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멋대로 해라
- 감독
- 장 뤽 고다르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장 폴 벨몽도, 진 세버그, 다니엘 보랭거, 장 피에르 멜빌, 밴 두드, 장 뤽 고다르, 리차드 발두치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감독의 < 퍼스트 카우 >(2019)는 오프닝 타이틀 후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로 영화를 시작한다.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한국어 번역은 자연스럽지만, ‘man’은 한국어로 번역할 때 그 함의를 옮기기 위해 고심하게 하는 단어이다. man이 인간이라면 남성으로서(만) 인간이며, man이 남성이라면 인간 대표로서 남성(만)이다. <퍼스트 카우>는 블레이크에게,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20년대 서부 개척지라는 시공간에게 아무런 모순 없이 당연했을 인간-남성이라는 전제를 문제시하고 해체하는 시도를 한다. 규범적 남성성 외부의, 즉 ‘인간’ 밖의 남성의 우정이 전면화 되고, 그 우정은 (개, 도마뱀, 올빼미, 고양이, 소와 같은) 동물과 여성, 즉 비남성-비인간들과 관계를 맺는다. <퍼스트 카우>는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진술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의심한다. 쿠키의 첫 등장은 단순하지만 다정하고 경쾌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버섯을 채집하는 섬세한 손으로 제시된다. 노란 버섯들 사이로 몸이 뒤집혀 노란색 배를 드러낸 작은 도마뱀을 조심스럽고 친절한 손길로 도와준다. 이 다정하고 충만한 분위기는 곧 외부의 사운드에 의해 깨진다. 쿠키는 떠돌이 모피 사냥꾼들의 무리에 고용된 요리사다. 사냥꾼들은 쿠키가 정성스레 채집한 버섯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동물들을 잡아서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고 위협하듯 말하거나 툭하면 주먹 다짐을 한다. 쿠키가 이 ‘남자’들의 세계에서 환영 받지 못 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쿠키 자신도 비규범적 남성으로서 자신을 비애적으로 대하거나 이 세계에 안달복달하며 적응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남자들을 대충 따돌리고 자신만의 텐트로 숨어들거나 도망가버린다.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 부츠를 장만해 신고 남자-인간들의 미개척지를 걷는다. 한편, 쿠키와 우정을 나누는 킹 루는 상승을 향한 도전에 불타는 기업가 기질로 충만해 있다. 개척지의 남성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는 성정을 갖추고 있지만, 인종적으로 남성-인간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 한다. 킹 루는 올빼미가 쿠키 일행의 텐트를 내려다 보는 날 밤 벌거벗은 채 나타나고, 쿠키로부터 온기와 먹을 것, 쉴 곳을 제공 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연히 쿠키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의 작은 집으로 초대한다. 한참 숲길을 걸어 도착한 오두막에서 둘은 술을 나눠 마시고 킹 루는 장작을 패러 나간다. 오두막에 남겨진 쿠키는 잠시 어색해하다가 곧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쓴다. 이불을 털고 꽃을 구해와 오두막을 장식한다. 이후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 둘의 이러한 작은 일상들이다. 같이 먹을 것을 채집하고 집을 돌본다. 한 명이 빨래를 하면, 한 명은 낡은 옷을 기운다. 서부 개척 시대 백인-남성-인간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인간-남성성 구현의 실패나 그 폭력성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이전에도 많다. 그러나 그 실패를 보여주는 과정은 종종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매혹이나 열렬한 열망, 그리고 실현될 수 없음에 대한 비애, 자기연민을 동시에 노출한다. <퍼스트 카우>는 결론적으로 실패든 비애든 그러한 이상적 인간-남성 규범을 통한 남성성 탐구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이 두 남자의 이러한 필요에 의한 일상 노동으로 채운 시간을 보여주고, 애정 어린 다정함이 기반이 된 관계에 집중한다. 이 다정함의 관계는 인간- 남성의 규범적 관계를 전복하거나 감화시키기 보다, 즉 휴머니즘의 가치를 대체하기 보다 그 주변의 비인간적인 것들을 향한다. 쿠키는 ‘첫 번 째 소’(영화의 타이틀 롤!)의 우유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매일 밤 짜러 가지만, 소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닌 의존하는 공존의 자세로 소를 대하고 둘 사이에 애착이 형성된다. 영화에서 관객이 제일 먼저 보는 생명체는 개이다. 그리고 그 개 옆에는 여자가 있다. 개가 가장 먼저, 그리고 다음으로 여자가 이 둘의 오래 된 과거의 물질적 증거를 발굴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소년들이었던 것이 (감독의 전작 <웬디와 루시>(2007)를 떠오르게 하는) 개와 여자로 바뀌었다. 영화는 종종 개와 소, 고양이, 올빼미와 같은 동물들이 무엇을 바라보는 눈이나 얼굴, 그리고 그들 시선의 반대편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진행과 전혀 상관은 없지만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의 원주민 여성들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얼굴도 종종 포착한다. 즉,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지는 풍경들에는 동물들과 원주민 (여성들)의 시점이 포함되어 있다. 쿠키와 루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지만, 영화에는 원주민 말을 하는 여성 두 명이 등장한다. 원주민 촌장의 아내와 영국에서 온 지역 권력자이자 ‘퍼스트 카우’의 소유자인 팩터의 아내이다. 두 여성은 서로 긴장 관계인 남편들 사이에서 말을 전달하는 도구거나 이국적 장식품처럼 기능하다가, 남자들이 방에서 사라지자 마자 자리를 옮겨 가까이 앉고 긴장이 전혀 없는 친밀하고 즐거운 얼굴로 대화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번역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의 공기는 짐짓 대접하는 척하지만 허세와 과시, 긴장으로 가득 찬 남자들 사이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퍼스트 카우>는 이러한 다정함 관계와 비인간-남성적 시선들을 결코 이상화하지 않는다. 서부 개척 시대의 시간을 정복이 아니라 다정한 공존의 관계 비인간-남성적 시선들로 채우지만, 이것은 곧 부서지며, 영화의 시작부터 예정되어 있다. 1820년대로 가기 전, 영화는 현대를 경유한다. 관객은 두 주인공의 시체를 미리 보고서야 1820년대의 시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개가 시체를 발견하기 앞서, 제시되는 것은 넓은 강에 굉음을 내는 거대한 증기선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기차나 마차가 지나가던 풍경을 포착하는 오프닝은 감독의 전작들과 겹쳐지며, 또한 영화의 끝에 감독이 경의를 표했던 피터 허튼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이미지들은 자본주의 산업화에 의해 침범된, 조직된 자연이다. 그리고 ‘퍼스트 카우’가 배를 타고 지주 팩터의 소유지에 도착하는 모습은 이 증기선이 움직이는 모습과 겹친다. 쿠키가 공존과 애착의 관계를 소와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이 소는 등장할 때부터 개인의 사유재산, 가’축’으로만 의미를 가지며 소유권으로 통제된다. 킹 루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관점은 쿠키의 관점과는 달랐다. 비버를, 소의 우유를 가공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채로 있는 미개척 서부는 킹 루에게 아직 역사가 시작되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팩터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약탈권과 소유권은 보호되지만, 인종적 약자인 킹 루의 초기 자본축적을 위한 약탈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영토와 자원에 대한 독점 소유권과 강탈이 중요한 축을 이루는 초기 미국 개척 신화, 그리고 서부극과 다른 자리에서 서서 다른 시선들을 보여주지만, 역사의 진행에 대한 비관은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종착점은 개와 함께 떠도는, 최종적으로는 그마저 함께 할 수 없는 <웬디와 루시>의 삶이다. 초기축적에 있어 불평등한 관계로 출발했던 자본주의는 소유권과 그 침탈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규칙이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웬디와 루시>에서 웬디의 좀도둑질에 대한 마트 직원의 대사)며 웬디의 삶을 인간의 룰에서의 안착보다는 비인간 개와의 관계에서 애착으로 향하게 한다.
본 게재 원고는,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이자, 가족 영화의 대가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정의 내리길 반복한다. 덕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속 가족은 어딘가 평범하지 않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엄마가 다른 자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떨어져 사는 가족,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들이 바뀐 가족, 그리고 그 중 <어느 가족>의 가족이 가장 정상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짜 가족보다 더 진짜 같은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닮지 않아도, 피로 이어지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혈연이 다 무슨 소용인지,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시바타 가족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납치’와 아동학대를 당하는 어린아이를 ‘구한’ 것의 갈림길에 있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관객들은 전혀 범죄자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처지에서 공감하고, 그들을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진짜 가족과 그 사람들에게서 안전함을 느끼며 잘 살던 린(사사키 미유)과 쇼타(죠 카이리)를 억지로 돌려보낸 경찰에게 분함을 느낀다. 이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도, 아플 때 병원에 데려갈 수도,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도 치를 수 없는 불완전한 부모이고 가족이지만 우리는 이들을 보며 가족이라는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선 단순 피뿐만 아니라 많은 조건이 있음을 깨닫는다. 첫째,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 엄마가 자기에게 옷을 사준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맞고 살던 린에게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사랑하면 때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때린다’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부모-자식의 관계는 갑-을 관계와 닮아 있어 자식은 쉽게 ‘갑질’에 노출이 되곤 한다. 단지 때리는 것만이 폭력인 것은 아니다. 부모가 자식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선 무언가를 해야 한다며 강요하는 것이 가장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갑질, 폭력인데, 노부요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린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면 보듬어주고, 강요보단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 부모라는 것임을 알려준다. 둘째, 항상 함께할 것. 쇼타는 차 안에 방치되어 있었고, 린은 추운 겨울밤에 혼자 베란다에 나와 있었다. 한창 부모의 손길이 필요할 나이에 부모 없이 방치해 두는 것은 가족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꼭 한 번씩은 가족에게 상처받고, 버림받은 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선택해 가족이 되었다. “스스로가 선택하는 편이 더 강하지 않겠어? 유대라던가 정 같은 거”라는 노부요의 말을 떠올려보자. 사회는 이들을 원래 가족의 품에, 시설에 보내버리는 둥 이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려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비록 사회가 인정해주는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고 행복이었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이들만이 진정한 내 편, 내 가족이었다는 기억만큼은 누구도 우리에게서 훔쳐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듯 이들은 더이상 함께할 수 없는 ‘우리’를 기다리며 다시 함께할 꿈같은 날들을 기다린다. 진짜 가족보다 더 깊은 유대와 정을 느끼는 가족. 애초에 가족의 시작은 혈연이 아님에도, 가족은 무조건 혈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시바타 가족’은 돌을 던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반성하듯 비극적인 결말에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하다. “버린 게 아니라 주워온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노부요의 말에 경찰은 공감하지 못한다. 오히려 뻔뻔한 범죄자로 인식할 뿐이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그들 안에 껴서 그들의 생활을 바라보고 함께하며 보는 것을 사회는 알지 못한다. 실제로 이 가족에 대한 뉴스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어느 가족>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가? 세상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는 것을 단순 영화 한 편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의 또 다른 ‘시바타 가족’을 위해 이제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 불쾌한 요소들 절도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유사 매춘 행위를 통해 돈을 벌고, 납치를 돈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납치가 아니라며 황당할 정도로 뻔뻔한 이들을 우리는 왜 불쾌하게 바라보지 않는가. 일단 이것이 연민이나 동정은 아니다. 처음 린을 납치해왔을 때도 노부요는 돈이 되는 것을 데려오라고 딴지를 걸기도 했고, 린의 실종 뉴스가 나와도 방귀 뀐 사람이 누구냐고 장난치며 그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생각도 않았다. 쇼타가 도둑질을 하던 상점의 사장이 이들의 도둑질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듯 이들의 뻔뻔함에 속아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것을 범죄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범죄를 미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것이 좋은 현상인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독특한 제작방식 2018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작품은 스토리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도 스토리 만큼이나 놀랍다. ‘액션’을 외치기 전에도 계속해서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 생각하고, 더 좋은 영화를 만들려는 감독의 욕심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 아직 미완성인 시나리오지만 여름을 놓칠 수 없어 여름 장면만 먼저 찍은 것은 물론이고, 배우의 연기에 맞춰 시나리오를 수정하기도 한다. 또, 당시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이었던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안도 사쿠라의 연기, 특히 우는 장면의 연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앞으로 우리가 찍는 영화에 우는 장면이 있다면 안도 사쿠라를 흉내 냈다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말하며 안도 사쿠라의 연기를 극찬했는데 케이트 블란쳇이 말한 그 장면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안도 사쿠라가 “노부요는 한 번도 엄마라고 칭해본 적이 없어요, 그럴 기회가 있어도 엄마라는 단어를 쓰지 않죠”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두고 그것을 그대로 영화 속에 녹여낸 것이다. 독특한 미장센 영화에는 음악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독특한 소재답게 독특한 음악을 사용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특히 영화의 오프닝인 쇼타와 오사무(릴리 프랭키)가 함께 장을 보는 장면에서의 그 음악이 없었더라면, 지극히 평범한 가족의 장보기로 밖에는 안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뒤죽박죽 산만해 보이면서도 잘 어우러지는 집 안과 밖의 풍경은 전혀 다른 가족 구성원의 하모니가 잘 어우러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들이 따뜻한 가족이었는지, 뻔뻔한 납치범, 좀도둑에 불과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나름대로 사정, 상처를 안고 사는 어른이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어린아이를 진짜 부모보다 더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사랑해주었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유독 아동학대에 관한 뉴스가 자주 들려오는 요즘, 피해자 아이들에게 굳이 진짜 가족과 함께할 필요 없다고 얘기해주는 이 영화는 세상의 많은 ‘시바타’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넨다.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화에 관해서는 망설임이 더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남에게 지적받을 것도 없이 바로 나 스스로 순수한 영화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TV 프로그램의 AD와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시절을 거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본인의 영화 언어가 텔레비전 방언이 밴 변칙적인 언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스스로를 ‘순수한’ 영화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5월, 그는 <어느 가족>(2018)으로 제 71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영화제에서 전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가족 영화의 대가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 언어의 순도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그가 전하는 밀도 높은 감정일 것이다. 이별 후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이야기(<환상의 빛>), 뒤바뀐 가족에 대한 이야기(<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가 다른 가족의 이야기(<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어진 가족의 이야기(<태풍이 지나가고>) 등 줄곧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영화 속에 담아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도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도둑질과 납치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으로, 해석하면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가르칠 것이 도둑질밖에 없다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세탁 업체에서 일하며 주머니 속 물품들을 빼돌리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는 성매매 업소에서 여동생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가출 청소년 아키(마츠오카 마유), 열 살 정도 되어 보이지만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쇼타(죠 카이리), 죽은 남편 덕분에 연금을 받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와 함께 살아간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가족’은 하츠에의 연금과 상습적인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간다. 쇼타는 문득 노부요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건 훔치는 건 나쁜 일이야?” 잠시 고민하던 노부요는 쇼타에게 되묻는다. “아빠(오사무)는 뭐라고 했어?” 쇼타는 답한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래.” 한편, 시간이 흘러 취조를 당하는 노부요는 하츠에를 땅에 묻은 사실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정말 좀도둑 가족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다툼을 피해 밖으로 나와 있던 5살 유리(사사키 미유)는 방치된 아이였고, 이 가족은 그런 유리를 품었을 뿐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뭉쳐 서로를 보듬어주는 가족이 되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서 겨우 겨우,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게가 안 망할 정도로만,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가려 했는데 세상은 그것조차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처를 알아봐주는 존재 “팔 좀 보자꾸나. 여긴 왜 이러니?” 유리를 처음 만난 날, 하츠에는 유독 말라 있는 유리를 걱정하며 온몸에 난 상처를 살핀다. 상처에 꼼꼼하게 약을 바르는 하츠에의 행동은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다. 무심해 보이던 쇼타 또한 유리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 왜 났어?” “넘어졌어.” “그거 화상자국이잖아.” 쇼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유리에게 “나한테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리의 상처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제껏 겪은 내면의 상처까지 포함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츠에와 쇼타의 관심 덕분에 유리는 신체의 상처와 함께 마음의 상처도 거의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치유 받는 입장에 처해 있던 유리는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유리는 샤워하는 노부요의 팔을 보고 묻는다. “거기 왜 그랬어?”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팔을 내밀며 자신에게도 같은 위치에 상처가 있음을 보여준다. 얼굴이나 성격은 달라도 흉터의 모양이 꼭 닮은 둘은 정말이지 ‘모녀’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유리가 노부요의 팔을 쓰다듬는 이 장면은 결이 비슷한 단편영화 <손님>(2011)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손님>은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로도 불리는 윤가은 감독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손님>의 주인공 자경(정연주)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아빠의 불륜녀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죄 없는 어린 남매만이 있을 뿐이다. 남매 중 동생인 기림(송예림)은 이마에 밴드를 붙여주는 자경의 눈썹에 흉터가 있음을 발견한다. “언니 왜 그래. 아파?” 밴드를 붙이는 자경과 눈썹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는 기림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손님>과 <어느 가족>에서 ‘상처를 알아보는’ 행위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유리는 친엄마의 상처를 발견한다. 유리가 상처를 만지자 친엄마는 “만지지 말랬잖아.”라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다. 친엄마와 노부요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타난다. 만지면 아플 정도의, 그러니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이의 위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물론 아이의 상처 또한 보듬어주지 못한다는 것. 홀로서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각자 다른 프레임 속에서 취조 당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1998)의 장면과도 닮아있다. 화면을 꽉 채우던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혼자’가 된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의 분리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는 면회 씬에서도 적확하게 드러난다. 투명 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쇼타와 노부요는 사실상 같은 장소에 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들을 철저하게 떼어놓는다. 동그란 대화 구멍의 은색 테두리라는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고 노부요의 얼굴을 가두어버린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거 아닌가요?’라는 쇼타의 질문은 이제껏 쇼타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양쪽 손끝을 맞대고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주먹을 쥐어 얼굴에 콩. 훔친 물건을 숨기던 파란 가방 대신 책이 들어 있는 새 가방을 멘 쇼타는 이제 학교에 다닌다. 오사무 또한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영화 초반부의 쇼타는 유리에게 밀개떡을 사준다. 천국에 있는 유리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그러면 이제 잊도록 해.”라고 말한다. 이제는 쇼타와 유리가 노부요와 오사무, 그리고 야키와 하츠에를 잊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버스 창문 너머의 오사무가 사라지고 나서야 마침내 ‘아빠’라는 말을 내뱉는 쇼타, 쇼타네 가족들과 부르던 노래를 아파트 복도에서 홀로 부르는 유리.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나 호칭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가족들은 서로가 함께였던 순간들을 쉽게 잊지 못할 듯하다. 사실 <어느 가족>을 따뜻한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마냥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로 해석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보통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가족은 마음뿐만 아니라 돈 문제로도 얽혀있는 보통 가족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서로를 ‘선택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제는 홀로 서야 할 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비혈연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모여 있는 가족과 흩어진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