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마도
- 감독
- 장해정
- 제작년도
- 1991
- 출연
- 장민, 구월청
무용 작품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만 존재하며, 그 작품의 지속은 오롯이 기억의 몫이다. <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 >(김남석/최승윤, 2019)는 이처럼 한순간 일어났다 영원히 사라지는 무용의 시간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시간이 카메라 앞에 일어나는 현재를 포착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기계에 기반을 두고 나타난다면, 무용의 시간은 매번 다른 현재를 만드는 신체의 움직임 속에서 산다. 영화와 무용은 서로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기록된 무용이란 무용 작품과는 또 다른 것으로,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는 공연을 기록하는 영상이 되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무용이 아닌 것으로 무용을 남기려는 시도다. 영화가 공연일 수 없다면 영화는 어떻게 무용을 기록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무용이라는 것은 어떻게 간직될 수 있을까? 영화는 공연이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이면의 시간을 기록한다. 총 5명의 무용가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무용학원 강사로 일을 하고, 요가 스트레칭으로 몸을 단련하고, 승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미래를 모색하고, 진정한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고, 안무 연습을 한다. 무용가이자 영화를 기획 중인 감독 최승윤은 이 무용가들을 각각 만나서 그들과 돈, 열정, 꿈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그들 삶에는 불안정한 미래를 나아가야 하는 불안이 존재하는 한편 그들에게 무용은 좋고 충만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용가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을 조직해가고 있다. 이들이 함께 한 공연은 영화에서 단지 포스터로만 소개되고, 공연을 함께 만들어낸 5인이 이야기를 나눈다. 무용이란 무용가들의 몸을 통해 실현되고 작품은 무용가들의 몸에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단지 안무를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무용의 시간은 공연하는 순간 속에 존재하지만, 그 순간은 이미 다양한 열정들이 마주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도달하게 되는 감정, 깨달음, 성취감, 유대감 등을 품고 있는 시간의 발현이고, 이러한 시간은 그것을 몸에 새긴 무용가들의 삶을 운영하는 영감이나 동력으로도 지속한다. 그런데 작품 전후 시간을 담아가는 형식 속에서 영화와 무용은 서로 더 복합적인 협업을 이룬다. 영화는 인물들이 인터뷰하면 카메라가 뒤에서 취재한 결과물의 편집이 아니라, 미리 공들여 계산된 장면들과 연출된 대화들을 통해 진행된다. 동료들과 만나고 있는 최승윤에게는 한 영화감독과의 만남도 끼어드는데, 그 대화에서는 영화와 무용 간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관한 생각이 오간다. 이 대화를 주고받는 영화감독은 영화의 장면 역시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촬영 때마다 매번 온갖 사물들이 빚어내는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면 같은 앵글에 놓고 찍더라도 어떤 때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지만 어떤 때는 미동도 없다. 그러므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찍는 작업은 똑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이런 영화 작품 이전의 반복과 변주를 영화 장면 자체로 실행한다. 장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동선은 같은 구성을 반복하는데, 그 반복은 조금씩 다른 앵글이나 시선 그리고 속도를 갖는다. 영화는 반복하지만, 그 반복 속에는 변화가 담겨 있다. <아이 바이 유 바리 에브리바디>는 마치 리허설 필름 같기도 하다. 영화 촬영이란 반복해서 찍으면서 좋은 것을 찾아내는 일종의 연습 시간인데, 이 영화에서는 반복 자체가 작품의 리듬을 형성하고, 그 반복의 시간 자체가 주제다. 영화는 작품이 리허설을 품기보다는 역으로 리허설이 작품을 품게 되는 모양을 그려나간다. 여기에서 리허설은 더 이상 작품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으며, 심지어 작품이라는 결과를 향한 목적론에 복무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시간과 무용의 시간 모두 작품이라는 목적보다 더 크거나 혹은 그러한 목적을 잘 모르는 리허설들로 채워져 있다. 작품 전후 활동 과정을 작품보다 부각하는 영화의 방향이 단지 자족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방향이 예술 작품이 무엇인지에 대한 잘 조직된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우선 무용과 영화 각각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작품을 만드는 시간을 성찰하고 작품에 구현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의 순환을 작품 내에 만든다. 영화는 최승윤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자 결심하고 김남석 감독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서로 편지를 나누는 보이스오버를 포함하고 있다. 그 편지는 최승윤 감독이 촬영을 막 완료하고 김남석 감독에게 소회를 밝히는 때까지 이어지는데, 우리는 이미 두 감독의 협업으로 완성된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의 끝은 영화의 시작으로 이어지고, 이 영화는 협업으로 나아가는 만남의 과정이자 협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메이킹 필름과 동시에 완성된 이야기인 것이다. 과정과 결과는 선형적인 관계나 위계를 벗어나고, 결과는 늘 과정 중인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는 무용과 영화가 각각 작품으로서 무엇을 남기는지, 또 작품을 도출하는 작품 바깥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지위는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남산타워가 창 너머로 잘려 보이기도 하고, 바깥에서 비스듬히 보이기도 하며, 또 밤하늘에 빛을 내며 오롯이 드러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것처럼 영화의 반복은 새롭게 보면서 더 나은 것을 향하는 방법이 되고, 무용은 새롭게 움직이면서 더 나은 것을 찾는 경험으로써 몸에 기억으로 남아 일상을 이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반복의 시간은, 무용이 지속하는 시간의 성격을 성찰하게 하는 한편, 영화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결정적인 시간이란 소위 사건의 클라이맥스보다도 오히려 그 사건을 도출해내는 전후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닐지 질문하게 만든다.
갈등의 민낯을 보는 일은 어렵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기 때문에, 일궈온 것이 무너질까 무섭기 때문에,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아 불안하기 때문에 등등으로 갈등 상황 및 그 안의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미뤄지거나 외면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2018년 두 편의 다큐멘터리 < 핑크페미 >(남아름)와 < 길모퉁이가게 >( 이숙경 )는 갈등의 역사 속에서 헤쳐가야 할 문제를 응시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페미니스트를 엄마로 둔 감독이 가족사를 되짚으며 페미니즘과 자신의 관계를 탐색하는 <핑크페미>는 여러모로 깨는 작품이다. 헌신적인 엄마와 철부지 자식의 구도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일찍이 사회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꾀했으며, 초등학생 때부터 딸은 자식을 위해 대기하는 엄마의 모습을 요구하지 않을 만큼 철이 들었다. 이 영화는 여성이기 때문에 분홍 리본 달린 공주 옷을 입었던 시절 대신 페미니스트보다 공주병으로 불리는 편이 사회적으로 낫다는 것을 체득했던 시절을 가진 청년의 이야기다. 페미니스트 엄마를 상대로 살아온 딸의 투쟁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녀에게는 페미니즘의 부재가 아니라 너무 무거운 페미니즘의 역사가 문제였던 것이다. 감독이 엄마와 함께 오랜 회포를 푸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우리사회에 지속해온 페미니즘 역사와의 반가운 만남이다. 한국사회에는 엄마의 역할을 우선시 하라는 것은 남녀차별이라고 어린 딸에게 말하며 세월을 헤쳐 온 쎈언니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거인 같은 엄마의 역사를 딛고 진격하는 딸의 역사다. 여유롭게 대화에 임하는 엄마 앞에서 울먹이며 그간의 사정을 고백하는 딸이 있다. 마냥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지극히 이성적인 태도를 요구받는 것은 매우 야속한 일이고, 신뢰하는 대상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위치에 서는 건 자기를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 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울먹거림과 함께 조목조목 나오는 딸의 이야기에는 진실한 용기가 담겨 있다. 위험을 각오하고 자기 역사의 거인 앞에 선 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핑크페미니스트’는 엄마에게 딸로서의 자기를 고백하는 한편 엄마의 그늘에 있기를 경계하면서 스스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자신을 껴안고 주체적으로 페미니즘을 질문해간다. 역사는 우리를 가르치고 억압하고 좋고 나쁜 여러 영향력을 행사한 우리의 조건 중 하나다. <핑크페미>는 이런 역사의 자산 및 도전의식과 함께 다시 커나가는 존재의 힘에 대한 호기로운 보고서다. <길모퉁이가게>는 사회적 기업의 일원인 청년들과 기업을 이끄는 수장을 소개하되 이들의 사연을 파고들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응시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는 시간 속에서 ‘사회’와 ‘기업’이 어떻게 성장해가는가이다. 정규 학업 과정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그 과정을 거부한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도시락 제조 기업 ‘소풍가는 고양이’는 두 가지 과제 수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멤버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스스로 또 함께 성장해가는 것, 그리고 기업의 운영이나 문화가 성장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저런 불안정한 운영상황에 직면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한 ‘소고’의 노력은 매출 증가라는 목표를 향하게 되고, 이러한 기업 성장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애초에 꿈꿨던 성장의 위상을 위태롭게 한다. 영화는 조용하게 ‘소풍가는 고양이’의 세월을 따라가는 것만 같지만 작고 세세한 긴장과 변화의 국면을 놓치지 않는다. 웃으면서 하는 회의지만 그것은 회사에 어떻게 기여할지 이야기해야 하는 잔인한 자리기도 하다. 전문 인력이 들어오고 효율적이고 철저한 서비스 관리가 시작되지만 이는 예민한 직원들을 사회적으로 좀 더 나이스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통제하는 문제와 맞닿는다. 이것은 그전에 멤버들 각각이 자기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필요했던 성장을 이야기 나누던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직원들이 쉬는 시간에 옹기종기 아이스크림을 먹던 풍경 대신 밤늦게 혼자 짐을 내려놓거나 코에 휴지를 꽂고 있는 모습들이 대치된다. 감독은 서서히 풍경이 바뀌어 가는 ‘소고’의 변화를 기록한다. 이는 기업의 성장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인물들의 표정과 이야기가 이 영화를 갈등하는 시간의 기록으로 만들어준다. 좋은 의도나 이미지에 숨지 않는 영화의 기록은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 막을 내린다. 직원을 다그치는 주방의 소리와 함께 영화는 자본주의 하에서 규정되는 기업의 운영을 질문한다. 그리고 청년들이 자신의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를 일터의 성장과정과 함께 지켜가는 일이 요원해지는 우리사회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묻는다. <핑크페미>와 <길모퉁이가게>는 대결하기 어려운 갈등 앞에 기꺼이 선다. 자기 앞의 대상에게 휘둘리거나 주눅이 들지 않고 잘 이해하기 위해 역사와 대면하고 대상의 본질적 경향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한가운데를 젊은 청년들이 걷고 있다. 그들은 망설이기도 하고 뛰쳐나가기도 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역사에 지지 않으려는 인물들과 연출자의 자세가 씩씩하다.
< 기프실 >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오랜 주제였으며 근래에는 다양한 미학적 접근을 통해 문제시되고 있는, 장소 박탈과 기억 투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영주댐 건설이 결정되고 감독의 할머니가 살아온 마을 ‘기프실’은 수몰 지구에 포함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감독은 더 이상 생명을 일구지 말라고 경작금지안내판이 붙은 기프실에서의 삶을 쫓는다. 상실이 예정된 이 마을에는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삶의 역사를 담은 공간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으로서 생의 리듬을 관할하고 관계를 축적한다. 영화는 터전이 되어주는 공간의 의미를 잘 기억하고, 이를 통해 장소 잃은 삶을 질문하기 위한 기록이다. 마을에서는 이런저런 의례가 열린다. 영주댐 착공식이나 자전거 대회같이 관에서 주관하는 행사에는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지역의 일을 유용하는 국회의원의 연설이 울려 퍼진다. 반면 곧 폐교되는 평은 초등학교 총동창회 운동회에서는 대선배 졸업생 할아버지가 오랜 추억을 돌이키며 연설을 하고 마지막 초등학생들이 단상에 선다. 운동회는 이제 사라질 마을이 한동네 사람들 공통의 기억을 만드는 곳임을 상기시키는 의식이기도 하다. 한편 할머니의 장례식은 가족의 기억을 갱신하는 동시에 감독이 간직하고 있는 오랜 기억을 불러들인다. 감독은 내레이션을 통해 내밀한 마음을 고백하고, 할머니를 쫓는 그 마음은 마을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도 닿는다. 그 불안은 내가 어떤 존재를 붙잡지 못하고 영원히 상실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의례에서 우리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용되는 경박하거나 낯선 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두 의례인 운동회와 장례식에서는 마을 공동의 기억과 한 개인의 기억이 교차하는 터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 기록되는 마지막 의례는 오랜 홈비디오에 담겨 있는 신년 잔치다. 이 홈비디오에서 집의 앞마당에는 웃음을 나누는 가족과 건강한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와 마당을 잃은 가족이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로 또다시 모여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기프실의 기록은 가족사에서 출발하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파괴되는 현장을 보고하고 그곳과 직접 관계를 맺어나간다. 또 감독의 내레이션은 개인에게 고유한 경험과 감정의 영역에서 마을을 상실하는 문제에 접근한다. 사적 다큐나 에세이, 또는 퍼포먼스 등 사회적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여러 층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근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시도들을 오가면서 <기프실>의 기억은 점점 단단해진다. 영화에서 기억되는 장소란 우선 모이고 쌓이는 곳이다. 터전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의 장소를 잃는 일이며 사람 사이 관계와 역사 지속의 중심을 잃는 일이다. 터전을 잃는다는 것은 삶을 경작하고 수확할 집을 잃는 일이다. 할머니가 무당새로 집에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엄마를 따라 감독의 의식은 돌아올 검푸른 무당새의 날갯짓과 기프실을 떠올린다. 생전에 자주 서던 거울 앞에 한동안 머무는 무당새를 보면서 감독의 어머니는 연신 새가 곱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고운 무당새는 철거된 집과 이윽고 잠기게 될 마을 앞에서 머물 곳을 잃고 헤맬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는 감독과 노미 할머니의 관계가 관통하고 있다. 노미 할머니와 감독이 누워서 함께 TV를 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언뜻 의아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구체적인 정보를 전하거나 이야기의 전개를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우리가 쉽게 의미화하기 힘든 집에서의 시간을 담고 있다. 한 공간을 나누는 삶이란 왕왕 별일 없이 흐르는 시간을 공유한다. 이 장면에 앞서 면서기 집 할머니와의 인터뷰 중에도 의아한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할머니만을 담던 화면 중간에 들어오는 그것은 인터뷰 중인 감독을 비롯하여 카메라가 세팅된 전체 모습을 한 화면에 담고 있는 풀숏이다. 꼭 필요한지 묻게 되는 이러한 장면들에는 공통적으로 감독이 스크린에 있고, 그것은 할머니와의 거리를 드러낸다. 오프닝과 엔딩 장면에서도 감독은 기프실의 기록에 등장한다. 감독은 계속 <기프실>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감독은 멀리 바라본 기프실의 풍경에서 시작해 마주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인터뷰를 거쳐 시간을 나누는 관계에 이르렀다. 마을에 쌓인 삶이란 이렇게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품고 있다. 감독은 베이고 절단되어 모래가 흘러내리는 산의 모습처럼 사라져가는 마을 및 개발의 풍경과 대립하여 삶의 장소를 다시 자신의 관계 속에서 복원하고 기록한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감독은 장소를 박탈당한 후의 할머니들을 따라간다. 그리고 영화는 경작이 계속되고 있음을 증언한다. 기억은 단절되거나 멈추지 않았다. 땅은 댐에 갇혀버렸지만, 기억을 간직한 손길과 발걸음은 안 좋은 토질에서도 험한 비탈길에서도 다시금 경작을 시작하고 있다. 땅에 쐐기 박혔던 경작금지안내판은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뿌리 뽑히고, 영화는 상실감 대신 기억의 투쟁을 껴안는다. 이 경작을 응원하는 감독의 퍼포먼스는 기프실과 감독의 거리를 더욱 밀착시킨다. 함께 살아가는 땅을 일구고자 하는 영화의 의지가 앞으로 경작해가야 할 우리의 미래에 기억의 싹을 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