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면마녀
- 감독
- 정창화
- 제작년도
- 1969
- 출연
- 금비, 진량, 성훈, 정홍, 유량화, 양지경, 번매생
홍콩 시티대학교와 한국영상자료원 공동 주최해 2025년 5월 16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국제 컨퍼런스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 (Destination Hong Kong: South Korean Cinema’s Encounter with Chinese-Language Cinemas)’의 기조연설과 2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 을 요약합니다. 컨퍼런스 개최 개요와 1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은 이전 글( 링크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조연설> 아시아 지역에서의 초국가적인 영화 협업 활동의 사례를 발견하고 그 맥락을 짚는다는 컨퍼런스의 목표에 맞춰,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의 크리스 베리 교수와 한국영상자료원의 김홍준 원장이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20세기 중후반의 역사적 사건들이 당대 아시아 영화의 제작과 배급, 수용에 미친 영향을 거시적인 차원의 담론과 미시적인 차원의 자전적 경험담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어권의 영화 연결 역사 속 우연성과 불가해성: 최국인, 신장, 그리고 <용의 해> (킹스 칼리지 런던 영화학과 교수 크리스 베리) 크리스 베리(Chris Berry) 교수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주 활동 무대였던 영화인 최국인과 그가 공동 연출한 <용의 해>(아사날리 아시모프, 최국인, 1981)를 중심으로,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어권의 연결이 얼마나 우연적이면서도 불가해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두 문화권의 영화적 교류가 이외 지역의 개입을 통해 더욱 확장된 프레임으로 논의될 가능성을 보였다. 아시아 내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활동한 “마이너 디아스포라”로 규정되기도 하는 최국인은, 1926년 조선에서 태어나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상하이로 이주하고, 6.25 전쟁 이후 북한에 체류하다가 1950년대 초반에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브기끄(VGIK)에 다니며 영화인으로서의 이력을 정립했다. 이후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카자흐필름스튜디오(Kazah Film Studio)를 마지막 근거지로 하여 활동했다. 다큐멘터리 <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김소영, 2017)을 통해 최국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크리스 베리는, 최국인을 ‘냉전’ 개념의 복합성을 깨닫게 해준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 지도자로 신격화했던 스탈린의 행태를 비판하며 스탈린 체제로부터 이탈해야 함을 주장한 흐루쇼프의 연설이 있은 후, 당시 소련에서 브지끄의 학생이었던 최국인과 그의 동창들은 이를 모방해 북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졸업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신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해 소련에 잔류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은 이를 허가한다. 흔히 미·소 간 대립을 중심으로만 이해되는 냉전의 이분법적 의미는 대개 서구 사회에 의해 구성되었고, 이외 문화권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서구적 의미 바깥에서 (심지어 사회주의 집단 내부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굴절이 발생하는지 를 알게 해준 일화였다. 게다가 동아시아가 ‘현대’ 사회로 돌입하며 받아들이게 된 이념은 상당 부분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동아시아 각지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는데, 크리스 베리는 이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영화를 통해 연대하려는 노력 이 최국인과 같은 영화인에게서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패권국이 시시각각 대립하며 파장을 낳는 동시대 사회 속 불안정한 일상과 일면 유사하기도 하다.) 관련 활동은 연설의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아시아 곳곳의 영화인들에 의해 ‘우연적’으로 발생했다. <용의 해(Year of the Dragon)> 포스터 / 사진: IMDb 그가 1981년 중 연출에 참여한 <용의 해>는 신장 지구와 위구르족에 대한 청나라의 폭력적인 정복을 다룬다. 작품의 제작과 개봉에 관해서는 여러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소련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내용의 영화 제작을 허가했고, 왜 최국인을 공동 연출자로 임명했을까? 작품 자체가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맥락을 먼저 살펴보자면, 작품은 20세기 중·후반 지속됐던 중·소 분열(Sino-Soviet Split)을 배경으로 기획됐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부터 중국은, 흐루쇼프를 필두로 탈스타린 기조에 접어든 소련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1964년에는 두 국가 간 국경이 과거 불평등 조약에 의해 확정됐다며 중국 측에서 소련을 대상으로 국경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여기에는 중국 서부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신장 지구가 포함된다). 그리고 당시 소련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신장 지구 내 위구르족의 투쟁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전개됐다는 입장으로 위구르족을 지지하며, 과거 청나라와 당시의 중국이 견지한 무리한 영토 확장 욕구를 비판하곤 했다. 더불어, 민족성(ethnicity)에 대한 두 국가의 인식 차이도 작품에 드러난다.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연방에 속한 개별 국가들의 자치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국은 각기 다른 민족이 통합되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함을 주장해왔는데, 크리스 베리는 극중 청나라의 장군과 위구르족의 일원이 위구르족의 중국 융화 필요성, 그리고 민족의 자기 결정권 존속을 두고 논쟁하는 장면이 이러한 인식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짚었다. 과거에 위구르족을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작품이 제작됐던 당시에도 중국은 소련에 대해 ‘하나의 중국’ 기조를 강요한다는 소련의 비판적 입장 이 내포됐다는 분석이다. 연설 중 재생된 <용의 해> 본편 영상 일부 한편, 최국인 개인의 이념이 작품과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은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사회적 이념을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재할 뿐더러, 그가 활동하던 시기 소련 영화산업의 현실을 고려하면 연결고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당시 소련의 영화 제작은 보통 개별 감독에게 국가가 작품을 배당함으로써 진행됐기에 배당을 받지 못한 감독들의 수입은 비교적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국인이 순전히 물질적인 관점에서 공동 연출 제의를 수락했는지, 그 이면에 개인의 이념적 지지 등이 존재했는지는 연설 제목처럼 여전히 불가해(unknowable)하다. 크리스 베리가 작품과 관련해 지적한 우연적이고 불가해한 또 다른 부분은 작품이 갑작스레 사라졌다는 점이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예산을 들여 제작됐고 1982년 제15회 소련 탈린영화제 수상까지 경험했음에도 오늘날 본편을 감상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저화질의 유튜브 영상에는 작품 배급이 갑작스레 중단된 데 대해 여러 이용자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원인으로 추정해볼만한 상황을 역사학자 피터 롤버그(Peter Rollberg)의 설명을 참고해 제안했다. 본 작품이 소련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알레고리 로, 즉 중국이 아니라 소련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인식될 여지가 있어 소련 차원에서 배급 중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영화학적 개념으로 그는 이스턴 장르를 언급한다. 서구 문화권에서 비롯된 웨스턴 장르는 미국 서부 지역을 정복한 유럽인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를 모델로 발전한 이스턴 장르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소련의 정복을 다룬다. 원주민과 카우보이의 구도가 바스마치(소련에 저항한 중앙아시아 세력)와 볼셰비키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막이나 스텝 지대를 배경으로 삼고 석양을 따라 말을 타고 달리는 인물들, 그들의 총격전 등을 보면 자연스레 웨스턴 장르가 연상된다. 극중 몇몇 장면을 컨퍼런스 현장에서 직접 재생한 그는, 중·소 분리와 소련·중앙아시아 간 대립을 동시에 은유할 가능성을 통해 냉전 국면에서 아시아의 영화사적 기록을 되짚을 때 감지되는 우연성과 불가해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황홀한 기억: 홍콩영화와의 조우, 196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 김홍준 원장은 삶의 궤적을 따라 홍콩영화와 맺어온 관계와 그로부터 받았던 인상, 영감, 깨달음을 개인적 일화들을 바탕으로 공유했다. 그가 영화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재임하기까지 되새길 만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홍콩영화는, 동시대 아카이브가 지닌 고유의 임무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67년, 11살이 되고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때 그는 홍콩영화를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유신정권에 돌입하기 전, 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시기다. 동시에 반공주의적 의식이 사회 전반에 공유됐는데, 흥미롭게도 007 시리즈가 이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영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리즈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묘사되었고, 주인공들은 '위험 세력'으로 그려진 이들을 소탕했기 때문이다. 이때 국내 군사 정부는 과거 식민 통치를 자행한 일본의 문화를 배격하던 와중이었기에 일본영화가 수입되지 않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일본영화가 점했던 영역을, 한국에서만큼은 홍콩의 액션 및 시대극 영화들이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의 등장으로 < 황야의 무법자 >(세르지오 레오네, 1964) 등의 명작이 소개된 직후, <대취협>(호금전, 1966) 을 접했다. 중국어권에서 집필된 무협소설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시절, 김홍준 원장 역시 이 작품을 만나기 전에 대만의 유명 무협소설 작가 와룡생이 쓴 『군협지』를 먼저 접한 상태였으며, 그의 표현처럼 어린 시절 그에게 “무협의 피”는 이미 흐르고 있었다. <대취협>은 홍콩에서 1966년에, 한국에서는 이듬해인 1967년에 개봉했다. 당시 17살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본 무협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가 대만 출신 배우 정패패와 영화 속 쿵푸의 세계를 최초로 알게 되는 계기였다. 이후 중국어권의 여러 무협영화 들이 국내에도 선을 보이면서 10대 관객들은 이들의 무협적 요소에 매료됨과 동시에 장르에 내재된 정서에 힘입어, 사춘기의 반항심이 거세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특히 정패패, 데이비드 치앙, 적룡과 같은 배우나 당대 걸출한 연출자로 꼽혔던 장철이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종류의 무협영화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액션이 아닌 맨주먹을 이용한 싸움을 소재로 하기 시작했기에, 무협 장르의 본령을 져버렸다고 생각한 그는 이전만큼 홍콩영화에 애정을 갖지 못했다. 이소룡과 성룡이 등장한 이후 20년간 홍콩영화를 그렇게 잠시 잊고 지내다가, 그가 2001년부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이끌게 되면서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국내 최초로 호금전 회고전을 기획해 < 협녀 >(1969), < 용문객잔 >(1967), < 산중전기 >(1979) 등의 작품을 상영한 것인데, 놀랍게도 30~50대 관객이 크게 몰렸다. 영화제 관객의 주 연령대인 2030 세대가 아니라 중년 관객층이 호응한 이례적인 사례였다. 2003년에는 복원 또는 재개봉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쇼브라더스 특별전을 개최했고, 영화제를 방문해 자신의 영화 인생 안내자로서의 호금전에 대해 설명하던 정패패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대취협> 중 정패패 /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대학 재학 중이던 1976년으로 돌아가보면, 김홍준 원장은 슈퍼 8mm 필름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제작했고, 이중 < 서울 7000 >의 수상을 계기로 영화 제작 활동을 보다 진지한 취미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학내 영화 동아리 ‘얄라셩’에 합류해 영화와 관련된 워크숍을 진행하며 관련 활동을 지속했지만, 본래 인류학을 전공했고 학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영상·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남는 시간에는 캠퍼스나 시네마테크 등을 찾아 계속 영화를 감상했으며, 교내 도서관의 간행물 섹션에서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 )》나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 American Cinematographer )》,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 )》와 같은 영화잡지를 즐겨 읽었다. 이때 토니 레인즈가 작성한 한 기사에서 홍콩영화계의 새로운 세대가 “ 홍콩 뉴웨이브 ”를 구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홍콩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렇게 학업을 이어가며 영화도 자주 감상하던 어느 날, 미국의 한 극장에서 < 도마단 > (서극, 1986) 을 상영하는 더블 피쳐 프로그램이 열렸고, 영화잡지 외에는 관련 정보를 살펴볼 기회가 드물었기에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관람했지만 홍콩 출신 여자 배우 3인의 우정이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그려지는 순간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물들이 곧 일어날 ‘혁명’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면 역시 돋보였다. 1980년대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외침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기에, 해당 장면 속 대사와 분위기가 암시하는 ‘혁명’은 그로 하여금 단어에 내포된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도록 했다. 작품을 연출한 홍콩 출신의 영화인 서극은 감독이자 제작자, 배우로서 여러 역작을 남겼다. 국내에서는 그가 연출 또는 제작한 < 영웅본색 2 >(오우삼, 1987), < 황비홍 >(1991), < 신용문객잔 >(1992) 이 흥행했다. 공교롭게도 김홍준 원장의 연설이 있기 3주 정도 전에, 서극은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좌 ) <도마단> 중 주인공 3인 / ( 우 ) 혁명 후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인물들 / 사진: IMDb 그리고 몇 년 후, 김홍준 원장은 국내 영화잡지 《로드쇼》에서, 한 작품의 특정 장면을 영화 이론이나 영화사적 개념으로 해설하는 “도시에” 섹션 연재를 맡는다. 섹션 내 첫 원고의 주제로는 대중적 관심도에 비해 주류 평론계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홍콩영화를 선택했다. 원고 작성 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고충은 있었지만,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평론가의 말처럼 1990년대 홍콩영화를 진지하게 비평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서 의미를 찾았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본 잡지에 그가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이 원고들은 이후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그가 홍콩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키워가도록 한 작품이 한 편 더 있다. 왕가위 감독의 < 열혈남아 >(왕가위, 1989)다. 국내에 수입된 당시 배포됐던 포스터와 한국어 제목이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 것과는 정반대로. 작품은 완성도 높은 예술영화에 가까웠다. 결투 중심의 홍콩영화로부터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적 동요와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혀 홍콩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는 눈에 띄는 강렬한 몇 장면을 연설 중 공유했으며, 그중 하나는 포장마차에서의 액션 신이다. 얼핏 보면 인공 혈흔과 같은 특수효과가 매우 어색해보이지만, 액션을 비롯해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 기술이 무척 유려하게 적용됐다는 점이 놀랍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만들어낸 명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김홍준 원장이 본래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홍콩영화 관련 영상자료들도 다수이지만, 그는 원내수집 담당 부서에서 국내 기증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수집을 진행한 덕에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 1,000여 점에 달하는 홍콩영화 DVD 또는 블루레이가 소장돼 있다고 전했다. 아카이브를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기억의 과정으로서, 작품을 재발견하고 수집한 후 디지털 복원해, 대중에게 그 가치를 전파하면서 작품 자체가 다시 상상(re-imagine)되는 데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밝히기도 했다. 연설을 마무리하며 그가 재생한 <열혈남아> 속 두 배우의 얼굴처럼, 과거의 한 순간에 멈춰 있지 않고 미래 세대를 위해 계속해서 재발견될 영화 속의 무언가를, 필름 아카이브로서 꾸준히 찾아 공유하고 싶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패널 3> 장르, 리메이크, 그리고 조우 특정 장르 속에서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계가 각자의 스타일과 인력을 교환한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이면의 지정학적·산업적 영향을 분석했으며, 홍콩대학교 김소혜 교수가 발표자들을 소개했다. 중국 멜로 TV 드라마 속 한국 남성 스타와 한류 남성성의 현지화 (영국 카디프대학교 현대언어학부(중국학) 조교수 일레인 정) (당시 해외 체류 중이었음에 따라 비대면 발표 진행) 일레인 정(Elaine Chung)은 중국 멜로영화나 TV 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한국 남성 배우들의 배역을 통해, 중국어권이 ‘한국의 남성성(Korean masculinity)’을 현지화하게 된 배경과 사례를 소개했다. 특히 상당수의 한류스타가 중국어권 콘텐츠 산업에 진출한 시기, 즉 그들의 인기가 중국어권에서 부상한 2000년부터 사드무기체계(THAAD) 배치로 인해 양국 교역이 대폭 축소된 2016년까지의 작품들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특성으로부터 중국어권 사회가 도출한 ‘한국의 남성성’과 이에 대한 인식이 내러티브에 어떻게 반영되어있는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로맨스와 남성성은 한국 드라마는 물론 아시아에서 흥행한 한류 콘텐츠 전반이 중심적으로 다루는 소재다. 정선의 한류 연구(“Pan-East Asian Soft Masculity”, 2001)에서는 두 요소의 결합을 통한 남성 한류스타들의 강력한 팬덤과 한국 멜로 TV 시리즈 흥행이 2000년대 초반 동아시아 한류 열풍을 본격적으로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한다. 일레인 역시 한류 콘텐츠 속 한국인 남성 주인공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 부드러운 남성성(Soft masculinity) ’을 언급했다.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 차분한 말투, 그리고 섬세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그들은 종종 재벌로 등장하며,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상대역 여성과 함께 신데렐라 내러티브를 완성시킨다(2000년대 초반 당시 한국 멜로 TV 드라마의 전형이다). 그러나 일레인은, 한류 콘텐츠를 통해 이상화된 부드러운 남성성이 중국 TV 시리즈 속 한국인 남성 배우를 거치면서, 중국어권 대중에게는 다르게 인식될 여지가 있다며 TV 시리즈 세 편을 예로 들었다.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 한국인 남성 주인공의 성격이 또 다른 중국인 남성 배우와 비교 또는 대조되며 내심 부정적으로 평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백령공우(White Collar Apartment)>(2002)의 안재욱, <100번째 신부(The 100th Bride>(2004)의 지진희, <다이아몬드 러버(Diamond Lover)>(2015)의 정지훈 모두 여성 주인공과 연인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관계를 지켜내는 데 실패한다. 반면 그들과 여성 주인공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룬 중국인 남성 배우는, 실용적이면서도 강인한 면모를 보이며 마침내 여성 주인공과 연인이 된다. 혹은 한국인 남성 주인공과 달리, 이들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자수성가했으며 여성 주인공에게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독립적이고 성숙한 어른을 표방하면서 더욱 이상적인 방식으로 ‘부드러운 남성성’을 구현한다. <다이아몬드 러버> 주요 인물 / 사진: TV Time 예시가 된 세 작품의 자세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시리즈 흥행을 위해 남성 한류스타를 캐스팅하고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면서도 결말은 중국인 남성에게 우호적으로 전개된다. 중국어권 콘텐츠 제작자의 관점에서 강력한 팬덤을 동원한 한류스타의 이미지를 문화적 자본으로 활용 해 상업적 성공을 꾀하면서도, 인물 구도와 내러티브를 중국어권 문화의 맥락에서 지역화한 결과 라고 일레인은 분석한다. 경제 발전 이후 중국사회에서 단정하고 신사적인 외양으로 대표되는 소위 “화이트 칼라 남성성(White-collar masculinity)”이 호응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레인에 따르면, 중국어권에 아직 널리 공유되어있는 통념상 가장 바람직한 남성 이미지는 ‘부단히 노력한 후 사회적 성공을 거둬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에 가깝다. 따라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부유한 집안에서 편안히 자랐지만 가정을 이끄는 독립적 주체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한) 한국인 남성 배우의 역할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로 지각되어 내러티브에서 소외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일레인은 추측했다. 중국어권 콘텐츠 흥행 수단으로 한류의 대중적 인기를 활용함과 동시에, 인기의 핵심이 되는 남성 이미지는 지역화해서 내러티브에 반영함으로써 한류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한·중 영화 협력의 산업적·정책적 측면: <제3의 사랑>을 중심으로 일본 교토대학 강사 김수현(현 영국 퀸즈대학교 벨파스트 조교수) 김수현 교수는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과 중국어권 간 콘텐츠 합작이 시도된 역사를 산업과 정치의 맥락에서 분석했다. 특히 한·중 합작 영화에서 작가로서의 권리와 투자자로서의 권리가 각 스태프에 의해 복합적으로 행사되는 현상 을, 동아시아의 정치와 산업에 관한 담론에 기반해 설명했다. 연구 방법론 중 하나로 참여관찰법을 도입해 합작 영화 < 제3의 사랑 >(이재한, 2014) 제작 현장에서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활동한 경험을 녹여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20세기는 방송(Broadcasting)의 시대”라며 방송이라는 동시다발적 송신의 매체가 대중문화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미셀 힐름스(Michele Hilmes)의 주장을 ‘영화’에도 적용하는 것으로 발표가 시작됐다. 영화도 기술을 바탕으로 초국적으로 전파될 수 있고, 스타나 대중문화에 관한 담론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화된 문화적 양식으로 공유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는 2000년대부터 영화를 매개로 초국가적인 협업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은 같은 시기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고 정부 당국이 한층 완화된 문화 정책을 펼치면서 ‘합작’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은 합작 파트너로서 중국어권 제작나와 배우와 협업해 < 비천무 >(김영준, 2000), < 무사 >(김성수, 2000), < 아나키스트 >(유영식, 2000)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김수현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초국가적 합작의 경제적 기반을 조성한 여러 주체들 간의 협상 결과에 따라, 작품의 ‘작가(author)’로서 창작의 방향을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가 주어진다. 한·중 합작 영화의 경우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정부 당국의 검열이 만연한 중국 영화산업의 특성까지 더해져, 작가로서의 권리가 제작 주체들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배분되기가 쉽지 않다 . 그는 <제3의 사랑>의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서 각색과 제작, 배급 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경험을 빌려, 이 과정에서 견제나 갈등, 때로 불공정한 상황까지 야기될 수 있음을 보였다. <제3의 사랑> 포스터, 스틸 / 사진: IMDb( 1 , 2 ) <제3의 사랑>은 동명의 중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인 이재한 감독(John. H. Lee)이 연출하고 중국 제작사 HS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은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다. 원작을 각색한 각본은 본래 이재한 감독이 집필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각본은 중국 측 프로듀서의 작업 결과물이었다. 특히 영화 제작 및 배급을 담당하는 국영 기업 차이나 필름 그룹(China Film Group Corporation)의 당시 부대표는, 일부 장면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대면하려는 동기를 약화한다는 이유로 원작 소설에 충실할 것을 지시하는 이메일을 감독에게 직접 보내기도 했다. 차이나 필름 그룹이 중국영화에 관한 대규모 투자 및 배급을 주도하는 국영 기업이라는 점에서, 각색에 참여한 한국 스태프 인력은 합작 영화의 창작을 둘러싼 권력 구조를 개편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중국 제작사 측의 불공정한 대우는 직업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수현 교수가 인터뷰한 한국 출신 조감독의 경우, 현장 참여를 위해 중국에 체류하던 중 비자가 만료되었음에도 중국 제작사는 이를 연장하는 데 협조하기를 거부했고, 해당 조감독은 촬영 도중 출국해야 했으며, 중국 측 제작사와의 갈등을 이유로 중국 재입국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 제작사는 촬영 종료일까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의 이름을 작품 크레딧에서 제외하고 만다. 이렇게 중국에서 일시적으로 근무한 한국 출신 스태프들은 체류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는 비자를 발급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제작 현장에 기여한 바와 관계없이 스태프로서의 지위까지 위협받는 불안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배급 지역마저도 중국 측 배급사가 단독으로 결정하면서, 대규모 흥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관객으로부터 발생할 잠재적 수요는 무시된 채 작품은 중국 내에서 배급되는 데 그쳤다. 또 다른 한중 합작 영화 < 평안도 >(장윤현, 2014)는 출연한 배우가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띤다는 등의 이유로 중국 내 상영이 금지됐고, 중국 당국의 압력으로 인해 해외 상영까지도 무산되며 2016년까지 개봉을 하지 못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은 몇몇 사례를 종합했을 때, 한·중 합작은 중국이 상대 국가와 맺고 있는 여러 종류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그에 따라 합작 결과물의 중국 시장 진출 향방이 정해지는 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합작’이라는 외형을 지녔지만 제작과 배급 전반이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게 되는 한계 가 드러나기도 했고, 상대국 제작진이 체감하는 지정학적 불안정성 이 그들의 제작 참여 경험의 질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수현 교수는 이렇게 영화산업의 논리와 제작 방식이 서로 달라 충돌하는 상황에서, 국제 합작이라는 작업에는 통상 모종의 긴장 관계가 형성됨을 언급했다. 그리고 ‘시장 확장’을 목표로 한다는 본래 특성상 합작 영화 제작 시 감독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여지가 있으며, 위에 언급한 국가 간 이해관계와 지정학적 역학 관계에 따라 창작과 배급을 주도할 권리가 주어지는 현상도 소개했다. 국제 합작은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권 간 타협과 조율, 그리고 힘겨루기의 장이 되며, 합작을 둘러싼 권리는 예술적 아이디어나 행위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가운데 주장 된다. 다만 산업 환경이 변화하면서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제 합작 경향은 조금씩 달라지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합작에서는 각본이나 캐스팅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며 작품의 ‘창작’을 함께 하려는 기조가 강했다(단, 일본의 경우 < 박하사탕 >에서처럼 제작 투자 위주로 참여했다). 그리고 시장을 효과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동아시아 관객 모두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주제(< 적벽대전 >과 < 묵공 >에서와 같이 대개 역사적 사건)를 바탕으로 한 블록버스터 대작들이 주로 제작됐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한중 합작이 주로 이뤄졌고, 중국을 찾는 한국인 제작진들의 규모도 증가했으며, 후반 작업 단계까지도 합작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최근 2020년대에는 분위기가 달라져, 앞서 언급한 캐스팅, 각본 집필 등의 창작 과정을 함께 하지 않고, 장소 섭외와 같은 프로덕션 서비스만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의 합작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김수현 원구원은 한·중 합작 사례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다는 부정적 현실을 전했다. 2016년, 사드무기체게(THAAD) 배치 문제로 한·중 간 지정학적 긴장 관계가 형성되면서 대부분의 합작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해당 분야에 투자되던 예산 역시 삭감되면서 2020년대까지도 한중 합작은 거의 성사되지 않고 있고, 최근 동아시아 내 합작은 주로 일본과 중국, 대만 간 진행된다. 액션! 대만 갱스터 영화의 부활과 한국 영화인·문화와의 연결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 조교수 팅 우 초) 팅 우 초(Ting Wu Cho) 교수는 이전부터 자신이 연구해왔던 ‘대만 펄프 영화(pulp film)’라는 주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만 갱스터 영화가 한국영화와의 상호작용을 거쳐 2000년대 이후 부흥한 현상을 다뤘다. 이를 위해 1950~60년대 대만 고전영화를 비롯해 대만 내 영화산업의 발전, 지역문화, 그리고 지정학적 관계의 변화에 따른 영향까지 폭넓게 고려했다. 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개념으로는 냥유연(Long-liu-lian) 을 제안했는데, 중국어 방언의 한 종류인 복건어로 표현된 ‘낭유연’은 목적 없이 방랑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는 행태를 말한다. 그는 제작 자본의 투자와 시장 구조, 장르적 요소의 측면에서 불안정하고 혼종적인 성격을 지닌 대만 갱스터 영화 의 특성이 이 개념과 유사하다고 봤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대만 갱스터 영화 중 다수가, 타국의 영화산업과의 합작을 통해 액션연기를 수입하고 자국 관객의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면서, 작품의 장르와 자본 모두 초국가적이고 혼종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팅 우 초는 대만 갱스터 영화를 시간 순으로 세 종류로 구분했다. ‘방랑자’의 전형을 타고난 인물에 대한 구원 서사 가 중심이 되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이 첫 순서다. 대만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범죄 및 갱스터 영화의 관습이 이들에게서부터 처음으로 발견되기 시작했다. 냥유연을 체화한 방랑자로서의 인물과 지역의 청년문화, 그리고 유행가 삽입을 통한 뮤직비디오와도 같은 연출이 눈에 띈다. 장르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야쿠자 영화와 홍콩의 액션 영화가 모두 엿보인다. 그리고 제작 자본은 불안정하게 투입된 데다 당시 검열의 강도는 높았기에, 이 시기에 발표된 대만 갱스터 영화들 대다수는 상업적 흥행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이 해제된 1990년대에는 대만 뉴웨이브 의 영향으로, < 비정성시 >(허우샤오셴, 1989),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 < 남국재견 >(허우샤오셴, 1996) 등 작가주의적 경향이 짙고 독특한 내러티브를 지닌 작품들이 갱스터 주제의 대만 펄프 영화 중 대다수를 이뤘다. 반면 세 번째 구간이라고 할 수 있는 2000년대 이후에는, 상업적 장르영화의 형식을 갖춘 작품들을 통해 갱스터 장르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 맹갑 >(유승택, 2010)과 같은 “ 대만 뉴 갱스터 필름 ”, 즉 1970~80년대 대만 펄프 영화의 특징에 청년들 간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상업성을 띠게 된 2000년대 이후 장르영화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아시아 전역에 세계화 트렌드가 나타나기도 하면서, 대만의 최신 가요와 인기 배우 등에 대한 국제적 인지도가 향상됐고, 타국 영화산업 인력과의 영화 공동 각색 및 합작 역시 활성화될 수 있었다. 대만 갱스터 영화의 지역적 전통과 세계적인 영화 트렌드가 맞물린 지점이다. <맹갑> 포스터 / 사진: IMDb < 하이자오 7번지 >(위덕성, 2008)라는 멜로드라마가 흥행하면서, 대만의 지역적 특성이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킬 잠재력을 지녔음이 재발견되고, 대만 영화산업의 십년 간의 침체가 극복되는 기회가 마련됐다. 이윽고 2010년에 개봉한 <맹갑>은 실제 야외 거리와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갱스터들을 묘사하는 등 초기(1970~80년대) 대만 갱스터 영화의 특징을 여럿 지니고 있다. 하지만 초국가적 협업 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초기의 형태와 차별화된다.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액션 연출 등의 주요 보직에 외국인 스태프를 많이 기용했다. 그리고 액션 자체도 정교하게 짜인 홍콩 스타일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본능적 움직임이 돋보이도록 연출됐는데, < 올드보이 >(박찬욱, 2003)의 액션에서 영감을 받아 양길영 무술감독을 섭외한 후 배우들에게 액션 연기를 전수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양길영 감독의 지도를 바탕으로 작품에는 1분 28초에 달하는 싱글 테이크 액션신이 삽입될 수 있었고, 이 장면은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신에 대한 오마주이자 동시대 대만 액션 연출의 우수 사례로서 현재까지도 언급되고 있다. <맹갑>에서 양길영 감독이 참여한 사례를 기점으로 대만의 갱스터 영화의 액션 연출은 물론 각색, 투자 등 종합적 측면에서 한국 영화인들의 기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대만의 상업영화 제작 기반이 다시금 다져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일례로, 한국영화 < 남자가 사랑할 때 >(한동욱, 2013)를 대만의 문화와 관객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해 흥행한 < 맨 인 러브 >(은진호, 2021)를 들 수 있다. 연출을 맡은 대만 출신 감독 은진호는 이전에 대만 밴드 “EggplantEgg”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해당 뮤직비디오에서 역시 청년 갱스터 문화를 반영하는 서사가 전개되며 음악과 잘 어우러져 “방랑자(Wanderer)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 그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대만의 관점에서 제작된 갱스터 영화로 리메이크하기 위해, 대만의 문화적 혼종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 인구가 집중돼 있거나 일본문화도 일부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을 배경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여기에 대만의 인기 가요까지 삽입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성공적인 지역화 사례라는 평가를 받으며 본 작품으로 당해 대만 개봉작 중 최고 흥행 성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좌) 국내 원작 <남자가 사랑할 때> / (우) 대만 리메이크작 <맨 인 러브> (사진: ㈜사나이픽처스, IMDb ) 한편, <맹갑> 흥행 이후 해당 작품의 제작자는 대만의 소위 ‘지하세계’ 경험을 모티브로 또 다른 갱스터 영화 <가타오>를 제작했다. 이 작품 역시 인기를 얻자 제작자 장웨이인이 후속편을 제작하면서 시리즈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갔다. 후속편 <가타오 2: 제왕의 부상>(2018)은 대만 뉴웨이브 작품에 자주 등장한 배우 겸 감독이자 과거 조폭집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알려져있던 옌정궈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됐다. 가오제나 콜린 쩌우와 같은 유명 배우가 출연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홍의정 무술감독과도 협업했다. IP 활용 범위도 넓어져, 작품 관련 OTT 스트리밍과 주제가 발표, 라이브 콘서트를 기획하며 ‘가타오 유니버스’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다음 편인 <가타오: 최후의 방랑자>(2021)에서는 한국 투자사와 타이베이 영화 기금 모두로부터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다. <가타오 2: 제왕의 부상> 포스터 / 사진: IMDb 결론적으로, 한국 영화인들의 전문성과 산업 구조 도입에 힘입어 형성된 대만의 뉴 갱스터 장르 는, 상업영화의 공식을 정립하고 이를 대만이라는 지역에 특화 하면서 대만 영화산업에 내재됐던 야심을 실현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은 또 다른 종류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The Pigs, the Snake and the Pigeon (2023)이라는 작품이 대만영화로는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서 대규모 흥행 성적을 거두며, 아시아 국가 간 협업을 통한 갱스터 장르의 색다른 변모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위 작품의 무술감독은 대만의 스턴트맨 출신이지만 <가타오> 시리즈에서 한국인 무술감독과 함께 작업한 이후 무술감독으로 성장했다. 또한 대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는 비쇼시네마(Vieshow Cinema)의 대주주인 와닌국제비주얼엔터프라이즈(Wanin International Visual Enterprise)는 중국의 영화 제작 및 배급 업체 알리바바픽처스(Alibaba Pictures)와 계약을 맺어, 작품의 IP를 범중국어권에 수출하려는 의도를 내비쳤고, 추후 일본과 한국, 말레이시아와의 합작 가능성도 열어 뒀으며, 리메이크 작품 제작을 맡을 한국 지사까지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아시아 국가 간의 영화 합작이 대만 영화계에도 생기를 불어넣을지, 혹은 대만의 갱스터 장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어질지를 주의 깊고도 흥미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팅 우 초는 설명했다. 포스트 정동 혹은 새로운 사후세계: <마약전쟁>과 <독전>을 통해 본 홍콩 누아르의 공명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박은지) 박은지 연구원은 특정 시기에 한국을 찾아온 ‘ 홍콩영화 신드롬 ’의 특징을 바탕으로 < 마약전쟁 >(두기봉, 2012)과 이의 한국판 리메이크작 < 독전 >(이해영, 2018)을 비교하며, 한국영화 속 (포스트) 홍콩 누아르의 흔적 을 발견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관객이 홍콩영화에 열렬히 반응한 일련의 현상을 일컫는 홍콩영화 신드롬은 특유의 감성과 에너지를 국내 영화계에 각인시켰으며, ‘문화적 기억’으로 회자될 만큼 영화문화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국내 영화인들의 상상력까지 가미되어 여러 차례의 각색과 리메이크, 오마주가 나타나기도 했다. <독전>은 그러한 사례들 중에서도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평단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던 작품이다. 반면, 놀랍게도 <마약전쟁>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이 작품 본연의 정체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홍콩 반환 이후 제작된 영화들의 국내 수입량과 인지도가 크게 감소한 데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국내 수입된 홍콩영화 편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연간 50~80편이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1997년부터 41편으로 급감했고, 2000년대에는 이내 한 자릿수까지 곤두박질치며 반환 이후 급속 냉각되고 있는 홍콩영화 시장의 현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신드롬이 한창이던 시기, 한국영화는 홍콩영화 특유의 어둡고 강렬한 미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홍콩 누아르’의 등장에 열광했다.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시리즈에 이어, < 첩혈쌍웅 >(오우삼, 1989)과 < 천장지구 >(진목승, 1990), < 지존무상 >(왕정, 향화승, 1989) 등 범죄 및 갱스터 장르의 홍콩영화가 한국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홍콩 누아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홍콩 누아르’라는 용어는 1991년에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 김홍준 원장이 처음 사용하며 이후 비평계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홍콩 누아르에 대한 국내 팬들의 열정이 거세졌고, 이전까지 이상적인 목표로 받아들여졌던 할리우드와 유럽영화로부터 벗어난 영역으로서, 한국 영화문화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되기에 이르렀다. <첩혈쌍웅>, <지존무상> 중 (사진: MUBI , IMDb ) 박은지 연구원은 홍콩의 누아르와 액션을 한국영화만의 방식으로 수용 했다는 데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환이 일어난 1997년 즈음 홍콩에 스며든 우울함을, 민주화를 열망하던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 했다는 분석이다. 홍콩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서울올림픽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화를 경험하는 한편,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불완전한 정착에서 비롯된 감각 역시 이상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충심과 형제애 등의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분위기로서의 “ 정동적 아노미(affective anomie) ”는 홍콩 누아르의 핵심적인 감수성으로 국내 관객에게 지각됐고, 파멸적이고 어두운, 울분의 폭발과 같은 키워드가 이 장르를 추동하는 감정으로 거론됐다. 박은지 연구원은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영향으로 내면에 모종의 불안이 자리하게 된 국내 관객이, 선과 영웅주의 위주의 표면적 서사 이면에 있는 이러한 누아르적 감수성에 열광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잡지 《키노(KINO)》는 오우삼과 왕가위 등을 정전화하며 해당 장르를 작가주의적 관념과 연결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영화 감독들은 홍콩 누아르의 기묘한 매력에 이끌려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본 장르의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홍콩 원작들에 대한 눈에 띄는 리메이크 시도들 역시 있었지만, 아쉽게도 많은 작품이 무산되거나 흥행에 실패했다. 반환 이후 홍콩에서 직접 제작된 누아르 영화들 자체가 국내 관객에게 소개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는데, 홍콩 누아르의 중심 인물인 두기봉 감독이 2000년대 연출한 역작 Breaking News , Election , PTU 등마저도 국내 대중에게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좌) 홍콩 원작 <마약전쟁> / 사진: IMDb (© 2013 - Variance Films) (우) 국내 리메이크작 <독전> 중 / 사진: ㈜용필름 와중에 <독전>이 흥행에 성공하며 원작 <마약전쟁>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킨 점이 흥미롭다. 두 작품은 줄거리는 같지만 스타일과 톤,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를 통해 <마약전쟁>은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작품으로 국내 관객에게 인식될 수 있었다. 영화는 두기봉 감독이 연출한 첫 홍콩-중국 본토 합작 영화로, 홍콩 마약 카르텔의 브로커 티미(Timmy)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마약 경찰 장(Zhang)과 공조한다는 설정으로 언더커버 범죄 스릴러의 흔한 관습을 따르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티미의 배신이 가져온 범죄 조직의 붕괴로 초점을 옮겨가고, 경찰 조직이 참혹하게 파괴되며 마무리된다. 치밀하게 탈출을 계획하는 티미와 마약 카르텔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장은 각자의 목표를 향한 굳은 결심을 지닌 채 극명하게 대립한다. 반면, <독전>은 경찰 원호( 조진웅 )와 락( 류준열 ) 사이의 정서적 긴장을 강조하고, 두 인물 간 경쟁 관계를 점차 심화시킨다. 그리고 자기 존립과 배신을 원동력으로 움직여 윤리적 측면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던 <마약전쟁>의 티미와 달리, 락은 마약 조직 내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로서 경찰의 수사를 도우면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인물로 상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인물 설정은 홍콩 누아르의 특징을 공유하는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며, ‘ 속죄를 통해 회복된 영웅적 행동 ’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원작 <마약전쟁>은 국가 간 합작으로 탄생한 동시대 홍콩 누아르에 그치지만, 리메이크작 <독전>에서는 남성 인물들이 차츰 동료애를 형성함과 더불어 서로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 극단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카르텔의 착취 구조를 배경으로 그에 대한 사회적 응징의 아이디어도 제시한다. 원호와 락은 마약 카르텔의 폭력에 어머니를 잃은 락의 사연, 그리고 그 카르텔에 대한 수사에 공조하려는 의지를 매개로 잠시나마 연대하고, 이로써 경찰과 범죄 조직원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이후 경찰 원호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개인의 실행을 중심으로 ‘정의’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락은 무자비한 착취를 기반으로 이익을 창출해온 브라이언의 신체를 훼손해 흔적을 남기며 사적 응징을 완수한다. 두 인물은 이윽고 서로를 총으로 겨눈 채 마지막 장면에서 마주하는데, 한때 감정적으로 결속했지만 극중 사건 이후 멀어진 둘 사이에 모호한 연대와 상호 환멸의 분위기가 감돈다. 박은지 연구원은 <독전>의 이와 같은 차별화된 서사와 감정들이, 홍콩영화 신드롬이 정착시킨 ‘농도 짙은 감정’의 범죄물을 한국 조폭영화의 관점에서 이해한 결과 라고 설명한다. 창작자의 시네필적 면모와 장르의 혼종이 작용하면서, 홍콩 누아르와 한국형 범죄영화의 특징들을 반영함과 동시에 전복하기도 하는 독창적인 리메이크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 토론 * 홍콩 침례대학교 영화과 조교수 도로시 와이 심 라우(Dorothy Wai Sim Lau)가 패널 3 발표자 4인의 연구 내용을 요약하고 아래와 같이 질문했으며, 발표자들이 답했다. Q. 김수현 교수에게 (질문1) 시대별로 한국과 중국이 처해있는 외교적 상황에 따라 합작 양상이 달라진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렇다면 <제3의 사랑> 제작 당시 한·중 간 정치·사회적 관계 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답변) <제3의 사랑>이 제직됐던 2010년부터 2015년 사이, 한국 정부는 영화산업에서의 합작에 호의적이었고 관련 절차가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본 작품의 감독과 촬영감독, 음악감독을 비롯한 여러 스태프 역시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했지만, 발표 중 이야기했듯이 중국 제작진의 개입과 지정학적 불안정성 등으로 인해 충분한 창작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질문2)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에게서 나타난 작가주의적 특색과 달리, 블록버스터 < 유랑지구(The Wandering Earth) >와 같은 작품은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national authorship)과 국가적 브랜딩이 눈에 띈다고 발표 중에 말씀하셨다. 후자의 ‘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 ’이 무엇일지 보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답변) 물론 장이머우와 천카이거 감독과 같은 이들은 한국의 봉준호 와 박찬욱 감독처럼,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통해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오랜 기간 인정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이 속한 제5세대 이후에 등장한 주선율영화(1990년대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이뤄진 후 사회주의와 애국주의 등의 중국사회 주류 이념을 교육 및 선전할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의 종류)와 같은 장르에서는 작가주의에 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비전이 관객 선전을 목적으로 하여 주입돼 있다. 따라서 감독이나 스태프 개인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작가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국가 권력과 이념을 기반으로 ‘중국영화’라고 이름 짓는 행위 자체만이 의미를 갖게 된다 는 점에서 제5세대 감독들의 활동과는 맥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Q. 팅 우 초 교수에게 (질문) 중국과 홍콩에서 비롯된 액션 스타일과, <맹갑>에 도입된 한국식 액션 스타일의 차이점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답변) 홍콩의 액션은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아, 각기 다른 그룹이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연출돼 있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이와 같은 홍콩식 액션을 받아들이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응용 했는데, 카메라 앵글에 맞춘 인위적 동작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움직임을 가미 했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Q. 박은지 연구원에게 (질문) 발표에서도 언급해주신 홍콩 누아르의 ‘정동’적 측면이 동아시아 국가의 리메이크작을 통해 표현 될 때 주로 어떤 특징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다. (답변) 이번 발표를 위해 진행한 <독전>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저 정동적 모티프로부터 영향에 따라 범죄자와 경찰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설정 이 있다. 이는 남성들 간의 연대에 기반한, 매우 불안정하고 양가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다른 하나는 ‘ 상호반영적 페르소나(mirroring persona) ’의 발견이다. 한국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두 남성 인물이 서로를 응시하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패널 4> 한·홍 합작의 재해석 특정 영화인이나 작품의 사례를 인용해 한국과 홍콩 간 영화 합작이 일어난 역사를 돌아보고, 눈 여겨 볼 만한 몇 가지 대목을 자세히 살펴봤다.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새로운 시대를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영화를 통한 두 국가의 협력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언도 이어졌으며, 패널 발표 전반은 홍콩 침례대 케니 응 교수가 이끌었다. 호금전의 한국 산악영화에 대한 재평가 (영화사가 · 독립 연구자 스테판 테오) 1970년대 한국영화는 홍콩과 대만과의 합작을 여러 번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Destination South Korea”와 같은 현상으로 일컬을 만큼 합작 영화의 주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스테판 테오(Stephen Teo)는 그중에서도 < 사문의 승객 >(1979)과 < 산중전기 >(1979)에 집중해, 한·홍 합작의 로케이션으로 한국의 산세가 선택된 맥락과 함께 각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었다. 그는 한국의 산속에 자리한 전통적 양식의 건축물과 사찰, 주변의 절경이 두 작품의 핵심적인 미적 요소로 기능했고, 배경이 되는 전근대 중국(historical china)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줬다고 말했다. 모든 장면이 인위적인 세트나 스튜디오를 이용하지 않고 실존하는 장소에서 있는 그대로 촬영된 점도 특별하다. 스테판 테오는 ‘문화적 냉전(cultural cold war)’이 이어지던 1970년대 중·후반 중국어권과 한국의 영화 합작이 선호되는 환경이 마련됐고, 두 편의 작품 역시 그 결과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의 잔재로부터 벗어난 직후였기에 정치와 사회 전반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무협을 비롯해 귀신, 종교, 미신 등(신이나 요괴,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중국영화의 한 장르로 ‘신괴’로도 일컬어진다)이 개입한 장르나 서사의 유통도 금지돼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영화 촬영지로서, 감독 호금전이 의도한 장르를 시도할 ‘자유’를 선사 했다고 봤다. 한국과 홍콩, 대만이 영화 제작 측면에서 ‘ 자유에 기반한 네트워크(freedom nexus) ’를 구축하며, 중국 본토에서의 정치, 사회,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수용되기 어려운 작품들이 제작되는 환경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지정학적 상황도 변화했기에 위와 같은 맥락은 작품의 가치를 뒷받침하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신 그는 한국이 ‘문화적 중국’으로 재현됐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합작의 의의와 효과를 설명했다. 유교학자 뚜웨이밍(Tu Wei-ming)이 제안한 개념인 ‘문화적 중국’은 중국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구성된 국제적 공동체를 가리키며,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을 포함해 전 세계의 중국어권 디아스포라 지역도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홍콩은 ‘문화적 중국’의 기조로 기획된 영화를 한국과 합작했고, 호금전의 위 두 작품에서 한국이라는 배경이 ‘문화적 중국’을 재현하는 데 효과적임이 입증됐다고 그는 평가했다. 호금전이 한 인터뷰에서 답변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몇몇 자연 경관으로부터 중국과의 문화적 유사성을 발견한 경험을 계기로 두 작품을 한국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두 국가는 유교와 불교와 연관된 의식이나 생활 양식을 오랜 시간 공유해왔다. 같은 맥락에서, 홍콩의 영화 제작진들 역시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된 문화적 냉전 시기, ‘문화적 중국’을 재현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한국을 택해 합작을 시도했다는 주장이다. <산중전기> 중 / 사진: IMDb( 1 , 2 ) 한편, 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되어온 동양 철학의 개념이 작품 속 주제의식의 동력이 된 점도 눈에 띈다. 도가적 사상에서 비롯된 장자의 ‘소요유’는 『장자』 제1편에 등장하는 용어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사물과 세상에 구속 받지 않고 광막한 공간에서 누리는 절대적인 자유이자 참된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호금전의 작품의 모티프로 자주 등장한다. <사문의 승객>과 <산중전기>에서도 인물들은 계속 걷는다. 단순히 땅 위를 걷는 것뿐만 아니라 적을 쫓아 뛰고, 몇몇 액션신은 공중에서 펼쳐지며 ‘하늘에서 걷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스테판 테오는 소요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감각을 포착한 호금전이, 이를 인물의 다양한 움직임들(걷기, 뛰기, 공중에서 활동하기)로 작품 속에서 실현 하고 있다면서, 배경이 된 한국의 자연경관 역시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관점에서 ‘소요유’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두 작품은 그 개념의 특성에 따라 존재와 시간의 ‘실존’을 지지하게 된다. 한편 호금전은 일종의 방랑자로서, 당시 중국사회의 제한적 환경에서 벗어나 한국이라는 대안적 공간에서 예술적 자유를 발휘해 창작한 작품으로 소요유 개념을 시각화했다고 덧붙였다. 무사, 스파이, 그리고 쿵푸 마스터: 정창화 감독과 초국가적 영화 제작자의 탄생 (홍콩 시티대학교 창의미디어학부 조교수 이상준) 이상준 교수는 그간 학술적으로 분석된 적이 드문 정창화 감독에 대한 예비적 수준의 연구로서 1960~70년대 한국과 홍콩에서 그가 지나온 연출 여정을 들여다봤다. 감독으로 데뷔한 1953년부터 1977년까지 그는 5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홍콩에서도 합작영화 제작의 주역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회고전을 계기로 그의 연출작이 지닌 영화사적 가치가 국내에서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당시 회고전에서는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와 작업한 한·홍 합작영화 9편이 상영됐다. 여러 국가를 오가며 활동하는 아시아 영화인들은 ‘내셔널 시네마’라는 프레임에 부합하지않는다는 이유로 과거 연구의 대상으로 쉽사리 선정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런 편협한 경향성이 사라지긴 했지만, 정창화 감독이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지녔거나 초국가적 작업에 참여하는 감독과 촬영감독, 배우 등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창화 감독은 활동 초기부터 여러 장르에 걸쳐 왕성화게 활동했다. 1965년부터 3년간 멜로드라마, 청춘, 무협 등의 장르영화 15편(< 황혼의 검객 > 등)을 한국에서 연출했고, 1968년에 쇼브라더스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6.25 전쟁 이후로 중국어 문화권의 제작사 두 곳(쇼브라더스, 골든하베스트)과 공식적으로 협업하며 높은 흥행 수익을 올린 최초의 한국인 감독으로 거듭났다. (물론 그가 쇼브라더스와 초반에 합작한 다섯 편은 제목과 감독의 이름을 사실과는 다르게 명시한 ‘위장 합작(counterfeit coproduction)’에 해당한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 배우와 촬영감독, 무술감독과 같은 제작 인력이 그의 활동을 계기로 홍콩으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합작에 합류하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제작 파트너가 골든하베스트로 바뀐 뒤에는, 그는 제작사 산하에서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별도의 전속 스튜디오를 설립해 한국은 물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제작사들과도 활발히 합작하기도 했다. 다만 그가 홍콩에서 제작했지만 한국에서 공개한, 앞서 언급된 ‘위장 합작’ 작품들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터라, 홍콩에서의 그의 활동이 학술적으로 면밀히 분석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낳고 말았다. 국내의 많은 영화사 연구자들은 그 작품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거나, ‘탈국적(denationalized)’ 활동의 결과물 또는 한국영화사의 ‘비공식적 일화’ 정도로만 평가했다. 이는 홍콩영화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 >(1972)이 ‘컬트적 고전(classic)’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역시 그를 ‘작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상준 교수는 이와 관련해 2008년에 홍콩의 영화 연구자 웡 아인 린(Won Ain-ling)과 대화하며 접한 설명을 인용했다. 웡 아인린에 따르면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영화’의 정체성 구성이 간절해진 상황에서, 홍콩을 상징하는 무협 장르의 영화에 한국과 일본 출신의 영화인들이 관계되어있다는 사실이 홍콩의 영화인들을 약간은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주자(Emigré)와 망명자(Exiled)와 같은 디아스포라 영화인들은 초국가적 영화사 형성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서 ‘내셔널 시네마’의 영역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활동이 망각돼서는 안된다고 이상준 교수는 주장한다. 영화와 사람, 문화적 움직임, 협업, 공간 등이 여러 국가에 걸쳐 조직될 수 있다는 ‘초국가적 관점’ 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창화 감독은 1960~70년대 한국과 중국어권 간의 영화적 교류를 중개한 이로 상정된다. 그는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고 정부 개입도 심각했던 당대 한국영화계에 쿵푸영화의 매력을 제시했고, 새로운 합작 파트너로서 동남아시아권의 인력을 소개하는 참신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상준 교수는 관련해 정창화 감독이 한국에서 홍콩으로 제작의 근거지를 옮기고 초반에 발생한, 쇼브라더스와의 합작 사례를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 망향 >(1958)을 통해 홍콩과의 합작을 처음으로 시도한 이후 < 조용한 이별 >(1967)과 < 비련 >(1967)을 제작했지만 홍콩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 첩보 스릴러로 손꼽히는 < 순간은 영원히 >(1966)의 흥행 성적은 비교적 준수했다. 설립자 런런쇼의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해 1968년, 쇼브라더스와 5년간의 계약을 체결하게 되기도 했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기준) 동시대적 설정을 바탕으로 ‘현대 액션 영화’를 구현할 줄 알았기에 자신이 섭외됐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이때까지 홍콩은 사극 기반의 무협 장르가 액션 영화의 중심이 되어 현대적 액션 연출 경험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쇼브라더스에서는 일본 출신 감독, 촬영감독, 작곡가, 안무가 등이 상당수 활동 중이었으며, 정창화 감독이 입성한 이후 성훈, 임지은, 남석훈 등의 한국 배우들의 합류도 앞두고 있었다. 당대 여느 제작사보다 국제적으로 조직이 구성되었던 업체라고 할 수 있다. 쇼브라더스의 국제 교류 역량에 힘입어 정창화 감독이 해당 제작사 안에서 처음으로 연출한 작품은 < 천면마녀 >(1969)로, 홍콩에서 007 시리즈가 유행하던 중 그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된 여성 주연의 액션 영화다. 두 명의 조감독과 배우 한 명(성훈)은 한국인으로, 세 명의 핵심 스태프는 일본인으로 기용하며 동아시아 출신의 인력들이 어우러졌다.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적정 수준의 상업적 이익을 달성하며 유럽 영화계에 진출한 최초의 쇼브라더스 제작 작품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그 사이 호금전의 <대취협>(1966)이 홍콩 박스 오피스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아시아 전반에 무협 장르 붐을 일으키면서 쇼브라더스의 제작 기조도 무협 장르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정창화 감독 역시 시장의 수요를 의식해 한국에서 <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 등 ‘국내 무협영화’를 연출한 데 이어 쇼브라더스에서도 중국어권 출신이 아닌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사극 무협 기반의 작품들을 연출했다. 그는 쇼브라더스의 무협 액션 스타일에 반일 감수성을 결합하고, 미국의 웨스턴 장르도 일부 차용했으며, < 강호여협 >(1970)과 < 아랑곡의 혈투 >(1970)와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아랑곡의 혈투>가 긴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연출된 전투 장면들로 볼 때 1960년대 만주리안 웨스턴 장르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천면마녀>, <아랑곡의 혈투>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다만 이상준 교수에 따르면, 정창화 감독은 무협 장르의 붐에 다소 늦게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쇼브라더스와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무협 장르 연출을 시도했던 1970년대 초반은 쇼브라더스의 무협 제작 열기가 식고 홍콩영화가 ‘쿵푸’라는 물결을 마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보다 현대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노동 계급의 이야기, 그리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맨손 쿵푸 액션은 홍콩영화의 새로운 흥행 공식으로 자리매김했고,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라는 제작사의 설립 및 운영의 주된 목표가 됐다. 정창화 감독은 이 트렌드를 재빠르게 수용해 1972년에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을 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쿵푸영화였지만 한국에서 제작했던 전작들과 유사하게 반일 감정을 모티프로 한 서사가 중심이 됐다. 다만 작품 개봉 직후에는 홍콩 내에서 흥행에 실패한 듯 보였고, 쇼브라더스의 새로운 인력과의 의견 불일치 등의 문제도 겹쳐 정창화 감독은 같은 해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직한다. 하지만 1973년 작품은 미국 박스 오피스 흥행 1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1970년대 초반 홍콩영화의 국제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골든하베스트는 할리우드와 같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구조를 추구하며 유연한 제작 체계역시 갖춘 기업이었다. 정창화 감독은 이곳에서 < 흑야괴객 >(1973), < 흑무사 >(1974), < 황비 >(1974), < 심판자 >(1976)를 연출했고, 다양한 장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 골든하베스트의 방침에 따라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한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작품 < 충열도(파계) >(1977)가 개봉하자, 그는 갑작스럽게 홍콩을 떠났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하신 만큼 한국영화의 발전에도 기여해줬으면 한다”라는 부탁을 문화공보부로부터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즈음 국내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전두환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어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 귀국 후 정창화 감독은 스스로 제작사 화풍흥업을 설립해 1980년대 중에는 국내에서 제작자로 활동했고, 이를 계기로 영화 연출에서 은퇴한 그는 199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상준 교수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창화 감독 회고전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한 조영정을 인용하며, “액션영화의 선구자로서 이 장르를 한국에 소개하고 발전시킨 그가 다채로운 이력에도 불구하고 심도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라는 점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발표 당시 컨퍼런스에 함께 하며 기조연설을 맡기도 했던 연구자 크리스 베리(Chriss Berry)의 말처럼,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 간의 연결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민족성(ethnicity)과 유사한 ‘국민국가(nation-state)’ 개념에 기반하지 않고, 개별적인 초국가적 프로젝트들에 의해 더욱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관련된 학술적 논의가 이어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하나의 냉전에서 또 다른 냉전으로: 한·홍 합작의 과거로 미래를 살펴보기 (홍콩필름아카이브 소속 영화평론가 샘 호) 샘 호(Sam Ho)는 이틀 간의 컨퍼런스를 마무리하는 순서에 걸맞게, 한·홍 합작의 과거를 지나 그로부터 역동적으로 변화한 결과로서의 현재를 개괄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국 간 영화 협업의 미래를 조망했다. 그는 동시대 사회가 유례 없는 새로운 질서 를 마주함과 동시에, 그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냉전 상황 역시 목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컨퍼런스의 목표가 더욱 뜻깊은데, 두 국가로부터 비롯된 영화적 움직임들이 갈라지면서도 합쳐지는 대목들을 다루고 있어, 모순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오늘날의 역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0년의 역사만 보더라도, 아시아는 외부의 오랜 침략과 억압으로 인해 깊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고통으로부터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 현재와 미래를 가꾸려는 의지가 돋보인다고 샘 호는 말했다. 따라서 아시아는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는 와중에 지정학적 권력의 중심으로 피할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그 권력의 중심지를 조정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려면 마주하게 되는 사건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짚어야 하는데, 개인이 모든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러 연구자가 관점을 공유하는 이번 컨퍼런스와 같은 자리가 자주 마련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그가 한·홍 합작 역사를 읽는 방법으로 추천한 바는 이렇다.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을 기점으로 합작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를 그는 홍콩영화의 제1 황금기라고 보는데, 좌익(left-wing)과 우익(right-wing) 진영의 제작사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홍콩영화의 두 진영은 당시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샘 호에 따르면 오히려 긴밀히 연결된 채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냉전 체제에도 불구하고 다극적인(multi-polar) 영화산업을 구축해나갔다. 여러 작품에 걸쳐 홍콩과 합작한 한국인 정창화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관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홍콩국제영화제에서 2000년대 초반의 독창적인 한국영화들을 관람하고 완전히 매료된 그는 해당 작품들 이전의 한국영화사가 궁금했고,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지원으로 한국에 방문해 한국고전영화를 연구하는 기회를 얻은 바 있다. 정창화 감독을 비롯해 홍콩과 합작한 여러 한국영화인들의 활동 역시 이러한 연구의 의지를 다지도록 해줬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과 홍콩의 합작이, 동아시아의 문화와 가치를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양국이 공유하게 된 경험 이고, 결과적으로 두 국가의 영화적 전형에서 벗어난 새로운 무언가가 창작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여정을 홍콩영화사와 연결 지어 돌아봤다. 홍콩은 자국 내 영화산업도 활성화된 상태였지만 영화 미학의 측면에서도 기여한 바가 큰 반면, 타국에 비해 필름아카이브를 상당히 늦게 설립했다(1990년대). 그래서 소장자료의 규모 역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인데, 그럼에도 아카이브로서 사업을 개척하고 학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샘 호는 그 비결이 영화 연구에 미치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수용하면서도 아카이브 고유의 임무에 충실한 연구를 병행 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영화 연구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은 아직까지 상당 부분 서구 문화권의 기준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연구 주제는 여전히 “저명한 지면”, 즉 서구의 주도 아래 발행되는 지면을 통해 공개되기 어렵다. 샘 호는 이를 비판하기보다, 지정학적 영향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 불가피한 현실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는 필름아카이브의 연구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영화학계의 여론을 지배하는 서구 문화권의 가치관에 근접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필름아카이브만이 파고들고 매진할 수 있는 주제로 연구하는 이들을 지원 하기도 한다. 아시아 영화인 1인의 필모그래피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저서를 집필하는 등, 주류 학계의 틈새를 메우는 이들의 유의미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샘 호는, 자신을 포함해 과거와 현재를 면밀하고 꾸준하게 연구하려는 의지를 지닌 아카이브의 일원들이 있기에, 홍콩영화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 토론 * 패널 3과 4의 발표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청중이 질문을 던지거나, 발표자들이 서로의 주제와 관련해 궁금했던 점을 문의하고 답변했다. Q. (청중) 이상준 교수에게 (질문) 정창화 감독은 홍콩에서 영화를 제작할 당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에 더욱 영향을 받았는지 , 혹은 홍콩 영화산업과 연출 방식에 동화된 상태였을지가 알고 싶다. (답변) 그의 자기 정체성 인식이 작품을 통해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처음 쇼브라더스를 통해 홍콩에 진출했을 당시, 그는 제작사와의 계약에 의해 섭외된 여러 외국인 감독 중 하나였다. 따라서 각본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작품 자체를 통제할 권한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연출 방식(액션 동작과 인물 설정, 반일 감정에 관한 요소 등)만큼은 당대 쇼브라더스에서 제작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골든하베스트 에서의 필모그래피는 달랐다. 이곳에서는 그가 창작에 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더욱 확대 됐고, 한국 출신 인력을 도입할 여건도 형성되어 쇼브라더스에 비해 훨씬 많은 ‘합작’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가 골든하베스트에서 작업할 당시 연출한 작품들을 선호한다. 물론 작품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은 전혀 아니며,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말씀드렸다는 점 참고 부탁드린다. Q. 샘 호 평론가 (질문) 일레인 정이 발표한 ‘부드러운 남성성’은, 중국의 유교적 가치관으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유래된 유교 사상에 입각해, 중국에서는 학문에 정진하는 ‘학자’로서의 태도 가 남성의 이상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건이 된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유교적 남성상은 점차 변화를 겪어 ‘신체적 강인함’을 수련하려는 태도도 강조 된 바 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학문 수양을 중심으로 한 전자의 ‘부드러운 남성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답변: 김수현 교수) 대부분의 각본을 남성이 집필하는 한국‘영화’ 의 경우, 신체적으로 강인하고 마초적인 남성성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반면 한국‘드라마’ 작품들은(특히 멜로드라마 장르가) 여성 작가에 의해 주로 집필되곤 한다. 그리고 이들이 그린 남성 인물의 이미지는 작가의 주관이 반영된, 이상적이면서도 무척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집합함으로써 탄생하기에, 한국드라마가 설정한 남성 이미지는 현실 사회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한국 영상 콘텐츠를 통해 남성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영화와 드라마에 각기 다른 양태로 형성되어있는 젠더 및 섹슈얼리티 구분 현상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고백. 내가 영화에 홀린 까닭은 단순하다. 영화가 활동사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다. 사진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간, 거기서 더 이상 사진이기를 중단하고 갑자기 새로운 시간이 시작하는 순간, 내 눈앞에 있는 모든 현실이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그 무언가의 힘 안으로 들어가 버린 다음 거기서 시침 뚝 떼고 다시 세상이 시작할 때, 거기서 나는 새로운 세상의 일부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거기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나는 몇 번이고 거기서, 라고 썼다. 거기서, 라는 지칭. 오랫동안 영화에서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들>을 보았을 때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거기서 내가 왜 그렇게 영화에 홀렸는지를 보았다. 똑같은 이유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스트롬볼리 >를 보았을 때 그걸 확인하게 되었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다. 그와 똑같은 의미로 꿈을 구성하는 예술이 아니다. 영화는 현실과 나 사이에 놓여진 간격의 세상을 창조하는 예술이다. 영화를 보는 나는 그 간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영화를 향해서 질문을 던질 때 그것은 그 간격의 구성 방법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그때 영화는 둘 사이의 매개가 아니다. 그건 그 자체로 하나의 활동하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시간이다. 우리는 영화를 담론 안에 살게 하면 안 된다. 이 기나긴 싸움. 담론과 형상. 물론 언어는 침식하듯이 다가와서 형상적인 것들을 잡아먹으면서 분절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언어가 그것을 자기의 체계 안으로 내재화시켜도 끝내 바깥에 머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중단된 이행. 그 사이의 침묵. 말하자면 침묵은 언어 바깥에 머물 것이다. 그때 나는 침묵에 시선을 돌릴 것이다. 침묵을 보는 일. 그게 영화를 지키려는 내가 할 일이다. 그 침묵을 통해서 비로소 영화가 언어에 의해서 상실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침묵의 가장자리에 놓여진 입구로서의 액션이라는 활동을 보게 된다. 이때 액션은 이미지이자 동선이며 시간이자 감각이고 무엇보다도 활동하는 형상이다. 아니, 차라리 나는 그걸 시네마틱 센스의 제 일 법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말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나는 이 법칙을 앞으로 좀 더 발전시킬 것이다. 영화적, 이라는 능력의 첫 번째 의미. 영화를 부정하려는 모든 이미지의 위협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우리들의 투쟁을 위한 첫 번째 방어선. 여기엔 다소 긴 서문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두 편의 영화를 오가게 될 것이다. 임권택 의 < 장군의 아들 >과 왕가위의 < 일대종사 >. 1990년과 2013년. 종로 우미관(優美館) 앞과 광저우의 불산(佛山, Foshan) 금루(金樓). 일본 제국주의. 김두한과 엽문. 그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 대신 그 둘은 서로를 보충하고 있다. 그 둘이 서로에게 무언가가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도 없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 놓여진 간격을 경유하여 이것을 저것의 자리에서 서로 각자 자기의 것으로 끌어당기려는 것, 바로 그 힘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거기에 놓인 유일한 교집합. 액션이라는 동선. 액션이라는 설계. 액션이라는 이미지. 액션을 둘러싼 시청각 기호들. 액션이라는 감각. 그리고 액션이라는 시네마토그래프. 활동하는 사진. 하지만 활동을 시작하자 사라져버린 사진. 서로 다른 카메라의 능력. 거기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가. 두 개의 활동하는 힘. 나는 둘 사이를 과도하게 도식적으로 묶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지금 액션만을 생각하고 있다. 이 위험한 생각. 내게 조언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건 스펙터클의 문제에요. 나는 지금 황홀, 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고 있다. 그 말을 파토스에 국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에서 액션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거기서 영화의 수학을 본다. 왜 그렇게 영화에서 액션은 기술(記述)하기 어려운 기술(技術)일까. 나는 여기서 설명하는 대신 단지 기술할 것이다. 그때 이 기술은 선과 속도, 점과 위치, 그리고 방향과 강도의 문제가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이 둘을 놓고 아무것도 이것을 저것에로, 혹은 저것에서 이것으로 환원하지 않을 것이다. 액션은 접촉이라는 문제라는 걸 생각해주기 바란다. 나는 두 영화를 가져다 놓은 다음 조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접촉의 방법을 확인하고 거기서 교차하는 영화적 경험을 보고 싶다. 단순하게 말하자. 여기서는 하나의 장면을 절단한 다음 저기에 올리고 저기의 것을 끌어다가 여기에 연결시켜서 하나의 집처럼 만든 다음 두 개의 층을 번갈아 오가게 될 것이다. 각각의 층. 나는 서로의 층이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둘 사이에서 마치 하나의 활동처럼 연결 지어져 있는 선을 따라가 볼 것이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겼는가. 하나를 본 다음 다른 하나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아니, 차라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요청하고 있었다. 나는 그 둘을 분리하는 대신 하나 안에서 출현하는 다른 하나를 겹쳐놓아 보기로 하였다. 말 그대로 배치. 그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을 설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당신이 현재라는 시간을 바탕으로 이끌어낸 내 기억의 발견과 그 안에서 진행되는 미래의 배움을 공감해주었으면 좋겠다. 인상에 대한 믿음. 거기서 시작된 감각. 나는 순진한 시선으로 그 둘 사이를 따라가 볼 것이다. 그때 서로에게 부여하는 다양한 힘의 방향들, 서로 다른 간격의 문턱들, 편집의 층위들, 동선의 단층들을 둘러볼 것이다. 단지 둘러보기. 그 말을 당신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두한. 엽문 물론 좀 더 친절한 유사성이 있긴 하다. 먼저 < 장군의 아들 >. 청계천 수표교 다리 밑에서 자란 김두한은 우연한 기회에 싸움에 말려들어 종로 주먹패들 안에 들어가게 된다. 종로패는 혼마치깡(지금의 충무로)를 점령한 일본인 하야시패와 서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김두한은 차례로 아래서부터 자신과 맞서는 상대를 무릎 꿇게 만들면서 위로 올라간다. 종로패 우두머리 김기환은 김두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위기에 처한 학생패 신마적 엄동욱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 하야시와 그가 고용한 (김두한의 어린 시절의 인연이자 유일한 싸움 경쟁자인) 김동회를 물리친다. 엄동욱은 김두한에게 종로를 넘겨주면서 그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2편으로 이어진다.) < 일대종사 >. 궁보삼은 북방 무술과 남방 무술이 서로 교류하는 장을 만들고 자신의 은퇴 이후에 ‘일대종사’라는 명예를 넘겨줄 무술가를 찾기 위해 불산 금루에서 대결의 연회를 연다. 여기에 영춘권을 익힌 엽문이 양광 국술계를 대표하여 차례로 아래서부터 물리치고 올라선다. 궁보삼의 제자 마삼도 그 자리를 탐내지만 궁보삼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삼은 스승에게 반기를 들고 궁보삼은 대결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딸 궁이는 정혼을 파기하고 마삼과 대결하여 그룰 굴복시킨다. 엽문은 ‘일대종사’가 되지만 홍콩으로 건너가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모두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잊혀져간다. 둘의 공통점,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둘은 (영화 제목이 부여하는) 명예의 자리에 오른다. 그런 다음 엽문과 그 모든 인물들은 위에서 아래로 역사의 힘에 의해서 추락한다. 세 편의 이야기 끝에 김두한은 김동회의 부축을 받으면서 종로를 떠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둘 사이의 줄거리의 유사성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단지 장면 안의 인물들의 동선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칭하는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만 이 줄거리를 이용하기 바란다. 임권택 그리고 약간의 사연. < 장군의 아들 >은 임권택 이 이어나가던 창작의 선 안에서 일종의 만곡처럼 보인다. 1972년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를 만들고 난 다음 임권택은 두 번 다시 다찌마와리 영화를 연출하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리만큼 이 영화의 제목이 그 자신의 선언처럼 읽힌다. 그런 다음 < 잡초 >를 만들었다. 새마을영화, 전쟁영화, 반공영화를 만들었지만 다찌마와리에 대해서는 마치 돌아보기도 싫다는 듯이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 장르의 영화가 몰락한 것도 아니다. 그런 다음 < 족보 >를 만들었다. 차례로 자기의 탐구를 이어갔다. < 만다라 >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 길소뜸 >과 < 티켓 >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이어지면서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새로운 미학적 형식의 기준이 세워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건과 인물, 형식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 씨받이 >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 개벽 >. 천도교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전기. 더 높이 더 멀리 뛰면서 이 땅의 개벽을 소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다음 갑자기 <장군의 아들>을 찍었다. 장르영화에로의 복귀. 물론 누군가는 <개벽>에서 <장군의 아들>로 이어지는 인물의 전기에 대해서 설명할지 모른다. 하나의 선. 나는 가능한 (모델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초상화와 같은 탐구가 없다. 여기서 김두한은 캐리커처처럼 단순해졌고, 종종 배경은 평면적이거나 흐릿해져서 공간적인 설정이 아니라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 영화에서 그런 단순함을 사랑한다. 하지만 거기서 인물의 가시성이라는 문제를 생각한다. 가시성의 형상. 가시성의 장소. 가시성의 방법. 방법의 배열. 인물에게 비치는 빛과 그림자. 불투명성과 투명성 사이의 긴장. 보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사이의 분배. 우리는 영화에서 그려내는 초상화가 가시성의 체계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임권택은 좀 더 직접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 < 아제아제 바라아제 > 이후 < 하류인생 >까지 영화를 제작했던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 나한테 자꾸만 한번 하자는 거예요. 처음엔 화를 냈다니까. 그런데 자꾸만 마음속 한 구석에서 이걸 해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게 보고 싶어진 거지요” <장군의 아들>은 임권택 자신에게 (그의 첫 번째 다찌마와리 영화인) 1964년 < 욕망의 결산 >에서 1972년 <떠나야 할 자와 돌아와야 할 자>에 이르는 (<잡초> 이전까지의) 영화와 다시 대면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여기서 배수의 진을 쳤다. “압구정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참 사내답지 않은 아이들이 지천인 거예요. 그 아이들을 데리고 1930년대 경성 거리에서 살아간 사내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죠” <장군의 아들>에서 ‘협객’으로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처음 영화에 출연하는 신인들이었다. 남자 배우도 그렇고 여자배우도 그렇다. 한 번도 연기 경험이 없는 배우들. 그 ‘아이’들은 종종 발성이 되지 않았으며, 연기의 동선을 알지 못했고, 씬의 연결에 대해서 현장에 와서 처음 구경했다. “내가 영화를 찍다 중간에 겁이 덜컥 나보기는 처음이에요. 어쩌려고 내가 이런 건가, 라는 순간을 매번 촬영 때마다 마주친 거요. 그래도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활기라는 게 있잖아요, 내가 그걸 놓치면 안 된다, 라는 심정으로 찍어나간 거죠” (아직은 시인이었던 영화감독) 유하 가 양귀자 의 소설 제목 <바람 부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를 패러디해서 <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를 막 발표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 시인을 문학과 지성사는 104번째 시집으로 초대하였다. 압구정 거리와 경성 종로통. 두 시대의 ‘모던 뽀이’들. 왕가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왕가위는 < 화양연화 >와 < 2046 >을 만들고 난 다음 잠시 멈추었다. 물론 캘리포니아에 잠시 다녀온 짧은 바캉스와도 같은 <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가 추신처럼 그 뒤에 달려있다. 나는 <화양연화>의 월드 프리미어 시사를 2000년 9월 18일 오후 7시에 홍콩에서 보았다. (그해 5월 칸 영화제에서는 워크 프린트가 상영되었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만찬회장으로 가는 차를 함께 타고 갔다. 왕가위는 이제야 끝났다는 약간 지친 표정으로, 다소 상기된 얼굴로, 언제나처럼 호화찬란한 홍콩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화양연화>를 지금 막 본 다음이었기 때문에 출렁이는 내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이 영화는 이제까지 당신이 만든 모든 영화들보다 더 훌륭합니다. 왕가위는 선글라스는 벗으면서 고마워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문득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제는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에요. 이 수상한 첨언.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말처럼 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말은 수수께끼처럼 내게 머물렀다. 그때는 그 말을 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왕가위의 타이밍. 기다리고 있는 배우들. 양조위, 장만옥. 그의 스텝들, 장숙평. 박수소리. 예술적 승리. 술과 요리들. 나는 그 말을 곧 잊었다. 그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러니까 5년이 지난 다음, <2046>을 보다가 문득 극장에서 그 말을 떠올렸다. 집(home)은 그가 살고 있는 집(house)이 아니라 그의 고향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왕가위를 처음 만났을 때 질문했다. 홍콩은 당신에게 어떤 곳인가요. 왕가위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홍콩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상하이에서 태어났고 단지 홍콩에는 아버지를 따라와서 잠시 머물고 있는 것뿐입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왕가위는 다섯 살에 상하이를 떠나 홍콩에 왔다. 다섯 살의 어린 아이. 그 아이는 홍콩에서 살면서 그 후로 한 번도 여기가 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 떠돌고 있는 주인공들. 발 없는 새. (< 아비정전 >)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무사들. (< 동사서독 >) 홍콩에서 캘리포니아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 중경삼림 >) 불면증에 시달리는 킬러. 홍콩의 밤. (< 타락천사 >) 세상 끝에 가보고 싶어요. (< 해피 투게더 >) 앙코르와트. 내게 만일 표가 두 장 있다면 함께 떠나주실래요. (<화양연화>, 혹은 <2046>) 그리고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한 번 홍콩을 반복한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1997년을 지난 지 10년도 넘게 지났다. 1936년 광저우 불산. 왕가위는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의 전기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오랜 동안 < 상하이에서 온 여인 >을 찍으려던 계획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엽문은 북방무술과 남방무술의 교차로인 불산에서 ‘일대종사’가 되지만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공산당의 전쟁 중에 홍콩으로 거취를 옮긴다. 거기서 어린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전수하지만 영화는 그 전에 끝난다. < 일대종사 >는 이제까지 홍콩을 떠나거나 떠나지 못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던 왕가위의 영화와 반대의 지리적 방향으로 진행된다. 혹은 역사적 수순을 따른다. 왕가위는 < 일대종사 >를 만들겠다고 결심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중국 전역에 흩어져있는 무술 명가의 일대종사들을 차례로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무술을 ‘감상’하고, 그들의 안무를 촬영하고, 그런 다음 조언을 구했다. “<일대종사>는 내게 중국의 정신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중국에서는 과거의 유산이 많이 사라졌거나 아니면 바뀌어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치도 버리거나 부서져버렸습니다. 아직 유산을 담고 있는 무언가를 잡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무술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정신의 방법을 알고 있는 스승(Master, 一代宗師)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왕가위는 마오쩌둥의 노선에 대한 비판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 해방 이후 유교전통과의 투쟁. 195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의 분서갱유. 문화혁명과 조반유리(造反有理). 일부 수정주의 노선에 따라 자본주의 시장을 표면적으로 개방했지만 여기는 지금 중국 사회주의 한복판이다. 나는 좀 더 < 일대종사 >의 배경을 설명하고 싶다. <일대종사>는 왕가위의 첫 번째 무술영화이다. 이 영화는 두 번째 무협영화가 아니다. 물론 왕가위는 자신만의 무협영화를 만들었다. < 동사서독 >. 명백히 호금전의 그림자 아래 놓인 영화, 후 샤오시엔을 감탄시킨 사막의 풍경화. 서극은 <동사서독>을 보고 난 다음 탄식을 했다. 나는 이제 더 빨리 찍을 수 밖에 없어요, 왕가위는 가장 느린 무협영화를 만들었어요. 명백히 서극은 < 칼 >을 찍으면서 왕가위를 의식하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의 미술은 장숙평이다) 장르 안에서의 경쟁. 말하자면 장르라는 경기장. <일대종사>를 만들었을 때 왕가위는 무술 영화의 전통 안에 처음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이건 그가 해본 적이 없는 장르이다. 물론 왕가위는 재치 있게 대답했다. “<일대종사>는 쿵푸영화가 아니에요. 이 영화는 쿵푸에 관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같은 말이다. 그때 왕가위는 이번에는 장철의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장철은 < 복수 >를 전환점으로 해서 무협영화에서 무술영화에로 옮겨갔다. 새로운 동작들. 검(劍)은 권(拳)이 되었고, 피아노 줄은 수명을 다했으며, 트램펄린과 편집의 이음새는 좀 더 정교해졌고, 대결의 거리는 좁아졌으며, 더 많은 피를 흘리는 대신 뼈가 부러지는 사운드가 가세하였으며, 몸은 새로운 형태의 도면이 되었다. 피와 살. 신경조직들. 그때 새로이 몸에 자리한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시지각의 관계 안에서 몸이 불러일으키는 반응. 때로 타격을 받아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몸. 그 안에서 흩어져버리는 생명. 각자의 고유한 몸. 살과 고기. 액션의 대상으로서의 육체라는 물(物). 쇼 브라더스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골든 하베스트는 홍콩 액션영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결정적인 새로운 스타 이소룡, 그의 죽음 ‘이후’ 성룡. 비극에서 희극에로. 정창화 (가운데) 나는 여기서 희미하게, 거의 지워질 듯 하면서도, 그 사이에서 가까스로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이름을 호명하고 싶다. 정창화 . 임권택 에게는 (그 스스로) 영화를 가르쳐준 스승이라고 부르는 사람. 그는 정창화 이외의 감독에게서 연출부를 한 적이 없다. “내가 만일 < 장군의 아들 >에서 해낸 액션 장면들이 인상적인 것이라면 대부분은 정창화 감독의 연출에서 가져온 경험들인 거예요” 정창화는 1968년 홍콩 쇼 브라더스에 가서 액션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 천면마녀 >는 홍콩에서 만든 다음 서울에서 개봉하였다. (그리고 유럽에 개봉하였다) 나는 그 영화를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보았다. < 아랑곡의 혈투 >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 철인(天下第一拳) >을 연출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미국에 <5 fingers of Death>로 개봉하여 주말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타란티노는 2002년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 투표에서 자신의 10 베스트 영화중의 한 편으로 선정하였으며,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운드트랙을 < 킬빌 >에 인용하였다. 정창화가 홍콩 쇼 브라더스에서 연출할 때 장철은 같은 스튜디오의 경쟁자였다. 그리고 오우삼은 장철의 연출부였다. 물론 오우삼은 정창화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걸 오우삼이 < 첩혈가두 >를 찍을 때 물어보았다. “정창화의 연출은 하나의 전통이 되었지요. 그 전에는 드라마와 액션 장면을 서로 다른 것으로 여겼어요. 하지만 정창화는 드라마 없는 액션은 감정이 없다고 생각 했어요” 정창화의 시간은 짧았다. 그는 한국에 돌아왔고 1981년 홍콩 뉴 웨이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우삼은 파토스가 충만한 액션 활극을 연출했다. 그게 전적으로 정창화의 영향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종종 주윤발의 코트자락, 적룡의 표정, 장국영의 노래 부르는 것만 같은 제스처들에서 그림자가 묻어난다. 임영동은 두 번째 새로운 물결이 되었다. 임영동은 오우삼의 전통에 저항했다. “난 장르 안의 리얼리즘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왕가위는 그를 위해서 시나리오를 썼다. 약간 소설처럼 쓰고 싶다. 그는 저 멀리 잠시 동안 머문 다음 떠나간 한국인을 쳐다보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정창화의 영화들은 홍콩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그때 정창화는 무협에서 무술영화에로 이행하는 (혹은 접합하는?) 시기에 잠시 걸쳐 서 있었다. 나는 둘 사이에 있을 지도 모르는 영화적 진동판을 건드려보고 싶다. 영화라는 커뮤니티. 영화사라는 시간적인 울림. 배움의 전이. 경험의 공집합. 방법의 정식화. 자기의 유한 세계 안에서조차 자신이 포함된 세계의 법칙들에 따라 움직이는 방법을 완전하게 무시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지만 이건 위험한 가설이다. 여기서 왕가위 영화의 뿌리는 1960년대 쇼브라더스 무협영화가 아니라 1950년대 광동 오페라양식의 멜로드라마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는 몇 차례이고 광동 오페라에 대한 자신의 매혹을 반복해서 고백했다. 그리고 그 고백을 < 동사서독 >, < 화양연화 >, < 2046 >, 여기에 그 어떤 영화보다도 < 일대종사 >에서 메아리처럼 듣는다. 일그러진 균형. 계속해서 사라지는 등장인물들. 군무와 아리아. 사람들은 이 영화를 대부분 오해했다. 경극과 오페라의 기기묘묘한 착종. 이 무대로부터 영향을 받은 1950년대 홍콩영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들은 (이 장르의 호사가들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다음 왕가위는 1950년대 할리우드영화와 1960년대 유럽 영화들에 이끌렸다. 그는 십대 소년시절을 영화관에서 보냈다. 왕가위는 그만큼 임권택과 멀리 있다. 왕가위가 그의 첫 번째 영화 < 열혈남아 >를 만들었을 때 임권택은 < 아제아제 바라아제 >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 아비정전 >을 촬영하고 있을 때 <장군의 아들>이 제작되었다. 나는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이미 말했지만 강제로 임권택 과 왕가위의 선을 연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은 내게 방법에 관한 전략의 문제이다. 영화에서 액션은 결국 과정을 보는 기술이다. 그때 우리는 방법의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그것을 보는 지식에 대한 일련의 질문을 위치지어야 한다. 액션의 성질, 동선의 출발. 이 선이 연결하는 변주들. 그 사이의 법칙과 목표 사이의 긴장. 물론 우리는 상황을 놓치면 안 된다. 나는 액션의 시퀀스란 결국 집합의 문제틀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움직이는가. 거기서 집합은 어떻게 분산되고 다시 하나로 모이는가. 누가 장소를 채우는가. 그 장소를 어떻게 채우는가. 동시적인 질문. 말하자면 영화적 순간들의 활용이라는 문제와 우리는 여기서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이때 왜 그 둘이 필요해졌는가. 나는 여기서 임권택을 임권택이라는 집합으로부터 빼내오고 싶다. 우리는 자칫하면 잘못된 운동의 가능성에로 휘말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세 편의 < 장군의 아들 >은 이 영화들을 둘러싼 < 개벽 >과 < 서편제 >로부터도 이상한 방식으로 떨어져 나와 있으며, 동시에 1960년대 임권택의 다찌마와리로부터도 달아나있다. 그러므로 나는 같은 방법을 따르고 싶은 것이다. 차이와 반복은 여기서 우선적으로 피해야 할 방법이다. <장군의 아들>을 보면서 이 주변을 둘러싼 영화들과 연결 지어 동일하게 다루는 관점을 먼저 피한 다음 모든 것이 뒤에 남겨진 다른 모든 영화들로부터 만들어진 연결과의 차이로부터도 나와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바르뜨의 말을 흉내 내서 말하자면) 나에게는 가시적인 것의 가시성과 가시성의 가시적인 것 사이에서 <장군의 아들>에서 내가 본 것을 < 일대종사 >가 (마치) 설명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 보는 것 속에 위치 지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Ceci n´est pas une pipe 내게 약간의 유머를 허락해주었으면 좋겠다. 말하자면 르네 마그리뜨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 파이프라는 형상. 그때 그 곁에 애매하게 달려있는 언표. 그 설명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푸코는 간명하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상사(相似)는 자신에게로 되돌아갑니다. 자신으로부터 출발해 펼쳐졌다가 다시 자신 위로 접히는 것입니다. 나는 같은 방법으로 설명을 흉내 내고 싶다. 그 둘을 동일한 운동 안에 집어넣은 다음 그 둘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서로가 동시에 활동하는 영화적 법칙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형상에 대한 언표의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형상으로서의 언표. 언표로서의 형상. 그때 여기서는 어느 쪽에도 우선권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둘 사이의 성격과 형질, 그리고 동선과 과정이 다르더라도 그 안에서 법칙은 언제나 영화라는 과정 안에서의 결정이 행사하는 방식에서 출발하고 그런 다음 귀결된다는 것이다. 나는 결정을 보고 싶은 것이다. 임권택 의 결정. 왕가위의 결정. 대부분 영화에서 그 결정은 과정 안에 신비롭게 숨어있다. 나는 그걸 끌어내서 가시성의 할 수 있는 한 가장 순수한 이것임, 을 설명할 수 있는 긍정의 아니다, 에로 데려가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액션의 방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방법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보려는 것이다. 첫 번째 활동. < 장군의 아들 >에서 김두한의 첫 번째 대결은 영화가 시작한 다음 24분 55초,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하고 4분의 1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처음 나온다. 이 씬 앞에 김두한이 종로패에 들어가는 계기가 된 싸움, 신마적 엄동욱과 구마적의 우미관 앞에서의 대결, 그리고 전라도에서 올라온 망치와 김두한의 싸움이 있지만 여기까지는 싸움의 규칙, 인물들 사이의 관계, 지리적인 이동의 체계, 종로와 충무로, 무대로서의 공간의 소개를 위한 것이며 사실상 <장군의 아들>에서 액션 장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씬은 양적으로 매우 짧다. 고작해야 1분이고 그리고 조금 넘은 다음 몇 초 정도를 더한다. <장군의 아들>에서 액션 씬들은 예외 없이 모두 짧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 나면 내내 액션 장면들만을 보고 나온 기분이 든다. “액션은 결국 분위기인 거예요, 거기다가 몰아넣기까지가 힘든 거요,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는 빨리 거기서 빠져나올 궁리를 해야만 되요. 이게 길어지기 시작하면 허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제 억지를 부리게 되는 건데, 싸움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기예를 익힌 선수들의 시합을 보아도 정말 잘하는 게 무언지는 그 세계를 아는 사람들의 눈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거기서 내가 무엇을 찍으려는 건지를 먼저 정한 다음 그걸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이 장면은 김두한이 종로패에 막 들어가고 난 다음 거리에서 조선 학생 깡패들과 일본학생 깡패들의 싸움에 휘말려 드는 대목이다. 약간의 설명. 1930년대 경성에서는 조선학생들과 일본학생들이 종종 싸움이 붙었으며, 이 싸움은 민족주의적 파토스가 거기 함께 담겨있어서, 일종의 자존심 대결 같은 양상을 보였다. 물론 이 설명은 역사적인 배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후일 이 시대를 다시 재각색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신화일 것이다. 홍성유의 원작소설에서 김두한과 그의 종로 깡패들을 협객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싸움에서도 예와 의를 지키면서 승패를 겨루었다. 그건 일본 혼마치깡패도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현실 세계 안에 공존하는 일종의 상상적인 또 하나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장르의 규칙이라는 이름 아래 보호받는 또 하나의 세계. 김두한은 여기서 현실세계로부터 장르 안의 세계 질서 안으로 옮겨간다. “거 주먹세계, 거 별거 아니더라구”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S#_11 S#_12 S#_13 S#_14 S#_15 상황의 설명. 풍미당 빵집에서 지금 막 큰 형님으로부터 가죽 잠바를 물려 입고 배부르게 빵을 먹고 있는 김두한을 청계천 수표교 다리 밑 움막에서 함께 지내는 친구 진영이 찾아온다. 진영에게 우쭐해진 김두한은 그에게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주면서 책을 사보라고 한 다음 자기는 돈이 필요 없는 자리에 갔다고 큰소리친다. “거 주먹세계, 거 별거 아니더라구”라고 하자 진영은 “너 그러다 종로 휘어잡겠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 말에 문득 김두한은 자세를 고치면서 “잡지, 잡고 말고”라고 대답한다. 말하자면 종로패의 우두머리를 위한 첫 걸음. 이제 그 자리를 향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상승이라는 선. 당신은 이 방향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물론 선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는 드라마의 운동. 김두한은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혹은 운명이 그를 그 자리에로 이끈다. 마치 그 대답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두 개의 대답의 차이) 그때 종로패 한명이 뛰어 들어와 김두한에게 다급하게 말한다. “두한이 형, 일본 학생하고 조선 학생하고 한판 붙었는데, 그 왜 있잖아, 오찌아이라는 깡패 두목 그 놈한테 걸린 모양이야”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선. 이때 풍미당 바깥으로 나가면서 김두한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간다. 동선이라는 문제. ( S#_1) 두 가지 설명. 이 대결에 김두한이 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김두한이 달려간다. 효과의 이유. 김두한은 의협심이 있으며, 게다가 일본인에게 조선인이 맞는 상황을 참지 않는다. 말하자면 장군의 아들. 아버지 김좌진의 피. 하지만 이 효과는 심리적으로 김두한을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게 허락한다. 김두한은 즉흥적이며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 미처 계산하지 못한다. 종종 김두한이 (전체 안에서) 수동적인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능동성에 이끌리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행동의 결정은 시종일관 반복된다. 그리고 이 결정이 종종 사건을 만들어낸다. 또 하나의 설명. 김두한은 운명에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의 자리에서 자신의 말을 증명해야 한다. < 장군의 아들 >은 먼저 말한 다음 거기에 대해서 사건이 다가오고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때 마치 김두한은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중적인 반어법. 김두한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항상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기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때 그래도 김두한이 하는 것은 언제나 대결이다. 우리는 이 대결의 성격을 설명하지 않으면, 임권택 의 말을 빌리면, 싸움의 분위기 안으로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항상 이미 거기에 있었던 대결. 그 자리에 불려가는 김두한. 우리는 이 대결이 일종의 소급효과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운명의 벡터. 김두한이 달려간 장소는 좁은 골목 안이다. ( S#_2) 김두한과 그를 부르러 온 종로패 사내를 뒤따라 카메라는 그 안으로 약간 흥분한 듯이 함께 안으로 흔들리며 직진한다. 이때 보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그 흔들림의 신호와 음악의 청각적 기호이다. 이 영화는 대부분 카메라를 레일 위에 올려놓았거나 안전하게 크레인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마치 들고 찍은 것처럼 움직일 때 그 흔들림이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인 신호처럼 가시화된다. 물론 이 장면은 장소의 힘이 불러일으키는 구도의 긴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두 개의 사선으로 이어진 깊이 안으로 우리를 이끌 때 여기에는 두 개의 운동이 있다. 하나는 카메라가 김두한과 종로패 사내와 함께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는 전진의 인력이지만 다른 하나는 사선의 깊이 안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가상선의 교차점에 서 있는 오찌아이의 존재감이다. 이 골목에는 오로지 직선밖에 없다. 그리고 그 선은 양쪽으로 교차하듯이 가운데를 향하고 있다. 거기서 김두한은 자기의 첫 번째 대결을 치러야 한다. 이때 이 골목이 단지 수평 직선이 아니라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상승의 방향으로 저 뒤쪽 배경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여기서부터 올라서야 하는 계단. 그 첫 번째 대결의 장소. 일종의 장면을 설정하는 쇼트(master shot). 김두한의 자리에서 멀리 있던 카메라가 단숨에 대결 장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임권택은 오찌아이에게 얻어맞는 조선학생이 땅바닥에 뒹구는 모습으로 바로 뛰어 들어간다. ( S#_3) 이 쇼트는 앞의 쇼트에서 이어져야 할 두 개의 다이어그램에서 김두한을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시선의 교차점을 잘라낸 것이다. 시선의 교환 사이의 데쿠파주. 김두한은 구경꾼의 자리에 있으며 오찌아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오찌아이가 그를 바라보는 것(reverse_shot)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선을 성립시키지 않으면 그 둘을 대결의 관계로 이어붙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두 개의 집합 중에 바깥의 블록으로부터 내부의 블록 안으로 시선의 고정점을 들여보내야 한다. 오찌아이를 찍은 다음 장면( S#_4)에서 그는 손가락을 들고 화면 정면을 향하여 “다음 놈은 나와라”라고 소리친다. 물론 그 손가락은 조선 학생들을 향한 것이지만 ( S#_5) 앞의 장면과 마주보는(reverse_shot) 다음 쇼트의 9명의 인물 중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은 김두한이다. 이때 임권택(과 정일성 )은 오찌아이와 김두한 사이를 오가면서 두 인물의 크기를 거의 동일하게 맞춰놓았다. 이 장면은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9명을 세워 놓으면서 아무도 인물들 사이에서 겹쳐 세워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 9명은 좁은 골목 안에서 반대로 수평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 김두한을 제외한 모든 인물에게 학생복을 입혔기 때문에 짧은 쇼트지만 시선은 김두한을 꼭짓점으로 하여 옆으로 벌어져 보인다. 임권택은 골목의 사선과 면 사이에 인물을 세워놓을 때 반복적으로 수평 구도로 늘여놓는다. 패배감에 조선학생들이 등을 돌려 돌아가려 할 때 김두한은 그들과 함께 등을 돌리면서 슬그머니 가죽 잠바를 벗는다. 등 뒤에서 오찌아이가 “이제 없는가?” 라고 물어볼 때 ( S#_6) 김두한이 돌아서면서 “여기 또 있다”라고 대답한다. 이 쇼트는 하나의 행동을 둘로 나눈 것이지만(double_action) 동시에 방향을 바꾸면서 상대방에로 시선을 돌리는 매우 간단한 방법이다. 이때 임권택은 동시에 9명 속에 섞여있었던 김두한을 그들로부터 떼어내는 효과를 동시에 활용하고 있다. 김두한이라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때 이 골목은 너무 좁아서 45도로 비틀기에 적절한 위치가 없다. 어쩌면 벽면의 붉은 색 벽돌은 이 골목의 연속성으로부터 인물의 행동을 고립시킬 수도 있다. 임권택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돌아보는 김두한과 그 시선을 따라가면서 벽면과 사선으로 평행이 되도록 세워 놓았다. 김두한의 대답이 오찌아이가 돌아보는 쇼트(reverse_shot)를 성립시킨다. ( S#_7) 구경꾼들이 배경으로 수평으로 늘어서 있고, 돌아가려는 일본학생들이 멈칫 할 때 오찌아이만이 마치 조건반사처럼 정확하게 돌아본다. 그들 사이에서 최고의 싸움꾼. 김두한과 겨뤄야 할 첫 번째 상대. 그가 보여주는 예민한 신경. 그 힘을 다시 이쪽으로 옮겨오기 위해서 거기에 먼저 힘을 실어야 한다. 오찌아이는 일본학생들 사이를 걸어 나온다. 정면으로 직진하는 오찌아이를 바라보며 그 앞으로 나서는 김두한의 얼굴을 가까이 다가갈 때(close_up) 거기서 보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표정 속의 눈이다. 마치 상대방을 반사하는 것만 같은 눈 안의 빛. 얼굴 위에 덧 쓰여진 표정. 그 위에 상대방을 향하는 시선, 그 시선의 방향을 따라 김두한이 화면 바깥으로 이동할 때(out_of_frame) 그는 마침내 오찌아이의 프레임 안으로(into_frame) 들어서는 것이다. 이제 두 개의 다른 블록이 하나가 된다. 혹은 여기서 저 안으로 이동한다. ( S#_8) 이때 김두한과 오찌아이는 먼저 서로를 마주보면서 상대방을 가늠한다. 물론 김두한이 블록 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먼저 김두한의 등 뒤에서 오찌아이를 바라보고 ( S#_9) 그런 다음 (reverse_shot) 오찌아이의 등 뒤에서 김두한을 쳐다본다. ( S#_10) 여기서 오찌아이가 김두한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할 때 그를 마주보는 김두한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동선의 일치이다. 탐색전을 벌이던 두 사람을 동일하게 한 프레임으로 잡을 때 갑자기 카메라가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간 다음 수직으로 내려다본다. ( S#_11) 그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의상밖에 없다. 이 프레임의 구도는 오찌아이를 왼쪽에 세우고 김두한을 오른쪽에 세운 다음 골목을 마치 경사 앵글처럼 비스듬하게 세운다. 이 구도가 이들의 대결을 역동적으로 만든다고 설명하는 것은 상투적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이 쇼트는 독립적인 프레임이 아니라 리듬 안에 놓여진 것이다. 김두한과 오찌아이가 서로를 마주볼 때 이 좁은 골목에서조차 오찌아아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내려왔고( S#_9) 김두한은 아래서 위로 오찌아이를 올려다보면서 올라간다. ( S#_10) 결합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위와 아래. 이 높낮이를 만들면서 동시에 이 균형관계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카메라는 구태여 왼쪽과 오른쪽으로 조금씩 이동해서 중앙 소실점의 성립을 피하고 있다. 그런 다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때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면서 동시에 경사진 구도에서 오찌아이가 왼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움직일 때 김두한은 오른쪽 아래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움직인다. 물론 이 시선은 영화를 보는 쪽에서만 성립되는 높낮이이다. 그러나 임권택은 두 인물을 각자의 동선을 따라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블록 안에서 높이의 배치를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둘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S#_12) 갑자기 구경꾼들 바깥으로까지 빠져나간 다음(long_shot)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좀 더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내리 누르듯이, 찍은 구도에서 오찌아이가 저 멀리 보이고 그 앞에 금방이라도 달려들 자세를 취하는 김두한의 위치는 잘못된 배치이다. 영화 문법적으로 이 두 사람의 배치는 김두한과 오찌아이의 상상선이 맞지 않는다. 약간 에매하지만 둘 중의 하나가 맞지 않거나 혹은 위치가 바뀌었다. 하지만 수직으로 내려다본 카메라의 위치가 완전히 이 시선 바깥으로 나갔기 때문에 마치 이 쇼트는( S#_11) 일종의 인서트처럼 쇼트 사이를 그냥 건너간다. 물론 이 쇼트 자체는 인서트가 아니다. 간단한 설명. 이 쇼트를 삭제하면 두 개의 쇼트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 S#10_ S#_12) 여기서 갑자기 이상한 쇼트의 교환이 일어난다. 완전히 구경꾼 바깥으로 빠져나갔다가 김두한이 결정적인 일격을 가할 때( S#_13) 카메라는 두 사람 사이 안으로 가깝게 들어와서 순간적인 디테일을 보여준다. 단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액션의 속도 자체에 변화를 주어서 스텝 프린팅의 방법으로 다시 변속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 S#_14) 이때 앞의 디테일의 쇼트와 다음 장면을 연결시키는 것은 스텝 프린팅의 변속으로 이어지는 액션의 리듬이다. 이 효과는 우리에게 클로즈 업 다음에 바로 뒤이어 완전히 뒤로 물러난 롱 쇼트로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디테일의 전부를 하나의 연속된 장면으로 본 것만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다음 김두한의 발아래 땅바닥에 쓰러진 오찌아이를 다시 가까이 다가가서 보여준다. ( S#_15) 이 4개의 쇼트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 쇼트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힘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선택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어떤 미학적 원칙에 따른 것인지 간단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무언가 각 쇼트마다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린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게 만든 다음 서로 유기적인 체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그룹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자, 나는 같은 질문을 왕가위의 < 일대종사 >를 보면서 다시 던져볼 것이다. 물론 그런 다음 다시 < 장군의 아들 >로 재빨리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대종사>를 돌아볼 것이다. 궁가 64수의 창안자인 궁보삼은 최고의 필살기 노원괘인을 마삼에게 설명한다. “이 초식의 정수는 고개를 돌려보는 것이다. 타격이 아니라 돌아보는 것이지” 나는 그 말을 믿어볼 참이다. (첫 번째 이야기 끝, 두 번째 이야기 계속) 장군의 아들 1990년 108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태흥영화㈜ 각색 윤삼육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음악 신병하 박상민 김두한 신현준 하야시 이일재 김동희 방은희 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