공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동안, 백금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 코미디언들은 조연이나 단역 이상의 역할을 맡지 못했다. 이들은 악극단의 전성기와 라디오 시대를 거치며 눈부신 활약을 했으나 흥행 시장이 영화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주변화 되었거나 영화를 건너뛴 채 쇼 무대에서 TV로 이동하여 스타덤을 이어갔다. 물론, 코미디의 영역 자체에서 여성들은 대체로 남성들에 비해 좁은 입지를 가져왔던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가부장제 하의 젠더 규범에서 여성성은 “겸손함과 어여쁨”으로 규정되어 왔기 때문에 “광대짓 하기나 바보짓 하기”는 여성들의 행동으로 부적절하게 여겨져 왔다. 즉, 여성이 코미디 발화의 주체가 되는 것은 “문화적으로 결정된, 이상적인 여성 행위에 대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1) 우리나라뿐 아니라 영미권이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코미디 산업의 모든 영역에서 오랫동안 남성들이 지배적인 것이 일반적 2) 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코미디 산업에서 남성의 우세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본다 하더라도, 한국 코미디영화와 여성코미디언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적인 측면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 해에 평균 10편 이상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이 기간 동안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언코미디가 50여 편 가까이 제작되었던 상황에서, 여성 코미디언이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영화는 매우 드물었다. 단편적인 무대 코미디나 만담, 쇼 등에서는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여성 코미디언들은 거의 대부분의 코미디영화에서 조연이나 단역에 머물렀다. 두 번째, 코미디영화 속 여성 재현의 문제이다. 프로이트는 두 남성 사이의 농담에서 여성의 역할이 “적대적이고 성적인 공격의 대상” 3) 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1950-1970년대 한국의 코미디영화 속 여성들 역시 대체로 프로이트적 규정 안에서 유형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남자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미용사> 등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들이 매우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여성 캐릭터들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른바 ‘남자 시리즈’ 속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교화’되어야 할 대상이자 남성 주인공의 사회적 성취와 더불어 주어지는 ‘성적 보상’으로 객체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영화의 여성 주인공은 대부분 미모가 두드러지는 젊은 여성 배우들이었고, 여성 코미디언들은 외모로 웃음을 담당하는 조연이나 단역으로 역할이 한정되었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영화의 존재는 매우 이채로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의 코미디영화 안에서의 여성 코미디언들의 문제적 위치와 재현 양상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코미디 배우들의 존재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고 제한된 영역 안에서나마 다양한 웃음의 코드들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기억되어야 한다. 이들은 박옥초와 백금녀 만큼의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 스타였다고 할 수는 없어도, 무대에서 혹은 TV에서 매우 강렬한 웃음을 만들어 내었던, 우리 시대의 코미디언들이었다. 가장 먼저 언급할 사람은 고춘자(1922-1995)이다. 고춘자는 장소팔과 함께 콤비를 이루어 1950-60년대 만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고춘자와 장소팔의 활약은 e-영상역사관에 남아 있는 몇 편의 문화영화, <내고향 좋을시고>와 <민요잔치> 등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고춘자는 활동 초기에는 장소팔, 후기에는 김영운과 짝을 이루어 대화만담과 민요만담 등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영화 출연은 콤비였던 장소팔에 비해서도 훨씬 뒤늦은 편이었다. 장소팔은 <여성 코미디언 약사> 1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처가>(김수용, 1958)에서 백금녀와 함께 주연을 맡아 출연한 기록이 있는데, 고춘자의 경우에는 196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단 한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김화랑 감독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1965)가 그것인데, 여기서 고춘자는 장소팔과 함께 실명 그대로의 만담가로 단역 출연했다. (그림1)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김화랑, 1965)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 컬러사진으로 실린 인물은 안경쓴 서영춘과 김희갑, 그 밑이 구봉서. '쥐’라는 글자 바로 왼쪽이 황정순, 황정순 왼쪽으로 두 번째가 고춘자이다. 다음으로는 백금녀를 벤치마킹하여 등장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이 있다. 가장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것은 오천평(1943- )이었는데, 오천평의 본명은 장정숙으로 오천평이라는 예명 자체가 그의 캐릭터를 대변해주었다. 박영한 작가의 『머나먼 쏭바강』의 한 대목을 보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사들을 위문하러 갔던 위문 공연단의 공연을 보면서 한 병사가 저 기막히게 잘 하는 여자가 누구냐고 질문하자, 바로 오천평이라고 대답하면서 ‘자네는 TV도 안 보나’라고 반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천평은 1970년대 TV에서 ‘기막히게 잘하는’,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유명 연예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오천평은 그 존재감이 TV에서만큼은 크지 않았다. 오천평이 출연했던 첫 영화는 이규웅 감독의 코미디 <치마바람>(1967)이었는데, 여기서 오천평은 주인공 김지미와 계원들이 놀러간 바닷가에서 마주친 여성으로, 서영춘과 함께 ‘역할전도’ 코미디를 선보였다. “밴드! Love Portion Number 9!”이라고 소리치며 무리 안으로 뛰어든 오천평은 서영춘과 말싸움을 하다가 서영춘을 어깨에 둘러메고 바닷물에 내팽개친다. 바닷물에서 정신을 잃은 서영춘을 다시 어깨에 메고 모래사장으로 돌아온 오천평은 서영춘의 배를 누르고, 서영춘의 배에서는 물과 함께 물고기들이 튀어나온다. 만화적 상상력을 보여주며 폭소를 유발하는 이 장면은 백금녀-서영춘 콤비 코미디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천평은 이 영화에서 백금녀의 역할을 이어 받아 서영춘과 대구를 이루는 코미디를 보여주었다. (그림2) <치마바람>(이규웅, 1967)의 한장면. 가운데 하얀 가운 차림의 김지미, 그 오른편 뒤쪽으로 오천평과 서영춘, 그 앞쪽으로 김지미에게 오른팔을 두른 사람이 도금봉이다. 오천평의 영화 속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스틸 사진은 임권택 감독의 1969년 코미디영화 <신세 좀 지자구요>에서인데, 이 스틸사진에 찍힌 오천평의 모습은 실제 영화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림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의 오천평 정면 스틸 사진.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천평 등장하는 장면을 실제 존재하지 않으며, 아마도 편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오천평이 등장했던 영화로는 <공주님의 짝사랑>(최은희, 1967), <가요반세기>(김광수, 1968), <남정임 여군에 가다>(김화랑, 1968), <타잔 한국에 오다>(김화랑, 1971), <삼일천하>(신상옥, 1973), <청춘25시>(이기영, 1973),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 <관광대행진>(이명식) 등이 있는데, <공주님의 짝사랑>에서는 철없는 공주 남정임 때문에 골탕을 먹는 정상궁 역을, <남정임 여군에 가다>에서는 남정임과 함께 입대하여 훈련을 받는 계모임의 일원 역을, <타잔 한국에 오다>에서는 배삼룡을 사랑하는 뚱순이 역을 맡아 웃음을 유발했다. 오천평의 출연작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은 <삼일천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오천평은 궁녀 혁명가 ‘고대수’로 열연하여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한 고대수(오천평)는 괴력을 가진 여성으로 등장하여, 굶주린 평민 남성들을 상대로 거친 액션신을 벌이고 이어 등장한 변수(박노식)에 의해 각성한 뒤 개화당을 도와 혁명을 이끄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이어지는 고문과 탈주, 그 뒤 거리에서 백성들의 돌에 맞아 비장한 최후를 맞게 되는 고대수 역은 오천평의 뛰어난 연기력과 색다른 연기의 지평을 보여줄 수 있는 주요작이다. (그림4)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장면. 굶주린 평민 남성들이 궁중에서 나온 음식들을 버리려는 궁녀 고대수(오천평)에게 덤벼들자 이들을 제압하는 장면. 이후 고대수는 각성하고 혁명에 동참한다. 오천평의 뒤를 잇는 ‘뚱순이’ 캐릭터로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써 나갔던 배우 중 한 사람은 최용순(1946-2000)이었다. 최용순 역시 영화보다 TV에서 더 존재감을 드러냈던 배우였다. 1969년 KBS 탤런트 공채로 시작하여 각종 TV 코미디에서 인기를 모은 최용순은, 이후 브라운관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에 진출한 경우였다.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용순은 탄탄한 연기력과 귀염성 있는 외모로, 결혼과 연애 서사 코미디에서 주, 조연을 맡곤 했다. (그림5)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결혼 후 본가에 온 최용순과 그의 부모. 오천평은 이 영화에서 최용순은 엄마로 등장했다. 사진 중간이 오천평, 오른쪽 최용순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최용순은 <산에 가야 범을 잡지>(이형표, 1969)를 시작으로, <팔도 며느리>(심우섭,1970),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 <너는 여자 나는 남자>(김응천, 1979), <서울은 여자를 좋아해>(남기남, 1987)까지 총 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림6) <팔도며느리>(심우섭, 1970)의 한 장면. 최용순은 김지미, 사미자, 여운계 등과 함께 김희갑의 팔도며느리 중 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맨 왼쪽부터 최용순, 사미자, 김지미 (그림7) <잘했군 좋았군>(고승호) 포스터. 가운데 부분 왼쪽 원안에 파란색 치마 한복을 입은 여성이 최용순이다. 그 중 <나의 인생고백 제2탄>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배삼룡을 주인공으로, 최용순이 상대역을 맡았다. 배삼룡과 최용순을 투 톱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35세의 노총각 배삼룡이 최용순과 결혼한 뒤 벌어지는 여러 가지 소동을 그렸다. 순진한 노총각 배삼룡은 최용순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의 부모와 섣부른 약속을 한 터라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다. 신혼 첫 날 밤부터 왕성한 식욕과 성욕을 과다 노출하는 최용순의 캐릭터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며, 또한 이를 통해 자신의 코미디를 연출한다. 예컨대, 끝없이 음식을 먹는 장면이나 배삼룡에게 억지로 섹스를 강요하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한다. 최용순이 출산으로 인해 집을 비웠던 사이에 배삼룡은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데, 모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순간에 아기를 안고 등장한 최용순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다짐을 늘어놓는다. (그림8) <나의 인생고백 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신혼여행 첫 날 밤의 배삼룡과 최용순. <나의 인생고백>에 등장하는 최용순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과다한 식욕과 성욕의 소유자로 단순화되고 대상화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영화 자체가 남성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신체적 우위를 내세운 최용순의 욕망은 항상 즉각적으로 충족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일방향적이고 일시적인 충족에 불과하다. 배삼룡이 끊임없이 새로운 여성을 욕망하고 최용순을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배삼룡이 진심으로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과 동시에 최용순은 ‘좋은 아내’가 되기를 약속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그들 사이의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아이까지 업은 배삼룡과 군것질을 하면서 지나가는 최용순의 대조적인 모습이 엔딩씬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림9) <나의 인생고백 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신혼 첫날밤부터 식욕과 성욕을 과다노출하는 최용순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이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나의 인생 고백 2탄>은 최용순이라는 인기 TV 코미디언과 당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배삼룡을 스크린으로 불러 왔지만, 최용순의 연기력이나 매력을 전혀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가하면, 배삼룡은 항상적 우울증을 가진 사람처럼 무기력하고 고독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다소 엉뚱하고 바보스러운 ‘비실이’ 캐릭터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이 영화의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영화는 건장한 신체를 가진 여성 코미디언을 활용하는 가장 손쉽운 방식을 택하여,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시켰다. 한국 영화 산업 자체의 위기를 겪게 되는 1970년대를 거치며 코미디영화들은 1960년대 코미디들이 주었던 동일시의 위안이나 전복의 쾌감을 줄 수 없는, 기묘한 웃음의 코드들만 남긴 채 사라져갔다. 그밖에 김희자(1934~ )는 1950년대 후반 HLKZ-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일한 여성 고정출연자였는데, 서영춘과 함께 무대에 올라 빠르게 주고받는 코미디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입담을 자랑했다. 그 역시 1950년대 악극단에서 데뷔하였고 TV코미디로 큰 인기를 누렸다. 김희자는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기록이 있다. <선화공주>(최성관, 1957),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 <관광대행진>(이명식, 제작년도 미상)인데, 세 편 모두에서 주요 배역을 담당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중 김희갑과 함께 출연했던 <선화공주>, <관광대행진>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서는 김희자가 어떤 역을 맡았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며, <우리강산 차차차>의 경우에는 단역으로 출연한 김희자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10)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 맨 오른쪽 김희갑 옆에서 춤추는 이가 김희자, 김희자 옆에는 백금녀가 보인다 . 이순주(1942~ )는 쇼 무대와 라디오의 전문 여성 MC로 활약했으며 주로 TV 코미디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순주는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 <생활의 명랑화>, <팔도노랭이>, <당나귀 무법자>, <타잔 한국에 오다> 등 5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팔도노랭이>는 <팔도강산>의 아류작 중 하나로, 김희갑과 박옥초가 부부로 등장하여 결혼한 일곱 딸들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전반적인 구성이다. 이순주는 코미디 콤비인 송해와 함께 넷째 딸 부부로 등장하여 비교적 비중 있는 역할을 소화했다. <당나귀 무법자>에서는 서영춘과 사랑을 나누는 술집 여성인 단역을 맡았다. (그림11) <팔도노랭이> 포스터. 가운데 김희갑을 중심으로 왼편 위에서부터 세 번째, 구봉서, 서영춘 다음이 이순주, 그 밑이 안인숙. 오른쪽 맨 밑이 백금녀이다. 김희자와 이순주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상대역 여성들이 박옥초와 고춘자에서 김희자와 이순주로, 거의 20살 차이가 나는 젊은 세대로 바뀌는 동안에도 여전히 남성 코미디언들은 취직과 결혼이 지상과제인 ‘청춘’ 주인공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에 주로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은 주로 단역을 맡으며 영화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 초를 마지막으로, 한국영화사에서 코미디영화 제작은 더 이상 호황이 아니었다. 매우 드물게, 이전 작품들의 리메이크가 만들어졌고 심우섭, 이형표 등의 감독들만이 1년에 한 작품 정도로 코미디영화 제작의 맥을 이어가는 형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여성 코미디 배우들의 입지는 또 다시 변화한다. 배연정과 권귀옥이 등장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에 대한 코미디 의존도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를 영화 속에 각인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배연정(1952- )은 1969년 가수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가 1971년 MBC 공채 코미디언 1기로 정식 데뷔하였다. 당시 MBC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던 <웃으면 복이와요>에 김희자의 대타로 출연하였다가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으며, 1973년 TBC로 옮기면서 배일집과 함께 ‘고전유머극장’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 이들은 ‘코미디계의 신성일, 엄앵란’으로 불리며 1970-80년대 TV 코미디의 전성기를 누렸다. 4) 배연정 역시 TV에서의 인기를 업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1970년대 말부터 약 10년간 총 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는 주지하다시피 한국영화의 침체기였고, 특히 코미디영화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 배연정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1960년대 코미디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이었던 심우섭, 이형표가 자신들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들에서 배연정은 코미디영화의 주연배우 혹은 비중 있는 조연배우로 등장했다. 출연작은 <마음 약해서>(심우섭, 1979),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형님먼저 아우먼저>(심우섭, 1980), <청춘을 뜨겁게>(심우섭, 1981),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 <전설철인 키매랑>(은희복, 1989) 등의 7편이다. 이 중에서 배연정을 주연으로 한 <난 모르겠네>는 태권도 유단자인 말괄량이 배연정의 연애와 결혼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였다.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했던 TV 스타 배연정은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청춘 코미디’, 즉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을 맡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배연정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일인 쇼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동양재벌 사장 딸이지만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인 동자(배연정)는 아버지가 정해준 신랑감 후보들을 모두 물리치고 쥐포장수로 변장하고 있었던 병태(장고웅)와 사랑하게 된다. 설정부터 결말까지,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한국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림12)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포스터. 위편 왼쪽에서 태권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바지 입은 여성이 배연정. 이후의 출연작에서 배연정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여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다음 작품이었던 <마음 약해서> 역시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임희춘 등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TV 코미디의 남성 스타들과 배연정, 권귀옥 등의 여성 코미디 스타들을 총 출동시켜 얽히고 설킨 연애담을 보여주는 청춘 코미디였다. 배연정은 까다로운 ‘올드 미스’로, 권귀옥은 결혼상담소 소장 서영춘의 딸이자 ‘조사부장’으로 등장했다. (그림13) <마음약해서>(심우섭, 1973) 포스터 가운데 안경 쓴 구봉서의 얼굴 왼쪽이 임희춘이고, 그 옆에 임희춘과 결혼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배연정이다. 구봉서와 임희춘 바로 밑이 이기동과 권귀옥이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더 좋아>는 김기풍 감독의 동명의 영화(1965년)의 리메이크로, 원작은 여장남자 코미디의 열풍을 불러왔던 서영춘의 출세작이었다. 이 전설적인 영화의 리메이크작이었던 1983년 <여자가 더 좋아>에서 배연정은 여장남자 식모인 장고웅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주인집 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그림 14) 1965년의 전설적인 코미디영화 <여자가 더 좋아>의 리메이크 작인 1983년 <여자가 더 좋아>에서 배연정은 여장남자 식모 장고웅의 잔소리, 장고웅에게 반한 남편 주병진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며느리 역을 맡았다. 권귀옥(1950~ )은 MBC 탤런트 공채2기로 1970년 데뷔한 이후 코미디언으로 전향하여, 1973년부터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기동과 함께 ‘땅딸이와 늘씬 미녀’로 활약했던 권귀옥 역시 TV 코미디로 전국적 인지도를 올리고 난 뒤 영화로 진출한 경우였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는 총 4편으로 <나에게 조건은 없다>(강대선, 1971), <시집갈래요>(이상언, 1974), <마음약해서>(심우섭, 1979), <아리송해>(심우섭, 1979) 등이었다. 이 중 코미디언으로 전향하기 전에 출연했던 <나에게 조건은 없다> 한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편은 코미디영화들인데, 권귀옥은 <아리송해>의 주연을 맡아 이기동과의 콤비 연기를 영화로 옮겨 보여주었다. (그림15) <아리송해>(심우섭, 1979)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 권귀옥. 권귀옥의 트레이드 마크인 표정 연기와 ‘늘씬 미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몸매를 부각시킨 포스터이다. 이 영화는 <초우>(정진우, 1964)의 설정을 빌어와 가정부 정옥(권귀옥)과 운전사 두만(이기동)의 가짜 연애, 그리고 가수로 성공하는 정옥의 성장담을 담았는데 무엇보다 권귀옥의 매력에 기댄 영화였다. 주인집 가족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당당한 ‘식모’ 역할은 당시 영화 속에서 하층계급 여성을 그리는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으며, 권귀옥 코미디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이 영화를 끝으로, 권귀옥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1980년 결혼과 함께 배우 생활을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약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영화에서의 활약상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고춘자, 박옥초와 같은 조연급 출연자들부터 백금녀, 오천평, 최용순과 같이 건장한 신체를 가진 코미디언들이 맡았던 역할들, 이순주, 배연정, 권귀옥 등 미모를 앞세운 코미디언들이 보여줄 수 있었던 코미디의 스타일은 매우 다른 것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코미디의 원천으로 삼아 확실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했고, 그 결과 다양한 스펙트럼의 코미디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한국영화 코미디사에서 이들이 구축했던 캐릭터와 웃음의 방식들은 시대적 한계와 함께 다시 한 번 더 논의되고, 좀 더 기억되어야 한다. 1) Kott hoff, Helga,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Elsevier B.V, 2006, p.12. 2) Inger-Lise Kalviknes Bore, “(Un)funny Women: TV Comedy Audiences and the Gendering of Humour”,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no.13(2), Sage Publications, 2010. 3)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 6.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임인주 옮김, 열린책들, 2007(4쇄), 129쪽. 4) “[문화] 오랜만입니다. 배연정씨가 걸어온 길”, 『문화일보』, 2012. 5. 11.
영화 <오발탄> 검열 과정 개요 유현목에 따르면 영화 <오발탄>의 제작은 4.19 발발 직전에 기획되었다. 이범선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그 암울한 내용 때문에 제작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감독 유현목, 촬영기사 김학성, 그리고 조명을 담당했던 김성춘이 동인 프로덕션을 구성하고 어려운 여건 하에서 제작을 시작했다. 제작비 조달 문제 때문에 제작 기간이 길어져서 결국 영화는 제작이 시작된 지 1년 여가 지난 1961년 2월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당시는 4.19의 발발로 출범하게 된 영화윤리전국위원회에 의한 ‘민간 자율심의’가 시행되던 때였기 때문에 <오발탄>은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의 심의를 거쳐 1961년 4월 13일에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었고 같은 달 20일까지 8일간 상영되었다. 4.19 이후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개봉을 마쳤지만, 1961년 5월 16일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오발탄>은 상영금지 영화가 된다. 내무부의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로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재검열의 결과 1962년 3월에 <오발탄>을 포함한 7편의 영화에 대한 상영금지 처분이 최종 확정되었다. <오발탄>의 제작자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을 시작으로 6월 11일(7월 8일), 8월 1일, 8월 21일 등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8개월에 걸친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노력은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자막 및 화면을 추가하는 등의 자진 개작을 포함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오발탄>은 여섯 군데 화면을 삭제하거나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8월 23일 상영을 다시 허가받았다. 이렇게 개작된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어 25일까지 14일 간 총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10월 말에는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오발탄>은 4.19와 5.16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을 통과하였고, 이 영화에 대한 검열서류들에는 그와 같은 정치적 격변에 따른 영화검열 제도 및 운영 방식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오발탄> 검열 서류는 매우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료라고 하겠다. 검열 서류를 통해 본 영화 <오발탄>의 검열 과정 첫 번째 국면 1961년 2월 9일자로 작성된 “국산영화 상영신고서”부터 첫 번째 개봉을 마친 4월 말까지를 첫 번째 국면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서류는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1961년 2월 9일) (2)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3)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4일, 문화 제1623호) 및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등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에는 원작자 이범선과 작곡자 김성태가 작성한 저작권 관련 서류와 한국은행이 발행한 국채소화증명서가 첨부되어 있다. 상영신고서는 (사)한국영화제작가협회를 경유(2월 13일)하고 영윤의 심의(2월 13일 접수)를 거쳐 문교부 장관에게 제출되었다. (2)의 서류는 (1)의 상영신고서를 접수한 후 문교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여기에는 영윤의 “심사논평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심사논평서에서 영윤은 “개천 하수도에서 어린이를 업은 여인이 목 매단 장면을 삭제하기를 희망”한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이와 같은 영윤의 의견은, 그것이 민간의 자율심의기구였기 때문에 명목 상으로는 행정적 강제력을 갖지 않았지만, 문교부는 이 권고사항을 수용할 것을 전제로 상영허가를 내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강제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 (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첫 번째 국면에서 쉽게 해명되지 않는,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상영 중이던 4월 14일에 문교부가 내무부 치안국장과 법무부 검찰국장 앞으로 <오발탄>에 대한 심의를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영화에 대한 정권의 통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4.19 이후의 국면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미 적법한 절차를 거쳐 상영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영화검열의 주무부처도 아닌) 내무부와 법무부의 사후 심의가 왜 필요했던 것일까? 특히 “사회윤리적인 책임성이 전무“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선전자료가 되는 것으로 관취“되므로 ”추천키 난“하다는 내무부의 부정적인 의견이 <오발탄>의 상영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림 2] 국산영화 <오발탄> 심의 의뢰의 건 (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다만 당시 영화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에 대해서 한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오발탄>이 아직 개봉하기 전이었던 1961년 3월 31일에 문교부는 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을 심사, 결정하는 국제영화 심사위원 12명을 위촉했다. 정부 관료가 다수 포함된 이 심사위원회 1) 에서는 4월 21일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으로 <마부>(강대진, 1961)를 선정했다. <오발탄>을 제치고 <마부>가 선정된 것은 무지한 관제 심사가 낳은 불공정한 결과라는 영화계의 여론이 형성되면서 국제영화제 출품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문교부가 내무부와 법무부에 <오발탄>의 심의를 의뢰한 4월 14일은 베를린영화제 출품을 위한 심사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영화 <오발탄>이 영화계 내에서는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유력시되었기 때문에, 문교부로서는 공식적인 심사위원회를 개최하고 출품작을 결정하기 전에 내무부와 법무부의 의사를 미리 타진해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국가기관에 의한 영화의 사전검열이 폐지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오발탄>에 대한 내무부의 부정적인 견해가 영화의 상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겠지만 국제영화제 출품작을 결정하는 데는 반영되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 추론이 맞다면 4.19 국면이 야기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별개로, 관이 주도하는 국제영화제 출품작 선정은 사실상 또 다른 검열의 관문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국면 5.16 쿠데타가 발발한 지 일주일만인 1961년 5월 23일에 내무부는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를 문교부에 보냈다. 이 문서로부터 촉발된 대대적인 재검열이 한국영화 <오발탄>을 비롯한 총 7편의 상영금지 처분으로 마무리될 때까지가 두 번째 국면이다. 두 번째 국면에서 <오발탄>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데, 그것은 <오발탄>의 재검열이 내치정 제3846호 문서에서 언급한 총 57편(한국영화 35편, 외국영화 22편)의 영화들에 대한 재검열과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발탄>의 재검열 과정을 담은 서류는 <오발탄> 검열서류철 뿐 아니라 외국영화 <폭력교실 Blackboard Jungle>(1955) 검열서류철에도 남아 있다. 따라서 쿠데타 세력에 의한 대대적인 재검열 과정의 전체상은 문제가 되었던 57편 영화들의 검열서류철 모두를 검토함으로써만 구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오발탄> 검열서류철에 남아 있는 이 시기의 서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 및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그림 3]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 (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내치정 제3846호 서류에서는 1958년 이후 개봉된 국산영화 35편과 외국영화 22편이 이른바 “불순영화”로 분류되어 있다. 재검토 대상의 광범위함과 문건 작성에 소요된 짧은 시간을 감안한다면 이 “불순영화” 목록에서 드러나는 지향점은 놀랄 만큼 분명하다. 대상에 오른 외국영화는 대개 영윤 시절에 풍속의 차원에서 문제가 되었던 작품들이었다. 한국영화의 목록을 보면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전기영화 두 편과 ‘의적’을 다룬 <의적 일지매>(장일호,1961)를 제외한다면 사극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사회상이나 서민의 일상생활을 다룬 영화들이 집중적인 재검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옥화>(신상옥,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아름다운 악녀>(이강천, 1958), <종말 없는 비극>(이강천, 1958), <철조망>(조긍하, 1960)처럼 한국전쟁의 여파를 다룬 영화들, 그리고 <돈>(김소동, 1958)과 <오 내 고향>(김소동, 1959), <하녀>(김기영, 1960), <3등 과장>(이봉래, 1961)처럼 1960년대 초 가족 드라마의 보수적 관점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 있는 영화들이 포함되었다. 5.16 직전에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결정되었던 <마부>까지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도시 빈곤층의 일상을 다룬다는 점이 중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밖에 <춘희>(신상옥, 1959), <쟌발쟌>(조긍하, 1961), <카츄샤>(유두연, 1960) 같은 외국 번안물과 외국으로부터 유래한 ‘투명인간’을 소재로 한 작품이 ‘사회불합리’의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장르적으로는 미국 갱영화의 영향을 현저하게 받은 범죄영화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내치정 제3971호의 서류는 불순영화 목록을 전달한 지 5일 만에 다시 내무부 치안국장이 문교부 문화국장에게 보낸 <오발탄>에 대한 별도의 의견서이다. 이 서류가 지적하는 <오발탄>의 핵심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의 조장과 “반미감정의 극단화”,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절망적 비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오발탄>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및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보류의 건”(1961년 7월 20일, 문화 제2412호) [그림 4]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 (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7월 18일자 서류에서는 내치정 제3971호에 표명된 내무부 치안국장의 의견에 따라 <오발탄>의 재검열을 위한 시사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재결을 요청한다. 1961년 7월 20일 3시에 문교부 시사실에서 열릴 시사회에는 내무부 치안국장, 법무부 검찰국장(정보과장), 중앙정보부 제3국장, 재건국민운동본부 예능과장, 문교부 문화국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7월 20일자 서류는 시사회 결과 <오발탄>의 상영보류가 결정되었음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시사회에 참석했던 법무부,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정보부의 관계관들이 제출한 “검열 의견서”가 첨부되었다. 내무부는 5월 28일에 제출한 내치정 제3971호의 견해로 검열의견서를 갈음하였다. (3)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1962년 3월 22일) [그림 5]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 (1962년 3월 22일) 영화 검열 사무가 문교부로부터 공보부로 넘어온 후이기 때문에 이 서류는 공보국 영화과에서 작성하였다. 이 서류는 1961년 5월 23일 내무부에서 작성한 총 57편의 “불순영화” 가운데 공보부에서 재심을 결정한 11편(국산영화 3편, 외국영화 8편)에 대하여 1962년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한 심사의 결과를 담고 있다. 내무부의 “보류 작품 영화 심사결과 통보”(1962년 2월 10일, 내치보 제65호)와 중앙정보부의 “검열의견서(종합 재검열 분)”(1962년 2월 6일로 추정)가 첨부되어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당시 공보부의 재심 대상으로는 한국영화 <하녀>, <고바우>(조정호,1959), <오발탄>, 그리고 외국영화 <템페스트 La Tempesta>(1958), <챠타레부인의 사랑 Lamant De Lady Chatterley>(1960), <로마의 여성 La Romana>(1954),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954), <폭력교실>, <위험한 고빗길 Les Tricheurs>(1958),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J'irai cracher sur vos tombes >(1959), <비트 걸 Beat Girl>(1961) 등이 올랐다. 이 가운데 재심에 참석했던 내무부, 문교부, 중앙정보부, 공보부 등 네 기관 가운데 다수가 상영불가 의견을 낸 7편, 즉 <오발탄>, <템페스트>, <챠타레 부인의 사랑>, <로마의 여성>, <적과 흑>, <위험한 고빗길>,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이 최종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세 번째 국면 <오발탄>의 제작사인 대한영화사 대표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 첫번째 탄원서를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1963년 8월 23일 마침내, <오발탄>의 상영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기간 동안 일부 화면의 삭제와 자막 및 몇몇 화면의 추가 등의 자진 개작을 하고 탄원서를 제출한 외에, 제작자 김성춘은 감독 유현목과 함께 여러 비공식적인 루트로 로비를 펼치는 등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했다. 서류들에 나타나는 공식적인 발화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성춘과 유현목의 ‘비공식적인 노력’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구술자료 및 여타의 자료들을 참조함으로써 공식적인 서류가 발화하지 않는 이면의 맥락까지 가급적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 국면의 검열 서류들은 다음과 같다. (1) “국산영화 재심사 신청의 건”(1963년 1월 23일 김성춘 작성, 26일 공보부 접수) 및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1963년 2월 25일, 435호) [그림 6]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 (1963년 2월 25일, 435호) 첫 번째 탄원서는 접수된 지 한 달 만에 반려되었다. 제435호의 “반려” 서류에서는 “해(該) 기간 중에 재심사에 불응한 작품 및 불허가 조치된 작품은 일체 재심 청구를 접수치 않기로 하였으므로 재심이 불가”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심 신청과 반려 사이에 <오발탄>의 재심이 있었던 사실은 외국영화 <폭력교실>의 검열서류철에 철되어 있는 <오발탄>의 재심 관련 서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공보부는 2월 13일 외국영화 <폭력교실>과 <오발탄>의 재검열 시사를 열었고 재심위원으로 참석한 최유현과 백영석은 두 작품 모두 상영을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재검열 의견서”, 1962년 2월 13일) 그런데 두 작품 모두 상영보류 판정이 내려진 지 3일 만인 2월 16일에 문교부 문화국장은 <폭력교실>은 2개 처를 단축하고 상영을 인정해도 무방하지만 <오발탄>은 “현실과는 너무나 부합되지 않은 비참한 스토리”라면서 상영보류 의견을 표명하는 공문을 공보부 공보국장 앞으로 보냈다. (“<폭력교실> 및 <오발탄>의 재검 시사의 건”, 1962년 2월 16일) 결국 <오발탄>은 상영보류가 해제되지 않았고 두 차례의 합동심사를 거쳐 외국영화 <폭력교실>은 7개 처를 삭제 또는 단축하는 것을 조건으로 상영이 허가되었다. (2)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1963년 7월 8일 중앙정보부 접수), “부전지”(1963년 6월 13일), “민원서 이첩”(1963년 7월 10일, 중비서 060), “부전지”(1963년 7월 22일),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날짜 및 작성자 불명)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01),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내무부),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민원서 처리결과에 대한 통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2),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1) [그림 7] 진정서 (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그림 8]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 (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김성춘이 작성한 진정서 두 통이 공보부(6월 13일)와 중앙정보부(7월 8일)에 접수되었다. 이 진정서에서 노모의 “가자” 대사를 “저 푸른 벌판의 양떼를 따라가자”로 바뀌는 개작이 처음 언급되었다. 이 진정서 이외의 서류들은 이 진정서가 접수되고 나서 이루어진 공보부와 중앙정보부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6월 13일자 “부전지”는 진정서를 공람 처리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1962년 1월 26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재심결과 불허가 조치되었지만 “영화내용은 건전하다”는 담당관의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 담당관은 공보국 영화과 행정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신봉승으로, 그는 검열관이라는 자신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역시 신봉승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7월 22일자 “부전지”는 제작자 스스로의 개작과 “예술적 가치”에 대한 “신문 및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맥칸 박사 등”의 견해를 언급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를 해제할 것을 주장한다. 이 “부전지”의 내용을 참조하면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 또한 같은 시기에 신봉승이 작성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신봉승은 자신이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신문기사 등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여 서류 기안 당시 첨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첨부 자료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리처드 다이어 맥칸(Richard Dyer MacCann)이 당시 공보부 공보국장 이성철 앞으로 보낸 “베니스영화제 출품작(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이라는 문서다. 미국 남가주대학교(USC) 영화과 교수였던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학자로서 미국무성의 지원을 받아 1963년 4월부터 8월까지 4개월 간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국립영화제작소와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강의를 하고 한국의 여러 영화인들과 접촉했다. (박익순 구술증언, 김정옥 구술증언) 신봉승은 국립영화제작소의 감독인 배석인이 소개하여 리처드 다이어 맥칸과 만났고, 특히 그와 <오발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구술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베니스영화제에 출품할 한국영화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달라는 공보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 추천 두 작품(<굴비>(김수용, 1963)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사적인 경로(미국으로 돌아간 후 맥칸이 쓴 글에 따르면 <오발탄>을 그에게 추천한 것은 극작가 이근삼이었다.)를 통해 보게 된 <오발탄>에 대한 평가를 적은 보고서를 냈다. 이 글에서 맥칸은 <굴비>는 일본 영화 <도쿄 이야기 東京物語>(1953)를 표절한 작품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미국의 전쟁영화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베니스영화제 출품작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썼다. 대신 그는 <오발탄>이야말로 “세계 수준에 있는 작품”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뿐만 아니라 <오발탄>에 대한 맥칸의 견해를 인용한 기사들이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고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가 해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영화 <오발탄>에 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에 첨부된 것은 당시의 이 같은 여론을 보여주는 기사들 중 일부이다. [그림 9] 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 (발신 : Richard Dyer MacCann, 수신 Lee Sung Chul) 요컨대, 1963년 7월 당시에 검열관 신봉승, 국립영화제작소 배석인을 포함한 공보부 내 인력들, 그리고 이근삼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미국의 영화평론가까지 합심하여 <오발탄>의 해금을 위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공보부는 7월 22일 노인의 “가자” 대사 및 화면 삭제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을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을 허가하는 공문을 작성했다. <오발탄>의 상영을 허가한다는 결정은 제작자 김성춘, 그리고 이미 7월 10일자 “민원서 이첩”(중비서 060)에서 “상연 허가함이 가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던 중앙정보부와 <오발탄>의 상영금지를 결정하는데 참여했던 내무부에도 통고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3일 후, 결정이 뒤집혔다. 중앙정보부와 제작자 김성춘을 수신인으로 한 7월 25일의 서류 두 종에는 <오발탄>의 상영을 불허가한다고 적혀 있다. 전후 맥락을 이해할 만한 다른 서류들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갑작스럽게 결정을 번복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이 사례는 검열제도가 일관된 원칙에 따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서 작동하기보다는 여러 우연적 요소들(예컨대, 검열관의 자의적 판단이나 외부의 정치적 압력, 또 피검열자와 검열자 간의 협상 등과 같은)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자의성’은 사실 검열제도가 작동하는 근본적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극영화 <오발탄> 상영에 대한 탄원서 회신”(1963년 8월 5일, 분류기호 1733.01 3226) [그림 10] 탄원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오발탄> 상영보류 해제를 위한 탄원서가 한국영화인협회에 의해서 제출되었으나, 공보부는 7월의 재심 결과에 따라 상영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회신하였다. (4)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21일 공보부 접수),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 해제”(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증 교부”(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3473),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8월 23일 작성, 28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 3543과 1733. 3544) 8월 21일 한국영화인협회가 탄원서를 제출하자 곧바로 공보부는 <오발탄>의 상영허가 보류를 해제하고 상영허가증을 교부했다. 이어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결정에 참여했던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이같은 사실을 통고한다. 상영허가 보류 해제 문서에서는 미국 MGM 및 영화업자들이 <오발탄>의 수출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 리처드 다이어 맥칸의 고평과 국내 언론들에 의한 상영허가 여론 등이 해금의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유로 든 사실들과 관련한 근거 자료는 이미 1963년 7월에 제출된 바 있고 8월 21일에 한국영화인협회가 제출한 탄원서도 이미 거부되었던 8월 1일자 탄원서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그리고 시사 및 재평가 같은 재심의 절차 없이 탄원서가 제출된 날 바로 허가증교부 절차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 해제에는 어떤 다른 힘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다른 힘이 무엇이었든 간에, 최종 허가 당시에 제한사항은 여섯 군데의 화면 및 대사 삭제와 화면 단축이다. 이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가자” 대사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 외에 상이군인이 소변을 보는 장면이 추가로 삭제되었는데, 감독인 유현목은 이 삭제 처분이 소변을 보는 장소가 한국은행 앞이었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4) “영화상영허가 신청서”(1963년 10월 18일), “국산영화 <오발탄> 복사판 상영허가”(1963년 10월 19일, 분류기호 1733.12 4096), “영화상영허가증”(1963년 10월 19일) 상영을 허가받은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었다. 이 서류들은 재개봉에 사용된 프린트 외에 별도로 한 벌의 프린트(복사판)의 상영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의 검열제도에서는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그 복사판은 원칙적으로 별건으로 처리되어왔다. 이는 원본과 복사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우려와 더불어, 영화 검열이 내용에 대한 검토 뿐 아니라 프린트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까지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재개봉 이후의 서류들 1963년 10월의 재개봉 이후에 작성된 서류들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대한영화사 김성춘으로부터 영화 <오발탄>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양도받은 동원영화사 김진문이 이를 공보부에 통보하고 새롭게 상영허가서를 받는 과정에서 생산된 서류들이고 둘째는, 세계문화자유회의에서 유현목 감독이 이만희 감독의 영화 <7인의 여포로>(1965)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일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던 당시에,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과거 <오발탄>의 상영금지 이력과 관련한 사실조회를 요청하는 문서이다. 1.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한 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권순영(서울지법 소년부 지원장), 이병일(제협 회장), 김은우(이대 교수), 홍승면(한국일보 편집국장), 오종식(영륜위원장), 오영진, 서정덕(문교부 문화국장), 최운조(외무부 방교국장), 노태준(문교부 예술과장), 문총사무국장, 법무부 국사처 영화과장. 《동아일보》, 1961.03.31.석간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