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 아웃
- 감독
- 조던 필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대니얼 칼루야, 앨리슨 윌리엄스, 브래드리 휘트포드, 캐서린 키너
< 놉 >을 처음 봤을 때 선명한 지향점을 지녔음에도 부분적으로 불투명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던 필의 전작인 < 어스 >(2019)처럼 구조의 뼈대가 매우 앙상하여, 숭숭 뚫린 구멍과 같은 알레고리가 여러 의미를 불러들이는 형태가 아닌, ‘영화’와 스펙터클이라는 분명하고 직선적인 길을 따라가다 여러 갈래의 분기점으로 갈라진 후, 분명 가려고 했던 목적지에는 도착했지만, 어느 것이 중심 도로였는지 잃어버리게 되는 영화 말이다. 때문에 갈림길 없이 메시지의 대로를 따라 장르가 지닌 속도와 감응하며 시너지를 내었던 < 겟 아웃 >(2017)과 비교하면 <놉>은 장르적으로도 어느 정도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명한 듯 불투명하게 보이는 알레고리와 장르적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놉>에는 분명 기이한 매혹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선명하게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상황이 매혹을 만든다 말하고 싶다. 똑똑히 눈으로 보았지만 구름과 언덕 사이를 유영하여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UAP(미확인 항공 현상)를, 보았다고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로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처럼 말이다. 당연히 <놉>을 향한 많은 해석과 이 글 또한 이러한 욕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메랄드(키키 파머)가 일명 오프라 쇼트라고 언급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두려움을 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미지를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을 따라 <놉>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영화를 두 번째 감상했을 때 하나의 의미로 깔끔하게 정리하기 힘든 두 요소가 마치 카메라와 피사체처럼 마주 보며 반복적으로 얽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카메라와 피사체라는 비유는 비유일 뿐 아니라 직접적인 소재로 등장하는 만큼 <놉>을 ‘영화’에 관한 영화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등장하는 ‘고디가 왔다’ 에피소드를 통해 피사체와 카메라의 권력 관계에 관한 이야기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 관음의 대상이던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스크린과 카메라 뒤편의 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 이창 >(1954)처럼, 카메라 뒤편에 선 제프리(제임스 스튜어드)와 카메라의 피사체가 되는 쏜월드를 완전히 분리시켜 카메라-피사체의 권력 관계를 도식적으로 구조화하는 영화 말이다. <놉>은 당연히 <이창>처럼 딱 떨어지는 구조를 지닌 영화는 아니다. 쏜월드와 달리 진 재킷은 피사체이면서 동시에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진 재킷의 입/눈은 직관적으로 카메라를 유추할 수 있게 시각화되어 있으며 먹이를 먹기 직전에 내는 효과음 또한 셔터의 사운드와 닮았다. 그렇기에 <놉>의 진 재킷과 에메랄드와의 관계는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카메라이자 피사체면서 주프(스티븐 연)의 테마파크처럼 서부 총잡이들 간의 대결 구도와 같다. 대신 서로 한 방을 맞는 순간 끝이 나는 저격수들의 싸움이다. 촬영되는 순간, 찍히는 순간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놉>은 ‘영화’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시선의 권력만으로 선명하게 의미화되지 않으며 피사체/카메라라는 이중 정체성으로 마주 보는 복합적 형태를 이룬다. 한쪽에만 카메라가 지닌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 서로를 찍으려 하는 대결 구도는 자연스럽게 영화에서 스펙터클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놉>에서 스펙터클을 다룰 때 중요한 지점은 <이창>이 지닌 관음의 구조가 아니라, 볼거리를 볼 수밖에 없는 본능 그 자체에 있다. 물론 주프가 어린 시절 겪었던 1998년 ‘고디가 왔다’ 생일 파티 에피소드는 피사체에 대한 존중 없는 스펙터클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또한, 보면 안 된다(Nope)는 장르적 조건과 영화의 제목은 스펙터클에 맹목적으로 이끌리는 관객과 사회에 대한 비판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사-고디라고 할 수 있는 진 재킷이 UAP가 아니라 동물이자 괴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중반부 이후에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두 명의 사람이 사망한 참사에서 살아남은 주프는 고디-진 재킷으로 은유 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매혹을 느낀다. 또한, 보면 죽는다는 조건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 두려움에 의한 것이든 시선을 사로잡는 시각적 매혹에 의한 것이든, 진 재킷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보면 잡아먹힌다는 조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수밖에 없다는 스펙터클의 매혹을 강조하는 장치로서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행위에 관한 비판적 은유를 넘어선다. 부분적으로 아이맥스로 촬영된 영화와 진 재킷의 본 모습이 발산하는 거대하고 매혹적 자태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놉>은 스펙터클에 대한 경고이면서 찬사이기도 한 모순적 상태를 카메라이자 피사체인 진 재킷과 피사체인 OJ(대니얼 칼루야)와 촬영자인 에메랄드 두 명의 주인공으로 구조화하고 있다. 주요인물인 OJ와 에메랄드가 각각 피사체와 카메라라는 것은 단순히 비유적 과장이 아니다. OJ는 전반부에서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던 인물이었지만 동생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진 재킷 앞에 서는 것으로 쇼맨(피사체)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에메랄드는 말-진 재킷을 갖지 못했던 과거를 괴물-진 재킷의 사진이라는 이미지 획득하며 촬영자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으며 극복한다. 이 중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촬영자인 에메랄드이다. 이는 스펙터클에 관한 찬사가 비판을 넘어섰다고 말한 것처럼 <놉>에서 나타나는 양가적 구도 중 핵심이 되는 것은 피사체가 아닌 카메라이며,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볼 수밖에 없다는 본능과 스펙터클을 촬영해서 이미지로 소유하고자 하는,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있음을 방증한다. 주프 또한 ‘고디가 왔다’의 참사를 겪으면서 자신이 봤다고 믿는 놀라운 광경을 단순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하여 소유하고 증명하려 한다. 당연히 타인의 죽음과 비극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사무실 속 비밀의 방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 않아야 하는 전시와 쇼를 알면서 비밀스럽게 행하는 주프처럼, <놉> 역시 할리우드와 쇼 비즈니스, 황색언론 그리고 그것들을 소비하는 인간을 풍자하고 비판하지만 동시에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쇼로 재구성하며, 스펙터클로 만드는 고전적 구조와 장르적 쾌감을 재생산한다. 많은 이들이 주프와 OJ를 비교하며 이미지와 피사체에 관한 존중의 유무를 두고 둘의 차이에 주목하지만, 사실 통제 되지 못한 스펙터클로 발생한 참사라는 점에서 ‘고디가 왔다’의 사건과 진 재킷과의 마지막 결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고디, 진 재킷과 교감하고 있다고 믿는 주프와 눈을 마주치면 공격한다는 동물의 습성을 파악한 것만으로 진 재킷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OJ는 크게 다르지 않으며, 주프가 진 재킷을 비밀스러운 쇼를 통해 스펙터클로 소비한 것처럼 에메랄드 또한 진 재킷을 오프라 쇼트라는 상업적 이미지로 포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놉>에서 말하려는 스펙터클이란 통제 되지 못했을 때 참사가 발생하는 불안정하고 위험천만한 이미지가 아니라, 반대로 통제되지 않아야 볼거리가 발생하고 갈등과 사건이 증폭되는 큰 그림 안에 놓인 하나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주인공이 해결함으로써 큰 그림의 쇼가 마무리된다. 그것이 통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나쁜 기적(Bad Miracle)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재구성하여, 스펙터클로 만드는 ‘영화’라는 쇼의 구조이다. <놉>의 진정으로 탁월한 지점은 이와 같은 ‘영화’와 인간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본질을 직접적이고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라는 외피 안에 자연스럽게 배치했다는 것에 있다. 아니 반대로 ‘영화’라는 은유적 외피를 두르고 벌이는 기이한 장르 영화라는 것 때문에 매혹이 발생한다. 예컨대 진 재킷의 자기장에 의해 디지털 카메라에서 원시적 카메라로 퇴행하는 촬영 방식은 인물들의 목적이 쉽게 성취되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자 액션 시퀀스의 긴장감을 만들기 위한 장르적 제한이면서, 일명 오프라 쇼트라 불리는 결정적 이미지를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촬영 과정의 매혹을 고전적 틀 안에서 직관적으로 담아낸다. 이처럼 쇼트(Shot)가 총을 쏜다는 행위와 카메라로 찍는다는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을 활용했을 때의 비유 자체는 진부하지만, 게걸스럽게 먹이를 찾아 탐닉하는 진 재킷이라는 스펙터클/카메라가 볼거리와 위협을 동시에 만들어 스펙터클-이미지를 소유하고 싶어 하면서 이미지의 대상으로 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양면적으로 비추며 진부함과 도식성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 본성이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경고를 장르적 즐거움 안에 놓으면서 스펙터클의, 촬영한다는 것의, ‘영화’ 자체의 비윤리적 본질과 매혹을 모순적이고 기묘한 감흥 안에서 감각하게 한다. <놉>의 이러한 기묘한 감각은, 실제 말이든 말을 모사한 모형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빨아들였다 내뱉는 진 재킷처럼, ‘영화’라는 시각 예술이 움직이는 대상을 이미지화 할 수 있게 된 이후에 획득한 의미망들을 수집광처럼 모아 광범위하게 발산시킨다. 그 과도함이 의미적으로 혹은 장르적으로 영화를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미지를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하여 찾아오는 위기가 영화라는 쇼 안에 포함된 하나의 과정인 것처럼, 결말에 이르러 과도하게 펼쳐진 의미망들을, 또 하나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이미지의 마주 봄으로 탁월하게 ‘영화’의 본질로 수렴시킨다. 그 본질이란 영화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카메라/피사체의 구도와 같이 두 개의 쇼트가 거울처럼 마주하는 엔딩에 있다. <놉>의 마지막 두 쇼트는, 영화 내적으로 카메라로 포착된 실재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컴퓨터 그래픽의 환영일 뿐인 진 재킷의 사진과, 영화 내적으로는 에메랄드의 눈으로 포착된 ‘저 너머(OUT YONDER)’라는 죽음과 삶 사이의 환영적 이미지면서 영화 외적으로는 인간이 연기했음이 분명한 실재의 마주 봄이다. 이 엔딩은 오프닝 크레딧 위로 영사 됐던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The Horse in Motion>(1878)처럼 ‘영화’란 실제 운동을 여러 장의 사진으로 재현한 것이며, 완전한 환영도 실재도 아닌 모호한 이미지임을 아이러니를 통해 꿰뚫는다. 그리고 마이브리지의 영상에서의 흑인 기수가 <놉>의 OJ로 재생산된 것처럼,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스펙터클을, 나쁜 기적(Bad Miracle)을, 영화를 필요로 할 것임을 나타낸다.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위험한 즐거움이라 하더라도 인간과 ‘영화’가 무언가를 본다는 시각적 유사성을 공유하기에 맞이하는 저주이자 축복인 운명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장면과 <놉>은 동양인 주프가 만든 서부극-테마파크에 서부 영웅이 되어 서 있는 흑인 O.J라는 결말처럼, 눈과 카메라, 인간과 ‘영화’의 핵심을 유머와 아이러니로 정확히 명중시키는 조던 필 다운 탁월한 오프라 숏이라 할만하다.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겟 아웃>은 어두운 날 밤, 어떤 흑인 남성이 납치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시점이 바뀌고 흑인인 남자친구 크리스는 백인인 여자친구 로즈가 함께 로즈의 본가인 '아미타지'가 에 가기로 하였는데, 자신이 흑인이라는 점을 여자친구의 가족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로즈에게 털어놓는다. 그러자 로즈는 크리스를 괜찮다며 안심시킨다. 크리스는 흑인 친구인 교통 경찰관 로드에게 강아지를 맡기고 둘은 로즈의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가는 길에 사슴을 로드킬 하게 되고, 경찰이 부르게 된다. 백인이었던 경찰은 운전자였던 로즈 뿐만 아니라 크리스까지도 신분증을 확인하려 한다. 그러자 로즈는 그것을 인종차별로 여긴 건지 경찰들의 행동을 지적하게 되고 결국 경찰들은 크리스의 신분증을 받지 못한 채 부숴진 전조등과 백미러를 고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간다. 우여곡절 끝에 로즈의 본가에 도착하게 된 크리스는 로즈의 가족들에게 환대를 받게 된다. 크리스는 로즈의 아버지인 딘에게 집을 소개받으면서 집의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딘은 백인 가족과 흑인 피고용인 조합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알지만, 오래 전부터 이 집안과 함께해 온 사람들이라 내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딘의 말에 크리스는 납득한다. 영화 <겟 아웃>은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조던 필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조던 필 감독은 미국의 세컨 시티 코미디 극단 출신으로, FOX의 ‘Mad TV’에서 만난 키건 마이클 키와 결성한 Key & Peele 콤비로 미국의 코미디 전문 방송국인 코미디 센트럴에서 본인들의 이름을 건 쇼를 진행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조던 필 감독을 코미디언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 영화 <겟 아웃>의 감독이 조던 필이라는 것을 알고는 많이 놀란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조던 필 감독은 젊어서부터 영화를 찍고 싶어 했으며 감독으로 입봉하기 위한 일종의 과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직업인 코미디언을 택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겟 아웃>의 중심이 되는 인종차별이라는 주제에 전부터 매우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코미디언 시절부터 자주 인종차별에 관한 주제로 개그를 짜기도 했으며,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내재된 고정관념적 인종차별, 그리고 흑인 사회 속에서조차 존재하는 인종차별에 대해 자주 미디어에서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신의 꿈과 생각을 실현시킨 조던 필의 연출 입문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저예산 영화인 <겟 아웃>은 무려 1억 2400만 달러의 수익을 챙겨 흑인 감독의 연출작 중 영화사상 최대 흥행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으며, 평론가들과 각종 영화 평가 사이트들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코미디언 출신 감독의 데뷔작이 이토록 흥행하고 좋은 평가까지 챙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겟 아웃>은 치밀한 복선의 설계와 메타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면 시작부터 건장한 흑인 남성이 누군가에게 납치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실 납치 당한 흑인은 영화 중반쯤에 나오는 이미 백인에게 몸을 빼앗긴 안드레이며 그와 전화를 하던 여자친구는 사실 안드레를 납치하기 위해 접근했던 크리스의 여자친구 로즈였다. 이 장면으로 흑인도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미타지 가족들의 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흑인 월터는 밤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기도 하며, 작중 크리스의 여자친구인 로즈를 예쁜 아이라며 칭찬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육상선수였던 딘의 아버지가 월터의 몸을 빼앗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딘은 자신의 아버지가 베를린 올림픽 미국 대표 선발 예선 대회에서 흑인 육상선수였던 제시 오언스에게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크리스가 "그 분에게는 아픔이었을 것이다"라고 할 때 딘이 "그러셨지. 하지만 극복하셨어"라는 현재 진행형 대사를 넣어 아버지가 살아있는 듯한 뉘앙스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딘이 크리스에게 "어머니가 이 주방을 너무 좋아하셔서 물건을 그대로 남겨놓았다"고 할 때 바로 흑인 하녀인 조지나가 나온다. 조지나가 사실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한다. 그리고 파티를 할 때 크리스에게 로즈와의 밤자리에 대해 물어보거나 타이거 우즈를 언급하며 크리스의 운동 능력에 대해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언뜻 봤을 때, 단순한 노파심에 던지는 오지랖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크리스의 몸을 빼앗기 위해 그를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과정이다. 로즈의 부모님이 계속해서 크리스에게 금연을 권유하는 것도 크리스의 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상품 가치의 하락을 걱정하는 것이다. 로즈의 아버지 딘은 로즈와 크리스로부터 차를 타고 길을 가던 중 사슴을 쳤다는 소리를 듣고는 사슴은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미국 재건기 때 백인에게 협력하지 않는 흑인들을 가리켜서 이들을 검은 사슴이라고 하였다. 사실 딘의 말에서 사슴은 흑인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겉으로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며, 과하다 할 정도로 흑인을 두둔하는 딘이 사실은 흑인을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겟 아웃>은 줄거리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인종차별이라는 정말 오랫동안 숱하게 대두되어 왔던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영화에 사용했다. 그리고 스토리는 비교적 평화롭게 시작되어서 점점 고조되며 공포스러워지는 분위기와 주인공의 위기, 그리고 위기의 극복, 다소 개연성이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겟 아웃>의 전체적인 흐름까지, 정말 무난한 스릴러 영화의 표본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보면 영화 <겟 아웃>은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뻔한 스릴러 영화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겟 아웃>을 실제로 본다면 영화 그저 그런 뻔한 영화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겟 아웃>은 특별하다. 그렇다면, <겟 아웃>이 우리에게 익숙한 여러 소재를 다루면서도 같은 소재를 다룬 여타 영화들와 다르게 신선하고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겟 아웃>이 사회적으로나, 영화의 소재로서나 우리에게 익숙한 인종차별을 다루었음에도 신선하고 특별한 이유는 역사 속 인물의 서사나 사건을 주로 다루는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영화 중 흔치 않은 장르인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영화라는 점도 큰 몫을 하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인종차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우리가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고정관념을 가지고 인종차별적 시선으로 영화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함정적인 요소들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초반에 크리스와 로즈가 그녀의 본가로 향다던 중 백인 경찰들이 갑자기 크리스와 로즈가 타고 있는 차를 검문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로즈는 마치 경찰들이 흑인인 크리스를 흑인이라는 이유로 검문하려 한다는 듯 크리스를 두둔하였고, 경찰들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물러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당연히 경찰들이 크리스가 흑인인 탓에 검문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영화 속 설정을 살펴보면 로즈의 본가 근처 흑인의 실종 사고가 많아서 경찰들이 흑인인 크리스를 불러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흑인인 크리스의 얼굴에 발리는 새하얀 면도 크림,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백인들, 하나같이 모두 검은 차에서 내리는 백인들, 빨간색 장신구들을 하고 있는 백인들과 작중 혼자서 파란색 옷을 입고 있는 크리스 등 색깔을 대비시키는 의도된 연출도 영화를 보는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스릴러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귀신과 같은 소재들을 사용한 것이 아닌 최면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사용하고 귀신보다도 무서운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로 공포를 자아냈다는 점은 <겟 아웃>을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영화들뿐만 아니라 스릴러 장르의 영화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겟 아웃>에서도 작은 아쉬움이 존재한다. 바로 크리스의 친구 로드이다. 작중 로드는 등장할 때마다 코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작품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크리스를 구해내는 데 결과적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현실성과 개연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다. 앞에서 이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할 때, 개연성과 현실성에 관해 말한 것도 이 이유에서 말한 것이기도 하다. 로드는 연락이 되지 않는 크리스를 구하려 경찰서로 가지만, 경찰들은 흑인들을 붙잡아 최면을 통해 성노예로 만드는 마을에서 크리스가 실종되었다는 로드의 주장에 로드의 말을 비웃는다. 그래서 결국 로드는 혼자 크리스를 구하러 가, 결국은 크리스를 구해내게 되지만, 로드가 크리스를 구하러 가는 과정과 그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 이 점이 <겟 아웃>에서 아쉬운 점이었다.
※<어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림자는 내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야 지당하다. 주인공 애들레이드(루피타 니옹고, 이하 애디)가 아름다운 발레 동작을 선보이면 그림자가 따라서 춤추듯이. 그러나 그림자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휘청이며 자신만의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애디를 찾아와 귀를 긁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실 너야말로 내게 묶인(tethered) 그림자라고. <어스>는 전형적인 공포 영화다. 날씨 좋은 시기에 휴가를 떠나면 아주 혼쭐난다는 것을 우리는 <호스텔>에서, <트루스 오어 데어>에서, 혹은 <미드소마>에서 이미 봤다. 한밤중에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집을 침입하는 경우는 <더 퍼지>나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에서 본 것 같다. 인물들이 통통 튀는가 하면 글쎄. 이 가족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우리는 그들과 구면이다. 애디 가족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국인’들이다. 꼭 심슨네 가족들처럼, 아둔한 아빠와 모성이 강한 엄마, 똑 부러지는 딸과 조금 덜 큰 아들의 조합은 영화 초반부에 이미 관객을 완벽히 영화 속 세계에 적응하게 한다.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 전형적인 가족이 전형적인 장소에서 전형적인 사건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나면 이 전형적인 영화의 공포는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어스>의 스토리는 전형적이지 않은 반전을 수반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사실 어린 시절 지상으로 탈출한 복제 인간이며, 레드야말로 지상 출신의 ‘진짜 애들레이드’란 것을 알게 된다. 레드와 사투 끝에 납치당한 아들을 구출한 주인공은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나고, 뒷자리에 앉아 진짜 애디가 길을 잃고 자신과 만나 뒤바뀌었던 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문득 아들을 쳐다보다가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아들은 늘 가지고 다니는 주황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가족이 탄 차는 계속 달리고 길에는 복제인간들의 퍼포먼스가 길게 이어진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찝찝한 공포감은 끝나지 않은 채, 손에 손을 잡고 선 복제인간들처럼 불길하게 늘어져 있다. 이 영화가 독창적인 지점은 침입자에 대한 공포로 시작해서 자신에 대한 공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야기 초반부에서 의문의 침입자는 나와 닮은 남이었다. 물론 얼굴이 닮은 기이한 자들에 대고 아들 제이슨은 “그들은 우리잖아. (They are us.)”라고 말하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 한번이라도 주인공 가족이 침입자들을 ‘나’라고 느낀 적이 있었나 싶다. 게이브는 에이브러햄을 처치할 때 주저했나? 제이슨은 플루토의 화상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나? 백인 친구의 집에서 그들의 복제 인간을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다. 친구의 얼굴을 한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고민은 일 분도 할 수 없다. 사유지를 침입하지 말라던 중산층 가족은 이제 다른 중산층 가족의 사유지에서 복제인간 일가족을 전멸시키는 전사로 거듭난다. 그들은 우리지만, 우리는 그들이 아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애디의 숨겨진 과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애디만이 죽어가는 엄브레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플루토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애디가 레드를 처치하는 장면에선 그녀는 웃으며 괴성을 지르는데 그 모습이 언뜻 지하인처럼 난폭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아들 제이슨은 안아주는 엄마에게 팔을 두르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엄마의 미소에 화답하는 대신 가면을 쓰고 얼굴을 숨긴다. <어스>의 공포는 여기에 있다. 공포를 야기하는 원인과 그것을 느끼는 대상의 경계는 일차적으로 서로 꼭 닮은 겉모습을 통해 흔들리며, 반전을 통해 완전히 전이되어 버린다. 나와 똑같은 존재인 ‘도플갱어’에 대한 공포는 사실 퍽 오래된 소재다. 이 소재를 가지고 가장 대중적으로 어필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나온 게 벌써 1886년의 일이니까. 이렇듯 나를 닮았으나 더 흉포한 존재, 말하자면 무의식 속 리비도에 대한 불안은 오랫동안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변주되어 왔다. 도플갱어 호러는 좀비나 언데드에 대한 공포를 닮았다. 한때 죽어 묻혔던 것들이 기이한 모습으로 귀환하는 좀비 호러처럼, 도플갱어라는 소재에는 내 손으로 목을 졸라 무의식 깊은 곳에 묻어 놓은 흉측한 나, 열화된 나, 어두운 나의 귀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어스>는 이 불쾌한 공포감을 극대화하여 귀환하는 자와 나 자신의 위치를 전복 시켜 버린다. 애초에 내가 귀환한 자다. 내가 바로 흉측한 나, 열화되고 어두운 자다. 그래서 관객은 애디의 시점을 공유하며 스토리를 따라가다가, 애디가 과거를 떠올리고 미소 짓는 그 순간 함께 미소 짓는 어정쩡한 처지에 놓여야만 한다. 당황스러운 이 순간이 이 영화가 선사하는 경험이다. 주인공의 시점이 도플갱어의 시점으로 급속하게 전환되고, 우리도 그 순간 도플갱어의 시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영화 속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하던 ‘저들’의 이야기가, 나와 나의 무의식 속 도플갱어인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지옥은 나와 나 사이의 가느다란 경계를 따라 존재한다. 그러므로 애디의 불길한 미소는 우리가 ‘진짜 나’라고 느끼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빼앗기는 순간이다. 조던 필 감독의 전작 <겟 아웃>이 신체 강탈의 공포를 담았다면 <어스>는 정체성 강탈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말 부분에서 인물의 정체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애디는 누구인가? 애디가 지하인이라는 이유로 이제껏 살아온 모든 일상을 부정해야 하는가? 그러나 애디라는 존재가 분명 따로 존재했는데, 애디의 이름으로 애디의 삶을 살았다고 그가 진짜가 되는가? 한편 레드는 가여운 피해자인가, 미친 사이코패스인가? 그러면 이제까지 애디를 응원한 나는 누구 편인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영화가 끝나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래서 <어스>는 무섭고 거북하다. 쿨한 음악과 강렬한 색감으로 무장했지만, 정체 모를 터널처럼 어둡고 끝이 없다. 영화 초반으로 돌아와서, 의미심장한 인상을 남기는 예레미야 11장 11절의 내용은 이렇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니••••••.” 아무렴, 우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이 내린 최악의 재앙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