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죽여
- 감독
- 김상훈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김주은, 김도연, 안정균, 김기두, 윤세웅, 반민정, 강동균
1. 영화에 대한 논의는 항상 ‘보는 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가진다. 영화적 경험에서 보는 이는 존재하는 이와 동일하다. 그리고 본다는 행위는 앎과 감정, 행위를 매개하며 이를 통해 발생하는 심리적, 감정적 긴장은 영화가 제공하는 쾌락과 미적 경험뿐 아니라 미학적, 정치적 역사기술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이는 광학-카메라가 내포하는 소위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과 명백한 인과율 그리고 그 세계에서 구성되는 통일적 주체라는 허구가 아니라, 사건(이미지)들의 발생과 연쇄를 즉각적으로 대면하고 반응하는 ‘끊임없는 변화 속의 주체(관람자)’ 경험을 통해 파악된다. 요컨대, 영화가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미학적 역사기술은 속박되지 않는 이미지, 그리고 안전한 관찰자의 자리를 박탈당하는 ‘보는 이’라는 이미지-시각 동학의 재구성이라는 방법론을 가질 때 비로소 권력의 시선에서 제공되는 연대기와 인과율을 벗어나 대항-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치로 게라의 < 뱀의 포옹 >은 영화-역사-정치가 절합(articulation)되는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영화는 신비한 효능을 가진 전설의 약초 야크루나(yakruna)를 찾는 독일 탐험가 테오와 그의 원주민 안내자인 만두카, 그리고 이들을 야크루나로 안내하게 될 젊은 무속인 카라마카테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카라마카테는 자기 종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폭압의 대상인 서구인 테오를 돕기 거부하고 서구적 관습을 흡수한 종족의 정보제공자(native informer) 만두카를 경멸하지만, 살아남은 종족의 생존을 돕겠다는 테오의 제안에 마지못해 두 사람과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이어서 영화는 40여 년을 뛰어넘어 노인이 된 카라마카테와 야크루나를 찾으려는 미국인 에반스의 또 다른 만남을 보여주면서, 두 명의 서구인 탐험가가 떠나는 상이한 시간의 여정을 카라마카테의 존재를 통해 느슨하게 병치시킨다. 경이에 가까운 아름다움과 날것의 이미지가 자아내는 공포가 공존하는 아마존의 풍경은 그러나 서서히 원주민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식민권력의 폭력적 현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의 여행자들은 천연고무 착취를 위한 원주민 학대나 원주민 아동들을 교화시키는 가톨릭 신부의 포악한 이면 등 서구 식민권력의 경제적, 문화적 폭력을 재현하는 장면들과 조우한다. 이 잔인한 식민지배/피지배의 무대에서 영화의 여행자들은 갈등하고 충돌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이어가면서 야크루나라는 목적을 향한 여정을 지속한다.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 리차드 에반스 슐츠 2. 실제로 19세기 독일인 탐험가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Theodore Koch-Grunberg)와 20세기 미국인 식물학자 리차드 에반스 슐츠(Richard Evans Schultes)라는 실존인물들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은 < 뱀의 포옹 >은 식민문학의 대표적 양식인 여행기(travelogue) 서사와 긴밀한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고 있다. 프론티어리즘에 입각한 서구적 영웅 서사와 기독교적 훈육제도, 공간이동 및 자연착취의 영역을 확대시킨 과학기술과 박물학, 휴머니즘과 이국애증, 제국주의적 욕망과 부르주아적 개인성에 바탕을 둔 여행기 양식은 유럽 식민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노골적인 얼굴이다. 그러나 여행기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착취에 기반한 지배/피지배라는 적대적 이분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여행기 양식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 전통과 가치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기술자가 경험하는 긴장의 양태들인데, 이는 종종 기존의 제국주의 서사의 관습과 충돌하는 반-정복(anti-conquest) 서사와 연결된다. 그러나 반-정복 서사는 제국주의적 정복 서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헤게모니를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결백을 지켜내고 싶었던 유럽의 부르주아 주체들이 활용한 재현 전략”(메리 루이즈 플랫)이다. < 뱀의 포옹 >이 서구 여행기 양식과 관련되는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가 유럽 제국주의와 맺고 있는 공모관계의 폭로라는 것이다. 영화는 테오/에반스와 카라마카테, 그리고 원주민들로 형상화되는 식민지배/피지배, 여행자/여행되는 자(travelees)라는 단순한 대립을 넘어 상이한 신념과 언어, 지식과 감정이 만나는 접촉 지대(contact zone)에서 발생하는 훨씬 복잡한 동학을 제시한다. 영화 중반의 고무나무밭 장면은 서구 자본과 (서구화된 콜롬비아인으로 제시되는) 서구 제국의 내적 주체(domestic subject), 그리고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원주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고무 채취와 노동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분노한 마카테가 채취된 고무액을 땅에 버리고, 이를 알게 된 원주민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를 이끄는 것은 폭압에 시달린 원주민의 팔 잘린 신체가 전달하는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테오의 유럽 휴머니즘의 정서다. 아마도 롤랑 조페의 <미션> 같은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해왔던 유럽 휴머니즘의 감정은 결국 마카테가 원주민을 자비롭게(!) 사살함으로써 설 자리를 잃은 채 훼손된다. 테오의 유럽/휴머니스트/부르주아 여행자의 정체성은 그의 여정 내내 계속하여 의문시된다.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의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보낸 테오는 호혜라는 관습과 가치를 평화롭게 습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한 원주민 아이가 그의 나침반을 가져가자 테오는 사유재산이자 (유럽의) 테크놀로지/지식을 위협/강탈한 원주민에게 적대와 폭력의 민낯을 드러낸다. 상심에 빠진 테오에게 카라마카테는 ‘지식을 독점하려는’ 백인의 태도를 꼬집고 타자(유럽)의 지식을 접촉하려는 자기(원주민)의 욕망을 변호한다. 결국 테오는 결코 ‘결백하지’ 않은 것이다. 도전받는 것은 기독교/가톨릭이라는 서구 종교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원주민 아이들을 콜롬비아 자본가 세력이나 원시적 폭력에서 보호하고 훈육하는 가톨릭 신부의 종교적 자비는 원주민 언어를 사용한 아동에 대한 가혹한 채찍 형벌이라는 폭력의 얼굴을 숨기고 있다. 한편 에반스의 여정에서 등장하는 사이비 교주의 커뮤니티는 메시아라는 일원신과 교회의 제도가 원주민들에 의해 ‘번역되는’ 또 다른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제시한다. 결국 제국주의적 정복서사나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이를 전유하는 < 뱀의 포옹 >의 궁극적인 전략은 유럽 중심의 다위니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로컬의 경험을 역사화할 수 있는 대안적인 ‘자가 기술 민족지(autoethnography)’의 의지를 담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유럽중심의 시각에 반하는 원시 아마존의 전통을 로컬 역사의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서구적 이성을 대변하는 테오/에반스와 원시 아마존의 철학을 들려주는 카라마카테의 부단한 대화라는 접촉지대,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낯섦과 몰이해 사이의 긴장에 주목한다. 영화는 결국 신비한 약초 야크루나로 향하는 목적론적 세계를 부인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바로 그 마지막 순간 등장하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는) 우주적 이미지는 근대의 시간을 부정하고 고대의 시원을 복원한다는 신화적 상징이라기보다,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로컬의 탈 식민적 역사기술을 시각화하는 창조적 카오스의 이미지 같다. 3. 플랫은 여행서사가 유행했던 근대 유럽의 소위 ‘지구적 차원의 의식’이 근거했던 과학 담론, 특히 박물학과 분류학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여행기 양식이 제공하는 가장 커다란 매혹은 낯선 공간과 이질적 문화라는 대상이다. 여행기는 이 낯선 사물들을 박물관마냥 채집한다. 어떤 사물의 이질성과 낯섦을 규정짓는 것은 그것의 낯선 배치, 즉 무질서다. 여행기는 이 사물의 무질서에 대한 보는 이의 매혹과 동시에 이를 다시 질서화하려는 어떤 욕망, 즉 분류학자의 의지를 가진다. 19세기 독일의 탐험가 테오는 전형적인 채집가이자 분류학자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면서도 그가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은 나비 채집본과 기록, 그리고 원주민들의 사진이다. 채집가인 테오에게 사진은 기억의 담지물, 탐사의 증거다. 테오가 카라타마테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사진은 속이 텅 빈 채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도는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출라차키)일 뿐이라고 답한다. 카라마카테의 사진을 유럽인들에게 보여줘도 된다는 허락을 받자 테오는 그에게 목걸이로 보답하지만 그는 거부한다. 이 장면은 이미지-기억의 가치에 대한 상이한 개념과 감각이 만나는 접촉지대 그 자체를 보여준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에반스가 버리지 못하는 축음기 역시 마찬가지다. 테오/에반스와 카라카마테의 대화들에서 기억저장소인 복제-이미지와 그 채집은 다르게 해석되거나 혹은 부인된다. 무엇보다 테오의 여행기는 영화 안에서 완성되지 못하며 심지어 사실 에반스는 가짜 탐사가/채집가이다. 실패한 여행가/채집가로서의 테오/에반스가 서사적 차원에서 유럽 민족지 담론에서 벗어나는 전략이라면, < 뱀의 포옹 >이 담아내는 경이로운 아마존의 풍경은 ‘이미지-보는 이’라는 영화적 차원에서 타자를 대상화하는 시각적 민족지이길 거부한다. 6년이 넘는 제작기간을 거쳐 영화는 콜롬비아 아마존의 원주민 문화를 꼼꼼하게 담아내는 동시에(실제로 치로 게라는 5개 이상의 원주민 언어를 이용하여 시나리오를 완성했으며 카라마카테를 비롯한 원주민 캐릭터는 실제 원주민을 캐스팅했다) 아마존의 풍경을 경이로운 흑백 파노라마 화면으로 ‘채집한다’. 무한한 지평선을 그리는 강,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만이 존재하는 원시의 고원, 헬리캠으로 촬영된 대지는 근대 인간의 개입이 차단된 자연 그대로의 이미지, 칸트적 숭고의 이미지다. 그러나 테오/에반스는 결코 영화 안에서 이 이미지들을 포획하는 시선의 담지자로 구성되지 않는다. 쇼트-역쇼트의 구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아마존의 풍경과 원주민의 이미지들은 테오/에반스의 시점쇼트에 대한 수동적 대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자연과 테오/에반스, 카라마카테, 원주민들은 하나의 공간(프레임) 안에 배치된다. 나아가 이 숭고한 자연-이미지들은 광학적/디지털 복제물로서의 스스로의 본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테오/에반스에게 포획되기도 분류되기도 거부하는 이 이미지들은 스크린-이미지를 ‘보는 이’인 우리에게도 포획되거나 분류되길 거부한다. 오히려 영화의 응시는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표범이나 뱀의 눈처럼 비-인간의 시선을 통해 구성되며 무질서로서의 자연-이미지는 기존의 분류/질서에 따른 풍경화(landscape)이길 거부한다. 이런 방식으로 < 뱀의 포옹 >은 흑백-파노라마라는 광학 이미지에 각인된 지배적 질서와 가치(원시로서의 아마존과 헐벗은 신체, 기억저장장치로서의 카메라/축음기, 채집된 증거로서의 복제 이미지)로부터 보는 이인 우리를 해방시키고 이미지-관람자 사이의 자유로운 접촉을 촉구하면서 서구 민족지 기술을 해체하는 정치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나이의 길이란 무엇인가? 어려운 물음이다. 일찍이 많은 남자들이 남도(男道)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마치 그것은 ‘남자의 로망’ 마냥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어 보편타당성을 획득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노식 이라면 어떨까? 스스로를 ‘뻥까오리 백작’이라 부르며 때로는 주먹으로 때로는 눈물로 영화판을 종횡무진했던 은막의 무뢰배.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그것을 일일이 찾아보는 것 보다, 그가 감독한 영화를 보는 것이 ‘박노식’이라는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이 훨씬 더 좋다. 평생을 배우의 자부심과 자의식으로 살아온 그는 점점 남의 작품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고 본인만의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감독 데뷔작의 제목이 < 나 >(1971)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서사, 틀, 클리셰 따위를 모두 다 박살 내고 오롯이 ‘박노식’의 생각만으로 빚어진 것들이었다. 나는 그의 영화에서 남자의 냄새를 맡는다. 근성... 뚝심...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오늘 소개할 영화 <왜?>는 그 중에서도 남다른 면이 있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용팔이( 박노식 )와 용칠이( 장혁 )은 봉선이와 함께 달린다. 남녀 한 쌍이 그들을 쫓는다. 엄청나게 다급한 상황! 용팔이는 어딘가의 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간다. 그렇지! 숨어서 시간을 끄는구나! 아니다. 그는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찾고 있었다. 화장실을 찾는 긴박감. 이렇게 보니 화장실인 것 같은 표정. 이것이 첫 장면이다. 일찍이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은 ‘영화의 첫 5분을 보면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일지 알게 된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에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이후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용팔이는 배가 아팠을 뿐이다. 그럼 그들을 쫓아온 남녀는? 모른다. 그럼 용칠이와 봉선이는 왜 그와 함께 뛰었을까? 모른다. 제목으로 사용된 < 왜? >라는 한 글자는 ‘내 마음대로 한다’는 뜻을 담은 ‘왜!?’일 수도 있고, 이런 식이어서 안 될 것이 뭐가 있냐는 뜻의 ‘왜?!’일 수도 있다. 정성일 선생의 말씀은 이 영화에도 정확히 적용된다. 남은 시간동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황홀경들이 한여름 마른 강냉이 털 듯 우수수 쏟아지기 때문이다. 봉선은 일본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그녀와 어머니를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아버지 최광진은 삶을 얼마 남기지 않고 봉선을 불러 유산 상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부재를 사과하려 한 것이다. 용팔과 용칠은 봉선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함께 일본에 당도한다. 하지만 이 여행은 조총련계 비밀 결사 조직의 계획에 의해 처음부터 어그러지고 만다. 그들은 유산 상속에 필요한 서류를 훔쳐 가짜 봉선이를 최강진에게 보내 유산을 가로채려고 한다. 그 돈으로 위대한 수령동지의 생일선물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한편, 최광진에겐 가정부와 정을 통해 낳은, 말하자면 서자쯤 되는 신따로라는 아들이 있다. 그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술과 폭력에 절어있는 망나니의 삶을 산다. 조총련 비밀조직의 두목( 박노식 )은 이 사실을 알고 신따로의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이용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봉선이 납치된다. 내용을 압도하는 그림. 조총련 비밀조직의 비주얼.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사실 내용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대충 써놔서 저렇지 그 사이에 변태 바보 아들을 둔, 자식 사랑 지독한 악당 아버지가 봉선을 납치하기도 하고, 조직을 배신하고 봉선이를 돕는 노진아라는 캐릭터도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압도하는 그림들이 영화를 수놓고 있다. 사실 여러분께서 이 영화를 이미 보셨다면, 이미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이 영화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영화의 분위기들을 다 때려 넣었다. 감독 본인이 창시하고 최고의 인기를 구했던 용팔이, 일본의 야쿠자 영화, 제임스 본드류의 첩보물, 게다가 일본 저예산 변태 영화의 기운까지 불어 넣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 당신은 평생 이 영화의 제목을 잊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보면서 ‘왜?’라는 단어를 계속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총련 비밀조직이 왜 야쿠자와 저리도 흡사한 모습이라는 말인가? 신따로라는 놈은 이복누이를 죽이려다가 왜 갑자기 효자가 되는가? 봉선이는 왜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노신사를 따라갔다가 변태같은 작자에게 수모를 당하는가? 용팔이는 왜 저리 바보인가? 왜?왜? 물론 답은 없다. 어설픈 이야기들이 얼기설기 얽히고 ‘재미있는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 하나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런 노력의 결과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잘 이어지지 않아 여기저기 후시녹음, 편집 등으로 대충 해결하려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러 인해 탄생한, 어디서도 보기 힘든 장면들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봉선이를 놓친 남녀 한 쌍의 조직원은 그에 대한 대가로 폭행을 당하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응당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고 그런 걸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알록달록한 원피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군단이 블링을 하며 발로 따귀를 때린다. 한 명이 덤블링을 해서 따귀를 때리면 반대편에서 다른 여인이 덤블링을 하며 다른 쪽 뺨을 때리는 그런 쌍 발따귀. 이것도 충분히 놀랍지만, 가히 충격에 가까운 발상이 그대로 구현된 장면이 있다. 발따귀 장면에서 조직 보스 박노식 은 잡혀온 여성 조직원에게 “그네를 탈테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 조직원은 “그...그네만은... 차라리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렇게 딱 한 번 언급되는 ‘그네’는 이후에 그 위엄을 드러낸다. 발따귀 조직에 의해 봉선이 잡혀오고, 용팔이와 용칠이도 포박당한 상황. 푸르름이 무성한 들판 가운데 대형 그네가 놓여져 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네가 맞다. 어린 시절 타고 놀던 그네. 단옷날과 춘향전하면 생각나는 바로 그것. 조직원들은 그네에 아래 부분에 칼을 장착하고 바닥에 봉선을 묶는다. 그리고 여성 조직원 둘이 올라가 타기 시작한다. 그네가 앞뒤로 움직이는 사이, 옆에서 줄을 잡고 있는 사내( 조춘 이다)가 그네의 높이를 점점 낮춘다. 봉선이 반쪽이 날 상황이 되어간다. 이 장면은 여러모로 굉장히 인상적인데, 이 끔찍하면서도 가내수공업적인 느낌 덕분에 웃음이 나는 걸 피할 길이 없다. ‘살인 그네’라니 누가 상상이나 해볼 수 있었을까? 용팔이는 묶여있고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위험한 상황에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신따로 덕분에 봉선은 목숨을 구한다.(왜라고 묻는 것도 이쯤되면 지친다) 하지만 날아가버린 관객의 정신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이 시퀀스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어서 나로서는 이런 연결이 더욱 놀라운데, 이 ‘살인 그네’ 시퀀스가 시작되는 부분에 이런 장면이 있다. 포박당한 용팔이 앞에 조직의 보스가 나타난다. 이 둘은 똑같이 생겼다. 그러자 서로 크게 웃기 시작한다. 용팔이는 보스를 보고, 보스는 용팔이를 보고. 크게 웃은 이들 둘은 보며 주변에 포진해 있던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웃는다. 으하하하하. 이 장면에는 총 3명의 박노식 이 존재한다. 용팔이 박노식, 조직 보스 박노식, 그리고 카메라 뒤의 감독 박노식. 마치 감독 박노식이 다른 두 자아를 비웃고만 있는 것 같아 굉장히 흥미로운 장면이다. 그는 배우로서의 자신에게 박힌 ‘전라도 용팔이’와 ‘악역전문 배우’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싫었던 것일까? 그래서 감독을 시작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역꾸역 영화를 만들어갔던 것일까? < 왜? >는 그런 본인의 캐릭터를 실컷 비웃고 그것에서 벗어나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었을까? 이후의 행보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이 장면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다. 그러나 감정을 수습할 새도 없이 곧바로 ‘살인 그네’가 빙빙 돌아가 주니 나로서도 계속 생각하며 버틸 수는 없었다. 살인그네 < 왜? >는 정말 괴상한 영화다. 잘 만들었다는 것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어떤 장르로서의 명확함 따위도 던져버렸다는 느낌이다. ‘재미’. 그것이 가능하든 하지 않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하지 않고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 만든 영화 같다. <왜?>는 박노식 의 7번째 감독작이다. 총 14편의 감독작 중 중앙에 위치한 이 영화의 만듦새가 이런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메가폰을 잡은 박노식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뛰어난 걸작을 만드는 것보다 본인이 납득할 수 있고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궁극의 ‘자유’였다고 생각한다. 배우였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감독의 지시에 따라야 했지만, 감독이 되어서는 다른 무엇과도 다른 ‘박노식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그 결과물이 일반적인 기준에서의 걸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업은 한국 영화사의 독특한 한 페이지로 충분히 기록 될 만 하다고 본다. 사내의 길이란 무릇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가는 것. 성공과 실패는 나중의 일. 시작한 것을 사력을 다해 완수하는 것. 세상에도, 은막에서도 사내의 향기를 맡을 수 없는 요즘 시대이기에 그의 이름은 더욱 그리운 것일지도. 박노식 김청자 장혁 감독: 박노식 각본: 유일수 개봉극장: 피카디리 관람인원: 22,19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