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 감독
- 주현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장원일, 정철, 이유한
< 광주비디오: 사라진 4시간 >( 이조훈 , 2020)은 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을 담은 ‘광주비디오’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80년 광주에 대해 한국 언론은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대학가와 성당에서 비밀리에 상영했던 ‘광주비디오’ 덕분에 사람들은 조금씩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광주비디오’가 하나의 버전이 아니었다. 영화는 다양한 버전의 ‘광주비디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쫓는다.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은 이제 중년이 되고 초로의 노인이 되었다. 40년 전의 이야기를 하는 그들의 눈빛은 하나 같이 그때 그 시간에 가있다. 그 눈빛과 함께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재현이 되어 관객을 그 시간으로 데려가 준다. 당시는 비디오를 만들고 복사하고 보는 과정까지 모든 과정이 목숨을 내놓아야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팩트를 따라 움직이는 저널리즘 다큐멘터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광주비디오 : 사라진 4시간>은 기억과 기록 그리고 시간이 투쟁하는 장이다. 주인공들의 인터뷰를 통해 비디오를 제작하던 과정과 그 시기를 따라가지만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던 주인공들이 어떤 마음으로 미래를 담보하면서 까지 그렇게 했는지 묻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주인공들의 목소리, 숨소리, 눈빛,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공간, 그들이 기억을 더듬는 모습 자체로 왜 그렇게 까지 했는지 답해 준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은 어느 한순간에 닿아 있다. 광주에서 최초로 군인이 자국민을 향해 발포하던 순간. 감독은 다양한 버전의 ‘광주비디오’와 기록물 속에서 발포하던 순간에 대한 기록을 쫓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발포된 순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사라진 4시간. 여전히 광주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록의 부재는 존재의 근거가 된다. 기록은 기억을 촉발하기도 하고 확장시키기도 또 기억을 나누어 연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진력으로 덮고 누군가는 애써 찾는다. 하지만 진실은 감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에 시간은 피해자의 편이 된다. 영화는 흥미롭게도 전두환씨가 89년 12월 31일 5공비리특별위원회 출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가 과연 광주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전 국민의 이목이 쏠려 있던 시간, 전두환씨는 위원들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증인선서도 없이 자신이 준비한 ‘자위권 발동이 가능했다’는 내용의 발표문을 읽고 자리를 떠난다. 가해자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전두환씨가 회고록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법정에 출두하고 나오는 장면이다. 이제 가해자는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 반성이 없는 자리에 거짓이 들어찬다. 반성을 위해서라도 기록은 필요할 수 있다. 감추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투쟁은 언제나 치열하기에 최근 활동을 시작한 5.18진상조사위원회는 공식적으로 10번째 조사기구다. 영화는 마침내 찾아낸 도청 옥상에 있던 기자에게 당시 발포 사진이 있는 지 묻는다. 하지만 그는 확인할 수가 없다고 답한다. 사진을 더 찍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가지의 아쉬움 한숨 속에서 우리는 진실을 마주한다. 영화가 주인공들에게 무슨 마음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묻지 않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형형하게 보여줬던 것처럼, 광주항쟁 기록의 사라진 4시간을 찾아 떠나는 외향을 갖추었지만 광주민중항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 4시간은 존재하고 가해자의 기록이 아닌 피해자의 기억으로 진실은 구성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부터 <광주비디오 : 사라진 4시간>은 또 다른 ‘광주비디오’가 된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이야기는 대부분 특정한 인물이 나오고 특정한 사건이 나온다. 감독은 특정한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이 자신의 경험들을 링크 시켜 인물과 사건을 이해하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든다. 가끔은 친절하게 길을 닦기도 하고 간혹 무심하게 길을 내기도 하고 공들여 길을 숨겨 놓기도 한다. 소통을 위한 길을 만드는 것은 그렇게 영화를 만드는 것이 된다. 명소희 감독의 < 방문 >(2018)은 감독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다. 자신의 이야기이자 엄마와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엄마와 외할머니의 이야기다. 지극히 사적인 관계의 이야기지만 관객은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며 명소희 감독의 이야기에 ‘방문’하게 된다. ‘하고 싶었던 일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이 되어 버린’ 순간, 감독은 엄마를 떠올리고 자신이 그렇게 떠나오고 싶었던, 엄마가 있는 춘천으로 향한다. 그리고 관객은 세 여자와 기억을 만나게 된다. 기억은 이미 지나 손댈 수 없는 과거의 일이지만 얄궂게도 역동적인 사고의 영역이다. 어떤 기억은 또렷한데 어떤 기억은 존재 했는지도 모르게 흐릿하고 심지어 모호하다. 어떤 기억을 건져 올려 어떤 사고를 해야 할지 몰라 우리는 기억 앞에 종종 무기력해진다. 그래서 어떤 기억은 지워버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능동적인 선택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소화 안 되는 음식을 먹었을 때처럼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는 시간을 지나 일상 속에서 잊혀진 듯 보인다. 특히 해석해낼 경험이 없고 나눌 방법도 모르는 아이의 사건은 쉽게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나게 된다. 하지만 덩어리 채 넘겨 버린 기억은 옅어지지 않고 밀려나지도 않으며 어느순간 눈앞에 나타나 현재를 멈추게 한다. 엄마를 만나러 가면서 시작하는 <방문> 이지만 감독은 엄마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기이하게도 멀리서 훔쳐본다. 짧은 컷이지만 감독은 길을 내고 있다. 무언가를 묻고 싶은 것도 같고 눈치를 보는 것도 같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 엄마와의 거리가 그대로 담기며 엄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외할머니에게 외면당했다. 딸이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외면당한 외할머니는 그대로 감독의 엄마인 딸을 외면했다. 엄마는 외면 받았지만 외할머니의 주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렵게 떠났지만 삶의 무게가 밀려 외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감독의 카메라는 엄마와 외할머니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묘하게 감독과 엄마의 관계를 암시한다. 또 다른 길을 만들고 있다. 식당을 운영하는 엄마는 역에서 춘천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관광지를 알려주며 식당을 홍보한다. 손님들에게 상냥한 엄마는 카메라를 든 딸에게는 퉁명스럽다. 인터뷰를 거부하다가 억지로 답을 해주는 엄마는 살갑지 않다. 삶의 고단함일까 생각될 즈음 오빠와 엄마가 다정하게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감독은 사진 속 엄마의 표정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이라며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시 외할머니와 엄마의 관계를 떠올린다. 외할머니에게 심한 잔소리를 하는 엄마는 남동생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외할머니를 다그치지만 그 안에는 연민과 서운함이 자리하고 있다. 감독과 엄마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처럼 할머니와 엄마의 거리도 좁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엄마를 만나기 위해 춘천을 방문하는 모습 사이사이 가족이 살았던 춘천의 공간들이 자리 잡는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정교하게 만나, 꿈속에서도 떠나는 상상을 했던 춘천은 흩어진 기억들이 모아지고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계기로 작동한다. 조금씩 감독은 또 다른 길을 내고 있다. 감독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감독의 기억과 만나게 된다. 한번쯤은 들여다봤을 엄마와 나의 관계, 그 관계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들여다봤을 엄마와 엄마의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또 누군가의 엄마가 된 감독은 수면 아래 덩어리 채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감독은 어릴 적 성추행 당한 기억과 먹고 살기 위해 사건을 묻어두길 선택한 엄마와 마주한다. 엄마의 첫 등장이 그러하듯 감독은 엄마에게 묻고 싶었을 수도 있다. 왜 그 사건을 묻었는지. 감독은 사건을 묻은 엄마를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혹은 자신이 그 사건 때문에 아프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런 순간들이 있다. 이해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순간들 말이다. 명소희 감독의 <방문>은 자신의 마음의 풍경을 외면하지 않고 솔직하게 그런 순간들을 보여주며 소통의 길을 만들었다.
세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부분 존 버거에게 빚을 졌다. 그중에서도 평등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사회구조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계기였다. 평등을 구현할 때 ‘기회의 평등’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다면 인간은 평등해질 수 있을까? 존 버거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존재의 평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존재만으로 평등한 사회는 뭘까? <있는 존재> < 고요수업 >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은 ‘거리’라는 영화적 장치들을 통해 ‘존재가 평등’한 사회에 대한 힌트를 준다. <있는 존재>는 제목으로 많은 것이 설명된다. 있는 존재로서의 트렌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독 친구인 주인공은 자신이 성 소수자인 것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 커밍아웃 한 이후의 관계의 변화,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감독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힌트를 준다.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만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감독은 주인공과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인 엄마, 친구, 감독까지 등장시켜 관계의 거리를 담아낸다. 한 화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등장하는 사람들 간의 거리는 매우 밀접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그 밖은 여전히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밀접한 거리는 역설적이게도 있는 존재를 없는 존재로 여기는 현실을 상상하고 인식하게 만든다. <있는 존재>는 ‘거리’를 통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것이 평등의 시작이라고 조용히 이야기한다. < 고요수업 >은 동생에게 한국 대학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익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학과를 없애는 학교에서 배제된 학생들이 있다. 길들이기 위해 교권을 빼앗는 현실에, 없는 존재가 된 강사들이 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현실에 주석을 다는 감독의 내레이션이 있다. 그리고 분할 화면이 있다. <고요수업>의 분할 화면은 다른 컷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한 컷을 잘라서 만든 것도 있다. 분할 화면은 검은 테두리로 분리되어 있다. 과거의 장면과 현재의 장면이 동시에 등장하지만 그 거리와 시간만큼의 안타까움이 존재한다. 한 컷이라도 분할해서 쓰이는 장면에서는 소통되지 못하는 현실이 담긴다. 분할 화면이 쓰이는 부분은 존재가 부정당하는 순간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감독은 나지막한 내레이션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사람들,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현실, 자신의 권리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평등한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절망적이라고 말한다. 간판도 없는 골목 모퉁이 세탁소의 주인 부부는 23년간 일하던 곳을 떠나야 한다.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은 세탁소가 문을 닫기 며칠 전부터 시작된다. 감독은 멀찌감치 떨어져 오래된 골목 모퉁이에 자리 잡은 세탁소와 주인을 담는다. 세탁소는 자체로 골목이다. 화면 안에는 세 개의 선이 있다. 수평의 선과 수직의 선이 있다. 그리고 화면을 관통하는 선이 있다.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은 카메라와 주인공의 ‘거리’ 속에서 관통하는 선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카메라는 멀리 떨어져 골목을 담아낸다. 동네 사람들은 느긋이 걸어와 세탁소 주인에게 사소한 부탁을 하고 20년 전 일을 엊그제 일처럼 이야기한다. 느긋한 말 사이에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빠른 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세련된 식당과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보인다. 거리를 뒀던 카메라는 조금씩 주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주인은 골목에 몰려든 사람만큼 몰려든 돈 때문에 밀려나야 하는 현실을 들려준다. 시간만큼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 없다. 세탁소 부부는 23년의 시간만큼 그 공간의 주인이다. 증명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그러하다.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은 카메라와 주인공의 거리와 시간으로 평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 질서 속 평등은 단조로워 폭력적이다. 화면 속 ‘거리’와 화면 밖 ‘거리’로 다른 상상을 해 봐도 좋겠다. 세 작품 덕분에 평등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