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
- 감독
- 미겔 고미쉬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미겔 고미쉬, 카를로토 코타, Adriano Luz
열 편 모두 사사로운 이유에서 선택한 영화들이지만, < 디아만티노Diamantino >(가브리엘 아브란테스/다니엘 슈미트, 2018)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 리스트의 취지에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에서이다. 가장 공감했거나, 탁월하다고 생각한 영화는 아니었다. 여러 유형의 영화들을 참신한 조합으로 선보일 수 있는가를 항시 고민해야 하는 직업의식의 발로에서 <디아만티노>를 봤을 때, 이 영화는 무논리, 무정형, 무감각의 진공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완력이 대단했다. <디아만티노>는 이민 위기, 민족주의, 트럼프, 인공두뇌학, 젠더 바꾸기, 정치적 부패, 인터넷 범죄 및 글로벌 스포츠 비즈니스의 뒤안을 구불구불 훑어간다. 포르투갈 출신의 영화감독 가브리엘 아브란테스와 미국인인 다니엘 슈미트가, 몇 편의 단편영화를 거쳐 공동으로 연출한 첫 번째 장편영화이다. 아브란테스와 슈미트는 허접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와 설익은 특수효과, 이미지 훼손, 장르 횡단, 불경스러운 상상력을 오가며,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아방가르드 SF 코미디를 창조해냈다. 글로벌 축구 스타 디아만티노 마타모로스(미겔 고미스의 < 타부Tabu >(2012), < 천일야화As mil e uma noites >(2015)에 나온 배우 카를로타 코타가 뇌리에 각인되는 연기를 보여준다)는 타고난 운동능력이 아니라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공허한 청년이다. 페널티킥을 실축함으로써, 그가 이루려 했던 마지막 목표인 포르투갈의 월드컵 우승을 이루지 못한 디아만티노는 자신의 지평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 자신의 실책 때문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아버지를 향한 부채감으로 선한 사역에 복무하기로 작정한 디아만티노는 모잠비크를 탈출한 난민 소년 라힘을 입양한다. 그러나 열심과 정성을 다해 살뜰히 돌보았던 이 소년의 정체는 포르투갈 정부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레즈비언 요원 아이샤. 아이샤는 디아만티노의 사악한 쌍둥이 자매가 연루된 돈세탁 작업을 조사하기 위해 저택에 잠입하였다. 여기에 국가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적의 슈퍼 팀과 위대한 포르투갈 재건을 위해 디아만티노를 복제하려고 하는 미친 과학자 람보르기니 박사가 준동한다. 더하여 이 미끈한 축구 아이콘의 공상 속에 등장하는 초고층 빌딩 크기의 털북숭이 강아지도 있다. 인물의 유형, 공간, 사건, 묘사의 수준에서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디아만티노>는 전 지구적인 대격변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축구 스타의 고통스러운 환상을 보여준다. 과연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중심을 상실한 채 흘러가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달리 요약할 방법은 없다.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지만, 전개가 혼란스럽지는 않다. 강인한 육체를 가진 어린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디아만티노는 모든 측면에서 메트로 섹슈얼 슈퍼스타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연상시키는 아바타이다. 대리모를 통해 아들을 입양한 호날두처럼 디아만티노는 아프리카 이민자 소년을 입양한다. 그러나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태연자약하게 달려 있다. “여기서 본 이야기, 모든 이름, 등장인물. 사건은 실제가 아닙니다. 실존 인물, 장소, 제품, 유전적 절차 또는 거대한 강아지에 대해 어떠한 유추도 해서는 안 됩니다.” 뻔뻔스럽기까지 한 이 경고는 스스로를 희롱하려는 듯한 이 영화의 어조를 닮았다. 디아만티노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판단은 곤란해진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항존한다. 탄탄한 근육과 아름다운 몸을 가진 뇌가 텅 빈 사람. 그는 순수한 인간이거나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무지한 저능아이다. 디아만티노는 그가 처한 상황에서 늘 소외된다. 딱한 처지의 난민들을 동정하는 그의 선의는 너무 순수해서 가장(假裝)한 것처럼 보인다. 디아만티노의 순수함과 유치함, 성실함은 이렇듯 심각한 세계와 대비되면서 풍자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빚어놓은 듯 단단한 육체는 디아만티노의 자선 의지와 한 몸을 이룬다. 성실한 육체에 깃든 성실한 의지. 디아만티노의 어린애 같은 태도는 경멸의 대상이지만 영화는 순수성의 인격화를 표상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류의 자산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변화하는 캐릭터로서 디아만티노의 전환점은 난민의 위기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개인 요트와 저택에 파묻힌 그가 아는 유일한 고통은 축구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그는 현실 세계의 고통을 알게 된다. 이 부조리극이 어떤 심각한 정치 드라마보다 논쟁적이 되는 것도 이 순간부터이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미친 시대’를 목도하게 된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디아만티노>는 오만가지 장르, 작가의 계보를 활발하게 혼성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키는 인물들, 특별히 디아만티노의 쌍둥이 누이는 알모도바르적인 캐릭터의 전형이다. 글을 조각내어 다른 순서로 재조합한 윌리엄 버로우즈의 콜라주 플롯, 리차드 켈리의 < 사우스 랜드 테일Southland tales >(2006)의 허무주의, 존 워터스의 터무니없는 컬트 고전들, 한나 바르베라의 풍자만화, 제임스 본드의 패러디, 심지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성 정치학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이질적 요소들의 접붙이기를 펼쳐 보인다. 서사는 고전적 팝 컬쳐, 신앙심이 깊은 시네필리아, 초현실주의 대중문화 아이디어의 융합이다. 아브란테스와 슈미트는 유럽을 잠식한 난민 위기, 네오-파시즘, 블랙시트, 감시 테크놀로지, 빈곤, 스포츠 애국주의, 인간복제와 같은 현대적인 주제들을 한밤중의 소동극 위에 얹는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흔들어댄 칵테일마냥 각각의 주제는 어떤 초점도 만들지 않고 평평해진다. 감독은 진정성 있게 이들 주제를 다루고 있는가? 이 유치한 ‘병맛 코미디’는 무엇을 표방하려는가? <디아만티노>는 하나의 상태에서 무작위적으로 확장해나가는 일종의 자유 형식을 채택한 영화이다. 이미지의 전략도 같은 맥락을 따른다. 어수선하고 화려한 색채, 지글거리는 16mm 필름의 터프한 룩, 한편으론 미끄러질 것처럼 블링블링한 상업광고의 비주얼, 의도적으로 장난스럽게 만들어진 CGI 화면을 합쳐 놓은 이 영화의 미학은 스토리텔링만큼 거칠고 우연적이다. 관념보다 이미지를 선호하는 영화감독은 일류가 될 공산이 크다. 숱한 연상을 자유로이 불러일으키면서도 편협한 목적으로 위해 소비되지 않는 이미지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총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디아만티노>는 2018년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받았다. 카오스적인 무논리가 횡행하는 키치 미학에 비평가들이 호응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평론가들의 눈이 어떻게 된 것일까? 영화의 표면에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폭력적인 체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 균질화된 표현의 영역 바깥으로 탈주하려는 욕망이 넘실댄다. 남발되는 시각효과는 기술적으로 하자가 있고, 참혹한 수준의 발 연기에 한숨이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에는 개성을 더한다. 이 반(反) 미학이 겨냥하는 바는 명확하다. 어떤 영화로부터의 영향도 거부하지 않는, 그 무엇과도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 <디아만티노>를 본 뒤 며칠간 한 편의 영화가 머리를 계속 맴돌았다.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 >(1971)이다. 물론 두 영화는 다르다. 누군가는 “격이 다르다”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교화되지 않는 앙팡테리블 알렉스와 <디아만티노>의 백치 축구 선수 디아만티노는 불가역적인 강압과 제도적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적 성정(性情)은 교정되지 않는다. 알렉스의 내면화된 폭력 성향에 의해, 디아만티노의 순진무구함에 의해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두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철저히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것을 조롱하기보다는 인간의 결점을 즐긴다. 심지어 그 결점이, 살면 살수록 나빠져만 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디아만티노의 백치미는 그 우매한 순수성으로 인해 규범화된 폭력과 정치적 위선을 도드라져 보이도록 한다. 언제나 문제는 상상력이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인류를 사로잡았던 예술작품이 보여주었던 것도, 일상을 풍요롭게 할 최상급의 공상도, 그것이 없다면 영화를 볼 이유가 없는 희열의 기원도 모두 상상력에 있다. 행여 <디아만티노>는 모든 관객이 즐거이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상하지만 용감한, 올해의 영화를 뽑으라면, 나는 여기에 한 표이다.
2015년 KMDb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는 제목 가나다 순서대로 꼽았다. 보고 나서 잠을 설쳤지만 명단에 넣지 못한 영화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고, 보고 싶었지만 놓친 작품들이 아쉽다. 무엇보다, 가장 기대했던 두 여성 감독의 신작을 보지 못했다. 쿠웨이트 태생 팔레스타인계 작가 바스마 알샤리프의 작품을 기회가 닿는 대로 챙겨보았지만, 신작 <깊은 잠Deep Sleep>(2014) 상영을 놓쳤다. 그런가 하면 샹탈 아커만의 < 노 홈 무비No Home Movie >(2015)는 학수고대했지만 국내에서 볼 기회가 없었다. < 뉴스 프롬 홈News from Home >(1977) 이나 <레터스 홈Letters Home>(1986) 등을 잊을 수 없기에, 그녀의 영화는 늘 ‘집에서 온 소식’과 같았다. 한데, 최근작이 유작이 되고 그 제목이 ‘집이 없는 영화’라니.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키노」에 기고한 인터뷰를 위해 2003년에 방문했던 파리 서쪽 끝 그녀의 작은 집을 기억하며, 새해에는 <노 홈 무비>를 꼭 보려 한다. 2015년 영화관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은 오쿠야마 준이치의 < 휴먼 플릭커 >를 본 날이었다. 1975년 야스다 홀에서 초연했다는 이 작품은, 각각 뜬 눈과 감은 눈 이미지를 스크린에 투사하는 두 대의 영사기 앞에 양손에 부채를 든 감독이 서서 왼쪽과 오른쪽의 영사기 렌즈를 번갈아 가리며 영화의 광학적 원리를 일깨우는 필름 퍼포먼스다. 깜빡이는 눈이 영사되고 있는 스크린 위에서 ‘인간 셔터’가 된 오쿠야마 감독의 그림자가 나비처럼 춤추는 광경을 체험하는 찰나, 빛과 그림자가 직조하는 이미지의 비의에 가닿는 듯했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는 많은 평자들이 다룬 바 있다. 그중 사막에 숨어있는 샘 같은 영화의 어떤 기원source을 더듬어 찾는 유운성 평론가의 글(‘사막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인문예술잡지 F」 18호)을 읽으시길 권한다. 고전과 현대 영화의 아름다움이 한 몸에 거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 스파이 브릿지 >도 적잖이 놀라웠다. 이러니 올해도 할리우드에 경배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스위스 연방이 주는 영화상을 받게 된 장 뤽 고다르는, 수상 소감을 대신하여 만든 단편 < 인사말: 스위스상(賞) / 나의 사의(謝意) / 생사를 막론하고 >(mubi.com에서 불어·영역 대본과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다.)에서 스위스 영화는 필름일 뿐 시네마가 없고, 미국 영화는 시네마라고 말한다(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다니엘 슈미트, 알랭 타네 등이 버티는 스위스 영화의 무게를 상기하노라면, 이 질문을 피할 도리가 없다). 시상식 불참 사유로 건강 핑계를 대면서도 <오른쪽에 주의하라Soigne ta droite>(1987)에서 필름 통을 안고 바닥을 굴렀던 자신의 연기를 온몸을 던져 재연하는 노 거장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한편으로 스위스 역사가 흘린 피를 머금고 있다. 또 하나의 ‘만년의 양식’은, 고다르보다 세 살 적은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근작 < 코뮤니스텐 >이다. 지금은 지구 위에서 사라진 독일민주공화국 국가였던 노래, 한스 아이슬러가 작곡하고 요하네스 로베르트 베허가 가사를 쓴 ‘폐허로부터 부활한Auferstanden aus Ruinen’이 흐르는 검은 화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두 독일 공산주의자가 나치에게 고문을 당하고 귀향하는 1934년을 담은 앙드레 말로 작 「모멸의 시간Le temps du mepris」의 일부를 2014년에 연출한 장면과 더불어, 다니엘 위예와 공동 연출한 과거 작품 <노동자, 농민>(2001) < 너무 일찍, 너무 늦게 >(1981) <포르티니/시나이의 개들>(1976) <엠페도클레스의 죽음>(1986) <검은 죄>(1988) 일부 장면을 발췌 편집했다. 해방 전후의 이탈리아, 공장을 나서는 이집트 노동자들의 식민해방투쟁, 나치가 민간인을 학살한 아푸아네스 산맥의 1967년 풍경들 사이에 존재하는 검은 화면의 심연은 ‘폭력의 예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횔덜린의 ‘새로운 세계’를 말하는 고(故) 다니엘 위예의 출현과 함께 ‘겨우 선 결심’이라는 표제가 붙은(‘그래야만 하나? 그래야만 한다’라는 악보의 부기로도 유명한)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 16번 Op.135로 영화를 마무리하는 스트라우브는 아직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감독의 뜻대로, 2분 길이의 단편 < 알제리 전쟁La guerre d’Algerie >(2014)와 함께 상영했더라면 더 좋았겠다). 파트리시오 구즈만도 여전하다. 아타카마 사막 천문대를 배경 삼았던 전작 <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 >(2010)에 이어, < 자개 단추 >에서는 카웨스카 족과 함께 물길을 타고 파타고니아까지 내려와 깊은 바닷속에 잠겼던 궤조강軌條鋼에 붙어있는 자개 단추를 건져 올린다. 이 단추는 먼 은하계의 소용돌이를 거쳐, 이를테면 대한민국 경상남도 거창 어느 골짜기에서 발굴된 양복 단추와도 공명한다. 그들보다 젊은 왕빙도 한결같다. < 세 자매 >(2012)를 찍으며 감독이 알게 된 또 한 사람의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 숙소에서 지내는 ‘아들’들의 2014년 2월 2일 일과를 기록하며 시작된 < 아버지와 아들 >은, 나흘 뒤 공장주가 촬영을 중단시키며 마무리되었다. 세간이라곤 화덕과 침상 하나뿐인 거처에서 오락기와 TV를 유일한 낙으로 삼는 일가의 생활을, 카메라는 꼼짝 않고 종일 함께한다. 북경영화아카데미에서 촬영을 전공하기 전에 미술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던 왕빙은,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과 공간을 사진으로도 기록하고 전시했다. 비디오 아트 페스티벌 ‘비디오릴레이 탄산’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는 강정석의 < 시뮬레이팅 서페이스 A >(작가의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에도 비슷한 사연이 있다. 처음 취업한 친구의 출근길을 아침마다 배웅한 7개월 동안의 영상 기록을 편집한 이 작품은, 친구가 해고당하면서 촬영이 종료됐다 한다. 친구의 삶과 노동에 보내는 우정과 지지의 정동은, 지하철을 타고 오가며 작가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서울 풍경의 표면 위로 미끄러져 내린다(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상영할 때엔, ‘서페이스’의 더욱 본격적인 ‘시뮬레이션’인 B면 <시뮬레이팅 서페이스 B>와 출판 작업 ‘Converted (CMYK) Normal Maps from 2012~2014’가 함께 보여졌다). (태국어 표기법을 따르자면 따이끼 삭삐싯이라 표기해야 할) 타이기 삭피싯의 < 불안의 시기 >는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무시무시한 작품이었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을 여전히 상상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의 원념이 플리커로 번뜩이는데, 궁중사극 호러 장르가 리얼리즘이 되어가는 상황은 아시아에선 태국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시나무처럼 떨며 볼 수밖에 없었다. 동병상련의 상념은, 국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라브 디아즈의 < 에레미아스, 1권: 도마뱀 공주의 전설 > 말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풀들을 보며 되살아났다. 감독의 신작 < 아 프리오리 >에서 목도하듯, 살육에 맞서 고개 드는 인간의 오연함이 더욱 긴급한 시절일 테지만, 그저 바람 속을 걸어 사라져 간 에레미아스의 ‘두 번째 책’이 전할 이야기가 하릴없이 기다려졌다. 이 기다림에 응해준 작품이 미겔 고미쉬의 < 천일야화 >였다. 특히 3부 ‘마법에 걸린 자’의 마지막 장면은 <에레미아스, 1권> 대단원 롱숏에 담겨있던 바람의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천일야화> vol 1, vol 2, vol 3 미겔 고미쉬는 해직자를 포함한 기자들로 팀을 만들어, 경제 위기가 깊어진 포르투갈에서 벌어진 근년의 사건을 모아 현장 조사를 마치고 < 천일야화 > 시나리오를 사건별로 나누어 개발했다 한다. 현실의 불투명함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고는 하나, 완결된 시나리오가 없어 이야기 전개를 알지 못한 채 장면을 나누어 촬영을 진행하며 배우와 제작진이 불안해 할까 봐 현장에서의 부담도 늘어갔다고 고미쉬는 여러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급기야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쳐버리는 감독으로 직접 분한 그는, 셰에라자드가 아버지와 관람차를 타는 놀이공원 장면에서 옛 아라비아 의상을 입고 다시 등장하지만 여전히 담배만 피울 뿐이다. 줄행랑을 놨다가도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 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는 이야기하는 자의 숙명을 사는 것일 테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천일하고도 하룻밤 동안 이야기를 계속하는 셰에라자드를 자신의 영화를 위한 복화술사로 불러들여, 고미쉬는 포르투갈의 현재라는 ‘사태’와 「천일야화」라는 ‘픽션’을 섞는다. 셰에라자드는, 이야기가 인간의 욕망과 공포에서, 죽은 자들과 도래할 자들에게서 온다고 말한다. 때로 거짓말이기도 한 이야기가 진정 우리를 생존하게 해준다고 여기는 그녀는, 고미쉬의 전작 <타부>(2012)의 벤투라처럼 이야기 속 이야기, 영화 속 영화를 짓는다. 「천일야화」원작에서 셰에라자드는 밤마다 새로운 화자를 새워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러니까 두 번째 탁발승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리하여 영화 <천일야화>에도 많은 내레이터가 등장한다. 벌을 치는 양봉업자,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도주 중인 탈주범, 딸의 가정생활을 보살피는 판관에게 진술하는 소, 새를 길들여 노래를 가르치는 남자와 마주친 그물에 갇힌 사내, 여행을 왔다가 경찰을 만나 임신한 중국 여인, 법정에 서는 닭…. 이야기는 인간에게서 동물에게까지 뻗어 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낳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이미지 속에서는 다른 영화가 태어난다. 미겔 고미쉬는 세 편인 동시에 한 편인 < 천일야화 >의 이야기가 성부-성령-성자의 삼위일체와 같다고 칸 영화제 때 수차례 밝혔다. 돌이켜보면 고미쉬의 장편 영화들은 늘 둘 이상의 이야기를 안고 있었다. <천일야화>도 각기 고유한 리듬과 소제목을 지닌 세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이 작품인 공동제작국인 프랑스에서는, 칸 영화제가 끝난 뒤 세 편을 나누어 약 한 달 간격으로 순차 개봉했다. 1부는 2015년 6월 24일, 2부는 7월 29일, 3부는 8월 26일에). 1부 ‘불안해하는 자’는 포르투갈 중공업을 대표하던 비아나두카스텔루 조선소 폐업 때 촬영했다. 작금의 포르투갈이 처한 위기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들이 물질과 연결되어 있는 양상은 경제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민주주의’를 다시 묻고 역사를 되새긴다. 고미쉬에 따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개별자들만이 아니라 ‘공동체’이기도 하다. 2부 ‘비탄에 잠긴 자’는 법정, 아파트 등 실내를 주 무대로 삼는데, 연극적 장치와 조명을 채용하여 야외 촬영이 많은 1부보다 어둡다. 이야기도 그렇다. 원형극장에 세워진 법정은 조정하는 힘을 잃었고, 저소득 임대 아파트 주민은 돈이 없어 죽음을 택한다. 한데, 주인과 거처가 잇달아 바뀌어도 개 딕시만은 근심이 없다. 3부 ‘마법에 걸린 자’에는 변두리에서 되새를 길들여 노래를 가르치며 소일하는 남자들이 나온다.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는 일상의 매끈한 표면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내레이터가 들려주는 그들의 사연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우화인지 실화인지 알 도리는 없다. 한데 무슨 영문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바그다드가 바다에 면했던 시절을 살며 사막화를 근심하는 셰에라자드의 옛이야기보다 현대 포르투갈 교외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지내는 이들의 일상이 지극히 초현실적으로 여겨지고, 새 노래 경연 대회가 종교나 정치 결사체의 비밀 회합처럼 보인다. 35mm와 16mm 필름으로 이 영화를 촬영한 사욤부 묵디쁘롬은, < 징후와 세기 >(2006) <나부아의 유령들>(2009) < 엉클 분미 >(2010) 등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대표작을 찍었던 태국 촬영감독으로, < 천일야화 > 제작을 위해 리스본에 1년 정도 살았다 한다(그와 고미쉬는 70mm로 촬영할 것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예산과 기동성 등 몇 가지 문제로 포기했다는 후문이다). 부산영화제에서 러닝타임이 381분인 <천일야화>를 본 날, 이웃한 상영관에서 연이어 < 찬란함의 무덤 >을 보았다. 사욤부 묵디쁘롬이 <천일야화>를 찍은 것도 <찬란함의 무덤>을 디에고 가르시아가 촬영한 것도 모른 채, 같은 날 상영하는 두 영화의 표를 우연히 구했다. 역시 우연이겠지만, 두 작품에는 모두 동물이 여럿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종들 외에, <천일야화> 1부에는 고래도 나온다. 해고자 루이스는 고래 뱃속에서 심장을 치료받고, 바닷가에서는 고래 심장이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고래가 해변으로 나오는 건 실수가 아니라 아파서인 경우가 많은데, 바다로 밀어 넣어도 대개 다시 나와 죽는단다. 인간이 바다에 버린 쓰레기를 먹은 고래 몸속에는 중금속이 쌓이는데, 보통은 지방층에만 축적되어 문제가 없지만 먹이를 제대로 못 먹는 상황에서는 지방을 에너지로 쓰는 대사가 일어나 온몸에 독이 퍼진다. 물속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피하지방을 유지해온 고래가 빈사 상태로 물 밖에 나오면, 온 몸이 열로 펄펄 끓다 급기야 내장이 밖으로 터져 나온단다. 뱃속 같은 이야기의 심층에서 불안으로 윙윙대기만 하던 ‘사태’들의 소음도, 임계점을 넘으면 표면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 ‘사건’이 된다. <천일야화>가 전하는 이야기의 표면에는 포르투갈의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 인류의 수런거림이 모이고, 의미가 뚜렷하지 않은 사건들·인물들·동물들이 공존하는 셰에라자드의 시공은 무한히 나뉜다. 이들이 모여 내는 목소리는, 인간의 언어보다는 되새의 노래에 가깝다. 들풀을 흔드는 바람 속에 새들의 노래가 들리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극장에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지난해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이 주관해 온 ‘사사로운 리스트’라는 기획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작품의 완성도나 품격, 내외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들의 목록. 이 기획은 ‘좋은 영화’, ‘가치 있는 영화’, ‘완성도 높은 영화’의 순위를 매길 때 준용되는 식상한 목록의 기준을 저버려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공인된 평판작이나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먼저 알려진 영화들은 가급적 배제하고자 했다. 기획자들의 취지에 부응하는 의미로 순전한 사사로움을 기준삼아 아래 10편의 작품을 골랐다. 가장 먼저 무빙 이미지의 창조적인 화용론을 보여주는 신작들이 눈에 띈다. 로이스 파티뇨의 < 나이트 위드아웃 디스턴스 >, 피터 보 랩먼드의 < 토포필리아 >, 가이 매딘/ 에반 존슨의 < 금지된 방 >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이트 위드아웃 디스턴스>와 <토포필리아>에서 이미지의 탐험가인 두 감독은 때로는 회화, 때로는 사진을 연상시키는 풍경의 경이로움을 통해 순수 이미지의 조형과 리듬이 주는 감흥을 만끽하도록 만든다. 영화적 풍경의 영기가 발산되는 두 작품은 오늘날 영화가 닿을 수 있는 표현의 지평이 어디까지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역작이다. 무성영화의 영혼이 전편을 장악하고 있는 가이 매딘의 <금지된 방>은 매딘의 전매특허와 같은, 유령과 환영을 따라 꿈의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신비로운 체험을 제공한다. 칠레의 대문호 로베르토 볼라뇨의 역작 ‘2666’을 모체로 한 <산타 테레세 앤드 아더 스토리스>는 신성과 악의 미로를 헤매는 시대의 정황을 ‘산타 테레사’라고 하는, 멕시코의 가상공간을 무대로 구성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아방가르의 화법을 유려하게 오가는 이 영화는 올해 본 가장 혁신적이고 용기가 있는 작품이었다. 지난 10월 5일 영면한 벨기에 출신의 아방가르드 감독 샹탈 애커만의 유작인 <노 홈 무비>는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집’의 상실을 메타포로 헐벗고 굶주린 이미지들을 만들어놓은 에세이 필름이다. 극영화 중에는 찰리 카우프만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감독 듀크 존슨이 합작한 < 아노말리사 >가 단연 돋보인다. 찰리 카우프만이 왜 위대한 작가인지를 통절하게 만드는 <아노말리사>는 한 작가의 강박적인 정신세계를 탐문하는 고도의 심리드라마이다. ‘사운드 연극’으로 기획되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집착과 강박, 로맨스, 악몽이 교차하면서 무엇이 우리를 진짜 인간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루마니의 뉴웨이브의 주역인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 트레저 >, 아르노 데스플레샹의 < 내 청춘 시절의 세 가지 추억 >, 미겔 고미쉬의 < 천일야화 >,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의 < 슈발리에 >도 해당 작가의 개성과 스타일이 십분 발휘된 작품들이다. 이들 가운데 < 슈발리에 >를 간판으로 소개하고 싶다. <슈발리에>는 그리스 여성감독이자 제작자로 명성이 높은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가 < 아텐버그 >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장편영화이다. < 비포 미드나잇 >, < 송곳니 > < 더 랍스터 >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프로듀서이기도 한 창가리의 이 야심작은 배타적인 남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경쟁 본능이 야기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에 대한 냉정침착한 관찰기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유럽영화계에서 새로운 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정도로 괄목상대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리스 영화의 저력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연출자는 여성이지만 영화에는 (전화 목소리로 출연하는 이를 제외하면)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2012년 창가리가 만든 중편영화 <캡슐>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진 <캡슐>은 동성 집단 안에서 권력과 통제에 관한 영화였는데, <슈발리에>에서 창가리는 남자들의 커뮤니티로 표적을 이동하였다. 에게 해 한가운데에 뜬 럭셔리 요트에 6명의 남성 선원들이 모인다. 다소 권태로운 호화 요트 여행. 남자들은 어느날 저녁을 먹다 ‘슈발리에’라는 게임을 하기로 뜻을 모은다. 게임의 ‘목적은 누가 더 멋지고 훌륭한 남자인가?’ 를 가리는 것. 요컨대 의협(義俠)을 선발하는 이 게임은 한 사람에 대해 나머지 다섯 명이 점수를 매겨 최고점을 얻은 이에게 승자의 영예가 돌아간다. 한 마디로 선하고 의로운 말과 행위를 통해 용기와 정의를 수호하는 사도를 찾는 게임인 셈이다. 게임에 돌입한 선원들은 잠자는 자세에서부터 다이어트 습관, 발기된 성기의 길이 등을 측정하면서 누가 더 멋진(?) 남성인가를 겨룬다. 그러나 반지를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이들의 황당무계한 게임은 아군이 없는 적대적인 무한경쟁으로 치닫는다. < 슈발리에 >는 시스템의 통제에 대한 우화이자 블랙코미디이다. ‘버디가 없는 버디무비’ 라는 카피를 단 영화는 여섯 명의 이성애자 남자들이 수컷의 공격성을 한껏 부풀리면서 벌이는 경쟁을 희화화한다. 남성들 간의 경쟁심이 점점 체면과 품격, 선의를 상실하는 과정이 점입가경의 상황들을 통해 전달된다. 요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이는 게임은 얄팍한 이해관계 앞에 신의와 우정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입증한다. 남자들만의 공동체를 무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 저들의 어리석음을 구경하는 관찰적인 시선이 긴장과 쓴웃음을 자아낸다.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 영화의 특징은 흡사 동물의 행동을 대면하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하면서 인간 행위를 응시하게 만드는 인류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그는 럭셔리 요트라는 제한된 공간에 남성-동물을 가두고 그들의 기벽을 관찰하면서 섹슈얼리티와 죽음, 폭력, 사회구조의 속살을 파헤친다. 수컷들의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는 비합리성의 세계는 남성들의 집단의식을 풍자하는 비틀어진 코미디로 형상화된다. 창가리는 남성의 세계, 통제와 길들이기, 인간의 아둔함, 집단 안에서의 불가사의한 영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거리두기의 방식을 동원하여 인상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집단의 광기와 이기라는 이슈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연출자의 감정이나 의도가 거의 섞여 있지 않은 영화는 사회적 관계와 태도를 질기게 붙잡고 있다. < 슈발리에 >는 남성성의 신화와 그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남성, 부성, 가부장의 어위군들이 불신의 눈초리를 받는 이 시대에 남성들의 세계는 타자성의 세계로 묘사된다. 이성애 집단 안에서 하나의 성(여성)을 제거한다면 그들 내부에서 권력과 욕망은 어떻게 일그러지는가? 이 불구적인 욕망의 일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의 산물인 영화는 용렬한 인간의 민낯을 가차없이 발가벗긴다. 한편으로 <슈발리에>는 창가리가 ‘스크루볼 비극’이라고 부르는 장르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다. 부분적으로 영화는 스크루볼 재담극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일부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과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실험으로도 보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의 억양과 톤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말의 억양은 하나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언어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했다. <슈발리에>에서 모든 인물들은 양식화된 대화를 나누고 때론 웅변을, 때론 노래를, 때론 시를 읊는다. 내러티브가 진행될수록 말의 리듬과 운율이 희비극의 양면을 내포한 작품과 기이하게 호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 슈발리에 >에서 자기애에 들든 과시적인 남자들을 통해 세상을 풀이하려 하는 창가리의 시선은 염세적이다. 풍자코미디의 끝은 대게 허무하지만,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광기에 대해 준열히 꾸짖기보다 속절없이 인간의 괴상한 행동을 목격하도록 만드는 것이 연출의 목적이다. 전투적인 경쟁과 교활함, 자애로운 연대를 가장한 탐욕은 점점 더 불신과 배반을 전염시킨다. 여기에 가담하는 것이 통제의 매커니즘이다. 상호견제와 긴장으로 점철된 게임은 질서유지와 통제의 수단이 된다. 여섯 남자들의 게임을 주관하는 시스템(선장과 그의 조력자들)은 불모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체제유지의 밸런스를 부산물로 얻으려 한다. 이 지배와 통제의 무한질주를 제어할 만한 시스템은 없으며 관객들은 점차 쩨쩨하고 비열해지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군데군데 유머아 기지가 넘치는 장면들이 여럿 있고, 존재의 무능을 확인하는 나른함이 사지를 옥죈다.