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
- 감독
- 이상언
- 제작년도
- 1975
- 출연
- 허장강, 백일섭, 김형자, 정애영, 이향, 추석양, 백송, 양춘, 정희섭, 백소진, 홍순자, 박희숙, 박예숙, 라정옥, 권일정, 성명순, 조학자, 손전, 임해림, 신찬일, 이석구, 서정일, 임성포, 최준, 김신명, 이정애, 이백, 박용팔, 이경려
애니메이션 < 소나기 >는 참 의외의 작품이다. 원작인 황순원 작가의 동명 단편 소설 「소나기」가 오랜 시간 교과서에 실렸던 만큼 그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안재훈 감독과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는 이 유명한 한국 근대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소설의 문장과 행간의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케 한다. 무엇보다 첫사랑의 원형과도 같은 소년 소녀의 서정이 어떤 형태였는지,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목격하는 기쁨을 준다. 도시에서 전학을 온 병약한 소녀와 무뚝뚝이 시골 소년이 개울가에서 마주친다. 둘은 몇 번을 마주치고도 인사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다가 소나기가 내리던 어느 하루를 온전히 함께 보낸다. (소설을 읽을 때도 깨닫지 못했던 이 사실을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실감했다!) 산과 들을 쏘다니던 두 아이는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 때문에 서로에게 부쩍 가까워진다. 그날 이후 소년은 소녀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며칠 만에 핏기없는 얼굴로 개울가에 나타난 소녀는 곧 이사를 가게 됐다며 아쉬워한다. 설상가상, 소년은 어느 밤 부모님의 대화 속에서 뜻밖에도 며칠을 앓다가 변변한 약도 써보지 못한 소녀의 죽음을 알게 된다. 소년 부모님의 대화로 끝나는 소설 「소나기」의 엔딩은 이렇게 충격적이면서도 시적인 여운을 남기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 소나기 >는 그 여운을 소중히 다루면서 소나기처럼 스쳐 간 그 시절의 어떤 마음을 더해 그렸다는 점에서 놀랍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 억새풀밭 사이에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이 엔딩을 장식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문장에 지혜로운 상상을 더한 셈이다. 황순원 원작의 표현처럼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던’ 소녀 때문에 가슴 떨렸던 기억을 어렴풋이 간직한 소년. 그래서 소녀를 떠올리면 드는 감정에 제대로 이름 붙여볼 겨를도 없었던 소년의 마음이 억새풀을 스치는 바람을 따라 스크린에 번진다. 엔딩만이 아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애니메이션 < 소나기 >는 그렇게 아직 설익은 소년 소녀의 마음을 담는다.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는 소년에게 “이 바보!”하고 조약돌을 던지는 소녀의 모습이 보이고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릴 때, 그 시절의 어떤 감정은 아주 선명하게 다가온다. 사랑스럽게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 부드럽게 흔들리는 들꽃, 학교 종이 선명하게 울리는 운동장과 교실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그 감정을 증폭시킨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장면에서 소년과 소녀는 주인공인데도 크게 그려지지 않는다. 어떨 땐 풍경에 묻혀 있다. 소년과 소녀의 모습보다 하늘의 구름, 다양한 꽃과 나무, 개울물의 반짝임이 훨씬 자주, 훨씬 디테일하게 등장한다고 느껴질 정도다. 누군가에게는 자칫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 도전적인 연출은 애니메이터로서 안재훈 감독이 추구해온 지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소나기>는 표면적으로는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듯하지만 실은 이 땅에 태어나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어린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지녔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에 대한 부담을 안고 만든 이 작품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순간 스쳐 가는 소중한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삶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안재훈 감독은 이전에도 한국 근대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왔다. < 메밀꽃(필 무렵- 이효석), 운수 좋은 날(현진건), 그리고 봄봄(김유정) >이 그 시작이었다. ‘시즌 2’에 해당하는 < 소나기 >는 여름의 끝자락에 개봉해서 기대만큼 많은 관객과 마주하진 못했다. 국내 극장 환경에서 <소나기>의 개봉은 여러모로 도전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다양한 공동체 상영을 이어가고 있는 이 작품의 정성만큼은 많은 이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고다르의 첫 번째 장편 3D 영화 < 언어와의 작별 >에 대해 무언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0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한 번의 감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는 식의 편리한 변명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일단 보고 나면 그것에 관해 자꾸 무엇인가 말하고, 쓰고 싶게 만든다. 우리를 언어를 향해 돌려세운다. 그렇게 다시 돌아서서 언어와 마주하고 나면 고다르적 연상의 벡터를 따라 온갖 상념이 흐르고, 갈라지고, 또 퍼져나간다. 이건 작별(‘언어여 안녕’)의 말 한가운데 자리한 모음이 돌아서면 환대(‘언어야 안녕’)의 말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고 나니, 한국어로는 ‘언어와의 작별’보다는 ‘안녕, 언어’라는 제목이 영화의 무드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원제 ‘adieu au langage’는 고다르의 언어유희를 따라 ‘Ah dieux, Oh langage’(오 신들이여, 오 언어여)로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 그런데 왜 신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 호명되는 것일까? 왜 언어는 여전히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일까? - ‘a dieu, au langage’(신에게로, 언어에로)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작별, 호명 그리고 지향. D: 차원(Dimension) 고다르가 즐겨 인용하는 앙드레 바쟁의 금언 가운데 하나는 “원근법은 서구 회화의 원죄”라는 것이다. < 언어와의 작별 >이 3차원의 환영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입체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겠지만, 이토록 단순한 방식으로 3D의 개념을 전복하는, 혹은 혁신하는 영화가 될 거라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다르는 때로 (‘3D 안경’을 쓰고 볼 때) 좌우 양쪽 눈에 아예 서로 다른 이미지가 입사되도록 함으로써 중첩(superimposition)의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입체적이라기보다는 ‘입체파적’(cubist)으로 여겨진다. 두 대의 분리된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두 개의 눈에 각각 입사시켜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스테레오스코프의 원리는 고스란히 차용하되, 좌우 양안에 비치는 두 이미지가 반드시 시각적으로 유사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순진한, 하지만 매우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고다르가 3D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이미지의 특성에 대한 그의 오랜 사색의 노정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담긴 시각적 정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지란 사실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무엇보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상이한 리얼리티의 ‘관계’이자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그것을 통한 ‘생성’이다.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가 < 열정 >(1982), <리어 왕>(1987), < JLG/JLG: 12월의 자화상 >(1995) 그리고 < 영화의 역사(들) >(1988~1998) 등에서 즐겨 인용해 온 피에르 르베르디의 「이미지」(191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그것은 얼마간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리얼리티에 의해 생성되는데 그들 간의 비교가 아니라 조화를 통해서다. 이러한 두 개의 리얼리티의 관계가 멀고 진실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더욱 강력해지고 보다 감정적인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 유추(analogy)는 창조의 매개체이다.” 두 대의 카메라,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두 개의 눈이 지향해야 할 것은 시각적인 깊이의 환영이 아니라 유추를 가능케 하는 거리를 둔 둘(deux)의 관계로부터(만) 생성되는 정신적 이미지, 사유의 이미지다. 말라르메가 자신의 시에서 선언했듯,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불러낸다.”(Toute pensee emet un coup de des) 하지만,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지하지 못할 것이다.”(Un coup de des jamais n’abolira le hasard) 그리고 “아무것도 [...]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장소 밖에서는 [...] 아마도 [...] 하나의 별자리 [...] 를 제외하고는.”(rien [...] n’aura eu lieu [...] que le lieu [...] excepte [...] peut-etre [...] une constellation) 여기서 이어지는 생각, 주사위 던지기와 별자리. D: 주사위(Dice) < 언어와의 작별 >에 대한 예고편과도 같았던 3D 단편영화 <세 가지 재앙>(2013)에서 고다르는 ‘3D’의 ‘D’를 ‘재앙들’(desastres)로, 거기서 더 나아가 ‘주사위들(des)―별들(astres)’로 바꿔 읽었다. 말라르메적 상상? 물론이다.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말라르메의 시와 수리철학자 고트롭 프레게의 언급을 다음과 같이 (멋대로?) 포갠다. “프레게는 사유가 수(數)를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구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고다르는 왜 말라르메의 주사위―별자리에서 프레게를 떠올린 것일까? (혹은 프레게에서 말라르메로 간 것일까?) 혹시 프레게의 다음과 같은 언급 때문이었을까? “주사위의 네 눈(目)에 대한 표상에서 우리는 ‘넷’이라는 낱말에 대응하는 그 무엇이 나타난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 수는 자립적 대상으로도 외부 사물의 성질로도 표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는 감각적인 것도 외부 사물의 성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수 0의 경우 가장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0개의 별을 표상하려고 해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상상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 ‘별’이란 낱말이나 0에 대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지금 아무 별도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을 표상할 뿐이다.”(「산수의 기초」 제59절) <세 가지 재앙>은 세 개의 주사위를 통한 세 번의 주사위 던지기로 진행된다. (위 사진 참조) 의미심장하게도, 세 번째에 가서는 텍스트가 주사위들의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지 않고 그저 검은 화면 위에 떠오른다. (3D는 아직 그에 걸맞은 가능한 이미지 생성의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는 고다르식의 일갈일까?) 이 주사위 놀이 클립 영상은 1977년에 고다르가 안느-마리 미에빌과 함께 만든 12부작 시리즈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두 명의 아이들을 통한 프랑스 여행’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심지어 영상 위에 입혀진 내레이션까지 고스란히 가져왔다. “괴물의 진화는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미시적 사건들과 돌연변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개념은 시간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에서는 이 뒤로 “계속되는 주사위 던지기, 하나의 하부단위에 이은 또 다른 하부단위의 생성, 이러한 우연의 게임으로부터 괴물의 신체를 형성할 수십만 번의 연쇄작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태양계의 수명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 괴물들과 관련된 두 개의 가장 중요한 발명은 섹스와 죽음이다.”라는 내레이션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의 주사위 놀이가 세 개의 주사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3D 테크놀로지에 대한 숙고의 과정에서 고다르가 사후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에 따라 ‘괴물’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대중에서 디지털 독재로. 이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언어와의 작별 >에서 고다르는 (다시 세 개의) 주사위로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 다시 한 번, 근본문제(Grundproblem)에 대한 접근은 순진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D: 디지털(Digital), 0과 1이라는 거짓된 둘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디지털은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디지털 영화, 폭넓게는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사유는 텔레비전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맞닿아 있다. < 언어와의 작별 >에서 그는 블라디미르 츠보리킨이 텔레비전을 발명한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선출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츠보리킨이 텔레비전 시스템을 고안한 것은 사실 1933년이 아닌 1923년이다. 이러한 연대 착오는 두 개의 일견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을 몽타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영화의 역사(들) >에서 텔레비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오늘날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진단으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전 세계의 스펙터클을 허름한 침실들로 가져간다는 레옹 고몽의 꿈이 텔레비전을 통해 실현된 것이라면, 그것은 목동의 머리 위의 광활한 하늘을 엄지동자 톰(Tom Thumb)의 높이로 축소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문장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언어와의 작별>에서 한 등장인물은 스마트폰 화면의 아이콘을 엄지동자 톰이 길을 찾기 위해 사용한 조약돌과 비교한다.) ‘텔레-비주얼’(tele-visual)이 도처에 존재하는 것(독재)이 된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서이다. 고다르는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노이즈’에 대한 관심을 전면화하는 것으로 그에 맞선다. 디지털적 이미지가 우리의 보는 방식을 표준화한다면, 고다르는 디지털적 이미지 생산의 기제들을 총동원해 그것들을 충돌시키고 각각의 차이와 부조화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즉 디지털적 이미지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언어와의 작별>을 제작하기 위해 일곱 가지 다른 종류의 카메라 - 캐논의 DSLR, 파나소닉의 Lumix 그리고 ‘웨어러블’(wearable) 카메라인 GoPro에 이르기까지 - 를 활용했는데, 촬영된 영상들은 균질하게 마름질되지 않은 채 뒤섞여 가히 ‘시각적 노이즈’의 카니발이라 할 만한 광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도래하는 건, 적어도 예견되는 건, 오직 이 소란 속에서다. 적잖은 평자들이 <언어와의 작별>을 보며 스탠 브래키지의 < 독 스타 맨 >(1964)을 떠올렸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자연으로 향하는 통로로서 은유를 활용”(블레이크 윌리엄즈)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닮아 있다. 또 하나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D: 만남으로 개시되는 둘(Deux) 은유(metaphor)란 무엇인가? 그것은 응축된 픽션이다. 그것은 픽션의 한계이자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픽션이다. < 언어와의 작별 >이 하나의 시청각적 ‘실험’에 그치지 않는 것은 여기서 고다르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을 붙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두 커플에 대한 두 번의 같지만 다른 이야기라고 한 고다르의 말을 믿어야 한다. <필름 소셜리즘>(2010)에 출연한 바 있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고다르와 작업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고다르의 차기 작품에서 저는 어쩌면 호화 유람선 횡단에 참여한 철학자-강연자 역할을 맡아 한 장면에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다르에게는 사랑이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랑과 저항 사이의 접속에서 고다르와 저의 차이는 바로 멜랑콜리인데, 이것은 고다르에게 모든 것의 색깔을 의미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사랑 예찬」) <언어와의 작별>과 관련해서, 여기에 바디우의 다른 텍스트를 겹쳐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만남을 통해 개시된 둘, 사랑이 그 진리를 실행하는 둘은 그 자신에게 닫힌 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둘은 통로이고 중심점이며, 최초의 수적 성격이다.”(「베케트에 대하여」) <언어와의 작별>을 구성하는 한편 작품 곳곳에 산포된 여러 ‘둘’들, 영과 무한, 자연과 은유 그리고 고다르적 픽션에 관한 이야기는 이 영화를 다시 본 다음에나 가능하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남아 있다. 고다르적 멜랑콜리? < 언어와의 작별 >이 고다르의 고별사일까? 이 글에서는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고다르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원기 왕성하며 활력으로 넘쳐난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 네 멋대로 해라 >(1960)를 당대에 보았던 이들은 꼭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하고 멋대로 상상해 보곤 했다. 영화의 폐허 속에서 ‘영화 같은 무엇’의 섬광이 춤추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16편 영화천구 Celestial Sphere of Cinema (2013년 11월 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북극]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장-뤽 고다르, 2014 야만의 땅 Barbaric Land, 예르반트 지아니키안 & 안젤라 리치 루키, 2013 서유 Journey to the West, 차이밍량, 2013 물 속의 도시, 김응수, 2014 [황도] 시인 요아브 The Kindergarten Teacher, 나다브 라피드, 2014 도원경 Jauja, 리산드로 알론소, 2014 자유의 언덕, 홍상수 프랑스 공주 The Princess of France,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4 [적도] 더 홈스맨 The Homesman, 토미 리 존스, 201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 웨스 앤더슨, 2014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마틴 스콜세지, 2013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데이빗 크로넨버그, 2014 [남극] [TV 시리즈] 트루 디텍티브 True Detective, 캐리 후쿠나가, 2014 [필름 퍼포먼스] 간섭의 셀룰로이드 Cellule d’intervention, 메탐킨 평행 I~IV Parallel I~IV, 하룬 파로키, 2012~2014 사진측량, 변재규, 2013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요청한 것은 개봉작과 미개봉작을 모두 고려해 2014년 11월 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제작, 공개된 영화의 베스트 10 리스트를 꼽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있지 않은 이상, 지난 1년 간 나온 영화들을 신속히 폭넓게 접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고민 끝에 나는 가능한 이 설문의 취지를 존중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리스트의 각 ‘구역’이 (그저 ‘최고의 영화들’의 나열이 아니라)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지난 1년 간 내가 관측할 수 있었던 ‘영화천구’의 짜임을 추정케 하는 별자리들이 되게끔 구성해 보았다. (황도의 4편의 영화들 가운데 2편은 천구의 북반구 쪽에, 2편은 남반구 쪽에 자리할 것이므로, 관측자는 북극 쪽을 향하건 남극 쪽을 향하건 10편의 영화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관측자가 북극이나 남극 어느 쪽을 향하건 항상 보이는 것은 적도의 영화들이다.) 이 리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그간 미처 보지 못한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보려 하지는 않았다. 즉, 위 리스트의 영화들은 베스트 10 설문에 참여하게 될 것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고 편견이나 강박이 없이 본 것들이다. 또한 영화관에서 본 작품들과 (부득이한 경우) HD 화질로 모니터한 작품들 가운데서만 골랐다. 기회가 없어 보지 못했거나 적절한 환경에서 감상할 수 없었던 것들 가운데 특별히 다음의 영화들은 조만간 꼭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다.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 Horse Money>, 라브 디아즈의 <아프리오리 From What is Before>,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 조 단테의 <베링 디 엑스 Burying the Ex> 그리고 임흥순의 <위로공단>. 이 리스트를 작성하기 전(11월 13일 이전) 가장 최근에 본 개봉작은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였는데,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시리즈물 <하우스 오브 카드> 첫 번째 시즌에서 그가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처럼) ‘스타일적 장치이자 서사를 위한 구실로서의 냉소주의’가 지나쳐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여행의 출발지는 1939년이다. 1917년에 시작되어 1966년까지 이어진 존 포드의 영화 이력의 중간쯤에 해당된다. 물론 첫 작품에서 출발해 연대기 순으로 살펴보는 것이 무난하고 합리적인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망설여졌다. 향후의 모든 코스가 정해져 있는 여행은 뭔가 지루하지 않을까. 더 중요하게는 그 길은 우리가 경계하려 하는 진화론적 관점, 체계에의 유혹을 피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음 기착지를 알 수 없는 무작위의 여행이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1939년이라는 연도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 1939년인가. 단순한 이유 하나는 이 해에 세 편의 존 포드 영화가 개봉되었고, 그중 두 편이 존 포드의 10 베스트 목록을 작성한다면 도저히 뺄 수 없는 걸작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중 한편은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며, 다른 한편은 비교(秘敎)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표현주의적’ 영화다. 한 해에 한 감독이 이 두 영화를 연이어 만들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 영화는 < 역마차 >와 < 젊은 날의 링컨 >이다. (또 다른 한편은 < 모호크족의 북소리 >다) 이 두 편만으로도 존 포드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등재될 자격이 있다. 1939년은 존 포드의 이력에서도 특별한 해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포드, 1939년의 세 영화들 태그 갤러거는 약간 다른 의미로 1939년~1941년을 ‘영예의 시기’(prestige period)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7편의 영화는 모두 10개의 오스카상을 받았고(주로 < 분노의 포도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덕이긴 하지만) 34번 후보에 올랐다. 뉴욕 비평가협회는 3년 연속 그를 최고의 감독으로 꼽았다. 존 포드는 명실상부한 할리우드 최고 감독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이 시기가 특별하다면 그것은 < 역마차 >와 < 젊은 날의 링컨 >이 이때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편의 영화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직 존 포드를 만날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어떤 야유나 비하의 뜻도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와 작품이라도, ‘나’라는 단독자와의 만남에는 때가 있고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처음 본 건 20대 후반이었지만, 그를 ‘만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30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다른 이유 하나는, 최근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 변호인 >이 75년 전에 만들어진 < 젊은 날의 링컨 >을 바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영화들이, 만든 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것과 유사한 선택을 한 과거의 영화들과의 대화 자리에 초대된다. 영화사의 정전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영화들과 대화하고 긴장하고 불화하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비밀을 하나씩 펼쳐 보인다. 물론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위대한 예술이 지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아마도 그것의 영원한 동시대성에 있을 것이다. 오늘 말하려는 영화는 < 젊은 날의 링컨 >이다. 이 영화는 2013년의 한국영화 < 변호인 >과 마찬가지로 한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의 취사선택과 극적 디테일의 가미를 거쳐 하나의 영화적 허구를 구성했다. 나는 평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동시대인으로서 <변호인>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다른 지면에 썼다. (「씨네21」 942호 참조). 여기선 <변호인>의 표준적 선택에 비추어 <젊은 날의 링컨>의 특별한 선택의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두 영화는 외견상 공통점이 꽤 있다. 이는 주로 두 영화가 다루는 실제 인물의 공통점에서 비롯된다. 링컨과 노무현은 모두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내세울 만한 학력을 얻지 못했으며, 개인적 재능과 노력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변호사를 거쳐 유명 정치인 및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자신의 국민들에게 단순한 존경 이상의 특별한 감정적 애호(혹은 격렬한 거부)의 대상이었으며, 무엇보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 젊은 날의 링컨 >과 <변호인>은 많은 공통점을 지닌 두 인물의 변호사 시절, 그것도 그들이 변호를 담당한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기획의 유사성도 있다. 하지만 유사성은 여기까지다. < 변호인 >은 영웅설화의 오래된 표준 양식을 따른다. 여기서 영웅은 도덕적 진리의 예시자다. 갈등은 오직 그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놓여있을 뿐, 진리 자체는 이미 자명한 것으로 주어져 있다. 해당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은 이 진리를 기준으로 취사선택된다. 존 포드가 말년에 만든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하라.”는 이 양식의 적절한 요약이다. 전설에 부합되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 이것이 <변호인>의 선택이다. 네 아들 (1928) < 젊은 날의 링컨 >은 불가사의한 영화다. 앞에서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 영화엔 F. W. 무르나우에게 영감을 얻은 < 네 아들 >(1928)이나 < 사형집행인의 집 >(1928)과는 달리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이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고전영화의 규칙과도 거의 무관하다. 어떤 범주화도 난감해지는 괴이한 영화가 뜻하지 않은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영웅설화를 구성하는 극적 사건과 결단의 행위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사건과 행위에 포섭되지 않는 일화와 농담들, 표정과 몸짓들, 기운과 예감들, 그리고 빛과 음영과 풍경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이 잉여들이다. 반복해서 보면, 이 영화는 선형적으로 전개되기를 끝없이 망설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달리 말하면, 잉여들이 살아 움직이며 극적 사건들의 전개를 끝없이 교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고전영화와 모던영화가 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은밀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링컨의 주의회 선거 연설 교전의 한 가운데 젊은 날의 링컨, 정확히 말하면 헨리 폰다라는 배우의 육체가 있다. 그는 긴 다리와 팔을 허공에 느리게 휘저으며 망설이듯 움직인다. 첫 장면에서부터 그러하다. 1832년 일리노이 주 샐럼 지역에서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보이는 동료에 의해 주의회 선거 후보로 소개된다. 동료가 네거티브 연설을 열심히 하는 동안 프레임 안에선 보이지 않던 링컨이 다음 장면에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걸어나와 소박한 연단에 선다. 기댈 곳을 잠시 잃은 것처럼 보이던 오른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연다.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에 실린 느리고 아주 짧은 연설. “...저는 전국은행(national bank)과 내부 증진 시스템과 테러 방지를 지지합니다. 이것이 저의 가치관이자 정치이론입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정치적 신념의 소유자인지 잘 알 수 없을뿐더러, 그가 정말 정치가의 야심이 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네 쪽으로 넘어졌으니 법을 공부할게” 이후로도 그가 망설이듯 움직일 때, 그가 가려는 곳에 가기를 정말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잘 알 수 없다. 그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언가가 그를 이끄는데 그것이 무언지 그도 모르고 그를 보는 우리도 알 수 없다. 한때 사랑한 여인 앤의 묘비 앞에서 그는 나뭇가지를 세워놓고 혼자 중얼거린다. “내 쪽으로 넘어지면 마을에 남고, 네 쪽으로 넘어지면 법 쪽으로 갈게” 나뭇가지는 묘비 쪽으로 넘어진다. 다시 혼잣말. “네 쪽으로 넘어졌으니 법을 공부할게” 그리고 자문한다. “내가 네 쪽으로 살짝 민 걸까?” 수수께끼와도 같은 마지막 말을 기억해두면 좋겠다. 나뭇가지의 움직임에 그의 의지가 정말 작용한 걸까. 이 질문은 대답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의문문으로만 남겨져야 한다. 이 인물에게 운명과 의지는 식별 불가능하다.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망설임과 움직임은 식별 불가능하다. 우리는 편리하게 운명의 편에 풍경과 시간을 두고, 의지의 편에 각성과 결단의 행위를 둠으로써 일련의 대립항 다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이 영화의 영원한 내적 교전을 도해(圖解)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의 도해야말로 이 영화의 아름다움과 가장 멀어지는 길이다. 식별 불가능한 것은 식별 불가능한 것이다. 이 동어반복이 차라리 그 아름다움에 가까울 것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그것은 오프닝 크레딧 직후에 등장하는 시다. 젊은 링컨의 표현을 빌리면 “적게 말하고 많이 일하는” 어머니의 사무치는 물음들. 낸시 행크스가 귀신이 되어 사랑하던 아들을 찾으면서 내 아들 어디 있소? 그가 무슨 일을 했소? 내 아들에 대해 아시오? 키는 많이 컸나요? 재미있게 살았나요? 읽는 법은 배웠나요? 그가 마을로 갔나요? 그의 이름을 아나요? 성공했나요? 라고 물을 것이다 - 로즈마리 베넷 (낸시 행크스는 링컨의 어머니이며 그가 9살 때 죽었다) 혹은 이 시가 쓰인 화면 뒤에 어른거리는 나뭇잎 그림자이다. 혹은 그가 앤과 거닐던 강물이다. 어쩌면 강물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것은 귀신이 된 어머니의 들리지 않는 말이며(극 중의 링컨은 이 시를 보지 못했고 보았다 해도 이것은 시인의 상상된 말이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옛 연인의 육체다. 극 중 등장인물의 말을 빌리면 젊은 링컨은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듯 강물을 바라본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초반에 등장한다. 봄빛 가득한 강둑에서 빨강머리 처녀 앤은 링컨에게 법 공부를 권하며, 링컨은 그녀에게 구애의 말을 전하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떠난다. 미묘한 엇갈림. 강물이 그들 뒤로 고요히 흐른다. 그녀가 떠나자 링컨은 조약돌을 강물에 던지고, 강물에는 작은 동심원이 인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장면은 적막하고 충격적이다. 강물에는 험상궂은 얼음이 떠다니며 들판에는 눈이 덮여있다. 털모자를 뒤집어쓴 링컨은 꽃을 들고 앤의 묘비를 찾는다. 그 사이에 5년이 지났고 그녀는 죽은 것이다. 존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잔혹하고 아름다운 몽타주다. 링컨이 돌을 던진 행위와 얼음투성이로 변한 강물 그리고 앤의 죽음 사이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돌을 던진다는 우발적이고 사소한 행위 ‘바로 다음에’ 그 행위에 대답하듯 가혹한 일들이 벌어진다. 영화에서 무언가가 ‘바로 다음에’ 그 장소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엄중하며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그것은 벌어졌으며 되돌릴 수 없다. 의지와 행위가 개입할 수 없는 장대하고 고요한 흐름, 우리가 보통 운명 혹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압도적 표정이 그 순간 섬광처럼 스쳐 간다. 어쩔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그 거대한 역량 앞에서 젊은 링컨은 지금 나뭇가지로 운명과 의지의 식별 불가능성을 유희하고 있다. 헨리 폰다의 육체는 망설이듯 움직이고 < 젊은 날의 링컨 >은 주춤거리듯 진행한다. 그 망설임과 주춤거림의 시간 사이로, 어머니의 들리지 않는 음성, 앤의 그림자, 강물의 침묵과 변덕의 아름다운 흐름, 그리고 경박한 유머, 덧없지만 생동하는 행위들과 몸짓들이 활동하고, 영웅설화적 사건과 진리의 발화들과 행위들, 숭고한 소명과 고결한 의지가 그들과 몸을 섞고 수시로 서로 자리를 바꾸며 소란스럽고 더럽고 아름답고 고요한 음악이 된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젊은 링컨의 용기와 지혜만큼이나 그의 반칙(줄다리기 시합에서의)과 야비한 유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의 링컨>은 소명과 의지의 송가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훼손하거나 따돌리는 오점과 얼룩들의 난장이며, 그들 모두를 응시하는 어머니의 음성과 죽음과 풍경의 노래다. 그들의 소란스런 화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와 전설은 진리의 언명에 순종하는 정태(靜態)의 구조이지만, <젊은 날의 링컨>은 흐르고 번잡하고 활동하는 삶의 시학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 젊은 날의 링컨 >을 보고 뭔가 써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런 영화는 권위 있는 최종적 견해라는 걸 도무지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전문가도 보지 못한 걸 당신이 볼 수 있으며 어떤 전문가도 쓰지 못한 것을 쓸 수 있다. 태그 갤러거는 「JOHN FORD-The Man and His Movies」(1986)을 2006년에 고쳐 쓰면서 “<젊은 날의 링컨>을 지금까지 50번 넘게 봤지만, 아직도 새롭게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미학적 시대적 범주화도 초라하게 만드는 < 젊은 날의 링컨 >을 말하면서 산만한 도취가 아니라 뭔가 정리된 언어들로 끝맺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번잡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몇 마디 말을 덧붙여보자. 지난 회에 서부극에는 인물의 사적 시간, 역사적 시간, 풍경의 시간이 교차하며, 그것은 존 포드의 영화에서 잘 구현된다고 썼다. 그리고 존 포드의 비서부극조차 서부극적이라고도 썼다. 나는 비서부극인 <젊은 날의 링컨>에 대한 위에서의 어수선한 찬미만으로 이 말들이 약간은 설명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나는 앞으로 다른 존 포드의 영화를 말하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할 생각이다. 물론 여기서 역사적 시간은 여전히 애매한 말이며, 나는 어느 정도 수사학적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을 포기하긴 힘들다. 역사적 시간은 우리에게 이미 구현되고 알려진 시간이지만, 역사적 사실들을 다루는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 그 시간은 거의 운명과 유사한 무게의 그림자가 된다. 우리는 알지만 그는 아직 모르고 있는 어떤 종말을 향해 그는 걸어간다. 알고 있는 우리 앞에 모르는 그가 걸어간다. 전기 영화에서 그리고 서부극처럼 역사적 소재를 극화한 허구의 서사에서 역사적 시간은 우리의 지식과 영웅의 무지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것은 불안한 공기처럼 인물을 감싼 채 떠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 젊은 날의 링컨 >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를 아름답게 시각화한 다른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는 사건을 훌륭하게 영웅적으로 해결했는데도 웃지 않는다. 젊은 링컨이 구름 낀 언덕을 천천히 걸어가 프레임에서 빠져나가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표정, 먹구름과 비가 미래의 비극에 대한 암시라는 수사학적 해석은 명쾌하지만, 이 장면의 물질성을 말하진 못한다. 그것은 미래의 암시 이전에 지금 걸어가고 있는 그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의 곁에서 흐르는 이미지다. 역사가 기입된 허구 안에서 역사적 시간은 텍스트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활동하는 이미지다. <젊은 날의 링컨>은 역사적 시간의 이미지에 관한 한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