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온 - 원혼의 부활
- 감독
- 미야케 류타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카고 아이, 미나미 아키나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잘 알려진 대로 음악 애호가였던 롤랑 바르트는 피아노를 웬만하면 느리게 치는 편이었다. 언젠가 바르트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흐르는, 하프시코디스트 블랑딘 베를레가 연주하는 바흐 파르티타 4번의 쿠랑트를 듣고는 너무 빠른 속주에 자신이 알던 그 곡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쿠랑트는 그 어원(courir, 달리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애당초 쾌활한 춤곡인 터, 실상 바르트의 기준점은 느린 자기 자신이었다. *주1 달리 말해 대개의 곡을 느긋하게 연주했던 바르트가 베를레를 특히 겨냥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것이 이미 표준이 된 현대적 기준 자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한편 나는 이 불만을 발화하는 그의 위치가 퍽 재밌다. 그가 요구한 기준이 여타 프로페셔널 연주자의 ‘정통적인’ 해석이나 정련한 이론에 근거한 게 아니라 오로지 자의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그는 음악비평을 위시하여 악기 연주와 작곡까지 꾸준히 실행했지만 끝내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자신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이 일화 속 바르트의 발언은 비평가의 무리한 지적과 외부인의 ‘미흡한’ 불만이 동시에 발휘된 경우처럼 느껴진다. 그는 괄호에 넣어 덧붙인다. “(이것은 음악 애호가의 자만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애호가의 욕망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쿠랑트는 그 자체로 (분명 역사적 진실에 따라) 연주되었지만,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2 말하자면 내게 비평 또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충실도를 떠나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을 찾는 과정인 듯하다. 나는 바르트의 이 마음가짐이 내가 영화에 느끼는 불손한 태도와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꼈다. 사실 이미 정해진 원고 분량을 훌쩍 넘겼음에도 송고 후 며칠이 지나서 나는 이 글의 서두를 다시 쓰고 있는데, 이 코너의 기획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비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 지면에, 비평에 대해서도 비평가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은 주제였을까? 솔직히 내게 영화평론가로서의 자의식은 별로 없고, 더 솔직히 그럼에도 영화평론가로서의 무게감은 너무 크다. 하나에서 기인한, 거의 없는 것과 너무 큰 것이 내 안에서 이상한 대결을 벌이는 탓에 이걸 직접적인 글감으로 삼는 글쓰기가 다소 곤란했다. 물론 비평을 글쓰기에만 국한할 수 없는 시대다. 어떤 추천의 목록과 그 방식, 기획과 운영, 수입과 수출, 또한 동료를 모으는 일까지도 모름지기 비평가의 ‘활동’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허덕이지만, 이러한 수행을 시기와 맥락에 맞게 이어나가는 동시대의 탁월한 비평가들은 분명 여럿 있다. 다만 나는 앞서 언급한 사례에 공감한 바, 보다 소박한 의미에서 태도로서의 비평을 돌아보고 싶다. 결국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당연히 할 말이 있기 때문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바르트의 불평처럼) 납득할 수 없는 표준을 의심하고, 대상과 거의 무관한 나를 데려와서라도 나에게 효과적인 것을 찾는 일이다. 내 사유를 보편과 일반에 등재시키고픈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면) 당연한 소리는 덜하고, 의외의 얘기를 더하고 싶다. 연장선상에서 (이제는 왠지 자주 오용되는 것 같은) 정확하게 쓰라는 주문에 오기가 생기곤 하는데, 나는 평문이 정교해지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정확해질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돌고 돌아 영화로 간다면, 오염 없는 적확성과 유의미의 강박을 동력 삼지 않는 영화들, 도리어 먼지나 얼룩을 묻히고도 별로 개의치 않는 이상한 욕구의 영화들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나는 대체로 이곳 저곳을 오가며 힐끗 엿보는 사람이다. 2. “우리가 어딘가 로부터 듣는 것이 듣기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앞 에 있는 것을 )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3 사진의 존재론적 모호성을 설명하기 위해 청각과 시각의 차이를 논하는 스탠리 카벨은 듣기와 보기 행위에 있어 위치/방향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리는 분명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본다. 문제는 우리가 앞에 놓인 것, 의 앞면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 앞의 그(것)도 우리를 보고 있다면 눈을 마주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약간 초조한 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곤충처럼 겹눈을 지니지 않은 탓에 앞에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하고, 이에 더해 타자인 대상의 앞뒤 또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을 보고 있나? 먼저 나는 어떤 뒷모습을 떠올렸다.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인데, 첫째로는 어느 비장하고 숭고한 뒷모습이고, 둘째로는 그 뒷모습을 비장하고 숭고하게끔 보이도록 만드는, 그의 앞에 펼쳐진 풍경이다. 그 풍경은 인물에게는 전경이겠지만 원근법에 의해 우리에게는 원경이다. 우리는 인물의 뒷모습과 더불어 그가 보고 있는 것까지 볼 수 있다. 모든 레이어를 조감할 수 있는 감상자의 위치 덕에 주체적인 응시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못지않게 우리는 (카벨이 “회화는 세계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듯 그 본연의 완결성이라는 속성에 더해) 인간의 시점이 지니는 일방향성이라는 강력한 한계에 도착하게 된다. 시선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영원히 볼 수 없다(=모른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8) 옆모습(profile)에 관해 떠올릴 수도 있다. 내게 옆모습이라는 개념은 주로 피아니스트의 무대를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리사이틀에서 연주자는 관객에게 측면을 보인다. 이 측면의 무대화는 (프란츠 리스트가 기원이라는 통상의 오해와 달리) 얀 라디슬라브 두세크가 최초로 시도한 것이었는데,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시초 격인 그가 연주의 기본 위치로 옆모습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연주자의 입체적인 윤곽을 과시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는 손뿐만 아니라 신체 전부를 적재적소에 써야 이상적인 연주에 도달할 수 있다. 다채롭게 변모하는 표정과 흔들리는 상체는, 그러나 청중에게 ‘완전히’는 노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절반의 획득/결핍이야말로 연주자를 향한 호기심을 배가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음악의 기이한 위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연주자는 입퇴장 시에만 청중에게 인사할 뿐 음악을 만들 때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정면의 욕구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화면 분할이나 오버랩의 기술을, 무엇보다 몽타주의 기법을 터득한 매체라서 우리에게 그(들)의 얼굴을 짜잔,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시야를 조각내는 기계인 카메라로 담은 세계이다(인간의 신체를 모방하며 발전해온 많은 기계장치가 그렇듯 그 기원적 조건을 인계받았을 뿐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말대로 ‘겨우 오려낼 줄 아는 사물’을 통해 우리는 애당초 분절과 절삭을 거친 모습을 간신히 제공받을 따름인지라,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무한한 역량으로 긍정하기에는 어쩐지 미진함이 남는다. (가령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2015)처럼 공간의 삼면을 스크린으로 이용해 동일한 인물과 그 주변을 다양한 각도에서 동시에 바라보는 시도의 경우도 영사 과정을 사후적으로 활용한 것이며 이는 물론, 영화관에서 진행될 수 없는 작업이다. 결과적으로도 우리는 다면을 일체에 조망하지 못하고 각각의 화면을 띄엄띄엄 관람할 수밖에 없다.) <열병의 방>(아핏차퐁 위라세타쿤, 2015) 3. 앞에 있는 것을 본다는 감각이 유효하더라도 정면을 보지 않으면 어딘가 부족한 느낌은 영화를 볼 때 역시 우리를 자극한다. 일단 정면 쇼트가 없는 영화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부족한 정면’, 그로 인한 ‘마주침의 결여’를 도리어 영화가 핵심적인 동력으로 삼을 때 우리는 그 여집합을 풍족하게 껴안게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엿보기의 영화들 .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할까? 가령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 자체를 엿보기와 동일시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관음적 요소를 서사의 국면마다 개입시키는 < 괴인 >(이정홍, 2022)은 어떨까. <괴인>의 도입부에는 어두운 밤 중 두 남자가 어느 문앞에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꾸 비밀번호를 틀리는 그들은 이 집의 주인이 아닌 것 같다. 추후에 밝혀지지만 그들이 머문 곳은 개업을 앞둔 피아노 학원이고 두 남자는 그곳의 공사를 맡은 목수들이다. 기홍은 다음 날 공사를 마저 진행하기 위해, 고객인 원장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학원을 간밤의 잠자리로 이용한다. <괴인>(이정홍, 2022) 중 기홍은 눈을 감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날 그는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닥뜨린다(흥미롭게도 이 사실마저 얼마 지나서야 알게 된다). <괴인>은 주인과 침입자라는 대비된 설정을 반복해 제시하면서도 그 양분된 세계에 머무르기보다 인물들의 동선마다 회색지대를 깔아놓는데, 이 과정에서 엿보기의 충동을 여지없이 기입한다. 남의 집안을 훔쳐보기(그러다가 휴대폰을 떨어뜨려 한쪽이 까맣게 나간 액정 화면), 답사의 명목으로 공간을 힐끔거리며 관찰하기, 심지어 계절이 지난 어느 날 길을 걷다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어떤 얼굴을 알아보는 것까지. 자유로운 시선이 아니라 어떤 낌새와 기미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만 유유하게 바라보는 이 찰나의 행위는 인물들 사이에 완벽히 봉인되지 못하고 새어나가는(영화의 주요한 사태를 빌려 말하면 ‘누수되는’) 관계의 파열음을 누적시키며 끝까지 미스터리를 야기한다. 인물들은 편하게 대화하는 듯하지만 매번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 나누는 메시지에도 의중이 애매한 뉘앙스가 오가고, 오랜만에 식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조차 개인이 발휘해야 할 의무가 마치 감시하듯 맴돈다. 보기는 봤지만 정확히 본 것이 아니라 확정할 수 없는 사태가 연속된다. <괴인>은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모호한 확실함(혹은 그 역)’을 섣부르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일별’하기 때문에 성공적이다(그 점에서 하나가 기홍에게 구태여 다시 돌아와 자신이 자동차 지붕을 망가뜨린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로 기능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한편 화면상에서 시각적으로 거의 와해된 조건을 설정함으로써 도리어 관객에게 엿보기의 감각을 완전히 이양해버리는 사례도 있다. < 물안에서 >(홍상수, 2023)의 개봉 당시, 언론시사회에서조차 이 영화의 화질을 영사 사고로 착각해 관객이 문제를 제기한 해프닝도 있었고, 시종 흐릿한 화면을 두고 제목 그대로 수중의 느낌을 표현하려 한 것이냐는 농담 섞인 평이 돌기도 했다. 말하자면 참을 수 없는 화면의 흐릿함. (초반부 약간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초점 없는 화면으로 일관하는 이 영화를 관습적인 언어로 규명하기에는 아직도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영화를 보고 말하는 작업에서 거의 불가피한, 장면 내부에 배치된 시각적 요소들의 기술(記述)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난감할 수밖에 없다. <물안에서>(홍상수, 2023) 중 그러나 <물안에서>가 형상을 분명히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영화를 지탱하는 모종의 조건들을 아예 유폐한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본 걸까. 그냥 단순히 흐린 것을 깨끗하게 보는 드문 경험에 참여한 것일까(아니면 그 반대인 걸까)? 특기할 만한 지점 중 하나는 영화의 서사다. 홍상수 영화의 이야기를 쉽사리 정돈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데, <물안에서>는 시공간을 불확실하게 맞물려놓거나 복수의 구조를 경합시키는 시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서사를 파악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한편 우리는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 자세와 제스처 등 비언어적 표현들을 소상하게 살필 수는 없는데, 대신에 우리는 이들의 (이마저도 종종 ‘불성실’하게 처리된) 목소리, 그리하여 서술되는 이야기를 건네받게 된다. 정면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와중에 이들의 말은 계속되고, 심지어 관객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시시콜콜 얘기하는 그들은 우리에게 시각적 경험의 불확실성을 절감하게 만든다. 관객은 이 갑갑한 화면을 정면으로 (못) 보면서 이미지의 제한된 용법이 단일한 서사 안에서 문법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에 함께 놓인다. <물안에서>는 극영화에서 서사를 전달하기 위한 형식으로써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명쾌한) ‘화면’이 역할을 거부할 때, 이 불가결하다고 간주되는 요소의 찌그러진 상태 와중에도 기묘하게 지속되는 영화의 방향을 새롭게 일깨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밝은가, 어두운가. 또렷한가, 흐릿한가. 움직이는가, 정지해 있는가. 짓물러진 화면은 이 판단을 진정 불가능하게 하는가? 그렇다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 걸까? 열화된 화면을 보는 내내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확히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엿보고 있다는 감각이 피어오르는 한편, (못) 보기의 문제가 역설적으로 정말 본다는 것의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물안에서>는 듣기의 작업과도 연동하여 주장한다. 예컨대 남희가 새벽에 들었다던 “정신 차려!”라는 말은 어디서 들렸으며 누가 말했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 이 잠수된 것 같은 화면에서 그 존재가 해소되지 않은 청각적 정보가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 도망친 여자 >(홍상수, 2019)에서 대사로는 대두되지만 그 모습은 제시되지 않는 ‘3층’이나 ‘위층’, ‘지하실’의 존재(부재)가 떠오르기도 한다. 종장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서론에 언급했던 회화와는 전혀 다른 시대와 맥락에 놓여 있음에도 몹시 완결된 인상을 전달하는 뒷모습이다. 역시나 그를 돌려세우고픈 마음이 일지만, 흐르는 물소리가 화면을 메울 때 우리는 이곳이 영화의 종착지임을 직감하게 된다. 그가 점점 멀어지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엿보지 않으면 보는 것은 시작도 할 수 없다. *** 주1. 다음의 논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김주원, 「롤랑 바르트의 음악비평」, 『불어불문학연구』, 제136집, 2023, 144쪽. 주2. 롤랑 바르트, 변광배 옮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민음사, 2021), 전자책 377쪽. 주3. 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눈에 비치는 세계』(이모션북스, 2014), 53쪽 이보라(영화평론가) l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일단은 쓴다. 씨네21 영화평론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
2011년 10월,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가 연출한 첫 번째 장편영화 < 물고기 >가 처음 상영되었다. 이전에 7편의 단편영화를 찍었지만 국내 영화제에 단 한 번도 초청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감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3D영화인 <물고기>는 연출자인 내가 후반작업 공정을 감당해야 했는데, 너무 힘든 과정이었다. 3D작업은 많은 작업량이 필요한데다, 사실 촬영 전부터 제작사가 투자 이외에는 작품 제작에 관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평 남짓한 조그만 방에서 오랜 시간 작업하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다행히 부산에 초청된 이후, 로테르담국제영화제부터 밴쿠버국제영화제까지 열 군데가 넘는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며 토니 레인즈(영화 평론가), 거윈(로테르담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등 많은 해외 영화인들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또한 이광국 감독(< 로맨스 조 > < 꿈보다 해몽 >), 박정범 감독(< 무산일기 > < 산다 >), 이돈구 감독(< 가시꽃 > < 현기증 >) 등 멋진 작업을 하는 감독들과 교류하며 영화작업 외적인 행복감도 느꼈다. 이후 < 물고기 >는 2013년 1월에 개봉했고, 언론배급시사회와 유료시사회는 전부 3D로 상영했지만 정작 본 개봉은 3D 관을 하나도 잡지 못하고 소수의 일반 상영관에서만 개봉을 하며 500명을 간신히 넘는 스코어를 기록하고 말았다. 열패감이 심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사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2년간 <황사>라는 시나리오를 열심히 취재하며 썼고, 2년 넘는 작업 끝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그러나 결국 여러 지원 프로그램에서 떨어지고 제작하려는 사람도 없게 되자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방향을 잃어버리니 스스로가 점점 고립되어 갔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될 그즈음 이광국 감독은 굉장히 힘든 상황에서 < 꿈보다 해몽 >을 완성하였고(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내가 매일 혼자 방에 있는 것을 알고는 수시로 작업실로 찾아오며 대화상대를 해줬다. 이돈구 감독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실에 와서 재능을 의심하고 있는 나에게 큰 힘을 주곤 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할까.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영화를 찍고 싶다. 왜 찍고 싶을까? 영화를 통해서 내 고민을 표현하고 싶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내가 흥미 있는 방식으로 솔직하게 영화로 만들어보자. 또한 어차피 고독할 거라면 내가 모든 제작 공정을 전부 컨트롤 할 수 있는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며 시작한 영화가 바로 < 혼자 >이다. < 혼자 >라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자체에 몰입하며 여러 복잡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었다. 한참 그렇게 방에 틀어박혀 구상하고 있을 때 박정범 감독이 갑자기 차를 몰고 왔고, 함께 정동진독립영화제에 가게 되었다. 바닷가에서 돗자리만 펴고 잠든 다음 날, 나는 박정범 감독에게 “대낮에 살인을 저지른 괴한이 내 작업실에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목격자인 나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는데, 나는 죽지 않고 맞은편 정자에서 알몸으로 깨어난다.”는 기본 줄거리를 처음 이야기했고 그러자 “재밌겠네. 꼭 만들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있는 작업실의 맞은편 동네는 신당9구역 재개발지역으로 신당동에 마지막 남은 재개발 구역이다. 현재는 재개발과 도시재생 사이에서 첨예한 대립각에 놓여있다. 힘들 때 옥상에 올라가면 이 동네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데, 언덕 빽빽이 놓인 집들의 모습을 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왠지 아름답기도 하고 압도적이기도 하고. 힘들 때 동네를 보고 있으면 이 동네의 모습이 마치 내 뇌 속 같다는 느낌도 들곤 했다. 이러한 느낌들을 영화로 구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매일 그 동네를 걸어 다니며 고민하고 관찰했다. 그리고 그 복잡 미묘한 동네의 모습과 내 무의식의 흐름을 대입시켜 표현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움직이는 롱테이크를 사용하면 무의식의 흐름이 긴 줄기처럼 효과적으로 표현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칙은 CG는 가능한 사용하지 않고 본 촬영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감당할 것. 그리고 무의식의 흐름을 긴 줄기처럼 표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롱테이크 기법을 최대한 활용할 것. 이었다. 움직이는 롱테이크를 잘 구현하려면 안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이 필요했고, 이에 대해 고민을 해야 했다.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일단 테스트가 필요했고, 장비 렌탈을 하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직접 구비하고 되파는 방식을 선택했다. 우선 갖고 있는 물건들을 팔고 빌려 돈을 마련했고, 필요한 촬영 장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사진 설명] 블랙매직 포켓 카메라 이미지 출처: https://www.blackmagicdesign.com/products/blackmagicpocketcinemacamera 일단 작은 카메라를 사용하고 싶어서 블랙매직 포켓 카메라를 구매했다(마침 차기 제품이 나오기 전 반값으로 할인하는 특별행사 기간이었다). 일반적인 DSLR류 카메라는 압축코덱을 사용하여 색보정 시 열화가 발생할 확률이 높지만 이 카메라의 경우는 저가 카메라에서는 보통 채택하지 않는 무압축 코덱(RAW)을 지원하고 계조가 13스톱이기 때문에 색보정 시 여러 가지 유리한 점이 많았다. 대신 단점도 많았는데 일단 선예도가 뛰어나지 않고 환산화각이 2.88:1 배율이라 화각이 너무 좁아 12mm 렌즈를 사용해야 간신히 표준 사이즈로 들어올 수 있었다. 추가 화각을 확보하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결국 30%가량의 화각을 더 확보할 수 있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화각 확보도 확보인데 포커스 아웃에서 발생하는 망울 느낌과 아나모픽 특유의 푸른 가로선 등이 내가 고민하는 영화의 기호와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AG-LA7200 어댑터 렌즈 이미지 출처: https://youtu.be/WkmS-9MTyR8 저가형 아나모픽 렌즈를 구매하고 팔며 테스트도 해보고 여러 군데를 다니며 공부를 하던 중, 파나소닉에서 예전에 캠코더의 4:3 사이즈를 16:9로 바꿔주는 AG-LA7200 어댑터 렌즈를 발매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제품을 16:9 렌즈에 장착하면 2.35:1로 바꿔주는 효과가 생긴다. 또한 대다수 아나모픽 렌즈는 아나모픽 렌즈에서 포커스 조정을 한 번 더 해줘야 하는데 이 제품은 본 렌즈의 포커스만 조정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 제품은 절판된 데다가 국내 중고장터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 해외 이베이를 뒤지기 시작했고, 겨우 독일에서 판매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국내 도착까지 2주가량 걸렸는데 다행히 장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대신 이 제품이 원래 캠코더용이기 때문에 일반 렌즈에 장착하려면 여러 어댑터 링이 필요해서 종류에 맞춰서 구비해 놨다. 이 상태에서 여러 테스트 영상을 찍기 시작했는데 카메라가 너무 흔들려서 도저히 영상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메라 스테빌라이저 장비를 사용해야겠다고 판단했고 다시 조사를 하던 중, DJI 사의 로닌이라는 제품이 발매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전에도 몇몇 업체에서 자체적으로 짐벌을 제작하고 발매하였지만 감당할 수 있는 무게와 안정성에 있어서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 제품의 제원은 내가 원하는 수준에 있었다. 현장에서의 짐벌, 이지리그 사용 모습 짐벌을 구매하고 나서 다시 생긴 문제는 포커스 부분이었다. 짐벌에 올린 상태에서는 카메라 수동 포커스 플레이가 불가능 한 것이다. 수동으로 포커스 플레이를 하기 위해서는 무선 팔로우 포커스가 필요했는데 가장 유명한 바텍이라는 업체의 무선 팔로우 포커스는 가격대가 1000만 원 가까이라 너무 비쌌다. 그렇다고 중국 제품을 쓰기에는 소음문제나 연동문제에 있어서 불안한 부분이 꺼려졌다. 그때 프랑스 이베이에 올라온 영화 장비 경매에서 바텍 무선 팔로우 포커스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격도 원가의 1/10에서 경매를 시작했고, 관세 포함 1/5 가격 정도에 낙찰받았다. 물품이 배송되는 몇 주 동안 문제가 발생할까 봐 정말 피를 말렸는데 다행히 도착한 제품은 크게 문제가 없었다. 무선 팔로우 포커스가 장착된 무선 모니터 이후, 카메라에 무선 팔로우 포커스와 짐벌을 장착하고 테스트를 했는데 카메라의 움직임은 만족스러웠지만 영상을 모니터 할 수가 없어 저가의 중고 소형 모니터 2대를 추가로 구매했다. 그리고 무선 영상 송수신기와 여러 장비들을 장착하니 너무 무거워져 안정적으로 카메라를 지지할 수 있는 이지리그 등을 추가로 구매했다. 또한 골목길에서 계단을 올라다니며 촬영을 하려면 촬영자가 수동으로 짐벌의 움직임을 조정할 컨트롤러가 필요한데, 지금은 정품 발매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로닌에서 썸 컨트롤러가 발매되지 않아서 인도 이베이에서 개조해서 쓰고 있는 판매자를 통해 모사품을 구매하여 장착했다. 이러한 과정으로 기본 카메라 세팅을 했지만 촬영 과정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그쯤 김병정 촬영감독님이 작업에 참여하시게 되어 함께 준비할 수가 있었다. 스토리보드에 짜 놓은 모든 장면이 영상으로 가능한지 전부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는데 대부분의 장면이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많이 고민했던 미장센을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편의점 그래서 구현 가능한 방법을 찾기 위해 촬영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복면남이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초반 시퀀스와 편의점 장면 등 대부분의 장면은 많은 리허설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민이 텅 빈 동네를 걸어 다니며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장면은 기존 장비와 상황으로는 구현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맞은편 옥상에서 동네를 촬영할 경우 망원렌즈를 쓰면 노출이 너무 떨어진다. 그래서 ISO값이 높게 적용되어 어두운 곳에서도 촬영이 비교적 용의한 A7S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압축코덱을 사용하여 색보정 시 불리한 점과 낮은 스탑의 다이나믹 레인지, 카메라 간 질감 차이 등은 감수하기로 판단했다. 맞은편 옥상에서 반대편 동네를 걸어 다니는 수민을 관찰하듯 촬영하려면 망원렌즈를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아답터 적용 값과 표준 사이즈 대비 카메라 크롭 정도까지 포함해서 환산화각 2000mm 이상이 되는 렌즈를 사용하여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 장비들의 경우 렌탈해서 테스트했는데 미세하게 조절을 하지 않으면 인물을 따라가기 어렵거나 움직임이 틀어지는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김병정 촬영감독님과 여러 변수들을 고려하여 준비를 하고 많은 테스트를 해가며 확신을 가져갔다. 또한 정말 어려웠던 장면은 동네 전경을 비추던 카메라가 서서히 내려와 수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후, 택시를 타고 떠나는 수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이 동네가 수민의 머릿속이고, 이곳을 수민이 벗어나기 위해 택시를 타고 달아난다는 기호를 이미지적으로 심플하게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에 꼭 한 커트여야 했다. 지미집 팀이 와서 촬영도 해보았는데 원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 실패하게 되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내 의도를 구현해주려 많은 고민을 하시던 김병정 촬영감독님이 결국 청계천에 가서 철근과 와이어 등을 구매하여 수동 크레인을 제작하셨는데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장면이 나오게 되어 놀라웠다. 몇만 원도 되지 않는 제작비로 원하던 장면을 얻었던 그 날, 그 상황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계속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 장비를 사용하여 수민이 옥상에서 떨어지는 장면까지 촬영이 가능했다. 이 영화 작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이런 테크니컬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요 인물들의 감정적인 부분을 함께 섬세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비 세팅 이후에는 배우들과도 함께 프리 프로덕션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거쳐 영화 전체를 테스트 촬영했다. 보통은 배우들과 리딩 정도를 하고 본 촬영에 임하는 경우가 많지만 < 혼자 >의 경우는 실제 촬영할 장소로 가서 반복적인 리허설을 시도했다. 테크니컬한 것에 함몰되면 내가 의도하는 영화적 표현이 의미 없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작비도 직접 마련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압박도 심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생각을 다잡으며 왜 영화를 하고 싶었는지 초심을 계속 떠올렸다. 촬영 현장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2015년 2월 중순, 총 9회차로 영화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이후, 편집과 색보정은 직접 진행을 했고 전작인 물고기 때도 함께 작업했던 VFX 업체인 IOFX 지명구 실장과 오수진 음악감독님도 흔쾌히 본 작업에 참여해 주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또한 고맙게도 부산국제영화제 ACF 후반제작지원도 받게 되어 잘 마무리되었다. < 혼자 >는 2015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처음 소개되었고, 올해의 배우상( 이주원 )과 시민평론가 상을 받았다. 이후 로테르담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총 국내외 18군데가량의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여러 영화제에 참석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해외 영화인들이 전작 < 물고기 >를 기억하고 있었고 차기작인 <혼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감사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2016년 11월 24일 국내 개봉을 했다. 하지만 개봉관 수가 일반 독립영화에 비해서도 너무 적게 잡혀서 역시나 스코어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물고기> 때보다는 훨씬 많은 국내 영화인들이 <혼자>를 봐주었고 좋은 평가를 해주었다. <혼자> 포스터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보통 현실에서 살짝 빠져나와 범상치 않은 어떤 일들을 한도 없이 무책임한 자세로 즐기는 일이기도 하다. 우연치 않게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수민( 이주원 )으로 문을 여는 < 혼자 >는 범죄스릴러 영화로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들게 하다가 목이 없어져 버린 자기 자신을 보거나, 정면으로 비추진 않지만 망치에 머리가 박살 난 것이 분명한데 방금 전과 상관없어 보이는 어느 지점에서 눈을 뜨고 일어난다거나 심지어 발가벗겨진 채라든가 하는 식으로 관객의 얼을 빼놓는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감독의 의도를 생각해본다. 빠져나갈 수 없는 악몽을 보여주려 한 것인가? 그나저나 테이크는 왜 이렇게 긴 것인가? 물론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혼자>가 어떤 영화인지 말은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체험은 그렇게 기분 좋지만은 않다. 박홍민 감독은 준비했던 영화가 중단되고 약 2년간 고립되어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고, 그러던 와중에 자괴감도 심해지고 타인들과 교류하는 것이 힘들어질 지경이 되어가는 도중에 < 혼자 >를 기획했다고 한다. 원칙은 최대한 롱테이크를 쓸 것. 매우 적은 예산이라서 한 번이라도 NG가 나면 제작이 거의 빵꾸(?)가 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많은 리허설과 철저한 계산으로 어려움을 돌파했다. 그런데, 왜 꼭 롱테이크여야 했을까? 내가 본 < 혼자 >는 불운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하여간 괴로운 과거의 시간을 담고 있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상징적인 폭력과 괴로운 기억이 뒤엉킨 폭력의 기억 속에서 헤매는 누군가의 상념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아주 간단히 말해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시작점에서 살해당하는 사람은 수민의 여자 친구 지연(송유현)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중간에도 등장하고 마지막에도 등장한다. 그러니까, <혼자>는 어떤 계기로 인해 (일종의 버리고 싶은) 의식 속으로 진입해 이루어지는 영화가 아니라, 그냥 영화 자체가 일종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 관념은 영화의 후반에 등장하는 수민이 지연에게 들려준 꿈 이야기, 그리고 동네와 뇌에 관한 비유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점(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평범한 커플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시퀀스)이 이른바 리얼리티를 담보한 세계냐? 그것도 아니다. 차라리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토대 위에 서 있는 숏은 바로 마지막의 산동네의 전경을 비추는 숏이다. 불이 하나둘 꺼지면서 암전으로 진입하는 이 장면은 비로소 누군가의 생각이 멈추고 어둠으로 진입해버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것을 수면이라고 부르든 죽음이라고 부르든 자유겠다. 이런 면에서 아마도 롱테이크라는 형식이 필연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이 어떤 관념을 떠올릴 때 사건, 개념, 에피소드를 명확하게 핵심만 짚으며 찍어나가는 식으로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을 최대한 영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37컷으로 90분을 채우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일컬어 ‘스릴러’라고 표현하는 글들을 본 일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쪽은, < 혼자 >는 ‘스릴러’를 포함한 어떠한 장르의 문법의 틀에도 몸을 구겨 넣을 의사가 전혀 없는 영화라는 것이다. 되레 형식이나 문법에서의 제약을 벗어나면서 힘을 발휘하는 지점도 있다. 다소 거칠거나 지나친 것 아닐까 하는 설정이나 촬영들이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지만 감독의 비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납득이 간다. 맞다고 느끼는 쪽은, 보고 나오면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내 기분 탓이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데 그것이 오히려 영화를 통해 본 내 머릿속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영화에 표현되는 많은 이야기들이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을 자기혐오와 그것이 기어코 나를 뒤덮는 것에 대해 도망칠 수 없다는 불가피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문득 과거의 상념들을 호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무섭다. 그것도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