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의 봉인
- 감독
- 잉마르 베르히만
- 제작년도
- 1957
- 출연
- 막스 폰 시도우, 벵 에커로, 거너 본스트랜드, 비비 앤더슨, 잉가 길
최근 선댄스영화제가 발굴한 재주꾼 중 한 명은 알폰소 고메즈-레존이다. 두 번째 장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로 2015년 선댄스 드라마 부문의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던 그는 NYU(뉴욕대)와 AFI(미국영화협회)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1990년대 초부터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세컨드 유니트 디렉터로, 혹은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아니면 연출부의 일원으로 그가 ‘모셨던’ 감독들의 명단은, 혹시 이 사람에게 수집벽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히 쟁쟁하다. 마틴 스코시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노라 에프런, 시드니 루멧, 마이클 만…. 최근엔 벤 애플렉 감독의 < 아르고 >(2012) 세컨드 유닛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였다, 시작은 TV 시리즈였고 < 글리 >(2009~15)나 <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2011~ ) 등에 참여했다. 2014년엔 드디어 첫 장편영화 <일몰이 두려운 마을 The Town That Dreaded Sundown>을 내놓는다. 전형적인 슬래셔 호러 장르에 나름의 스타일과 플롯 비틀기를 가미했지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서 그는 환골탈태한다. 제시 앤드류스의 첫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장르적 전형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과 비주얼을 결합한다는 점에서 <일몰이 두려운 마을>과 유사한 방식의 시도였다. 하지만 드라마의 깊이와 캐릭터의 매력은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틴에이저 장르 안에서 이토록 유쾌하고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작은 기적이다. 제목이 말하듯 이 영화는 ‘나’인 그렉(토머스 만)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하이스쿨 졸업반이 된 그렉. 그는 8년째 투명인간처럼 학교 생활을 해온, 거의 모든 성향의 집단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게 말하면 친화력 좋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색깔 없는 ‘왕따’나 마찬가지인 십대다. 유일한 친구는 얼(알제이 사일러)이다. 유치원 때부터 함께 어울린 둘의 공통점은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 영화사를 아로새긴 걸작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리메이크(라기보다는 패러디)한다. 역사 교사 매커시(존 번탈)의 방에서 빈둥대거나 영화 찍는 것 말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하지만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올리비아 쿡)과 만나면서 그들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할리우드 틴에이저 무비는 겉으로는 얄팍해 보이지만 의외로 성찰적인 장르다. 십 대들의 불안한 삶은 지향점을 알 수 없는 저항으로 치닫고,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에 빠지고, 세상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고, 때론 힘겨운 운명의 짐을 지기도 한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친구, 연인, 교사, 부모 등의 한정된 캐릭터로 이뤄지지만, 이 제약적인 토대 위에서도 틴에이저 무비는 매우 풍성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도 마찬가지다. 전반부가 제법 발랄한 톤의 루저 코미디를 통해 십 대들의 냉소적 불안감을 담아낸다면,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어른스럽고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가면, ‘쿨’하게 시작해 점점 온도를 올렸던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이런 드라마의 힘은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과 ‘나’ 그렉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하이스쿨 시절을 마감하고 대학으로 가는 관문인 졸업반 시기. 레이첼은 백혈병에 걸려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렉은 그 어떤 꿈도 없다. 같은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불운한 우정’이 시작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이첼의 백혈병이다. 그렉은 “가서 친구가 되어 주라”는 엄마(코니 브리튼)의 말에 못 이겨 레이첼의 집에 갔고, 어색하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어느덧 졸업반 내내 이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렉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고, 레이첼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더욱 절박한 상황에 처한 레이첼이 그렉의 삶을 채찍질하고 이끈다는 점이다. 레이첼은 그렉 대신 대학 입학처에 편지를 보내고 그를 격려한다. 하지만 그렉은 오히려 레이첼의 호의와 헌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그렉은 조금씩 껍질을 깨나가며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이러한 성장 영화의 측면이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의 진지한 얼굴이라면, ‘나’ 그렉과 ‘친구’ 얼이 만들어낸 수많은 영화들의 목록은 시네필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다. 이 영화엔 수많은 영화들이 언급된다. 그렉과 얼은 역사 선생 방에서 컴퓨터로 베르너 헤어조크의 < 피츠카랄도 >(1982)에 대한 메이킹 다큐멘터리인 < 버든 오브 드림스 >(1982)를 본다. 그렉의 아버지(닉 오퍼맨)도 헤어조크의 팬으로 < 아귀레 신의 분노 >(1982)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렉의 방엔 프랑소와 트뤼포의 < 400번의 구타 >(1959) 포스터가 붙어 있으며, 그는 실의에 빠졌을 때 이 영화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렉이 얼과 함께 만드는 영화들의 제목들 역시 가관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1957)에서 모티브를 얻은 <일곱 마리 물개 The Seven Seals>에선 기사와 죽음의 사자가 황당한 체스를 둔다(‘seal’엔 봉인과 물개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마이클 파웰의 ‘엿보기’에 대한 범죄 영화 < 저주의 카메라 Peeping Tom >(1960)는 <똥싸는 톰 Pooping Tom>으로 바뀌었는데, 주인공은 뚫어뻥의 공격을 받는다. 이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1971)가 <양말장치 오렌지 A Sockwork Orange>가 되고, 데이비드 린치의 < 블루 벨벳 Blue Velvet >(1986)이 <원숭이 맥주 Brew Vervet>가 되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 베니스에서의 죽음 Death in Venice >(1971)이 <테니스장에서의 죽음 Death in Tennis>이 된다. 과거 8mm 시대 영화광을 연상시키는 그렉과 얼의 이러한 ‘영화 장난’들은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 독특한 결을 부여한다. 전작인 <일몰이 두려운 마을>에서도 ‘영화 속 영화’의 컨셉트로 연쇄살인극을 구성했던 고메즈-레존 감독은 두 번째 영화에선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영화 유희적 본성을 드러내며, 그 기발함과 유머는 자칫하면 느슨해질 수 있는 루저 스타일 틴에이저 무비를 활기 찬 소동극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는 결코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가장 결정적 순간을 위한 토대가 된다. 그렉과 얼은 태어나 처음으로, 기존에 있는 영화를 비트는 것이 아닌 순수한 창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바로 레이첼을 위한 영화다. 그러나 ‘진짜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야심은 곧 난항을 겪고, 결국 얼이 그만 둔 상태에서 그렉 혼자 영화를 완성한다. 병원에 있는 레이첼과 그렉이 그 영화를 함께 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여기서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지만, 아무튼 이 장면이 환기시키는 감정의 진폭은 상상 이상이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는 현재 할리우드 틴에이저 장르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이며 자유로운 작품이다. 관객과 대화하듯 진행되는 내레이션, 별나면서도 진정성 있는 캐릭터, 묵직한 드라마와 코미디를 자연스레 결합하는 솜씨 등 이 영화는 많은 영화적 미덕을 지녔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느새 ‘삶과 죽음’에 대해, 아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묻는다. 피상적으로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있잖아?”라며 대충 얼버무리며 끝나는 청춘 영화와 비교하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사족 하나. 이 영화의 위트 넘치는 카메라 워크가 궁금해 크레디트를 유심히 살펴봤다면, 우린 의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Cinematography by Chung-hoon Chung’. 맞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바로 한국의 정정훈이다. 박찬욱 감독과 < 올드보이 >(2003)부터 호흡을 맞추었고, < 스토커 >(2013)로 함께 할리우드에 진출한 정정훈 촬영감독은 미국에서 솜씨를 인정받았고,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인 < 블러바드 >(2014)에서 우울하고 정적인 촬영을 선보이더니 세 번째 할리우드 영화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선 마치 날개를 단 듯 역동적이며 재미있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가 만들어낸 비주얼들 역시, 이 영화를 꼭 ‘봐야’하는 이유 중 하나다.
< 순교자 >(1965)는 김은국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미국에 수출한 첫 번째 한국영화이다. 영화를 연출한 유현목 감독은 한국전쟁에서 아버지와 형제를 잃고 나머지 가족들과 남쪽으로 내려와 실향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자신의 신앙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실존주의가 크게 자리하게 된다. ‘인간들의 절망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전쟁을 겪고 미국으로 건너간 김은국의 「순교자」(1964)는 이 절박한 질문의 답변 같은 소설이었다. 1950년 10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은 평양에서 후퇴하기 직전에 목사 14명을 처형한다. 그런데 한국군에서 진상을 알아보니 한 목사와 신 목사가 살아있다. 포로로 잡힌 인민군의 증언에 따르면, 12명의 목사 대부분은 믿음을 부정하고 살려달라고 짐승처럼 애걸했다. 한 목사는 여기에 충격을 받아 실성을 했지만, 신 목사는 당당하게 맞섰다. 그래서 두 명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국군이 12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만들어 인민군의 만행을 부각시키려고 할 때, 현장에 있었던 신 목사의 증언이 절실해진다. 신 목사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이 대위에게 “일생동안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없다. 천당도 지옥도 없다. 전쟁의 비극과 학살에 희생당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믿는 진실이 절망에 빠진 인간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덧붙인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에게는 진실보다 ‘천국이 가까이 있다’는 ‘환상’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 목사는 12명의 목사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 속에서 순교했다고 증언하고 유다 같은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그는 진실 대신 거짓을 말함으로써, 기꺼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진짜 순교자’가 된다. 여기서 신 목사는 최후의 만찬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남아서 믿음을 전파할 의무를 떠안은 사도 바울에 가깝게 보인다. < 순교자 >는 한국전쟁을 매개로 해서 기독교의 믿음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유현목 은 이 영화가 로베르 브레송의 < 시골 사제의 일기 >와 잉마르 베리만의 < 제7의 봉인 >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김은국은 기독교를 소재로 해서, 인간이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서 어떻게 절망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전쟁을 겪어야 했던 한국사의 비극에 방점을 두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 최선을 다해 ‘순((殉)’하는 인물 군상을 제시하려 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의 부조리를 고발하려 했다. 유현목은 실존주의 문학에 속하는 원작에 이끌리면서도 기독교 신자로서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신앙과 실존주의 사이의 불화를 미묘하게 봉합하는 각색을 했다. ‘인간의 구원’을 강조하고, ‘신을 위해서든 인간을 위해서든, 참된 믿음과 봉사를 선택한 사람이 곧 순교자’라는 점을 더 부각시켰다. 신 목사뿐만 아니라 환자들을 위해 희생을 선택하는 의사의 경우처럼.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기독교계의 거센 반발과 관람거부운동이 벌어졌다. 유현목 은 방송에 출연해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꽃이나 나비를 보아도 거기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했다. 영화 내내 황폐한 화면 밖에서 울려 퍼지는 교회의 종소리와 끊임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유현목이 믿는 하나님, 존재하지만 숨어 있는 신의 현현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또 다른 제약은 반공영화가 아니면 한국전쟁을 다룰 수 없었던 시대의 억압이었다. 따라서 원작과 달리 영화는 ‘피에 굶주린 공산주의자들이 동족상쟁의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는 이 대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 대위가 ‘죽을 때까지 조국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제 한국전쟁은 오래 전의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절망적인 인간의 실존을 견디기 위해서는 비록 거짓이라 해도 희망을 줄 수 있는 환상이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문제 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원작과 영화가 여전히 의미심장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