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 감독
- 김민숙, 이정국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이무생, 전보영, 명승훈, 이희준, 최종률, 김예리, 박채연, 송지숙, 강지혜, 한소민, 박수정, 최민호, 김선희, 박수정, 지서해, 이웅, 이광호, 김진욱, 오창경, 김기성, 신용섭, 송봉한, 윤대성, 강성원, 정민욱, 이현용, 신철진, 정인지
임시연 감독이 연출한 < 햄스터 죽이기 >의 주인공 효정은 존재감이 없는 아이다. 그녀는 15살 동갑내기 수정과 일란성 쌍둥이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하게 구분된다. 수정이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효정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불분명한 상태로 그려진다. 수정은 신분과 소속이 분명하지만, 효정은 신분과 소속이 불분명하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효정을 수정으로 착각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효정의 존재론적인 지위는 불분명하다. 영화 초반, 효정은 내레이션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5년 전 엄마는 쌍둥이를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이건 마지막으로 내가 김효정이었던 때의 이야기이다.” 이 독백이 암시하는 것처럼, <햄스터 죽이기>는 타자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비교적 덤덤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도플갱어는 오랜 시간 동안 문학과 영화의 주요 소재로 쓰였다. 사전적으로 도플갱어는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을 뜻하며, 그것은 자아의 증식, 복제, 분할, 분열 등과 같은 함축적 의미를 포함한다. 도플갱어가 자아의 증식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욕망의 발현과 관련이 있으며, 도플갱어가 자아의 분열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이성에 의한 억압과 관련이 있다. 일찍이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도플갱어의 의미를 자아의 분할, 구분, 교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억압된 대상이 회귀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도플갱어는 억압된 주관성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반발을 표현하고자 했던 낭만주의 문학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다룬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났다. < 프라하의 학생 >(1913),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19), < 노스페라투 >(1922), < 마부제 박사 >(1922)가 도플갱어를 영화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작품들은 거울 이미지, 괴물, 광인 등으로 도플갱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인물과 그것의 유령적인 대응물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조력자이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장애물일 수 있다. 도플갱어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자아와 타자는 서로 운명 공동체를 형성한다. <햄스터 죽이기>의 효정과 수정 또한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 두 사람은 모종의 협상을 맺고서 서로의 분신이 되기로 약속한다. 수정은 효정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를 수 있는지 묻는다. 파우스트적인 거래에 가까운 이 협상이 맺어진 결과 수정은 효정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그동안 효정은 수정을 대신해 학교에 간다. 영화는 효정의 변화된 삶에 주목한다. 그녀는 수정의 명찰이 붙은 교복을 입고, 수정이 다니는 학교에 가서, 수정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수정을 대신해서 시험을 본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효정은 자신을 수정이라고 믿는 사람들 앞에서 수정을 연기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효정의 억압된 욕구가 현실로 회귀하고,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효정의 욕망은 그녀가 수정의 분신이 되었을 때만 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한계를 갖는다. 또한, 효정이 수정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그녀의 소원 성취는 일시적으로 혹은 무기한 유예된다. 이것은 타자의 도플갱어가 된 한 인간의 비극적 결말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모든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분신이라는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햄스터 죽이기>는 우화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삽입한다. 이 영화는 한 쌍의 햄스터가 있을 때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도플갱어로 맺어진 효정과 수정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 수정은 학교 앞에서 사 온 것이라면서 한 쌍의 햄스터를 집에 들인다. 수정이 햄스터에 대해서 비교적 무심한 것과 달리 효정은 케이지 안에 들어 있는 한 쌍의 햄스터를 유심히 관찰한다. 햄스터를 관찰하는 효정의 모습은 이 영화 전체의 구조와 어우러져 관객인 우리가 그림 속의 그림을 바라보는 듯한 착시를 경험하게 만든다. 관객이 효정과 수정 사이에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정은 한 쌍의 햄스터 사이에서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본다. 이 미장아빔(mise en abyme)의 구조에 의해서 영화의 안과 밖 모두 도플갱어가 관계의 중심을 이루는 세계처럼 지각된다. 그리고 이 액자식 구조 속에서 관찰자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문자 그대로 잡아먹는 잔인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욕망이 도착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인 동시에 먹는 행위를 통해서 정령, 타자, 초월적 존재가 현현(incarnation)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자의 그림자에 갇힌 도플갱어를 넘어서 타자를 집어삼킨 도플갱어의 모습에서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햄스터 죽이기> 후반부의 일부 장면은 너와 나의 구분이 무너진 도플갱어의 관계를 암시한다. 효정이 두 마리 햄스터 중 한 마리의 사체를 화단에 묻고 난 직후 그녀는 교복을 입은 수정과 마주한다. 여기서 영화는 효정과 수정의 모습을 각각 풀 샷, 바스트 샷, 클로즈업 샷으로 담은 이미지를 쇼트와 역-쇼트 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 쇼트들의 교환 속에서 효정의 얼굴과 수정의 얼굴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그 교환의 구조 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증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효정과 수정을 구분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명찰이 없는 교복을 입었기에 효정인지 수정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 누군가가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근데 쥐새끼도 제 자식은 알아보는 게 아닌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그것은 분명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 영화 속 누군가의 자조 섞인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리라.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2017년 2월, 나는 < 다시 태어나도 우리 Becoming who I was >가 아직 ‘앙뚜’라는 제목일 때 처음 만났다. 당시 난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부문의 심사를 위해 열흘간 베를린에 머물던 중이었고, ‘앙뚜’는 심사를 해야 할 경쟁부문 진출작 중 하나였다. 사실 처음 심사 제의를 받았을 땐 무척 혼란스러웠다. 나 같은 초심자가, 그것도 나처럼 분석과 비평에 약한 주관적 감상의 소유자가 심사라니. 더욱이 그땐 당장 내 시나리오조차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던 터라, 과연 내가 감히 다른 작품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자격이 될까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집행위원장 마리안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심사라는 건 절대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작업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지지하고 싶은 작품의 손을 들어 진짜 친구를 만드는 멋진 자리라고 나를 북돋웠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날아온 어린이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멋진 영화들을 잔뜩 보고 이야기 나누는 일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경험이 아니겠냐고, 그래야 다음 작품에 필요한 더 큰 자극과 자양분을 얻어갈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도무지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마리안의 말만 믿고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서른 편이 넘는 영화들 가운데, 정말 기적처럼 이 영화 < 다시 태어나도 우리 >를 만났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다음 작품의 영감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두고두고 다시 볼 좋은 작품을 만난 뿌듯함에 오랜만에 많이 행복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좋은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심사의 진정한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창용 , 전진 감독의 < 다시 태어나도 우리 >는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 린포체 ‘앙뚜’와 그를 돌보는 노승 ‘우르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장장 9년에 걸쳐 정직하게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느 무엇보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꼬마 앙뚜의 티 없이 맑은 눈과 눈부신 미소다. 그토록 모든 것에 투명하게 반응하는 아이의 해사한 얼굴을 또 본 적이 있었나 되묻게 되는 놀라운 눈빛과 미소다. 그렇듯 온전하게 빛나는 앙뚜의 모습으로부터 눈을 떼기란, 그 자체로 완벽하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게 우리는 앙뚜가 웃으면 같이 웃고, 앙뚜가 찡그리면 같이 찡그리고, 앙뚜가 두려워하면 같이 움츠러들고 긴장하는 놀라운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가, 아니 이 영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든 믿고 함께 가보겠다는 결심을 절로 하게 된다. 영화의 진짜 기적은 바로 그다음부터 시작된다. 카메라는 계속 동자승에서 린포체로 성장하는 앙뚜를 진솔하게 담아내는데, 어느덧 우리의 시선은 어린 앙뚜로부터 스승인 우르갼에게로 서서히 이동하게 된다. 우르갼은 늘 따뜻한 미소와 눈빛으로 앙뚜의 곁을 지키며 아이의 모든 여정에 ‘함께’ 한다. 그는 때론 부모처럼 살뜰히 앙뚜의 옷을 입히고 정성스레 밥을 지어 먹이는가 하면, 때론 친한 친구가 되어 앙뚜와 함께 공을 차고 눈밭을 구르기도 한다. 또한 그는 앙뚜가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젊은 승려를 불러 과외수업을 받게도 하고, 사원이 없는 앙뚜의 불안과 걱정을 자신의 일처럼 끌어안고 함께 티벳으로 향하기도 하는데, 그때 우리는 그가 그 누구보다 큰 스승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든, 그 어떤 삶의 불확실성과 공포와 마주하든, 항상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앙뚜를 대하고 지켜주고자 노력하는 양육자 우르갼의 굳건한 태도와 확신이다. 그는 아이의 모든 호기심과 실수와 배움에 늘 다정하고 섬세하게 반응하고 동참한다. 그는 늘 아이 곁을 든든하게 지키며 무엇이든 나누려 하지만, 절대 함부로 간섭하거나 명령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 배경에야 당연히 린포체를 잘 모시고 섬기려는 승려로서의 종교적 사명감과 책임감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앙뚜를 대하는 그의 한결같은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그런 종교적 신념 이전에 이미 ‘우르갼’이라는 한 인간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발현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이 영화가 종교적 신비에 둘러싸인 린포체의 은밀한 성장담을 담아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한 아이를 온 정성을 다해 돌보고, 가르치고, 이끄는 진정한 부모와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그리고 어른과 아이가 최선을 다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배움의 과정인지 나누려 했음을 깨닫게 된다. 전생의 사원을 찾아 티베트로 향한 여정의 끝에서, 우르갼은 언젠가 앙뚜와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 우르갼이 그동안 앙뚜를 린포체로 모실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고 말하자, 앙뚜는 공부를 다 마친 15년 후 반드시 돌아와 다시 스승님과 만날 거라고 약속한다. 우르갼은 그땐 자신은 너무 늙어서 아이처럼 되어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자 앙뚜는 다시 약속한다. 그땐 자신이 스승님을 모실 거라고. 그때야말로 자기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들이 될 거라고. 어쩌면 < 다시 태어나도 우리 >라는 아름다운 제목 속에 숨겨진 문장은,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우리’가 되고 싶어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음 생에 새롭게 태어난 앙뚜가 이번엔 어린 린포체 우르갼의 스승이 되어 또다시 기적 같은 ‘우리’의 삶을 함께 살아갈 모습을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남자들로 구성된 한국의 특수 집단, 학교와 군대. 폭력과 권력으로 대변되는 주류 남성성은 이 폐쇄적 남성공간을 통해 획득되고 구성된다. 말하자면 남자 고등학교는 ‘예비 남성’인 소년들의 병영체험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곳은 의리와 우정으로 대변되는 남성 결합의 공동체인 동시에 숭배, 질투, 분노의 감정이 오가는 잔인한 결투의 장이다. 왕성한 발육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의식상태는 잔혹한 공격성향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른바 왕따(집단따돌림) 현상은 그러한 정념의 발화일 것이다. 차이에 대한 이질감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또는 그저 재미있으므로 강자는 약자를 괴롭힌다. 이 풋내기 수컷 문화로 점철된 남고에 마선과 마택이 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우팅 당한 마선은 급우들 사이에서 ‘호모새끼’로 낙인 찍혀 집단 괴롭힘을 당한다. 같은 반의 마택은 그에게 안쓰러운 감정을 느끼지만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선듯 마선의 편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얼굴 가득 여드름 꽃이 핀 두 인물은 배우가 아닌 실제 고등학생이다. 반의 아이들은 마선을 향해 “호모새끼”, “더러워, 역겨워”, “진짜 저 새끼 너 애인이야?” 등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마초적 대사들을 시종일관 쏟아내는데, 그것이 뻔한 설정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그 또래의 문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등장인물들이 또래의 비전문 배우로 캐스팅했기 때문이리라. 한편, 둘에게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으니 바로 음악이다. 마선은 드럼, 마택은 베이스를 연주한다.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두 사람은 나란히 교내 밴드부에 합격하게 되고, 밤새 연습을 하면서 미묘한 감정을 쌓아간다. 둘은 말이 아닌 음악의 언어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밴드 음악에서 전체적인 리듬을 형성하고 받혀주는 드럼과 베이스의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이 둘의 합주는 찹쌀떡 궁합을 보여준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이들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동물 왕국의 아이들은 둘을 연인으로 간주하여 공개재판을 연다. 마택은 자신마저 따돌림을 당할 상황에 놓이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마선에게 배반의 장미를 던진다. “김마선, 니 애인한테 가서 똥구멍이나 핥아!” 영화는 학교 내 남성 동성애자의 현실을 다루기는 하지만, 성적지향에 따른 차이보다는 집단 괴롭힘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호모포비아라는 특정한 소재를 토대로 누구나 겪을 수 있을 법한 왕따 현상을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마택이 왕따를 당하는 이유를 가난, 외모, 장애, 성적 등으로 치환하여도 무리 없이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이유들은 급우들에게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될 여지가 있겠지만, 동성애자란 정체성은 혐오와 경멸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일 듯이다. 이같은 경계의 불확실성은 둘의 관계와 정체성도 해당된다.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마선이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단순 루머에 의한 따돌림의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스스로 긍정도 부정도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선을 향한 마택의 감정이 약자에 대한 연민인지, 혹은 음악적 연대감을 나누는 우정인지 모호하다. 심지어 마택 역시 클로짓 게이로서 마선을 향한 묘한 애정을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가 마선을 특별히 신경 쓴다는 것 외에는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다. 이런 감정의 모호성은 영화의 단점이기보다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흔히 우리가 확연하게 선을 긋는 사랑과 우정의 경계란 것이 실상 불명확하고, 또한 남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자에 대한 특수한 차별과 폭력의 문화를 보편적인 따돌림 현상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자면 자칫 영화가 평범하게 설명되는 듯하다. 분명 < Bomb! Bomb! Bomb! >은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거부한 채 실험적인 영화를 제작해온 쌍둥이 감독 김곡 , 김선 의 이전 영화와는 달리 친절한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그러나 비타협창작집단 곡사의 인장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드러난다.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동물원’의 제물이 된 마선은 홀로 책상에 앉아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소위 ‘동물원’이라 불리는 이 놀이는 교실에 왕따 한명을 가둬넣고 동물 취급을 하는 집단따돌림의 한 종류이다. 이 잔혹한 놀이는 광기에 사로잡힌 수컷집단에 의한 희생양의 정신적 화형식이다. 창문을 두드리며 광분하는 아이들을 비집고 이내 마택이 나타난다. 그는 아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교실문을 열고 마선에게 다가간다. 동물원의 동물로 만난 마선과 마택. 이때 침묵을 지키던 마선이 말한다. "마택아, 쟤들 다 죽여버릴까?" 그리고 정말 음악과 함께 모두를 죽여 버린다. 내가 이 영화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는 마지막 두 주인공이 선사하는 전복의 쾌감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원 제의를 보며 분노에 휩싸여 스크린을 찢고 들어가 교실을 폭파 시키고 싶은 기분에 휩싸일 때, 카운트다운하듯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Bomb! Bomb! Bomb!)하며 안과 밖은 역전된다. 광분하던 창밖의 아이들은 마선과 마택의 연주에 열광하는 군중으로 변하고, 우리의 분노와 슬픔은 흥분과 전율로 뒤바뀐다. 윗옷을 벗은 채 그들만의 상상적 공간 속에서 발광하듯 합주하는 마선과 마택의 모습은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폭발력있는 오르가즘을 발휘한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한 세계의 전복. 모든 아름다운 영화가 그렇하듯 < Bomb! Bomb! Bomb! >은 보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PS: < Bomb! Bomb! Bomb! >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시선 시리즈 중 < 세 번째 시선 >(2006)에 포함된 작품이다. 시선 시리즈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옴니버스 영화로, 2003년 < 여섯 개의 시선 >에서 시작돼 박찬욱 , 류승완 , 임순례 , 장진 , 김태용 등 총 52명의 쟁쟁한 한국 영화감독들이 참여했다. 알려진 바로는 2015년 정지우 감독의 < 4등 >을 끝으로 제작비를 구하지 못하여 잠정적 중단 되었다고 한다. 이 훌륭한 기획이 올해는 부활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