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해협
- 감독
- 박기채
- 제작년도
- 1943
- 출연
- 문예봉, 남승민, 김일해, 독은기, 김신재, 김선초, 최운봉, 김한, 복혜숙, 김령, 김소영, 쓰바키 스미에, 서월영, 남홍일, 홍청자, 강정애, 이금룡, 박영신, 손일포, 이원용, 이효, 기노시타 후쿠에, 가네모토 겐바이
문화영화는 특정한 사상의 전파와 일반 대중의 계몽 혹은 지식의 전파를 증진할 목적으로 제작되는 각종 형태의 영화를 일컫는 용어이다. 보통은 관에서 주도하여 제작한 홍보영화와 계몽영화 등이 이러한 범주 안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영화의 상영은 관에서 조직한 활동사진반의 순회영사 등을 통해 무료로 상영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문화영화를 통한 시국선전활동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1939년 제정된 일본영화법 15조에서는 문화영화에 관한 규정을 두어 그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도 문화영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조선문화영화사, 조선문화영화협회와 같은 영화제작회사가 설립되었고 조선영화사와 고려영화협회 같은 기존 극영화제작사에도 문화영화부가 설치되는 등 기존의 영화회사도 문화영화 제작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문화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의 설립 역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문화영화 전용관의 설립은 기존에 영화관 출입이 어려웠던 학생 관객들을 수용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일본정부가 든 문화영화관 설립의 주된 이유는 정부에서 지정하는 문화영화 혹은 각 지방 장관이 문화영화로서 추천하는 영화를 학생들에게 공개하여 널리 구경시켜 지적인 면을 함양케 하는 동시에 정서 교육으로 많은 도움이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문화영화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서도 문화영화 관람 기회를 늘리기 위해 문화영화관 설립이 가시화 된다. 조선에서 문화영화관은 백화점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일반 영화관처럼 대극장이 아니어도 괜찮을 뿐더러 많은 관객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도 고려되었다. 당시 백화점 업계에서는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지속적인 불황을 타개하려 백화점 내에 극장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국의 문화영화관 설립 움직임과 맞아 떨어지면서 백화점 안에 영화관 설립이 추진된다. 1939년 서울의 백화점들은 상품선전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영업방식을 강구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인 백화점으로 알려진 미쓰코시(三越), 미나카이(三中井), 조지아(丁字屋) 등 남촌의 세 백화점은 연합하여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영화관을 지어 일정 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무료입장권을 제공해주는 계획을 세운다. 문화영화관 설립을 추진 중이던 조선총독부는 백화점 업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치하는 것을 허가해 준다. 총독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립, 많은 이들이 시국선전용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1939년 12월 23일,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경일문화영화극장이 준공되어 개장식을 거행하였다. 경성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이 영화관은 200석의 좌석을 가졌으며 어른 20전, 군인과 소학생은 10전씩 요금을 받았으며 매일 오전 10시 개관하여 <경일세계 뉴-스>와 <요미우리신문 뉴-스>와 같은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상영했다. 이 영화관에서 문화영화를 감상한 임화(林和)는 극장의 규모가 좁아서 기분이 아담하고 저렴한 가격, 상대적으로 짧은 상영시간(1시간 반), 아이들과 어른들 누구나 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프로그램과 같은 장점들을 나열한 후 북촌에도 조선어신문사가 운영하는 이런 문화영화관이 생기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문화영화가 극영화 중심의 재래영화의 신생면의 하나라면 문화영화극장은 영화흥행 및 감상에 새로운 경지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임화, ““뉴-스”와 만화 경일문화영화극장“, 《매일신보》, 1940.2.9.) 라며 문화영화관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남촌의 백화점이 적극적인 영업정책을 세우자 북촌에 자리한 화신백화점도 백화점 6층의 다목적 홀을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화관으로 개조하여 영업활동에 이용하기로 한다. 1940년 5월 28일 화신백화점 6층에 개관한 화신영화관은 경일문화영화관과 마찬가지로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비롯해 각종 선전영화들을 상영하게 된다. 1940년 11월 1일부터는 문화영화가 모든 극장에서 강제상영 된다. 아울러 조선 내에서 문화영화 제작도 활발해진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도 문화영화관의 설립이 추진되는데 1941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상인천역 앞의 400여 평에 현대식 건축물로 문화영화와 뉴스영화를 상영할 극장을 세웠다. 경일영화문화관과 화신영화관 같은 문화영화 전용관이 들어서면서 백화점 업자들은 극장을 운영하는 것에 더해 독점적 영화제작이나 영화배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 장기화를 이유로 영화산업의 신체제를 천명하고 독점화로 산업재편을 꾀하자 백화점업자들은 이 독점기업에 참여하게 된다. 1942년 경성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다나카 시계점을 운영하던 다나카 사부로(田中三郞)를 중심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발족했다. 이 당시 조지야백화점의 고바야시 겐로쿠(小林源六)와 화신백화점의 박흥식(朴興植) 등이 발기인 겸 주주로 참여하였다. 또한 문화영화관을 운영하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각각 독점적 영화배급사인 조선영화배급사가 설립될 당시에 자본금 총 15만원 중 각각 2만5천 원씩을 투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쟁선전활동의 주요한 장소로 큰 역할을 담당했던 문화영화관들은 해방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중 화신영화관은 일반상영관으로 전용되었으며 경일문화영화극장은 폐관 되었다. * [사진](상단) 미나카이백화점 뒷편 경일문화영화관 [ 자료 ] 《 매일신보 》 , 1939.12.24. 경일 ( 京日 ) 문화영화극장 준공되어 성대히 개관 본정 ( 本町 ) 삼중정 ( 三中井 ) 백화점 뒤에 짓기 시작하든 경일문화영화극장 ( 京日文化映畵劇場 ) 은 저간에 준공되어서 23 일 개장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 이 영화극장은 반도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는 전당으로서 각 방면에서 오래전부터 긔대하던터이라 개장하는 날 각 방면 인사가 만히 와 관람하얏는데 좌석은 200 명을 수용할 수 잇고 입장료금은 어른 이십전 , 군인과 소학생은 십전씩이며 매일 오전 열시부터 개관하는데 경일세계 『 뉴 - 스 』 와 독매 ( 讀賣 ) 신문 『 뉴 - 스 』 문화영화와 밋 만화 등을 상연한다고 한다 . ( 사진은 경일문화영화극장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3.07.23. 예술가들도 총동원 , 호화롭게 전개될 징병축하행사 오는 팔월 일일부터 일주일간에 걸쳐 전개될 징병제 실시 감사의 기ᄲᅳᆷ은 전 동아에 펼쳐질 것으로 이 경축행사의 감격은 바야흐로 반도에 물 ᄭᅳᆯ듯 이러나고 잇는데 경성에서는 조선연맹 , 경기도연맹 , 경성부 등 삼연맹의 주최로 문화행사를 거행하기로 되엇다 . ▼ 팔월 삼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경성운동장 육상경기장에서 조선영화배급회사 , 조선음악협회 , 조선축음기제조협회 찬조로 음악과 영화의 밤을 개최할 터인데 제일부 음악데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연주와 이인범 ( 李仁範 ) 씨의 국민가요 독창 , 현제명씨의 군가독창 등이 잇고 영화부에는 조선시보 , 일본 『 뉴 - 스 』 , 무적전차 ( 無敵戰車 ) 공의 신병 ( 神兵 ) 의 상영이 잇슬 터이다 . ▼ 그 이튿날 사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연극협회 , 조선문인보국회 , 조선영화제작회사 , 조선축음기제작협회 협찬으로 연극과 낭독의 밤을 열 터이다 . 영화극으로 조선해협 ( 朝鮮海峽 ) 의 상연이 잇슬 터인데 이 극에는 조영배우 일동이 출연하고 연극으로는 제일악극대 ( 第一樂劇隊 ) 의 『 격멸하고야 만다 』 일장의 상연이 잇게 되엿는데 참관 희망자는 이십육일ᄭᅡ지 왕복엽서로 조선연맹문화과에 신청하여 주기 바란다 . ▼ 그리고 미술과 문학전람회는 팔월 일일부터 칠일간 삼월 ( 三越 ) 백화점 조선 미술협회 조선문인협회 협찬으로 문인보국회 동인의 작품을 미술가들이 붓을 든 작품전시와 육해군에 관한 회화와 만화의 전람회를 개최할 터이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1.11.02. 고려영화 신작 풍년가 스틸전 ( 展 ) 정자옥 ( 丁字屋 ) 서 개최중 고려영화 신작 방한준 『 씨나리오 』 , 연출 金井成一 카메라 , 『 풍년가 』 는 저간 경성서 제작종료 하야 십월 중순경 방한준씨가 원판을 동경으로 가저가 전부 완료하야 래 ( 來 ) 오일 『 프린트 』 와 함께 귀성하기로 되엿는데 , 이에 압서 고영 ( 高映 ) 선전부에서는 지난 삼십일일부터 삼일간 확대 『 캐비네 』 백여점을 정자옥 사층 홀에 진열하고 『 풍년가 』 스틸전람회를 개최중이다 . 동 『 스틸 』 전람회는 연일 성황을 이루고 잇는데 오전 중에는 출연배우 김신재 , 최운봉 , 전택이 제씨가 『 푸로마이트 』 에 싸인을 해주기로 되어 잇는데 방금 신곡감사제 ( 新穀感謝祭 ) 로 풍년제를 각 기관에서 거행 중인 이ᄯᅢ 영화 『 풍년가 』 는 큰 의의를 가진 작품으로서 그 봉절이 자못 기대되어 잇다 . ( 사진은 스틸 전람회장 ) [ 자료 ] 《동아일보》 , 1940.05.28. 화신 ( 和信 ) 영화관 입팔일 ( 廿八日 ) 부터 개관 , 화신백화점 ( 和信百貨店 ) 에서는 뉴 - 스 영화관을 계획 중이엇는데 요즈음 준비가 되어 이십팔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상영영화는 내외 뉴 - 스 급 문화영화 등으로 장안 종로 일대에 영화오락기관의 한 거름을 앞서 뉴 - 스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제공하기로 되엇다 .
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
내가 손전 (孫傳)이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 내가 넘은 38선 >(손전, 1951)이라는 영화를 단체관람으로 보고 나서다. 그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북한에서 지주를 반동으로 모는 데 앞장섰던 청년이 귀순해 국군이 되어 먼저 월남한 지주의 아들과 함께 북진 대열에 참여했다가 전사한다는 이야기다. 이후 그는 < 공포의 밤 >(1952, 각본?주연)과 < 여자의 열쇠 >(1963)에 이어 < 쌍무지개 뜨는 언덕 >(1965)의 메가폰을 잡았다. 이 가운데 <쌍무지개 뜨는 언덕>을 제외한 두 편은 보지 못했으나, <내가 넘은 38선>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알게 된 손전 선생과 1980년대 초 인사를 나눈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인협회가 지방에서 주최한 세미나 자리였다. 그때 나는 연사로 참석했었다. 그러니까 그가 전성기를 보내고 제2의 영화의 길로 들어선 지 한참 지난 시기였다. 1부 행사를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에 그가 먼저 인사를 했다. 그 뒤 한번은 < 도쿄 이야기 >와 <맥추(麥秋)> 등 시나리오를 게재한, 일본의 어느 출판사에서 간행한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작품집>을 서명을 넣어 보내주기도 했다. 그는 달필이었다. 그는 배낭에 성경책과 영어사전을 늘 챙겨 넣고 다녔다. 이런 손 선생과 더욱 가까워지게 된 것은 내가 몇 년째 심사를 맡고 있는 청룡영화상에서 그가 특별공로상을 받게 되면서부터다. 1994년 12월 제15회 때였다. 이해 처음 1000만 원 상금이 걸린 특별공로상 부문이 신설되었는데, 시상식이 끝난 며칠 뒤 손 선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약속한 어느 호텔 레스토랑에 나갔더니 고맙다며 점심을 샀다. 솔직히 말하면 심사위원 대부분은 그를 단역배우로만 알고 있을 뿐 주연과 감독 경력이 있는 전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손 선생은 그 뒤부터 연말이면 연하장을 보냈다. 5개월쯤 지나서였을까. 차나 한잔하자고 해서 뵈었더니 메고 있던 배낭에서 원고 한 뭉치를 꺼내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읽어보니 영화에 대한 견해와 걸어온 자취를 기록한 원고지 300매 분량의 <배우는 누구나 될 수 있다>(부제 ‘나의 영화 인생 60여 년’)는 제목의 글이었다. 당시 ‘일간스포츠’나 ‘스포츠서울’ 같은 연예 스포츠 신문에는 배우들의 이야기가 연재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이 같은 지면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그의 글을 지면으로 소개하기엔 대중성이 떨어지고, 단행본으로 엮기엔 분량이 모자란다고 판단했다. 한 달 뒤 약속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자 일단 내용을 보충하고 분량도 늘릴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손 선생은 완성된 원고를 내게 건네지 못한 채 1999년 9월 8일 89세의 나이로 별세하고 말았다. 1910년 1월 27일 경상북도 대구 태생인 손전 의 본명은 손병철(孫秉喆)이다. 그는 손자까지 영화의 대를 잇게 해달라는 뜻으로 손전(孫傳)이라는 예명과 함께 손일포(孫一圃)라는 또 하나의 예명을 가졌다. 그가 영화에 처음 출연한 것은 스물여섯 살 때인 1936년 이규환 감독의 < 무지개 >의 삼촌 역을 맡으면서부터다. 이를 발판 삼아 신경균 감독의 < 순정해협 >(1937)에선 주연급으로 올라섰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조선영화사의 관제 영화 < 젊은 모습 >(1943), < 조선해협 >(1943), < 거경전 >(1944), < 병정님 >(1944) 등에 출연했다. 광복 후에는 < 똘똘이의 모험 >(1946)의 똘똘이(구민 역)의 아버지 역을 비롯해 < 민족의 새벽 >(이상 이규환 감독, 1947), < 조국의 어머니 >( 윤대룡 , 1949)에 출연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데뷔작인 < 무지개 >부터 < 똘똘이의 모험 >, <민족의 새벽>에 이르기까지 이규환 감독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전성기는 < 내가 넘은 38선 >을 정점으로 그 후광에 기대 명맥을 이은 < 쌍무지개 뜨는 언덕 >(1965)까지 14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이성구 감독의 < 일월 >(1967) 의 형사 역을 계기로 30여 년 동안 개런티 개념이 아닌 일당을 받는 단역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 한 >(1967), < 사랑 >(1968), < 역전파출소 >(1969), < 태백산맥 >(1975), < 장마 >(1979), < 안녕하세요, 하나님 >(1987), < 서울 무지개 >(1989)>, < 개벽 >(1991) 등 1500여 편에 그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한때 서울 창신동 언덕배기 2만5000원짜리 전셋집에 살며 단역배우 생활로 300만 원을 모으는 데 1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가 필자에게 건넨 원고에는 몇 가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그중 하나가 광복 전부터 영화인들이 크랭크인에 앞서 고사(告祀)를 지낸 관행이다. 조선영화사는 촬영에 앞서 반드시 가미사마(神樣) 앞에 스태프와 배우를 모아놓고 제를 올렸다. 정종, 팥밥(赤飯), 기타 음식을 차려놓고 예를 올리고 사원들에게 배불리 대접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 한 가지는 이규환 이 어용 영화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배경이다. ‘연조가 깊고 실적이 있었던’ 그가 조선총독부의 통제 아래 들어간 관제 조선영화주식회사의 감독 진용에 누락, 졸지에 ‘무직자’가 되면서 수원 탄광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규환 감독의 < 새 출발 >(1939) 기술시사회가 명동의 명치좌에서 열렸을 때 일본인 시나리오작가 니시키 모토사다(西龜元貞)가 들어왔다. 이를 본 이감독이 불청객이 들어왔다며 단호히 제지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이 사람이 조선영화사의 고문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보복으로 감독진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