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의 정원
- 감독
-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 제작년도
- 2007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필름포럼 은 이화여대 후문 건너편, 연세대 동문으로 가는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위치에서 2012년 5월 개관하여 2013년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선정되었다. 필름포럼 영화관의 운영 주체는 ‘사단법인 필레마’로, 필레마는 ‘ 서울국제사랑영화제 (2003년 서울기독영화제로 시작)’ 운영도 함께 하고 있다. 예술, 독립, 기독 영화의 발굴과 상영을 추구한다. 본래 영화평론가인 임재철 씨가 종로에서 필름포럼 영화관을 운영하다가 2008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고, 2012년 사단법인 필레마가 임재철 평론가로부터 운영권을 인수하여 법인 성격에 맞게 운영하기 시작했다. 필름포럼이 입주해 있는 하늬솔 빌딩은 건물 자체는 도로변에 있으나 영화관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도로 뒤편 골목에 있다. 또한 인근에 대학교가 많고 자취생들이 많은 입지 특성상 자취하는 20대 대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실 거주인이 많지 않다 보니, 인근 지역 자체가 평일 낮에는 굉장히 활발하고 평일 저녁이나 주말이 되면 조용하다. 그러한 분위기는 필름포럼을 찾는 관객들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쳐, 청년들 같은 경우 혼자 와서 영화를 보고 가거나 여럿이 오면 세미나를 하는 등의 학구적인 모습이 많이 보인다. 필름포럼이 위치한 하늬솔 빌딩 20대 관객들 같은 경우,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등 명작들을 필름포럼 스크린에서 처음 접해보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인근 지역에 사는 50대 이상의 주민들 상당수는 그림 감상, 아카데미 강좌 수강 등을 이유로 방문했다가 카페도 이용하고 영화를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는 극장 현재 필름포럼을 운영하는 인원들은 성현 대표와 조현기 프로그래머를 비롯해서 팀장, 카페 매니저, 카페 아르바이트 등을 포함하여 전체 10여 명 정도다. 성현 대표는 영화관의 전체적인 기획과 경영 및 프로그래밍에 대한 조율 업무를 맡고 있고 조현기 프로그래머는 상영작들의 큐레이션 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다. 프로그래머는 본래 2명이었는데 현재는 1명인 상태다. 상영관은 2개관으로 1관은 90석이고 2관은 52석이다. 연중무휴이며 광고 없이 정시에 시작한다. 외부 철제 계단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정원이 보여 지하인데도 지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정원이 딸린 카페 같은 외관인데 유리문을 열면 로비가 펼쳐지면서 카페가 같이 있다. 카페는 갤러리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고, 카페 계산대에 영화관 키오스크가 설치되어 있어서 키오스크나 직원을 통해서 티켓 발권과 음료 주문을 한다. 전체적인 건물 평수는 약 500평 정도인데, 이중 상영관은 350평 정도 규모이고 나머지 공간을 카페를 겸한 로비와 세미나실로 구성하여 사용하고 있다. 필름포럼 로비 전경 상영 시스템의 경우, 개관 초기에는 필름으로도 상영을 했었지만 지금은 모두 디지털 영사기로 바꿨다. 1관은 디지털 시스템을 모두 갖췄고, 2관은 아직 국제인증을 받지 못해 한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서버를 갖추고 있다. 2024년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시설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2관도 1관처럼 디지털로 완전히 개편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영화관 로비가 카페이자 갤러리 역할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고 지향했던 필레마의 방향성이다. 실제로 관객들은 이 공간을 영화 상영 전 대기 장소로서뿐만 아니라 만남의 장소로서도 이용한다. 이 공간에서는 아마추어들에게도 전시 기회가 열려있는데, 운영자들이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1관 상영관 내부 전경 관객과 함께 하는 공간 로비 중앙에는 출석부와 방명록이 놓여 있어서 관객이 참여하고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어 있다. 영화 출석부의 경우 여러 횟수가 쌓이면 영화관으로부터 초대권을 받을 수 있으며, 평론가처럼 출석부에 본인이 본 영화에 대한 별점과 한 줄 리뷰를 남기게 되어 있다. 이는 관객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로비에 오픈되어 있어서 해당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다른 관객들과도 나눌 수 있게 한다. 로비에 있는 ‘북 큐레이션’은 12권의 책을 한 달에 한 번씩 바꿔서 소개하고 있는데 상영 영화는 물론 현재 동시대성을 띤 책들이 섞여 있어서 관객들로부터 호응도가 매우 높다. 필름포럼 출석부 강연장에서는 자체적으로 기획한 인문/문화예술/종교와 관련된 아카데미를 꾸준히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커뮤니티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시네필 쪽에 포커스를 두고 강좌를 기획하고 운영했는데, 실제로는 예술영화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관객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고 좀 더 다양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시네마 브런치’는 월요일 오전 10시에 예술영화를 함께 보고 샌드위치 들고 영화관 안에 들어와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영화에 대한 해설을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인데, 큰 호응을 얻었다. 상영되는 모든 영화는 기본적으로 큐레이션 된 영화들이다. 기획전 상영작들은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비롯하여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기독교 영화들도 많다. 영화를 좋아하는 시네필들의 재방문율이 높은 편이며 예술가의 삶이나 회화에 관련된 영화 기획전도 많이 열린다. 엠네스티와 같은 국제단체를 비롯하여 단체나 학교, 지역주민모임, 서점이나 사진관 등과도 협업한 기획전을 종종 개최하기도 한다. 필름포럼 세미나실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527 하늬솔빌딩 A동 B1 2) 설립일 : 2005년 4월 22일 3) 대표자 : 성현 4) 규모 : 하늬솔빌딩 A동 1749.38m2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수, 훨체어석) : 1관 90석, 2관 52석, 총 142석 6)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09:30~22:00, 연중무휴 7) 입장료 및 할인 정책 - 평일: 성인 10,000원, 청소년 9,000원, 경로/국가유공자/장애인 7,000원. 조조 7,000원 - 주말: 성인 11,000원, 청소년 10,000원, 경로/국가유공자/장애인 7,000원, 조조 8,000원 - 단체 할인: 10인 이상 1,000원 할인 / 30인 이상 2,000원 할인 8) 조직도 및 조직 구성 - (주)필레마 서울국제사랑영화제(극장운영주최) - 문화선교연구원(이론, 학술배경 제작) - 필름포럼(극장) 9) 구성원 : 성현 대표, 프로그래머, 조현기 프로그래머, 팀장, 매니저 취재 일자: 2024년 11월 19일 글/인터뷰 진행: 김문경 사진: 허 성
홀로코스트 영화는 윤리적 재현과 관련해 오랫동안 아방가르드의 위치를 점해왔다. 미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던져졌고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이에 자의적, 타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절멸이라는 끔찍한 폭력을 구체적으로 시청각화 하는 것은 어떠한 효과를 낳는가, 인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폭력을 서사화할 수 있는가, 목격자가 없거나 말하기 힘든 경우 (예를 들면, 가스실) 증언과 기억은 어떻게 기록될 수 있는가, 과거는 어떻게 현재와 대화를 나누고 기억을 상속할 수 있는가, 트라우마의 고통 속에 놓인 생존자들의 증언은 어떠한 형식으로 가능한가, 관객들의 동일시와 공감은 어떤 강도로 이끌어 내는 것이 적절한가, 피해자·가해자·조력자·제삼의 목격자 들 중 어떤 시점을 선택할 것인가 등. < 밤과 안개 >(알랭 레네, 1955), <카포>(질로 폰테코르보, 1960), < 소피의 선택 >(알란 J. 파큘라, 1982), < 쇼아 >(클로드 란츠만, 1985), < 쉰들러 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 1993), < 인생은 아름다워 >(로베르토 베니니, 1997), < 사울의 아들 >(라즐로 네메스, 2015), < 조조 래빗 >(타이카 와이티티, 2019) 같은 대표적 작품들을 거쳐 오며 각 질문과 관련해 새로운 미학적 선택이 쟁점화 되었고 역사적으로 홀로코스트 영화는 이전 영화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무언가 새로운 영화적이고 윤리적인 미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홀로코스트 영화들에는 있을 수밖에 없다. 관객들 또한 이전 영화와 관련된 쟁점을 인식하고 그에 근거해 영화를 보게 된다. 따라서 모든 홀로코스트 영화는 내외적으로 이전의 영화들을 적극적으로 매개하고 참조하는 미디어 고고학적 상태에 놓인다.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조나선 글레이저가 감독한 <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3) 역시 그러한 강박 속에 놓여있다. 영화는 새로운 위치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시각화 한다. 이제까지의 홀로코스트 영화가 수용소 및 피해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화하는 선택을 했다면(평화로운 전원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기념관이 된 전후의 수용소를 보여준 <밤과 안개>, 방관자였던 폴란드 주민들의 변명을 듣고 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화면에 담는 <쇼아>, 흐릿한 포커스 아웃과 좁은 주관적 시야의 제한적인 시각을 통해 목격의 의지를 영화화 했던 <사울의 아들>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 글레이저 감독은 수용소가 아닌, 수용소 소장의 사택과 가정생활을 탐색한다.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앙 프리에델)는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 높은 담장 밖 바로 옆에 위치한 빌라에 거주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는 아내인 헤트비히 회스(산드라 휠러) 그리고 다섯 아이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있는 다정다감한 가장이다. 루돌프는 큰 아들에게 직접 승마를 가르쳐주고 잠 못 들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막내딸에겐 <헨델과 그레텔> 동화를 읽어준다. 그는 아내에겐 책임감 있고 유머러스한 남편이기도 하다. 헤트비히 역시 집안을 건사하고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며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열정적이다. 전쟁 기간 동안 계급적 상승을 이뤄낸 회스 부부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얻어낸 것에 큰 자부심과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용소가 아닌 사택과 그 주변의 목가적인 풍경만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화장터 굴뚝의 연기와 냄새, 강물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재를 막을 수는 없다. 영화의 제목인 ‘관심/이익 지역’은 나치에 의해 몰수된 수용소 주변 토지를 일컫는다. 이들은 이 지역을 사택으로 사용하는 등 경제적 이익(interest)을 취했다. 이 영화에서 수영장과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한껏 꾸며진 사택은 그 경제적 이득, 시각적 관심이 된다. 어떤 이미지의 관심 혹은 이익은 다른 이미지의 무관심/피해를 대가로 한다. 회스 부부는 바깥과 타자를 절멸시킨다. 가해자 가족의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은 수용소에 대한 철저하고 적극적이며 의식적인 무관심 혹은 비가시성과 교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이미지의 정치경제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가해자 일인이 아닌 그의 가족생활을 다루는 실내극이라는 점에서 이전에 가해자들을 주인공으로 했던 다른 영화들과도 변별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젠더의 정치학이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에서 유태인 절멸 계획을 짜고 지휘한 루돌프 회스 만큼이나 그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를 주인공의 자리에 놓고 그녀의 선택과 행동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가족극, 혹은 < 잔느 딜망 >(샹탈 아커만, 1976) 같은 페미니스트 예술영화들이 실내 건축학을 통해 가족의 정치경제학을 영화적으로 전경화 했던 것처럼 집안과 그에 딸린 목가적 풍경,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의 동선이 끊임없이 시각적이고 경제적인 관심/이익의 교환체계에 놓여있음을 각인시킨다. 헤트비히는 루돌프에게 수동적으로 딸려 있는 부수적 이해관계자가 아니다. 헤트비히는 수용소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모른 척하고 무관심한 채 유태인들의 죽음을 대가로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선택한다. 루돌프가 집안 거실에 앉아 가스실과 화장터 건축과 운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만들어낼지, 즉 어떻게 사람들을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이 살해할지에 대한 계획을 사업체로부터 듣고 논의할 때, 그리고 지상에서는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지하에는 비밀통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줄 때, 가족의 단란함을 포함해 중상층 가족이라는 계급적 유지가 근본적으로 집단학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가해 행위와 결과로부터 그들 자신을 분리하려 한다. 루돌프의 청결에 대한 강박, 매일 밤 모든 방의 전등을 끄고 문단속을 하는 반복 일상, 외화면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화면 안을 가득 차게 보여주는 정원의 꽃의 클로즈업 쇼트들, 침대에 누워 부부가 함께 회상하는 이탈리아 휴가, 유태인 수용수의 모피코트 주머니 속 립스틱까지 꼼꼼하게 챙기면서 유태인들의 유품이 쌓여있는 장소를 ‘캐나다’로 부르는 철저함, 정원의 꽃 이름, 주변 숲의 새 이름을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기억하게 하기 등. 신체, 시각, 언어, 사유의 차원 모두에서 깔끔하게 집단학살을 분리해 내려 한다. 하지만 헤트비히와 카메라의 보지 않으려는 회피, 혹은 적극적 무관심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음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디테일, 안락과 아름다움은 학살에 기반 한다. 화장된 피해자들의 뼛가루로 키워낸 탐스러운 꽃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완벽한 무관심, 외면은 불가능하다. 앎은 단순히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앎은 신체적이고 환경적이다. 소리, 빛, 냄새, 물의 흐름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대사들은 종종 J 또는 L 컷으로 편집된다. 앞 쇼트의 대사는 뒷 쇼트로 흘러넘치고, 뒷 쇼트의 대사는 앞 쇼트에 선재한다. 복도, 창, 문, 하늘, 강은 거부할 수 없는 신체적 앎이 통제를 벗어나 흘러 다니는 통로이다. 헤트비히는 일을 하느라 자신과 독일 장교 부인들의 앞을 지나가고 창 밖에서 일하고 있는 유태인 하녀와 하인들을 무시한다. 이들은 쇼트와 쇼트, 프레임 안과 밖을 사운드와 함께 넘나든다. 독일 장교 부인들이 유태인의 소지품을 어떻게 나눠가졌는지, 그들이 어떻게 끌려갔는지에 대한 농담을 하는 부인들의 대화는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창과 문 너머로 집 안에서 일하는 유태인들의 몸에 흘러 들어간다. 동시에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또한 막지 못한다. 잠시 머물다 간 헤트비히의 엄마, 유태인 하녀들, 그리고 딸까지 모두 그 소리를 듣지만 회스 부부는 적극적으로 듣지 않는다. 관심지역은 적극적 무관심 지역을 통해 만들어 진다. 이 영화는 신체적 앎 그리고 알면서도 행하는 악의 적극성이 어떻게 회스 부부에게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글레이저 감독이 마지막에 루돌프 회스의 구역질 장면을 넣은 것도 이 신체적 앎에 근거한다. 그들은 알면서도 행한 것이다. 당연히 이 앎은 반성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와 적극적 무관심으로 이른다. 사진: "Jon obeu inteoreseuto", IMDb ( 좌 , 우 ) 홀로코스트 이후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집단학살과 관련된 예술에 있어 주요한 윤리적 테제 중 하나로 언급되어 왔다. 가해 집단이 피해자와 동일한 인간 종에 속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일이 일어난 이후 어떻게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글레이저는 여기서 이 지침을 한번 뒤집는다. 그렇다면 절멸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혹은 정말로 서정시를 쓰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헤트비히의 정원에는 꽃 하나하나 벌레 먹지 않고 탐스럽게 피어 있다. 영화의 대부분에서는 카메라가 거리를 두고 건조한 관찰의 태도를 취하지만 헤트비히가 키워낸 꽃만은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의 관습적 연출을 보듯 탐스럽게 클로즈업으로 정성들여 포착한다. 그것의 즉각적 아름다움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평화로운’ 집 주변의 목가적 풍경처럼 말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곧 그 클로즈업 바깥에서 꽃의 비료로 쓰이는 것이 소각장에서 태워진 분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프레임 바깥과 내부는 끊임없이 교환되고 연결된다. 마찬가지로 루돌프가 다정한 아버지로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바깥에서 시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집단학살의 꼼꼼한 계획, 유태인 여성에 대한 성착취를 행하고 있는 루돌프는 끔찍하게도 가정적인 부성을 동시에 수행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의 부성은 가해 행위 위에 기반해 있다. 그러면 시와 노래는 어디서 가능한가? 글레이저는 수용수들을 돕기 위해 사과를 노역장에 몰래 숨겨놓는 폴란드 소녀를 적외선 카메라로 애써 보여주며 증명하려 한다. 소녀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보려는 태도는 흐릿한 쿠키더미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나 혹은 우리의 관심/이익 영역이 아닌 바깥을 보려는 태도, 효율성이나 성과가 아닌 다른 가치를 돌보려는 태도, 타자의 존재는 교환할 수 없거나 나눌 수 없음을 인지하는 태도, 내장지각에 가까운 신체적 앎을 회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태도, 실내와 목가가 얼마나 정치경제적인지를 인식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더 중요하게는 글레이저 감독이 아카데미 수상소감에서도 밝혔듯이 오늘날 시가 가능하려면 이스라엘 혹은 홀로코스트 바깥을 봐야 한다. 가자지구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또 다른 민족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집단학살하며 가해자고 되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팔레스타인의 이미지가 더 필요하다. 사진: " Jon obeu inteoreseuto ", IMDb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957년, 가설극장으로 시작하다 미림극장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민들과 함께 한, 인천을 대표하는 지역 상영관이다. 1957년 인천 동구 송현동에 고은진 씨가 천막을 세워 무성영화를 상영한 것을 시작으로 문을 연 미림극장은 이후 47년간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처음에 평화회관으로 시작한 천막극장은 이내 평화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미림(美林)극장으로 개명한다. 극장 운영은 고은진 대표의 아들 고용성 씨와 사위 오윤섭 씨가 맡아왔다. 이후 오윤섭 씨는 미림을 그만두고 오성극장을 설립하면서 미림극장은 고은진 씨의 아들 고희성 씨가 대표를 이어받았다.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외화 중심의 상영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면서 지역 문화 공동체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미림극장은 1970년대 중반 단층이었던 건물을 이층으로 신축하였고 그때 지금과 같은 2층 발코니 구조로 완성되었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근무한 조점용 영사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에는 고희성 대표의 탁월한 외화 프로그램 구성이 소문이 나서 서울의 극장배급사에서도 찾아와 견학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천 지역에 들어선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공세에 밀려 2004년 7월 29일 영화 <투 가이즈> 상영을 마지막으로 폐관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9년 뒤인 2013년 10월 미림극장은 ‘추억극장 미림’으로 단장하여 다시 돌아왔다. 미림극장 로비 추억극장으로 재출발하다 재개관한 추억극장 미림은 인천 최초이자 유일한 실버전용관을 콘셉트로 지역사회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140개 회원사를 가진 인천광역시 사회적기업협의회의 의지가 있었다. 원도심을 살리기 위한 복합문화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가능성 있는 사업 중 옛 영화관을 살려내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인천시에서 재정을 지원하고 비영리단체인 인천시 사회적기업협의회가 운영을 맡는 방식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천시의 정책이 여러 차례 변경되면서 약속되었던 인프라 구축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6년 인천시는 사실상 지원 종료를 통보한다. 지원이 끊어진 후 여러 차례 진정서와 청원서가 제출되었지만 방침은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낸 옛 영화관의 문을 다시 닫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크고 작은 후원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2월 29일 공익형 사회적 기업 1호로 거듭난 추억극장 미림은 단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 확장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고령, 경력 단절 여성 등 취약 계층의 고용률을 60% 이상 유지 중이며 실버 세대의 자원활동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상영관 내부, "추억극장 미림에서 추억의 명화를 만나보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무엇보다 추억극장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하되 그것에만 스스로를 가둔 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재 ‘미림’(美林)은 ‘아름다운 숲’이란 의미처럼 세대를 아우르며 공존하는 문화공간을 지향한다. 문화 혜택의 사각지대인 실버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가족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6년 문화관광부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지정된 이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역사회와 밀착 중이며 2016년 9월 SK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와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2017년 인천광역치매센터 치매극복 선도기업으로 지정된 후 노인문화복지 증진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동시에 젊은 관객층 개발에도 소홀하지 않고 관객들이 직접 영화를 선정하여 상영하는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과거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고전영화 상영을 기본으로 하되 후배 세대와의 소통 창구를 꾸준히 개발하여 공존의 의미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 복원을 위한 노력 10년의 폐관 기간 동안 미림극장의 많은 자료들은 안타깝게 유실되었다. 하지만 재개관 후 보관된 자료들을 복원하고 인천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기증받는 등 자료복원과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극장의 3층에는 영화연구가 정종화 선생이 50년간 수집한 영화 포스터, 전단, 스틸 사진 등의 자료가 전시 중이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진행되는 정종화 영화연구가의 시네마데카메론 수업을 통해 과거의 낭만을 되짚어보고 청년세대에게 전하는 만남의 장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공존의 현장이라 할만하다. 미림극장은 상영관 오른쪽에 바로 외부와 연결되는 문이 뚫려있는 독특한 구조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실과 영화의 세계를 오가는 건축물은 지역주민과 밀착하여 가깝게 소통하는 미림극장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3층 미림역사관에 전시된 미림극장의 역사 자료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주소): 인천시 동구 화도진로 31 (송현동 92-7) 2. 설립일 - 1957.11월 최초 개관(평화극장) - 1958.10.5. 정식 개관(미림극장), 2004.7.29. 폐관 - 2013.10.2(재개관)~ 3. 대표자: 고은진(창업주), 고희석(폐관 당시), 최현준(현재) 4. 규모: 대지면적 477m², 연면적 745.79m², 바닥면적 437.79m²(지상2층, 지하1층) (1~3층 구조인데 건축물대장에는 이와 같이 표기되어 있음) 5. 극장 구성 - 단관극장, 재개관하면서 1층 206석, 2층 77석이였으나 2002년 3월 CGV 좌석기부를 통해 2층 좌석을 교체하면서 47석으로 줄어듦. 현재 253석. - 1층: 매표소(매점 겸업), 여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2층: 미림살롱(소공연장), 남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3층: 미림역사관(상설전시관), 영사실 6. 운영시간: 쉬는 날 없이 매일 9:30~20:30 7. 입장료 - 고전영화(기본 5,000원, 학생 4,000원, 65세이상 2,500원) - 개봉영화(기본 7,000원, 학생/65세이상 5,000원) 인터뷰: 최현준 대표(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최현준 대표 송경원 _미림극장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은 1957년도 지금 이 위치에서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의 천막극장으로 시작됐습니다. 오랫동안 인천시민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2004년도에 폐관을 했고, 다시 문을 연 건 2013년입니다. 인천 구도심의 오래된 영화관의 모습을 다시금 살려내어 향수를 추억하는 동시에 청년세대에게도 고전영화의 감동과 즐거움을 전하기 위해 운영 중입니다. 송경원 _9년 동안 폐관되었다가 어떻게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나요. 최현준 _1999년도에 인천 지역 멀티플렉스가 생겼습니다. 신도시로 인구 이동이 많았죠. 자연스럽게 동인천역 주변 지역은 구도심이 되었는데 그렇게 극장을 비롯한 상권의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2004년에 결국 미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10년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재개발 이슈가 있었지만 당장 이뤄지는 건 아니라서 오히려 보존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원도심을 살려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중 하나가 옛 영화관을 부활시키는 거였습니다. 인천시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미림이 다시 문을 열었죠. 송경원 _하지만 그 뒤로도 상황이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최현준 _맞습니다. 원래 인천시가 인프라 구축과 재정지원을 약속했는데 이행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결국 포기해버렸습니다. 운영을 맡았던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한번 폐관됐던 극장을 다시 또 문닫게 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렇게 비영리 단체이 기업협의회의 주관 아래 다양한 후원과 관객들의 사랑으로 지금까지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송경원 _미림은 '아름다운 숲'이란 뜻인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최현준 _이름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습니다. 원래 평화극장이었다가 어느 날 미림으로 변경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르기 쉽고 아름답고, 인근 수도국산이 있기도 하고 문화적인 쉼터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처음에는 시장통에 천막을 치고 시작했다가 점점 사람들이 모여 동인천 인근의 문화공간으로 유명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시장 번화가이기도 하고, 맞은 편에 달동네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는 장소였던 셈이죠. 계단 벽, "미림, 아름다운 영화의 숲"이라는 슬로건이 보인다 송경원 _건물 형태가 독특합니다. 극장 바로 옆에 출입구를 열면 바깥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에 오래 근무하신 직원분들에게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를 자주 들었습니다. 간판 그림을 그리신 김기봉 선생님, 극장 입구를 지키셨던 양재영 선생님, 그리고 영사를 맡았던 조점용 선생님이 있습니다. 전성기였던 1970, 80년대에는 200석 남짓한 극장에 하루 2, 3천 명씩 몰려들어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70년대 중반 관객을 좀 더 수용하기 위해서 극장을 확장했는데, 천장이 높은 장점을 살려 2층에 발코니를 만들고 80석 규모를 늘렸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도 사고 한 번 나지 않았던 걸 오래 근무하신 분들은 다들 자부심으로 여깁니다. 문을 열면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아요.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의 동선이 겹치지 않으니 사람이 깔릴 일이 없는 거죠. 한편으론 낭만적인 면도 있습니다. 2시간 남짓 영화의 세계에 푹 빠졌다가 오른쪽 출구 문을 여는 순간 현실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보면 이곳이 영화관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셨다고 합니다. 미림극장을 추억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도 이런 건물구조라는 분도 꽤 계십니다. 상영관 출구가 거리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 콘셉트의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을 했습니다. 최현준 _문화 소외층인 노령층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입니다만 거기에 국한되지 않고 가족 관객이 함께 찾는 지역 문화공간을 지향합니다. 2층에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소공연장 미림살롱을 마련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층에는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인 미림역사관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재개관 2년 뒤인 2016년에 입사를 했는데 미림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도 과거 자료들을 찾는 거였습니다. 1957년에 개관한 영화관이니 얼마나 많은 자료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사실 남아있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정종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뜻있는 분에게 자료를 기증받았고, 공사를 하면서 발견한 작은 박스에서 예전 극장을 운영했던 장부 등의 기록 문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3층을 역사관으로 꾸몄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수소문하며 과거의 자료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아직 많은 자료를 복원하진 못했지만 미림을 방문해주신 인천 시민분들께 이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가 어떤 역사와 얽혀서 지금까지 왔는지 알리고 싶습니다.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2층 미림살롱의 무대 공간 송경원 _미림극장에는 어떻게 근무하게 된 건가요. 최현준 _인천 지역에 개인적인 연고는 없습니다. 문화재단 관련 일을 오래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미림극장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천국제영화제가 첫 직장이었는데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친숙함이 미림극장에서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송경원 _사회적 공익기업이 주체인 만큼 다양하고 특색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띕니다. 최현준 _실버영화관이 시작이었던 만큼 인천광역치매센터와 함께 노령층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다만 지금은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생존하기 힘든 상황이라 저변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의 정신에 맞게 취약 계층 고용률을 6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쉽지 않고, 피치 못한 사정으로 직원들이 떠나야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신기한 건 인천시와 같은 외부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어려운 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점입니다. 2016년에 인천시의 지원이 중단됐을 때 2500여 명의 시민들이 서명을 하여 청원을 넣기도 했습니다. 그런 힘으로 오늘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상영관 입구, 다양한 시민들의 메시지가 붙어있는 벽면이 보인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에서 출발하여 지역 기반의 문화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최현준 _아직 갈 길이 멀고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70대 이상 관객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버영화관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차라리 추억을 어떻게 함께 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젊은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고전 걸작과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고자 합니다. 클래식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필요한 건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1957년에 문을 연 미림극장은 세월의 힘이 쌓여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은 오래된 영화관 이상의 특별함을 드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 중입니다. 어르신들은 물론 원도심 인근의 아이들에게는 이 극장이 유일한 문화공간입니다. 우리 동네 마을 극장이라고 할까요.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꾸준히 고민하면서 이 공간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길 희망합니다. 인터뷰: 조점용 영사기사(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조점용 영사기사 송경원 _미림극장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196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영사기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림극장의 흥망성쇠를 함께 지켜보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영사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자식 셋을 키워냈습니다. 오래 했지만 뒤돌아보면 뚜렷하게 남긴 건 없네요. 그저 쉬지 않고 했습니다. 미림극장이 문을 닫았을 때도 말이죠. 매주 월요일에는 간석동에 있는 노인 종합문화회관, 화요일에는 중구청 지역의 문화원, 수요일에는 부천지역까지 가서 영화를 틀었습니다. 지금도 미림극장에서 불러주면 영사기를 만집니다. 송경원 _미림극장에 처음 오셨을 때 극장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조점용 _내가 처음 왔을 때는 천막은 아니고 단층극장이었어요. 단층에 200석인데 손님은 미어터져서 건물을 새로 지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더 몰리고. 재밌는 외화가 한다고 소문나는 시기에는 매일 작게는 1천 명, 많게는 3천 명까지 와서 장사진을 쳤죠. 인근 지역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여기서 영화를 튼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송경원 _개관 당시부터 꾸준히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군요. 조점용 _맞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TV가 집집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이 최고의 호사였으니까요. 당시 수도국산 산동네는 정말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로애락을 주는 영화가 더욱 소중했죠. 인천 동구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이쪽으로 영화를 많이 보러 왔습니다. 왜냐면 서울에서는 개봉영화를 보려면 예매를 해야 하는데, 여기는 아무 때나 와서 자리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당시 인천 지역의 극장 시스템은 그랬습니다. 지금은 문을 닫은 문화극장이나 오성극장, 그 위쪽의 인천시민회관 등 인천 지역 영화의 산실이 바로 동인천 동구 이 동네였거든요. 송경원 _동구 지역 영화관 중에서도 미림극장이 특별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조점용 _사장님이 흥행할 영화를 잘 골라왔어요. 당시 영화수입업자들은 다 충무로에 있었는데 인기 있는 영화를 얼마나 가져오느냐에 따라 수입 차이가 꽤 컸습니다. 한국영화는 별로 인기가 없어서 억지로 틀고 그 대신 외국영화 틀 날짜를 받아오곤 했지요. 당시 사장인 고용성 씨가 미 8군사령부 수석 통역관이었던 사람이라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영어가 되니까 영화도 잘 고르는 거죠. 그래서 서울의 수입업자들이 고용성 사장을 찾아와서 어떤 영화를 수입할지 물어보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고용성 그 양반이 영화에 대한 식견도 높아서 당시에 해외영화 잡지 같은 것도 챙겨보고 그랬습니다. 영화가 미국에서 흥행했다고 한국에서 다 흥행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한국 정서에 맞는 작품을 잘 찾아야 되는데, 고용성 사장이 귀신같이 그런 걸 잘 골라냈습니다. 그런 자산을 가지고 영화를 빠르게 잘 배급해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역사관에 전시되고 있는 80-90년대 상영되었던 영화 예고편 필름들 송경원 _40년 세월 영화를 틀어오셨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있을까요. 조점용 _글쎄, 워낙 많아서. <킬링 필드>(롤랑 조페 감독, 1984)라는 영화가 공무원들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라 단체관람객이 많이 왔던 게 생각납니다. 학생 단체관람도 많았고. 당시에 한국영화는 관객이 잘 안 드는데 스크린쿼터 때문에 억지로 틀기도 했어요. 그럴 땐 한국영화 간판만 걸어놓고 외화를 틀기도 했죠. 단속이 나와서 걸리다 보니까 나중에는 못하게 됐지만. 송경원 _2층 발코니 공간의 좌석이 특색이 있는 구조입니다. 조점용 _사람이 워낙 몰리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공사를 했죠. 당시엔 건축학과 교수들도 와서 이야기하곤 했어요. 여기가 인천에서 영화 보기 제일 좋은 곳이라고. 다들 좌석 한 자리라도 더 늘리려고 하지 이렇게 영화를 보기 좋게 설계한 곳이 없다고. 상단, 하단, 구석 어디에 앉든 스크린이 가려지는 곳이 없거든. 280석이 정원이지만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받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어렵게 발걸음 했는데 많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손님이 하도 많으니까 여름에는 에어컨이 돌아가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들 열기랑 습기가 섞여가지고 유리창이나 렌즈만 닦는 아르바이트를 따로 고용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몇십 년을 운영하면서 이제껏 큰 사고 한번 안 났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도 그게 자랑거리입니다. 그만큼 직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는 거죠. 상영관 2층 발코니 형 좌석 송경원 _그러던 게 1990년대 말, 2000년 초가 되어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침체에 빠졌습니다. 조점용 _서서히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관객이 한 번에 사라졌어요. 시대가 바뀐 거죠. 한 번에 14개 관에서 여러 영화를 상영하니 단관극장으로 사람들이 올 리가 있나. 매일 미어터지던 입구가 정말 거짓말처럼 한산해졌습니다. 송경원 _2004년 문을 닫는 마지막 날까지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본 겁니다. 손님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허전한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이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쩌겠어. 평생 해온 게 이 일이고 내 자리가 여긴데. 에어컨도 없이 여름이면 지옥 같은 영사실에서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이제 와서 뭘 다른 일을 하겠어요. 우리 집이 바로 여기서 몇십 미터 앞이거든. 여기서 일하려고 집을 아예 구해버렸지. 일하기 좋았던 시절도 있고 어려운 시절도 있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오늘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많이 퇴색이 됐어요. 추억을 쌓고 잊히지 않는 공간으로 자꾸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런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요. 미림극장이 다시 문을 연 건 반가운 일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쉽진 않지만. 필자: 송경원(씨네21) 사진촬영: 손홍주 인터뷰 일자: 2022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