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또 하나의 새벽을 그리며)
- 감독
- 양주남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문정숙, 허장강, 맹만식, 장민호, 이기홍, 하지만, 박영태, 정철, 임동훈, 양일민
2002년 | 스튜디오박스 감독: 박찬욱 | 각본: 박찬욱 이무영 이재순 이종용 | 제작: 임진규 | 촬영: 김병일 | 미술: 오상만 오재원 최정화 | 음악: 어어부 프로젝트 CAST 동진: 송강호 | 류: 신하균 | 영미: 배두나 | 류 누나: 임지은 | 유선: 한보배 박찬욱 감독의 이른바 ‘복수 3부작’은 처음부터 3부작으로 기획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 복수는 나의 것 >(2002) < 올드보이 >(2003) 그리고 < 친절한 금자씨 >(2005)가 이어지면서, 마치 사후평가처럼 3부작이 완성되었죠. 그렇다면 <복수의 나의 것>은 그 시작인 셈인데요, 혹자는 3부작 중에, 혹은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서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 공동경비구역 JSA >(2000)의 큰 성공 이후 작품이라, 제작 전부터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는데요, 제작 발표회와 두 번에 걸친 현장 공개엔 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었습니다. 제작 발표회는 2001년 7월 24일에 열렸습니다. 장소는 종각의 국세청빌딩. 영화 제작 발표회가 열리는 공간으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곳이었는데요, 천장이 높기에 다소 소리의 울림이 있긴 했지만 나름 신선했습니다. 이날 ‘하드보일드’라는 장르 컨셉트가 공개되었고요. 기자 간담회에서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감정이 풍부한 영화였다면, 이번엔 반대로 건조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왼쪽부터 박찬욱 감독, 신하균과 배두나, 그리고 아역 한보배를 안고 있는 송강호입니다. 한보배는 이 영화로 데뷔해 최근까지도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활동중인데요,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꼬마가 이젠 20대 중반의 숙녀가 되었습니다. 제작 발표회 3주 후에 첫 촬영 현장 공개가 이뤄졌습니다. 공개된 장면은 거의 첫 촬영에 해당하는 지하철 역 장면. 버티고개역에서 이뤄졌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엔 대사 없는 신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 장면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동진(송강호)의 딸인 유선(한보배)을 유괴한 류(신하균)와 영미(배두나)는 몸값을 요구합니다. 이에 동진은 돈 가방을 들고 유괴범의 지령에 따르는데요, 영미는 조심스럽게 동진의 뒤를 밟습니다. 초췌한 모습의 동진입니다. 이 신의 차가운 그린 톤은 지하철 역의 형광등 80개를 갈아 끼워 만들어낸 톤이었습니다. 김병일 촬영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이 첫 작품이었습니다. 20대 초반인 1985년에 촬영 쪽 일을 시작한 그는 1990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2000년까지 외국에서 광고와 다큐멘터리 등에서 일했는데요, 충무로에서 ‘촬영감독’이라는 직함을 단 첫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며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촬영상을 수상합니다. 이후 < 중독 >( 박영훈 , 2002)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 이재용 , 2003) 등의 카메라를 잡았습니다. “<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2000)와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는 ‘내가 아니면 안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했던 작품이고, <복수는 나의 것>은 ‘나한테 이 작품이 온 게 천만 다행이야’라는 고마움을 느꼈던 작품이에요.” 배두나의 필모그래피에서 <복수는 나의 것>의 영미는 어떤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었는데요, 이 영화를 통해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급속도로 확장되었죠. 첫 촬영인 만큼 현장의 긴장감은 꽤 강도가 높았습니다.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송강호의 표정이 매우 심각(?)해 보입니다. 박찬욱 감독도 마찬가지고요. 이날은 자신의 분량이 없었음에도 신하균이 현장을 찾았는데요, 신하균과 송강호는 무려 네 편의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그 시작은 <공동경비구역 JSA>였고요, <복수는 나의 것>에 이어 <친절한 금자씨>에서 짝을 이뤄 카메오 출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박쥐>(2009)에서도 공연했죠. 하지만 가장 강렬하게 부딪혔던 작품은 <복수는 나의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까요? 배두나와 박찬욱 감독이 현장에서 파안대소하고 있는데요, 이 순간을 사진기자들이 놓치지 않습니다.
동시녹음 시대의 한국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우의 대명사는 고은정 일 것이다. 고은정을 모르더라도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라는 1970년대 영화의 대사는 익숙할 것이다. 각종 TV프로에서 패러디되어 마치 후시녹음 시대의 전형처럼 남아있는 그 목소리,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경아의 목소리가 바로 성우 고은정의 소리이다.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제대로 접하지 않았어도 그 시대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나 말투는 왠지 익숙하다. 고은정을 위시한 많은 성우들이 만들어낸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와 말투는 이 시기 한국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남아있다. 고은정은 영화 후시녹음은 물론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 문화영화의 나래이터 때로는 텔레비전 외화 시리즈 더빙과 텔레비전 방송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고은정은 1936년 2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6년간 일본에서 자랐다. [사진1, 2]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과 모친 김재순,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高犧鼎)과 모친 김재순(金在順),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채 6살이 안된 어린 그녀는 당구를 삼백 정도나 치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당구장에서 당구를 즐기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줏빛 카페트 위에서 연분홍 와이셔츠에 감색 망사 조끼 그리고 회색 스커트를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생모와 보낸 시간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영향은 크고 강렬했다. 음악과 미술에 조애가 깊은 어머니는 사별하기 전까지 어린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부지런히 키워줬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림에서 종소리가 난다 말할 만큼 충만한 감성과 관찰력을 지닌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헌신적이고 생활력이 강했던 할머니와 새어머니로부터는 오랜 세월 동안 방송과 영화계에서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근성을 배웠다. 그녀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망인으로 가족을 지켰던 강인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를 일컬어 시대를 살아낸 모성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에는 모친의 죽음을, 청소년기에는 한국전쟁과 부친의 죽음을 겪었고 전후 재건기 대학생 시절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목소리 하나로 시대를 풍미한 그녀 또한 집안의 강인한 모계혈통을 이을 만한 여성이라 할 만한다. 그녀는 1954년 KBS방송극회원 1기 (서울중앙방송극단 연구원 1기) 즉, KBS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한다. 라디오가 유일한 전파매체이던 시절, 인기 있는 라디오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 조차 영화 후시녹음에서 당시 인기였던 최초의 라디오드라마 <청실홍실>(1956, 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의 전후파 여성 동숙(성우 정은숙 연기)의 말투를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하니 라디오드라마 성우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고은정은 KBS방송극회원으로 선발되고 난 뒤 1955년 KBS 아나운서 시험에도 합격하여 8개월 동안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사진3] 1955~56년 KBS 아나운서시절, 국회부의장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장금자, 고은정, 강영숙, 라연수 이다. 어린 시절부터 웅변보다는 동화구연에 더 뛰어났던 그녀는 아나운서 생활을 8개월 만에 정리했다. 목소리에 배어있던 바이브레이션은 아나운서의 발성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은 다소 경직되고 보수적이던 아나운서실의 문화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발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후에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와 나래이션을 도맡아 했지만, 이제 막 방송에 데뷔해 연기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있던 시절의 그녀에게는 보도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어울렸다. 실제로 그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사진4] 1957년 KBS남산 사옥에서 찍은 KBS 방송극회원 1기생들. 왼쪽 뒤부터 김수일,고은정, 박용기, 김옥경, 윤미림, 오른쪽아래부터 이창환, 김소원, 심영식, 신원균 당시 KBS 방송극회원 동기생들은 영화를 보는 대신 그녀에게 영화 줄거리를 들으며 영화를 즐겼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그녀에게 영화 이야기를 들으러 가자로 통했을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 능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녀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는 후에 방송작가로 등단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구술한 사건과 경험들은 늘 흥미롭거나 아련한 이야기들이다. 그녀가 들려준 한국전쟁 경험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애틋한 우정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십대 문학소녀의 시선에서 전쟁과 피난의 여정은 친구와의 아쉬운 이별 이야기로 그려졌고, 9.28 수복 후 여군으로 생활하며 지낸 부산의 훈련소는 소공녀의 방으로 도치되었다. 물론 성장소설의 한 대목처럼 묘사된 그녀의 이야기 속에도 잔인하고 고된 현실은 존재한다. [사진5] 서울 수도여고 1학년 재학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사진. 왼쪽부터 고은정, 최도영, 최순림. 그녀는 9.28 수복 후 서울에서 여자의용군 2기를 모집할 때 예술대에 자원입대한다. 이때 동덕여고 무용부, 한성여고 밴드부가 단체로 입대했고 그녀를 포함한 수도여고 학생 4명 또한 중창단으로 들어가 병과 훈련과 예술대 훈련을 받았다. 당시 여자의용군은 정훈대, 첩보대, 전투부대, 예술대에서 활동했고 1, 2기생 중 우수자는 전선에 배치되어 현지 임관되기도 했다. 그녀는 1.4후퇴 때 의용군 예술대 대원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 영도의 학교건물에서 내무반 생활을 이어갔다. 위문공연을 하며 종군할 생각으로 연습과 훈련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여고생 4명은 내무반 건물 한 쪽에 책을 쌓아 소공녀의 방을 꾸미며 막막한 전쟁기를 버텨갔다. 그녀는 내무반에서 입은 부상으로 병가 제대를 하고 부산에 피난 와 있던 수도여고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여고생들에게 지낼 곳을 내어준 신부님 댁에 기숙하면서 장갑을 짜고 수를 놓아 교통비를 마련해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그 속에서도 친구와 함께 쓰던 좁은 방에 씨레이션 박스로 책상을 만들고 보리밥풀로 교복의 각을 세울망정 벽에는 그리어 가슨, 그레고리 펙,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사진을 붙여 놓고 창 밖 하늘과 연결되도록 해 서정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어려운 현실을 견디려했다. 전쟁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휴전반대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인솔하는 규율부였던 그녀는 인기 많은 경기고 대대장과 안면을 트고 YMCA 영어강좌에 함께 참석하는 등 설레는 순간들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녀의 전쟁담은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인 성장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6]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 사진. 왼쪽 아래 황양자, 고은정. [사진7]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휴전반대시위 중 규율부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진숙, 고은정 역사적인 사건을 정서가 도드라지는 개인사와 연결시켜 묘사하고, 감정이 고리가 되어 이야기를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방식이 그녀의 구술이 지닌 논리이자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구술 채록문에서 가령 한국전쟁에 관한 사건은 각기 다른 주제로 다른 회 차에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되기에 전쟁과 피난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면들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숙명여대에 진학하여 연극반 활동을 한다. 이때 선배의 권유로 우연히 지원하게 된 KBS방송극회원 모집에 합격하여 방송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어 친구와 함께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도 진학을 결심한다. 그래서 백병원에 줄을 서서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서라벌예대 입학원서를 내고 남은 돈으로 당시 한창 유행하던 핫케익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연기욕심 덕에 매일 정동의 KBS방송국과 남산 서라벌예술대학 그리고 청파동의 숙명여대를 발에 못이 박히도록 뛰어다녀야했다. [사진8] 1956~7년경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정동사옥 앞. 성우로서의 그녀의 기초체력은 연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고은정는 성우란 아름다운 목소리 뿐 아니라 연기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면도날처럼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말한다. 그녀는 끝까지 라디오를 떠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연기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뛰어난 성우로 자리매김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데뷔했을 당시 이미 전문 성우로 이름이 알려진 동료들이 있었다. 작은 녹음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젊은 에너지들이 경쟁하고 상처받고 번민하는 일은 빈번했다. 그녀는 방송국에서 연습하던 대본들을 주워와 매일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러 역할을 독학으로 연습했다. 그러던 순간 귀가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체 내부의 울림으로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듣는 소리로 인식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후 KBS 라디오드라마 <산넘어 바다건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7)의 미라 역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다. 이후 박남옥 감독의 남편인 연출가 이보라의 연기지도로 관습화된 연기와 언어가 아닌 현장의 연기와 실제 언어를 반영하는 훈련을 통해 KBS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에서 19살 경희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어서 KBS 라디오드라마 <장희빈>(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9)에서 독한 장희빈의 연기를 탁월하게 해내 10년 뒤 텔레비전드라마 <장희빈>이 등장하던 시기에도 그녀의 이름이 회자될 정도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9] 1959년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이다. 서있는 이들 왼쪽부터 성우 박동근, 백성희, 고은정, 정애란, 박순옥, 작가 이서구, 김소원, 오정환, 앉아있는 이들 왼쪽부터 나옥주, 오승룡, 장서일. 1959년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나온 사진 속 화사한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1954년에 KBS 성우로 발탁된 뒤 5년 만에 주연급 성우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50년대 후반 인기 라디오드라마가 방송 직후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절에 성우 즉, 라디오연기자였던 고은정이 동명 영화의 후시녹음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술자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 자신이 했던 19살 경희를 연기한 엄앵란의 목소리를 맡게 된다. [사진10] <동심초>에 미망인의 딸 경희역으로 출연한 배우 엄앵란의 목소리를 고은정이 더빙했다. 애초에 좀 더 큰 비중의 역을 추천받았지만 본인에게는 라디오에서 했던 역의 연결이 중요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작이 돋보이는 엄앵란의 연기가 마음에 들어 경희 역을 고집했다고 한다. 엄앵란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잘 살려준 그녀의 목소리 연기가 간절했기에 배우 엄앵란과 성우 고은정의 콤비 관계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엄앵란이 영화제 연기상 수상을 목적으로 후시녹음을 직접 했던 작품에서도 그녀의 도움과 보완이 필요했을 정도로 고은정은 엄앵란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두 사람은 적어도 영화텍스트 안에서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움직였고 때때로 개인사적인 궤적 또한 묘하게 겹쳐지기도 했다.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의 행복한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얼굴마저 닮아 보인다. [사진11]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이 축하연을 즐기고 있다. 숙명여대 사진동아리 숙미회에서 주최한 고은정과 엄앵란 사진전에서 보듯 대학 동문인 둘은 오랜 기간 동안 연기자로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대표적인 배우-성우 콤비로 자리매김한다. [사진12] 1960년대 초반 숙명여자대학교 사진동아리 숙미회의 엄앵란·고은정 사진전에 참석한 고은정과 엄앵란 1963년 8월 방송문화상을 수상하는 고은정은 이미 당시 최고의 성우였다. [사진13] 1963년 8월 15일 방송문화상 수상식 현장. 공보부장관 임성희, 고은정. 엄앵란 뿐만 아니라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 정윤희, 안인숙 까지 당대의 내노라할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는 전부 고은정을 거쳐 갔다. 영화 후시녹음에서 목소리 연기는 입모양에 맞춰 대사를 넣어주는 역할 뿐 아니라 배우들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연기를 완성시켜주어야 했다. [사진14] 1960년대 후반 남산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왼쪽부터 강부자, 고은정, 김순원. 1960년대 후반 남산에 있던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그녀의 표정을 보면 성우 또한 연기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영화 속 여배우의 표정에 소위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펑펑 쏟게 해달라는 감독의 제안을 받을 때면 여배우가 얼굴을 가리거나 커트가 바뀌는 순간을 노려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연기자가 대사를 실수한 채로 어영부영 넘어갈 경우 입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그 장면을 살려내는 것은 전부 성우의 몫이었다. 배우들의 겹치기 촬영으로 연기의 몰입도가 부족하거나, 빠르게 진행되는 촬영현장에서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은 후시녹음 단계에서 성우들의 연기로 보완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후시녹음 된 한국영화에서 배우가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대사가 대본과 맞지 않아 성우가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이고 또 컷이 바뀔 때 웃음소리 등이 이어지는 경우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아 목소리로 연결을 맞춰 준 장면들이라 하겠다. 남산의 한양녹음실 위층에는 다방이 있어 녹음하다 잠시 다방에서 쉴 때면 연예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하니 녹음실과 주변 풍경 또한 영화촬영 현장만큼이나 분주했던 듯하다. 때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고 더빙을 탁월하게 잘 해준 성우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역설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제작의 관행인 입도선매와 입도선매로 투자받을 수 있는 조건인 특정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그리고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지탱해야 하는 빠른 제작 속도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제작의 악조건은 촬영현장에서 부족한 부분을 후반작업에서 성우들이 메워주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성우들은 낮 시간에 라디오방송 녹음을 마치고 영화녹음실로 출근해 밤새 영화를 녹음하는 식으로 밤낮없이 일하며 1960~70년대를 보내게 된다. [사진15] 1963년 만리동 녹음실에서 러시필름을 보며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그러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전 마지막 순간에 숨을 불어넣는 그들의 역할은 영화 텍스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영화의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았기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그녀의 영화후시녹음 작품목록을 완전하게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과 엄앵란, 이창환과 신성일 등 성우와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딧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연하고 공공연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채, 타인의 연기에 목소리를 넣어주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그녀는 1983년도를 마지막으로 영화후시녹음을 그만둔다. 물론 198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도 동시녹음으로의 변화를 꾀하긴 했지만 장비, 자본과 제작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1980년대 내내 여전히 성우들의 후시녹음은 이어졌다. 연기에 갈증이 있는 그녀는 영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독보적이고 온전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라디오가 항상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사진16] 1963년 동아방송 개국 시 동아일보사 정문 모습. 그러나 방송계 또한 1960년대 초중반부터 민영방송국들이 대거 등장하며 성우와 탤런트를 확보하기 위해 전속제를 추진하다보니 KBS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고수해 온 그녀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 하자, 엄연히 성격이 다른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라디오가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안타까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디오 방송의 인기시리즈 <법창야화>(MBC, 최풍 각본, 고무송 연출, 1977)나 <고백>(MBC, 1975~76)같은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17] 1975년 2월 MBC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한 MBC 라디오드라마 <법창야화>팀. 뒷줄 왼쪽 세 번째부터 고은정, 최풍, 김현직, 변웅전, 고무송PD, 아랫줄 왼쪽 두 번째부터 최선자, 김성옥, 홍성민. [사진18] MBC라디오 1인 드라마 <고백>팀. 성우 고은정이 홀로 엮어 나가는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왼쪽부터 고무송PD, 첫 회 주인공이었던 가수 문주란, 고은정, 유현종 작가. 뿐만 아니라 인기 텔레비전 외화시리즈 <왈가닥 루시>(1971)의 루시, <사랑스런 지니>(1977)의 지니 역을 더빙해 텔레비전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1950년대 말 종각에 있던 한국 최초의 상업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에서 이순재, 김승호와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에 성우가 아닌 연기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목조건물인 HLKZ방송국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텔레비전 연기자로 활동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디오로 목소리가 널리 알려진 상태에서 1970년대 다시 텔레비전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일치시켜 활동해야 된다는 것은 부담이었다. 20년이 넘도록 라디오와 영화, 텔레비전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했던 그녀가 방송 매체의 변화와 보이지 않는 역할에 회의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1977년 작가로서의 이력을 새롭게 시작한다. MBC 라디오 각본공모에 <대니 할머니>로 당선되며 성우에서 작가로 자리바꿈을 시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12년간 동아방송의 동명 프로그램에서 직접 집필했던 방송 원고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 <고운정 미운정>을 출간한다. 이 책은 1996년에 다시 재간되기도 했다. 작가로 데뷔한 뒤 성우 일을 접고 세계를 돌며 취재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너무도 견고하여 작가로서의 활동은 성우의 명망 뒤에 숨겨지게 된다. 1977년 이후 그녀는 방송작가와 성우를 겸했고 영화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를 각색하고 정지영 감독의 권유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19, 20]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에서 각색을 맡았고 수명(정윤희)의 정신과 의사로 출연했다. 사실 그녀는 연극을 통한 연기활동을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왔다.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이보라 연출, 1958)와 <장희빈>(박동근 연출, 1959)으로 한창 바쁠 때에도 그녀는 제작극회 초기작인 연극 <불모지>(김경옥 연출, 1958)와 현대극회의 창립작인 연극 <칵테일파티>(이보라 연출, 1959)에 출연했다. 현대극회는 중앙방송국(KBS)과 기독교방송국(CBS)의 성우들과 작가 및 연출가인 이보라, 임희재, 조남사가 모여 만든 극단이다. [사진21] 1958년 7월 제작극회 4회 발표작 연극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 왼쪽부터 효과 최창봉, 건너 띄고 이두연, 박현숙, 조동화, 건너 띄고 작가 차범석 작가, 연출 김경옥. 아랫줄 가운데 노인 분장을 한 고은정, 아랫줄 오른쪽 끝 안평선. [사진22] 1959년 10월 공연한 현대극회 창립기념 작 연극 <칵테일파티>(T.S 엘리엇 작, 이보라 연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꽃을 들고 있는 이가 박용기, 고은정, 연출 이보라, 이미경, 박기선, 오승룡. 둘째 줄 안경을 쓴 이가 각색 윤병일, 최을선 가운데 위쪽 분장하고 꽃을 들고 있는 신원균, 이우영, 최난희. 1962년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의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966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오사량 연출)에는 나타샤 김역으로 1968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동굴>(유인형 연출)에는 유애 역으로 열연했고 1972년 7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1972, 권오일 연출)에는 첼레스티나 역으로 유인촌과 함께 출연했다. [사진23] 1966년 5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작, 오샤랑 연출) 중 한 장면. 왼쪽이 나타샤 역의 고은정이다. [사진24] 1968년 4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동굴>(김승규 작, 유인형 연출)의 한 장면. 왼쪽부터 김정철, 민지환, 고은정, 백성희. [사진25] 1972년 7월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막스 프리쉬 작, 권오일 연출)의 출연진. 왼쪽 상단 유인촌, 아랫줄 가운데 첼레스티나 역의 고은정, 오른쪽 옆에 최병학, 건너 띄고 이수나, 고은정 뒤로 돈 후안 역의 황일청, 그 오른쪽에 미란다 역의 노경자. 그뿐 아니라 막역한 사이인 최은희 선생의 배우극장 멤버로 꾸준히 공연을 올렸고 지방 순회공연까지 참여했다. 그녀는 성우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공적인 영역의 활동 또한 활발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성우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성우 에이전시를 만들어 처우개선에 힘썼고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성우, 작가, 배우,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전문성을 펼쳐왔다. 그러한 전문성과 노련함이 그녀의 구술채록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26] 1977년 단행본 『고운정 미운정』에 실린 작가 고은정의 소개 사진. 1950년 말 우미관에서 개봉한 서부영화들을 극장 영사실에서 더빙한 기억, 1971년 개봉 영화 <러브 스토리>(아더 힐러, 1970)의 영화홍보용 라디오드라마에 출연했던 경험, 영화후시녹음의 다양한 기술, 성우들과 영화감독들의 작업 스타일,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녹음 방식 등 무척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구술이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단 한 번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적 없고 영화와 관련된 수상을 해본 적 없는, 영화의 공적 기록과 역사에서 부재된 채 남아있는 그녀의 역할을 그녀의 목소리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영화 프로듀서란 무슨 일을 하는가’ 라는 주제의 칼럼을 써주지 않겠느냐는 원고 청탁을 갑작스럽게, 사무실 옆 테라스에서 받았다. 영화 프로듀서의 역할을 잘 모르는 독자들이 많고, 현장의 이야기를 다룬 글의 반응이 좋다며 편집자는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역에 있지도 않은 데다 PD로서의 경험이 많지 않아 이런 글을 쓸 깜냥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거절하다 그럼에도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 개인적으로도 영화계 지망생 또는 시네필들에게 많은 문의가 왔었고, 내가 이 글에서 주로 언급하고자 하는 한 편의 영화, < 소셜포비아 >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특이한 시작과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소견이 나를 지배한 이유에서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영화 제작은 사실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①시나리오 ②사람들(감독, 배우, 스태프) ③예산 ④시간 이렇게 네 가지의 희소한 자원만 있으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영화를 ‘찍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상당히 느낌이 다르다. 물론 모든 영화인들은 영화를 ‘영화’처럼 만들려고 하니까 당연히 쉽지 않은 작업이 되는 결과에 봉착한다. 위 네 가지를 숫자 표기까지 하며 언급한 까닭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영화 제작에서 중요함의 우선순위를 강제로 나열하기 위해서지만, 사실 각각의 이해관계가 촘촘히 얽혀져 있어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 프로듀서는 업무에 따른 역할과 책임에 따라 세부적으로 나뉜다. 영화의 제작 케이스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 종류에는 프로듀서, 기획 프로듀서, 라인 프로듀서(Line Producer, 우리나라에선 제작실장이라고도 불린다), 이그지큐티브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 우리나라에선 제작자 또는 대표님이라고 불린다) 등이 일반적이다. 업무가 구분되어 있지만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화 프로듀서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작자(일반적으로 제작사 대표)에게 제작 권한을 위임받은 1인 또는 다수의 프로듀서로서, 영화의 기획 시점부터 개봉까지 영화 제작과정을 총괄한다. 일반적 상업영화 기준으로 제작사와 시나리오, 감독, 배우 정도가 윤곽이 잡히게 되면 투자를 받거나, 거꾸로 투자를 받아 그를 통해 감독, 배우가 정해지는 등 유동적인 시스템 속에서, 투자 이후부터 개봉까지 시나리오 탈고와 캐스팅, 스태핑, 예산, 스케줄, 제작 진행, 후반 작업, 개봉까지 영화 제작 전반의 과정을 진행... ...역시 재미가 없다(사실 나도 잘 모른다). 프로듀서의 역할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 등은 영화 관련 서적과 인터뷰, 인터넷에 정보가 무더기로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대신하여 내가 PD로 참여했던 < 소셜포비아 >의 제작 과정을 제작기 형식으로 전하도록 하겠다. 2013년 여름 어느 날, 이전부터 여러 작업을 함께 해왔던 이성중 촬영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장편제작연구과정에 선발되어 < 소셜포비아 >라는 장편을 준비 중인데 프로듀서가 필요하단다. 일반적으로는 프로듀서가 촬영감독을 섭외하는데 이 영화는 학교에서 제작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학생인 감독과 촬영감독이 프로듀서를 찾았던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프로듀서를 하기에는 나의 경험이 스스로 염려되었거니와 당시 막 < 타짜-신의 손 >의 제작팀에 들어갔기에 그의 부탁을 고사했다. 그러나 <소셜포비아> 라는 제목이 주는 기묘한 매력 때문인지 시나리오를 읽고 싶은 마음에 도통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연속이었다. 결국 시나리오를 받아 단숨에 읽어보고서는 무릎을 탁 쳤다. 거칠고 어수룩한 초고였지만 영화의 소재와 스타일, 인물들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 영화 만들고 싶다’라는 강렬한 욕구가 용솟음쳤고 바로 감독과 미팅을 잡았다. 종각역 어느 카페에서 홍석재 감독과 이성중 촬영감독과 나는 70페이지가량 되는 초고를 놓고 둘러앉았다. 홍석재 감독은 당시 단편영화 < 킵 콰이어트Keep Quiet >로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므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이런 ‘덕력’ 가득한 시나리오를 쓰는 오타쿠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매우 컸다. 기대와는 다르게 꽃사슴같이 예쁜 외모는 나의 편협한 시각을 반성하게 만들었지만 당시 그의 행색은 영락없는 오타쿠 영화감독 꼴이라 나름 안심하기도 했다. 미팅을 주선한 이성중 촬영감독은 우리들 중 가장 연장자로 무척이나 아날로그 한 감성을 소유한 심성 탓인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근래의 디지털 문화와 과도하게 그 문화에 쏠려버린 인물들의 심리 등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는데, 때문에서인지 홍석재 감독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기이한 현상과 문화에 대해 나름 빠삭(?)하게 알고 있는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첫 만남은 시나리오 얘기보다는 시덥지않은 인터넷, 게임, 만화책 얘기만 실컷 하다가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 악수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영화 제작이 시작되었다. 나에겐 전도유망한 젊은 감독과, 20살 때부터 영화를 시작해 당시 영화 경력이 14년에 이르는 베테랑 촬영감독과, 지금 생각해도 너무 적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일금 육천만 원의 예산과, 다듬어지지 않아 아직 돌덩이 같은 시나리오와, 준비 기간과 촬영 기간을 포함한 5개월의 시간과, 동료 영화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기 위한 아이폰이 있었다. 예산이 적은 것 빼곤 꽤 괜찮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주승(왼쪽) 변요한 류준열 감사하게도 꽤 괜찮았던 캐스팅이었다는 평을 들었지만 최종 캐스팅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감독은 주연 중 ‘용민’ 역에 이주승 배우를 콕 집어 캐스팅 의사를 밝혔는데 나를 비롯한 제작진 모두가 동의했다. 가장 중요한 주연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신뢰할 수 있고 반짝이는 배우가 붙어주어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캐스팅이란 배우의 섭외뿐 아니라 제작진 안에서의 합의 과정까지 포함된다는 점을 상기하자. ‘지웅’역을 위해 꽤 많은 오디션과 배우 미팅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캐스팅 보드 맨 위에 있던 변요한 배우로 최종 낙점됐다. 당시 < 들개 >( 김정훈 , 2014)가 동경영화제에 초청되어 일본에 가 있던 변요한과 전화로 미팅을 잡고, 귀국하자마자 지체 없이 만났다. 주연배우들의 미팅 이후 계약까지, 캐스팅이 수월했던 건(눈물 나는 계약금의 설득은 수월하지 않았다) 시나리오의 공이 컸다. 극 중 처음부터 끝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건을 진행하는 ‘현피 멤버’는 그 수가 무려 일곱이었는데, 배우 한 명을 볼 때 어느 역할 하나를 콕 집어 캐스팅하려고 하기보다는 여러 캐스트 중 어디에도 들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캐스팅을 진행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류준열 배우를 ‘BJ양게’ 역으로 만나게 되었다(원래 류준열은 다른 역할로 오디션을 봤었다). 감독과 나는 BJ양게 역의 캐스팅을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었는데, 시나리오 수정을 위해 감금시켜놓은 감독 대신(결국 시나리오는 탈고하지 못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연출부가 진행한 오디션의 영상을 돌려보던 나는 류준열 배우의 BJ방송 진행 연기 영상을 보고 바로 감독에게 추천했고, 오디션 영상을 본 감독은 박수를 쳤다. 써놓고 보니 너무 순조로운 것 같지만 말 못할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노량진에서 경찰시험을 준비하는 인물들의 영화를 만드느라 촬영 이전부터 노량진에 수십 번을 갔다. 실제 노량진에서 경찰시험을 준비했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컵밥을 먹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져버린 노량진 육교를 수십 번 건너고, 500명의 학생이 한 강의실에 들어가서 수업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촬영부는 카메라와 함께 담요를 뒤집어쓰고 강의실 구석구석에 숨어 세 시간 동안 경찰학 강의를 들었다. 노량진이라서 좋았던 것은 3천 원으로 뷔페식 식사와 과일에 라면까지 마음대로 끓여 먹을 수 있는 ‘고시식당’이었는데, 많은 제작진들이 좋아해서 다행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단가가 나올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세 군데가 넘는 경찰서에 협조를 구해 촬영을 하다 어느 한 곳에서는 쫓겨나기도 했고, 옥탑방에서 자살 신을 찍다가 경찰에 신고가 들어와 영화촬영을 설명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예산이다. 매일 아침은 김밥이고, 현장에 간식은커녕 물 외에 다른 음료도 없었다. 배우, 스태프들 모두와 계약을 하긴 했지만, 계약서상 금액을 보면 허탈한 웃음이 났다. 발전차를 쓰지 못해 그 무거운 발전기를 모든 회차에 들고 다녔고, 가게에서 전기를 빌려다 길바닥에서 분장을 하고, 의상 실장은 배우, 스태프들의 옷을 빌리기 위해 그들의 빈곤한 옷장을 털었다(인물들의 설정이 고시생이어서 다행이었다). 지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지만 손난로를 추가로 살 돈이 없어서 ‘영하 10도 이하인 회차에만 손난로를 준다는 기준을 세워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다 울컥했다. 촬영 중 대기할 공간이 없어 24시간 맥도날드에서 밤을 새우다 쫓겨나고, 깎고 깎아서 세트에 들어갔지만 시간을 초과해 촬영 종료한 척 문을 잠그고 세트장 직원 몰래 조용히 찍다가 쫓겨날 뻔했다. 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예산이 1억 가까이 늘었다는 말을 듣고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억울했다. <소셜포비아> 촬영현장 영화는 절대 혼자서 만들 수 없다. 한 쇼트의 탑에서 엔드까지, 시각적, 청각적인 표현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한다. 각자의 분야에서 논의와 고성이 오가고, 서로 기대고 도와가며 영화를 만든다. 프로듀서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영화의 완성까지 이끌어 가는 스태프인 것인데 나의 경우에는 예산을 이유로 너무나 척박한 환경을 제공해 우리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역류성 식도염, 원형 탈모, 간헐적 혈변이 익숙해지는 때가 되니 영화의 촬영이 끝났다. 몇 번의 추가촬영까지 진행하고 후반 작업이 시작되었다. 서교동 한국영화아카데미 3과 1/2층에 가면 맥(Mac) 몇 대가 놓여있는 매우 좁은 편집실이 있는데, 각자 자리의 구획을 나누기 위한 파티션이 철창으로 되어있어서(거짓말이 아니다.) 몇몇 감독들이 마치 유치장과 같은 곳에서 감금당해 편집하는듯한 기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몇 개월간의 감금(편집)과 후반 작업이 끝나고 영화는 완성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프리미어 상영을 했다. 모든 상영이 매진됐고, 박수가 나왔다. 두 개의 상을 수상했고 잡지와 매체에 < 소셜포비아 >가 소개되었으며, 우리는 계속 트위터를 새로고침 했다. 홍석재 감독은 단편 영화들을 만들 때부터 영화제에 초청되어 수상하면 상을 꼭 두 개를 탔는데, 이쯤 되면 영화계의 홍진호, 또는 영화계의 용개라고 불려야 할 것 같다. 몇 번의 국내외 영화제를 다녀오고 해가 넘어가서 개봉을 하게 되었다. <소셜포비아>를 만들 당시 나는 우리 배우들에게 “수퍼스타가 될거야” 란 말을 습관적으로 말했는데, 그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다. 배우들이 수퍼스타가 된 덕분에 <소셜포비아>는 독립영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많은 상영관을 가지고 개봉했다. 저예산 독립영화였고, 배우들은 무명이었고 감독을 포함한 많은 헤드 스태프들이 장편 데뷔하는 작품이었다. 척박하고 궁핍했고 추웠지만 우리는 치열했다. < 소셜포비아 >의 프로듀서로서 부족하고 아쉬운 점은 너무 많았다. 프로듀서로 참여해 큰 즐거움이 한가지 있다면 처음 기대한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논하고 비평하며 현실 사회를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 감독과 촬영감독과 함께 논했던,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의도했던 대로 말이다. 또 한 가지, 함께 했던 동료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배우들은 스타가 되었고, 감독은 계약했고, 촬영감독과 미술감독, 조명감독은 또 다른 장편을 만들었다. 막내는 < 옥자 > 제작팀에 들어가서 브래드 피트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수집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담당자로서 마지막 한 마디. 우리의 영화유산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소중한 자료의 기증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