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은
- 참여 작품
- 나는 드리핀이다 (2022), 두 개의 연애 (2015), 좋아해줘 (2015), 서태지 모아이: 더 필름 (2011), 요술 (2010),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2008)
전투기 편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화면을 횡으로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비행기의 놀라운 속도감은 꼬리의 연기로 배가된다. 자욱한 운해가 화면을 송두리째 채우고 있다. 은빛 동체의 전투기들 저 아래로 지상은 까마득하게 검붉은 지형으로 보인다. 동체에 선명히 찍혀 있는 ‘R(epublic).O(f).K(orea). AIR FORCE’. ‘대한민국 공군’의 위용을 자랑하며 세 대씩 삼각편대를 구성한 9대의 비행기가 화면의 전방으로 날아 들어와, 가로질러 후방으로 빠져나갈 때 속도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공기와의 마찰음 사운드가 이를 청각적으로 확장시킨다. 그 위에 울려 퍼지는 주제가.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이 경쾌한 행진곡풍의 주제가는 곧 대한민국 공군의 공식 군가로 채택될 터이다. < 빨간 마후라 >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 순간의 신상옥의 야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성공한 색채 공중촬영”, “속도감 있고 박력 넘치는” 화면이라는 1964년 당시 <빨간 마후라>에 부여되었던 평가는 정말로 이 영화의 모든 것으로 보인다. 신상옥 은 한국 전쟁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전혀 새로운 공중촬영을 위해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가용자원을 동원한 것 같다(참고로 공군을 소재로 한 최초의 한국영화는 1954년 홍성기 가 감독한 영화 < 출격명령 >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공군 파일럿이라는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와 전우애를 그리고 있는 이 영화에서 공중촬영은 아직 시도되지 못하고 있었다.) 공군의 전면적인 지원으로 공중촬영을 달성해내고 있는 이 영화는 당시 일반적인 영화 한 편당 사용되던 필름 양의 무려 4배에 해당하는 8만 자를 사용하였으며(이중 절반이 생소한 공중촬영의 ‘시험’ 촬영에 소용되었다), 특별히 10배 줌 렌즈가 사용되었고, 고속촬영을 위해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고속촬영기를 빌려왔다. 이로써 < 성춘향 >(1961) 이래 컬러 시네마스코프라는 당대의 영화적 세계표준시를 성공적으로 시험하고 있던 이 테크놀로지스트는 비행기라는 대상이 보여주는 속도와 높이를 화면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과연 <빨간 마후라>가 선사하는 것은 칼라 시네마스코프 공중촬영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시각적 쾌감이다. 화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아찔한 활공. 그것들은 종종 급강하하며 폭탄을 투척하고 다시 떠오르는데, 정찰기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된 이 장면들은 비행기-카메라와 대상인 전투기의 속도라는 이중의 움직임-속도 속에서 놀라운 쾌감을 선사한다. 속도와 높이를 탑재한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사물들이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지상의 대공포가 하늘을 향하여 포탄을 발사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간단하게 지상의 사람과 사물들을 제압한다. 덧붙이자면 신상옥은 한국전에서 한국 공군의 활약상을 그려내는 이 영화에서 소위 역사적 고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영화의 전투기는 F-86이고, 클라이막스에서는 미그기와의 공중전이 감행된다. 실제로 F-86 제트기는 한국전 당시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였으며(한국 공군의 주력은 P-51 머스탱. F-86은 전쟁 이후 3년이 지나서 한국 공군에 도입되었다), 한국 공군의 인적 물적 자원하에서 공중전은 불가능했다. 참고로 고지전으로 상징되는 지상의 지리한 공방전과 별개로 한국전에서 미군은 전쟁 초기부터 단 한 번도 제공권을 상실한 적이 없었다. 승패의 불확정, 휴전으로 잠정 종결된 이 전쟁을 다루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이 미공군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정 부분 이로부터 기인한다. 즉, 공군 표상 속에서 이 전쟁의 이미지는 승리로 어필될 수 있었다. 1964년의 시점에 보여지는, 한국전 당시 F-86을 타고 지상 폭격과 공중전을 치러내는 대한민국 공군이라는 이 ‘소망적’ 형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백해 보인다. 그것은 한국전 당시 미공군이 수행하던 역할을 한국 공군으로 치환시킴으로써, 강력한 (동시에) 현대적인 대한민국의 남성성을 과시한다. 그런데, 이 명백한 표상 전략은 한국 전쟁영화라는 맥락 속에서 조금 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에서 미군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전략은 1961년 < 5인의 해병 >(김기덕)이 한국전쟁을 다룬 최초의 전쟁영화로 자리매김한 이래 한국 전쟁영화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법으로 제시되었다.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오롯이 한국군의 힘으로 내부를 지켜내는 이 문법을 통하여 한국 전쟁영화는 전쟁영화의 본원적인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적과 동지를 가르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슈미트) 위에서 어떻게 내부의 공동체를 창출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 한편, 이 공동체를 위해 죽어간 자들의 희생을 상기시킴으로써 구체적이고 심정적인 결속으로 나아가는 애도의 공동체 형성과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빨간 마후라> 이전의 두 편의 성공적인 한국 전쟁영화 <5인의 해병>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은 ‘한국군’과 ‘희생’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어떻게 한국전쟁을 이 정치공동체의 원천적 장소로서 내러티브화하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을 한국군‘만’의 전쟁으로 부각시킬 때, 현재의 이 국가가 이들의 죽음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를 공고히 하고자 할 때 여기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필연적인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 전쟁이 ‘내전’인 한에 있어서 제기되는 적의 이중성과 관련된 문제. 그러니까 이 적은 적이자 또한 ‘형제’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바로 이 문제와 직면했다. 인민군의 양민학살 ‘이후’로부터 시작하는 (그럼으로 인민군의 형상을 비껴가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적의 자리에 중국군을 둠으로써 내전이 야기하는 심리적 딜레마를 해소하고자 한다. 산등성이를 가득 메운 중국군이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며 벌판으로 밀려 내려온다. 롱 숏의 사이즈는 이들을 절대다수의 숫자로만 인식하도록 만든다. 참호 속 아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달려오는 적들은 번번히 쓰러지지만 저 숫자를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에서 감지되는 것은 보병적 전투의 무력감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죽음들은 <5인의 해병>의 희생 서사를 반복하며, 동일한 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하지만 저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오는 적을 상대로 한 전투의 무력감은 <5인의 해병>과 달리 이 희생에 기초한 그 어떤 승리의 예감도 봉쇄시키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이를 상쇄시킬 것인가? 1964년의 <빨간 마후라>는 이 순간 한국 전쟁영화가 봉착한 문제에 대한 아마도 가장 ‘탁월한’ 답변으로 보인다. 앞질러 말하자면 그것은 오로지 이 영화가 공군의 영화, 폭격기 조종사의 시점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보병의 무력감은 지상을 향한 공중에서의 폭격이라는 절대적인 위치의 비대칭성을 통하여 상쇄된다. 비행기가 점유하는 고공의, 속도를 동반한 시선. 이 속도와 높이 속에서 보병적 감각의 무력감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속도와 높이는 필연적으로 사람과 사물의 고유성의 상실이라고 할만한 것을 동반하는 것이다. 시선의 위치는 너무나 높고, 너무나 빨라서 저 아래 있는 사물들은, 사람들은 거의 분간되지 않는다. 사물들과 사람들이 그 개별성을 상실할 때, 그것이 그저 추상적인 덩어리로 인식될 때 감정은 얼마나 이입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를, 혹은 그녀를 분간할 수 있는가? 그 혹은 그녀의 얼굴을, 몸을 볼 수 있는가? 만약 볼 수 없다면 당신에게 그 혹은 그녀의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미를 갖는가, 혹은 그저 무의미한 덩어리에 불과할 뿐인가? 오늘 ‘괴뢰군’이 숨어있는 자신의 고향을 폭격한 조종사는 폭격을 당한 자들 중에 당신의 친척이, 아는 자들이 있지는 않겠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모르죠, 있었는지도.” <빨간 마후라>가 내전이 야기한 그 어떤 심리적 얼룩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조종사의 대답은 그 어떤 과장도 없이 솔직하고 담백한 것이다. 그의 위치에서 지상의 얼굴들이란 이미 식별 불가능하다. 이 순간 적의 얼굴을 둘러싼 딜레마는 원천적으로 해소된다. 그리고 곧이어 조종사는 이 냉담함을 통해 더 높은 사명으로 가닿는다. “그러나 저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슬퍼하기 전에 이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찌 되든 싸움에 이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빨간 마후라>는 한국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그 어떤 영화보다 밝고 명랑하다. 슬픔도, 탄식도, 체념도 없는 이 세계는 누군가의 언급처럼 거의 ‘찬란’해 보일 지경이다. 그것은 ‘모르죠’라는 저 언급이 보여주고 있는바, 얼굴, 개별성, 구체성의 상실을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구현해낸 스펙터클의 핵심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내전인 한에 있어서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심리적 부하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영화이다. 그것은 오직 하늘을 나는 자의 시선을 획득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 시선은 조망하는 시선이자, 편재하는 시선이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자는 빠른 속도와 높이를 획득한다. 높이 속에서 사물들과 사람들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그것은 그저 지형이 된다. 속도 속에서 사물들과 사람들은 빠르게, 거의 순식간에 뒤로 밀려가며 사라진다. 비행기에서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무정한’ 시선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시선을 획득한 순간 이 영화는 1960년대의 한국 전쟁영화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냉전 아시아의 문화장이라고 할만한 곳에서 통용가능한 이미지-상품으로 기능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빨간 마후라>는 대만에서 거의 붐이라 할만한 현상을 만들어냈고(신상옥에 따르면 대만 국책영화를 이끌었던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은 그에게 이런 영화를 한 편 만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홍콩, 싱가폴, 태국 등지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둬들였으며, 일본 극장(쇼치쿠 계열)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첫 번째 한국영화로 기록되었다.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가 이룩해낸 공중전 스펙터클의 기념비적 이미지는 냉전 아시아에서 통용되는 시각적 보편성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 지점이 <빨간 마후라>가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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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영화’ < 오리엔트 특급살인 >처럼 기차를 무대로 한 영화들은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공간 자체가 내용을 장악한다. 출발과 도착, 한 방향으로 계속 달리는 기계, 체인으로 연결된 차량들, 사건이 벌어지고야 마는 화장실, 마지막 칸, 물러설 수 없음, 절대로 왔던 길(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 기차 영화는 대개 불온하다. 스릴, 총싸움, 살인, 범인 잡기……. 기차 밖도 마찬가지다. 나가봤자 허허벌판이다. 좁은 공간에서 무기는 효율성이 다르다. 어떤 무기가 유리할까. 분명한 것은 기차 칸에서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다. 전통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은 결국 무기전”이라고 하지만, 기차 안에서는 첨단 무기가 승부를 결정짓지 않는다. 코앞의 단도나 야구 방망이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소지품이 무기가 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기차의 가장 큰 의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데 있다. 철도와 기차는 근대 자본주의의 기본 인프라이자 근대성을 상징한다. 기차는 물자 수송과 인간의 이동,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기차 시간은 정확해야 한다. 승객은 제시간에 기차에 승차해야 한다. 10초도 늦어서는 안 된다. 숨이 차도록 기차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우리 자신도 경험했다. 비행기의 지연 출발, 착륙은 흔한 일이지만 기차는 그렇지 않다. 기차를 놓쳐본 이들은 알 것이다. 인간이 아직 하늘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지상은 장악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기차 시간의 정확성은 한 사회의 발전과 기술, 질서를 의미한다. 에릭 홉스봄이 적었듯이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시간에 왔다”(나중에 이 말은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되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기차로 시작된 근대 근대 전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절멸전(絶滅戰), 대량 학살인데, 이는 인간의 의지(will)가 인간성을 어디까지 변형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히틀러가 자살 직전 마지막에 한 말은 “이것이 내 의지다!”이었다. 우리의 개발 독재 시대의 슬로건 역시 “하면 된다.”였다. 지금도 “하면 된다”고 하는 이들이 없진 않지만, 인간의 의지는 질주하는 자본주의 구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안다. 인생은 해도 안 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인간의 의지, 불굴의 의지, ‘그놈의 의지’……. 나는 인간의 의지가 개인과 사회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는 만큼만 생각하면 된다. 홀로코스트. 하나의 질서만 유일한 진리가 되는 보편성(uni/versal)의 폭력이 실제로 실현된 대량 학살이다. 프리모 레비의 시 「기차는 슬프다」는 이를 정확히 표현한다. 첫째 연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 더 슬픈 게 있을까? /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인간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근대적 사고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 개념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다. 인간(백인 남성)은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하여 미래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구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적 진보(progress)의 개념이다(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와는 다르다). 단수(單數)의 시간.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 시간관과 단수의 주체가 시간의 기준을 제시한다. 개별적 인간의 상황마다 ‘10분’의 의미가 다를 수 있는데, 백인 남성 비장애인의 시계를 중심으로 삼아 객관적 시간 개념이 설정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처럼 행복한 시간과 지루한 시간은 그 길이가 다르다. 고문당하는 10분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같겠는가. 시간은 척도가 아니라 경험이다. 농촌의 시간과 도시의 시간은 다르다. 장애인의 시간과 비장애인의 속도는 다르다. 이런 차이가 무시되고 누군가의 시간이 기계적으로 설정되고(시계), 사람들은 속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발전, 추격, 100미터 달리기, 문명과 야만, 최연소의 성취... 물론 가장 끔찍한 ‘야만’은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the spatialization of historical time). “한국은 미국의 80년대다.”라는 식으로 각 지역의 발전 차이를 문명화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서구를 기준으로 놓고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국제 사회의 위계를 만들어, 이는 인종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설국열차 근대성의 교과서, < 설국열차 > 봉준호 감독이 타고난 재능과 훈련, 지성을 모두 갖춘 예술가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 만들기를 ‘마스터’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의 첫 장편영화 < 플란다스의 개 >를 가장 좋아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무정형의 영화다. 패턴이 없다. 걸작이라는 얘기다. 영화는, 그 영화에서 화제가 되었던 ‘김뢰하처럼’ 생겼다. 이후 < 살인의 추억 >, < 괴물 >, < 마더 >, <설국열차>, 레오 카락스, 미셀 공드리와 함께 한 옴니버스 영화 < 도쿄! >(일본의 히키코모리를 다루었다)까지, 봉준호는 소위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그는 위 영화들에서 근대성의 주제들을 섬세하게 공들여 변주한다. 좌우를 초월한 남성 연대(그런 면에서 <살인의 추억>과 <설국열차>가 가장 비슷하다), 괴물적 모성, 오염 메타포,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구조적 파국. 특히 숙주(宿主)와 기생충.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였다. 2019년 <패러사이트(para/site, 영어 어원으로는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의미, 우리말은 ‘기생충’)>를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니, 연작의 완성인 셈이다. 숙주와 기생충은 대립하는 생물이 아니라 공존 관계다. 앞서 말한 그의 영화들은 모두 근대성의 공식에 충실하다. 원작 탓일까. <설국열차>가 가장 노골적이다. 나는 그 영화를 어떤 ‘어른’을 모시고 봤는데, 옆자리에서 나는 다음 장면을 중계했다. 한 장면만 빼고, 다 ‘맞추었다’. 그는 내가 “천재”이거나 영화를 두 번 보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단백질 바(bar)의 원료가 바퀴벌레인 것도 알았다. 바퀴벌레는 영양이 풍부하고, 깨끗하며, 물 한 방울만으로도 몇 달 동안 생존이 가능한 강력한 생명체다. 단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에 오염의 매개체여서 사람들이 질색할 뿐이다. 내가 예상치 못한 장면은 공동체와 리더십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부정의와 연관이 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에게 지도자의 역할이 요구되자, 그는 사양한다. 공동체를 위해 투쟁하다 장애인이 된 사람도 있는데, 온몸이 멀쩡한 자신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반대다. 이곳은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상이용사’든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 그들은 ‘재수 없는 피해자’이거나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다짐케 하는 반면교사이거나 ‘민주화 운동 경력을 팔아 국회의원을 노리는 이들’이다. 반민특위서부터 일상화된 한국의 부정의한 일상의 근대사다. 한국은 살아남는 것, 더 잘사는 것이 유일한 가치인 나라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생존자는 소녀, ‘흑인’ 소년, 동물(곰)이다. 이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희망을 상징한다. 지구의 미래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구를 망치는 데 앞장선 이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미래의 희망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은, 현재를 주도하는 주체의 타자라는 얘기다. 한국의 녹색당에서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탈핵을!”이라는 구호에 대해 고등학생 당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른’ 당원들은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생들은 왜 자신들을 현재의 동반자가 아니라 어른의 관점에서 ‘미래’로 정의하느냐며 항의했다.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구호는 “지금, 당장, 우리 모두를 위해 탈핵을!”이다. 자신들을 타자화하지 말라는 얘기다. <설국열차>나 녹색당의 ‘어른’들은, 타자를 정의하고 보호하는 주체는 성인 남성임을 자임한다. 그들은 재현의 주체이지, 재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10대들은 말한다. “우리는 당신의 미래가 아니야, 당신의 관점에서 우리를 정의하지 마” MB 시대의 ‘조현오’가 만들어낸 좀비, < 부산행 > 스티브 연이 출연한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걸어 다니는 시체)>는 내게 난독 증을 일으킨다.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지칭하는 말 중에, ‘리빙 데드(living dead, 살아 있는 시체)’가 있는데, 죽을 만큼 고통스러우나 죽지 못하는, 그래서 자살만이 치료인 이 병의 특성을 표현한 단어다. 우울증과 좀비 상태는 삶과 죽음의 중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좀비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의 반영이다. 괴로운 상태지만 죽지는 않는.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끔찍한 상태는 없다.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아름다운 좀비 영화도 많다. 나는 좀비 영화 중에서 조시 하트넷이 나오는 2007년작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30 Days of Night)>를 가장 좋아한다. 아메리카 최북단 도시인 알래스카의 배로우는 매년 겨울이면 30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화면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어둠과 추위 때문에 더욱 아늑해 보이는 도시, 카페들, 좀비가 나타날 때마다 흰색 눈 위에 뿌려지는 선연한 붉은 피, 눈 내리는 거리의 가로등……. 영화를 보다 보면 30일이 지나서 해가 뜰까 봐 걱정일 정도다. 그런데 대개의 좀비 영화는 신체 변형의 공포를 활용한다. 피와 근육이 질척인다. 좀비를 두 종류로 나뉜다면 무한 증식하는 좀비와 그 숫자가 그대로 유지되는 좀비다. 감염, 오염, 흡혈 따위로 증식하는 좀비 영화에서는 극소수만 남게 된다. 최근 좀비 영화를 신자유주의 체제의 생존 법칙과 연결하여 분석하는 소위 ‘좀비 사회학’이 인기인데, 인간은 모두 좀비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을 보면서 이명박 시대를 이렇게 비판할 수 있는 영화가 또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행>에서 좀비가 되는 방식은 오염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 그럴 힘도 없다 - 상대방을 나랑 같은 처지로 만드는 것이다. MB 시대의 정신을 체화한 ‘MB 캐릭터’는, 이 영화의 최고 악역( 김의성 분)이 아니다. 그는 평범한 생존자다. 문제는 그 이상(以上)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MB 시대의 대표적 모델은 전 서울 경찰청장 조현오 씨다. 그가 저지른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등은 MB가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MB는, 아예 그런 문제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다. 이 사건들은 조현오 개인의 과잉 충성의 결과였다. MB 캐릭터의 특징은 최소한의 근대적 인간관을 갖추지 못한 데다, 실력은 없으면서 셀럽 욕망이나 권력욕에 미친 사람들이다. 진보 진영과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다. 무식과 뻔뻔함은, 이들이 장착한 최고의 만능 아이언맨 슈트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실력이 있으면 굳이 비윤리적이지 않아도 되는 능력주의 사회다. 이들은 실력이 없으므로 한편으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편으로는 극도로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들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은 인생의 낭비다. 이 시대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약자가 사는 방식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최고의 자살률은 수치심을 버린 자들이 휘두른 자상의 결과다. 인사불성(人事不省) 상태에서 부끄러움 없는 사람의 활기(活氣)는, 그 자체로 흉기다. 한 마디로, 지금 이곳은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다. 정의는커녕, 의리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 평범한 사람도 오염된다. 오염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한국 사회를 기차 안에 압축해 두고 모두가 나쁜 사람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는 과정이 이보다 현실적일 수 있을까. 다시 쓴다. 이 영화는 보통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과정을 그린, 몸서리쳐지는 영화다. 다른 선택은 없다. 오염의 주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주인공 공유 나 마동석 도 구원받지 못하며, 나쁜 세력의 승리에 제단에 바쳐진다. 이 영화에서도 부정의에 오염되지 않을 두 명만 남겨준다. 역시 여성( 정유미 )과 아이( 김수안 )다. 이 영화를 부성 영화로 보는 것은 넌센스다. 스테이션 에이전트 < 스테이션 에이전트 >의 ‘난쟁이’ 그는 타자인가, 진정한 친구인가 <스테이션 에이전트(The Station Agent>(2003)의 주인공 핀은 내가 꿈꾸는 삶을 산다. 동네에 버려진 기차 한 칸이 그의 집이다. 관리해야 할 물건이 없는 간소한 삶. 우리에게도 익숙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장애인(난쟁이)’ 배우, 피터 딘클리지(Peter Dinklage)와 폴 벤저민(Paul Benjamin), 퍼트리샤 클라크슨(Patricia Clarkson)이 나온다. 토머스 매카시(Thomas McCarthy) 감독의 <스테이션 에이전트(역장)>는 그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각본상(감독이 직접 썼다)과 관객상을 받았다. 조용한 마을,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핀을 좋아한다. 그와 차를 함께 마시고,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가족과 싸우고 연인과 헤어지고 갈 곳 없는 이들이 간혹 그의 기차 칸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핀은 마음씨 좋은 신부님, 의지할 수 있는 마을의 상담자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다. 왠지 나는 성별과 ‘외모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역할에 강하게 동일시했다. 나는 꼭 그였다. 나도 핀과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과 ‘같지 않다’. 그는 마을의 살짝 외곽, 숲 근처에 살고 있다. 그의 존재는 궤도 밖에 있다. 마을 사람(여성)들은 그를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먼저 그를 찾지, 그가 먼저 원하는 경우는 없다. 만일 그가 먼저 사람들을 원한다면, 관계의 법칙은 깨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무언가 결핍이 있는 존재이고,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동경해 본 적이 없다. 주변 지인들은 내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해준다’. 그러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그들과 동급이 아니다. 나 역시 어떤 부분에서 ‘장애인’이어서, 그들 인생의 경쟁 상대가 아닌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핀(역장)을 편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사람들, 자기 기준에서 ‘차이(모자람)’가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외이며, 편안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타자(他者, the others)라고 부른다. 타자는 억압받기도 하지만, 유사 종교적 존재로 존중받기도 한다. 지배와 피지배, 속(俗)과 성(聖),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서 모두 후자이되, 긴장이 덜하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이 만든 타자지만, 사람들은 그를 낭만화하고 신비화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타자의 위치에서 탈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의 관계 원리는 ‘나는 너와 다르고, 그것은 내가 결정한다’이다. 장애인으로 규정당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느 정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들의 규범에 괴로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과의 차이의 문제를 글로 쓸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이니까. 감독들은 왜 다들, 그토록 주체인가 근대성이라는 기차는 처음부터 균불등 발전을 의미했다. 이제는 불균등 발전은 극단의 양극화를 넘어, 지구 자체가 망하게 생겼다. 트럼프 같은 인간도 패닉 룸(반공호)을 잃을 판이다. 기존의 근대성을 고수하면 모두가 망한다는 진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자국의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아프리카 땅을 마구 사들이는 중국, 전쟁주식회사는 의뢰인에게 돈 대신 받는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는다. 가만히 앉아서 물과 식량을 잃는 사람들, 매일 매일의 내전, 피 묻은 다이아몬드, 녹아버리는 거대한 빙하, 죽은 고래 몸 앞에 든 80킬로그램의 비닐, 바다 위에서 사라지지 않은 스티로폼 부표, 고용 없는 성장……. 이제 기차는 계속 달릴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이제까지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던 여자, 아이, 자연, 장애인들을 기차 밖에 살게 하거나 생존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진정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여성과 아이, 동물은 오염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 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주체의 전복과 파괴, 변형이 상상력이다. 작품마다 자신을 부수는 소설가 정찬은 그의 걸작 「슬픔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 외부 필진의 원고는 영화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하마을에서 계속 굴만 파고 있는 시몬과 카미나, 카미나는 지하 위 세계가 있다고 믿고 꼭 밖으로 나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요코라는 지상에서 온 여자와 만나고 ‘라간’이라는 조그만 얼굴 모양으로 로봇을 얻으면서 겨우 나쁜 촌장이 지배하는 지하에서 벋어난다. 지상으로 나오자 그들에게 아름다운 빛과 자연의 세계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들이 본 아름다운 지상은 사실 나선왕와 수인들이 지배하는, 인간이 사냥당하는 그런 세계이다. 카미나와 시몬, 요코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나선왕과 수인들과 새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사실 이 머리가 큰 웃기게 생긴 로봇들의 디자인을 보고 ‘멋있다.’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어 제목을 보면 ‘이건 뭐 장사로 성공하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본에서 2007년에 방영된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이들에게는 이미 명작으로 통하는 작품이다. 제작사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으로 유명한 가이낙스. 이 애니메이션은 미소녀, 로봇, 소심한 소년의 성장, 그리고 철학적 세계관과 굉장한 스케일의 액션 등 오타쿠들이 좋아할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다. 비록 일본도와 전함 야마토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 등 약간의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장치들도 가지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대책 없는 열혈 대사들이 남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확실하다. 유아용 로봇물처럼 보이는 이 작품이 우리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바로 투쟁심과 동료애, 사랑, 자유, 그리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너무나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믿음 때문이다. 바로 개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닥쳐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 사랑하는 것이 희망이라는 믿음, 우리가 우리 스스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그 믿음 말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세상은 사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바꾸려고 해 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 나만 죽을 뿐이다. 진실에 대한 믿음도, 진정한 사랑도, 용기도, 투쟁심도 압도적인 적의 힘 앞에 패배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반의 일진의 힘 앞에 도대체 무엇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도덕과 용기를 가르치는 어른들은 멀리 있고 무력하다. 어른들 세계에서도 언제나 나쁜 놈인 쪽이 높은 지위에 있고 돈과 법을 장악하고 있다. “우리는 질 거야. 세상은 바뀌지 않아. 강력한 그들의 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이기겠어?” 당연하다. 싸우지 않고 엎드려 있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언제까지 도망칠 테냐. 여태까지의 자신을 바꾸고 싶다면 바로 지금이다.” 라고 말하며 ‘사나이 영혼의 완전연소’를 외치며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라고 폼 잡으며 되지도 않는 싸움을 계속하는 바보 남자가 있다. 바로 카미나다. 그는 오래전 사라졌던 진짜 남자다. 불의 같은 건 참지도 않고 권모술수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이길 수 없어 보이는 거대한 악당을 향해 소리치며 돌진해 가는 포기를 모르는 진짜 남자 말이다. 카미나는 보잘것없는 굴착 꾼 소년 시몬에게 말한다. “잘 들어 시몬. 너의 드릴은 촌장의 것이 아냐. 너의 드릴은 너 자신이야. 너의 드릴은 하늘을 뚫어버릴 드릴이라구!”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제목 ‘천원 돌파’의 의미다. 그리고 그게 묘한 감동을 준다. 우리가 바로 지하에서 작은 드릴로 굴이나 파고 있는 시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