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 감독
- 추이시웨이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장첸, 리아오판, 니 니, 황각, 류화
배우 이월화(1904~1933,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배우의 표현수단인 몸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인 동시에 작품과 관객을 잇는 최초의 통로가 된다. 텍스트가 추상적인 문자로 쌓아올린 성채라면, 관객은 배우의 육체를 안내자 삼아 비로소 비밀스러운 문을 발견한다. 객석에 불이 꺼지면 관객들은 광막한 어둠을 불안스레 응시하지만 무대 위나 스크린 속에서 익숙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안도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텍스트의 내적 질서는 배우의 몸을 통해 구체적 형상을 얻고, 눈앞에 놓인 허구의 세계는 비로소 인간 사회를 들여다보기 위한 창문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배우는 몸을 통해서만 관객에게 현시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배우는 필연적으로 공공의 시선 앞에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출이란 배우라면 응당 짊어져야 할 숙명이겠지만 문제는 그 시선이 배우의 몸을 대상화하여 눈요깃거리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더군다나 전근대적 도덕관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여배우는 훨씬 더 가혹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시각적 쾌락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여배우들은 종종 화류계 여성들과 동일시되곤 했으니 이런 환경에서 여배우가 쉽게 출현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배우는 끝내 근대극장의 당당한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여배우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설움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테니 각도를 조금 달리해서 질문해보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배우의 역할은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일까? 또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여배우는 어떻게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의 지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사실 여성 연행자들의 존재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예기(藝妓)들을 양성하기 위한 전통적 교육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들 중 몇몇은 협률사, 장안사, 연흥사 등의 초창기 극장들이나 ‘구극’을 주로 제공하던 광무대에서 전문 소리꾼으로 활약한 바 있었다. 그러나 여배우는 기술을 통해 여성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존재감 그 자체 를 전시하던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별화되었다. 즉, 여배우는 생물학적 성의 동일성에 힘입어 기술로 모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단번에 뛰어넘는 것이 가능했다. 여배우의 등장을 필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재현의 사실성을 둘러싼 당대의 인식체계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 것이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일이라는 생각은 특정한 시기를 거쳐 비로소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1910년대까지 배우와 배역의 성적 불일치는 그리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유래하여 1910년대 극장가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한 신파극은 남성 배우의 여장 연기를 일반적인 관습으로 채택했다. 이른바 ‘여형배우(おんながた)’는 여성의 무대 출연이 불허되었던 에도 막부시대 이래 가부키의 관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여형배우’는 형식미학을 중시하는 가부키의 특징과 맞물려 미학적 경지로서 숭앙되기도 했다. 남성 배우가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보이는 재현의 기술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예의 궁극적 도달점이라 여겨졌다. 한국의 신파극단들도 이러한 관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신파극단들은 여성 역할을 맡아 일세를 풍미했던 여형배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수철은 <장한몽>의 여주인공 심순애 역할을 통해 당대의 대표적 여형배우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사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수철의 사진을 보면 그의 외형은 여성스럽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비록 가발과 분장으로 가려놓긴 했지만 겉보기에도 그의 체격은 굉장히 건장해 보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는 여성을 흉내낸 그의 연기가 당대의 관객들에게 충분히 그럴싸한 것으로 보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고수철 (사진: 《조광》, 1935. 12.)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당대의 관객들은 극의 등장인물을 통해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을 발견하기보다 그 인물이 표상하는 인간 유형이나 그들의 갈등을 통해 제의적으로 모방된 도덕체계를 떠올릴 때가 많았다. 한국의 전통연희인 탈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탈 속에 숨겨진 배우의 진짜 얼굴보다는 부네나 각시탈로 표상된 캐릭터의 고유한 성격에 관심을 기울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극은 사유하는 존재 로서 내면을 가진 인간의 형상을 그려내고자 했고, 이때 표정이나 동작은 이를 외화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새롭게 규정되었다. 이제 배우는 표현하기에 앞서 존재해야 하는 이 로 지목된 것이다. 이른바 이성장(異性裝) 연기란, 남성들의 여장 연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반대로 여성들이 남성성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 시작된 소녀가극은 오늘날까지도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도 ‘배구자악극단’을 비롯한 소녀가극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또한 해방 후에는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창극의 형태가 유행하여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 정년이 >(정지인, 2024)가 소재로 삼았던 ‘여성국극’이 그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례들이 특수한 흥행가치를 만들어내며 인기를 끌었던 것과 달리 신극운동이 본격화된 1920년대에 들어서며 ‘여형배우’는 아마추어의 영역에서만 통용될 법한 결여태라 인식되기 시작했다. 1921년에 전 조선을 순회하며 공연활동을 펼쳤던 ‘극예술협회’는 식민지 조선 신극운동의 효시를 쏘아올린 집단이었다. 재래의 신파극단과 차별화되기 원했던 그들은 무대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여형배우’라는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는데,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인 <최후의 악수>의 여주인공 ‘화봉’ 역할은 마해송의 몫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것은 공연 준비가 촉박한 상황에서 여배우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반면, 2년 뒤인 1923년에 창립공연을 가진 토월회 는 여배우의 출연이 곧 공연의 성패와 직결된 요소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배면에는 토월회가 여타 학생 소인극단들과 쉽게 동일시되기 어려웠던 사정이 개입되어 있다. 토월회 역시 극예술협회와 마찬가지로 동경 유학생들의 모임이었지만, 극예술협회가 재일본 노동자와 고학생 단체인 ‘동우회’ 후원을 목표로 순회극단을 조직했던 것과 달리, 토월회는 공연 그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자신들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토월회 공연 당시 촬영 추정 사진 일본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 중에서 예술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있는 사람들이 조직한 토월회에서는 이번 여름 휴식을 이용하여 경성에 돌아와 임시 사무소를 낙원동 149번지에 두고 연극회와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겠다는데, 연극은 금 6월 하순에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유-젠․피롯트의 『기갈』과 안톤 체호프의 『곰』과 사람의 영혼까지 웃기게 하고야 만족하는 희극작가 버나드 쇼 씨의 희극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엇이라고 거짓말을 하엿나』와 박승희 씨의 『길식』 등을 올릴 터인데 전부 한 막거리로 의복과 배경은 다 동경에서 마치어 가지고 나왔다 하며...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3 』, 202쪽. “토월회 제일회의 연극공연회-동경 류학생 속의 유지자로 조직된”, 《동아일보》, 1923. 6. 13. 기존의 학생극단들은 연극을 매개로 삼아 사회사업에 소요되는 기금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토월회의 경우, 별도의 공연 취지 대신 조선의 문화 향상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목표를 내세웠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토월회의 공연에서는 으레 학생 순회연극단의 공연에 수반되었던 사회자의 행사 취지 소개나 개막 선언과 같은 순서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동우회순회연극단이 《동아일보》의 공식적 후원을 얻어 전 조선을 대상으로 한 순회연극을 기획할 수 있었던 반면, 토월회는 자발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토월회는 그들의 활동에 호의를 보이던 일본인에게 600원의 자금을 얻어 공연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일개 학생단체에 불과했던 토월회가 거금을 융자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심인물인 박승희의 아버지가 최초의 주미공사 박정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토월회의 동인들 중에는 박승희와 같은 유력가의 자제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의 존재는 언론이 기존의 학생극단에 부여했던 표상, 즉 ‘고학생 단체’로서의 성격을 희석시킨 요인이었다. *주1 그렇기에 토월회는 동경 유학생 중 예술에 뜻을 둔 ‘유지자’들의 단체로 소개되었을 따름이었다. 즉, 토월회에게 있어 ‘예술’이라는 레토릭은 그들의 공연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했던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었다. 예술이라는 막연한 지향점은 ‘ 무대 사실주의의 확립 ’이라는 목표로 구체화되었으며, 토월회가 무대장치에 역점을 두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다행히 토월회는 동경미술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어선 무대장치를 갖출 수 있었다. 1923년 8월에는 부속기관인 ‘토월미술연구회’가 결성되어 무대장치를 전담했는데, 안석주, 윤상열, 이승만 등 다수 화가들의 열성적인 참여는 토월회가 보다 정교한 무대장치를 구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 결과 토월회의 무대장치는 일본 신극운동의 본산이었던 ‘축지소극장’의 수준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라 평가되기도 했다. 토월회가 여배우를 섭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도 ‘무대 사실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촉박한 연습 기간을 고려할 때, 토월회가 선정한 네 편의 작품에서 여성 등장인물을 모두 여배우로 채우기 위해서는 복수의 여배우가 필요했다. 이서구와 박승희는 교대로 귀국하여 여배우를 찾아 헤맸는데, 우여곡절 끝에 진명여고 학생이었던 이정수와 이혼 후 가정에 머물던 이혜경을 섭외할 수 있었다. 다만, 배우 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들만으로 공연을 진행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기에, 신극좌와 민중극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던 이월화 가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다. 동경에서 연극을 연구하던 어린이들의 모임이 곧 토월회이올시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모국 한 끝에 극에 대한 새 빛을 찾으라고 그 첫소리를 금 29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외치려 한 것이올시다. 각본은 구미의 문호의 작품을 중심으로 차림은 전부 동경에서 가져다가 오직 열성 하나로만 모든 것과 싸워 앞길을 개척하려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과 같지 못한 우리의 일이오라, 뜻밖에 여배우에 대한 문제가 돌발하여 저희는 도저희 저희의 양심을 거스르지 못하겠으므로 다시 7월 4일로 공연날을 두 번 연기하였사오니 깊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3 』, 223쪽. “토월회 공연 연기”, 《동아일보》, 1923. 6. 29. 위의 인용문은 예정된 창립 공연을 앞두고 토월회가 신문에 게재했던 광고문이다. 토월회는 구미 문호의 작품을 각본으로 선정했음은 물론, 무대 배경을 전부 동경에서 가져다 만들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변별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고문의 실제 목적은 공연 일정을 미루게 된 사정을 밝히면서 관객들의 양해를 구하는 데 있었다. “여배우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서 부득불 공연일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박승희의 회고에 따르면 문제를 일으킨 여배우는 이월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2 여배우 중 가장 뒤늦게 합류했던 이월화는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에 어머니가 연극 출연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출연을 고사한 바 있다. 이월화의 출연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토월회는 공연일정을 연기하기로 하는데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토월회는 이미 창립 공연 일정과 장소를 한 차례 변경한 전력도 있었다. *주3 그렇지만 토월회는 “도저히 저희의 양심을 거사리지 못하겟슴으로” 연기를 결정했다고 밝히면서 양해를 구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그만큼 토월회가 여배우의 존재를 중시했다는 점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김기진을 비롯한 동인들은 직접 이월화의 집에 찾아가 그의 어머니를 설득한 끝에 겨우 출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으며, 다행히 창립공연은 애초의 캐스팅대로 진행되었다. 안타깝게도 토월회의 창립공연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큰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박승희가 회고했듯, 토월회 공연은 “은그릇에 담아 놓은 설렁탕”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훌륭한 무대장치와는 대조적으로 아마추어의 티를 벗지 못한 연기가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토월회 동인들의 애초 계획은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한차례 공연만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명예회복을 위해 곧바로 2회 공연 준비에 돌입한다. 동경대진재 이후 급격히 흉흉해진 분위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일본에 돌아갈 수 없었던 상황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토월회가 절치부심하여 준비한 2회 공연은 연일 만원관객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둔다. 창립공연의 레퍼토리가 네 편의 단막극으로만 구성되어 단조로웠고, 대중들에게 난해한 내용일 수 있음을 파악한 그들은 보다 대중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자 했으며, <알트 하이델베르히>와 <부활>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선정했다. 그리고 두 작품의 주연을 맡았던 이월화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사실 이월화를 캐스팅하는 과정에는 약간의 마찰도 있었다. 이미 기존의 신파극단들도 제한적이나마 여배우를 기용하기 시작했으니 여배우를 섭외하기 위해서는 기성극단에 문의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토월회 동인들은 “신파에 물들지 않은 무경험자”를 찾고자 했기에, 신파극단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던 배우들을 선호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월화의 영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월화는 토월회에 합류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판단의 배후에는 다름 아닌 영화의 영향력이 가로놓여 있다. 이화진이 지적한 것처럼 당대의 관객들은 같은 시기, 심지어 같은 극장에서 서양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 *주4 카메라의 기계적 재현성에 기반한 영화가 이미지의 리얼리즘을 태생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여형배우는 영화에서 쉽게 용인될 수 없는 관습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월화는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였던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의 주연배우이기도 했다. 토월회 공연이 있기 불과 몇 달 전에 공개된 이 영화를 통해 이월화는 실제 여성에 의해 재현된 여성성의 표본을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던 바 있다. 어쩌면 토월회가 이월화를 통해 획득하고 싶었던 것은 여전히 신파극의 태를 벗지 못한 그의 무대 경험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보증된 이미지의 사실성 그 자체 였다고 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분명 토월회의 공연은 여배우의 기용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보편적 상식으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점차 영화 관람에 친숙해진 당대의 관객에게 배역과 배우 성별의 불일치가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토월회가 그러한 흐름을 민감하게 읽어내고자 했다는 점이다. 식민지기 극장은 연극과 영화가 공존했던 공간이었고, 이곳에서 형성된 관객들의 취향은 생산자들의 기획과 긴밀한 피드백 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극장 속에서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을 마련해 나간다. < 지나가의 비밀, 일명 흑진주 >(유장안, 1928) 중 이월화(우)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 주1. 김기진, 김복진 형제의 아버지는 충북 영동의 군수였으며, 이서구는 안양 부호의 자제였다고 알려져 있다. (박승희, 「토월회 이야기」, 『사상계』, 1963. 5.) 주2. 박승희, 「토월회 이야기」, 『사상계』, 1963. 5. 주3. 토월회의 당초 계획은 “륙월 하순에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공연하려는 것이었으나, 공연 직전에 “예뎡을 번경하야 오는 이십구일부터 시내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닷세 동안을 흥행”하는 것으로 변경을 고지한 바 있다. (“토월회 공연 연기-이십구일부터 개시”, 《동아일보》, 1923. 6. 28.) 주4. 이화진, 「여배우의 등장 - 근대 극장의 신체와 섹슈얼리티」, 『여성문학연구』 28, 한국여성문학학회, 2012.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은 2차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초에 촬영되었고 그해 12월에 개봉되었다. 전쟁 중에 만들어져 전쟁 직후에 공개된 셈이다. 이런 정황은 이 영화가 전쟁 영웅을 미화하는 선전영화일 것이라고 짐작하도록 이끈다. 누구보다 존 포드는 전쟁기록 촬영 팀을 이끌고 자진 입대한 ‘애국자’였고 이 영화 연출을 위해 본국으로 불려 오기 전까지 정보장교로서 태평양, 북아프리카, 노르망디를 누비고 다녔다. 크레딧의 감독 이름도 ‘John Ford Captain U.S.N.R.’(해군 예비역 대위 존 포드)로 되어 있다. 초계 어뢰정 함장인 두 주인공 중 브릭 중위 역을 맡은 배우 로버트 몽고메리는 톱스타 시절에 과감히 입대한 뒤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초계어뢰정 함장 조니 벌킬리(Johnny Bulkeley)의 부관으로 1943년 남태평양 전투에 참여했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구축함 작전장교를 맡았다. (스크린 캐릭터로만 짐작하면 가장 앞장섰을 법한 존 웨인은 의아하게도 입대하지 않았는데, 이 ‘오점’ 때문에 존 포드는 이 영화 촬영 때 존 웨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어 로버트 몽고메리가 뜯어말릴 정도였다고 한다. 존 웨인이 입대하지 않은 이유는 가족문제와 계약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요컨대,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은 전쟁 중에 군인들이 만든 전쟁영화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우리의 짐작은 완전히 빗나간다. 수십 대의 전투기까지 동원된 대규모 해전 장면이 두 번 등장하지만 화면에는 종종 회한의 기운이 짙게 번져있고 인물들은 비장하기보다 심드렁하거나 침울하다. 그러고 보면 제목부터 선전영화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들은 소모품이었다’가 아닌가. 그렇다고 반대로 이 영화를 전쟁의 참혹함에 몰두하는 반전영화라고 말하는 건 사태를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은, 포드의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단일한 해석과 손쉬운 범주화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미묘한 표정과 시적 정감으로 가득하다. 앞서 소개한 두 영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도망자 >와 달리, 존 포드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열렬한 지지자 린지 앤더슨(Lindsay Anderson)과의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자신은 ‘명령에 따라’ 만들었을 뿐이고 촬영한 뒤에는 다시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편집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음악도 제작사 간부가 임의대로 넣었다는 것이다. 포드는 인터뷰 한 달 뒤 앤더슨에게 “<익스펜더블>을 봤는데, 당신이 맞았어”라고 전보를 보내긴 했지만, 말년의 특강에서 이 영화를 싫어한다고 다시 말했다. 인터뷰, 특히 비평가와의 인터뷰를 싫어했던 존 포드가 앤더슨에게 진심을 말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적어도 포드 스스로 만족하는 작품에 속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앤더슨은 이렇게 썼다. “내켜서 만들었건 그렇지 않건 간에,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을 보면 그 주제가 포드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음이 분명하다.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심원한 사적 체험이 명료하고도 힘 있게 담겨 있다. 입대 권유라는 의도가 처음부터 제작과정에 개입되었다 해도, 결과물은 그것을 초월한다. 근본적으로, 이 영화의 가치와 인간적인 반응은 <분노의 포도>의 그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동지애, 신념에의 헌신, 패배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인내의 영혼을 두 영화는 공유한다. 강렬하고 일관된 표현을 통해 이 영화는 걸출한 시적 성취를 이루었다.” 나도 이 영화를 존 포드의 10베스트에 넣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그 이유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좋은 영화가 좋은 이유를 말하는 건 늘 난감한 일이지만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경우엔 좀 더 까다롭다. 앤더슨의 말에는 대체로 동의할 수 있지만 얼마간의 보충설명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약간의 우회로를 택해보자.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1941년 필리핀 마닐라에 주둔 중인 초계어뢰정 함대의 지휘관 브릭 중위(로버트 몽고메리)와 부지휘관 러스티 중위(존 웨인)는 라이벌이자 실전 명령이 떨어지기를 고대하는 전투적 해군 장교다. 그들은 소형 초계정으로 거대한 일본 구축함과 순양함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발휘해왔다. 하지만 일본군은 막강한 화력과 거대 병력으로 필리핀의 각 미군 주둔지를 포위해온다. 미군 사령부는 필리핀 철군을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은 브릭과 러스티가 이끄는 초계정을 타고 필리핀을 탈출한다. 맥아더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지만, 필리핀에 남은 수만 명의 미군 병사들은 그저 일본군의 진격을 지체시키고 그들의 병력과 무기를 소진케 하는 한시적 용도의 소모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브릭과 러스티는 알고 있다. 두 장교 역시 병사들을 남겨두고 필리핀을 떠나는 마지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이 이야기는 전쟁 중에 자원입대 고취라는 목적 아래 메이저 제작사가 만든 전쟁영화에는 전혀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누가 자원해서 소모품이 되려 할 것인가. 자원입대 고취라는 목적이 없었다면 왜 미군은 이 영화에 대대적인 지원을 했을까. 제작사의 기획 의도, 제작과정에 관한 증언과 자료가 별로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앤더슨에게는 극히 부정적으로 말한 포드가 이 영화를 만들 때는 어느 때보다 열성적이었다고 존 웨인은 회고했다. 포드에게 이 영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제작사의 개입으로 그의 의도가 어디선가 훼손된 것일까. 태그 갤러거에 따르면 이 영화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고 흥행성적도 10위 안에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린지 앤더슨 외에 이 영화를 포드의 중요한 작품으로 다룬 후대의 비평가도 거의 없다. 말하자면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은 존 포드 영화 중에서도 유달리 기묘하고 애매한 자리에 놓인 영화다. 영화의 내부로 들어가면 애매성은 배가된다.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의 가장 특별한 장면은 맥아더 장군의 쇼트다. 그는 이 영화의 주요 인물이 아니며 탈출하는 순간에 잠깐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이 장면의 카메라는 맥아더를 신격화한다(#1). 그가 모습을 보이자 병사들의 얼굴에는 경외의 눈빛과 표정이 번져가고 국가만큼 유명한 공화국 찬가(The Battle Hymn of the Republic)가 울려 퍼진다(#2, #3). 철없는 한 병사는 그에게 사인을 부탁한다. #1 #2 #3 맥아더의 비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사는 없지만 그의 발언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4은 영화의 시작 장면이고 #5는 마지막 장면이다. 모두 맥아더의 말이며,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도 실은 그의 명령에 의해 진행된다. 맥아더는 특정 장면의 시각적 표상에서뿐만 아니라 서사의 질서에서도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이라는 영화적 소우주의 보이지 않는 군주다. #4 #5 이런 장면들은 이 영화를 선전영화라고 보는 관점을 지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시에 맥아더의 신격을 은밀히 훼손한다. #1의 다음 장면에서 맥아더를 실은 배가 떠나자 병사들은 그것을 물끄러미 본다(#6). 그리고 떠나는 배를 흘끔흘끔 보며 반대 방향으로 터덜터덜 행진하기 시작한다(#7). 다음 쇼트에서 그들은 소실점을 향해 걸어간다(#8).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죽음 혹은 포로이다. 신적 영웅은 신도를 버리고 삶을 향하며, 그를 떠나보낸 신도는 죽음을 향한다. #6 #7 #8 이 대목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장교 브릭과 러스티를 실은 비행기가 이륙한 직후 장면에 병사들은 역시 소실점을 향해 힘없이 걷고 있다(#9).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들은 하늘을 바라본다(#10). 그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마지막 쇼트가 바로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맥아더의 말이 새겨진 #5이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 비행기를 쳐다보던 병사들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영웅은 그들을 버렸다. #9 #10 #5 아마도 브릭과 러스티(그리고 맥아더)는 자신의 부하들을 사지에 두고 떠나는 포드의 유일한 영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전쟁영웅을 비판하는 반전영화인가. 그렇게 말하는 건 초점이 빗나간 것 같다. 러스티(존 웨인)가 마지막 순간에 비행기에서 내리려 할 때(물론 부하들과 함께하기 위해) 브릭은 “자넨 누굴 위해서 일하고 있나? 자네 자신인가?”라고 말하며 그를 주저앉힌다. 여기서 영웅의 명예율과 국가의 명령은 충돌한다. 스스로 전쟁의 최전선에 나섰던 서부사나이 존 포드는 전쟁 막바지에 만든 이 영화에서 두 계율이 화해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른다. 이 영화의 애매함은 화해할 수 없는 두 계율 앞에 선 영웅의 망설임과 깊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존 포드가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에서 찍은 건 망설임이다. 물론 앞 장에서 살펴본 전전(戰前) 영화들에서도 포드의 주인공들은 확신에 찬 고결한 속인이 아니라, 망설이고 주저하는 범속한 성인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망설임은 인물의 망설임이 아니라 쇼트의 망설임이다. 브릭과 러스티는 전투에 나서고 싶어 안달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포드의 쇼트는 인물의 심리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지배하는 모종의 공기 혹은 보이지 않는 질서의 리듬을 따른다. 무언가가 그들을 멈춰 세우거나 그들의 행위를 지나쳐간다. 그것이 이 영화의 특별한 시적 정취를 빚어낸다. 이 영화의 매혹적인 시정(詩情)은 한두 가지 요소로 환원될 수 없으며, 프레임, 미장센, 인서트 컷, 리듬이 모여 빚어내는 합주의 효과다. 이 영화를 분석자의 태도로 반복해서 볼 때도 어느새 그 합주의 능란함에 홀려 평자의 임무를 잊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심도 화면이다. 나는 포드의 영화를 볼 때마다 종종 동굴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가진다. 존 포드는 심도 화면의 대가이다. 무성영화 시절부터 그는 화면의 전경 중경 후경을 동시에 활용했다. 포드는 고전기 감독 가운데 2차원의 화면으로 3차원의 효과를 빚어내는 데 가장 능숙한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심도 화면은 포드의 영화 가운데 가장 공간 중심적이며, 가장 정서적이다. #11 #12 #13 초반에 등장하는 이 장면(#11) 은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이들이 이미 어둠의 운명 깊숙이 가라앉아있음을 암시한다. 브릭과 러스티가 일본군 폭격기와 맞서 싸우고 돌아오자 그들의 진지는 이미 폐허가 되어있는 장면(#12), 출정을 앞두고 죽음을 앞둔 전우를 문병 온 장면(#13) 역시 깊은 심도로 황량하거나 어둡게 묘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심도화면은 소실점을 향한 병사들의 수직 혹은 사선방향의 이동 쇼트에서도 등장한다. 그것은 짐작할 수 있듯 죽음을 향한 행진이다.(#14, #15, #9)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에는 포드의 서부극과는 달리 수평 이동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움직임은 소실점을 향한 수직 이동 혹은 사선 이동이다. 인물들은 관객으로부터 멀어져 소멸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풍기는 깊은 회한의 정서는 이 움직임의 방향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14 #15 #9 이 영화의 심도화면과 대구를 이루는 것이 인물화 쇼트라고 부르고 싶은 클로즈업이다. 일반적으로 클로즈업은 사건이나 상황이 벌어진 다음의 감정 반응을 드러내는 주관적 쇼트로 사용된다. 하지만 포드는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의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을 기록하듯이 클로즈업을 사용했다(#16, #17, #18, #19). 대부분은 클로즈업 쇼트는 렘브란트 조명을 연상시키듯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사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때 그곳의 있었던 사람들의 표정을 보듯 이 인물 쇼트들을 마주하게 된다. #16 #17 #18 #19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장소의 영화, 표정의 영화, 나아가 공기의 영화다. 무언가 하나씩 사라져 간다. 진지와 물자와 무기와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혹은 소실점을 향해 차츰 사라져 간다. 마지막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전쟁이라는 사건의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포드는 일본군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았고 그들의 공격 장면도 찍지 않았다. 전쟁, 더 정확히 말해 패배한 전투를 이처럼 자연적 소멸과정처럼 묘사하는 다른 전쟁영화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이 영화가 풍기는 애매함이라는 첫인상은 우리가 이런 영화를 접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 역시 재발견되어야 할 포드의 걸작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한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러스티와 간호장교의 저녁 식사 직후 장면이다(#20). 다른 손님들이 먼저 자리를 뜬 뒤, 남녀는 지금 문밖을 향해 가만히 앉아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이날 이후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쇼트를 오랫동안 롱테이크라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확인해보니 실제 지속시간은 10초 정도에 불과했다. 좋은 영화에는, 쇼트의 물리적 길이에 관계없이, 앞뒤의 모든 사건을 잊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아득한 순간이 등장한다. 그런 순간을 담고 있는 영화는 다른 어떤 결함들도 사소하게 만든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에선 이 장면이 바로 그런 순간을 선사한다. #20
혼자 살던 집에 두 식구가 새로 들어온 게 벌써 재작년 일이다. 남자친구가 무턱대고 주워온 고양이 두 녀석. 남자아이는 콩이, 여자아이는 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삼십대 중반을 넘기도록 집에서 동물 한번 키워본 적이 없고 고양이의 ‘고’자도 모르고 오히려 고양이에 대한 막연한 편견만 가지고 있던 나는 졸지에 두 아이의 엄마, 그것도 초보엄마가 되어 좌충우돌을 겪었다. 더욱이 아이들이 길에서 한 달을 살았던 만큼 건강상태나 발육이 그리 좋지 않았고, 특히 콩이는 ‘너무 못 먹어서’ 앙상한 몸에 회충과 설사로 고생하며 위험한 시기도 겪었다. 그리고 벌써 2년. 이제 다음 주에 2살이 되는 콩이와 뚱이는 동네 길고양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람한 체격을 지닌 이른바 ‘돼냥이’로 자랐다. 이제 나도 나름 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늘어 트위터에서 돌발상황에 당황해하는 서툰 초보엄마들에게 잘난 척하며 조언을 줄 수 있게 되었고, 늦게까지 술을 먹다가 혹은 출장을 갔다가도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귀가를 서두르고, 집 앞 골목을 다니는 길고양이들이 눈에 밟혀 대문 앞에 이따금 사료를 놓아주는 전형적인 ‘캣맘’이 되었다. 바뀐 것들이 또 있다. 사실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는, 고양이 키우는 사람들의 삶을 블로그를 통해 슬쩍 들여다 볼 때마다 그들이 너무 과민하고 때로 히스테리컬하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것에 지나치게 분노나 감격을 표현하는 것도 유난스러웠고, 때로는 ‘살아있는 동물’을 상대로 “좀 비싼 취미를 누리는 듯한”, 나아가 그걸 기어코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아이들을 기르는 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사료나 모래 외에도 온갖 고양이 장난감, 혹은 캣타워 같은 것들을 ‘지른’ 인증사진을 올리며 호들갑을 떨거나 유난히 비싼 사료와 비싼 모래를 샀다고, 혹은 ‘생식’을 먹인다며 정성을 쏟는 모습이 요란스레 느껴졌고, 나아가 “내 아이에겐 최고만을!”을 외치는 광고 속 극성 엄마들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런 식의 유난과 과민함이 실은 고양이를 향한 편견과 학대가 만연한 현실에서 유래한 일종의 자기방어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몰랐던 동물 학대, 특히 고양이 학대의 실상을,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되면서 고양이를 키우고 아낀다는 것이 일종의 ‘소수자 정서’에서 유래한 것임을 느끼게 된 것이다. 당장 가까운 지인만 해도 고양이를 키운다니까 즉각적으로 “고양이는 요물인데...”라 반응하는 걸 보면서 얼마나 놀랐던가. 아이들은 내게 기쁨과 즐거움과 위안만 주지 않았다. 과연 ‘영물’과 ‘요물’의 단어 뉘앙스의 차이는 뭘까 생각하고, 동네 식당의 주인 아주머니가 손님이 먹고 남긴 음식을 길고양이들에게 주는 걸 보며 감격하고, 동물학대 사건을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관심을 갖게 되고, 육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그러나 육식성인 아이들을 보며 자연의 먹이사슬을 받아들이게 되고, 동물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게 되고, 개고기와 동물권을 둘러싼 논쟁을 보며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고... 아이들은 내가 모르고 있던, 혹은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묵직한 생각거리들을 바로 눈앞에 산처럼 쌓아주었다. 그리고 내 삶에서의 변화와 입장 정리, 그리고 실천을 요구받는 상황에 왔다. 독립영화가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뚱이와 콩이가 내 인생의 일부가 된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창간호부터 99권을 꼬박 모았던 <키노>에서 처음 독립영화를 접하고 한독협과 인디포럼의 존재를, ‘서영집’과 ‘노뉴단’과 김동원 감독을 알게 됐지만, 오랫동안 독립영화는 내게 “그런 게 있다”는 정도의 존재였고 굳이 찾아가 접하기엔 어쩐지 두려운 대상이었다. 여러 ‘고전’ 독립영화들을 제목만 알았을 뿐 실제로 보지 못한 영화가 대부분었고, 내게 독립영화는 오랫동안 ‘정치적 주제에 너무 많이 집중하며 지나치게 선동을 주 목적으로 하거나,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지나치게 관념적인'' 영화였다. 하지만 독립영화에 좀더 가까이 가 무작정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얼마나 빙산의 일각만을 보는 왜곡된 시선에 불과했는지 알게 됐고, 독립영화가 일반적인 상업영화와는 또 다른 차원의 거대한 세계라는 걸 깨닫게 됐다. 독립영화를 통해 이루어진 ‘발견’은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미학의 탐구 가능성을 안겨주었고, 이는 영화를 보는 눈과 영화를 향한 내 사고의 차원을 한 뼘 더 넓혀주며 새로운 영화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걱정과 근심까지 받아안게 되었다. 독립영화를 둘러싼 환경과 지난한 문제들, 그리고 정책과 시장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영화가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통찰 같은 문제들 말이다. 이를테면 내가 가장 딜레마로 생각하며 고민하는 것들엔 이런 것들이 있다. 적은 돈으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보수로, 혹은 적은 돈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스탭들은 또 다른 형태로 서로 노동을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자본에 대한 일정한 경계와 때로 독립을 주장하며 만들어지는 독립영화가 사람들과 널리 교감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시장에서 어필해야 하는 상황, 혹은 시장에서 성공했을 때 겪게 되는 또 다른 문제들, 기존 자본에 기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다양한 형태의 국가 및 공적 보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다시 국가나 공공기관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등등. 만들어진 영화를 그저 보는 입장에서도 고민하게 되는 이런 것들을, 일선에서 직접 독립영화를 만들고 제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뼈저리게 느끼며 매일매일 고민할까. 사실 인디포럼도 한독협도 그리고 인디스토리와 시네마 달과 같은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도, 독립영화전용관과 디지털 영화 제작의 붐도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공동체 상영도, 독립영화 전문 온라인 배급사도, 블로그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이용한 마케팅도, 모두 당대 독립영화와 시대를 붙잡고 고민과 토론을 거듭한 끝에 거머쥔 산물이다. 그렇게 찾은 것들을 시도하며 얻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 새로이 안게 된 고민으로 또다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독립영화다. 최근 들어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공공제작’ 혹은 ‘사회적 제작’의 형식도, 어렵사리 극장개봉을 한 독립영화 감독과 배우들이 혹독하리만치 빡빡한 일정의 GV를 자청하며 계속해서 직접 관객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의 위상이 예전만 같지 않고 영화를 둘러싼 환경이 급박하게 변하는 한편 자본은 두드러지게 양극화로 편제되고 있다. 충무로에서 재미없는 영화들만 그야말로 ‘양산’되고 있는 이때, 독립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비약과 도약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 큰 싸움을 준비하며 더욱 고단하고 암울한 상황, 그리고 새로운 차원의 고민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내가 독립영화를 보고 독립영화를 지지하며 독립영화를 둘러싼 고민에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치열하게 독립영화를 고민하고 독립영화를 만들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글 쓰는 이로서 느끼는 의무감 역시 새로운 차원의 것이 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를 위해 최근 나는 한독협 비평분과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앞으로 내가 쓰는 글이 더 이상 ‘주변인’ 혹은 ‘관객’으로서 한발 물러서 있는 글이 아니라, 함께 싸우고 함께 고민하며 함께 나아가는 과정의 글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