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는 잠수부에요
- 감독
- 루 지안 슌, 창 지안 하오
- 제작년도
- 2014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평을 쓰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누벨바그 시네마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이 유명한 말은 한국의 수많은 시네필에게 영화 사랑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주1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영화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 창작 욕구가 없다고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영화 사랑 정도가 트뤼포가 말한 저 세 단계 중 어느 경지에 있는지 재본 적이 있지 않을까? 게 중에는 실제로 영화 창작의 꿈을 펼치는 이가 있을 것이고, 영화에 관한 글 혹은 영상을 쓰거나 만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저 영화 보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사랑의 정도를 단계로 매겨 고수와 하수로 평가할 일은 사실, 아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 정해진 단계란 있을 수 없다. 트뤼포가 말한 세 단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이도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할 ‘사진첩’의 소장자, 고(故) 홍영철(1946~2016)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여느 영화팬과 마찬가지로 영화 보는 걸 즐기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영화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영화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영화를 즐겨 보면서 입장권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 포스터와 신문광고 같은 것을 함께 모으다 보니 재미가 있더라. 그러다가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1년이다. 영화에 빠지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변변한 자료집 하나 없었으니.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이것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다. - “ 한국 영화사 연구가 홍영철에게 ‘영화도시 부산’의 길을 묻다 ”, 《부산시보 부산이라 좋다》, 2014. 8. 25. 194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으로 부산에 정착했다. 젊은 시절, 영화를 즐겨 보며 입장권을 모으던 데서 시작해, 영화 포스터와 스틸, 전단 등 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부산의 여러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극장 간판 사진을 찍었고, 영화관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을 했다고 하니, 201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꼭 45년 동안 수집한 자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해 『한국영화도서자료편람 1925~1990』(한국영상자료원, 1991)과 『부산영화 100년』(한국영화자료연구원, 2001), 『부산근대영화사: 영화상영자료 1915~1944』(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산지니, 2009), 『부산극장사』(부산영상위원회·한국영화자료연구원 엮음, 부산포, 2014) 등의 책을 편찬했다. 그리고 2017년, 홍영철 선생의 유족은 그가 반평생을 넘게 수집한 자료들을 부산시에 기증했다. 자료의 원본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 보존·관리하기 시작했는데, 2019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일부 자료를 디지털 복사본의 형태로 기증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번에 공개한 “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은 바로 이들 자료 중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을 정리해 해제를 덧붙인 것이다. 이 컬렉션에는 1923년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연출한 < 춘향전 >부터 1944년 방한준 감독의 < 거경전 >까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제작된 극영화 70여 편의 스틸 132점이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언뜻 영화 스틸 같아 보이지만 영화 스틸이 아닌 것도 섞여 있다. 사진 속에는 그 유명한 영화 < 아리랑 >(1926)의 감독이자 배우로도 인기 많았던 나운규 가 등장하고, 그와 함께 <아리랑>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 남궁운 과 주인규 가 출연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진들은 심훈 이 1926년 11월 9일부터 12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소설 「탈춤」의 스틸이다. 극의 한 장면을 실사(實寫)로 촬영한 스틸인데 영화가 아닌 소설의 스틸이니, 그렇다면 ‘소설 스틸’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까? 그런데 잠깐만! ‘소설 스틸’이 무슨 말이냐고? 문자를 존재의 수단으로 삼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시각 요소가 핵심인 ‘스틸’이라는 용어가 붙은 합성어가 말이 되냐고? 하신다면…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한 ‘ 영화소설 ’이라는 문화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0년대까지 ‘영화 관람의 시대’를 보낸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는 1919년 < 의리적 구토 >를 시작으로 본격 영화를 만드는 시대를 맞았다. 이와 함께 영화의 대중적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이를 반영이나 하듯, 1920년대 중반부터 여러 신문은 연재 소설에 삽화 혹은 연출된 사진을 수록하고, 여기에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소설’이 일련의 공통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른 특별한 양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보다 당시 신문들이 앞다투어 사용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는 나름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영화소설을 문학 장르가 아닌 ‘문화현상’이라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신문에 연재된 것은 김일영의 「삼림의 섭언」이라는 작품으로, 이는 《매일신보》를 통해 1926년 4월 4일부터 5월 16일까지 총 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192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민간 신문 발행을 허용했던 때로, 1910년대까지 총독부 기관지로 독주했던 《매일신보》는 이제,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민간 신문과 경쟁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1926년에 《매일신보》가 처음 도입한 ‘영화소설’은 당시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신문 판매 부수로 견인하려는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도 잇달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단 작품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주2 영화소설을 신문 마케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은 《매일신보》에 「삼림의 섭언」이 연재되고 약 6개월 후, 《동아일보》에 연재된 「탈춤」(1926. 11. 9.~12. 16., 총 34회 연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탈춤」 연재를 시작하기 하루 전, 다음과 같은 홍보 기사를 게재했다. 사진: " 창작 영화소설 탈춤(예고) 심훈 작 ", 《동아일보》, 1926. 11. 8., 3면 심훈의 「탈춤」을 “조선서 처음되는 영화소설”이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이미 수개월 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연재된 작품이 있기에,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이 홍보 기사에서 방점을 찍어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를 바 없이 삽화를 수록했던 최초의 영화소설 「삼림의 섭언」과 달리, 「탈춤」은 “매일 삽화 대신으로 미려한 실연 사진”을 수록한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차용했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다른 신문 다른 작품에 뺏겼지만, 《동아일보》는 처음으로 소설에 “실연 사진”을 도입하는 차별화 전략으로 신문 독자들에게 영화 관람 못지않은 기대감을 심으려 했을 것이다. 비로소 그 실상이 공개된 「탈춤」의 스틸은 화려한 캐스팅마저 자랑했다. 연재 첫 화의 스틸에는 같은 해 공개돼 화제를 모았던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스타 배우 나운규가, 또 같은 해 < 장한몽 >(이경손, 1926)의 심순애 역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김정숙 을 안고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어지는 회마다 차례로 공개된 스틸에는 <아리랑>에서 현구 역으로 큰 인기를 끈 배우 남궁운과 악역 연기의 일인자로 정평이 난 주인규가 등장했다. 스틸 캐스팅만으로도 당대 소설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영화소설 「탈춤」을 읽는 재미는 이뿐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재되는 사진 위에는 상황을 요약한 지문 내지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말풍선으로 제시되었다.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속 영화소설 「탈춤」 스틸 역시 연재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풍선과 함께 실렸다. 소설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말풍선으로 제시되는 대사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재미까지 의도한 듯한 구성은 어느새 독자들에게 ‘진짜로’ 만들어진 혹은 만들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았을까? 특히 보통의 소설처럼 서술되던 내용이 연재 후반부에 이르러 갑자기 영화 시나리오 형식으로 제시되었을 때, 이러한 의심(?)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 심훈은 연재 중 불쑥 등장해,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기도 했다. 결혼식까지 하게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층절이 잇서 좀 더 세밀한 묘사를 해야 할 것이나 “스티-ㄹ”(삽화 사진)이 부족 해서 부득이 겅정겅정 뛸수밧게 업시되얏고 결혼식 장면은 전문용어만 쓰지안코 원 영화 각본을 꿈이는 체로 시험삼아 써봄니다. - " 탈춤(26) ", 《동아일보》 1926. 12. 6., 3면 그런데 작가의 이 말은 또 다른 혼란을 가중한다. 심훈은 극 중 혜경이 준상의 강압으로 그와 결혼식을 치르는 과정을 세밀하게 전개하지 못한 이유를 스틸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스틸의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다. 소설의 스토리를 뒷받침해 주는 보조 수단이 스틸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이 순간부터는 역으로 소설이 스틸의 스토리를 보완하는 장치가 되어버린다.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 연재가 기획된 것인지 아니면 연재하던 중에 영화화가 결정된 것인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영화소설 「탈춤」은 연재가 끝난 그 이튿날, 영화 제작 소식을 전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할 영화 < 탈춤 >은 원작자 심훈이 각색을, 나운규가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다. 나운규를 비롯해 소설 스틸에 출연한 남궁운과 주인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할 계획이지만, 여배우만큼은 전격 신인으로 교체하리라고 발표되었다. *주3 그러나 영화 촬영은 예고했던 것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7월, 《조선일보》는 그간의 각색 작업을 마치고 계림영화사 제작 아래 심훈이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알렸다. 배우 역시 선정 중이라고 밝혀, 영화소설 「탈춤」 스틸에 출연한 배우들마저 전격 교체될 것임을 시사했다. *주4 그러나 영화 <탈춤>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5 대신 심훈은 1927년 9월, 자신이 쓴 시나리오 < 먼동이 틀 때 >를 촬영하며 첫 메가폰을 잡았다. 심훈의 연출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7) * 공교롭게도 영화소설 「탈춤」이 신문에 연재 중이던 때에 「탈춤」 스틸에 출연한 나운규, 김정숙, 남궁운, 주인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의 < 풍운아 >에도 출연했다(1926년 11월 19일 크랭크인, 1926년 12월 18일 조선극장에서 개봉). 그 때문인지 나운규가 자동차 뒤에 매달린 스틸은 훗날, 영화 <풍운아>의 스틸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스틸이 영화소설 「탈춤」에 수록된 날짜(1926. 11. 15.)가 <풍운아>의 공식 크랭크인 날짜보다 나흘 앞선다는 점에서, 그 정보는 수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주1. 정성일에 따르면, 이 말은 일본을 경유하며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트뤼포는 ‘시네필로서 어떤 순간에 감독 혹은 비평가가 되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반추하며, 자신의 비평집 『내 인생의 영화(Les Films de ma vie)』에서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감독을 적어 두는 것이며, 세 번째는 연출의 자리에 가서 내가 선택한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성일, 「트뤼포,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사람처럼」,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을유문화사, 2006, 980~981쪽. 주2. 《매일신보》의 영화소설 게재 배경 및 특징에 대해서는 배현자·이혜진, 「근대 영화소설의 처음과 끝- 『매일신보』 영화소설」, 『한국 근대 영화소설 자료집: 매일신보편 上』, 소명출판, 2019, 3~34쪽 참고. 주3. 《동아일보》 , 1926. 12. 17., 5면. 주4. 《조선일보》, 1927. 7. 23., 2면. 주5. 심훈은 “촬영을 개시하기 6일 전에 초지(初志)를 뒤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탈춤」은 부르주아의 생활 이면을 유치하게나마 그린 것이 되기 때문에 스케일이 여간 크지가 않고 출연 인원도 엄청나게 많은 동시에 한 이천 원 한도하고 촬영비를 내게 되는 터라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라고 회고했다. 심훈, 「『먼동이 틀 때』의 회고-조선영화감독고심담」, 『심훈문학전집 1』, 탐구당, 1966, 577쪽; 주인, 「영화소설 정립을 위한 일고- 심훈의 탈춤과 영화평론을 중심으로」,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어문연구』, 34권 2호, 2006, 267쪽에서 재인용.
대구에는 1910년 이전 달성관(達城館)이라는 연예회장이 있었다. 극장이라기보다는 각종 집회와 연회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1912년 폐관되었다. 그 외에도 대구 서문과 북문 밖에는 가설극장들이 존재했으며 금정(錦町)의 금좌(錦座)와 대화정의 낭화관(浪花館), 대구구락부와 같은 활동사진이 상영되던 극장이 있었다. 1910년대 후반 이후 대구지역의 극장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① 칠성관(七星館), 대송관(大松館), 만경관(萬鏡館), 대경관(大鏡館), 호락관(互樂館) 대구부 촌상정(村上町)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6년 후루가와(古川文之助) 등이 청원하여지어졌다. 1922년 무렵 칠성관은 대송관으로 바뀌었다. 이후 대송관은 대영관(大榮館)에 인수되어 제2대영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8년 만경관(萬鏡館)을 운영하던 이제필이 만경관이 화재로 소실 된 후 대송관(제2대영관) 건물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했다. 이후 만경관이 신축되자 이제필은 이곳을 대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영화 대경관 신설>, 《동아일보》, 1929.01.02) 이제필이 운영하던 대경관은 1933년 8월 12일 윤무용(尹武用), 김상덕(金尙悳), 김파영(金波影) 등의 경영진 하에서 다시 이름이 호락관(互樂館)으로 바뀌었다. 1938년 시설 낙후 등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② 대구좌(大邱座), 대구극장(大邱劇場) 대구좌는 대구부 전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용산의 앵좌(櫻座)를 이전하여 건설한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던 대극장이었다. (<대구좌 신축 신보(新捗)>, 《조선시보(朝鮮時報)》, 1918.04.27) 1918년 5월 말 대구기업주식회사에서 세웠다. 극장의 운영은 나카무라(中村喜一)가 맡았다. 1925년 봄 야마네(山根初太郞)가 대구좌의 운영을 맡아, 외관과 내부를 수리한 후 9월 재개장 했다. 이 무렵 대구좌라는 명칭 대신 대구극장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대구극장은 경성의 부민관이나 평양의 금천대좌와 같이 다목적 회관의 성격을 지닌 극장으로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조선관(朝鮮館), 만경관(萬鏡館) 조선관은 대구부 경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이다. 1920년 대구의 전당포업자들의 모임인 십일회(十日會)와 대구좌(大邱座) 주인 나카무라(中村喜一), 조선인 배모(裵某)가 합작하여 만든 극장이었다. (<대구에 극장 신설>, 《매일신보》, 1920.02.26) 하지만 건립 직후 화재로 사라졌다. 1922년 8월 조선관이 있던 자리에 만경관(萬鏡館)이라는 새로운 극장이 지어졌다. 삼층의 벽돌 건물로 대구지역의 대표적 조선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었다. 192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만경관의 흥행을 맡아하던 이제필은 대송관(大松館)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이어갔다. 1929년 화재로 사라졌던 만경관이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만경관의 흥행주는 니시야마(西山吉五郞)이며, 72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④ 대영관(大榮館), 소명관(昭明館), 신흥관(新興館),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 대영관(大榮館)은 대구부 전정 14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으로 1921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 대영관은 소명관(昭明舘)으로 관명이 바뀌었으며, 1931년 4월에는 신흥관(新興館)으로 다시 바뀌었다. 신흥관은 1939년 6월 문을 닫았다. 18년 전 지어진 건물이라 시설이 낙후하였기 때문이다. 1940년 7월 5일 시마다(島田金四郞)가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을 설립했다. 신흥관의 흥행권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1943년 현재 대구송죽영화극장의 흥행주는 이토(伊藤勘吾)이며 객석 수는 570석이었다. 해방 후 대구동보극장(大邱東寶劇場)으로 바뀌었다. ⑤ 영락관(永樂館) 1930년 무렵 대구부 전정(田町) 11번지에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인 영락관(永樂館)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당시 경영자는 나가오(長尾喜重郞)이었다. 1934년 영락관을 운영하기 위해 주식회사 대구영흥상회(大邱映興商會)가 조직되었다. 1936년 여름 시설을 크게 개선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송전극장으로 바꾸었다. ⑥ 대구키네마구락부(大邱キネマ俱樂部), 대구보총극장(大邱寶塚劇場) 대구부 동성정 2정목 88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대구키네마구락부는 1938년 호락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1940년 이름을 대구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950석에 달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는데 한국전쟁 기간에는 국립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⑦ 김천좌(金泉座), 김천극장(金泉劇場) 김천좌는 1910년대부터 흥행장으로 활용된 경상북도 김천의 극장이다. 정확한 설립연대와 설립자는 알 수 없다. 1925년 무렵 낡고 협소한 공간이 문제가 되어 당시 관주인 후쿠시마(福島格一)가 영업을 중지했다. 대신 1923년 잠시 문을 열었다가 문을 닫은 활동사진상설관 조선관(朝鮮館)의 건물을 인수받아 영업을 이어갔다. (<金泉唯一の娯楽塲>, 《朝鮮新聞》, 1925.08.22) 1938년 김천읍내 유지들로 구성된 경북흥업주식회사가 김천좌의 흥행권을 인수한 후 성내정의 부지를 매수하여 그곳에 극장을 신축하게 된다. (<경북흥업 신축 재이(在邇)>, 《동아일보》, 1938.02.24)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김천극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노(佐野秋千代), 지배인은 타니히치(谷久平)이다. 객석 수는 800석이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⑧ 영일좌(迎日座) 포항극장(浦項劇場) 1920년대 포항에는 영일좌(迎日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언제 만들어지고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영일좌에 이어 들어선 극장이 포항극장이다. 1936년 포항읍 대정정에 들어섰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마노우치(山之內學)이며 객석 수는 597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영천극장(永川劇場) 경북 영천읍 창구동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34년 무렵 신문지상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하라(安原在玉)이며, 객석 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⑩ 상주좌(尙州座), 상주극장(尙州劇場) 경북 상주읍 서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쿠쇼쿠(拓植光太郞)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⑪ 예천극장(醴泉劇場)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8년 1월 영업을 시작했다. 설립자는 예천 청년 김위진(金渭鎭)으로 1만 1천원의 비용을 들여 완성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위진(창씨명 正木渭鎭)이며 객석은 총 400석이었다. ⑫ 청도회관(淸道會館) 경북 청도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하라(大原基一)이다. ⑬ 안동극장(安東劇場) 경북 안동읍에 있었다. 1939년 무렵 개관을 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는 권투경기가 자주 열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가노(中野文雄)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⑭ 경주극장(慶州劇場) 경북 경주읍 동부리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8월 19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경주 학교조합관리자 기노시타(木下宇平)이다. (<慶州劇塲竣工>, 《朝鮮新聞》, 1928.8.17) 경주지역의 유일한 흥행장으로 연극, 영화의 상연은 물론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39년 9월 17일 흥행주 기노시타(木下淸)가 낡고 좁은 건물을 증축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노시타(木下淸)이며 객석 수는 350석이다. ⑮ 대인좌(大仁座) 구룡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32년 11월 20일 설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다(多田仁助)이며 객석 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영주극장(榮州劇場) 영주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로타(廣田且吉), 지배인은 야스다(安田浩三)였다. 객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강구회관(江口會館) 강구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후지하라(藤原英一)였다. ⑱ 의성회관(義城會館) 의성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라노(平野文雄)이며, 객석 수는 600석이었다. [자료] 《朝鮮新聞》, 1928.08.17. 慶州劇塲竣工, 十九日落成式 (慶州)篤志家木下宇平氏は前學校組合管理者にして地方發展の爲慶州劇場建設を計畫し愈愈日頃竣工し上つたので新築落成式を兼ねこけら落しを擧行する事となり內地より松島家松鶴一座を招聘し來ろ19日午後3時より落成式を擧げ引續き6時から招待演劇を開幕すぺく多數各方面に夫夫招待狀を出しをりつあり [자료] 《매일신보》, 1940.11.11. 감포극장(甘浦劇場) 전소(全燒) 【경주】 감포극장(甘浦劇場)은 지난 八일 오전 二시경에 전소하였는데 원인과 손해는 방금 당지 주재소(駐在所)에서 조사 중이라는데 동 극장은 十여 년 전에 건축한 二층으로서 손해는 대략 三천원가량이라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27.05.19. 대구의 대극장, 만경관(萬鏡舘) 전소(全燒), 십팔일 새벽에 불이 낫다 【대구지국특전】 대구에 잇는 죠선인 죠합 조직의 활동사진상설관 만경관(萬鏡館)은 젼에 불탄 극쟝자리에 새로 셰운 남선유일의 큰 극장이엇섯는대 십팔일 새벽 돌연이 불이 나서 대구 시내의 소방대는 일제히 츌동하야 진화에 노력하야 연소는 없섯스나 만경관은 젼소되고 악긔와 및 비품도 젼부 소실되고 마랏다는대 진화는 오젼 여섯시경이었다. 손해는 오(五)만원, 원인은 실화인 듯 츌화한 원인에 대하야는 아직 조사 즁이나 삼층 우에서 발화되듯하다 하며 손해액은 젼부 오만원 이상에 달하겟고. 보험에는 삼만원 드러잇다고 한다. 만경관은 최근에 신츅된 남션 유수한 극장이다. [자료] 《동아일보》, 1922.06.28. 대구 이오극장(二五劇塲) 신설 대구부 경정(京町) 一정목 전(前) 조선관(朝鮮館) 기지(基址)에 대구 유력자 十二인이 합명하야 극장을 건설하고 기(其) 명(名)을 이오관(二五館)이라 하야 활동사진 ᄭᅡ 지 겸영(兼營)하리라더라.(대구) [자료] 《동아일보》, 1939.09.20. 경주극장 신장(新裝), 거(去) 십칠일부터 개관 【경주】 二만여 읍민의 유일한 관극장소인 경주극장(慶州劇場)은 과거에 넘우 자리가 협소하야 왜지의 큰 흥행단체도 흥행 “코-수”에 엇지안코 통과하는 일이 만흘뿐덜어 또한 조곰 조흔 극이 오면 즉시 만원이 되어 일반의 관극 상 불편이 적지 안엇는터인데 금번 극장주 목하청(木下淸)씨가 다대한 돈을 엇고 수리를 시작하야 낭하를 물리이고 장내를 확장하는 등 어느 정도의 신장을 보이게 되엇다. 그동안 근 수십일을 두고 휴업중에 잇든 경주극장도 지난 십칠일 밤부터 참신한 면목으로 손의 앞에 개관케 되엇다. 앞으로 속속 조흔 흥행물을 골나서 관중을 마즈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8.01.12. 예천극장 개관 【예천】 예천 지방에서 일반이 갈망하든 극장은 예천읍 발전 상 긴요한 숙제이든바 당지 청년 김위진(金渭鎭)씨의 노력으로 一만 一천여원의 금전과 五개월의 시일을 소비한 결과 지난달에 준공하고 그동안 모든 설비도 완비되엇으므로 신년 벽두를 기하야 지난 五, 六 양일간 주야겸행으로 일반에게 피로 공개한바 연일 초만원의 성황이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1.02. 영화 대경관(大鏡館) 신설 대구의 상설영화 만경관은 연전(年前)의 화재를 당한 후, 당시 경영자 이제필(李濟弼)씨는 촌상정동(村上町洞) 대송관(大松館) 집을 빌어 만경관 이름을 보게(保揭)하고 이래 적극적 노력을 하야 오든 바 금번 경정(京町) 소지(燒址)에 신관이 재성(再成)되고 신경자(新營者)가 현출(現出)됨으로 씨는 종래의 만경관 명을 해관(該館)에 양환(讓還)하는 동시, 신년 一월 一일부터 종래 씨의 경영하든 바 만경관은 『대경관』이라 개칭하야 더욱 확충에 진력하겟다는 바이로서 대구에 영화상설관은 양처(兩處)가 된다더라. 【대구】
중앙관은 1921년 10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 영락정 상품진열관 앞에 세운 영화관이다. 중앙관을 세운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朝鮮活動寫眞株式會社)는 1920년 8월 나카무라 히코(中村彦) 외 두 명이 영락정 상품진열관 건너편에 극장을 짓기로 출원하자, 이를 계기로 세키상점(關商店)의 운영주이자 경성상업회의소 상의원 대표인 세키 시게타로(關繁太郞)와 마쓰모토 민스케(松本民介), 이와모토 요시후미(岩本善文), 후지토미 구니다로(藤富國太郞), 나리키요 다케마쓰(成淸竹松), 사노 히고쿠라(佐野彦藏), 미나미 겐베이(南源兵衛) 등 경성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자본금 50만원에 불입금 12만 5천원 규모로 세운 흥행 목적의 주식회사이다. 1921년 4월 설립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는 활동사진관 신축에 나서 1921년 10월 15일 중앙관을 개관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관이자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특약관으로 “막대한 자본과 좋은 입지조건, 그리고 비교적 잘나가는 변사와 오케스트라로 경성 키네마계를 지배”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앙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제국키네마에서 제작한 일본 영화와 이태리 영화가 중심이었다. 중앙관 신축을 시작으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경성과 인천에 있는 활동사진관을 인수하여 흥행 및 배급을 강화하고 영화촬영소를 세워 영화제작에 나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풍부한 자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이러한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앙관에 근거지를 둔 영화제작 조직은 극동영화구락부(極東映畵俱樂部)였다. 극동영화구락부는 1922년 9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요 인물들인 나리키요 다케마쓰, 이와모토 요시후미, 이와타 센타로(岩田仙太郞)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나리키요 다케마쓰의 아들인 쇼치쿠 촬영기사 나리키요 에이(成淸榮)가 전속 촬영기사였으며 중앙관에서 연쇄극을 공연했던 오미 후미노스케(五味文之助)가 이끄는 연쇄극단이 전속 배우로 합류하였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는 가장 먼저 경성일일신문사(京城日日新聞社)에서 주최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大阪毎日新聞社)와 만철(滿鐵) 간의 야구경기의 실사 영화를 촬영했고 이어 극영화 <국경>을 제작했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 제작한 <국경>은 조만국경 지역을 배경으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가들로 상상할 수 있는 마적단을 토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로 인해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상영이 재개되지 않았다. 영화 개봉 하루 전, 경성 시내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자극시킬 만한 내용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경찰이 금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극동영화구락부는 제대로 된 활동 없이 문을 닫았다. 1920년대 중앙관은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비롯해 마키노키네마, 동아키네마 등의 영화를 상영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으로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1922년 10월에는 제국키네마가 중앙관을 직영하게 되면서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다. 제국키네마에서는 새로운 경영진을 보내 중앙관을 운영했는데 개관 당시 경영을 맡았던 히라노 후쿠마쓰(平野福松)를 비롯해 나카야마 로게쓰(中山朧月)가 다시 경영자로 들어왔으며 변사진도 새롭게 바꾸었다. 하지만 제국관으로의 전환은 큰 효과를 얻지 못한 채 적자만 누적되자 문을 닫게 된다. 1923년 제국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이름을 중앙관으로 다시 바꾼 인물이 오모토(大本)와 모리(森) 두 사람이었다. 이들 새로운 경영자들은 제국키네마와 관계를 끊고 오사카로 건너가 쇼치쿠 을부(乙部)영화를 수입하기로 하고 쇼치쿠 특약관으로 전환했으나 경영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관은 경성의 유서 깊은 여관인 파성관(巴城館) 주인이자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주인 마쓰모토 민쓰케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 후지모토 쇼죠(藤本省三)를 지배인으로 내세워 경영을 시작했다. 후지모토는 쇼치쿠 영화를 대신하여 마키노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하였는데 마키노 영화에 대한 호평이 늘어나면서 중앙관의 운영은 점차 안정되었다. 1925년 마쓰모토 민쓰케가 중앙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마키노키네마와 합병한 도아키네마(東亞) 직영으로 바뀌었으나 마키노 쇼죠가 도아키네마에서 나와 마키노프로덕션을 설립하게 되자 중앙관은 도아키네마 직영에서 마키노프로덕션 직영으로 바뀌게 된다. 자연히 중앙관의 영화도 마키노 계통의 영화를 상영하였다. 이 시기 중앙관은 다른 영화관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불황과 1926년부터 시행된 필름검열 수수료 부담으로 인한 비용 증가 등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1930년 8월 15일부터는 위층 20전, 아래층 10전의 입장료를 받는 등 프로그램에 따라 입장료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의 가격 인하를 주도하였고 캐러멜회사와 제휴하여, 입관자들에게 캐러멜을 위층 6개 아래층 4개씩 나눠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중앙관은 1930년 1월 경성의 일본인 극장 중 처음으로 토키영화를 상영하였으며 1930년 4월 25일 데이코쿠키네마의 히트작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何が彼女をさうさせたか)를 시작으로 데이코쿠키네마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조선극장에서도 상영되었는데 5년여 동안 조선으로부터 차단된 제국키네마 영화가 조선에서 상영되는 계기였다. 1931년 11월 중앙관은 오다 유키치(小田勇吉)가 경영을 맡았다. 이 당시 데이코쿠키네마가 신코키네마로 바뀌면서 중앙관 역시 신코키네마의 특약관으로 있었다. 하지만 중앙관 운영권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기자 중앙관 경영자 오다는 1934년 11월 경성흥행협회 회장인 경성극장(京城劇場)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와 부회장인 조일좌(朝日座)의 오이시 사다시치(大石貞七)를 공동경영자로 끌어 드렸다. 1936년 들어 약초극장과 명치좌, 황금좌 등 신축 영화관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경성의 영화관은 크게 요동치게 된다. 같은 해 9월 중앙관은 신코키네마와 절연하고 다이토영화사의 조선봉절관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지만 경영 악화로 인해 고전하게 된다. 1940년 10월 17일 중앙관 역시 새롭게 개장 후 개관하게 되면서 이름을 중앙영화극장으로 바꾸고 신코키네마 2번관이 된다. 운영자 역시 바뀌어 조일좌 운영주 오이시 사다시치가 맡았다. 하지만 중앙영화극장은 인근에 위치한 신코영화 봉절관인 경성극장에 비해 입장료가 불과 10전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에 관객들을 유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경성극장이 영화관으로 전용된 후 경성의 일본인 전용 연극극장이 전무하던 상황이었기에 운영자 오이시는 중앙영화극장을 연극극장으로 전환할 것을 고민하게 된다. 오이시는 가장 먼저 조선악극단에 위탁경영을 제의했으나 교섭에 실패했다. 이어 조선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던 도호와 협의를 시작하여 1940년 12월 중앙영화극장을 신코영화의 2번관에서 도호의 2번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름도 동보문화극장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문화극장이라는 이름이 문화영화와 시사영화 전문 상영관이라는 인상을 주었기에 1941년 7월 이름을 동보중앙극장으로 개칭하였다. 영화배급 통제가 실시되면서 홍계 상영관으로 있었던 동보중앙극장은 1944년 9월부터 연극장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중앙극장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1945년 5월에는 전창근, 김태진 등이 주축이 된 극단 태양을 전속 극단으로 두었다. [자료] 1960년대 중앙극장(국가기록원) 해방 후 중앙극장은 연극전용관에서 영화관으로 바뀌었으며 흥행업계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던 김상진(金尙鎭)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었다. 1950년대 벽산그룹의 모태가 된 불이무역(不二貿易)의 김인득(金仁得)이 소유하고 있던 중앙극장은 1998년 3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영화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중앙시네마로 바꾸었으나 벽산그룹이 도산하면서 2010년 폐관하였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중앙관 개관 광고(《경성일보》, 1922.10.15) [자료] 매일신보, 1921.03.09. 경성 ( 京城 ) 에 우 ( 又 ) 상설관 ( 常設館 ) / 일홈은 즁앙관이고 자본금은 오십만원 경셩의 연예계ᄂᆞᆫ 종ᄅᆡ로 잘 발뎐이 못되고 도리혀 쇠하 야 가ᄂᆞᆫ 모양이오 졈졈 활동사진을 인하야 시민의 연예와 오락 ᄎᆔ미가 ᄉᆡᆼ기여 오ᄂᆞᆫ 바 현ᄌᆡ는 내디인 편이 활동사진 상설관이 셰시나 잇고 됴션인 전문의 상설관은 다만 둘밧게 업ᄂᆞᆫ데 또 이것ᄲᅮᆫ으로도 시민의 긔ᄃᆡ를 맞츄어 줄 설비와 ᄉᆡ로운 ᄉᆞ진을 속히 뎨공하지 못하ᄂᆞᆫ 것이 유감되여셔 이 결ᄒᆞᆷ을 보츙하고 ᄯᅩ 됴선 만주에 자랑ᄒᆞᆯ만한 완전히 설비한 상설관을 건설하야 보려고 지ᄂᆞᆫ번 ᄅᆡ로 시ᄂᆡ 유지ᄌᆞ들에 의하야 그 계획이 진ᄒᆡᆼ되ᄂᆞᆫ대 이번에 아죠 허가를 엇어셔 됴선활동사진주식회사가 츌현하게 되엿ᄂᆞᆫ대 ᄌᆞ본금은 오십만원이요 쳐소ᄂᆞᆫ 영락뎡 1 뎡목 상품진렬관 압이오 ᄅᆡ월에 챵립 총회를 열고 쇽히 역사를 하야 ᄶᅡ른 긔ᄀᆞᆫ에 쥰공하고 즁앙관 ( 中央館 ) 이라고 일홈을 진다ᄂᆞᆫᄃᆡ ᄆᆡ우 찬셩자가 만타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03.08 . 조선활동진보 ( 朝鮮活動進陟 ) 경성 영락정 상품진열관 전 ( 前 ) 에 상설관을 건설하고 활동사진 급 ( 及 ) 차 ( 此 ) 에 부대하ᄂᆞᆫ 영업을 행ᄒᆞᆯ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기보와 여 ( 如 ) 히 창립사무가 진척하여 발기인의 부담주를 정한후 찬성주의 할당에도 착수하였ᄂᆞᆫᄃᆡ 하여간 자본금 50 만원으로 총 주수 1 만주에 불과ᄒᆞᆷ으로 주주를 광 ( 廣 ) 히 일반 시민에 모집하고 발기인의 독점의 폐를 피 ( 避 ) 키 위하야 발기인의 특주ᄂᆞᆫ 150 주씩 4 천주로 정하였ᄂᆞᆫ대 발기인 중에 다수히 주를 요구하ᄂᆞᆫ 자가 유하야 점차 주식분배 상 부심 ( 腐心 ) 중인바 여하여간 유리한 활동사진흥업의 영리 회사임으로 찬성인이 속출하야 기히 이배 반의 신입 성적을 거 ( 擧 )하 얏스며 일양일 ( 一兩日 ) 중에 찬성주의 할당을 요 ( 了 )하 고 일천주를 할 ( 割 )하 야 일반에 모 ( 募 )하 기로 ᄒᆞᆯ 터이며 창립사무소를 영락정 경매조합에 치 ( 置 )하 야 창립사무를 급속히 하ᄂᆞᆫ 중이라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03.16 . 조활창립총회(鮮活創立總會) 조선 활동사진 회사 래 ( 來 ) 십구일부터 이십삼일 지에 제일회 불입을 료 ( 了 ) 고 래 사월 칠일 창립 총회를 개최 터인대 창립 총회 종료와 공 ( 共 ) 히 직 ( 直 ) 히 상설관 건축에 착수 다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10.11. 중앙관 개관 ( 開館 ) 피로 ( 披露 ) 예 ( 豫 ) 히 공사중이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경영에 의한 중앙관 ( 영락정 1 정목 ) 은 수 ( 遂 ) 히 공사 준공 되얏슴으로쎠 10 일 당국 검사를 종료하얏슴으로 13 일 개관피로연을 겸하여 제국활동사진을 시사ᄒᆞᆯ터인대 초대 인원은 관민 유력자 신문기자 주주 전부에 긍 ( 亘 ) 하야 약 1,500 명의게 각각 초대장을 발하얏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4.06.26. 미국영화 상영중지 / 대정관과 중앙관 일본이 미국의 쳑하 형셰 로 고됴되야 최근에 이르러셔 젼국에셔 각죵 물품을 쳑하 동시에 일반 화 ( 華客 ) 의 환심을 사고 부심하 민쳡 상인들은 벌셔브터 간판 ( 看板 ) 의 미국이라 글발을 삭졔하며 혹은 미국품을 팔지안는다 광고를 널리하야 연히 미 긔분이 농후하야 가는 터인바 경셩 활동 진 상셜관 ( 活動寫眞 常設舘 ) 에셔 내디 각 디방에서 미국 「 필림 」 을 쳑하 영향을 바다 관 들도 미국 사진을 죠와하지 안는 경향이 잇슴으로 대졍관 ( 大正舘 ) 에셔 솔션하야 불일간 미국영화 ( 米國映畵 ) 를 즁지하고 시대물 ( 時代物 ) 로써 보츙하고 계획한다하며 한 동업 즁앙관 ( 中央舘 ) 에셔 이에 공명하야 미국 진 대신에 목야 ( 牧野 ) 의 독특한 시대극 ( 時代劇 ) 으로쎠 보츙하고자 게획중이라 대 대졍관에셔 벌셔브터 문압을 장식하야 잇 만국긔에셔 미국긔를 여바렷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